발제문[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8강

권순모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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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1976년 2월 25일



(블랭빌리에의 역사적-정치적 연속체의 구성/ 역사주의/ 비극과 공법/ 역사의 중앙 행정/ 계몽주의의 문제들과 앎의 계보학/ 규율적 앎의 네 가지 작동과 그 효과들/ 철학과 과학/ 앎들의 규율화)

-- 블랭빌리에가 제도들, 사건들, 왕들, 그들의 권력 아래에서 분석했던 것은....이해와 관습과 법률이 동시에 연결된 사회였습니다....그는 신민들의 역사를 썼습니다.....다시 말해, 블랭빌리에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맞은 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즉 그는 ...인민의 역사 혹은 인민들의 역사가 될 어떤 것에 역사 속에서의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 권력은 권력을 행사하지만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한 사람들로 이뤄진 소집단의 권력입니다. 하지만 이 권력은 결국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되며, 폭력이나 반란을 빼면 그 어떤 것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됩니다. 블랭빌리에가 발견했던 것은, 역사란 권력의 역사가 아니며 그 어떤 법적 허구[의제]에 의해서도 수수께끼를 풀거나 분석할 수 없는 괴물적이고 매우 기묘한 짝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민의 원초적 힘들과 힘은 없으나 그럼에도 권력인 어떤 것으로부터 마지막으로 구성된 힘이라는 짝의 역사입니다.........권력은 소유물도, 힘도 아닙니다. 권력은 늘 관계일 뿐이며..

-- 우리는 왕의 역사도, 인민의 역사도 쓸 수 없으며, 한쪽은 결코 무한하지 않으며 다른 쪽도 결코 零이 아닌 서로 대치하고 있는 이 두 항들로 구성하는 바의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 주권이라는 법적 용어가 아니라, 힘관계들 사이의 지배와 작용이라는 역사적 용어로 블랭빌리에는 권력의 현상을 서술

--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그저 예를 들 수 있게 해주는 장소, 말하자면 권력의 행사를 위한 법해석이나 전술적 모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블랭빌리에게는 반대로 힘관계와 권력게임이 역사의 실체 자체입니다.

-- 결국 블랭빌리에게 역사적 서사와 정치적 계산의 대상은 완전히 똑같습니다.

-- 블랭빌리에가 비판한 것이 행정감독관들의 앎이라는 것, 즉 행정감독관들이나 일반적으로는 군주제적 행정이 끊임없이 권력에 제안했던 통치에 관한 분석과 통치 프로그램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이 앎을 몰수하는 것, 그리고 행정적 앎, 행정감독관들의 앎, 경제적 앎의 탄생지이자 활용의 장이기도 했던 절대 군주제의 체계에 맞서 이 앎을 기능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 블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에서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을 역사에 대한 이해가능성의 원칙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서사와 국가 경영이 연속성을 갖게 된 것, 이것이 아주 중대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경영의 합리적 모델을 역사에 대한 사변적 이해가능성의 격자로 활용함으로써 역사적-정치적 연속체는 구성됩니다.

-- 블랭빌리에게 역사의 영역에서 발언한다는 것, 하나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힘관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중요한 것은 힘관계들을 그 장치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 현실적 균형 속에서 변경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단순히 힘들의 분석틀이나 해독틀이 아니라 변경틀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적 앎의 차원에서 통제한다는 것, 역사적 앎의 차원에서 근거를 갖는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힘관계 틀 안에서 결정적인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 역사적 앎은 투쟁의 서술인 동시에 투쟁에서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 역사적 앎은 아무리 멀리 간들 결코 자연도, 법도, 질서도, 평화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멀리 간들 역사적 앎은 전쟁의 무한정성을, 다시 말해 그 관계들과 대립들을 수반한 힘들을, 그리고 힘관계들이 항상 일시적인 방식으로 정해지는 사건들과 마주칠 뿐입니다.

