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숭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참석여부가 불확실 하시어, 발제 순서를 저와 바꾸었습니다.
2020. 2. 20. 목 _ 존재와 시간 65쪽-93쪽 _ 넝구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1장 현존재를 예비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과제의 설명
제1장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분석론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제9절], 현존재분석론과 유사해 보이는 여러 연구들(심리학, 인간학, 생물학 등)을 그것과 구별해야함[제10절]을 논하고 있다.
제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
현존재의 두 가지 성격은 다음과 같다. 본질에 우선한 “실재”의 우위 그리고 각자성.(68)
1. 현존재의 본질이 실재에서부터 개념파악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존재론적인 과제가 제시해야 할 것은 현존재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실존이라는 용어를, 실재라는 칭호 대신 눈앞에 있음이라는 해석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눈앞의 존재 정도를 말하며, 따라서 현존재와 같은 성격의 존재자에게는 속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양식을 말하기 때문이다.(66) 그가 제시한 바대로 문장을 고쳐 쓰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67)라는 정리된 문장이 나온다. 현존재라는 칭호는 그의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67)
2. 현존재에게 그의 실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67)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에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다.(67) 자신의 존재하는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 현존재는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67)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두 존재양태는 현존재가 각자성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68) 현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그의 존재의 문제틀을 그의 실존의 실존성에서부터 전개시키라는 지침이 놓여 있다.(68) 하이데거는 평균적인 일상성이라 칭해지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에서 현존재를 설명하는 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비록 비본래성의 양태로이기는 하지만 실존성의 선험적인 구조가 놓여 있고 거기에서도 현존재에게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69)이다.
3. 현존재의 분석론에서부터 발원한 모든 설명내용들은 그의 실존구조를 고려하여 획득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실존성에서부터 규정되고 있기에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성격을 실존범주라고 이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의 존재규정(범주라고 칭해지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70) 범주와 실존범주는 존재 성격의 두 가지 근본 가능성이다. 존재성격의 이 두 양태의 연관에 대해서는 존재물음의 지평이 해명된 뒤에야 비로소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70)
제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실존론적 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은 오직 원칙적인 존재론적 물음과만 관계가 있다.(71)
1. ‘코기토 숨’에서 데카르트는 자아의 사유함을 탐구하였지만 코기토와 똑같이 근원적인 단초로 설정되어 있는 ‘숨’은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현존재분석론은 숨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이것이 규정되어야 비로소 사유의 존재양식이 파악될 수 있다고 본다.(71-72) 그는 이미 주어져 있는 주체의 단초가 현존재의 현상적 존립을 근본에서부터 놓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주체를 존재론적인 근본 규정으로 해명해야할 때, 먼저 사물성 자체가 그것의 존재론적인 유래를 증명할 필요가 있으며(72) 그래야 무엇을 도대체 긍정적으로 주체, 영혼, 의식, 정신, 인격의 사물화 되지 않은 존재 아래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고 본다.(72)
2.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철학이 삶에 대한 물음으로의 도상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그의 철학이 인간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73)한다. 인격성의 해석에서 후설과 셸러는 인격이 사물도, 실체도, 대상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들의 인격주의가 인간 존재를 신체적, 영혼적, 정신적 통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인간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74) 전통적인 인간학의 중요한 근원들인 그리스의 정의(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와 신학적인 실마리(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한 본질규정 안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망각된 채로 남아 있으며, 오히려 이 존재가 다른 창조된 사물들의 눈앞에 있음의 의미로 “자명하게” 개념 파악되었다는 것이다.(76) 사유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 인간학적인 문제틀은 존재론적 기초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76) 이라고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3. 앞서 언급한 결여된 존재론적인 기초는 인간학과 심리학을 하나의 보편적인 생물학 안에 구축한다고 해서 보충될 수 없다. 생물학은 “생명에 대한 과학”으로서 현존재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76) 생명은 단순한 눈앞에 있음도 아니고 또한 현존재도 아니다. 현존재는 사람들이 그것을 생명(삶)이라고 설정하고 거기에다가 어떤 다른 것을 추가하는 식으로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규정될 수는 없다.(77)
제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획득의 어려움
1. 현존재를 그의 일상성에서 해석하는 일은 원시적 현존재의 단계를 기술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일상성은 원시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성은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에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이다.(77) 다른 한편, 원시적인 현존재도 비일상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특수한 일상성을 가지고 있다. 원시적 현존재는 때로 현상들에 근원적으로 몰입하여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우리 측에서 볼 때 서툴고 거친 개념성이 현상들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순수하게 끄집어내오는 데에 긍정적으로 유익할 수 있다.(78) 그러나, 민속학은 그것의 선별과 정리 작업에서 이미 인간 현존재에 대한 특정한 앞선 개념과 해석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민속학자가 함께 끌어들이고 있는 심리학, 사회학이 철저히 탐구해야 할 현상들로의 적합한 접근 가능성과 그것에 대한 적합한 해석과 전달을 보장해주는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78) 하이데거는 민속학이 이미 현존재에 대한 충분한 분석론을 실마리로서 전제하고 있다(78) 고 본다.
