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안티 오이디푸스] 2장 9절

권순모
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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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떠나기

--정신증을 과정이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과정의 중단이라 부를 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은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의 한계로서의 욕망하는 생산이며, 우리 근대인들의 병이다. 역사의 끝에서 사회적 생산은 탈영토화의 극단으로 치닫고 형이상학적 생산은 새로운 땅에서 욕망을 재생산한다. 분열자는 탈코드화된 흐름과 함께 기관 없는 신체라는 사막을 건너면서 그곳에 자신의 욕망하는 생산을 세우고 현실적인 힘이 영원히 넘쳐흐르도록 한다[an apocalyptic vision].

--분열자는 떠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여행은 기이하게도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오지 않았으며,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하지도 않는다. 그의 여행은 이곳 욕망기계의 주위를 도는 강도의 여정이다. 이 욕망의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와 같다. 그들은 극한 고통과 병이 어떤 건지도 알지만, 스스로에게서 자유인—책임감에 억눌리지 않고, 고독하고, 기쁨에 차있으며,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으로 단순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결여 없는 욕망, 장애와 코드를 넘어서는 흐름, 그 어떤 자아도 의미하지 않는 이름을.

--랭과 야스퍼스는 과정과 그 완성의 의미를 알았기에 가족주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 랭은 광기는 병(breakdown)이 아니라 돌파구(breakthrough)라고 말한다. 광기는 소위 정상성(sanity)의 희화화이자 조롱이며 그것의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이다. 진정한 정상성은 어떤 식으로든 규범적 자아(normal ego)의 해체를 동반한다[사실 프로이트 역시 이러한 견해를 <애도와 멜랑꼴리>(1917)에서 피력. 3쪽 참조].

 

2. 화가 터너

--터너의 그림은 벽을 오르되 동시에 그 뒤에 남아있는 게 어떤 건지, 또 흐름이 우리를 데려가건 우리에게 흘러오건, 흐름을 흐르게 하는 게 어떤 건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그림을 세 시기로 나눌 때 첫 번째 시기는 종말, 눈사태, 폭풍 등을 그린 시기다. 두 번째 시기는 의고주의를 통한 착란적 재구성의 시기. 세 번째 비밀의 시기가 가장 문제적인데, 이때의 작품들은 영원한 어떤 것, 영원한 미래로부터 오거나 그곳으로 흘러가는 것들을 담는다. 화폭은 구멍, 호수, 불꽃, 회오리, 폭발에 의해 관통되어 있으며, 남는 것은 분열증이다—모든 것은 섞이고 혼란스러우며, 여기에서 바로 병이 아니라 돌파가 일어난다.



3. 과정의 중단들: 신경증, 정신증, 도착증

--독특한 영미문학 작품들: 토마스 하디, D. H. 로렌스, 말콤 라우리, 헨리 밀러, 알렌 긴즈버그, 잭 케루악 등. 이들은 떠날 줄 아는 이들, 코드들을 섞고, 흐름이 순환하게 하고, 기관 없는 신체를 횡단하는 이들이다. 한계를 넘고, 자본주의적 장벽인 벽을 부순다.

--신경증적 교착상태(아빠-엄마의 오이디푸스화, 미국, 고향으로의 귀환, 이국적 영토성의 변태화, 마약, 알코올, 오래된 파시즘의 꿈)는 문을 닫고, 분열증적 흐름(정자, 강물, 배수구, 정액, 코드화되지 않는 단어들, 지나치게 유동적이고 끈적이는 리비도, 문법에 대한 폭력, 기표의 파괴, 흐름이 된 무의미, 모든 관계에 출몰하는 다성성)은 움직인다.

