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안티 오이디푸스] 1장 욕망 기계들 - 3. 주체와 향유 / 4. 유물론적 정신의학

권순모
2020-01-16
조회수 379

『안티 오이디푸스』 1장 욕망 기계들 3. 주체와 향유 4. 유물론적 정신의학

20200117 요약: muse

3. 주체와 향유(enjoyment)

*셋째 종합--결합 또는 소비의 생산

따라서 그것은......이다.

& 이상한 주체: 고정된 정체성도 없고, 기관 없는 신체 위를 방황하며, 항상 욕망 기계들 곁에 있고, 생산물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몫에 의해 정의되며, 도처에서 생성 내지 아바타라는 덤(a reward)을 얻고, 자신이 소비하는 상태들에서 태어나고 또 각 상태마다 다시 태어나기에 이상한 주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다, 따라서 그것은 내 것이다’

&향유: 맑스의 말처럼 괴로움(suffering)마저도 자기 향유다. 모든 욕망적desiring 생산은 미리부터 즉각 완수이자 소비며, 따라서 ‘쾌감’sensual pleasure이지만 각 나눔의 여분들 속에서 등록 표면의 분리들을 통해서만 자기 자리를 정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에게는 아직 그렇지가 않다. 쾌감에는 댓가가 따르고 이 쾌감 중 법원장이 느끼는 쾌감은 일부residual share이다. 다른 한편, 신은 세계질서에 적합하게 존재하는 영혼들의 조건에 따라 지속적인 향유constant state of enjoyment를 요구한다. 슈레버는 신이 계속 향유할 수 있도록 하고 그는 고난과 박탈에 대한 보상으로 감각적 향유sensual pleasure의 일부를 누린다.

&생산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일부가 등록 에너지(누멘)로 변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등록 에너지의 일부는 소비consummation 에너지(볼룹타스)로 변형된다. 바로 이 잔여 에너지가 무의식의 셋째 종합을, ‘따라서 그것은 ......이다’라는 결합 종합 또는 소비consummation 의 생산을 추동한다.

*독신기계(celibate machines)

&이런 종합synthesis, 이런 주체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본원적 억압의 편집증 기계paranoiac machine에서 나타났던 식의 저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 밀쳐냄은 기적 기계에서 하나의 끌어당김에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끌어당김과 밀쳐냄 사이에 대립은 지속된다.46

실효적 화해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 기능하는 새 기계의 층위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화해가 실존할 수 있다는 점은 모든 것이 증언해준다. 슈레버는 자신이 실제로 치료되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되찾은 바로 그 때에, 사실상 여장 남자(이성의 옷을 입는 성도착자)의 태도pose와 장치 paraphernalia of a transvestite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된다.

&독신기계: 신인류 또는 영광스러운 유기체의 탄생을 위해 욕망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 사이에 새 결연을 형성함으로써,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의 뒤를 잇는 이 기계를 지칭하기 위해 <독신기계>란 이름을 빌려 오자. 주체는 욕망 기계들 곁에서 여분으로서 생산된다는 말과 주체 자신은 이 제 3의 생산 기계 및 이 기계가 행하는 잔여적 화해, 즉 <따라서 이것은 그것 이었다>라는 놀라운 형식을 띤 소비의 결합 종합conjuntive synthesis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결국 같은 얘기다.47

미셀 카루주는 문학에서 발견한 몇 개의 환상적 기계들을 ‘독신 기계’란 이름 아래 떼어냈다. has identified 뒤샹의 「벌거벗은 신부」("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카프카의 「유형지에서」의 기계, 레몽 루셀의 기계들, 자리의 「초남성」supermale의 기계들, 에드거 앨런 포의 몇몇 기계들, 빌리에의 「미래의 이브」 등.

우선 독신 기계는 체형(體刑)tortures들, 그림자들, 옛 법 등으로 예전의 편집증 기계를 증언한다reveal. 독신 기계 자체는 편집증 기계가 아니다. 독신 기계는 그것이 주는 체형들 또는 죽음에서까지도 새로운 무언가를, 태양의 권력solar force을 드러낸다. 둘째로, 여기서 일어나는 변모transfiguration는, 비록 그 기계가 최고의 기입들inscriptions을 실효적으로 은닉하고 있기는 해도, 그 기계가 은닉하고 있는 기입으로 인해 지니는 기적을 낳는 성격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미래의 이브」에서 에디슨이 행한 등록들을 참조할 것).48