2. 오늘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와 현존재의 형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자연적 세계개념”의 이념을 정리작업하는 데 더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풍부한 지식은 본래적인 문제를 잘 못 보게 만드는 유혹으로 작용한다. 세계상을 정리하는 데에는 세계 일반에 대한 명시적인 이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자체가 현존재의 구성요소라면, 세계현상을 개념적으로 정리작업하는 데에는 현존재의 근본구조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79)
제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제2장에서는 연구의 확정된 단초를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현존재에서 기초구조, 즉 세계-내-존재를 밝히고 있다.
제12절 안에- 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현존재분석론의 올바른 단초는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구성틀의 해석에 달려있다. “세계-내-존재”라는 합성된 표현은 통일적인 현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80) 하이데거는 이 전체 현상을 그 현상적 실상을 추적하여 다음의 세 가지 계기 ① 세계-내 ② 각기 그때마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존재자 ③ 내-존재[안에-있음]로 나누어 분석하려고 하며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열거한 내-존재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제12절의 내용이다.
1. 내-존재[안에-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의 하나이며 실존범주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것을 눈앞에 있는 것들의 공간적인 “서로 안에 있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in은 ‘거주하다’, ‘체류하다’를 의미하는 innan-에서 유래한다. 그 어근에서 an은 ‘나는 습관이 되었다’, ‘~와 친숙하다’, ‘어떤 것을 보호 한다’를 뜻한다. bin(나는 있다)이라는 표현은 bei(곁에)와 결부되어 있다. Ich bin(나는 있다)은 다시금 ‘나는 거주한다’, ‘나는 ~에 머문다’, ‘이러저러한 친숙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머문다’를 말한다.(82) 세계 “곁에 있음”은 안에-있음에 기초하고 있는 실존범주의 하나이다. 실존 범주로서의 세계 “곁에 있음”은 발견되는 사물들이 나란히 함께 눈앞에 있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83) 존재자가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의 거기-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발견되어 있고, 그 세계에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존재자가 그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83)
2.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그것의 현사실성과 더불어 각기 이미 안에-있음의 특정한 방식들로 분산되었거나 갈기갈기 찢겨졌다. 안에-있음의 이러한 방식들의 다양성은 범례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하여 제시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관련하다, 어떤 것을 제작하다, 어떤 것을 경작하고 가꾸다, 어떤 것을 사용하다 등. 이러한 안에-있음의 방식들은 배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연구에서는 “배려함”이라는 표현을 존재론적인 용어(실존범주)로서 가능한 세계-내-존재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다.(85) 이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현존재가 우선 대체적으로 경제적이고 실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존재를 염려로서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86)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1편 제6장 참조.