--문학의 문제를 이데올로기나 사회 질서에 의한 회유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회유될 수 있지만, 문학 작품은 언제까지나 잠자는 젊은이들을 깨우고, 불꽃을 퍼트리는 일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골칫거리인데, 기호가 기표질서에 머무르려는 내용의 형식을 돌파하려고 할 때[문학 작품이 기존질서를 전복하려고 할 때] 문학 기계와 생산의 장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하지만 엥겔스가 말했듯이, 작가는 흐름을 따라가고, 흐르게 하고, 자기 작품의 정통적, 독재적 기표를 쪼개게 한다는 점에서, 또 떠오르는 혁명기계에 필연적으로 영양분을 준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그것이 바로 문체, 혹은 문체의 부재이며, 비통사적이고 비문법적인 언어는 의미를 나타내기보다 욕망이 된다. 문학은 분열증과 같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며, 표현이 아니라 생산이다.

--문학이 기존질서에 순응하는 소비대상이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화이다. 문제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오이디푸스화가 아니라, 작품을 지배 코드에 따른 이데올로기를 분비하는 쪼잔한 표현 행위로 만드는 오이디푸스적 형식이다. 예술작품은 신경증과 승화 사이를 오가는데, 한편으로는 퇴행적으로 어린 시절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재분배하고 다른 한편 미래를 향한 새로운 해결로 이끄는 길을 만들어낸다. 문학은 이렇게 문화상품(문화대상)이 된다. 정신분석을 예술작품에 적용할 필요 없이 작품 자체가 성공적인 정신분석, 즉 모범적인 집단 잠재성을 지닌 숭고한 ‘전이’가 된다. (대중문학에서) 신경증은 궁극적으로 창조적인 것으로, 정신증은 소외시키고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기성문학을 오이디푸스 정신분석학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데, 이러한 문학은 문자화되지 않은 초자아보다 더 유독한 초자아의 형식을 펼치기 때문이다. 브레통 vs. 아르토, 괴테 vs. 렌츠, 쉴러 vs. 횔덜린. 문학의 오이디푸스 형식은 문학이 상품화된 형식이다. 순수 신경증자는 무책임하고 팔리지 않는 고독의 작품을 생산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읽히고 번역되고 파생상품으로까지 팔린다. 아르토가 말한 것처럼, 약한 이들, 못배운 이들을 실어나르거나 언어의 똥을 치우는 과정 대신,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거나 어떤 목적을 가진 글들은 모두 돼지 오물 같은 거다. 그러니 우리에게 승화 따위의 얘기를 하지 말아 주시오. (제대로 된) 문학은 폭발물을 내장하고, 위조지폐를 만들며, 초자아나 시장가치를 날려버리는 종류의 것들이다.

--아르토가 분열증이여서 문학 밖에 있다고 하든 그의 문학이 진짜여서 분열증이 아니라고 하든 모두 분열증에 대한 유치하고 반동적인 개념과 문학에 대한 신경증적이고 시장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하지만 아르토는 분열증적이기에 정신의학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분열증적이기에 문학의 완성이다. 그에게는 욕망의 흐름을 탈코드화하는 과정에 있는 정신증자에 대한 사회의 대우 혹은 문학을 정신증과 대립시키는 사회의 처사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

 

4. 탈영토화 운동과 영토성들

--랭이 말한 분열증적 벽 혹은 한계를 돌파한 사람들은 거의 없고 게다가 이들은 ‘매우 보통인 사람들’이다. 1) 신경증자: 주류는 벽에 다가가지만 겁에 질려 물러난다. 거세와 오이디푸스의 기표 법 아래에 머무르기를 바라면서, 그 경계를 사회형성체의 내부, 즉 사회 재/생산과 가족 재생산 사이로 전치시킨다. 그들은 오이디푸스의 두 극 사이에서 움직이며, 바위로서의 오이디푸스와 동굴로서의 거세는 그들의 궁극적인 영토성이다(비록 분석 카우치에서 끝나지만). 신경증은 경계의 전치이며, 그렇게 자신만의 작은 식민지를 만든다. 2) 도착증자: 이들은 벽을 따라가며 도착(도착증)의 장소에서 자신들이 기획한 좀더 인위적이고 좀더 비밀스러운 사회, 처녀지를 원한다. 3) 분열증자: 이들은 오이디푸스의 유용성도, 도착증의 조잡함과 유미주의도 지겨워, 벽으로 가 부딪치고 튕겨져 나오곤 하며 때때로 이는 심한 고통을 동반한다. 이때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며 기관 없는 신체--여전히 영토성이지만 모든 욕망하는 생산이 위축되고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즉 정신증의 사막 같은 곳--로 후퇴한다. 긴장한 몸들은 신경증자를 낳는 사회적/정신적 억압 체제로부터 피하기 위해 일차 억압에 모든 힘을 쏟지만, 그들을 오이디푸스를 결여한 입원 정신병자로 만드는 더 날 것의 억압이 그들에게 닥친다.