마치 기계적 에로티즘the eroticism of the machine이 다른 무제한적 권력forces들을 해방하기라도 하듯, 새 결연, 새 탄생, 눈부신 황홀 같은 혼례가 맺어지는 이 새 기계의 현행적 소비genuine consummation가, 즉 자기 성애적 또는 차라리 자동 장치적이라 할 수 있을 쾌락이 존재한다. is achieved

((종합의 세 차원, 또는 세 가지 생산이란 무엇인가? (1) 연결적/접속적 생산(connective production, 連言) (2) 분리적(탈구적) 생산(disjunctive production, 選言) (3) 접합적 생산(conjunctive production, 合言) - 생산은 결국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맺어주는 기계적 과정이다. ))



* 물질. 알. 그리고 강도들--나는 느낀다

물음은 다음과 같다. 독신 기계는 무엇을 생산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생산될까? 형태와 형식을 벗어 던진 순수하고 생생한 강도 상태intensive quantities들일 것이다. 환각 현상(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등)과 망상 현상(나는 ......라고 생각한다 등)은 더 깊은 차원에서의 ‘나는 느낀다’를 전제하며, 이것은 환각hallucination들에 대상object을 주고 생각의 망상delirium에 내용content을 준다. ‘나는 내가 여자가 됨을 느낀다’, ‘내가 신이 됨을 느낀다’ 등은 망상이나 환각이 아니며, 오히려 환각을 투사하거나 망상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순수한 강도는 밀쳐냄과 끌어당김이라는 두 힘의 대립에서 유래한다. 강도들 자신이 서로 대립하고 있고 어떤 중립 상태 주위에서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도들은 기관 없는 충만한 신체를 지칭하는 강도(=0)에서 출발해서 모두 플러스 값을 갖는다.

법원장 슈레버의 가설에 따르면, 끌어당김과 밀쳐냄은 기관 없는 신체를 잡다한 정도로 채우고 있는 강렬한 신경 상태들을 생산하며, 슈레버-주체는 이 상태들을 경유함으로써 영원회귀의 원(圓)에 따라 여자도 되고 어떤 다른 것들도 된다. 벌거벗은 상반신의 두 젖가슴은 망상이나 환각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기관 없는 신체 위의 어떤 강도 지역, 어떤 강도 지대를 지칭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알(卵)이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재현이 아니다. 모든 것은 삶이고 체험이다. 이는 마치 알 속의 한 예정된 지대가 거기에 들어설 기관을 닮지 않은 것과 같다. 거기에는 강도대(帶)들, 퍼텐셜들,potentials 문턱들, 기울기들밖에는 없다. 이것은 애절하고 너무나 감동적인 경험으로, 이를 통해 분열자는 물질에, 물질의 강렬하고 생생한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된다.50

* 역사의 이름들

정신분석은 어떻게 신경증자를 아빠-엄마만을 영원히 소비하고 다른 것은 전혀 소비하지 않는 불쌍한 피조물로 환원해 버리고, 현실에서 격리되고 삶에서 절단된 무기력한 자페증환자autistic rag로 환원해버리는 걸까? 이 삶의 운동 전체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길(짧은 길)에 따르면 기관 없는 신체 위의 분리 점들은 욕망 기계들 주위에서 수렴원(收斂圓)들을 형성한다. 그러면 기계 곁에서 잔여로서 생산된, 즉 기계에 인접한 부속물 내지 부품으로서의 생산된 주체는, 그 원의 모든 상태를 경유하고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이행한다. 주체 자신은 기계에 의해 점유된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고정된 정체성 없이 있으며, 중심에서 늘 벗어나고, 자신이 영유하는 상태들로부터 귀결된다.

복잡한 다른 길에서는, 편집증 기계와 기적 기계를 가로질러,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의 밀쳐냄과 끌어당김의 비율들이 독신 기계 속 0에서 출발하는 상태들의 계열을 생산한다.

&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며 갑작스레 이성을 잃어 낯선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문헌학 교수 니체-자아는 없다. 상태들의 계열을 경유하는, “역사의 모든 이름이 나다.....”라면서 역사의 이름들을 이 상태들에 동일시하는, 니체-주체가 있다.

주체는 자아가 그 중심을 저버린 원의 원주 위에서 자신을 펼친다. 중심에는 욕망의 기계가, 영원회귀의 독신 기계가 있다. 그 기계의 잔여 주체, 즉 니체-주체는 그 기계가 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독자가 니체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작품일 뿐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에서, 행복에 겨운 덤(볼룹타스)을 끌어낸다. 자신을 인물들과 동일시하지 말고, 역사의 이름들을 기관 없는 신체 위의 내공 지대들과 동일시하라. 그러면 그때마다 주체는 <이게 나다, 따라서 이게 나다!>라고 외친다. 분열자만큼 역사를 이용한 자는 없었다. 그는 단번에 세계사를 소비한다. 우리는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로 규정하면서 시작했는데, 결국 분열자는 호모 히스토리아(Homo historia)인 것이다.



