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강

권순모
2020-02-10
조회수 369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강 1976년 1월 7일



김정인(2020.2.11.)



강의란 무엇인가 | 예속된 앎들 | 투쟁의 역사적 앎, 계보학과 학문적 담론들 | 계보학의 관건인 권력 | 권력에 대한 법적 경제적 개념 파악 | 억압으로서의 권력과 전쟁으로서의 권력 |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즘을 뒤집기



강의란 무엇인가

▶ 푸코의 강의 : 연구에 있을 법한 방향의 암시, 생각이나 도식의 파편이자 소묘나 도구에 지나지 않음. →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푸코가 아니라 청강생의 몫[← 강의자가 사용법과 관련한 규칙을 세워서는 곤란], 현재의 강의는 자신의 연구 작업에 관해 제도적이고 정기적인 간격으로 보고하는 자리로 만들고자 함.

▶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연구 작업에 대한 푸코의 평가 1971년 콜레드주프랑스에 교수로 부임



- 통합적인 전체를 이루지도, 하나의 연속을 형성하지도 않은 복수의 단편적 연구로서 하나로 완결되지 않고 후속 연구도 이뤄지지 않은 것임/분산적이고 반복적인 연구 과정에서 끊임없이 동일한 궤도, 주제, 개념에 다시 빠지게 만드는 연구

- 그간의 연구 내용 : 형사소송절차의 역사와 관련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 19세기 정신의학의 진보와 제도화, 궤변술이나 그리스의 화폐나 중세의 이단 심문에 관한 고찰, 17세기 고백의 실천이나 18-19세기 아동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통제를 통해 이뤄진 성의 역사 혹은 성의 앎의 역사에 관한 서술, 비정상에 대한 이론과 앎의 발생을 그것과 연결된 모든 기술[기법]을 갖고 탐지하는 것



# 푸코의 저작들

1961 광기의 역사 서구 사회에서 시대별로 광기를 정의하는 방식, 광기와 이성을 구별하는 방식,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광기가 표출되는 방식을 논함

| 1962 레이몽 루셀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레이몽 루셀의 작품을 분석

| 1963 임상 의학의 탄생 18세기 후반의 의학 담론과 사회제도 사이의 관계를 전문 용어로 분석

| 1966 말과 사물 각 시대별로 지식이 조직화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망. 여러 학문 분야에서 지식이 조직화되는 방식들 간의 유사성을 다룸

| 1969 지식의 고고학 불연속성 개념을 구사, 담론 구성체 개념을 체계화하고 담론이 방생하고 통제되는 방식을 설명.

| 1973 나, 피에르 라비에르 19세기 프랑스 농민으로 가족 3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리에르 리비에르의 회고록, 사료 분석, 푸코 분석이 텍스 분석에 적용되는 방식을 소개

| 1975 감시와 처벌 범죄자에 대한 처벌 방식의 역사적 변화. 범죄자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가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지 않음

| 1976 성의 역사 1권 : 앎의 의지 섹슈얼리티 및 우리가 섹슈얼리티와 억압을 생각하는 방식을 설명. 권력관계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푸코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음.

| 1984 성의 역사 2권 : 쾌락의 활용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적 쾌락과 이것을 불러 일으켰던 도덕적 문제 사이의 관계 분석. 자아의 해석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 1984 성의 역사 3권 3권 : 자기에의 배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 관계가 중심적인 문제임. 타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는 가를 분석(이상, 푸코 저서 분석은 사라 밀스(임경규 옮김),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앨피, 2008)





- 지금까지 해온 작업은 첫째 연구의 실마리에 불과,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 둘째 연구는 점묘화일 뿐이고 이것을 선으로 연결해 굴절시키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고, 나는(푸코)는 이것들을 계속 뒤쫓거나 혹은 다르게 배열하는 일을 함.

