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발제
김택유
제 1장 존재물음의 필연성, 구조 그리고 우위
제 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형이상학을 다시 긍정한 것을 자신의 공에 의한 진보로 치고는 있지만 실제 탐구의 주체가 되는 물음으로서는 침묵 속에 빠져버렸다. 존재의 해석은 독단적인 경향이 되었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불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존재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내용없는 개념이다 라고 말한다. (유명론?) 개념정의의 시도도 거부하며 그것이 일종의 태양과 같은 명백한 자명성이 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아직도 묻는 사람은 방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서 문책받게 되었다. 이러한 선입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존재의 보편성은 유의 보편성이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형태의 보편성을 넘어선다. 초월적 보편의 단일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사태내용적인 최고의 유개념의 다양성과 대비시켜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했다.그러나 범주적 연관의 어두움을 밝혀 보이지는 못했다. 존재는 명확한 개념이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될 수 없다.
존재는 존재자로서 개념파악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부터 존재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귀결되어 나오는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뿐이다.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물음을 던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존재이해 속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존재의 의미가 어두움에 싸여 있다는 이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연성을 입증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찾고 있는 것이다.
제 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한 물음은 그에 합당한 투명성을 필요로 하고 무엇이 속하는지가 논의되어야 탁월한 물음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음은 일종의 찾아나섬이라 자신의 방향을 미리 제시받는다. (본 저자는 이에 대해 3가지로 분류해 물음의 구성을 분석한다. 첫째는 물어지고 있는 것 즉 내용이자 존재이고 두 번째는 물음이 걸려있는 것 즉 무엇인가, 즉 대상이자 존재자(여기서는 현존)이며 마지막으로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 즉 의도이자 존재의 의미자체이다.)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이다[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평균적이고 모호한 존재이해는 하나의 현사실이다. 존재이해의 이러한 무규정성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긍정적인 현상이다.(해명을 필요로 하니까)
정리작업해야 할 물음에서 물어지고 있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이데아는 없다?) 이렇게 되어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 즉 존재의 의미도 나름의 독특한 개념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 개념성 또한 존재자가 자신의 의미에 맞는 규정성에 이르게 되는 그 개념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한,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라는 것이 귀결되어 나온다. 이 존재자에게서 흡사 그것의 존재를 캐묻는 셈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주어져 있음에 놓여 있다. 어떤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가? 어떤 특정의 존재자가 존재물음의 정리 작업에서 일종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가? 존재물음의 정리작업이란 한 존재자를 그 존재에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자, 즉 우리들 자신이 각기 그것이며 여러 다른 것들 중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라는 용어로 파악하기로 하자. 존재의 의미에 대한 분명하고 투명한 물음제기는 한 존재자(현존재)를 그 존재에 있어 앞서 먼저 적합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도가 명백한 순환논증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가 그 존재에 있어 규정될 수 있다. 주도적인 관점 취득은 평균적인 존재이해에서 자라나온다. 그리고 그 존재이해가 결국에는 현존재 자신의 본질구성틀에 속한다. 이러한 전제는 거기에서부터 명제추론을 연역해내는 어떤 한 원칙의 정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제기에는 도대체 순환논증이 놓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연역적인 근거제시가 아니라 근거를 밝게 파헤쳐 제시함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성격을 띤 존재자는 존재물음 자체와 하나의 연관을 맺고 있어 현존재우위와 같은 어떤 것이 알려진 셈이다.
