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존재와 시간] 14절-20절

권순모
20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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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by 마르틴 하이데거


발제자: 지숭이, 발제 범위: 제 3장 14절 – 20절, 날짜: 2020년 2월 27일 


제 3장 세계의 세계성


 제14절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기술한다고 함은 ‘세계 내부에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제시하고 개념적-범주적으로 고정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 문제틀 자체가 자연의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설명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 존재자에 대한 수학적인 자연과학에서 주어지고 있는 그러한 근본발언들에 맞추어 이루어진다면, 이 존재론은 결코 “세계”의 현상을 적중시키지 못한다(94).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적 묘사도, 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도 그 자체로는 “세계”의 현상을 적중시키지 못한다(95).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는 세계-내-존재를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성도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범주이다(95). 세계성 자체는 특수한 “세계들”의 그때마다의 구조 전체로 변양될 수 있지만 자체 안에 세계성 자체의 선험적 토대를 포함하고 있다(96). “세계적”이라는 [형용사적] 변화는 용어상 현존재의 존재양식의 하나를 의미하지, 결코 세계 “안에” [눈앞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의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후자의 경우 우리는 세계귀속적 또는 세계내부적이라고 칭한다(96).


일상적인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주위세계이다(97). 그렇지만 주위세계에 구성적인 “주위를 빙 둘러”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98).


가.   주위세계성 및 세계성 자체의 분석


제15절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우리는 또한 세계 안에서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왕래’라고도 이름한다. 이 왕래는 이미 배려함의 방식의 다양성 안으로 분산되었다. 왕래의 가장 가까운 양식은 그저 인지하기만 하는 인식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다루며 사용하는 배려함이다(98). 

그리스인들은 “사물”에 대한 적합한 용어를 가지고 있었다. 프라그마타, 즉 사람들이 배려하는 왕래에서 그것과 상관이 있는 그것이다. 우리는 배려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도구’라고 이름한다(100).


엄밀히 말해서 하나의 도구는 없다. 도구의 존재에는 그때마다 각기 언제나, 그 안에서 도구가 그것이 무엇인 바로 이 도구일 수 있는 일종의 도구 전체가 속한다(100-101). 도구는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성, 편의성 등과 같은 “하기 위한”의 여러 상이한 방식들이 하나의 도구전체성을 구성한다. “하기 위한”의 구조에는 일종의 어떤 것의 어떤 것으로의 지시가 놓여 있다. 도구는 그것의 도구성에 상응하게 언제나 다른 도구에의 귀속성에서부터 존재한다[…](101).


망치질을 함 자체가 망치의 독특한 “편의성 [손에 익음]”을 발견한다. 도구가 그 안에서 그것 자체에서부터 스스로를 내보이고 있는 도구의 존재양식을 우리는 손안에 있음이라고 부른다. 오직 도구가 이러한 “자체 존재”를 가지고 있어서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손에 익을 수 있고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다(102). 도구와의 왕래는 “하기 위한”의 지시의 다양성 아래에 예속되어 있다. 거기에 맞추어진 시야가 곧 ‘둘러봄’이다(102). […] 행위가 자기의 시각을 가지고 있듯이 고찰도 그렇게 근원적으로 일종의 배려이다(102).

만들어야 할 물품은 망치, 대패, 못 등의 ‘그것을 위해서’로서 그 도구 나름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102). 제작된 물품은 그것의 사용성의 ‘그것을 위해서’와 그것의 성립의 ‘거기에서부터’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수공업적인 상태에서도 그것 안에는 동시에 착용자와 이용자에 대한 지시가 놓여 있다(103).


각기 그때마다 배려된 물품은 예를 들면 작업장이라는 집 안의 세계에만 [손안에]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공공의 세계에도 있다. [예를 들어] 우선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손안에 있는 시계라는 도구를 사용할 때 주위 세계 자연도 함께 손안에 있는 것이다(104).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 양식은 손안에 있음이다(104). 손안에 있음은 존재자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범주적 규정이다(105). 우리는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를 해석하면서 언제나 이미 세계를 “전제했다”. 이러한 존재자들을 함께 짜맞춘다고 해서 그 총합으로서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105).


제16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서 알려지는 주위 세계의 세계 적합성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내부적 존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계는 이 존재자를 깊이 규정하기 때문에, 세계가 “있는” 한에서만 이 존재자를 만날 수 있게 되고 발견된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서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 된다(105-106).