3. 세계-내-존재의 현상학적 제시는 위장과 은폐를 퇴치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현상이 언제나 이미 개개의 현존재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그 자체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상이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87) 그러나 현상은 또한 이미 언제나 대개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되었거나 또는 존재론적으로 충분치 못하게 해석되었다. 존재구조는 존재적으로 존재자(세계)와 존재자(영혼)사이의 “관계”로서 경험되고 있고 존재가 우선은 존재론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발판으로 삼아 이해되고 있기에 언급한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눈앞의 존재(실재)로 개념파악하려는 시도가 행해진다. 세계-내-존재는 비록 현상학 이전으로 경험되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적합지 못한 해석의 방법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88)
제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인식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먼저 설명하지도 않은 채 인식함을 문제점으로 발견하고 있으며(91) 인식현상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해명하려고 하면서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90)
1. 하이데거는 인식함을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식이라고 본다.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일종의 이미-세계-곁에-있음 안에 근거하고 있는데, 현존재의 존재는 그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내-존재는 배려함으로서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 의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인식함이 눈앞의 것을 고찰하는 규정함으로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세계와 배려하는 상관맺음에 결함이 생기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제작함, 사용함 등을 단념하고 배려함이 이제 오직 다만 안에-있음의 양태에만, ~곁에 그저 단지 머무름으로만 있다.(91) 이와 같이 모든 형태의 사용과 이용을 중지한 상태에서- 이런 종류의 “체류”에서 눈앞의 것을 인지함[받아들임]이 수행된다. 이 존재양식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그것의 순수한 겉모습(에이도스)에서 만나게 해준다. 이러한 바라봄은 그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방향잡음, 눈앞의 것을 대면함이다. 이러한 행위는 만나는 존재자에서 애초부터 하나의 “관점”?을 끄집어낸다.(92) 인지하면서 간직함은 세계-내 존재의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의 해석함의 토대 위에서 발생한 인지함, 규정함, 보존함, 간직함은 주체가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을 조달하는 “과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2. ~에로 향함, 파악함에서 현존재는 그의 내면영역에서부터 비로소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차적인 존재양식에 따라서 언제나 이미 “바깥에”?, 각기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 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해야 할 존재자 곁에 규정하며 머물러 있음은 대상 곁에 “밖에 나가 있음”?에서 현존재는 바르게 이해된 의미로 “안에”?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세계-내-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는 그 존재자이다.(92) 그리고 또한 인지함, 보존함, 간직함에서 인식하는 현존재는 현존재로서 바깥에 남아 있다. 세계인식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내-존재의 양태들의 기초부여 연관을 제시한 결과 분명해진 것은, 인식함에서 현존재는 현존재에서 각기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세계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존재입지[상태]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인식함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현존재의 한 양태이다. 그러므로 세계-내-존재는 근본구성틀로서 일종의 선행적인 해석?을 요구한다.(93)
* 지숭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참석여부가 불확실 하시어, 발제 순서를 저와 바꾸었습니다.
2020. 2. 20. 목 _ 존재와 시간 65쪽-93쪽 _ 넝구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1장 현존재를 예비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과제의 설명
제1장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분석론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제9절], 현존재분석론과 유사해 보이는 여러 연구들(심리학, 인간학, 생물학 등)을 그것과 구별해야함[제10절]을 논하고 있다.
제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
현존재의 두 가지 성격은 다음과 같다. 본질에 우선한 “실재”의 우위 그리고 각자성.(68)
1. 현존재의 본질이 실재에서부터 개념파악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존재론적인 과제가 제시해야 할 것은 현존재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실존이라는 용어를, 실재라는 칭호 대신 눈앞에 있음이라는 해석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눈앞의 존재 정도를 말하며, 따라서 현존재와 같은 성격의 존재자에게는 속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양식을 말하기 때문이다.(66) 그가 제시한 바대로 문장을 고쳐 쓰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67)라는 정리된 문장이 나온다. 현존재라는 칭호는 그의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67)
2. 현존재에게 그의 실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67)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에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다.(67) 자신의 존재하는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 현존재는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67)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두 존재양태는 현존재가 각자성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68) 현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그의 존재의 문제틀을 그의 실존의 실존성에서부터 전개시키라는 지침이 놓여 있다.(68) 하이데거는 평균적인 일상성이라 칭해지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에서 현존재를 설명하는 일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비록 비본래성의 양태로이기는 하지만 실존성의 선험적인 구조가 놓여 있고 거기에서도 현존재에게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69)이다.