제 3절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물음 그 자체의 형식적 구조를 실마리로 삼아 존재물음을 특정지음으로 해서 이 물음이 독특한 물음임이 분명해졌다. 존재물음의 빼어난 특징은 그 물음을 그것의 역할, 의도 그리고 동기와 관련지어서 충분히 제한 규정할 때에만 비로소 완전하게 명명백백히 드러날 것이다. 물음을 재개해야할 동기는 충분한 문제제기조차 도대체 결여되어 있었다는 데에서부터 제시되었다. 실증성에 놓여 있든 아니든 탐구의 진정한 진보는 근본구성틀에 대한 물음에서 이루어진다. 한 학문의 수준은 그 학문이 자신의 근본개념의 위기를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에서부터 규정된다.(이를 근본 개념과 근본토대의 위기와 함께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신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예를 들며 설명한다.) 근본개념들은 사태영역이 선행적이며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하는 이해에 이르게 되는 그러한 규정들이다.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참되게 증명되고 근거제시 될수 있다. 존재자를 존재의 근본구성틀에 있어 해석하는 것이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탐구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긍정적 소득도 인식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정립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 일반에 속하는 그것의 산출작업을 위한 단초의 확보에 있다. 초월논리학은 자연이라는 존재분야에 대한 선험적인 사태논리학이다. 존재론적 물음은 분명히 실증과학이 던지는 존재적 물음과 대비해볼 때 더 근원적이다. 그러므로 존재물음은 학문들의 선험적 가능조건 뿐 아니라 또한 존재적 학문들 앞에 놓여 있으면서 그것에 기초를 부여하는 존재론들 자체의 가능조건까지도 목표로 삼고 있다. 존재론들이 기초적인 과제로써 개념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들이 아무리 풍부하고 꽉 짜여진 범주체계를 구사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근거에서 맹목적이고, 자신의 고유한 의도가 전도된 채로 남아 있다. 존재론적인 탐구 자체는 존재물음에게 그것의 존재론적 우위를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적-학문적 우위만이 유일한 우위는 아니다.
제 4절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
학문 일반을 참된 명제들의 근거제시연관의 전체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이 정의는 완전하지도 않으며 학문을 그 의미에서 적중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학문들은 인간의 행동관계로서 이 존재자[인간]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인 탐구는 그러나 유일한 존재양식이 아니다.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는 현존재가 그 존재에서 이 존재와 일종의 존재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속한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현존재가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이름한다. 사태내용적인 무엇을 제시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존재라는 칭호는 순전히 존재자를 지칭하기 위한 순수한 존재표현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실존의 문제는 언제나 오직 실존함 자체에 의해서만 처리 될수 있다. 이때의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이름한다. 실존의 물음은 현존재의 존재적 용건이다.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물음은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그것을 풀어헤쳐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구조의 연관을 우리는 실존성이라고 이름한다, 실존성의 분석학은 실존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고 실존론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학의 과제는 현존재의 존재적 구성틀에서 앞서 윤곽지어져있다. 실존이 현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한, 실존성에 대한 선행적인 관점취득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실존성을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구성틀이라고 이해한다. 학문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이 존재방식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자와도 관계를 맺는다.(선험적경험?)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성격의 존재자를 주제로 삼고 있는 존재론들은 현존재 자체의 존재적 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존재적 구조가 존재론 이전의 존재이해 규정성을 자체 안에서 개녀마악하고 있다.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현존재는 존재적 우위[그 존재에서 실존에 의해 규정되어있다], 존재론적 우위[실존규정성 때문에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론적이다.], 모든 존재론의 존재적 – 존재론적 가능조건으로써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실존론적인 분석론은 그 나름 또한 결국 실존적으로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 뿌리를 박고 있다. 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충분하게 정리작업해야 할 존재자로 드러내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물음이 걸려야 할 존재자로 기능한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제 2장 존재물음의 정리작업에서의 이중의 과제. 탐구의 방법과 그 개요.
제 5절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론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냄이다.
현존재는 분명히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기에 존재론적으로는 가정 먼 것이다. 현존재는 우선 관계 맺고 있는 그 존재자에서부터 즉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이해[“범주적” 존재구성틀] 안에 세계이해가 현존재해석에 존재론적으로 되반영된다고 제시하게 될 그것이 놓여있다. 현존재에게 존재이해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과 더불어 형성된다면 풍부한해석[되어있음]을 구사할 수 있다.(각 학문들을 말함) 그것들이 아마도 실존적으로 근원적이었듯이 그렇게 똑같이 근원적으로 실존론적으로 수행되었는가이다.(3절 학문에서의 각 물음처럼을 말하는건가?) 현존재의 분석론은 존재와 현실의 이념-그것이 아무리 자명하다고 하더라도-에 의해서 윤곽잡힌 범주들은 어던 것도 현존재에 존재론적으로 조사하지도 않고 강제로 덮어씌워서는 안된다. 그 양식은 우선 대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즉 그것의 평균적인 일상성에서 제시해주어야 한다. 본질적인 구조들이 산출되어야 한다. 이 분석론은 자신의 한계를 규정받는다. 완벽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우선은 잠정적이다. 그것은 단지 처음으로 이 존재자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가장 근원적인 존재해석을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내보이는 일을 이 분석론을 예비해야 된다.