--그런데 왜 분열자라는 말이 1) 한계를 넘어서는 한에서의 과정과 2) 한계와 맞선 채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의 결과 둘 모두를 지칭하는가? 왜 같은 말이 궁극적인 돌파, 가능성으로서의 병,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의 모든 이행과 복잡성을 가리키는가? 세 모험 중 정신증의 모험이 과정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야스퍼스가 보여준 것처럼 “악마적인” 것(보통 억압된 것)이 정신증에 의해 폭발되거나 정신증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진정한 광기는 과정이고 병은 단지 그 위장인지, 아니면 병이 우리의 유일한 광기이고 과정은 유일한 치유가 되는 건지, 우리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어찌 됐든, 생산의 과정이 빗겨나가면서 거칠게 방해될수록 더 많은 실체-분열자가 구체적인 생산물로 나타난다. 신경증, 정신증, 도착증의 관계는 각각 과정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또 과정의 중단(탈영토화된 욕망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애써 붙잡고 있는 한 조각의 남은 땅)을 어떻게 표상하는지에 달려있다. 오이디푸스의 신경증적 영토성, 인위성의 도착적 영토성, 기관없는 신체의 정신증적 영토성. 어떤 때 과정은 덫에 빠져 삼각형 안에서 맴돌고, 어떤 때는 스스로를 목적으로 두며, 다른 때는 허공에 머물면서 완성 대신 끔찍한 악화를 초래한다. 세 형식은 모두 분열증을 기반으로 삼는다.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야말로 유일한 보편이다. 분열증은 벽이고, 벽의 돌파이며, 동시에 이 돌파의 실패이다. 반 고흐: “아무리 세게 쳐도 안되니 어떻게 이 벽을 넘을 것인가. 줄(file)로 뚫고 파헤쳐 나가야 한다,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그렇게.” 예술 기계이든, 분석 기계이든, 혁명 기계이든 사회적, 정신적 억압의 틀 안에서 외연적 관계로 남든가, 아니면 욕망 기계를 부양하는 흐름의 톱니바퀴가 될 것이다. 이때 참을성 있게 불붙여진 많은 국지적 불들은 하나의 일반적 폭발이 되며, 기표가 아니라 분열자가 바로 그 불이다.

 

*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정신병과 정상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 단지 멜랑꼴리 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리에 대해 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몹시 비난하면서 자신이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거짓말쟁이고 독립심이 부족한 사람이며 오로지 그의 천성적인 약점을 감추는 것만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쩌면 그는 자기 이해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단지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가 그러한 종류의 진실에 접근하기 전에 멜랑꼴리라는 병을 앓아야 하냐는 것이다.” 프로이트 특유의 냉소와 진심이 섞여 미세한 톤을 결정하기 어려운 이 구문에서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록 멜랑꼴리적 주체의 자기비난이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그가 다음 문단에서 지적하듯이 보통 상대적으로 더 양심적이고 더 교양있는 사람들이 멜랑꼴리 증세를 보인다—자신이 쪼잔하고 이기적이며 거짓말쟁이고 의존적이며 약점을 숨기는데 급급하다는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판이 자신이 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며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위와 같이 자신을 생각할 때 즉 민낯의 진실을 맞대면할 때 그는 이미 현상적으로 멜랑꼴리병을 앓고 있는 것이며 정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걸리버의 광기: 멜랑꼴리적 주체와 <<걸리버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