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L’ANTI ŒDIPE
발제: 황선애 2020.01.30
1장 욕망기계들
5. 기계들
욕망의 기계들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절단의 첫 번째 양태-흐름과 채취(선취)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첫째로 모든 기계는 연속적 물질적 흐름(휠레hylè)과 관련을 맺고 있고, 절단은 이 연합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실제로 휠레는 관념 안에 있는 물질의 순수한 연속성을 가리킨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정의한다.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횡단적 내지 초한적 연결들의 극한에서, 부분대상과 연속된 흐름, 절단과 연결은 하나로 합쳐진다. 도처에 욕망이 솟아나는 흐름-절단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의 생산성이요,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는 일을 한다.(75)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1882-1960, 영국 정신분석학자)은 부분대상에 대한 심오한 발견을 했지만, 흐름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모든 연합을 무시했다.
-코네티커connecticut: connect(연결하라)-I(나는)-cut(자른다)라고 꼬마 조이가 외친다.
;베델하임Bettlheim(1903-1990, 미. 아동 심리학자)의 조이Joey 사례. 기계-아이의 경우 욕망의 생산 체제, 고장이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루고, 절단이 기계적 연결들의 이부를 이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는 삶의 일부일 뿐이고 삶의 전체 경험에 대한 자율적 반응>이 있다. 기계들 자체가 욕망의 상실이나 억압(자폐증)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욕망 기계가 기계아이를 생산했는가?
;기관 없는 신체와 욕망 기계→ 조이의 편집증 기계들, 기적 기계들, 독신 기계들의 거치는 과정
-
절단의 둘째 양태-사슬 또는 코드 그리고 이탈
-둘째로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지니고 있다.
-이 코드는 몸의 상이한 지역들에 자신이 등록되고 전달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과 관련해 몸의 각 지역이 등록과도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의 기관은 상이한 연결들에 따라 여러 흐름들에 연합될 수 있다.(77)-‘거식증인 입’
-라캉Lacan은 무의식의 코드를 발견했고, 정신분석을 변화시켰다- 「도둑맞은 편지」
;하지만 이 영역은 그 다양체가 이상해서, 하나의 사슬 또는 하나의 욕망적 코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다. 이 사슬들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표 사슬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기호들 자체는 의미화를 행하지 않는다.
-코드는 언어라기보다는 개방적, 다의적 형성물인 은어와 더 유사하다. 기호들은 코드 안에서 아무 본성이건 가질 수 있으며, 기호들의 전달매체(le support)에는 무관심하다.(전달매체가 기호들과 무관한 것 아닐까? 전달매체는 기관 없는 신체다)
-사슬은 동종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알파벳 행렬과 유사하다.
;서양란의 코드와 말벌의 관계: 각 사슬은 다른 사슬들의 파편들을 포획하여 그 파편들에서 잉여가치를 끌어온다.
;철도 변경, 제비뽑기 체계:
내부코드에서, 외부 환경에서, 유기체의 이 부위 저 부위에서 오는 등록과 전달들은 거대한 선언적 종합의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을 따라 서로 교차한다. 여기에 글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하게 다의적이며 결코 일대일대응 관계도 선형도 아닌, 바로 실재에 그대로 쓴 글이요, 횡단담론적transcursive글, 결코 담론적discursive이지 않은 글이다.(78-79)
-이 사슬들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이탈의 끊임없는 소재지이다. 도처에 있는 분열들(schizzes), 이것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메워서는 안 된다.
-채취-절단과 이탈-절단의 구분:
채취-절단: 연속적 흐름들과 관련되며, 부분대상들로 회부된다.
이탈-절단: 이종(異種)적 사슬들과 관련되며, 이동이 쉬운 블록이나 벽돌 같은 이탈 가능한 절편들, 이동 가능한 재고들을 통해 진행한다.
-사회적 코드: 전제군주와 분열자의 경우
;전제군주의 기표는 모든 사슬을 부수고 선형화하고 일대일 대응시키며, 벽돌들을 만리장성을 짓기 위한 이동 불가능한 요소들로 써먹는다. 분열자는 욕망의 코드라는 새로운 다의성을 되찾기 위해 늘 이 사슬들을 풀고 떼어내고 모든 방향으로 가져간다.