우리가 현존재라고 이름짓는 그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로서 시간성이 제시될 것이다. 현존재가 도대체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나지 않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시간을 존재이해의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인 시간성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획득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속적인 시간이해와 구별해서 한정해야되는데 베르그송의 테제에 반해서-그가 의미하는 시간은 공간이다(레비나스가 오해한 부분?)- 통속적인 시간개념에 그 독자적인 권리를 되돌려 줄수 있게 된다. 시간은 존재적인 척도로 기능하였으나 무슨 권리로 바로 시간과 같은 어떤 것이 그러한 척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 존재론적인 중요성이 표현되고 있는지 물음으로 제기되지도 않고 연구되지도 않았다. 저절로 이러한 자명한 존재론적인 기능속으로 휘말려들었으며 지금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다. 정리작업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토대 위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과연 그리고 어떻게 올바로 고찰되고 올바로 설명된 시간의 현상속에 모든 존재론의 중심문제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이다. 비 시간적인것과 초 시간적인것도 그것의 존재를 고려해볼 때 시간적[시간내재적]이다. 우리는 존재와 그 성격 그리고 그 양태의 근원적인 의미를 시간에서부터 근원적으로 규정한 것을 존재시적인 규정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를 해석해야 하는 기초적 존재론적 과제는 자체 안에서 존재의 존재시성을 산출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 (p573 각주 참고) 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오직 시간에 대한 관점에서부터만 파악 가능하기 때문에 존재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격리된 맹목적 문장 속에 담겨질 수 없다. 그 대답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충분히 오래된 것이어서 고대인들이 마련해놓은 가능성들도 개념파악하는 것을 배울수 있다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 실패의 운명이 현존재적으로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통찰되어야 비로소 대답이 충분하게 주어진 셈이된다.
존재와 시간 발제
김택유
제 1장 존재물음의 필연성, 구조 그리고 우위
제 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형이상학을 다시 긍정한 것을 자신의 공에 의한 진보로 치고는 있지만 실제 탐구의 주체가 되는 물음으로서는 침묵 속에 빠져버렸다. 존재의 해석은 독단적인 경향이 되었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불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존재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내용없는 개념이다 라고 말한다. (유명론?) 개념정의의 시도도 거부하며 그것이 일종의 태양과 같은 명백한 자명성이 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아직도 묻는 사람은 방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서 문책받게 되었다. 이러한 선입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존재의 보편성은 유의 보편성이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형태의 보편성을 넘어선다. 초월적 보편의 단일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사태내용적인 최고의 유개념의 다양성과 대비시켜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했다.그러나 범주적 연관의 어두움을 밝혀 보이지는 못했다. 존재는 명확한 개념이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될 수 없다.
존재는 존재자로서 개념파악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부터 존재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귀결되어 나오는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뿐이다.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물음을 던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존재이해 속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존재의 의미가 어두움에 싸여 있다는 이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연성을 입증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찾고 있는 것이다.