4유물론적 정신의학

*무의식과 생산의 범주

‘전체적·체계적 성격의 망상은 부분적·국지적 자동증(自動症)들에 비하면 2차적이다.’ : 망상을 자동증automatistic phenomena에 2차적인 것으로 본 클레람보의 명제는 설득력이 있다. 망상이 고유한 종합들과 변용을 갖고 있지만 자율적 영역을 구성하지 못하고 욕망기계들의 작동과 고장에 비하면 2차적이다.(54)

망상의 좋은 부분a large part of delirium을 자동증의 결과라고 설명했고 개인적 부분에 관해서는 그것이 반응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동증에 앞서 성격(가령 편집증적 성격)에 관련되어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클레람보는 자동에서 말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신경학적 메커니즘만 보았을 뿐, 욕망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경제적 생산의 경과를 보지 못했다. 또 역사와 관련해서는 타고난 성격 내지 획득된 성격을 원용하는 데 그쳤다. 이런 의미에서 클레람보는 정신의학의 포이어바흐이다. 반대로 참된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기라는 이중 작업으로 정의된다.

* 극장이냐 공장이냐

관념론idealism 의 전형적 형식들과 가짜 유물론 사이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해리dissociation,(설명적 개념인 바 분열증에 특유한 장애나 1차적 결손을 지적) 자폐증,(이해를 도우려는 개념으로 분열증 결과의 특유성을 지적. 망상 자체 또는 절단. 시-공간 또는 세계-내-존재(표현적 개념인데 망상하는 인간을 그의 특유한 세계에서 발견 또는 재발견한다)라는 분열증 이론의 새 개념은 “신체의 이미지”를 매개로 분열증 문제를 자아에 관련시킨다. 하지만 자아는 엄마-아빠처럼 분열자가 오래전부터 믿지 않는 것이다.(55)

프로이트마저도 자아라는 이 좁은 관점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삼위일체 공식, 즉 오이디푸스, 신경증, 아빠-엄마-나라는 공식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분열자를 좋아하지 않으며 짐승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는 분열자를 낱말을 사물로 여기며 무감동하고 나르키소스적이며, 현실에서 절단되어있고 전이가 안되며 철학자를 닮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한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안에 놓이자마자, 술책이 작동해서, 생산이라는 본래의 유일한 관계는 제거되고 만다.

정신 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적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해 금세 은폐되었다. 즉 공장으로서의 무의식은 고대 극장으로 대체되었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은 재현으로 대체되었고, 생산적 무의식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인 무의식(신화, 비극, 꿈...)으로 대체되었다.

* 생산과정으로서의 과정

분열자는 흩어진 자아로, 때로는 절단된 자아로, 때로는 (가장 매력적인 것인데) 존재하기를 멈춘 적 없이 특유하게 자기 세계에 존재해온 자아로 여겨졌다. 이 마지막 경우는 약삭빠른 정신의학자, 포괄적인 이해력을 가진 뛰어난 관찰자, 요컨대 현상학자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여기서 한 번 더 맑스의 경고를 상기하자.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 맞힐 수 없고, 생산물에서 생산 체제와 생산관계를 알아맞힐 수 없다. 생산물은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경과가 아니라, 인과나 이해나 표현이라는 관념적 형식들에 관련될수록, 특유하게 보인다.

분열증은, 자폐증 속에서 억지로 인물화된 분열자의 질환이기에 앞서, 욕망과 욕망 기계들의 생산 과정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할까? 이 이행은 불가피한가? 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과정이라는 개념을 단절, 침입이라고 생각하며, 과정이 자아와의 허구적 imaginary관계와는 상관없다고 보고 이를 자연 속에 있는 ‘악령’ demoniacal 과의 관계로 본다 . 그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다만 과정을 경제적·물질적 현실로, 자연= 산업, 자연= 역사의 동일성 속에 있는 생산과정으로 착상하는 to view 일이었다.