-모나코브와 무르그Monakow et Mourgue: 신경학에 욕망을 도입
;기능해리diaschisis와 본능해리diaspasis-벽돌들은 등록 절차라는 관점에서 욕망 기계들의 본질적인 부품.-벽돌 이론, 벽돌들의 이탈 및 벽돌들의 파편화 이론
절단의 셋째 양태-주체와 잔여
-셋째 절단은 여분-절단 또는 잔여-절단으로, 이것은 기계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을 생산한다.
-이 주체는 기계 곁에 있는 하나의 몫일 뿐 아니라, 기계에 의해 실행되는 사슬의 이탈들과 흐름의 채취들에 상응하는 부분들이 되돌아오는 하나의 공유된 몫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주체는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 상태들에서 태어나며,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몫으로서 이 상태들에서 항상 귀결된다. 이 부분 각각은 한순간에 기관 없는 신체를 채운다.(81)
-부분은 전체와 아무 관계도 없다. <부분은 완전히 혼자서 자신의 부분 노릇을 한다. 여기서 주체는 자기 분할(partition)에서 자기 분만(parturition)으로 진행한다. (...) 이렇게 때문에 주체는 여기서 자신과 관련된 것, 즉 우리가 시민 자격을 주는 상태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여기에 도달하는 일만큼 집요하게 매달리게 되는 일도 없다. 부분(pars)이 되기 위해 주체는 자기 이익의 대부분을 기꺼이 희생하리라...>(라캉).(81)
-주체의 절단은 결핍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와 반대로 주체에게 몫이 돌아오는 부분, 주체에 여분으로 돌아오는 수입을 가리킨다. 절단들은 분석의 사실이 아니다. 절단들 자체가 종합들이다. 나눔들을 생산하는 것은 종합들이다.(81)
-욕망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 양태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자이다.
;첫째 양태: 연결 종합, 리비도- 채취에너지, 둘째 양태: 분리 종합, 누멘-이탈에너지,
셋째 양태: 결합 종합, 볼룹타스-잔여에너지
-욕망적 생산의 경과: 생산의 생산(채취), 등록의 생산(이탈), 소비의 생산(여분 남기기)-생산하기, 욕망의 실재적 작업들을 수행
6. 전체와 부분들
다양체들의 위상
-모든 것은 욕망 기계들 속에서 동시에 기능하지만, 그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un tout)로 재통합하지 않는 총합 속에서 기능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이 문제를 문학 기계의 층위에서 제기한다.
;서로 차이로서의 차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차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잃어버린 근원적 총체성(une totalité)이나 도래할 결과적 총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파편들(les fragments)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사유할 것인가?(83)
-다양체multiplicité라는 범주만이 욕망적 생산을 설명할 수 있다. 욕망적 생산은 순수한 다양체, 말하자면 통일체unité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우리는 부분대상들, 벽돌들, 잔여물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기원의 총체성도 목적지의 총체성도 믿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부분들 곁에서 이러한 총체성을 만난다면, 그것은 이 부분들의 전체un tout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총체화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들 전체의 통일체une unité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통일하지는 않으며, 별도로 구성된 새로운 부분으로서 지금까지 있어온 부분들에 덧붙이는 것이다.
-<통일성이 출현한다. 영감을 받아 태어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도로 구성된 조각처럼 전체에 붙여진다>(프루스트M.Proust, 발자크H.Balzac 작품에 대해, 8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문학 기계에서, 어떤 지점에서건 모든 부분이 비대칭적인 두 쪽, 끊긴 방향들, 닫힌 상자들, 통하지 않는 관들, 칸막이들로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이것은 탁월한 분열적 작품이다.
-작품에서 법의 엄격함의 진정한 목적은 조각난 세계를 면죄해주기 위함이다.-죄책감이나 죄책감의 고백의 테마(샤를뤼스, 알베르틴)는 다른 테마인 양성의 칸막이 속에 있는 식물적 순진함(l’ingénuité végétale dans le cloisonnement des sexes)과 얽혀 있다.
