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7장

권순모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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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김상운 옮김, 「7장 1976년 2월 18일」,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2015

 

2020년 3월 24일

한승훈

 

민족과 민족들(네이션과 네이션들)

 

1. 역사적 담론 (6강 복습)

  푸코는 “로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하는 기능을 맡았던 ‘역사적 담론’이 어떻게 파열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음.

  ‘역사적 담론’의 파열 1.

  언제 : 17~18세기, 󰋻 누가 : 프로테스탄트파, 󰋻 어떻게 : 침략과 단절을 이야기,

  무엇을 : 왕의 절대주의에 반대함.

  ‘역사적 담론’의 파열 2. (더 중요하다고 생각함)

  역사의 새로운 주제/주체의 도입. 더 이상 ‘국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음. 다른 어떤가가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함.

  ‘다른 어떤 가’는 바로 ‘민족(네이션)’임

  푸코가 민족(네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바로 “민족(네이션) 개념을 중심으로 민족성, 인종, 계급 같은 개념들이 확산되거나 파생되기 때문”(178쪽)

 

2. 민족(네이션)의 고착화

푸코가 분석한 ‘백과전서파가 부여한 민족(네이션)의 실존에 관한 네 가지 기준“

첫째, 민족(네이션)은 인간의 거대한 다수자여만 한다.

둘째, 민족(네이션)은 어떤 한정된 고장에 사는 인간의 다수자여야만 한다.

셋째, 이 한정된 나라는 국경선에 의에 둘러싸여 있어야만 한다.

넷째, 국경선 내부에 놓인 인간의 이 다수자는 고유한 법률과 정부를 준수해야 한다.

 

 백과전서식 민족(네이션) 설명에 대한 푸코의 해석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네이션)의 고착화임. 그 민족(네이션)의 고착화는 국경 안에서 고착화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라는 형태 안에서 고착화되는 것임.

 민족(네이션)의 고착화는 귀족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텍스트에서도 발견됨.

 푸코는 민족(네이션)에 대한 설명(민족(네이션)의 고착화)이 “당시 지배적이었던 넓은 정의를 반박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배제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도발적 정의”였다고 판단함.

 푸코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주제/주체”를 갖게 된다고 함. 푸코가 이야기한 새로운 주제/주체는 바로 민족(네이션)으로 보임.

 

3. 귀족, 민족(네이션)이라는 파열의 원리를 역사적 담론에 도입하고자 함

 푸코가 보여주고 싶어한 것 “귀족들은 민족(네이션)이라는 파열의 원리를 역사적 담론의 거대한 국가적 조직화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도입했는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잉글랜드 : 의회적 반대파와 민중적 반대파가 해결해야 할 단순한 문제는 잉글랜드 군주제 안에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법체계와 동시에 두 개의 민족(네이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음.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프랑스

- 귀족들은 두 가지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음 : 군주제(와 그 권력 찬탈에 맞서), 제3신분

- 제3신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귀족의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서 절대군주제를 이용했음.

- 귀족 : 군주제의 절대주의를 상대해서는 자유를 부각. 제3신분에 맞서서는 그 권리가 제한되지 않는 절대적 승리자여만 했음. --> 여기서 문제의 복잡성이 생김.

 

로마의 정복, 로마인들의 영광과 몰락

 

4. 귀족 이야기 1 : 로마법과 로마언어에 익숙한 갈리아의 행정귀족

 불랭빌리에가 묘사한 갈리아 : 결코 돌아가길 소망했던 조국이 아님. 프랑크족이 갈리아에서 발견한 것은 정복의 땅이었음. 그 땅에는 정복이 있었으며 갈리아족이 정복에 의해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뜻함. 갈리아에서 군림하는 법은 결코 동의된 주권이 아니라 지배의 사실인 것임.

 불랭빌리에가 몇 가지 국면을 통해서 포착하고자 한 바 : 로마인의 점령 내내 지속되었던 지배의 메커니즘

 첫 번째 국면 : 로마인들은 귀족을 약화시키고 하층민들을 치켜세움으로써 갈리아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고 자신들 고유의 황제정치를 확립하였음.