- 푸코=향유고래 : 일시적이고 작은 물보라의 흔적을 남기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잘 보지도 않고 누구도 목격할 수도 없고 확실하다고도 할 수 없는 수면 아래에서 마치 깊고 논리 정연하고 잘 숙고된 일련의 수맥을 그리면서 헤엄치는 향유고래!

- 지금까지 한 작업은 단편적이고 동시에 반복적이고 불연속적인 진보를 이루어냄

-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자료나 참고도서, 먼지 낀 텍스트, 한 번도 읽히지 않은 문서, 인쇄되자마자 서가의 책꽂이에 사장되어 잠을 자다가 수세기 뒤에나 선반에서 끌어내진 책들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열병환자의 무기력증’(=게으른 버릇=아무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낭비적 앎=페이지 구석에 여기보란 듯이 주를 붙이는 벼락부자의 앎을 부르짖는 사람에게 고유한 성급한 타성= 프리메이슨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 시민주의적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적 취미)

-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의 작업이었지만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10년 혹은 15년 간 우리가 적합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음.



예속된 앎

▶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1960년대, 1970년대 전반)의 2가지 특징

① 국지적 비판, 즉 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공격이 지닌 실효성이 드러남.

- 반정신의학 담론의 실효성 : 반정신의학은 실존적 분석[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에서 새로운 개념적 도구를 찾았던 정신의학] 루트비히 빈스방거의 사례 : 실존주의와 심리치료를 결합한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와 달리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수용하는 현존재 분석으로 세계 내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 마주침의 문제,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집인 “Dream and Existence”를 푸코가 프랑스어로 번역함.

과 맑스주의나 빌헬름 라이히의 이론에 기반. 라이히나 마르쿠제 마르쿠제와 라이히 모두 맑스주의자(?), 마르쿠제는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노동소외 사상, 프로이트의 에로스 사상을 통합해 현대의 고도산업사회와 산업문명에 대한 변증법적인 부정철학인 비판이론 개진함.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자로서 정치를 불신하고 자율적인 섹슈얼 유토피아인 “워크-데모크라시”를 고안함, 성의 자유를 통해 전체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함.

에 막연하게 의거해 도덕이나 전통적인 성적 위계질서에 맞서 일어났던 공격의 실효성

- 사법기관에 대한 공격의 실효성 : “계급 정의” 같은 극히 의심스러운 일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공격, 아나키스트적 주제와도 거의 연결된 적이 없는 공격

- 『안티-오이디푸스』의 실효성 : 감히 책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한, 그 자체가 지닌 놀라운 이론적 창조력 외에는 어디에도 거의 의거하지 않는 책=사물=사건, 가장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피분석자가 자신이 누운 침대에서 오랜 시간 방해 없이 분석가의 의자로 흘러 들어갔던 중얼거림까지 [그 자체의] 쉰(생생한)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데 성공함. 모든 형태의 파시즘 ─ 이미 자리를 잡은 파시즘이건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파시즘이건 간에 ─ 에 반대하는 이러한 삶의 기술에는 몇 가지 핵심 원리들이 수반된다. 내가 이 위대한 책을 일상생활의 매뉴얼 혹은 가이드로 만들어야 한다면 그 원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치적 행동을 모든 형태의 통일적이고 총체적인 편집증에서 해방시켜라. -행동과 사유와 욕망을 세분화[하위구분]와 피라미드식 위계화가 아니라 증식·병치·분리/이접disjonction를 통해 성장시켜라. - 서구 사상이 아주 오랫동안 권력 형식이자 현실/실재에의 접근 방식으로 신성시했던 ‘부정적인 것’의 낡은 범주들(법, 한계, 거세, 결핍, 누락)에서 벗어나라. [부정적인 것보다는] 포지티브하고 다양한 것을, 획일성보다 차이를, 통일성보다는 흐름flux을, 체계보다는 유동적 배치를 선택하라. 생산적인 것은 정주적이 아니라 유목적이라고 생각하라. - 싸우고 있는 대상이 혐오스럽더라도 투사가 되려면 슬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혁명적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표상/재현의 형식들 속으로의 욕망의 도주가 아니라) 욕망을 현실[실재]에 연결하는 끈이다 - 정치적 실천에 진리값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유를 이용하지 말라. 사유가 마치 단순한 사변에 불과한 것인 양 사유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정치적 실천을 이용하지 말라. 정치적 실천을 사유의 강화기제로 활용하고, 분석을 정치적 행동의 개입 형식 및 영역의 다양화기제로 활용해라. - 철학이 정의했던 것과 같은 개인의 “권리들”을 복원하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말라. 개인은 권력의 생산물이다. 필요한 것은 배가(倍加)와 전위(轉位)를 통해 다양한 배치들을 탈-개인화하는 것이다. 집단은 위계화된 개인들을 통일시키는 유기적 연결 끈이 아니라, 탈-개인화의 항상적인 발생장치여야 한다. -권력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푸코, 「안티 오이디푸스 서문-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 1972).