-프루스트:“전체는 생산된다. 그것 자체는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된다. 그것은 통합하지도 않고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는 관들 사이에 엉뚱한 소통들만을 만들면서,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는 요소들 사이의 횡단적 통일들만을 만들면서 부분들에 부착된다.”(85)
-작품의 철도 여행에서 여행자가 그리는 횡단성-근접시킨다. 바꾸어 놓아 본다는 것은 조이스Joyce가 말하는 <다시 구현하기re-embody>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부분들에 적용되고 부분들로 복귀할 때, 기관 없는 신체는 기표 사슬들의 절단들과 거기서 눈에 띄는 주체의 절단들을 통해 부분대상들의 기능적 절단들이 끊임없는 재절단되는 자기 자신의 표면 위에서, 횡단적 소통들, 초한적 총합들, 다의적. 횡단담론적 기입들을 생겨나게 한다.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 아니라,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로 따로 생산되며, 부분들에 적용된다.(83-84)
-부분과 전체의 문제-기계론이나 생명론이나 모두 욕망 기계들의 본성을 파악 못함, 기계론적인 것에 욕망 도입, 욕망 속에 생산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
부분대상들
-멜라니 클라인은 부분대상들, 폭발들, 회전들, 진동들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 대상들의 논리를 그르쳤을까?
:i)그녀는 이 대상들을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들을 실재적 생산의 관점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판단했다. 부분 대상을 욕망 기계들의 경과(proscès)라는 생산의 진정한 경과에 결부하지 않았다.
ii)그녀는 편집-분열증적 부분대상들이 하나의 전체와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부분대상들은 온전한(global전체의, 포괄적인) 인물들에서 채취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자아들, 대상들, 충동들에 관련된 통합의 총체성들 속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나, 어머니, 아버지 사이의 대상관계의 1차 유형을 구성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다.
-부분대상들은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를 뛰어넘을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욕망적 생산은 절대적으로 무無오이디푸스적 성격이다. 그러나 멜라니 클라인은 전체, 온전한 인물들, 완전한 대상들이라는 관점을 그대로 유지했다.-오이디푸스의 굴레를 뛰어넘는데 부분대상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비판, 오이디푸스 기만
-멜라니 클라인의 딕Dick 사례
;딕(작은 기차)-아빠(큰 기차)-엄마(정거장), 엄마(세면대)-딕(물에 젖음)→ “이건 오이디푸스야”
-이렇게 되면 모든 욕망적 생산은 으깨지고, 부모의 이미지들로 복귀하고, 전-오이디푸스 단계들에 맞추어 늘어놓이고, 오이디푸스 속에서 총체화 된다. 그리하여 부분대상들의 논리는 무로 환원되고 만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이 논리의 시금석이 된다.(89)
-무의식은 인물들을 모른다. 부분 대상들은 부모라는 인물의 대표가 아니며, 가족 관계들의 전달매체도 아니다. 부분대상은 욕망 기계들 속 부품들이고, 오이디푸스의 형상 속에 자신을 등록하는 것에 비해 환원불가능하며 1차적인 생산의 경과 및 생산관계들에 관계된다.(89)
아이는 이미... ...
-프로이드와 융Freud et Jung
-융은 정신분석가가 전이에 있어 자주 악마, 신, 마법사로 나타나며, 그 역할들이 부모의 이미지들을 독특할 정도로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욕망 기계들의 성적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성욕의 가족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성욕은 아이가 성장하면 더 이상 가족 관계가 아닌 사회관계들 속에서 파악된다.
-프로이드는 성욕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나중>의 형식으로 사회적(형이상학적) 관계들 속에서 승화내지 중화된다고 인정
-융은 관계들이 성욕이 아닌 에너지를 작동하며, 성욕은 그 나름대로 이 에너지를 신비적인<너머>로 상징화하는 데 그친다고 인정
-그들은 리비도는 사회장 내지 형이상학장을 매개 없이 투자할 수 없다고 믿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방안을 기어다는 아이. 아이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모의 대표로서 체험되는가?
