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문학기계] 『카프카, 마이너문학을 위하여』
20200309 muse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 *카프카 소설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상의 상응성은 없다 p.71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문학이 아니라 언표 행위: “욕망과 함께 하는, 법과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언표행위. 하지만 언표 행위는 그 자체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다. 다른 모든 심급을 문제 삼는 미시 정치학이요 욕망의 정치학이다. 욕망의 관점에서 그보다 더 희극적이고 즐거운 저자는 없었다. 언표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가는 없었다”
**단절된 내용을 재구성함(p.72)
카프카 소설은 형식과 내용이 해체 된 가운데 단지 표현 기계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인데 “혁명적인 문학은 일단 언표한 후 보고 생각한다”→표현은 형식을 부수고 단절을 표시. 단절된 내용을 재구성해 냄(기성의 문학에서는 내용이 표현 형식 안에서 주어져 있거나 적절한 표현의 형식을 발견한다)
***...이 순간, 언어 활동은 그것이 말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그것을 의미에 종속시키는 것에 의해서는 더더욱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활동은, 언어를 흐르게 하고 유통시키고 폭발시키는 것, 즉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왜냐면 문학은 전적으로 분열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며,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p. 237)
***소수문학이란***
들뢰즈/가타리는 '소수문학'이라는 개념을 카프카의 일기 1911년 12월 25일자에서 가져온다. 그리고 '소수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수 집단의 문학이란 소수 집단 언어의 문학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지배 집단의 언어권에서 소수 집단이 지탱해가는 문학을 지칭한다.
* 소수문학의 특징
1) 언어의 탈영토화
2) 목전의 정치 문제에 가지처럼 매달린 개인적인 문제
3) 발화의 집단적 구성
이 세 가지가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지배 문학의 언어적 재영토화에 대항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를 탐구하고 '거장(예를들어 괴테같은)'의 개별적인 발화가 아닌 집단적 발화를 구성하는 카프카를. (비평고원에서 발췌)
1. 내용과 표현
*카프카 작품 속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 굴이다. 입구가 있지만 사용 및 분배법칙은 불분명하고 어떤 입구도 특권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들어가는 입구의 점이 다른 어떤 점들과 연결되는지 두 점을 연결하려면 어떤 갈림길과 통로를 지나야 하는지 리좀의 지도는 어떠하고 다른 점으로 들어갈 경우 어떻게 변경되는 지를 찾고자 할 뿐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입구는 단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도래할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중입구의 원칙은 오로지 적 혹은 시니피앙의 침입을 막는 것, 사실상 실험에만 뜻을 두고 있는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막는 것이다. (작가가 실험으로 쓴 글을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 ‘숙인 고개’라는 내용의 형식과 ‘사진-초상화’라는 표현의 형식: <성>에 나오는 머리 숙인 문지기의 초상화, 초상화 혹은 낙심하여 숙인 머리, 굽은 등은 작품에 따라 가변적인 자율성의 정도를 갖는, 카프카 작품에 ‘상수’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입구는 기대와 달리 도래할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입구 자체가 <성>의 초반부에서 통합/합병되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두 형식, 내용의 형식 “숙인 머리”와 표현의 형식 “사진-초상화”의 연결에 의해 구성된다. ... 우리는 단지 이 통합/합병이 기능의 정지blocage, 실험적 욕망의 중화[약화]를 수행한다고 말할 뿐이다. 기억(사진으로 나타나는)은 욕망을 가로막고, 욕망에서 본(本)calque을 추출하고, 욕망을 지층들 쪽으로 몰아가고, 욕망을 모든 연결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하지만 물론 리좀의 일부를 이룰 수 있는 한에서 막다른 골목도 좋다. (카프카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구”를 찾는다는 의미? 막다른 골목마저도 하나의 출구?)
*기억이라기 보다는 욕망: <성>에서 고향종탑의 이미지는 기억이지만 더 이상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적인 어린 시절의 블록들을 가지고 '어린아이-되기'라는 블록들을 생산한다. 욕망의 대상. 욕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향종탑은 욕망을 일으켜 세우고 증식시키고 다른 강도에 들어가게 한다. 중요한 것은 종탑과 성의 망루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순수 소리이다.