가까이 손안에 있는 존재자가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그것의 특정한 사용을 위해서 차빅ㅏ 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작업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용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눈에 띄게 된다. 눈에 띔이 손안에 있는 도구를 일정한 손안에 있지 않음에서 내준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사태가 드러난다. 즉 사용할 수 없는 것이 거기 그냥 놓여 있다(107).


손안의 것은 손안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강요[절실함]의 양태에 오게 된다. 비는 것이 더 요긴하게 사용되면 될수록, [바꿔 말해서] 그것을 더 본래적으로 그것의 손안에 없음에서 만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그 손안의 것은 강요성을 더하게 되어서 그것이 손안에 있음의 성격을 상실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을 그저 단지 눈앞에 있는 것—그 비는 것 없이는 그 자리에서 떼어낼 수 없는 그런 것—으로서 드러낸다(107). 이러한 손안에 있지 않은 것은 방해하고 우선 먼저 배려해야 할 것의 버팀을 드러나게 해준다(108).

도구는 사람들이 던져버리고 싶어하는 그것이라는 의미의 “그 따위 것”이 된다. 그런 반발의 경향에서도 손안의 것은 여전히 손안의 것으로서 그것의 확고한 눈앞에 있음에서 자신을 내보인다(108).


눈에 띔, 강요, 버팀에서 손안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손안에 있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손안에 있음은 그 자체 손안의 것과의 왕래에는, 비록 비주제적이기는 하지만, 이해되어 있다. 도구로서의 손안의 것의 존재 구조를 지시를 가지고 규정했다(108).


여기에 ‘하기 위한’이 ‘그것을 위한’을 가리키는 그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고 있음이 놓여 있다. 지시 자체는 고찰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배려하며 지시를 따르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시의 방해 속에서 —어디에 사용할 수 없음에서—지시가 명백해진다. […] 작업 도구의 파손에 부딪친 둘러봄에게 존재적으로 명백해진다. 도구 연관이 그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둘러봄에서 항시 애초부터 이미 보아진 전체로서 빛나게 된다(109).   


[…] 어떤 손안의 것의 빔(결여)도 일종의 둘러봄에서 발견된 지시연관의 단절이다. 둘러봄은 허공에 부딪치고 이제야 비로소 비는 것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손안에 있었던 지를 보게 된다. […] 둘러봄이 언제나 존재자를 다루는 한, 둘러봄에게 접근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둘러봄에 그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져 있다(109).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빛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도대체 열어 밝혀져 있어야 한다. 둘러보는 배려에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이 접근 가능해짐과 더불어 그때마다 이미 세계가 앞서 열어밝혀져 있다. 다라서 세계는 현존재가 존재자로서 각기 이미 “그 안에” 있었던 그런 어떤 것이며, 현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분명하게 도달함에서 그리에로 언제나 되돌아갈 수 있는 그런 어떤 것이다(110).


제17절 지시와 기호


[…] 다중적인 의미로 “지시들”이 발견될 수 있는 그러한 도구의 하나를 존재론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한다. 그러한 “도구”를 우리는 기호에서 발견한다(111). 기호는 우선 그 자체 도구이며, 이 도구의 특별한 도구성격은 가리킴에 성립하고 있다(112). 지시함은 하나의 연관지음이다(112). 모든 지시는 다 연관이다. 그러나 모든 연관이 다 지시는 아니다. 모든 “가리킴”은 다 지시이다. 그러나 모든 지시함이 다 가리킴은 아니다(가리킴<지시<연관)(112).


최근 승용차에 회전식의 붉은 화살이 장치되어 있는데, […] 이러한 기호는 단지 운전자의 배려함(조종함) 속에서만 손 안에 있는 그런 도구가 아니다. 함께 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그 도구를 보고 대응되는 쪽으로 피하거나 멈춰 서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이러한 기호는 교통수단과 교통통제라는 도구연관의 전체 안에 세계내부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이다(113).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가리킴으로서의 이러한 “지시함”이 도구로서의 기호의 존재론적인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리킴으로서의 “지시함”은 오히려 도구의 존재구조에, 즉 ‘……을 위한 쓰임새’에 근거하고 있다. 이 쓰임새가 하나의 존재자를 벌써 기호로 만드느 것은 아니다. “망치”라는 도구도 쓰임새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지만, 그로써 망치가 기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리킴이라는 “지시”는 하나의 쓰임새의 “그것을 위해서”를 존재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며 하나의 도구를 이 도구로 규정한다(가리킴은 특정 도구가 지닌 다양한 쓰임새 중 현존재가 처한 상황에 부합하는 하나의 쓰임새를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113).