- 사물, 제도, 실천, 담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통해 우리 자신, 신체, 일상적 몸짓의 가장 친숙하고 견고하며 가까운 토양도 쉽게 바스라질 수 있음을 목도

- 연약하고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며 국지적인 비판의 놀라운 실효성&총체적 이론 즉 포괄적이고 전반적인 이론에 고유한 억제 효과

- 가령 맑스주의, 정신분석은 국지적으로 사용가능한 도구들을 일정한 조건=담론의 이론적 통일성이 중지되는 조건[잘라지고 잡아당겨지고 잘게 토막나고 뒤집혀지고 자리가 바꿔지며 희화화되고 놀림감이 되고 연극화된다]에서만 제공, 이론이 총체성의 용어로 다시 파악될 때는 반드시 억제 효과로 귀착됨

- 비판의 국지적 성격은 아둔하고 소박하거나 어리석은 경험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무른 절충주의도, 기회주의도, 이론적 기획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를 터무니없을 정도의 이론적 비약함으로 귀착시키는 자발적 금욕주의도 아님.

- 비판이 지닌 근본적으로 국지적인 성격이란 비판의 유효성을 정립하기 위해 이른바 그 어떤 공통 체계의 허락도 필요로 하지 않는, 중심화되지 않은, 일종의 자율적인 이론적 생산을 말함.

② 국지적 비판은 ‘앎의 회귀’를 통해 이루어짐 : “아냐! 앎이 아니라, 삶을”,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책이 아니라 돈[여행]을” → ‘예속된 앎’들의 봉기



▶ 예속된 앎

① 기능적 일관성이나 형식적 체계화 속에 파묻히거나 은폐된 역사적 내용

: 정신요양원이나 감옥에 대한 실효적 비판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내용의 등장, 역사적 내용만이 기능적 정돈이나 체계적 조직화가 은폐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즉 대결과 투쟁의 균열점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 줌[정신요양원에서의 삶의 기호학이나 범죄의 사회학X].

2) 비개념적인 앎, 충분히 세공되지 않은 앎, 자격을 박탈당한 채 있는 일련의 앎, 소박한 앎, 서열상 하위의 앎, 필요했던 인식이나 과학성의 수준보다 낮은 수준의 앎,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자격을 박탈당한 앎이 재출현해 국지적 비판을 행함/정신치료를 받는 사람의 앎, 환자의 앎, 간호사의 앎, 의학의 앎에 평행적이면서도 주변적인 것으로서의 의사의 앎, 범죄자의 앎= ‘서민의 앎&rsquo=개별적인 앎, 국지적이고 지역적인 앎, 미분적인 앎, 만장일치란 있을 수 없는 앎, 그 주변의 모든 것에 대립된다는 예리한 차별에 의해서만이 그 힘을 얻는 그런 앎→서민의 국지적인 앎, 자격을 박탈당한 앎이 재등장해 국지적 비판을 행함



투쟁의 역사적 앎, 계보학과 학문적 담론들

▶ 전문적인 역사 지식과 국지적이고 개별적이고 공통감각 없이 방치된 서민의 앎이 ‘예속된 삶’이라는 동일한 범주에서 짝짓기를 하면서 지난 15년간 담론 비판의 힘이 되었음.