제 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한 물음은 그에 합당한 투명성을 필요로 하고 무엇이 속하는지가 논의되어야 탁월한 물음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물음은 일종의 찾아나섬이라 자신의 방향을 미리 제시받는다. (본 저자는 이에 대해 3가지로 분류해 물음의 구성을 분석한다. 첫째는 물어지고 있는 것 즉 내용이자 존재이고 두 번째는 물음이 걸려있는 것 즉 무엇인가, 즉 대상이자 존재자(여기서는 현존)이며 마지막으로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 즉 의도이자 존재의 의미자체이다.)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이다[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평균적이고 모호한 존재이해는 하나의 현사실이다. 존재이해의 이러한 무규정성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긍정적인 현상이다.(해명을 필요로 하니까)
정리작업해야 할 물음에서 물어지고 있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이데아는 없다?) 이렇게 되어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 즉 존재의 의미도 나름의 독특한 개념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 개념성 또한 존재자가 자신의 의미에 맞는 규정성에 이르게 되는 그 개념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한,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라는 것이 귀결되어 나온다. 이 존재자에게서 흡사 그것의 존재를 캐묻는 셈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주어져 있음에 놓여 있다. 어떤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가? 어떤 특정의 존재자가 존재물음의 정리 작업에서 일종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가? 존재물음의 정리작업이란 한 존재자를 그 존재에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자, 즉 우리들 자신이 각기 그것이며 여러 다른 것들 중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라는 용어로 파악하기로 하자. 존재의 의미에 대한 분명하고 투명한 물음제기는 한 존재자(현존재)를 그 존재에 있어 앞서 먼저 적합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도가 명백한 순환논증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가 그 존재에 있어 규정될 수 있다. 주도적인 관점 취득은 평균적인 존재이해에서 자라나온다. 그리고 그 존재이해가 결국에는 현존재 자신의 본질구성틀에 속한다. 이러한 전제는 거기에서부터 명제추론을 연역해내는 어떤 한 원칙의 정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제기에는 도대체 순환논증이 놓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연역적인 근거제시가 아니라 근거를 밝게 파헤쳐 제시함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성격을 띤 존재자는 존재물음 자체와 하나의 연관을 맺고 있어 현존재우위와 같은 어떤 것이 알려진 셈이다.
제 3절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물음 그 자체의 형식적 구조를 실마리로 삼아 존재물음을 특정지음으로 해서 이 물음이 독특한 물음임이 분명해졌다. 존재물음의 빼어난 특징은 그 물음을 그것의 역할, 의도 그리고 동기와 관련지어서 충분히 제한 규정할 때에만 비로소 완전하게 명명백백히 드러날 것이다. 물음을 재개해야할 동기는 충분한 문제제기조차 도대체 결여되어 있었다는 데에서부터 제시되었다. 실증성에 놓여 있든 아니든 탐구의 진정한 진보는 근본구성틀에 대한 물음에서 이루어진다. 한 학문의 수준은 그 학문이 자신의 근본개념의 위기를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에서부터 규정된다.(이를 근본 개념과 근본토대의 위기와 함께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신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예를 들며 설명한다.) 근본개념들은 사태영역이 선행적이며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하는 이해에 이르게 되는 그러한 규정들이다.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참되게 증명되고 근거제시 될수 있다. 존재자를 존재의 근본구성틀에 있어 해석하는 것이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탐구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긍정적 소득도 인식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정립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 일반에 속하는 그것의 산출작업을 위한 단초의 확보에 있다. 초월논리학은 자연이라는 존재분야에 대한 선험적인 사태논리학이다. 존재론적 물음은 분명히 실증과학이 던지는 존재적 물음과 대비해볼 때 더 근원적이다. 그러므로 존재물음은 학문들의 선험적 가능조건 뿐 아니라 또한 존재적 학문들 앞에 놓여 있으면서 그것에 기초를 부여하는 존재론들 자체의 가능조건까지도 목표로 삼고 있다. 존재론들이 기초적인 과제로써 개념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들이 아무리 풍부하고 꽉 짜여진 범주체계를 구사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근거에서 맹목적이고, 자신의 고유한 의도가 전도된 채로 남아 있다. 존재론적인 탐구 자체는 존재물음에게 그것의 존재론적 우위를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적-학문적 우위만이 유일한 우위는 아니다.