고개 숙인 고정된, 복종적인 혹은 복종하는 욕망, 중립화된 욕망, 접속이
초상화-사진 최소화된 욕망, 어린 시절의 추억, 영토성 내지 재영토화
쳐든 고개 치켜든 욕망, 혹은 슬며시 빠져 나가 새로운 접속으로 열리는
음악적-소리 욕망, 유아기의 블록, 혹은 동물적 블록, 탈영토화
( 이렇게 도식할 수 있지만 이 도식은 충분치 않다)
* 사진, 소리(일탈한) 또는 음악: 흥미로운 점은 카프카의 경우 소리가 끼어드는 것이 고개를 세우거나 쳐드는 운동이 종종 나온다. ‘치켜든 고개’와 ‘음악적-소리’라는 두 개의 형식이 내용의 형식(숙인 고개-쳐든 고개)사이에서 표면적으로 의미 화하는 이항적 관계(가령 복종-저항)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표현의 질료“로 나타나며 이 질료는 다른 항들에게 반작용을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점점 덜 형식화되어 감을 드러낼 내용들을 표현하는데 쓰이게 된다. 가령 치켜드는 머리는 그 자체로나 형식적으로는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된다. 그것은 이제 소리 표현의 흐름에 이끌리고 휩쓸리는 변형시킬 수 있는(형식이 바뀔 수 있는)실체일 뿐이다.
* 치켜든 머리가 숙인 머리와 대립하는 것처럼 표현에서 소리가 초상화와 대립하지 않는다.
음악은 언제나 분해 불가능한 아이-되기나 동물-되기 속에서 시각적 추억과 대립되는 음향적 블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 연주할 줄 모르는 연주자의 휘파람 소리에 청중은 박수를 치고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에서도 요제피네는 단지 못 부는 휘파람을 불 뿐이며 미스테리를 더한다. 소리에서는 강도만이 중요하고(<소송>에서 태형당하는 관리의 비명소리)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표현의 질료’로 나타난다.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탈주선이 문제다. “어디에 있든,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가능한 덜 의미 작용적인 단순한 출구만이 문제다.
***들뢰즈 가타리의 문학 읽기 방식***
*우리는 카프카의 상상력이나 역동성ㆍ동물성을 이루는 원형(archétypes)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원형은 유사성ㆍ동질성ㆍ주제에 의해 진행되는데, 반대로 우리는 이질적인
작은 선들이 미끄러지고 단절되는데 한해서만 우리의 규칙을 찾아낼 뿐이다).
*우리는 “자유연상”을 찾지도 않는다. (언제나 우리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인도하거나, 더 나쁘게도 환상으로 이끄는 자유연상의 서글픈 운명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슬픈 결과는 자연연상이 실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유연상의 은폐된 법칙이라는 원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을 하고 ‘이것은 저것을 뜻한다’고 말하지 않고 형식적 대립과 기성의 시니피앙을 가진 구조는 찾지 않는다. : 체계가 어디서부터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요소가 이질성의 역할, 전체를 달아나게 하고 상징적 구조를 깨뜨리는 포화체의 역할 역할을 수행하는 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 작가는 작가-인간이 아니다. 작가는 정치적 인간이고, 기계-인간이며 실험적 인간이다. 작가는 동물이 되고 비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멈추는데 정말로 목소리를 통해 소리를 통해 문체를 통해 그리고 필경 절제의 힘으로 동물이 되기 때문이다.
* 구조도 환상도 아닌 카프카의 하나 또는 여러 기계만 믿는다: 카프카의 기계는 ‘다양한
정도로 형식화된 내용 및 표현’과 그 안을 드나들며 모든 상태를 통과하는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로 구성된다. 기계 안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 기계를 따라가는 것 등등 여전히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어떤 해석과도 관계없이 욕망의 상태들이다. 탈주선도 기계의 일부를 이루고, 동물은 땅굴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문제는 자유로운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출구 , 입구, 인접지를 찾는 것이다. 기계의 순전히 외견상의 통일성(〈유형지에서〉에서는 기계는 강한 통일성을 보인다. 인간들 자신이 기계의 부품이 되는 방식〈(유형지에서〉에서 인간이 기계에 끼어들고 기계의 분쇄를 초래한다), 기계와 관련하여(인간 또는 동물의) 욕망의 위치 (<아메리카(실종자)>에서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의 이동 진입과 쫓겨남, 배-기계와 삼촌의 자본주의 기계, 호텔 기계)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예요. 그 중 어느 길로 가는 게 유행이면 대부분 그리로 가고, 다른 길이 유행이면 다들 그곳으로 몰리지요. 어떤 규칙에 따라 그렇게 유행이 바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p. 350
* 욕망은 이 모든 위치와 상태를 통과하고 정확히 말해서 이 모든 선을 따라간다
* 욕망은 형식이 아니라 과정(processus) (procès)이다.
