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이디푸스 세미나 2020.2.21./김정인】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성가족(聖家族)
5. 소비의 접합 종합
접합 종합의 두 가지 사용 – 분리차별적·일대일대응적 사용, 유목적·다의적 사용
기관없는 신체와 강도
- 접합 종합 : 기관 없는 신체=알 : 축선이 가로지르고, 여러 지대가 띠를 두르고, 마당 또는 장(場)이 자리 잡고, 구배로 측정되며 퍼텐셜이 주파하고 문턱으로 표시되는 알
- 분열증의 생화학[알의 본성 및 장-구배-문턱의 분포를 규명]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의 관계, 이를 통해 주체는 기관없는 신체 위를 지나가고 되기, 추락과 상승, 이주와 이동을 수행
- 분열증의 과정은 통과의례의 여행(by R. Laing)
: 안(내적 여행)과 밖(외적 여행)에서 모두 유목적 주체가 통과하는 순수 강도만 빛남=강도량의 소비로서의 감정과 느낌은, 뒤따르는 환각과 착란의 질료를 형성
∴강도적 감정, 즉 정동은 망상과 착각의 공통 뿌리이자 분화 원리→모든 것은 강렬한 되기, 이행, 이주 속에 뒤섞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든 표류 : 나는..........이다(라고 느낀다)
-“강도”에서 모든 것이 뒤섞임, 공간과 형식은 강도적 차원을 위해 해체된 상태
여행, 이행 – 나는 ...이 된다.
-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처음 배분되는 것은 인종, 문화, 신
- 기관 없는 신체의 부위는 인종과 문화를 <나타내지> 않음. 인종과 문화는 신체 위의 부위들 즉, 강도의 지대들, 퍼텐셜의 장들을 지칭하며 이 ‘장’에서 개체화, 성별화 현상이 생산
- 한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가려면 문턱을 넘어야 함 : 이주, 개체화, 성별화, 싸움, 파괴 등 잔혹극이 벌어짐
- 개체화 : ① 강도적 진동에 의해 명백하게 정의된 힘의 장에서만 일어나며, 이 장은 인물을 오직 욕망하는 기계의 유도 기관 내지 부품으로서만 살아 움직이게 함. ② 힘의 복합체 속에서 일어남, 힘의 복합체는 사람/개인을 한 명의 <죄인> 속에 구현된 그 수만큼의 강도적 상태로 규정하며 가족과 자아의 거짓 통일을 파괴함으로써 끊임없이 문턱을 넘음.
- 강도량 생산 속에는 인종, 민족, 사람/개인을 부위·문턱·효과와 동일시하는 고유명사가 있음. 고유명사는 재현의 관점이 아니라 <효과>의 등급과 관련됨. 효과는 원인의 부속물이 아니라 영역(분야)의 충족이자 기호 체계의 실행임.
모든 망상은 사회적・역사적・정치적이다
- 분열자는 실재가 생산되었고, 생산되고, 생산될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해 분할 불가능하고 분해 불가능한 거리[독신기계가 있는 사막=기관없는 신체]를 조망, 여기서 실재는 강도량 속에 거리를 함축하고 있는 생산물임.
- 분열자에게 원리가 없음. 다른 것임으로써만 어떤 것. e.g. 그는 ‘Worm’여야만 ‘Mahood’이고, ‘그 아무개’여야만 ‘Worm’이다.
- 분열자의 이중산책 : 분해할 수 없는 거리를 따라가는 외적인 지리적 여행/이 거리를 함축하는 강도를 따라가는 내적인 역사적 여행
e.g. 콜럼버스는 춤추는 창녀시늉을 하는 (사이비) 제독을 시늉함으로써만 자기 배의 승무원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제독이 됨.
: 시늉=동일시=형식을 바꿈으로써 서로 안에서 분할되는 강도 속에 늘 함축되어 있는 분해 불가능한 거리
: 동일시=명명, 지칭/시늉=명명에 상응하는 실재에 직접 쓴 놀랄 만큼 다의적인 글로 실재를 그것의 원리 밖으로 가져감. ①욕망 기계에 의해 실효적으로 생산되는/②복사물이 복사물이기를 그치고 실재계가 그것의 인공물이 되는/③더 많은 실재성을 캐내고 편집증적 고통과 독신의 영광의 보물을 형성하는 지점까지 가져감. but 강도적 실재는 자연과 역사의 공외연 속에서 생산되는 그대로 파악할 것
- 분열자는 현실의 고동 치는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실재계의 생산과 뒤섞이는 강렬한 지점에 있음
e.g.[루이17세와 거짓 수수께끼] 왕위 계승권자 리슈몽의 경우 : 분리 선택 그물망 속 특이성의 계열, 접합 조직의 강도 상태의 계열, 모든 원 위의 전위적[轉位,옮겨 다니는] 주체만이 존재→ 접합 종합 : ‘따라서 왕은 나다! 따라서 왕국은 나의 것이다! 하지만, 이 나는 원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 진폭에서 결론으로 도출되는 잔여적 주체일 따름이다.’
인종
- 모든 착란은 세계사적・정치적・인종적 내용을 갖고 있음, 인종, 문화, 대륙, 왕국을 끌고 표류함→ 가족과의 단절!, 분열자에게는 가족 밖에서 문제가 제기됨.