 로마 통치에 저항한 갈리아 귀족들을 체계적으로 대량 학살

 로마는 갈리아에 행정적 귀족을 구성함 (로마법과 로마언어에 능숙함)

이상의 서술은 목가적인 로마적 갈리아 신화를 해소할 수 있게 해줌.

프랑스 국왕들에게 이 신화들을 반박하는 행위가 갖는 의의 “당신은 로마적 절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갈리아의 땅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기법이 특별히 명예롭지 못한 뚜렷하고 특수한 역사를 표방하는 것이다.

 

5. 귀족 이야기 2 : 프랑크족 전사 귀족의 등장

 두 번째 국면 : 갈리아에서 로마적 절대주의는 게르만족에 의해서 내적 퇴락이라는 필연성에 의해서 제거되고 패함. 불랭빌리에는 여기서부터 갈리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실제로 초래한 결과들을 분석함.

 야만적이고 소수였던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침략해서 역사에서 가장 가공할 만한 로마제국을 파괴함. 프랑크족의 힘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프랑크족 전사 : 근본적으로 유일한 프랑크족 인민이었음.

 프랑크족 왕 : 왕은 어디까지나 평화의 시기에 분쟁이나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였음. 즉 왕은 시민적 행정관일뿐이었음. 평화의 시기에는 권력이 최소한이었던 사회였으며, 결과적으로 최대의 자유가 있었던 사회였음.

 

앙리 드 불랭빌리에가 말한 게르만 민족(네이션)의 자유에 대해

 

6. 귀족 이야기 3 : 프랑크족 전사 귀족의 자유

 전쟁의 시기에는 전사들의 우두머리(전시 사령관)가 선출됨. 그렇다면 전사 귀족계급이 누리던 자유는 무엇이었는가?

 프랑크 전사 귀족의 자유 : 이기심의 자유, 탐욕의 자유 전투와 정복과 노략질을 좋아할 자유였음. 즉 전사들의 자유는 지배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는 자유, 즉 존중의 자유이기는커녕 잔인함의 자유였음.

 프랑크 전사 귀족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

 갈리아-로마인들에게 동화되는 것을 거부

 자유로운 프랑크족 전사들은 정복과 지배를 너무 탐했기에, 갈리아의 땅을 스스로 개인자격으로 탈취하였음.

 프랑크족의 승리는 그들의 왕이 갈리아 땅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들 각자가 스스로, 직접적으로 승리와 정복의 해택을 누리는 것임.

 푸코는 이를 두고 “봉건제의 아득히 먼 시작”으로 보았음.

 푸코는 프랑크족 전사가 각자 갈리아 땅을 가졌고, 왕 역시 자신의 땅만 소유하였음. 그 결과 왕은 갈리아 전체에 대해 로마식 주권의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고 봄.

 결과적으로 전사들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토지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사들은 어찌 보면 로마 황제의 후계자인 왕을 자신들 위에 모실 이유가 없었던 것임.

 

수아송의 항아리

 

7. 귀족 이야기 4 : 프랑크족 전사 귀족이 갈리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수아송의 항아리는 불랭빌리에와 그의 선구자와 계승자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임.

 

#. 수아송의 항아리 1.

클로도비크(왕)이 전리품 중하나인 항아리를 갖고 싶다고 하자, 한 전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

“당신은 이 항아리를 가질 권리가 없소. 당신이 아무리 왕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리품을 똑같이 나눠가져야 하기 때문이오. 당신은 전쟁에서 획득한 것에 대해 아무런 선매권도, 절대적인 선점권도 갖고 있지 않소.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여러 승리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소유물로서 분할되어야만 하오. 그러니까 왕은 아무런 우선권도 갖고 있지 않소.”

