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안티 오이디푸스]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성가족

권순모
20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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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L’ANTI ŒDIPE』

발제; 박아무개 2020.2.7.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성가족 聖家族

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오이디푸스의 양태들】

* 특수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나라는 삼각형 형상이며, 인물로 나타난 가족 성좌이며, 정신분석은 이러한 오이디푸스를 교의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아이에게 있는 전-오이디푸스, 정신병자에게 있는 탈-오이디푸스, 다른 민족들에게 있는 곁-오이디푸스 등의 관계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 일반화된 오이디푸스; 교의로서의 오이디푸스 기능, <핵심 콤플렉스>로서의 오이디푸스의 기능.

*오이디푸스의 양태들

계열의 오이디푸스(정신분석가는 양성의 각 주체에서의 충동들, 감정들, 관계들의 강도 계열을 고려. 이것들을 콤플렉스의 정상적, 긍정적 형식과 콤플렉스의 전도된 또는 부정적 형식을 통일). ☜「자아와 이드 」(1923) 집단의 오이디푸스(정신분석가는 주체들 자신의 외연적 공존과 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고려하여 방계 친족, 자손들, 조상들을 통일). 구조의 오이디푸스(상상계와 싱징계의 구별은 위치들과 기능들의 체계로서의 오이디푸스. 이 위치들과 기능들은 특정한 사회구성체 내지 병리학 구성체 속에서 이것들을 점유하는 자들의 가변적 형상과 합치하지 않음. 〔구조의 오이디푸스(3+1)〕 이는 삼각형과 합치하지 않으며, 규정된 영역에서 욕망과 욕망의 대상 그리고 그 법을 분배함으로써 가능한 한 모든 모든 삼각형화를 수행한다.



【정신분석에서의 오이디푸스적 전환점】

* 앞서 설명한 오이디푸스의 비판은 상상적 오이디푸스에만 적용되고 또 부모 형상들의 역할을 다루어서 상징적 위치들과 기능들의 구조와 그 질서에 대해 완전히 피상적이고 보잘 것 없다고 판단할 위험이 있다.

* 참된 차이는 상상적이면서도 구조적인 오이디푸스와 모든 오이디푸스가 억압하고 탄압하는 다른 어떤 것, 즉 욕망적 생산 사이에 있다. 이 때 욕망적 생산은 욕망 기계들이며, 욕망기계들은 구조는 물론이고 인물들로도 환원할 수 없으며, 상징계와 상상계 양자 너머에 또는 이것들 아래에서 현실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다.

* 무의식의 생산들과 무의식의 불변항 사이(욕망 기계들과 오이디푸스 구조 사이)에는 부합이 있을까? 아니면 그 불변항은 그 모든 변주와 양상을 가로질러 단지 하나의 오랜 오류의 역사를, 끝나지 않는 탄압의 노력을 표현할 뿐이 아닐까? 우리가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이미지, 및 구조와 혼인한 자원으로서 정신분석이 실천적· 이론적으로 전념하는 맹렬한 오이디푸스이다.

* 분열증마저도 오이디푸스화하는 것만이 중요할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 심지어는 정반대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분열증화하는 것, 즉 무의식의 장을 또 역사장 · 사회장을 분열증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오이디푸스의 속박을 풀어 도처에서 욕망적 생산들의 힘을 다시 발견하고, 정신분석 기계, 욕망 그리고 생산의 연줄을 심지어 현실계에 다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무의식 자체는 더 이상 구조적이지도 인물적이지도 않으며, 상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상하지도 형상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기계 작동하며 기계적이다. 무의식은 상상계도 상징계도 아니다. 무의식은 현실계 그 자체요, <불가능한 현실계> 및 그것의 생산이다.



【욕망적 생산과 재현】

*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욕망의 재생산은 이론에서는 물론 치료 과정에서도 단순한 재현에 자리를 내준다. 생산적 무의식은 자기를 표현할 줄밖에 모르는, 즉 신화, 비극, 꿈에서 밖에 자기를 표현할 줄 모르는 무의식에 자리를 내준다.