기호의 가리킴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대답은 오직 우리가 지시도구와의 적합한 왕래 양식을 규정할 때에만 획득될 수 있다. 만나게 되는 기호에 상응하는 행동 관계(존재)는 그 화살을 달고 다가오는 자동차를 보고 “피하거나” 또는 “멈춰 서는” 것이다(114).


기호는, […] 오히려 하나의 도구 전체를 두드러지게 둘러봄 안으로 부각시켜서 그와 동시에 손안의 것의 세계적합성이 자신을 알려오게 하는 하나의 도구이다(115). 기호의 독특한 도구 성격은 “기호 설정”에서 특히 명확해진다. 기호 설정은 어느 때나 하나의 손안의 것을 통해서 그때마다의 주위 세계가 둘러봄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손안에 있는 가능성을 필요로 하는 그런 어떤 둘러보는 앞서 봄 안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수행된다(115).  


기호는 또한 이미 손안에 있는 것을 기호로 취하면서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양태에서 기호 설정은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를 드러내준다. 가리킴에서 단지 하나의 손안에 있는 도구 전체와 주위 세계 이반이 둘러보며 방향 잡아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마련될 뿐 아니라, 기호 설정이 심지어 맨 처음으로 발견할 수도 있다(116).   


사람들은 여기에서도 다시금 둘러보는 가운데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손안의 것의 도구 성격을, 단지 그저 눈앞에 있기만 한 것의 파악을 위해서 앞서 주어져 있는 순전한 사물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116).


기호와 지시의 관련은 다음과 같이 삼중이다.

1.     가리킴은 사용 용도[쓰임새]의 ‘그것을 위하여’의 가능한 구체화로서 도구구조 자체에, 즉 ‘하기 위한(지시)에 터하고 있다.

2.     기호의 가리킴은 하나의 손안의 것으 도구성격으로서 하나의 도구 전체성 안에, 하나의 지시의 연관 안에 속한다.

3.     기호는 다른 도구들과 함께 손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손안에 있음 안에서 주위 세계가 그때마다의 둘러봄에 두드러지게 접근 가능해진다. 기호는 하나의 존재적 손안의 것이며, 이러

한 특정의 도구로서 동시에 손안에 있음, 지시 전체성 그리고 세계성의 존재론적 구조를 게시하는 어떤 것으로서 기능한다. 바로 그 안에 이러한 손안의 것이 둘러보며 배려하는 주위 세계 내부에서 가지는 우월함이 뿌리를 박고 있다(118).


제 18절 사용 사태와 유의미성. 세계의 세계성


손안의 것은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된다. 세계는 모든 손안의 것 안에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다. 세계는 모든 만나게 되는 것과 함께—비록 비주제적이기는 하지만—선행적으로 이미 발견되어 있다(119).


도구 구성틀로서의 쓰임새(지시)는 한 존재자의 적합성도 아니며, 오히려 한 존재자가 적합성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는 데에 대한 존재적인 가능 조건이다. 그렇다면 지시란 무엇을 말한다는 말인가? 손안의 것의 존재는 지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것 자체에서 지시되고 있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어디에 사용하는 그것의 사용성을 지니고 있다. 손안의 것의 존재 성격은 사용사태이다. “어떤 것을 가지고 어디에”라는 연관이 지시라는 용어로써 제시되어야 한다(120).


사용사태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이며, 이 존재자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우선 그리로 자유롭게 주어져 있다. 그 존재자가 ‘거기에’ 사용사태를 가지고 있는 그 ‘어디에(Wobei)’가 쓰임새의 ‘그것을 위하여’이며 유용성의 ‘거기에’이다. 존재자는 쓰임새의 ‘그것을 위하여(Wofur)’와 함께 다시금 자신의 사용사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120).


예를 들면 망치는 이 손안의 것—그래서 망치라고 불리는 것—을 가지고 망치질하는 데에 자신의 사용사태를 가지는데, 망치질함은 무엇인가를 고정하는 데에 자신의 사용사태를 가지며, 고정함은 폭풍우를 방비하는 데에 자신의 사용사태를 가진다. 이 방비라는 것은 현존재가 그 안으로 피난하기 위함 때문에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현존재의 존재의 한 가능성 때문에 있는 것이다. 하나의 손안의 것이 어떤 사용사태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그때마다 사용사태 전체성에서부터 앞서 윤곽지어진다(120).