-욕망 기계, 부분 대상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적 이지 않다. 그것은 관계들의 전달매체이며, 담당자들의 분배자이다.
-어린아이는 가족 안에서 엄청난 비가족적 경험을 하고 있다.-린드너의 그림
-중요한 건, 부모의 삶과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욕망적 생산에서 부모의 위치와 부모의 기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요, 거꾸로 욕망 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이디푸스의 제한된 코드로 복귀시키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욕망적 생산의 등록표면에 나타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아이는 부분대상인 젖가슴을 어머니라는 인물에 관계 짓고, 끊임없이 어머니의 얼굴을 살핀다. -<관계 짓는다>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산적 관계가 아니라, 기입에서의, 누멘에서의 하나의 설명, 하나의 기입을 가리킨다.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온통 욕망적 삶을 살며, 욕망의 대상들 및 욕망의 기계들과 온통 비가족적 관계를 맺는다. 아이는 직접적 생산이라는 관점에서는 부모와 관련이 없지만, 경과의 등록이라는 관점에서는 이 등록의 아주 특수한 조건들 아래서, 이 조건들이 경과 자체에 대해 반작용을 하긴 해도(되먹임) (사랑이나 미움과 더불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
고아인 무의식
-아이가 자기 삶을 체험하고 또한 산다는 게 뭔지 자문하는 것은 부분대상들 한 가운데서이고, 욕망적 생산의 비가족적 관계들 안에서 이다.
-아르토A.Artaud의 경우; 존재론적 질문들-아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아이의 물음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부모와 관련된다는 관념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의 삶을 외이디푸스 틀 속에 구겨 넣고, 가족관계들을 어린 시절의 보편적 매개로 만들면, 무의식 자체의 생산과 무의식에 직접 결부되는 집단 메커니즘들을, 특히 본원적 억압, 욕망 기계들, 기관 없는 신체 등의 작용 전체를 몰라볼 수밖에 없다.(93)
-왜냐하면 무의식은 고아이며, 그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난
엄마-아빠 게 아냐
정신분석에서 잘 안 되는 일은 뭐지?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 둘 모두는 나중이나 너머를 구성하지 않는다.
-욕망적 생산의 본성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어떤 압력들 아래서 오이디푸스 삼각형화가 경과의 등록 속에 개입하는지를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의 삶과 그 여파, 성인의 신경증적. 정신병적 문제들, 그리고 성욕 전부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확산되고 일반화된 오이디푸스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정신분석에 대한 로렌스Lawrence의 반발
;그는 인공 삼각형 안에 성욕을 가두고 있으며, 이 삼각형은 욕망의 생산으로서의 성욕 전체를 질식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성욕을 다시 <더러운 작은 비밀>, 가족의 작은 비밀로 만들고, 자연과 생산이라는 엄청난 공장 대신 내밀한 극장으로 만든다고 인식.-그는 성욕에 더 많은 힘 내지 잠재력이 있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정신분석은 <그 더러운 작은 비밀을 소독하게> 되었지만, 현대의 폭군인 오이디푸스를 전면에 내세움.
-푸코M.Foucault는 광기와 가족의 관계가 어떤 점에서 19세기 부르주아사회 전체와 관계된 발전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 -이 발전을 통해 가족 성원들의 책임과 그들의 죄책감이 가족에게 부여
-정신분석이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 속에 집어넣고 죄책감의 고백을 오이디푸스에게 귀결되는 자기 형벌의 모습들에서 다시 찾아내는 한, 정신분석은 혁신이 아니라 19세기 정신의학이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고 있다.
-정신분석은 실효적인 해방 사업에 참여하는 대신, 가장 일반적인 부르주아 탄압 작업에 가담한다. 이 탄압 작업은 유럽의 인간을 아빠-엄마의 굴레에 묶고 바로 이 문제를 끝장내지 못하도록 한다.
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L’ANTI ŒDIPE
발제: 황선애 2020.01.30
1장 욕망기계들
5. 기계들
욕망의 기계들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절단의 첫 번째 양태-흐름과 채취(선취)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된다.