* 결핍으로서의 욕망이라는 관념론적 착상(환상)

욕망의 논리는 첫걸음outset 부터 그 대상을 놓치고 있는데 그것은 생산과 획득 쪽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플라톤의 나눔이다. 욕망을 획득 쪽에 두면 욕망을 결핍으로 규정하게 되고 이는 관념론적 착상conception이다.(58)

칸트는 욕망을 “자신의 표상을 통해 이 표상의 대상들의 현실성을 야기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욕망 이론에서 비판적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정의를 예시하면서 칸트는 미신적 신앙들, 환각, 환상을 원용했다.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한 대상의 현실은 심리적 현실이다. 칸트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고전적 착상을 되묻지 않고, 거기에 기대고 의지해서 이 착상을 더 깊이 파고드는 데 그친다.(59)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욕망은 결핍, 대상의 결핍, 현실적 대상의 결핍이라고 규정한다. 욕망은 마치 <각 현실적 대상 뒤에는 꿈꾼 대상>이 있거나 현실적 생산들 뒤에는 정신적 생산이 있기라도 한 양, 현실을 이중화하게 될 하나의 상상물을 내부적으로 생산한다. 필요는 상대적 결핍에 의해 정의되고 자신의 고유한 대상에 의해 규정되는 반면, 욕망은 환상을 생산하는 자로서 나타나며, 대상에서 이탈함으로써, 또 이와 동시에 결핍을 배가해 절대적인 것으로 데려가 <존재의 치유할 수 없는 불충분함>, <삶 그 자체인 존재-의-결핍>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 욕망적 생산을 환상의 생산으로 환원하고 나면, 욕망을 결핍으로 정의하는 관념론적 원리의 모든 귀결을 끌어내는 데 그치고 만다.(60)

*현실계와 욕망적 생산 - 수동적 종합들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계이다.its product is real(그것의 생산물은 실재적이다) 현실계the real는 무의식의 자기-생산(자동생산 autoproduction)으로서의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고,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주체인데, 억압에 의해서만 고정된 주체가 생기기 때문에 그 주체는 고정된 주체이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이며, 즉 기계의 기계로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이며, 욕망의 대상 역시(그것에) 연결된 기계이다. 맑스의 말처럼 결핍은 없으며, 다만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로서의 겪음(passion.정념이 아닐까?)이 있다. 필요는 욕망이 생산하는 역-생산물이고 결핍은 욕망의 역-결과이다.

욕망은 대상적 실존existence의 조건들conditions 가까이에 있어서 이 조건들에 합류하고 이 조건들보다 오래가지 않고 이 조건들과 함께 이전되기에 죽으려는 욕망이 된다. 반변 필요는 이 조건들의 수동적 종합을 상실함으로써 욕망을 상실해 버린 주체의 소원withdrawal 정도를 나타낸다.

혁명가들 예술가들, 견자들은 욕망은 생산적 권력productive force으로 삶을 껴안으며, 욕망이 필요를 더 적게 가질수록 그만큼 더 강렬한 방식으로 삶을 재생산 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깨비phantasmal 세계?는 결코 충분히 정복된 적 없는 세계이다. 그것은 과거의 세계이지, 미래의 세계가 아니다.

결핍은 사회적 생산 속에서 (만들어지고) 설비되고 조직된다. 결핍은 1차적이지 않다. 오히려 결핍은 선행하는 생산의 조직화 후에 자리 잡고 액포화 되고 번식한다. 생산의 풍부함 속에 결핍(wants and needs)을 조직하기, 모든 욕망을 결핍에 대한 큰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 욕망 외부에 있다고 상정되는 현실적 생산에 대상을 의존시키기(합리성의 요구들) 등은 시장 경제의 기능으로서 결핍을 교묘히 만들어내는 바로 지배계급의 예술art이며, 반면 동시에 욕망의 생산은 단지 환상으로 넘어간다. (categorized)

* 사회적이자 욕망적인, 유일하고 동일한 생산

한편에 현실의 사회적 생산이 있고, 다른 한편에 환상의 욕망적 생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맑스-프로이트의 병렬은 불모이고sterile 무의미하다. 돈=똥이라는 유명한 등식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서로 내면화하거나 introjections하거나 서로 투사하는 항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나 여전히 서로 낯선 채로 남는다..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단지 욕망적 생산 자체이다. 사회장social field은 즉각 욕망에 의해 주파된다.is invested 욕망과 사회가 있을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가장 탄압적이고 가장 치명적인 형식들조차도 욕망에 의해 생산된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오해나 착각을 내세우지 않고,욕망을 통한 설명, 욕망의 견지에서의 설명을 요구한다. 파시즘조파도 대중들의 욕망이다. 유물론적 정신 의학을 정초하는데 라이히가 결핍하고 있던 것은 욕망적 산이라는 범주였다.

