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inas, Emmanuel, ‘Existence Sans Monde’De l'existence à l'existant, 1947; 3rd, LibrairiePhilosophique, J.Vrin, 1993.
에마뉘엘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2003.
발제: 김쫑(04.04.19)
3. 세계 없는 존재 Existence Sans Monde
1. 이국 정서 L’exotisme (예술론) - ( )은 발제자가 덧붙인 것
주어진 세계의 일부이자, 지식의 대상이자, 유용한 대상인, 사물들은 하나의 내재성un intérieur을 지시한다. 이 대상들은 실천의 연쇄 고리 속에서 파악되었(거머쥐어졌)으며pris 여기서 이 대상들의 이타성 altérité은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예술은 이 대상들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주며, 이를 통해 주체에 귀속되지 않고 떨어져 나오게 해준다. (원시예술은 대상 자체의 자리를 대상의 이미지로 그려냄-추상화, 이는 대상보다 못한 존재-베르그송).(83)
우리와 사물 사이에, 사물의 이미지를 개입시키는 이런 방식(예술)과 우리가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본질적으로 변형시킨다. 이 변형은 그 상황이나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이국정서exotisme에서 기인한다. 이는 관조 자체에 la contemplation même 변형을 가져오고 ‘대상들’은 바깥에 있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84) 예술은, 대상의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나는데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형식formes 자체의 부재이다. 이는 외재성이, 형상formes이 이뤄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재 La réalité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étranger이다.
세계는 소리, 색채, 말 등, 지각 속에서Dans la perception 주어진다.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주관적 의미를 갖는다. 예술 운동은 감각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대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던renvoi(참조하던) 성질을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sense-perception, sensation) 속에서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produit l'effet esthétique.(85)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 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미감적 사건, 우리는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한다. 음악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 음악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음악 소리는 대상의 질서와는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 관계들이자 종합들일 수 있다. 색채와 사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말은 의미와 분리될 수 없으나 (목)소리의 질료성이 음악성으로 환원되게끔 해준다.(86) 말이 의미의 다양성과 결합되거나, 다른 말과의 이웃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애매성이 있는 한에서 말은, 그 객관적 의미로부터 분리되어 감각적인 것의 요소로 되돌아간다. 이때 말은, 의미한다signifier는 사실 자체로 기능한다. 의미 뒤에서 ‘사유’는 시가 지닌 음악성 속에서 길을 잃는다. 이런 시의 음악성은 사유가 젖혀놓는 것, 사유가 벗어나는 것과 관계를 가지고 변화해 나간다.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조각(로댕)도 마찬가지이다. (렌즈로 클로즈업 기법을 이용한) 영화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또 다른)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이 사물은 외면과 내면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나온다.(88)
이러한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이제 내재성의 겉봉으로 나타난다. 초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정물화, 풍경화는 그것들의 질료적 겉봉이 표현하는 하나의 고유한 내재적 삶을 가진다. 그리고 대상들에 깃들여 있는 영혼과는 별도로 이른바 예술가의 세계를 표현한다. 위고가 되었든, 들라크루아가 되었든 예술가의 영혼과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작품의 이국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alter ego로 유지되는 한에서 예술작품의 이국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 재현된 실재는, 그 실재가 감싸고 있는 영혼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재현된 모습의 실재 자체에 의해서 그 감각과 관련되는 것이다.(90) 현대 회화를 통한 물질의 재현에서, 세계로부터의 형식/형상 없애기deformation, 즉 발가벗기기는 유달리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연속성의 단절, 부서진 선 선호, 비례 무시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단순하고 절대적인, 발가벗겨진 요소들, 존재의 융기 또는 존재의 부스럼이다. 이러한 추락chute에서 대상들은 질료적 대상이라는 그것들이 힘을 주장하며, 물질성의 절정에까지 다다른다. 그림은 시를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자체를 절대적으로 만든다.