* 무의식 속의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화하는 동시에 신경증화하는 일, 무의식 전체를 가족 삼각형으로 꽉 움켜잡는 일. 여기서는 바로 분열자가 적이다. 욕망적 생산은 인물화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인물론화되고 상상화되고 구조화된다. 생산은 이제 환상의 생산, 표현의 생산일 뿐이다. 무의식은 본래의 모습, 즉 하나의 공장, 하나의 작업장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극장, 즉 무대와 연출이 되고 만다.



【욕망 기계들의 단념】

*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경제의 기초 개념들, 즉 노동과 투자는 그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적 무의식의 형식들에 종속되어 있을 뿐, 더 이상 생산적 무의식의 구성체들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다. 욕망의 생산의 무오이디푸스적 본성은 현존하지만, <전-오이디푸스>, <곁-오이디푸스>, <준-오이디푸스> 등으로 번역되는 오이디푸스의 좌표들에 유인되고 있다.

* 정신분석가들은 오이디푸스를 도입하고, 무의식 전체 속에 그것을 주입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후 오이디푸스는 마치 욕망의 모든 생산력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기나 한 양 욕망적 생산으로 복귀해서 이것을 전유했다. 정신분석가는 오이디푸스의 시녀, 욕망 속의 반생산의 큰 담당자가 되었다.



2.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오이디푸스화 / 법원장 슈레버의 망상의 진압】

* 프로이트의 글에서, 슈레버의 망상이 지닌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내용에 관해서는, 마치 리비도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양 한마디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성적 논의와 신화학적 논의만이 주로 언급되고 있는데, 전자는 성욕과 가족 콤플렉스를 용접하고 후자는 무의식의 생산적 역량과 <신화들과 종교들의 건설적 힘들>의 부합을 정립한다.



【어떤 점에서 정신분석은 아직도 독실한가】

* 프로이트와 융한테는 “왜 신화로 되돌아가는가?”, “왜 신화를 모델로 삼는가?”하는 근본적 물음은 무시되고 기각된다.(신화를 척도로 무의식을 측정하고 처음부터 생산적 구성체들을 단순한 표현적 형식들로 대체) 무의식들을 이렇게 되면 [무의식과 신화들 및 종교들의] 추정된 부합은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이른바 신비 추리적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는 거꾸로 <낮은 곳>을 향하는 분석적 방식으로, 신화를 충동들과 관련해 해석할 수도 있다.

* 융은 가장 확산되고 가장 영적인 종교성으로 인도된 반면, 프로이트는 가장 엄격한 무신론을 확신하게 되었다. 종교를 무의식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무의식을 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종교적인 것을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것이다(죄책감!)--- 교회들과 장신분석의 화해---“이 점에서 우리도, 우리는 아직도 독실하다!”

신을 부정하는 자는 <2차적인 것>밖에 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는 인간의 실존을 내세우기 위해,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기 위해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맑스의 선언.

하지만 인간의 자리가 전혀 딴 곳에, 즉 인간과 자연의 공통-외연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낯선 존재, 자연과 인간을 넘어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의 가능성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신화라는 매개, 즉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을 경유할 필요가 없다. 그는 무의식의 자기-생산 지역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에서 무의식은 고아인 동시에 무신론자이다.

* 프로이트는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을 모두 욕망이 직접 투자할 수 없는 하나의 나중 내지 하나의 너머(un par-après ou un au-delà)로 설정하는데, 그는 이 “너머”가 욕망의 분석적 변형을 통한 가족 콤플렉스에서 유래하는지, 아니면 그 변형을 통한 신비적 상징화속에서 의미화하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무관심하다.