- 슈레버의 변신과 이행 :(독일인으로서의 선민사상 ↔ 유대인, 가톨릭교도, 슬라브인) 문하생-되기, 시장-되기, 소녀-되기, 몽골인-되기→ 모든 편집광적 망상은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더미를 뒤적거림/파헤침,
- 파시스트는 단순한 편집광이라고 결론을 내릴 경우, 현재 상황에서 그것은 착란의 역사적・정치적 내용을 내적인 가족 규정으로 다시 데려갈 것임. 프로이트가 행한 분석에서는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에서 짓이겨지고, 가루가 되고, 삼각형화가 이루어짐.
동일시가 의미하는 것
- 편집증적 망상에 대한 보고(by 모 마노니): 환자 자신이 표명하는 인종주의적, 정치적, 형이상학적 주제를 위해 가족 관계가 폭파되는 것은 모태로서의 가족 구조 안에 기원을 가짐 → 과학적으로 규정해야 할, 그리고 역사에 종종 출몰하는 그 이름은 단지 아버지의 이름일 뿐,
- 라캉의 배제 개념을 이용한 강제 오이디푸스화 : 역사적-정치적 테마 전체는 오이디푸스 혹은 오이디푸스화되기 위해 환자에 필요한 것에 의존하는 일련의 상상적 동일시로 해석됨.
∴분열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기 때문에 동일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음, 그는 모두가 강요하는,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오이디푸스화(정신분석 이전의 사회적 억압)에 병든 것임.
정신분석은 사회-정치적 내용들을 어떻게 제압할까
-분열증적 알의 역사≒생물학적 알의 역사
: 생물학의 알의 역사 : <형성체>가 알의 발달과 분화에 있어 부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인식→ 후에는 자극은 조직자[형성체]가 아니라 단순한 유도자라 인식
- 정신분석 : 가족주의에 함몰되어 일반화, 부모를 무의식 속의 가장 적절한 자리 즉, 유도자 자리에 놓음. 조직자의 역할은 가족과 가족의 오이디푸스적 모태의 요소인 상징적 또는 구조적 요소에 부여함→ 가족을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수단을 발견했을 뿐.
고질적인 가족주의
- 정신분석의 치료 불가능한 가족주의 :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안에 넣고, 양쪽에서 동여매고, 욕망적 생산을 으스러뜨리고, 환자에게 아빠-엄마라고 답하게 하고 언제나 아빠-엄마를 소비하게 함.
- 19세기 수용소 정신의학의 실행 계획(by 푸코) : ①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에 용접하고 <가족의 반(半) 현실적, 반(半) 상상적 변증법에 묶기> ② 부르주아 사회와 그 가치의 큰 집단적 구조, 즉 가족과 아이들, 잘못과 징벌, 광기와 무질서가 상징화되는 소우주를 구성하기 ③ 탈소외도 소외와 같이 양 끝에 오이디푸스가 있는 길을 통과하게 하고 아버지이자 재판관, 가족이자 법으로서의 의사의 도덕적 권한을 정초하기. ④ <정신병자는 자기 의사의 실물 속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반면, 의사는 정신병의 현실을 광기라는 위험한 개념에 흩뜨린다.>라는 패러독스에 도달하기.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 ① 병을 환자 내부의 가족 콤플렉스 안에 포함시키고, 그 다음엔 이 가족 콤플렉스 자체를 전이 또는 환자-의사 관계 안에 포함시켜서, 가족을 어떤 점에서는 강도적으로 사용(←무의식 안에 있는 강도량의 본성을 왜곡 but 강도 생산의 일반적 원리를 부분적으로 존중) ② 다시 정신병과 대면하면서 가족은 외연적으로 다시 펼쳐졌고, 그 자체로 소외와 탈소외의 힘의 gradimetre로 간주됨 → 가족의 외연적 질서에서 오이디푸스가 지배하게 만들어, 오이디푸스를 재활성화함.
- 이 질서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삼각형을 타인의 삼각형과 어떻게든 조합했고 확대가족 전체를 구조화하고 분화시키는 <건강한> 삼각형화의 극과 미분화된 것 속에서 용해를 수행하는 도착적 삼각형의 형식이라는 극 사이에서 동요.
가족과 사회적 장
- 정신병 가족의 변이형(by 자크 오슈망) : ① 융합 가족-가족과 가족 아닌 사이에만 분화 존재 ② 분열 가족- 가족 안에 블록, 파벌, 동맹을 설립 ③ 관(管)형 가족 – 각 구성원이 다른 삼각형과 맞물려 있는 자신의 삼각형을 갖고 있음. ④ 배제형 가족 – 한 가족 구성원 안에 포함된 동시에 축출된 채 존재[배제는 여러 세대, 적어도 삼대가 정신병자의 생산 조건을 형성하는 가족의 외연적 틀 속에서 기능]
: 소외와 탈소외의 고유한 역량을 받아들이는 외연적 가족주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정신분석의 기본 입장의 포기를 초래
- 공동체 정신의학/가족 정신요법 : 요양소 생활을 실제로 중단시키나, 모든 전제를 간직하며 19세기 정신의학을 부활시킴. <가족에서 병원제도로, 병원 제도에서 가족제도로 (…) 치료를 가족에게 돌려주라!>
- 진보주의적・혁명적 정신의학 : 외연적 가족주의의 위험 존속, 구조적 오이디푸스 틀(신성한 삼위일체)로 꺾일 위험. 정치적, 문화적, 세계사적, 인종적 내용은 오이디푸스의 맷돌 속에 으깨져 있음, 가족을 모태로, 소우주, 표현적 환경을 다룸
- 반정신의학 :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소외의 본성의 동일성을 상정, 핵심테제가 가족주의 반박이 아니라 유지임, 소우주-가족, grandimetre-가족이 사회적 소외를 표현하는 한, 그것은 구성원 또는 정신병에 걸린 가족 구성원의 정신 속에 정신적 소외를 <조직한다>고 여겨지기 때문
- 가족-사회 관계 :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없음. 오이디푸스는 열린 사회적 장에 늘 열려 있음.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장 곳곳에서 사방으로 열려 있음(3+1도 아니고 4+n).