-첫째로 모든 기계는 연속적 물질적 흐름(휠레hylè)과 관련을 맺고 있고, 절단은 이 연합적 흐름에서 채취를 수행한다. 실제로 휠레는 관념 안에 있는 물질의 순수한 연속성을 가리킨다. 절단은 연속성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성의 조건을 이루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적 연속성으로서 내포하거나 정의한다.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 이런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횡단적 내지 초한적 연결들의 극한에서, 부분대상과 연속된 흐름, 절단과 연결은 하나로 합쳐진다. 도처에 욕망이 솟아나는 흐름-절단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의 생산성이요,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는 일을 한다.(75)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1882-1960, 영국 정신분석학자)은 부분대상에 대한 심오한 발견을 했지만, 흐름에 대한 연구를 경시하고, 모든 연합을 무시했다.
-코네티커connecticut: connect(연결하라)-I(나는)-cut(자른다)라고 꼬마 조이가 외친다.
;베델하임Bettlheim(1903-1990, 미. 아동 심리학자)의 조이Joey 사례. 기계-아이의 경우 욕망의 생산 체제, 고장이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루고, 절단이 기계적 연결들의 이부를 이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어머니는 삶의 일부일 뿐이고 삶의 전체 경험에 대한 자율적 반응>이 있다. 기계들 자체가 욕망의 상실이나 억압(자폐증)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욕망 기계가 기계아이를 생산했는가?
;기관 없는 신체와 욕망 기계→ 조이의 편집증 기계들, 기적 기계들, 독신 기계들의 거치는 과정
-
절단의 둘째 양태-사슬 또는 코드 그리고 이탈
-둘째로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지니고 있다.
-이 코드는 몸의 상이한 지역들에 자신이 등록되고 전달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과 관련해 몸의 각 지역이 등록과도 분리시킬 수 없다. 하나의 기관은 상이한 연결들에 따라 여러 흐름들에 연합될 수 있다.(77)-‘거식증인 입’
-라캉Lacan은 무의식의 코드를 발견했고, 정신분석을 변화시켰다- 「도둑맞은 편지」
;하지만 이 영역은 그 다양체가 이상해서, 하나의 사슬 또는 하나의 욕망적 코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다. 이 사슬들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표 사슬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기호들 자체는 의미화를 행하지 않는다.
-코드는 언어라기보다는 개방적, 다의적 형성물인 은어와 더 유사하다. 기호들은 코드 안에서 아무 본성이건 가질 수 있으며, 기호들의 전달매체(le support)에는 무관심하다.(전달매체가 기호들과 무관한 것 아닐까? 전달매체는 기관 없는 신체다)
-사슬은 동종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알파벳 행렬과 유사하다.
;서양란의 코드와 말벌의 관계: 각 사슬은 다른 사슬들의 파편들을 포획하여 그 파편들에서 잉여가치를 끌어온다.
;철도 변경, 제비뽑기 체계:
내부코드에서, 외부 환경에서, 유기체의 이 부위 저 부위에서 오는 등록과 전달들은 거대한 선언적 종합의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을 따라 서로 교차한다. 여기에 글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하게 다의적이며 결코 일대일대응 관계도 선형도 아닌, 바로 실재에 그대로 쓴 글이요, 횡단담론적transcursive글, 결코 담론적discursive이지 않은 글이다.(78-79)
-이 사슬들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이탈의 끊임없는 소재지이다. 도처에 있는 분열들(schizzes), 이것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메워서는 안 된다.
-채취-절단과 이탈-절단의 구분:
채취-절단: 연속적 흐름들과 관련되며, 부분대상들로 회부된다.
이탈-절단: 이종(異種)적 사슬들과 관련되며, 이동이 쉬운 블록이나 벽돌 같은 이탈 가능한 절편들, 이동 가능한 재고들을 통해 진행한다.
-사회적 코드: 전제군주와 분열자의 경우
;전제군주의 기표는 모든 사슬을 부수고 선형화하고 일대일 대응시키며, 벽돌들을 만리장성을 짓기 위한 이동 불가능한 요소들로 써먹는다. 분열자는 욕망의 코드라는 새로운 다의성을 되찾기 위해 늘 이 사슬들을 풀고 떼어내고 모든 방향으로 가져간다.