【결핍의 이데올로기 – 거세】

* 프로이트의 텍스트 [아이가 매를 맞는다](1919)에서, 오이디푸스 제국주의는 부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녀에게서 상정되는 환상의 세 시기 중에서, 첫째 시기는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나타나지 않은 시기요, 셋째 시기는 아버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고, 둘째 시기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런 애매함도 없이> 영롱한 빛으로 환히 빛난다. 하지만 이 둘째 국면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무의식인 채로 머무르기에 단지 정신분석에 의해 재구성될 뿐이다.



* 프로이트는 환상의 집단적 성격을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하기를 바라며, 또한 환상의 변형된 모습들은 엄밀하게 배타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분리들 속에서 조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소년들의 환상은 두 시기만 나타나는데, 첫째 시기는 <소년들이 교사에게 매를 맞는> 시기이고, 마지막 시기는 <내 어머니가 나를 때리는> 시기이다. 소녀들의 둘째 시기와 소년들의 첫째시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버지의 우세가 아무 애매함이 없이 단정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 이는 두 성에 각각 결핍을 주고, 비대칭적인 두 계열에 결핍을 분배하며, “너는 소녀 아니면 소년이다!”라는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는다. (---) 거세는 공통된 운명, 말하자면 우세하며 초월적인 남근인 동시에, 소녀들에게는 음경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나고, 소년들에게는 음경을 잃는 공포 내지 수동적 태도의 거부로 나타는, 배타적 분배이다. 이 공통된 어떤 것은 무의식의 분리들의 배타적 사용의 기초를 놓아야 하며, 우리에게 체념을 가르쳐 준다. 이 공통된 어떤 것, 즉 ‘거대한 남근’, ‘중첩될 수 없는 두 얼굴의 결핍’은 순전히 신화적이다. 그것은 부정신학(否定神學)의 일자(一者)와 같다. 그것은 욕망에 결핍을 도입하며, 배타적 계열들을 생겨나게 해서 이 계열들에 하나의 목표, 하나의 기원, 하나의 체념의 길을 고착한다.



※부정신학 (negative theology)

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력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다 묘사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다만 부정적인 표현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는 신학사상. “신은 ~가 아니다.” 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신은 ~이다.” 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이는 불가지론과는 다른데,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신의 존재와 행위가 계시되었다고 본다. ( 네이버지식백과) ❝“I pray God to rid me of God❞”(Meister Eckhart)



* 남녀 양성에 대한 결핍의 법칙에 반대되는 것도 말해야 한다. 두 성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지만, 이와 동시에 두 성은 횡단적 양태로는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는데, 이 방식에서 각 주체는 두 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 두 성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다른 주체의 한 성 내지 다른 성과 소통한다. 부분대상들의 법칙

* 부분대상들의 법칙에서 그 무엇도 결핍되어 있지 않으며, 결핍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의식 속의 분리들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으며, 고유하게 포괄적인 사용의 대상이다.

* 정신분석 고유의 오류추리 이탈될 수 있는 부분대상에서 이탈된 것으로서 하나의 완전한 대상(남근)의 정립으로 이행하는 지점에서 성립. 이 이행은 특정한 성을 가진 고정된 자아로 규정된 주체를 함축하며, 이 주체는 하나의 결핍으로서 전제군주적인 완전한 대상에 필연적으로 예속해 살아간다.

* 거세는 오이디푸스화의 완성이다.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거세하고 거세를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거세는 생산적인 욕망 기계들의 수천의 흐름-절단들이 하나의 똑같은 신화적 장소, 즉 기표의 단일한 자취 속에 투사될 때 얻어진다.



【모든 환상은 집단 환상이다】

* '아이를 때린다, 아이들이 매를 맞는다'는 환상은 전형적으로 집단 환상이다. 이 환상에서 욕망은 사회장과 그 탄압적 형식들 자체를 투자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회적-욕망적 기계가 출현한다.

*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의 본성의 차이에서, 전자는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사회장을 규정하는 <상징적> 분절들과 분리할 수 없는 반면, 개인 환상은 이 사회장 전 체를 <상상적> 소여들로 몰아붙이는 것 같다.