-- 서양적 앎의 모든 조직화와 필시 연결되어 있는 [플라톤적] 관념은, 앎과 진실이 질서와 평화라는 대역에만 속할 수 있으며 앎과 진실을 전쟁.폭력,무질서의 편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관념입니다.........앎과 진실이 전쟁에 속할 수 없고 질서와 평화에만 속할 수 있다는 이런 관념에 관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 국가가 이런 관념을 18세기에 앎들의 '규율화'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오늘날 깊이 재이식했다는 것입니다.

-- 군주의 사랑과... 식사와... 잠과 기상을 지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들이 궁정의 의례와 典禮에 특유한 조작입니다. 그러므로 궁정이 주권자, 즉 군주제의 실체 자체인 군주의 인격에 걸맞게 일상적인 것을 지고의 것으로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데 반해, 비극은 이것과는 아무튼 정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즉 비극은 뭐랄까 궁정 의례의 예식이 매일 수립하는 것을 해체하고 재편성했습니다.
고전기 비극, 라신느의 비극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 역할은, 아무튼 그 축들 중 하나는 의례의 이면을 구성하는 것, 찟겨진 의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적인 역량의 보유자인 군주가 정열의 인간, 분노의 인간, 복수의 인간, 사랑이나 근친상간의 인간으로 해체되고 나서부터 이 왕-군주가 재탄생하고 스스로를 재편성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가 된 순간을, 즉 군주의 한가운데서 왕의 신체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학문들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어떤 축, 대체로 지식-진리의 축 위에, 혹은 아무튼 지식의 구조에서 진리의 요구로 나아가는 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데서 구별됩니다. 학문들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앎들의 계보학은 다른 축 위에, 담론-권력의 축 위에, 혹은 담론적 실천-권력적 대결이라는 축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낮과 밤...지식과 무지 사이가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앎들 사이의, 즉 그 고유한 형태론에 의해 서로가 적인 그 보유자들에 의해, 그 內因적인 권력 효과들에 의해 서로 대립되는 앎들 사이의 다수이자 거대한 싸움을 [지각해야 합니다.]

-- [18세기에] 테크놀로지적 앎의 비밀을 아는 것이 부의 원천이고 이 앎들 상호 간의 독립이 개인들의 독립을 의미했던 그런 사회에서, 이 앎들은 서로 함께 또는 서로 마주해 싸움을 벌였습니다............
...18세기의 테크톨로지적 앎의 발전이라고 불렸던 것은 다수이고 독립적이며 이질적이고 비밀스러운 앎이라는 이런 형태 속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런 다수성의 형태 속에서 생각해야지 밤에 대한 낮의 진보, 무지에 대한 지식의 진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국가는 이런 투쟁에서..크게 네 가지 기법으로 개입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아무런 쓸모도 없고, 다른 것으로 돌릴 수도 없으며,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드는 작은 앎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제거하고 그 자격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즉, 제거와 자격박탈입니다. 두 번째로, 이런 앎들의 규범화입니다. 이것은 이런 앎들이 서로 조정하고 교통하게 만들고 비밀과 지리적,전문적 경계확정이라는 장벽을 허물게 할 수 있습니다....즉 분산된 앎들의 규격화입니다. 세 번째 조작은 이 앎들을 위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마지막 네 번째의 조작, 피라미드식 중앙집중화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은 이 앎들의 통제를 가능케하고, 선별을 확보해줍니다.

-- 선별, 규범화, 위계화, 집중화 : 규율권력의 네 가지 조작입니다.

-- 18세기 이전에 과학은 실존하지 않았습니다. 학문들, 앎들, 또한 철학은 존재했습니다. 철학은 바로 앎들 상호간의 조직체계, 아니 오히려 교통체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랬기 때문에 철학은 발전해가는 지식들 내부에서 효과적이고 실제적이며 조작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앎들의 규율화와 더불어, 그 다형적 특이성 속에서, 이제 우리의 문화와 한 몸을 이루고 '과학'이라 불리는 이런 사태와 이런 제약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순간부터, 바로 이런 사태 때문에 한편으로 철학의 근본적인 동시에 창설적인 역할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철학은 과학의 내부와 앎의 과정 내부에서 더 이상 그 어떤 유효한 역할도 맡지 못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리고 이와 나란히 모든 과학들의 형식적 도구이자 엄격한 기초이게 될 보편과학의 기획으로서의 '보편수학'이 사라집니다. 일반적 영역으로서의 과학, 앎들의 규율적 경찰로서의 과학이 철학과 보편수학의 뒤를 동시에 잇는 것입니다.