-모나코브와 무르그Monakow et Mourgue: 신경학에 욕망을 도입
;기능해리diaschisis와 본능해리diaspasis-벽돌들은 등록 절차라는 관점에서 욕망 기계들의 본질적인 부품.-벽돌 이론, 벽돌들의 이탈 및 벽돌들의 파편화 이론
절단의 셋째 양태-주체와 잔여
-셋째 절단은 여분-절단 또는 잔여-절단으로, 이것은 기계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을 생산한다.
-이 주체는 기계 곁에 있는 하나의 몫일 뿐 아니라, 기계에 의해 실행되는 사슬의 이탈들과 흐름의 채취들에 상응하는 부분들이 되돌아오는 하나의 공유된 몫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주체는 자신이 경유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 상태들에서 태어나며,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몫으로서 이 상태들에서 항상 귀결된다. 이 부분 각각은 한순간에 기관 없는 신체를 채운다.(81)
-부분은 전체와 아무 관계도 없다. <부분은 완전히 혼자서 자신의 부분 노릇을 한다. 여기서 주체는 자기 분할(partition)에서 자기 분만(parturition)으로 진행한다. (...) 이렇게 때문에 주체는 여기서 자신과 관련된 것, 즉 우리가 시민 자격을 주는 상태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여기에 도달하는 일만큼 집요하게 매달리게 되는 일도 없다. 부분(pars)이 되기 위해 주체는 자기 이익의 대부분을 기꺼이 희생하리라...>(라캉).(81)
-주체의 절단은 결핍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와 반대로 주체에게 몫이 돌아오는 부분, 주체에 여분으로 돌아오는 수입을 가리킨다. 절단들은 분석의 사실이 아니다. 절단들 자체가 종합들이다. 나눔들을 생산하는 것은 종합들이다.(81)
-욕망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 세 양태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자이다.
;첫째 양태: 연결 종합, 리비도- 채취에너지, 둘째 양태: 분리 종합, 누멘-이탈에너지,
셋째 양태: 결합 종합, 볼룹타스-잔여에너지
-욕망적 생산의 경과: 생산의 생산(채취), 등록의 생산(이탈), 소비의 생산(여분 남기기)-생산하기, 욕망의 실재적 작업들을 수행
6. 전체와 부분들
다양체들의 위상
-모든 것은 욕망 기계들 속에서 동시에 기능하지만, 그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un tout)로 재통합하지 않는 총합 속에서 기능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이 문제를 문학 기계의 층위에서 제기한다.
;서로 차이로서의 차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고유한 차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잃어버린 근원적 총체성(une totalité)이나 도래할 결과적 총체성에 의존하지 않는 파편들(les fragments)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사유할 것인가?(83)
-다양체multiplicité라는 범주만이 욕망적 생산을 설명할 수 있다. 욕망적 생산은 순수한 다양체, 말하자면 통일체unité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우리는 부분대상들, 벽돌들, 잔여물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기원의 총체성도 목적지의 총체성도 믿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부분들 곁에서 이러한 총체성을 만난다면, 그것은 이 부분들의 전체un tout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총체화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들 전체의 통일체une unité이기는 하나 이 부분들을 통일하지는 않으며, 별도로 구성된 새로운 부분으로서 지금까지 있어온 부분들에 덧붙이는 것이다.
-<통일성이 출현한다. 영감을 받아 태어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도로 구성된 조각처럼 전체에 붙여진다>(프루스트M.Proust, 발자크H.Balzac 작품에 대해, 8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문학 기계에서, 어떤 지점에서건 모든 부분이 비대칭적인 두 쪽, 끊긴 방향들, 닫힌 상자들, 통하지 않는 관들, 칸막이들로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이것은 탁월한 분열적 작품이다.