* 개인 환상 그 자체는 사회장을 상상적 성질들을 통해 파악한다. 그리고 이 상상적 성질로 말미암아 사회장에는 일종의 초월성 내지 불멸성이 부여된다. 기존 사회 질서에 부여된 불멸성은 자아 속에 탄압의 모든 투자, 동일시, '초자아화', 거세 등의 현상들, 모든 욕망-체념을 끌어넣는다. 또한 이 사회질서를 위해 죽겠다는 체념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그러한 한 개인 환상의 상상적 차원은 죽음 충동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반면 그 충동 자체는 바깥으로 투사되어 타인들을 겨냥한다. 이와 반대로 집단 환상의 혁명적 극極이 나타나는 것은 제도들 자체란 죽기 마련이라고 체험하는 권력에서, 그리고 죽음 충동을 참된 제도적 창조성으로 만들기 위해 욕망과 사회장의 마디들을 따라 제도들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는 권력에서이다.

-개인 환상은 자아를 주체로 갖고 있다. 이때의 자아는 그 속에서 그것이 <자신을 상상하는> 합법적이고 합법화된 제도들에 의해 규정된 한에서의 자아를 말한다. (---)하지만 집단 환상은 이제 충동들 자체, 그리고 이 충동들이 혁명적 제도와 더불어 형성하는 욕망 기계들만을 주체로 갖는다. 집단 환상은 분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서 각 주체는 자신의 인물적 동일성은 제거되었으면서도 독자성은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부분대상들의 고유한 소통을 따라 다른 주체와 관계를 맺게 된다.

* 환상의 두 유형(또는 환상의 두 체제): '재화'의 사회적 생산이 하나의 자아를 매개로 자신의 규칙을 욕망에 부과하느냐, 아니면 정감(affect)들의 욕망적 생산이 자신의 규칙을 제도들에 부과하느냐에 따라 구별.

* 클로소프스키는 사회적 생산과 생산관계들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의 제도인지, 정감들 내지 충동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부구조 자체의 일부가 되고 있는지 발견하고 있다. 정감들 내지 충동들은 경제적 형식들 속에서 자신의 탄압뿐 아니라 이 탄압을 부수는 수단들도 창조함으로써 하부구조의 일부가 되고 온갖 방식으로 거기에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구별들의 발전은, 결국 개인 환상이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두 종류의 집단들이 즉 주체 집단들과 예속 집단들이 있다. 또한 이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의 안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 프로이트의 환상의 차원들은 그 본성상 환상을 예속 집단들에 관련시키며, 모든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의 담당자들을 가족적 재생산의 형상들 위에 포갤 때, 우리는 불안에 빠진 리비도가 오이디프스를 내면화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리비도는 언표 주체와 언표행위 주체를 거세하는 이원성의 형식으로 오이디프스를 내면화 하는데, 이야말로 사이비-개인적 환상의 특성이다. 하지만 이 이원성은 인공적이고 파생된 것이요. 집단 환상 속에 있는 언표행위의 집단 담당자들과 언표의 직접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흐름으로서의 리비도】

*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 」(1931).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무엇인가가 잘되어 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치료는 더욱 더 종결될 수 없는 것으로 가고 있다. 치료의 장애물들; 욕망의 경제적 문제가 다만 양에 관한 것이기만 했다면 모든 것이 잘되어 갔으리라. 하지만 충동들에 맞서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저 성숙하고 강한 자아, <계약>, 정상적 자아와 분석가 사이의 <협정>--- 따위가. 욕망 경제학 속에는 질적 요인들이 있어서 바로 이것들이 치료의 장애가 되는데, 프로이트는 자기가 이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음을 뉘우치고 있다.