손안의 것을 만나고 그리고 이때 현존재가 그렇게 만나는 존재자와의 존재적 왕래에서 그것을 존재적인 의미로 사용케 할 수 있는 가능조건이다(122). 이 사용사태로 자유롭게 내어주는 각기-이미-사용케-해왔음이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선험적 완료이다.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사용케 함이란 존재자를 그것의 주우세계내부적인 손안에 있음에로 선행적으로 자유롭게 내어줌이다(122).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우선 그리로 자유롭게 되는 그것[지평]이 선행적으로 열어밝혀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의 존재에는 존재 이해가 속한다. 이해는 자신의 존재를 이해함 속에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 대해서 현존재는 존재자로서 언제나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123).


사용사태라는 존재양식 안에서 존재자를 만나게끔 하는 ‘그리로’이자 자신을 지시하는 이해함의 ‘그곳’이 세계라는 현상이다. 그리고 현존재가 자신을 그리로 지시하고 있는 그것의 구조가 곧 세계의 세계성을 구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124).


현존재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그 안에서 각기 이미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그곳과 근원적으로 친숙하다. 그리고 이 세계친숙성 자체는 또한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함께 형성하고 있다(124).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존재와 존재가능을 자신의 세계-내-존재와 관련하여 이해하도록 해준다. 이 의미부여 속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에게 선행적으로 자신의 세계-내-존재를 이해할 것으로 내준다. 이러한 의미 부여의 연관의 전체를 우리는 ‘유의미성’이라고 칭한다(125).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사용 사태의 존재양식(손안에 있음) 안에서 만나게 되며 그렇게 자신을 그것의 자체로 있음에서 알려올 수 있는 그런 존재자가 발견될 수 있는 존재적 가능 조건은 유의미성과의 친숙함 속에 있는 현존재이다(125).


열어 밝혀진 ‘유의미성’은 현존재의, 즉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로서 하나의 사용사태전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존재적 가능조건이다(126).


나.   데카르트의 세계 해석에 대비하여 세계성의 분석을 구별 부각시킴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본규정을 엑스텐시오(extensio), 즉 연장에서 보고 있다.


제19절 연장된 사물로서의 “세계”에 대한 규정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사물로서의 “에고 코기토(ego cogito, 나는 사유한다)”를 “물체적인 사물(res corporea)”과 구별한다. 이 구별이 그 이후 “자연과 정신”의 구별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한다(128).


실체들은 그것들의 “속성”에 있어 접근이 가능하며, 개개의 실체는 하나의 탁월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고유성에서 한 특정한 실체의 실체성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다(129). […] 길이, 폭, 깊이에 따른 연장이 우리가 “세계”라고 이름하고 있는 물질적인 실체의 본래적인 존재를 형성하고 있다(129).


“하나의 동일한 물체가 그것이 전에 가졌던 동일한 양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상이한 방식으로 연장될 수 있다(129).

[…] 물체적 사물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연장이며, 그것은 온갖 방식으로 나뉘고 형성될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분할 가능성, 형성 가능성, 운동 등의 온갖 방식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이며, 각종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견지하며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체사물에서 그러한 지속적인 머무름을 만족시키고 있는 그것이 그 물체사물에서의 본래적인 존재자이며, 그래서 이 실체의 실체성도 그것에 의해서 성격 규정된다(131).


제20절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규정의 기초


“전적으로 어떠한 다른 사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실체로 오직 하나의 유일한 실체를 생각할 수 있으니, 곧 신이다”(132). “모든 다른 것들은 오직 신의 도움으로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통찰하고 있다. 신이 아닌 모든 다른 존재자들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제작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신이 아닌 모든 존재자는 다 창조된 존재자들이다. 이 존재자는 분명히 신과 비교해볼 대 제작 및 유지를 필요로 한다(132).


“신은 존재한다”와 “세계는 존재한다”라는 발언에서 우리는 존재를 밖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두 존재자 사이에는 일종의 무한한 차이가 존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은 “존재”라는 낱말의 긍정적인 의미를 “유비적”의미로 파악하여 일의적 의미 또는 단지 이름만 같은 의미와 구별하고 있다(133).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연구하는 데에서 스콜라 철학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