3. 현존재의 분석론에서부터 발원한 모든 설명내용들은 그의 실존구조를 고려하여 획득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실존성에서부터 규정되고 있기에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성격을 실존범주라고 이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의 존재규정(범주라고 칭해지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70) 범주와 실존범주는 존재 성격의 두 가지 근본 가능성이다. 존재성격의 이 두 양태의 연관에 대해서는 존재물음의 지평이 해명된 뒤에야 비로소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70)
제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실존론적 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은 오직 원칙적인 존재론적 물음과만 관계가 있다.(71)
1. ‘코기토 숨’에서 데카르트는 자아의 사유함을 탐구하였지만 코기토와 똑같이 근원적인 단초로 설정되어 있는 ‘숨’은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현존재분석론은 숨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이것이 규정되어야 비로소 사유의 존재양식이 파악될 수 있다고 본다.(71-72) 그는 이미 주어져 있는 주체의 단초가 현존재의 현상적 존립을 근본에서부터 놓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주체를 존재론적인 근본 규정으로 해명해야할 때, 먼저 사물성 자체가 그것의 존재론적인 유래를 증명할 필요가 있으며(72) 그래야 무엇을 도대체 긍정적으로 주체, 영혼, 의식, 정신, 인격의 사물화 되지 않은 존재 아래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고 본다.(72)
2.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철학이 삶에 대한 물음으로의 도상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그의 철학이 인간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73)한다. 인격성의 해석에서 후설과 셸러는 인격이 사물도, 실체도, 대상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들의 인격주의가 인간 존재를 신체적, 영혼적, 정신적 통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인간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74) 전통적인 인간학의 중요한 근원들인 그리스의 정의(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와 신학적인 실마리(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한 본질규정 안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망각된 채로 남아 있으며, 오히려 이 존재가 다른 창조된 사물들의 눈앞에 있음의 의미로 “자명하게” 개념 파악되었다는 것이다.(76) 사유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 인간학적인 문제틀은 존재론적 기초에서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76) 이라고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3. 앞서 언급한 결여된 존재론적인 기초는 인간학과 심리학을 하나의 보편적인 생물학 안에 구축한다고 해서 보충될 수 없다. 생물학은 “생명에 대한 과학”으로서 현존재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76) 생명은 단순한 눈앞에 있음도 아니고 또한 현존재도 아니다. 현존재는 사람들이 그것을 생명(삶)이라고 설정하고 거기에다가 어떤 다른 것을 추가하는 식으로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규정될 수는 없다.(77)
제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획득의 어려움
1. 현존재를 그의 일상성에서 해석하는 일은 원시적 현존재의 단계를 기술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일상성은 원시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성은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에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이다.(77) 다른 한편, 원시적인 현존재도 비일상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특수한 일상성을 가지고 있다. 원시적 현존재는 때로 현상들에 근원적으로 몰입하여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우리 측에서 볼 때 서툴고 거친 개념성이 현상들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순수하게 끄집어내오는 데에 긍정적으로 유익할 수 있다.(78) 그러나, 민속학은 그것의 선별과 정리 작업에서 이미 인간 현존재에 대한 특정한 앞선 개념과 해석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민속학자가 함께 끌어들이고 있는 심리학, 사회학이 철저히 탐구해야 할 현상들로의 적합한 접근 가능성과 그것에 대한 적합한 해석과 전달을 보장해주는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78) 하이데거는 민속학이 이미 현존재에 대한 충분한 분석론을 실마리로서 전제하고 있다(78) 고 본다.
2. 오늘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와 현존재의 형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자연적 세계개념”의 이념을 정리작업하는 데 더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풍부한 지식은 본래적인 문제를 잘 못 보게 만드는 유혹으로 작용한다. 세계상을 정리하는 데에는 세계 일반에 대한 명시적인 이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자체가 현존재의 구성요소라면, 세계현상을 개념적으로 정리작업하는 데에는 현존재의 근본구조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79)
제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제2장에서는 연구의 확정된 단초를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현존재에서 기초구조, 즉 세계-내-존재를 밝히고 있다.
제12절 안에- 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현존재분석론의 올바른 단초는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구성틀의 해석에 달려있다. “세계-내-존재”라는 합성된 표현은 통일적인 현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80) 하이데거는 이 전체 현상을 그 현상적 실상을 추적하여 다음의 세 가지 계기 ① 세계-내 ② 각기 그때마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존재자 ③ 내-존재[안에-있음]로 나누어 분석하려고 하며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열거한 내-존재에 대한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제12절의 내용이다.