-작품에서 법의 엄격함의 진정한 목적은 조각난 세계를 면죄해주기 위함이다.-죄책감이나 죄책감의 고백의 테마(샤를뤼스, 알베르틴)는 다른 테마인 양성의 칸막이 속에 있는 식물적 순진함(l’ingénuité végétale dans le cloisonnement des sexes)과 얽혀 있다.
-프루스트:“전체는 생산된다. 그것 자체는 부분들 곁에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생산된다. 그것은 통합하지도 않고 총체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는 관들 사이에 엉뚱한 소통들만을 만들면서,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보존하는 요소들 사이의 횡단적 통일들만을 만들면서 부분들에 부착된다.”(85)
-작품의 철도 여행에서 여행자가 그리는 횡단성-근접시킨다. 바꾸어 놓아 본다는 것은 조이스Joyce가 말하는 <다시 구현하기re-embody>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부분들에 적용되고 부분들로 복귀할 때, 기관 없는 신체는 기표 사슬들의 절단들과 거기서 눈에 띄는 주체의 절단들을 통해 부분대상들의 기능적 절단들이 끊임없는 재절단되는 자기 자신의 표면 위에서, 횡단적 소통들, 초한적 총합들, 다의적. 횡단담론적 기입들을 생겨나게 한다. 전체는 부분들과 공존할 뿐 아니라,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로 따로 생산되며, 부분들에 적용된다.(83-84)
-부분과 전체의 문제-기계론이나 생명론이나 모두 욕망 기계들의 본성을 파악 못함, 기계론적인 것에 욕망 도입, 욕망 속에 생산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
부분대상들
-멜라니 클라인은 부분대상들, 폭발들, 회전들, 진동들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 대상들의 논리를 그르쳤을까?
:i)그녀는 이 대상들을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들을 실재적 생산의 관점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판단했다. 부분 대상을 욕망 기계들의 경과(proscès)라는 생산의 진정한 경과에 결부하지 않았다.
ii)그녀는 편집-분열증적 부분대상들이 하나의 전체와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부분대상들은 온전한(global전체의, 포괄적인) 인물들에서 채취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자아들, 대상들, 충동들에 관련된 통합의 총체성들 속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나, 어머니, 아버지 사이의 대상관계의 1차 유형을 구성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다.
-부분대상들은 그 자체로 오이디푸스를 뛰어넘을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욕망적 생산은 절대적으로 무無오이디푸스적 성격이다. 그러나 멜라니 클라인은 전체, 온전한 인물들, 완전한 대상들이라는 관점을 그대로 유지했다.-오이디푸스의 굴레를 뛰어넘는데 부분대상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비판, 오이디푸스 기만
-멜라니 클라인의 딕Dick 사례
;딕(작은 기차)-아빠(큰 기차)-엄마(정거장), 엄마(세면대)-딕(물에 젖음)→ “이건 오이디푸스야”
-이렇게 되면 모든 욕망적 생산은 으깨지고, 부모의 이미지들로 복귀하고, 전-오이디푸스 단계들에 맞추어 늘어놓이고, 오이디푸스 속에서 총체화 된다. 그리하여 부분대상들의 논리는 무로 환원되고 만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이 논리의 시금석이 된다.(89)
-무의식은 인물들을 모른다. 부분 대상들은 부모라는 인물의 대표가 아니며, 가족 관계들의 전달매체도 아니다. 부분대상은 욕망 기계들 속 부품들이고, 오이디푸스의 형상 속에 자신을 등록하는 것에 비해 환원불가능하며 1차적인 생산의 경과 및 생산관계들에 관계된다.(89)
아이는 이미... ...
-프로이드와 융Freud et Jung
-융은 정신분석가가 전이에 있어 자주 악마, 신, 마법사로 나타나며, 그 역할들이 부모의 이미지들을 독특할 정도로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욕망 기계들의 성적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성욕의 가족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성욕은 아이가 성장하면 더 이상 가족 관계가 아닌 사회관계들 속에서 파악된다.
-프로이드는 성욕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나중>의 형식으로 사회적(형이상학적) 관계들 속에서 승화내지 중화된다고 인정
-융은 관계들이 성욕이 아닌 에너지를 작동하며, 성욕은 그 나름대로 이 에너지를 신비적인<너머>로 상징화하는 데 그친다고 인정
-그들은 리비도는 사회장 내지 형이상학장을 매개 없이 투자할 수 없다고 믿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방안을 기어다는 아이. 아이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모의 대표로서 체험되는가?