- 전쟁의 외상, 식민 상태, 극도의 사회적 비참 등의 한계상황은 오이디푸스를 구축하는데 좋지 않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계상황은 정신병의 발달 혹은 폭발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줌.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투자
- 혁명가는 “오이디푸스, 알게 뭐야”라고 맨 먼저 말할 수 있는 사람.
- 가족≠소우주 :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각난 채 존재함, 아버지, 어머니, 나는 역사적・정치적 상황의 요소와 얽혀 있고 직접 통해 있음. 역사적・정치적 상황은 모든 삼각형화를 깨부수고, 상황 전체가 가족 콤플렉스 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 안에 내면화되지 못하게 막음. 가족은 본성상 중심축을 떠나있고, 탈중심화되어 있음. 가족은 가족적이지 않는 절단들로 절단됨, 역사적 사건들은 오이디푸스보다 더 유효한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형성함.
-희랍 연구가도 오이디푸스에 있어 정치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나 리비도와는 관련 없다고 주장↔오이디푸스의 분리된 요소들을 통해, 그리고 바로 이 요소들이 표현적인 자율적 정신 구조를 형성하지 않는 한에서, 리비도가 투자하는 것은 가족 외의, 가족 아래의 절단, 즉 욕망하는 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생산의 형식임.
- 분열-분석=정치적・사회적 정신분석=전투적 정신분석, 역사적인 사회적 생산의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의 실존을 보여주고자 함.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언제나 인공적・억압적이고 가족에 의해 매개되고 억압된 오이디푸스적인 표현적 무의식을 해체하려 함.
- 리비도 : 여러 무의식적 형식으로 사회적 장에 투자하고, 그럼으로써 전 역사를 환각하고 문명과 대륙과 인종을 망상하고, 세계적으로 되기를 강렬하게 <느끼는> 것.
- 가족은 자극이자 유도자임, 조직자도 탈조직자도 아님. 반응은 언제나 다른 데서 옴. 오이디푸스 정신분석도 부모의 이미지가 일으키는 자극이 반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걸 인정, 하지만 반응을 생산의 무의식적 체계 속에서 해석하는 대신 가족적인 표현적 상징주의로부터 이해하고자 함.
어린 시절부터
- <적어도 처음에는…>이다. : 무의식이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뒤섞여 있는 가족관계 및 성좌 속에서 표현된 것인 바, 사회적・형이상학적 관계는 피안처럼 그 다음에 출현하지만, 결국은 그것도 오이디푸스의 틀로 해석될 것임 → 신경증의 유아기적 요인과 현실적 요인의 비교 역할에 대한 논의를 보더라도 현실적 요인이 차후의 형태로 생각되는 한, 모든 것은 오이디푸스 쪽으로 꺾임.
- but 현실적 요인은 어린 시절부터 있고, 그것이 가족 안에 도입하는 단절 및 연결과 관련해서 리비도 투자를 결정함. 가족 구성원의 머리 위, 또는 아래에서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어린이의 경험을 통해 본성의 동일성과 체제의 차이를 겪음.
- 자율적이거나 표현적이거나 의미작용적인 가족 질서에 붙잡혀 있는 아이는 발견되지 않음. 언제나 현실의 욕망하는 생산에 붙잡혀 있음. 이 생산에서 부모는 욕망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직접 관련 짓는 흐름 속에서 부분대상, 증인, 보고자, 에이전트 역할을 함.
- 아무 것도 전-오이디푸스적이지 않고, 생산 질서 차원에서 모든 것은 무오이디푸스적이고 비-오디푸스적인 적임/무오이디푸스적인 것, 즉 오이디푸스와는 다른 체제와 차원에서 종합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 그것은 고아-무의식, 놀이꾼 무의식, 사색적이고 사회적인 무의식의 자동 생산에 자양분을 생산.
정신분석의 셋째 오류추리-일대일대응적 <적용>으로서의 오이디푸스
- 오이디푸스 조작=적용/응용 : 사회적 생산・재생산・반생산의 에이전트 대 자연적인 가족적 재생산 에이전트 사이의 일대일대응 관계를 수립하는 것, 적용은 모든 것이 식탁보의 네 귀퉁이가 셋(3+1)으로 접히는 것처럼 진행되는데, 여기서 집단적 에이전트는 부모 형상의 파생물 혹은 대체물로 해석됨.