 

 푸코는 “수아송의 항아리” 사례가 가난하고 숫자도 적은 인민(프랑크족 전사)이 인구도 많고 부유한 갈리아를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준다고 함. 즉 프랑크족 전사들은 갈리아의 무기만 빼앗았을 뿐, 갈리아가 점유한 토지는 그대로 남겨둠. 즉 싸우는 자(전사)와 경작하는 자들이 갈리아에 존재하였던 것임. 전사들은 갈리아인들에게 부과조(현물)을 납부하라고 요구하였음. 이는 농민들에게 지불하기 어려운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라고 한 로마의 경우보다 좋은 상황이었음.

 푸코는 불랭빌리에의 “프랑크족은 갈리아족의 생업 덕분에, 갈리아족은 프랑크족이 마련해준 안전 덕분에 행복했다”는 분석을 인용함.

 

봉건제의 기원

 

8. 귀족 이야기 5 : 프랑크족 전사 귀족이 군주의 절대권력에 속박됨

 

 푸코는 불랭빌리에의 발명으로 “6~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유럽사회들을 특징짓는 역사적-법적 체계로서의 봉건제”를 지적함.

 세 번째 국면 : 전사계급들은 권력과 부의 요체를 잃고 결국 군주 권력에 속박되었다는 일련의 사실.

 프랑크족 왕의 변화 : 시민적 권력이 절대적 형태를 띠도록 만들어 준 첫 번째 조작. 점차 항구적이고 세습적이고 절대적인 군주로 변모함. 어떻게 변화가 일어났을까?

 전사들에 의한 문제(반란 등등)에 맞서 왕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용병들에게 호소함. 무기를 잃은 갈리아인 인민 혹은 외국 용병이 그 대상이 됨. 결과적으로 전사들은 군주권력과 군주의 절대권력을 지지하도록 조금씩 요청을 받은 갈리아 인민 사이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임.

#. 수아송의 항아리 2.

클로도비크(왕)이 군대를 사열하는 도중, 그 항아리 입수를 방해한 전사를 알아보았음. 그러자 클로도비크는 커다란 도끼를 쥐고서는 “수아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고 말하면서 그 전사의 두개골을 박살냄.

 

 시민적 행정관에 불과했던 클로도비크(왕)은 시민적 문제여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의 사열식(자기 권력의 절대적 성격을 보여주는 형식)을 이용하였음. 즉 푸코는 이를 두고 절대군주는 권력의 군사적 형태와 규율이 시민법을 조직하기 시작한 순간에 탄생한 것으로 보았음.

 

교회, 권리, 국가의 언어

 

9. 귀족 이야기 6 : 왕과 갈리아 옛 귀족(앎의 언어)의 동맹 (전사 귀족의 몰락)

 

 시민적 권력이 절대적 형태를 띠도록 만들어 준 두 번째 조작(푸코는 더 중요하다고 봄). : 왕권과 갈리아의 옛 귀족계급 사이의 동맹

 갈리아 옛 귀족 : 프랑크족과 게르만족 전사에게 토지를 빼앗김(가장 고통을 느낀 계층). 그들은 유일한 안식처인 교회로 피신함.

 갈리아 옛 귀족들이 교회에서 한 일

 교회 기구 발전, 자신들이 유통시킨 신앙체계로 인민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확산시킴. 절대주의적 형태를 취한 로마법 연구를 함.

 “프랑크족 군주들은 게르만족 귀족계급에 맞서 한편으로는 인민에 의지하게 됐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라틴어와 로마법에 통달했던 갈리아족 귀족계급과 동맹 관계를 맺음.”

 불랭빌리에게는 앎의 언어, 언어-앎의 체계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

 라틴어 : 국가의 언어, 앎의 언어, 법적 언어가 됨

 전사 귀족 계급 : 그들의 언어는 게르만 언어였음. 그들은 라틴어를 알지 못했음. 그들은 라틴어로 된 칙령에 의해 새로운 법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도 파악하지 못했음.

 교회(갈리아 옛 귀족)와 왕 : 전사 귀족계급을 무지한 채 머물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음. 전사 귀족들이 십자군에 참전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왕, 교회, 갈리아족의 옛 귀족들은 전사들의 땅과 권리를 빼앗게 될 라틴어로 된 법률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었음.