-욕망 기계, 부분 대상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적 이지 않다. 그것은 관계들의 전달매체이며, 담당자들의 분배자이다.
-어린아이는 가족 안에서 엄청난 비가족적 경험을 하고 있다.-린드너의 그림
-중요한 건, 부모의 삶과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욕망적 생산에서 부모의 위치와 부모의 기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요, 거꾸로 욕망 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이디푸스의 제한된 코드로 복귀시키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욕망적 생산의 등록표면에 나타난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아이는 부분대상인 젖가슴을 어머니라는 인물에 관계 짓고, 끊임없이 어머니의 얼굴을 살핀다. -<관계 짓는다>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산적 관계가 아니라, 기입에서의, 누멘에서의 하나의 설명, 하나의 기입을 가리킨다.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온통 욕망적 삶을 살며, 욕망의 대상들 및 욕망의 기계들과 온통 비가족적 관계를 맺는다. 아이는 직접적 생산이라는 관점에서는 부모와 관련이 없지만, 경과의 등록이라는 관점에서는 이 등록의 아주 특수한 조건들 아래서, 이 조건들이 경과 자체에 대해 반작용을 하긴 해도(되먹임) (사랑이나 미움과 더불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
고아인 무의식
-아이가 자기 삶을 체험하고 또한 산다는 게 뭔지 자문하는 것은 부분대상들 한 가운데서이고, 욕망적 생산의 비가족적 관계들 안에서 이다.
-아르토A.Artaud의 경우; 존재론적 질문들-아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아이의 물음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부모와 관련된다는 관념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의 삶을 외이디푸스 틀 속에 구겨 넣고, 가족관계들을 어린 시절의 보편적 매개로 만들면, 무의식 자체의 생산과 무의식에 직접 결부되는 집단 메커니즘들을, 특히 본원적 억압, 욕망 기계들, 기관 없는 신체 등의 작용 전체를 몰라볼 수밖에 없다.(93)
-왜냐하면 무의식은 고아이며, 그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난
엄마-아빠 게 아냐
정신분석에서 잘 안 되는 일은 뭐지?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 둘 모두는 나중이나 너머를 구성하지 않는다.
-욕망적 생산의 본성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어떤 압력들 아래서 오이디푸스 삼각형화가 경과의 등록 속에 개입하는지를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의 삶과 그 여파, 성인의 신경증적. 정신병적 문제들, 그리고 성욕 전부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확산되고 일반화된 오이디푸스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정신분석에 대한 로렌스Lawrence의 반발
;그는 인공 삼각형 안에 성욕을 가두고 있으며, 이 삼각형은 욕망의 생산으로서의 성욕 전체를 질식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성욕을 다시 <더러운 작은 비밀>, 가족의 작은 비밀로 만들고, 자연과 생산이라는 엄청난 공장 대신 내밀한 극장으로 만든다고 인식.-그는 성욕에 더 많은 힘 내지 잠재력이 있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정신분석은 <그 더러운 작은 비밀을 소독하게> 되었지만, 현대의 폭군인 오이디푸스를 전면에 내세움.
-푸코M.Foucault는 광기와 가족의 관계가 어떤 점에서 19세기 부르주아사회 전체와 관계된 발전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 -이 발전을 통해 가족 성원들의 책임과 그들의 죄책감이 가족에게 부여
-정신분석이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 속에 집어넣고 죄책감의 고백을 오이디푸스에게 귀결되는 자기 형벌의 모습들에서 다시 찾아내는 한, 정신분석은 혁신이 아니라 19세기 정신의학이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고 있다.
-정신분석은 실효적인 해방 사업에 참여하는 대신, 가장 일반적인 부르주아 탄압 작업에 가담한다. 이 탄압 작업은 유럽의 인간을 아빠-엄마의 굴레에 묶고 바로 이 문제를 끝장내지 못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