- but 접합 종합의 잘못된 사용이 발생 : <그것은 네 아버지였어. 따라서 그것은 네 어머니였어.…>, 그리고 분절 사이의 상징적 관계를 위해 다의적 실재계의 으깨짐을 나타내는 공식인 <따라서 이것이 뜻한 것은 그것이었다>가 등장
: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로 다시 데려온 만큼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에서 출발하게 함. 역사적 또는 선사적 기원으로건 구조적 기초로서이건, 단지 외견상으로만 오이디푸스는 처음(←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처음!)
-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그리고 단지 사회구성체에 의해 구성된 정의역에 대한 공역 → 정의역에는 사회적 형성물이 존재, 공역에는 아빠, 엄마, 나만 존재
-욕망 생산과 오이디푸스 모두 “끝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
① 욕망적 생산은 자본주의 형성체에서 언제나 저지되는 사회적 생산의 한계[탈영토화된 사회체의 한계에 있는 기관없는 신체, 도시의 관문에 있는 사막], 욕망의 몰적 조직화와 욕망의 분자적 다양체 사이의 한계[탈영토화의 한계].
② 오이디푸스는 한계를 옮겨 내부화함. 군집성의 도구인 오이디푸스는 유럽인의 순응적이고 사적인 최후의 영토성임
역사에서의 정신분석의 수치(羞恥)
- 위인과 군중의 등장 :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된 위인=오이디푸스적 갈등에 대한 독창적 해법을 찾아냄↔집단적 이미지에 의해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된 군중
- 정신분석가는 ① 자신은 특정한 종류의 원인에만 관심을 두며 <다른> 원인도 고려해야 하지만 자기가 모든 걸 할 수 없다고 주장 ② 시대적 제도를 고려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합하는, 위인과 군중의 행동 속에서 분리되어 다르게 재편되는 새로운 종류의 부모 이미지를 보기 위한 것임. ③ 역사적-정치적 적용을 스스로 금하고는 환원 불가능한 <참을 수 없는 진실>의 장소로 제시된 거세라는 바위에 틀어박힘.④ 분석 활동을 소우주 속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리비도에 의한 사회적 장의 직접 투자를 단순한 오이디푸스의 상상적 부속물로 다룸
# 정신분석의 외침 : “사회 또한 삼각형적이고 상징적임을 잊지 않는 우리 분석가들의 독창성을! 거세는 우리를 정치적인 것과 분리시키는 것이요, 우리의 독창성을 이루는 것이다!”
분리차별과 유목
-오이디푸스가 복귀 내지 적용에 의해 얻어진다는 게 사실이라면 진정한 유형의 사회적 장의 형성과 리비도 투자와 생산을 전제로 해야 함. 예속 집단, 즉 기성질서가 억압적 형식으로 투자되는 곳에서 번성함. 오이디푸스적 적용은 정의역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과, 이 규정의 리비도 투자에 의존
→무의식의 접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이 존재함, 우리 고장에 고유하다, 우등 인종에 속한다 등의 감정/느낌을 구성, 이 사용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무기이나 계급 구분과 일치하지 않음[오이디푸스는 민족주의적・종교적・인종주의적 감정에 의존]
- 사회적 장이 거대한 시원성을 전제함으로써만 가족 유대로 방향을 꺾는다는 점에서 분리차별적 사용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조건임. ‘나는 당신들과 하나다…’
-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체가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에 명백히 반대 방향으로 갈 때, 그들이 싸워야만하는 계급의 이해관계와 이상에 동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무지와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임,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
→ 전의식적 투자는 대립하는 계급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해지거나 행해져야 함. but 무의식적 투자는 욕망의 위치와 종합의 사용에 따라 행해짐. 또한 절단과 분리차별을 이해관계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 투자되는 사회적 장 속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을 확고히 함.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의 형식은 경제・금융 메커니즘, 정치 형성체 등과 함께, 욕망하는 주체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전체 또는 부분을 욕망될 수 있음.
: 경제적 사회적 복합체에서 이데올로기, 오이디푸스, 남근은 할 일이 없음. 흐름들, 재고들, 흐름들의 절단과 변동의 문제이기 때문. 욕망은 무엇인가가 흐르고 흘러 지나가는 곳 어디에나 있으면서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만이 아니라 취해 있거나 잠든 주체도 죽음의 하구로 끌고 감.
-분열-분석의 목적 :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투자의 종별적 본성을 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안에서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도록 결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 모든 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일어남.
- 파시스트적 또는 반동적 유형의 무의식적 투자는 의식적인 혁명적 투자와 공존/혁명적 투자는 욕망의 층위에서 의식적 이해관계가 부합하는 반동적 투자와 (드물지만) 공존 가능.
① 무의식적인 반동적 투자 :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그러나 욕망의 견지에서 오이디푸스가 파생되어 나오는 접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에 의해 진행됨.
② 무의식적인 혁명적 투자 : 욕망이 여전히 자기의 고유한 상태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재절단하고 모든 분리차별과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을 동시에 깨뜨릴 수 있는 흐름,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을 망상하고 대륙을 불태울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는 투자
∴접합 종합의 유목적・다의적 사용과 분리차별적・일대일대응적 사용은 대립함.
- 망상/착란은 인종주의적 극과 인종적 극/분리차별적-편집증적 극과 유목적-분열증적 극을 갖고 있음. 이 양극 사이에 많은 불확실한 미묘한 미끄러짐이 있음. 무의식 자체가 반동적 부화와 혁명적 잠재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미끄러짐.