 불랭빌리에는 귀족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하지 않음. 그는 귀족들에게 앎의 재개를 권유함.

 “당신(귀족)들이 패배한 것은 어떤 순간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앎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임”

 

 푸코, “자기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 앎과 기억의 원천을 간파하기, 이것은 역사의 모든 신비화를 고발한다는 뜻. 자의식을 되찾음으로써 앎의 씨실 속에 재기입됨으로써 귀족은 다시 새로운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고 역사의 주체로서 자처할 수 있음. 따라서 역사에서 하나의 세력으로서 자처한다는 것은, 첫 번째 국면에서는 자의식을 되찾는 것을, 그리고 앎의 질서 속에 재기입된다는 것을 내포함”

 

불랭빌리에게서의 전쟁의 3대 일반화 : 역사법칙과 자연법칙, 전쟁의 제도들, 힘들의 계산

 불랭빌리에가 제기한 주제들에 대한 푸코의 평가 :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역사적-정치적 분석에서 분명히 근본적이게 된 분석 유형들을 도입하고 있음. 그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전쟁을 중요시되고 있기 때문임.

 불랭빌리에의 전쟁에 대해 계기적인 혹은 중첩된 세 가지 일반화

 첫째, 법과 법의 기반들에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둘째, 전쟁의 형태와 관련된 일반화

 셋째, 침략의 사실과 관련해서, 그리고 침략의 상보물인 반란과 관련한 전쟁의 일반화

 

11. 전쟁의 일반화 1 : 법과 법의 기반들에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법과 법의 기반들에 관련된 전쟁의 일반화 -> 전쟁은 단순히 소요와 중단이기는커녕 역사를 모조리 뒤덮어버린다.

 불랭빌리에는 전쟁이 법을 완전히 뒤덮는다고 판단함(자연법을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고 일종의 허구처럼 만들 정도)

 “도처에 불평등이, 도처에 불평등을 정초하는 폭력이, 도처에 전쟁이 있다. 귀족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에 이런 종류의 호전적인 긴장이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랭빌리에가 말하는 자유의 기준

 타인에게서 자유를 박탈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유의 첫 번째 표현임.

 자유는 평등의 반대임. 차이, 전쟁, 힘 관계의 모든 체계에 의해서 행사되는 것이 자유임. 불평등한 힘 관계로 표출하지 않은 자유는 추상적이고 무능력하고 허약한 자유일 뿐.

 블랭빌리에는 “역사의 법칙에 따르면 자유란 타인을 희생시켜 확보되는 그런 자유일 때만, 본질적인 불평등을 보증하는 사회가 존재할 때에만 강력하고 원기왕성하고 충만하다”라고 함.

 자연의 평등법칙은 역사의 불평등 법칙 앞에서 무기력하다.

 “역사는 결국 자유와 평등의 반정립이라는 자연법칙을 창출하는 데 이르고, 이 자연법칙은 이른바 자연권이라 불리는 것 속에 기입된 법칙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말했을 때, 즉 자연의 힘과 관련해 역사가 지닌 더 거대한 힘, 바로 그것은 결국 역사가 자연을 모조리 뒤덮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12. 전쟁의 일반화 2 : 전쟁의 형태와 관련된 일반화

 

 힘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네이션이 전투에서 이기게 하고 다른 쪽이 패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푸코는 “군사제도들의 성격과 조직화”에서 해답을 찾음.

 기사 : 창이나 무거운 갑옷; 부유층의 소규모 군대를 말하는 것임.

 활, 가벼운 갑옷 : 대규모 군대를 말함.

 “왕은 경비병을 통해서 대규모 군대를 가질 수 있음.”

 푸코는 “군사제도들의 중계에 의해 전쟁이 시민적 질서 전체에 일반적인 효과를 끼치게 된다”고 봄.