* 집단 환상의 현실성

욕망 기계들은 환상적 내지 몽환적 기계들이 아니다. 환상 기계, 몽환 기계들은 기술 기계, 사회 기계들과 구별될 수 있고, 욕망 기계들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환상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집단 환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 기계들, 즉 이것들이 형성하는 거대 군중 속에서 파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기계들, 즉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구성적 힘들에 관련되는 방향이다. 따라서 집단 환상에 있어, 리비도가 가장 탄압적인 사회 형식들을 포함해서 기존 사회장을 투자하거나, 또는 반대로 리비도가 기존 시회장에 혁명적 욕망을 연결하는 대체-투자로 진행 될 수 있다(이를테면 19세기의 위대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이상적 모델이라기보다는 집단 환상으로서, 즉 욕망의 현실적 생산성의 담당자로서 기능). 즉 욕망 기계들과 사회·기술 기계들 간에는 결코 본성의 차이란 없다. 구별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기의 비율(rapports)에 따른 체제의 구별이다. 그것들은 체제의 차이를 제외하면, 같은 기계들이다. 집단 환상들은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 체제의 차이들

기술 기계들은 고장 나지 않고 마모될 뿐이다. 따라서 기술 기계들의 체제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엄밀하게 구별되는 체제다. 생산물에게 자신이 마모되는 만큼의 가치를 전달한다. 반대로 욕망 기계들은 끊임없이 고장 나며, 고장 난 체로만 작동한다. 예술은 종종 이 특성을 이용한다. 이 때 욕망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일부를 이루며 예술 작품은 그 자신이 욕망 기계이다.

욕망 기계들이 반생산을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 자체를 통해서인데 반해, 기술 기계들에게 고유한 반생산은 경과의 재생산의 외래적 조건들 속에서 생산될 뿐이다. 이래서 기술 기계들은 하나의 경제적 범주가 아니며 언제나 하나의 사회체 내지 사회 기계와 결부되어 있다. 기술 기계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형식의 지표일 따름이다. 수동 기계과 원시사회, 수력기계와 아시아적 형식, 산업기계와 자본주의가 그 예다. 욕망 기계들은 욕망의 경제를 기초로 하는 범주요, 그것들 자체를 통해 기관 없는 신체를 생산하며, 담당자들과 자신의 부품들을 구별하지 않으며, 또 생산관계들와 그 자신의 관계들을 구별하지 않고, 또 사회성과 기술성을 구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욕망 기계들은 기술적이고 사회적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욕망적 생산은 본원적으로 억압의 장소인 반면 사회적 생산은 탄압의 장소고, 또한 후자로부터 전자로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과 유사한 어떤 것이 실행된다.

* 사회체와 기관 없는 신체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욕망적 생산에서 유래한다. 호모 나투라. 하지만 더 정확하게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로 향한다. 호모 히스토리아.

사회 기계 또는 사회체는 토지의 신체, 전제군주의 신체, 돈의 신체일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기관 없는 신체의 투사가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오히려 탈영토화된 사회체의 궁극적 잔여물이다. 사회체의 문제는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하고 기입하고 등록하여 막히거나 수로화되거나 규제되지 않는 그 어떤 흐름도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흐름들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라는 상황에 대해 자본주의는 바깥에서 맞서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이 상황을 살며,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조건과 질료를 동시에 얻으며, 온 힘을 다해 이 상황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돈-자본이라는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과 자유노동자라는 노동의 탈코드화된 흐름이 만나서 탄생한다.

* 자본주의 그리고 극한으로서의 분열증 (상반된 경향성)

흐름들의 탈코드화, 사회체의 탈영토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성을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주체인 분열자를 온 힘을 다해 생산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자신의 경향성을 가속하는 동시에 이 경향성을 반대하고 금지한다. 자본주의는 상상적이건 상징적이건 온갖 종류의 잔여적, 인조적 영토성을 세우거나 재건하여, 이 영토성들 위에서, 추상량들에서 파생되는 인물들을 잘못 또는 잘 재코드화하고 틀어막으려 한다. 국가들, 고향들, 가족들, 이 모든 것이 다시 지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자본주의 기계가 여러 흐름들에서 잉여가치를 추출해 내기 위해 탈코드화하고 공리화함으로써 탈영토화하면 할수록, 관료 조직과 경찰 기구 같은 자본주의의 부속 장치들은 잉여가치의 증대하는 몫을 흡수하면서 더욱더 재영토화한다.

*신경증, 정신병, 변태pervert

현대의 영토성들과의 관계에서 신경증자는 우리 사회의 잔여적 또는 인조적 영토성들에 설치되어 있으며, is trapped이것들 모두를 궁극적 영토성인 오이디푸스로 복귀시킨다. 변태는 책략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분열자는 자신의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 사회체의 해체를 무한히 추구하여 늘 탈영토화를 향해 더 멀리 간다.

분열증,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극한으로서 욕망적 생산이다. 따라서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 차이는 끝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