-- 이성의 진보라고 불렀던 것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형적이고 이질적인 앎들의 규율화였음을 포착해야 되는데.....첫째, 대학의 등장입니다.........대학은 선별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선별이 아니라 앎들의 선별입니다. 대학은 사실들, 또한 권리를 독점해 선별의 역할을 행사합니다.........제도적 장 내부에서 생겨나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앎, 이런 장의 외부에서 야생의 상태에 있는 앎, 다른 곳에서 생겨난 앎은 ...자동적으로 적어도 선험적으로 자격이 박탈됐습니다. 아마추어 학자들의 사라짐, 이것은 18~19세기에는 잘 알려진 현상입니다. 따라서 대학의 선별 역할은 앎들의 선별입니다. 앎들의 단계.질.양을 상이한 수준에서 분배하는 역할인 것이죠.......공인된 지위를 지닌 일종의 과학적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이 앎들을 동질화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마지막으로 이것은 국가의 기구들에 의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집중화입니다......대학 같은 것이 앎들의 규율화, 앎들의 규율적 조직화가 행해지던 바로 그 순간에, 즉 19세기 초부터 출현한 것은 당연합니다.

-- 언표의 내용을 대상으로 한 정통교리가 과학적 앎의 축적을 갱신하는 데 장해물이 됐던 만큼, 거꾸로 언표행위의 수에서 규율화는 훨씬 더 대대적으로 언표가 빠르게 갱신되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언표의 '검열'에서 언표행위의 '규율'로, 혹은 정통교리에서 제가 '정통학'이라고 부를 어떤 것으로, 규율에서 출발해 지금 행사되는 통제의 형식으로 이행한 것입니다.

-- 개인들의 신체 자체의 수준에서 파악된 권력의 규율적 테크닉이 어떻게 권력의 정치경제를 변화시키는데 이르렀는가? 어떻게 그 기구들을 변경했는가? 또한 신체를 대상으로 한 권력의 이 규율적 테크닉이 어떻게 앎의 누적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앎의 영역들을 끌어내게 했는가? 그리고 신체에 적용된 권력의 규율이 어떻게 예속된 신체로부터 혼-주체, '나', 정신현상 등과 같은 것을 끌어냈는가? 이 모든 것이 푸코가 연구하고자 했던 것

-- 이 규율화가 어떻게 권력과 앎 사이의 새로운 관계양식을 정비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규율된 이 앎에서부터 어떻게 새로운 제약이, 더 이상 진리라는 제약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제약이 출현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 국가는 이 테크놀로지적 앎들 상호간의 일반적 투쟁에 규율화라는 기능과 역할을 갖고, 다시 말해 선별, 동질화, 위계화, 중앙집중화를 통해 개입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앎은 완전히 상이한 이유들로, 거의 같은 시기에 투쟁과 전투의 장에 진입했습니다.

-- 역사가 제 생각처럼 본질적으로 反국가적인 앎인 한에서, 국가에 의해 규율돠된 역사, 그러니까 공식적 교육의 내용이 된 역사는 투쟁과 연결된 역사, 즉 투쟁하는 주체의 의식으로서의 역사와 끊임없이 대결했습니다. 규율화가 이런 대결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습니다. 18세기 동안 시행된 규율화가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는 대체로 효과적이고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역사적 앎에 관련해서는 한편으로 규율화가 있긴 했지만 이 규율화는 비국가적 역사, 탈중심화된 역사, 투쟁하는 주체들의 역사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투쟁, 몰수, 상호대결의 모든 방식을 통해 결국 이런 역사들을 강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