[들뢰즈와 문학기계] 『카프카, 마이너문학을 위하여』
20200309 muse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 *카프카 소설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상의 상응성은 없다 p.71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문학이 아니라 언표 행위: “욕망과 함께 하는, 법과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언표행위. 하지만 언표 행위는 그 자체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다. 다른 모든 심급을 문제 삼는 미시 정치학이요 욕망의 정치학이다. 욕망의 관점에서 그보다 더 희극적이고 즐거운 저자는 없었다. 언표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가는 없었다”
**단절된 내용을 재구성함(p.72)
카프카 소설은 형식과 내용이 해체 된 가운데 단지 표현 기계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인데 “혁명적인 문학은 일단 언표한 후 보고 생각한다”→표현은 형식을 부수고 단절을 표시. 단절된 내용을 재구성해 냄(기성의 문학에서는 내용이 표현 형식 안에서 주어져 있거나 적절한 표현의 형식을 발견한다)
***...이 순간, 언어 활동은 그것이 말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그것을 의미에 종속시키는 것에 의해서는 더더욱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활동은, 언어를 흐르게 하고 유통시키고 폭발시키는 것, 즉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왜냐면 문학은 전적으로 분열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며,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p. 237)
***소수문학이란***
들뢰즈/가타리는 '소수문학'이라는 개념을 카프카의 일기 1911년 12월 25일자에서 가져온다. 그리고 '소수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수 집단의 문학이란 소수 집단 언어의 문학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지배 집단의 언어권에서 소수 집단이 지탱해가는 문학을 지칭한다.
* 소수문학의 특징
1) 언어의 탈영토화
2) 목전의 정치 문제에 가지처럼 매달린 개인적인 문제
3) 발화의 집단적 구성
이 세 가지가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지배 문학의 언어적 재영토화에 대항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를 탐구하고 '거장(예를들어 괴테같은)'의 개별적인 발화가 아닌 집단적 발화를 구성하는 카프카를. (비평고원에서 발췌)
1. 내용과 표현
*카프카 작품 속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 굴이다. 입구가 있지만 사용 및 분배법칙은 불분명하고 어떤 입구도 특권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들어가는 입구의 점이 다른 어떤 점들과 연결되는지 두 점을 연결하려면 어떤 갈림길과 통로를 지나야 하는지 리좀의 지도는 어떠하고 다른 점으로 들어갈 경우 어떻게 변경되는 지를 찾고자 할 뿐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입구는 단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도래할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중입구의 원칙은 오로지 적 혹은 시니피앙의 침입을 막는 것, 사실상 실험에만 뜻을 두고 있는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막는 것이다. (작가가 실험으로 쓴 글을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 ‘숙인 고개’라는 내용의 형식과 ‘사진-초상화’라는 표현의 형식: <성>에 나오는 머리 숙인 문지기의 초상화, 초상화 혹은 낙심하여 숙인 머리, 굽은 등은 작품에 따라 가변적인 자율성의 정도를 갖는, 카프카 작품에 ‘상수’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입구는 기대와 달리 도래할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입구 자체가 <성>의 초반부에서 통합/합병되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두 형식, 내용의 형식 “숙인 머리”와 표현의 형식 “사진-초상화”의 연결에 의해 구성된다. ... 우리는 단지 이 통합/합병이 기능의 정지blocage, 실험적 욕망의 중화[약화]를 수행한다고 말할 뿐이다. 기억(사진으로 나타나는)은 욕망을 가로막고, 욕망에서 본(本)calque을 추출하고, 욕망을 지층들 쪽으로 몰아가고, 욕망을 모든 연결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하지만 물론 리좀의 일부를 이룰 수 있는 한에서 막다른 골목도 좋다. (카프카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출구”를 찾는다는 의미? 막다른 골목마저도 하나의 출구?)
*기억이라기 보다는 욕망: <성>에서 고향종탑의 이미지는 기억이지만 더 이상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적인 어린 시절의 블록들을 가지고 '어린아이-되기'라는 블록들을 생산한다. 욕망의 대상. 욕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향종탑은 욕망을 일으켜 세우고 증식시키고 다른 강도에 들어가게 한다. 중요한 것은 종탑과 성의 망루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순수 소리이다.