【안티-오이디푸스 세미나 2020.2.21./김정인】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성가족(聖家族)
5. 소비의 접합 종합
접합 종합의 두 가지 사용 – 분리차별적·일대일대응적 사용, 유목적·다의적 사용
기관없는 신체와 강도
- 접합 종합 : 기관 없는 신체=알 : 축선이 가로지르고, 여러 지대가 띠를 두르고, 마당 또는 장(場)이 자리 잡고, 구배로 측정되며 퍼텐셜이 주파하고 문턱으로 표시되는 알
- 분열증의 생화학[알의 본성 및 장-구배-문턱의 분포를 규명]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의 관계, 이를 통해 주체는 기관없는 신체 위를 지나가고 되기, 추락과 상승, 이주와 이동을 수행
- 분열증의 과정은 통과의례의 여행(by R. Laing)
: 안(내적 여행)과 밖(외적 여행)에서 모두 유목적 주체가 통과하는 순수 강도만 빛남=강도량의 소비로서의 감정과 느낌은, 뒤따르는 환각과 착란의 질료를 형성
∴강도적 감정, 즉 정동은 망상과 착각의 공통 뿌리이자 분화 원리→모든 것은 강렬한 되기, 이행, 이주 속에 뒤섞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든 표류 : 나는..........이다(라고 느낀다)
-“강도”에서 모든 것이 뒤섞임, 공간과 형식은 강도적 차원을 위해 해체된 상태
여행, 이행 – 나는 ...이 된다.
- 기관 없는 신체 위에 처음 배분되는 것은 인종, 문화, 신
- 기관 없는 신체의 부위는 인종과 문화를 <나타내지> 않음. 인종과 문화는 신체 위의 부위들 즉, 강도의 지대들, 퍼텐셜의 장들을 지칭하며 이 ‘장’에서 개체화, 성별화 현상이 생산
- 한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가려면 문턱을 넘어야 함 : 이주, 개체화, 성별화, 싸움, 파괴 등 잔혹극이 벌어짐
- 개체화 : ① 강도적 진동에 의해 명백하게 정의된 힘의 장에서만 일어나며, 이 장은 인물을 오직 욕망하는 기계의 유도 기관 내지 부품으로서만 살아 움직이게 함. ② 힘의 복합체 속에서 일어남, 힘의 복합체는 사람/개인을 한 명의 <죄인> 속에 구현된 그 수만큼의 강도적 상태로 규정하며 가족과 자아의 거짓 통일을 파괴함으로써 끊임없이 문턱을 넘음.
- 강도량 생산 속에는 인종, 민족, 사람/개인을 부위·문턱·효과와 동일시하는 고유명사가 있음. 고유명사는 재현의 관점이 아니라 <효과>의 등급과 관련됨. 효과는 원인의 부속물이 아니라 영역(분야)의 충족이자 기호 체계의 실행임.
모든 망상은 사회적・역사적・정치적이다
- 분열자는 실재가 생산되었고, 생산되고, 생산될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해 분할 불가능하고 분해 불가능한 거리[독신기계가 있는 사막=기관없는 신체]를 조망, 여기서 실재는 강도량 속에 거리를 함축하고 있는 생산물임.
- 분열자에게 원리가 없음. 다른 것임으로써만 어떤 것. e.g. 그는 ‘Worm’여야만 ‘Mahood’이고, ‘그 아무개’여야만 ‘Worm’이다.
- 분열자의 이중산책 : 분해할 수 없는 거리를 따라가는 외적인 지리적 여행/이 거리를 함축하는 강도를 따라가는 내적인 역사적 여행
e.g. 콜럼버스는 춤추는 창녀시늉을 하는 (사이비) 제독을 시늉함으로써만 자기 배의 승무원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제독이 됨.
: 시늉=동일시=형식을 바꿈으로써 서로 안에서 분할되는 강도 속에 늘 함축되어 있는 분해 불가능한 거리
: 동일시=명명, 지칭/시늉=명명에 상응하는 실재에 직접 쓴 놀랄 만큼 다의적인 글로 실재를 그것의 원리 밖으로 가져감. ①욕망 기계에 의해 실효적으로 생산되는/②복사물이 복사물이기를 그치고 실재계가 그것의 인공물이 되는/③더 많은 실재성을 캐내고 편집증적 고통과 독신의 영광의 보물을 형성하는 지점까지 가져감. but 강도적 실재는 자연과 역사의 공외연 속에서 생산되는 그대로 파악할 것
- 분열자는 현실의 고동 치는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실재계의 생산과 뒤섞이는 강렬한 지점에 있음
e.g.[루이17세와 거짓 수수께끼] 왕위 계승권자 리슈몽의 경우 : 분리 선택 그물망 속 특이성의 계열, 접합 조직의 강도 상태의 계열, 모든 원 위의 전위적[轉位,옮겨 다니는] 주체만이 존재→ 접합 종합 : ‘따라서 왕은 나다! 따라서 왕국은 나의 것이다! 하지만, 이 나는 원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 진폭에서 결론으로 도출되는 잔여적 주체일 따름이다.’
인종
- 모든 착란은 세계사적・정치적・인종적 내용을 갖고 있음, 인종, 문화, 대륙, 왕국을 끌고 표류함→ 가족과의 단절!, 분열자에게는 가족 밖에서 문제가 제기됨.