 승패를 따지는 전쟁이 아니라 전투의 이편과 저편에서 포착된 전쟁, 전쟁을 행하는 방식으로의 전쟁, 전쟁을 준비하고 조직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음(무기의 분배, 무기의 성질, 교전술, 병사의 모집과 봉급, 군대에 관련된 조세로 이해된 전쟁, 내적 제도로서의 전쟁, 그것이 사회체 전체에 전쟁의 인감도장을 찍는 것임)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불랭빌리에는 전투 뒤와 침략 뒤에 군사제도를 나타나게 하고, 군사제도를 넘어서는 나라의 제도들과 경제의 총체를 나타내게 하는 이 끈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고 봄.

12. 전쟁의 일반화 3 : 침략의 사실과 관련해서, 그리고 침략의 상보물인 반란과 관련한 전쟁의 일반화

 

 불랭빌리에가 하고 싶었던 (연구) “침략과 전투에 의해 현시됐던 어떤 힘관계가 어떻게 조금씩 은밀하게 뒤집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임” “강자가 어떻게 약자가 되는가?” “약자가 어떻게 강자가 되는가?” 즉 이행의 문제가 본질을 이룸.

 “역전의 내적 매커니즘”의 결정

 블랭빌리에는 전쟁 단계를 모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침투시키고, 수천 개의 다양한 경로에 의해 더 하위로 분할함. 그리고 서로 교화되고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 동맹을 맺는 집단들, 전선들, 전술적 단위들 사이의 항구적 상태 같은 것으로 전쟁을 드러냄.

 푸코는 전쟁의 일반화야말로 불랭빌리에의 사상을 특징짓는 다고 생각함.

 

전쟁에 대한 몇 가지 고찰(7강의 마무리)

 

13. 전쟁을 이야기한 이유 : 힘관계가 역사적-정치적 대상이 됨

 

 푸코의 질문 : 전쟁에 대한 이런 삼중의 일반화는 무엇으로 귀결될 것인가?

 불랭빌리에를 다시 거론함 “전쟁은 법, 경제, 재정, 종교, 신앙, 교육, 언어의 실행, 법적 제도를 건드림. 역사는 전쟁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출발해서, 그리고 전쟁에 입각한 분석에서 출발해서 전쟁, 종교, 정치, 관습, 기질 같은 모든 것을 관련지을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사회에 관한 이해 가능성의 원리가 됨. 즉 역사적 담론에 있어서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전쟁임.”

 푸코가 불랭빌리에를 인용한 이유 “그가 사회 내부에 일존의 계속된 전쟁으로서 힘 관계를 도입함으로써, 마키아벨리에게서 볼 수 있는 유형의 분석을 역사적 용어로 소생시켰기 때문”임. --> 정치적 대상이던 힘관계가 이제 역사적 –정치적 대상이 됨.

 힘관계 분석의 유용성

 귀족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의식할 수 있고, 자신들의 앎을 되찾을 수 있으며, 정치적 세력장에서 다시 하나의 정치적 세력이 될 수 있음.

 정치 투쟁에서 역사가 기능하게 된 계기

 군주만 관심을 가졌던 힘관계가 어떤 집단, 민족(네이션), 소수자, 계급 등에게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순간 --> 역사적-정치적 장의 조직화의 시작

 정리 : “귀족이 제3신분과 군주제에 맞서 동시에 정치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 전쟁 내부에서 그리고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적 담론 같은 것을 수립할 수 있었음”

 

 

[강의 말미에 남긴 말]

 

 부르주아지는 쇠퇴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합리적으로 보았기에, 역사를 발명하였음.

 그렇다면 프랑스 귀족들이 역사를 발명한 것은 무엇인가? 귀족들은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전쟁을 바로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으며, 전쟁은 동시에 담론의 출발점, 역사적 담론이 출현할 가능성의 조건, 이 담론이 향하는 참조점, 대상이었음. 즉 전쟁은 담론의 출발점인 동시에 이 담론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했음.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정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에, 17세기에서 18세기로 접어들 때에 누군가가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된 전쟁이라고 분석하고 말하고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