- 박식의 앎과 (지식과 과학의 위계질서에 의해 자격이 박탈된) 서민적 앎은 모두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 즉 서로 견제했던 싸움의 기억에 기반해 있음. → 다양한 형태의 계보학적 연구 등장, 그것은 투쟁의 재발견인 동시에 싸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의미

- 박식한 앎과 서민적 앎의 짝짓기로서의 계보학의 유일한 성립 조건 : 위계질서와 이론적 전위의 특권을 지닌 총괄적인 담론의 전제(專制)를 제거

- 계보학=박식한 지식과 국지적 기억의 결합 →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을 형성, 그런 앎을 현재의 전술에 활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몇 년의 작업이 빚어낸 계보학에 대한 잠정적 정의]

- 계보학적 기획을 관통하는 것은 경험주의도 [과학의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실증주의적 회귀도 아님 ①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이며 자격이 박탈되고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앎을, 그것을 여과하고 위계질서화하며 질서를 부여하는 통일적인 이론적 심급에 맞서 작동하는 것 ② 소수의 몇몇이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참된 지식, 과학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질서를 부여하려는 통일적인 이론적 심급에 맞서도록 하는 것

- 계보학=반(反)과학으로서 앎의 봉기=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담론에 고유한 권력 효과에 맞서 싸우는 것

ex) 맑스주의 담론과 정신분석 담론이 과학 담론과 맺는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유사성에 대한 물음, 이전에 ‘과학이다’라는 주장이 수반하는 권력의 야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해야 함. 즉 ‘당신이 맑스주의가 과학, 즉 합리적 구조를 가졌고 그 명제는 결국 검증 절차의 소관임을 증명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곧 그것은 곧 당신이 서구가 중세 이후 과학에 부여했고 과학 담론을 말했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권력효과를 맑스주의적 담론과 그 담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님’

- 계보학=역사적인 앎을 탈예속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기획=통일적이고 형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론적 담론의 강제에 대립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국지적[들뢰즈의 소수자적] 앎을 활성화하는 것

▶ 고고학은 국지적인 담론태의 분석에 고유한 방법, 계보학은 국지적 담론태에서 출발해 이로부터 풀려난 탈예속화된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

- 최근 4-5년 전부터 푸코가 반복해온 모든 단편적인 연구,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동시에 중단된 채 있는 이 모든 주제가 이런 계보학의 요소로 간주될 수 있음.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함.



계보학의 관건인 권력

- 모래에서 파낸 앎을 모든 예속에서 벗어난 생생한 상태에서 활용하고 유통하려고 하자마자, 이 요소들이 통합적 담론에 의해 재코드화하고 재식민화되어버릴 위험은 없을까요? 어떤 통일적 담론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세워버릴 위험은 없을까요?

- 과학적 담론의 권력 효과에 맞선 앎의 싸움, 즉 앎의 계보학을 회피하려고 하는 통일적 이론의 침묵, 신중함은 그들이 전혀 겁을 먹지 않았음의 징표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함.

- 분산된 모든 계보학에 연속적이고 견고한 이론적 지반을 제공하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은 곤란, 계보학을 통일시키는 일종의 이론적 왕관을 씌워서는 안 됨.

▶ 올해 강의부터는 과학적 담론의 앎·권력의 효과, 과학적 담론의 제도에 맞서는 앎들의 대립·투쟁·반란에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규명하고자 함.

- 권력이란 무엇인가?X, 사회의 상이한 수준과 다양한 영역에서 상이한 외연을 갖고 작동하고 있는 이 상이한 권력 장치란 무엇인가?O, 메커니즘, 효과, 관계의 차원에서 권력 장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여기서 관건은 권력의 분석이 어떻게 경제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인가임.