- 슈레버의 변신과 이행 :(독일인으로서의 선민사상 ↔ 유대인, 가톨릭교도, 슬라브인) 문하생-되기, 시장-되기, 소녀-되기, 몽골인-되기→ 모든 편집광적 망상은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더미를 뒤적거림/파헤침,
- 파시스트는 단순한 편집광이라고 결론을 내릴 경우, 현재 상황에서 그것은 착란의 역사적・정치적 내용을 내적인 가족 규정으로 다시 데려갈 것임. 프로이트가 행한 분석에서는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에서 짓이겨지고, 가루가 되고, 삼각형화가 이루어짐.
동일시가 의미하는 것
- 편집증적 망상에 대한 보고(by 모 마노니): 환자 자신이 표명하는 인종주의적, 정치적, 형이상학적 주제를 위해 가족 관계가 폭파되는 것은 모태로서의 가족 구조 안에 기원을 가짐 → 과학적으로 규정해야 할, 그리고 역사에 종종 출몰하는 그 이름은 단지 아버지의 이름일 뿐,
- 라캉의 배제 개념을 이용한 강제 오이디푸스화 : 역사적-정치적 테마 전체는 오이디푸스 혹은 오이디푸스화되기 위해 환자에 필요한 것에 의존하는 일련의 상상적 동일시로 해석됨.
∴분열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기 때문에 동일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음, 그는 모두가 강요하는,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오이디푸스화(정신분석 이전의 사회적 억압)에 병든 것임.
정신분석은 사회-정치적 내용들을 어떻게 제압할까
-분열증적 알의 역사≒생물학적 알의 역사
: 생물학의 알의 역사 : <형성체>가 알의 발달과 분화에 있어 부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인식→ 후에는 자극은 조직자[형성체]가 아니라 단순한 유도자라 인식
- 정신분석 : 가족주의에 함몰되어 일반화, 부모를 무의식 속의 가장 적절한 자리 즉, 유도자 자리에 놓음. 조직자의 역할은 가족과 가족의 오이디푸스적 모태의 요소인 상징적 또는 구조적 요소에 부여함→ 가족을 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수단을 발견했을 뿐.
고질적인 가족주의
- 정신분석의 치료 불가능한 가족주의 :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안에 넣고, 양쪽에서 동여매고, 욕망적 생산을 으스러뜨리고, 환자에게 아빠-엄마라고 답하게 하고 언제나 아빠-엄마를 소비하게 함.
- 19세기 수용소 정신의학의 실행 계획(by 푸코) : ①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에 용접하고 <가족의 반(半) 현실적, 반(半) 상상적 변증법에 묶기> ② 부르주아 사회와 그 가치의 큰 집단적 구조, 즉 가족과 아이들, 잘못과 징벌, 광기와 무질서가 상징화되는 소우주를 구성하기 ③ 탈소외도 소외와 같이 양 끝에 오이디푸스가 있는 길을 통과하게 하고 아버지이자 재판관, 가족이자 법으로서의 의사의 도덕적 권한을 정초하기. ④ <정신병자는 자기 의사의 실물 속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반면, 의사는 정신병의 현실을 광기라는 위험한 개념에 흩뜨린다.>라는 패러독스에 도달하기.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 ① 병을 환자 내부의 가족 콤플렉스 안에 포함시키고, 그 다음엔 이 가족 콤플렉스 자체를 전이 또는 환자-의사 관계 안에 포함시켜서, 가족을 어떤 점에서는 강도적으로 사용(←무의식 안에 있는 강도량의 본성을 왜곡 but 강도 생산의 일반적 원리를 부분적으로 존중) ② 다시 정신병과 대면하면서 가족은 외연적으로 다시 펼쳐졌고, 그 자체로 소외와 탈소외의 힘의 gradimetre로 간주됨 → 가족의 외연적 질서에서 오이디푸스가 지배하게 만들어, 오이디푸스를 재활성화함.
- 이 질서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삼각형을 타인의 삼각형과 어떻게든 조합했고 확대가족 전체를 구조화하고 분화시키는 <건강한> 삼각형화의 극과 미분화된 것 속에서 용해를 수행하는 도착적 삼각형의 형식이라는 극 사이에서 동요.
가족과 사회적 장
- 정신병 가족의 변이형(by 자크 오슈망) : ① 융합 가족-가족과 가족 아닌 사이에만 분화 존재 ② 분열 가족- 가족 안에 블록, 파벌, 동맹을 설립 ③ 관(管)형 가족 – 각 구성원이 다른 삼각형과 맞물려 있는 자신의 삼각형을 갖고 있음. ④ 배제형 가족 – 한 가족 구성원 안에 포함된 동시에 축출된 채 존재[배제는 여러 세대, 적어도 삼대가 정신병자의 생산 조건을 형성하는 가족의 외연적 틀 속에서 기능]
: 소외와 탈소외의 고유한 역량을 받아들이는 외연적 가족주의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정신분석의 기본 입장의 포기를 초래
- 공동체 정신의학/가족 정신요법 : 요양소 생활을 실제로 중단시키나, 모든 전제를 간직하며 19세기 정신의학을 부활시킴. <가족에서 병원제도로, 병원 제도에서 가족제도로 (…) 치료를 가족에게 돌려주라!>
- 진보주의적・혁명적 정신의학 : 외연적 가족주의의 위험 존속, 구조적 오이디푸스 틀(신성한 삼위일체)로 꺾일 위험. 정치적, 문화적, 세계사적, 인종적 내용은 오이디푸스의 맷돌 속에 으깨져 있음, 가족을 모태로, 소우주, 표현적 환경을 다룸
- 반정신의학 :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소외의 본성의 동일성을 상정, 핵심테제가 가족주의 반박이 아니라 유지임, 소우주-가족, grandimetre-가족이 사회적 소외를 표현하는 한, 그것은 구성원 또는 정신병에 걸린 가족 구성원의 정신 속에 정신적 소외를 <조직한다>고 여겨지기 때문
- 가족-사회 관계 :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없음. 오이디푸스는 열린 사회적 장에 늘 열려 있음.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장 곳곳에서 사방으로 열려 있음(3+1도 아니고 4+n).