고개 숙인 고정된, 복종적인 혹은 복종하는 욕망, 중립화된 욕망, 접속이
초상화-사진 최소화된 욕망, 어린 시절의 추억, 영토성 내지 재영토화
쳐든 고개 치켜든 욕망, 혹은 슬며시 빠져 나가 새로운 접속으로 열리는
음악적-소리 욕망, 유아기의 블록, 혹은 동물적 블록, 탈영토화
( 이렇게 도식할 수 있지만 이 도식은 충분치 않다)
* 사진, 소리(일탈한) 또는 음악: 흥미로운 점은 카프카의 경우 소리가 끼어드는 것이 고개를 세우거나 쳐드는 운동이 종종 나온다. ‘치켜든 고개’와 ‘음악적-소리’라는 두 개의 형식이 내용의 형식(숙인 고개-쳐든 고개)사이에서 표면적으로 의미 화하는 이항적 관계(가령 복종-저항)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표현의 질료“로 나타나며 이 질료는 다른 항들에게 반작용을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점점 덜 형식화되어 감을 드러낼 내용들을 표현하는데 쓰이게 된다. 가령 치켜드는 머리는 그 자체로나 형식적으로는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된다. 그것은 이제 소리 표현의 흐름에 이끌리고 휩쓸리는 변형시킬 수 있는(형식이 바뀔 수 있는)실체일 뿐이다.
* 치켜든 머리가 숙인 머리와 대립하는 것처럼 표현에서 소리가 초상화와 대립하지 않는다.
음악은 언제나 분해 불가능한 아이-되기나 동물-되기 속에서 시각적 추억과 대립되는 음향적 블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투쟁의 기록>에서 연주할 줄 모르는 연주자의 휘파람 소리에 청중은 박수를 치고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에서도 요제피네는 단지 못 부는 휘파람을 불 뿐이며 미스테리를 더한다. 소리에서는 강도만이 중요하고(<소송>에서 태형당하는 관리의 비명소리)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형식이 부여되지 않은 ‘표현의 질료’로 나타난다.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탈주선이 문제다. “어디에 있든, 왼쪽에 있든 오른쪽에 있든” 가능한 덜 의미 작용적인 단순한 출구만이 문제다.
***들뢰즈 가타리의 문학 읽기 방식***
*우리는 카프카의 상상력이나 역동성ㆍ동물성을 이루는 원형(archétypes)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원형은 유사성ㆍ동질성ㆍ주제에 의해 진행되는데, 반대로 우리는 이질적인
작은 선들이 미끄러지고 단절되는데 한해서만 우리의 규칙을 찾아낼 뿐이다).
*우리는 “자유연상”을 찾지도 않는다. (언제나 우리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인도하거나, 더 나쁘게도 환상으로 이끄는 자유연상의 서글픈 운명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슬픈 결과는 자연연상이 실패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유연상의 은폐된 법칙이라는 원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을 하고 ‘이것은 저것을 뜻한다’고 말하지 않고 형식적 대립과 기성의 시니피앙을 가진 구조는 찾지 않는다. : 체계가 어디서부터 어디를 향해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요소가 이질성의 역할, 전체를 달아나게 하고 상징적 구조를 깨뜨리는 포화체의 역할 역할을 수행하는 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 작가는 작가-인간이 아니다. 작가는 정치적 인간이고, 기계-인간이며 실험적 인간이다. 작가는 동물이 되고 비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멈추는데 정말로 목소리를 통해 소리를 통해 문체를 통해 그리고 필경 절제의 힘으로 동물이 되기 때문이다.
* 구조도 환상도 아닌 카프카의 하나 또는 여러 기계만 믿는다: 카프카의 기계는 ‘다양한
정도로 형식화된 내용 및 표현’과 그 안을 드나들며 모든 상태를 통과하는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로 구성된다. 기계 안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 기계를 따라가는 것 등등 여전히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어떤 해석과도 관계없이 욕망의 상태들이다. 탈주선도 기계의 일부를 이루고, 동물은 땅굴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문제는 자유로운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출구 , 입구, 인접지를 찾는 것이다. 기계의 순전히 외견상의 통일성(〈유형지에서〉에서는 기계는 강한 통일성을 보인다. 인간들 자신이 기계의 부품이 되는 방식〈(유형지에서〉에서 인간이 기계에 끼어들고 기계의 분쇄를 초래한다), 기계와 관련하여(인간 또는 동물의) 욕망의 위치 (<아메리카(실종자)>에서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의 이동 진입과 쫓겨남, 배-기계와 삼촌의 자본주의 기계, 호텔 기계)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예요. 그 중 어느 길로 가는 게 유행이면 대부분 그리로 가고, 다른 길이 유행이면 다들 그곳으로 몰리지요. 어떤 규칙에 따라 그렇게 유행이 바뀌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p. 350
* 욕망은 이 모든 위치와 상태를 통과하고 정확히 말해서 이 모든 선을 따라간다
* 욕망은 형식이 아니라 과정(processus) (procè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