* 요인 ① 비대칭적인 두 빗면을 지닌 거세라는 <바위>이다. 정신분석은 이 바위에 기대고 있다. ② 갈등을 유발하는 질적 소질이다. 이 소질 때문에 리비도의 양은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응하는 두 힘으로 나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한테서 이 두 힘 사이에 서로 환원되지 않는 대립들을 만들어 낸다. ③ 그 위치를 정할 수 없는 일종의 저항들과 관련. 이 요인은 역학적 및 장소론적 고찰로는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경제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어떤 자들은 끈적이는 리비도를 갖고 있고 반대로 어떤 자들은 아주 막힘없이 흐르는 리비도를 갖고 있어서 아무것도 그들을 <제어할>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 욕망의 현상 중 가장 본질적인 것, 즉 리비도의 여러 질적 흐름들이 문제 되고 있다. 앙드레 그린은 세 가지 유형의 <회합>을 표로 만들어 이 문제를 거론한다.



⓵ 유형 1; 점착성, 즉 히스테리 형식의 저항. 담론은 현재 일어난 일이 지배적이며(---) 수수께끼인 꿈은 2차적으로 가공된다. 전이는 끈끈해진다.

② 유형 2; 유동성, 즉 강박 형식의 저항. 환자는 분석 상황에 아무런 근본적 변화도 생기게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말을 할 수 있다. 무의식의 갈고리로 걸려 나오지도 않고, 전이 속에 정박하지도 않는다.

③ 유형 3; 좋은 분석이라 정의. (환자가) 내놓는 모든 해석은 그 의미화를 기다리고 있는 기성품-기의로 주어질 수 있다. 해석은 언제나 회고적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 흐름들의 반란】

* 프로이트는 질적 요인들을 치료의 장애로 해석할 뿐, 치료 자체의 결함, 즉 치료 절차의 결과나 역효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치료가 행사되는 인공적 조건들(전이)속에서 오이디푸스화가 촉진되고 강화된다.

* (정신분석)치료의 좋은 조건: 오이디푸스에 의해 막히는 흐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대상(남근)에 포섭되는 부분대상들, 신화적 장소에 투사되는 흐름-절단들, 일대일 대응과 선형화되는 하나의 기표에 매달린 다의적 사슬들, 자신을 표현하는 무의식, 온전 특유한 연결 종합들, 배타적 제한적 분리 종합들, 인물적 분리 차별적 결합종합들, < 따라서 이것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 역으로 리비도의 흐름들이 더러 치료의 실천에 저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자아의 저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적 생산 전체의 요란한 아우성이다. 우리는 이미 도착증자가 잘 오이디푸스화되지 않는다(오이디푸스의 영토성보다 더 인공적이고 더 몽상적인 영토성들을 발명)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분열자가 오이디푸스화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영토성 바깥에 있고, 자기 흐름들을 사막까지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토지에서마저도 히스테리 내지 강박 형식의 <저항들>이 욕망의 흐름들의 무오이디푸스적 질을 증언하고 있다. 질적 경제학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는 흐름들이 새어나오고, 삼각형을 가로질러 지나가, 삼각형의 꼭짓점들을 서로 떼어 놓아 오이디푸스의 마개는 이 흐름들을 제어할 수 없다.

* 우리는 오이디푸스화되기도 하고 거세되기도 한다. 이 조작들을 발명해 낸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다. 제 나름의 탁월함을 발휘하여 새로운 자원들과 절차들을 제공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것이 욕망적 생산의 아우성을 잠재우기에 충분할까?

“우리는 모두 분열자다! 우리는 모두 도착증자다! 우리는 너무 끈적이는 또는 너무 막힘없이 흐르는 리비도이다---. 이리 되고 싶어서 그리 된 게 아니다. 탈영토화된 흐름들이 우리를 데려간 그곳에서 이렇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억지로 오이디푸스와 거세에 직면하여 이것들에 내몰린다. 하지만 어쨌든 나쁜 일이 생겼고 치료는 오이디푸스화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에는 온통 오물이 뿌려져 있었다. 차라리 분열증화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치료에서 치유되었을 터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