- 전쟁의 외상, 식민 상태, 극도의 사회적 비참 등의 한계상황은 오이디푸스를 구축하는데 좋지 않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계상황은 정신병의 발달 혹은 폭발을 조장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줌.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투자
- 혁명가는 “오이디푸스, 알게 뭐야”라고 맨 먼저 말할 수 있는 사람.
- 가족≠소우주 :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각난 채 존재함, 아버지, 어머니, 나는 역사적・정치적 상황의 요소와 얽혀 있고 직접 통해 있음. 역사적・정치적 상황은 모든 삼각형화를 깨부수고, 상황 전체가 가족 콤플렉스 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 안에 내면화되지 못하게 막음. 가족은 본성상 중심축을 떠나있고, 탈중심화되어 있음. 가족은 가족적이지 않는 절단들로 절단됨, 역사적 사건들은 오이디푸스보다 더 유효한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형성함.
-희랍 연구가도 오이디푸스에 있어 정치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나 리비도와는 관련 없다고 주장↔오이디푸스의 분리된 요소들을 통해, 그리고 바로 이 요소들이 표현적인 자율적 정신 구조를 형성하지 않는 한에서, 리비도가 투자하는 것은 가족 외의, 가족 아래의 절단, 즉 욕망하는 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생산의 형식임.
- 분열-분석=정치적・사회적 정신분석=전투적 정신분석, 역사적인 사회적 생산의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의 실존을 보여주고자 함.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언제나 인공적・억압적이고 가족에 의해 매개되고 억압된 오이디푸스적인 표현적 무의식을 해체하려 함.
- 리비도 : 여러 무의식적 형식으로 사회적 장에 투자하고, 그럼으로써 전 역사를 환각하고 문명과 대륙과 인종을 망상하고, 세계적으로 되기를 강렬하게 <느끼는> 것.
- 가족은 자극이자 유도자임, 조직자도 탈조직자도 아님. 반응은 언제나 다른 데서 옴. 오이디푸스 정신분석도 부모의 이미지가 일으키는 자극이 반응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걸 인정, 하지만 반응을 생산의 무의식적 체계 속에서 해석하는 대신 가족적인 표현적 상징주의로부터 이해하고자 함.
어린 시절부터
- <적어도 처음에는…>이다. : 무의식이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뒤섞여 있는 가족관계 및 성좌 속에서 표현된 것인 바, 사회적・형이상학적 관계는 피안처럼 그 다음에 출현하지만, 결국은 그것도 오이디푸스의 틀로 해석될 것임 → 신경증의 유아기적 요인과 현실적 요인의 비교 역할에 대한 논의를 보더라도 현실적 요인이 차후의 형태로 생각되는 한, 모든 것은 오이디푸스 쪽으로 꺾임.
- but 현실적 요인은 어린 시절부터 있고, 그것이 가족 안에 도입하는 단절 및 연결과 관련해서 리비도 투자를 결정함. 가족 구성원의 머리 위, 또는 아래에서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어린이의 경험을 통해 본성의 동일성과 체제의 차이를 겪음.
- 자율적이거나 표현적이거나 의미작용적인 가족 질서에 붙잡혀 있는 아이는 발견되지 않음. 언제나 현실의 욕망하는 생산에 붙잡혀 있음. 이 생산에서 부모는 욕망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직접 관련 짓는 흐름 속에서 부분대상, 증인, 보고자, 에이전트 역할을 함.
- 아무 것도 전-오이디푸스적이지 않고, 생산 질서 차원에서 모든 것은 무오이디푸스적이고 비-오디푸스적인 적임/무오이디푸스적인 것, 즉 오이디푸스와는 다른 체제와 차원에서 종합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 그것은 고아-무의식, 놀이꾼 무의식, 사색적이고 사회적인 무의식의 자동 생산에 자양분을 생산.
정신분석의 셋째 오류추리-일대일대응적 <적용>으로서의 오이디푸스
- 오이디푸스 조작=적용/응용 : 사회적 생산・재생산・반생산의 에이전트 대 자연적인 가족적 재생산 에이전트 사이의 일대일대응 관계를 수립하는 것, 적용은 모든 것이 식탁보의 네 귀퉁이가 셋(3+1)으로 접히는 것처럼 진행되는데, 여기서 집단적 에이전트는 부모 형상의 파생물 혹은 대체물로 해석됨.