제 4절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
학문 일반을 참된 명제들의 근거제시연관의 전체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이 정의는 완전하지도 않으며 학문을 그 의미에서 적중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학문들은 인간의 행동관계로서 이 존재자[인간]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인 탐구는 그러나 유일한 존재양식이 아니다.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는 현존재가 그 존재에서 이 존재와 일종의 존재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속한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현존재가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이름한다. 사태내용적인 무엇을 제시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존재라는 칭호는 순전히 존재자를 지칭하기 위한 순수한 존재표현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실존의 문제는 언제나 오직 실존함 자체에 의해서만 처리 될수 있다. 이때의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이름한다. 실존의 물음은 현존재의 존재적 용건이다.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물음은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그것을 풀어헤쳐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구조의 연관을 우리는 실존성이라고 이름한다, 실존성의 분석학은 실존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고 실존론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학의 과제는 현존재의 존재적 구성틀에서 앞서 윤곽지어져있다. 실존이 현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한, 실존성에 대한 선행적인 관점취득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실존성을 실존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구성틀이라고 이해한다. 학문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이 존재방식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자와도 관계를 맺는다.(선험적경험?)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성격의 존재자를 주제로 삼고 있는 존재론들은 현존재 자체의 존재적 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존재적 구조가 존재론 이전의 존재이해 규정성을 자체 안에서 개녀마악하고 있다.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현존재는 존재적 우위[그 존재에서 실존에 의해 규정되어있다], 존재론적 우위[실존규정성 때문에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론적이다.], 모든 존재론의 존재적 – 존재론적 가능조건으로써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실존론적인 분석론은 그 나름 또한 결국 실존적으로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 뿌리를 박고 있다. 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충분하게 정리작업해야 할 존재자로 드러내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물음이 걸려야 할 존재자로 기능한다는 것이 제시되었다.
제 2장 존재물음의 정리작업에서의 이중의 과제. 탐구의 방법과 그 개요.
제 5절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론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냄이다.
현존재는 분명히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기에 존재론적으로는 가정 먼 것이다. 현존재는 우선 관계 맺고 있는 그 존재자에서부터 즉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이해[“범주적” 존재구성틀] 안에 세계이해가 현존재해석에 존재론적으로 되반영된다고 제시하게 될 그것이 놓여있다. 현존재에게 존재이해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과 더불어 형성된다면 풍부한해석[되어있음]을 구사할 수 있다.(각 학문들을 말함) 그것들이 아마도 실존적으로 근원적이었듯이 그렇게 똑같이 근원적으로 실존론적으로 수행되었는가이다.(3절 학문에서의 각 물음처럼을 말하는건가?) 현존재의 분석론은 존재와 현실의 이념-그것이 아무리 자명하다고 하더라도-에 의해서 윤곽잡힌 범주들은 어던 것도 현존재에 존재론적으로 조사하지도 않고 강제로 덮어씌워서는 안된다. 그 양식은 우선 대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즉 그것의 평균적인 일상성에서 제시해주어야 한다. 본질적인 구조들이 산출되어야 한다. 이 분석론은 자신의 한계를 규정받는다. 완벽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우선은 잠정적이다. 그것은 단지 처음으로 이 존재자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가장 근원적인 존재해석을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내보이는 일을 이 분석론을 예비해야 된다.
우리가 현존재라고 이름짓는 그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로서 시간성이 제시될 것이다. 현존재가 도대체 존재와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나지 않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시간을 존재이해의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인 시간성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획득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속적인 시간이해와 구별해서 한정해야되는데 베르그송의 테제에 반해서-그가 의미하는 시간은 공간이다(레비나스가 오해한 부분?)- 통속적인 시간개념에 그 독자적인 권리를 되돌려 줄수 있게 된다. 시간은 존재적인 척도로 기능하였으나 무슨 권리로 바로 시간과 같은 어떤 것이 그러한 척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 존재론적인 중요성이 표현되고 있는지 물음으로 제기되지도 않고 연구되지도 않았다. 저절로 이러한 자명한 존재론적인 기능속으로 휘말려들었으며 지금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다. 정리작업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토대 위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과연 그리고 어떻게 올바로 고찰되고 올바로 설명된 시간의 현상속에 모든 존재론의 중심문제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이다. 비 시간적인것과 초 시간적인것도 그것의 존재를 고려해볼 때 시간적[시간내재적]이다. 우리는 존재와 그 성격 그리고 그 양태의 근원적인 의미를 시간에서부터 근원적으로 규정한 것을 존재시적인 규정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를 해석해야 하는 기초적 존재론적 과제는 자체 안에서 존재의 존재시성을 산출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 (p573 각주 참고) 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오직 시간에 대한 관점에서부터만 파악 가능하기 때문에 존재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격리된 맹목적 문장 속에 담겨질 수 없다. 그 대답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충분히 오래된 것이어서 고대인들이 마련해놓은 가능성들도 개념파악하는 것을 배울수 있다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 실패의 운명이 현존재적으로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통찰되어야 비로소 대답이 충분하게 주어진 셈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