권력에 대한 법적 경제적 개념 파악

▶ 18세기 철학자들의 자유주의적 개념 규정과 맑스주의적 개념 규정의 공통점 : 권력이론의 ‘경제주의’

- 고전적인 사법 권력 이론에서 권력은 소유할 수 있고 이전 혹은 양도할 수 있는 권리로 간주됨. 모든 개인이 권력을 쥐고 있으며 그 권력을 [정치권력]·정치적 주권을 구성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양도, 정치권력은 계약적 교환으로 분류되는 사법적 작동 모델 위에서 구성됨. 결국 권력과 재산, 권력 부 사이에는 명백한 유비관계가 존재함.

- 맑스주의의 일반적 개념 규정에도 권력의 경제적 기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음.

- 권력의 경제적 기능성 : 권력은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생산력의 발달과 이에 고유한 전유양상을 통해 가능해진 계급지배를 연장하는 역할을 함. 정치권력은 자신의 역사적 존재 이유, 자신의 구체적 형식과 현실적 기능의 원리를 경제에서 발견

- 권력을 비경제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도구는? 권력은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며, 행위 속에서만 존재한다! 권력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관계의 유지와 갱신이 아니라 그 자체 힘 관계에 기반함. 권력이 행사되는 것이라면 그 행사란 무엇인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 행사의 기제란 무엇인가?를 탐구해야 함.



억압으로서의 권력과 전쟁으로서의 권력

- ①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억압이다! 권력은 본성, 본능, 계급, 개인을 억압한다(헤겔, 프로이트, 라이히), 권력에 대한 분석은 곧 억압의 메커니즘에 관한 분석

- ② 권력은 전쟁이다,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 권력이 힘 관계의 작동이자 전개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에게 권력은 힘의 관계이다. 또는 차라리 모든 힘 관계는 하나의 권력관계이다. 우선 권력이 하나의 형식, 예를 들면 국가형식이 아님을, 나아가 권력관계는 마치 지식처럼 어떤 두 형식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힘은 결코 단수가 아니며 언제나 본질적으로 다른 힘과의 연관 아래서만 존재한다. 모든 힘이란 이미 언제나 하나의 관계, 즉 권력이다. 힘은 다른 힘 이외의 어떤 대상 또는 주체도 갖지 않는다...푸코는 힘의 관계가 무엇보다 폭력을 넘어서며 폭력에 의해서는 결코 정의될 수 없다고 본다. 이는 폭력이 스스로가 파괴하거나 변형을 가하는 어떤 특정존재나 대상 또는 육체에 작용하는 것인 반면, 힘이란 또 다른 힘들 이외의 어떤 대상도 갖지 않는 것, 관계성 이외에 어떤 존재도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란 ”행위에 대한 행위, 즉 현재 또는 미래의, 현실적 또는 실제적인 모든 행위에 대한 행위“이며 ”가능한 행위에 대해 가해지는 모든 행위의 총체“이다...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묻지 않는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가? 다만 우리는 이렇게 물을 뿐이다.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는가? 권력의 행사는 특정한 ‘영향력’(affect)으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힘이 그 자체로 자신의 권력에 의해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힘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다른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질 들뢰즈[허경 옮김], 『푸코』, 그린비, 2019, 123-125).

라면 권력은 양도, 계약, 이양의 용어 혹은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기능적 용어로 분석되기 보다는 투쟁, 대결, 또는 전쟁과 같은 용어로 분석되어야 함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즘을 뒤집기

▶ 칼 폰 크라우제비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다.”