- but 접합 종합의 잘못된 사용이 발생 : <그것은 네 아버지였어. 따라서 그것은 네 어머니였어.…>, 그리고 분절 사이의 상징적 관계를 위해 다의적 실재계의 으깨짐을 나타내는 공식인 <따라서 이것이 뜻한 것은 그것이었다>가 등장
: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로 다시 데려온 만큼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에서 출발하게 함. 역사적 또는 선사적 기원으로건 구조적 기초로서이건, 단지 외견상으로만 오이디푸스는 처음(←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처음!)
-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그리고 단지 사회구성체에 의해 구성된 정의역에 대한 공역 → 정의역에는 사회적 형성물이 존재, 공역에는 아빠, 엄마, 나만 존재
-욕망 생산과 오이디푸스 모두 “끝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
① 욕망적 생산은 자본주의 형성체에서 언제나 저지되는 사회적 생산의 한계[탈영토화된 사회체의 한계에 있는 기관없는 신체, 도시의 관문에 있는 사막], 욕망의 몰적 조직화와 욕망의 분자적 다양체 사이의 한계[탈영토화의 한계].
② 오이디푸스는 한계를 옮겨 내부화함. 군집성의 도구인 오이디푸스는 유럽인의 순응적이고 사적인 최후의 영토성임
역사에서의 정신분석의 수치(羞恥)
- 위인과 군중의 등장 :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된 위인=오이디푸스적 갈등에 대한 독창적 해법을 찾아냄↔집단적 이미지에 의해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된 군중
- 정신분석가는 ① 자신은 특정한 종류의 원인에만 관심을 두며 <다른> 원인도 고려해야 하지만 자기가 모든 걸 할 수 없다고 주장 ② 시대적 제도를 고려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합하는, 위인과 군중의 행동 속에서 분리되어 다르게 재편되는 새로운 종류의 부모 이미지를 보기 위한 것임. ③ 역사적-정치적 적용을 스스로 금하고는 환원 불가능한 <참을 수 없는 진실>의 장소로 제시된 거세라는 바위에 틀어박힘.④ 분석 활동을 소우주 속에서 전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리비도에 의한 사회적 장의 직접 투자를 단순한 오이디푸스의 상상적 부속물로 다룸
# 정신분석의 외침 : “사회 또한 삼각형적이고 상징적임을 잊지 않는 우리 분석가들의 독창성을! 거세는 우리를 정치적인 것과 분리시키는 것이요, 우리의 독창성을 이루는 것이다!”
분리차별과 유목
-오이디푸스가 복귀 내지 적용에 의해 얻어진다는 게 사실이라면 진정한 유형의 사회적 장의 형성과 리비도 투자와 생산을 전제로 해야 함. 예속 집단, 즉 기성질서가 억압적 형식으로 투자되는 곳에서 번성함. 오이디푸스적 적용은 정의역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과, 이 규정의 리비도 투자에 의존
→무의식의 접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이 존재함, 우리 고장에 고유하다, 우등 인종에 속한다 등의 감정/느낌을 구성, 이 사용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무기이나 계급 구분과 일치하지 않음[오이디푸스는 민족주의적・종교적・인종주의적 감정에 의존]
- 사회적 장이 거대한 시원성을 전제함으로써만 가족 유대로 방향을 꺾는다는 점에서 분리차별적 사용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조건임. ‘나는 당신들과 하나다…’
-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체가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에 명백히 반대 방향으로 갈 때, 그들이 싸워야만하는 계급의 이해관계와 이상에 동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무지와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임,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
→ 전의식적 투자는 대립하는 계급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해지거나 행해져야 함. but 무의식적 투자는 욕망의 위치와 종합의 사용에 따라 행해짐. 또한 절단과 분리차별을 이해관계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 투자되는 사회적 장 속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을 확고히 함.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의 형식은 경제・금융 메커니즘, 정치 형성체 등과 함께, 욕망하는 주체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전체 또는 부분을 욕망될 수 있음.
: 경제적 사회적 복합체에서 이데올로기, 오이디푸스, 남근은 할 일이 없음. 흐름들, 재고들, 흐름들의 절단과 변동의 문제이기 때문. 욕망은 무엇인가가 흐르고 흘러 지나가는 곳 어디에나 있으면서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만이 아니라 취해 있거나 잠든 주체도 죽음의 하구로 끌고 감.
-분열-분석의 목적 :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투자의 종별적 본성을 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안에서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도록 결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 모든 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일어남.
- 파시스트적 또는 반동적 유형의 무의식적 투자는 의식적인 혁명적 투자와 공존/혁명적 투자는 욕망의 층위에서 의식적 이해관계가 부합하는 반동적 투자와 (드물지만) 공존 가능.
① 무의식적인 반동적 투자 :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그러나 욕망의 견지에서 오이디푸스가 파생되어 나오는 접합 종합의 분리차별적 사용에 의해 진행됨.
② 무의식적인 혁명적 투자 : 욕망이 여전히 자기의 고유한 상태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재절단하고 모든 분리차별과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을 동시에 깨뜨릴 수 있는 흐름,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을 망상하고 대륙을 불태울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는 투자
∴접합 종합의 유목적・다의적 사용과 분리차별적・일대일대응적 사용은 대립함.
- 망상/착란은 인종주의적 극과 인종적 극/분리차별적-편집증적 극과 유목적-분열증적 극을 갖고 있음. 이 양극 사이에 많은 불확실한 미묘한 미끄러짐이 있음. 무의식 자체가 반동적 부화와 혁명적 잠재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미끄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