1. 내-존재[안에-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의 하나이며 실존범주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것을 눈앞에 있는 것들의 공간적인 “서로 안에 있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in은 ‘거주하다’, ‘체류하다’를 의미하는 innan-에서 유래한다. 그 어근에서 an은 ‘나는 습관이 되었다’, ‘~와 친숙하다’, ‘어떤 것을 보호 한다’를 뜻한다. bin(나는 있다)이라는 표현은 bei(곁에)와 결부되어 있다. Ich bin(나는 있다)은 다시금 ‘나는 거주한다’, ‘나는 ~에 머문다’, ‘이러저러한 친숙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머문다’를 말한다.(82) 세계 “곁에 있음”은 안에-있음에 기초하고 있는 실존범주의 하나이다. 실존 범주로서의 세계 “곁에 있음”은 발견되는 사물들이 나란히 함께 눈앞에 있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83) 존재자가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의 거기-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발견되어 있고, 그 세계에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존재자가 그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83)
2.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그것의 현사실성과 더불어 각기 이미 안에-있음의 특정한 방식들로 분산되었거나 갈기갈기 찢겨졌다. 안에-있음의 이러한 방식들의 다양성은 범례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하여 제시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관련하다, 어떤 것을 제작하다, 어떤 것을 경작하고 가꾸다, 어떤 것을 사용하다 등. 이러한 안에-있음의 방식들은 배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연구에서는 “배려함”이라는 표현을 존재론적인 용어(실존범주)로서 가능한 세계-내-존재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다.(85) 이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현존재가 우선 대체적으로 경제적이고 실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존재를 염려로서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86)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1편 제6장 참조.
3. 세계-내-존재의 현상학적 제시는 위장과 은폐를 퇴치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현상이 언제나 이미 개개의 현존재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그 자체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상이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87) 그러나 현상은 또한 이미 언제나 대개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되었거나 또는 존재론적으로 충분치 못하게 해석되었다. 존재구조는 존재적으로 존재자(세계)와 존재자(영혼)사이의 “관계”로서 경험되고 있고 존재가 우선은 존재론적으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발판으로 삼아 이해되고 있기에 언급한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눈앞의 존재(실재)로 개념파악하려는 시도가 행해진다. 세계-내-존재는 비록 현상학 이전으로 경험되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적합지 못한 해석의 방법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88)
제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인식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먼저 설명하지도 않은 채 인식함을 문제점으로 발견하고 있으며(91) 인식현상을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해명하려고 하면서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90)
1. 하이데거는 인식함을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식이라고 본다.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일종의 이미-세계-곁에-있음 안에 근거하고 있는데, 현존재의 존재는 그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내-존재는 배려함으로서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 의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인식함이 눈앞의 것을 고찰하는 규정함으로서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세계와 배려하는 상관맺음에 결함이 생기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제작함, 사용함 등을 단념하고 배려함이 이제 오직 다만 안에-있음의 양태에만, ~곁에 그저 단지 머무름으로만 있다.(91) 이와 같이 모든 형태의 사용과 이용을 중지한 상태에서- 이런 종류의 “체류”에서 눈앞의 것을 인지함[받아들임]이 수행된다. 이 존재양식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를 그것의 순수한 겉모습(에이도스)에서 만나게 해준다. 이러한 바라봄은 그때마다 하나의 특정한 방향잡음, 눈앞의 것을 대면함이다. 이러한 행위는 만나는 존재자에서 애초부터 하나의 “관점”?을 끄집어낸다.(92) 인지하면서 간직함은 세계-내 존재의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의 해석함의 토대 위에서 발생한 인지함, 규정함, 보존함, 간직함은 주체가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을 조달하는 “과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2. ~에로 향함, 파악함에서 현존재는 그의 내면영역에서부터 비로소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차적인 존재양식에 따라서 언제나 이미 “바깥에”?, 각기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세계에서 만나는 존재자 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해야 할 존재자 곁에 규정하며 머물러 있음은 대상 곁에 “밖에 나가 있음”?에서 현존재는 바르게 이해된 의미로 “안에”?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세계-내-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는 그 존재자이다.(92) 그리고 또한 인지함, 보존함, 간직함에서 인식하는 현존재는 현존재로서 바깥에 남아 있다. 세계인식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내-존재의 양태들의 기초부여 연관을 제시한 결과 분명해진 것은, 인식함에서 현존재는 현존재에서 각기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세계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존재입지[상태]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인식함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현존재의 한 양태이다. 그러므로 세계-내-존재는 근본구성틀로서 일종의 선행적인 해석?을 요구한다.(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