- 의미: ① 권력관계는 역사적으로 시기구분이 되는 특정 시기에 전쟁 와중에 또한 전쟁에 의해 확립된 일정한 힘 관계에 정박되어 있음. 정치권력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시민사회에 평화를 수립하거나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것이 전쟁의 효과를 중단시키거나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드러난 불균형을 중성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힘 관계를 일종의 조용한 전쟁에 의해 제도, 경제적 불평등, 언어, 심지어 각자의 신체에 계속 기입하려는 것임.→정치란 전쟁에서 드러난 힘의 불균형을 승인하는 것이자 갱신하는 것 ② [시민전쟁 혹은 내전과 반대되는]시민평화의 내부에서 정치투쟁이나 권력에 관련된, 권력에 대한, 권력을 위한 항쟁이나 한쪽의 증대·정복 등 힘 관계의 변경 같은 모든 것은 하나의 정치체제에 있어서 전쟁의 계속으로 해석되어야 함. 즉, 전쟁 자체의 에피소드, 전쟁의 단편화, 전쟁의 이전으로 해석해야, 평화와 그 제도의 역사를 쓸 때조차 그것은 결국 전쟁 역사를 쓰는 것임. ③ 최종 결정은 전쟁에서 즉 무기가 최후의 판관이 되는 힘겨루기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 최후의 전투가 정치를 종식시킨다는 것, 최후의 전투가 지속된 전쟁으로서의 권력의 행사를 최후에만 정지시킬 수 있음.

▶ 비경제주의적 도식으로 본 두 개의 권력 분석 가설 : ① 라이히의 가설 : 권력 메커니즘이 억압 ② 니체의 가설 : 권력 관계의 토대가 힘들 사이의 전쟁 같은 싸움

- 압제=사법적 차원에서 주권 남용, 억압=전쟁의 정치적 결과

▶ 권력 분석의 대립적인 두 개의 체계

- 정치권력은 계약-압제[사법적 도식, 합법과 비합법의 대립] : 사람들이 원초적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주권을 구성하는 것이 권력이고 계약이 정치권력의 모태라는 입장. 계약 조항을 벗어나면 압제[남용]

- 정치권력은 전쟁-억압[지배-억압, 투쟁과 복종의 대립], 억압은 지속적인 전쟁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사이비 평화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계속 작동하는 힘 관계





[앞으로의 강의]

- 최근 푸코 연구는 투쟁-억압의 도식 안에 있음. 하지만 억압, 전쟁 개념은 여전히 크게 달라져야 할 만큼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음. 권력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억압 메커니즘이라는 가설, 정치권력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본질적으로 전쟁 같은 관계라고 하는 가설 역시 상세히 검토해야 함.

- 억압 가설에 대한 의심 : 형법의 역사, 정신의학적 권력의 역사, 소아성욕에 관한 통제의 역사 등과 관련해서는 권력 형성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적어도 그 이상임을 보여주고자 함.

- 다음 강의는 억압 개념에 관한 비판적 재검토 : 권력 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규정하는 것으로 오늘날 널리 퍼진 이 억압 개념이 어째서, 왜 권력 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명확하게 정의하는데 부적합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함.[← 이 내용이 다음에 나오지는 않음]

- 전쟁의 문제 : 전쟁, 투쟁, 힘의 충돌 등의 이항 도식이 실제로 어떤 점에서 시민사회의 토대인 정치권력의 행사의 원리이자 동력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살피고자 함. 권력의 기능을 분석할 때 전술, 전략, 힘 관계 같은 개념은 유효할까? 권력은 그저 무기와 다른, 전투와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일까요?

-“권력은 사회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 사회의 정치구조가 어떤 이가 다른 이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또는 다른 이의 반항에 맞서 자신의 지배를 방어할 수 있게, 또는 단순히 자신의 승리를 방어하고 다른 이를 예속시킴으로써 승리를 영속화할 수 있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

- 시민사회에서 전쟁에 대한 이론가로 간주되는 마키아벨리, 홉스는 제외하고 시작함.

- 전쟁을 권력 작용의 역사적 원리로 간주하는 전쟁 이론을 인종 문제라는 맥락에서 다시 분석할 예정, 서구에서 정치권력을 전쟁으로서 분석할 가능성이 처음 보인 게 인종의 이항 대립이기 때문, 인종투쟁과 계급투쟁이 정치사회에서 전쟁 현상과 힘 관계를 가늠하는 데 곧잘 사용되는 두 개의 거대한 도식이 되었던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