기계론적 법칙들을 통해서 정의된 물질 개념은, 현대 예술의 몇몇 형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최상급의 물질성과는 거리가 멀다. 사용되기 위한 물질적 대상이나 어떤 장식의 일부를 이루는 물질적 대상은, 사용이나 장식 자체로 인하여 이미 하나의 형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형상은 대상의 벌거벗음을 우리 앞에서 감추어버린다. 존재의 물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형상 없는 우글거림grouillement의 발견이다. (92)
2. 존재자 없는 존재 Existence sans existant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모든 존재들, 즉 사물들과 인간들이 무로 되돌아간다고 상상해 보았을 때, 무로의 이러한 되돌아감을 모든 사건 바깥에 위치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밤과 침묵으로서의 무라면,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무언인가 일어난다’의 무규정성은 주체의 무규정성이 아니며, 어떤 명사와도 관계가 없다. 동사의 비인격적 형식 속의 삼인칭 대명사처럼, 이 무규정성은 잘 인식되지 않는, 행동의 주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동 자체의 특성을 지칭한다. 이를테면 이 행동은 주인이 없고 익명적이다. 존재의 이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그러나 꺼버릴 수도 없는 연소(燃燒), 그것은 무 자체의 한복판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그런 것, 우리가 있음이라는 용어로 부들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 형식을 가지기를 거부하는‘있음’은 ‘존재 일반’이다. 존재의 익명적 흐름은 주체, 인격 또는 사물 등 모두를 침략하고 침몰시키낟. 우리가 존재자들existants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객체의 구별은 존재 일반에 접근하는 성찰의 출발점이 아니다. (93)
밤 속에서 우리는 어둠에 얽매여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것도 아님rien은 순수 무로서의 아무 것도 아님이 아니다. 이 있음은 이것, 저것을 말하는 부재의 대립 항도 아니다. 사유를 통해서는 이 현전을 포착할 수 없다. 이 현전은 거기에la 있다. 이 있음 일반은 비가 온다 il pleut (it rains), 덥다 il fait chaud (it’s hot)에서 볼 수 있는 비인격적 형식이고 있음은 본질적인 익명이다. 더 이상 세계는 없다.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자아가 사라진, 자발적인 주도권도 없이 익명적으로 모든 자들on이 참여하는 존재의 사실 자체만 남는다. (94) 존재는 힘의 장으로서, 어떤 인격에게도 속하지 않는, 어떤 무거운 분위기ambiance로서 머물고, 또한 이 존재에 균열을 내는 부정의, 한복판 자체로 회귀하는, 그리고 그 부정의 모든 단계들로 회귀하는 보편으로 남는다. 밤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고 어둠이 내용물로서 투명성을 채우고 꽉 채우고 있다. 밤의 공간 안의 점들은 서로 연관을 맺지 않고 그저 우글거리고 있다.(95)
낮의 부재, 부재는 불안정성이 된다. 불안정성은 밤이 은폐하는 낮의 세계의 사물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불안정성은 확실히 아무것도 접근하지 않고 아무것도 오지 않으며 아무것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감각’의 이러한 침묵, 고유함, 무는 절대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희미한 위협을 구성한다.
이러한 불분명함 속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 곧 ‘있음’의 위협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흑의 침략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닫아걸고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은신처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 밤의 공간은 우리가 존재를 향해 접근하는 일을 도와주는 대신에 우리를 존재에게 내맡겨 버린다. 때론 한낮에 나타나는 밤도 있다. 빛을 받은 대상들이 마치 황혼 무렵에 걸쳐 있는 듯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여행 끝에 지칠 대로 지쳐서 찾은 비실재적인, 꾸며낸 그런 도시에서처럼 사물들과 존재들이, 마치 그것들이 더 이상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 않는 듯, 존재의 카오스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 우리에게 다가올 때 말이다. (96) 이 물질성은 밤을 가로지르며 불면증 속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하나의 단조로운 현전처럼 사물들이 나타나게 한다.
있음이 만들어내는 가벼운 소리 frolement, 그것이 공포이다. 밤 속에서 암시된 있음, 대상들의 집합소의 기능, 즉 존재(자)들에게 접근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없는 공간 그 차체에서 오는, 규정되지 않은, 위협 같은 공포(97).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은 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의식은 존재의 주인이며, 밤의 익명성 속에서 이미 하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 속에서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깨어 있는 상태vigilance 속에, 참여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참여라는 개념은, 성스러운 것sacré 이 불러일으킨 느낌들을 기술하는 범주들을 파괴하는 데 있다. 대상과 마주하고 있는 주체의 느낌들로 머문다. (98) 성스러운 대상이 지닌 감각적 성질들은 이 대상이 내뿜는 정서적 힘 및 이 정서의 본성 자체와 공통점이 없다. 이 대상의 감각적 성질들이 ‘집합적 표상들’의 운반자들이라는 점은 [이 감각적 성질들과 정서적 힘 사이의] 불균형과 부적합성을 설명해 준다. 이는 또한 플라톤의 개물(個物)(genre) 개념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신비적 참여에서는 [개별적] 항들의 동일성[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명사성substantivite 자체를 구성해 주는 것을 잃어버린다. 하나의 항이 다른 항에 참여하는 것은 속성을 공유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항은 다른 것[타자, l’autre]으로서 존재한다. 원시 종교에서 성스러운 것의 비인격성은, 신의 출현을 준비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있음의 개념은 우리를 신보다는 차라리 신의 부재로, 모든 존재자의 부재로 인도한다.
공포는 결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원시인들은 죽음을 자연적 사실로 복 그에 대해 무관심했다. 공포 속에서 주체는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존재에 대한 느낌으로서의 ‘구토’는 여전히 비인격화가 아니다. 반면 공포는 주체의 주체성, 주체가 가진, 존재자로서의 특별성을 전복시킨다. 공포는 있음으로의 참여이다. 있음은 소멸 속에서마저도 죽음의 불가능성, 존재의 보편성이다. 공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듯 이 부정의 한가운데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사건이다. (100) 유령이다. 유령들은 존재와 무의 한계 위에서 부단히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존재와 무의 이 한계에서 존재는, 마치 대지의 거품처럼 무 자체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101)
존재는 무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있음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밤의 공포는 우리에게 죽음의 위험을 드러내지 않으며, 심지어 괴로움의 위험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이데거적인 불안의 순수한 무는 있음을 구성하지 않는다. 무에 대한 불안과는 반대되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있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재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어떤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부터의 시달림이 있고, 그런 어떤 것에게로의 떠맡겨짐이 있다. 첫 햇살에 밤이 사라질 때 [익명적인]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님rien으로 나타난다. 공포는 영속적인 실재에 대해, 존재의 ‘출구 없음’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다.(103)
하이데거에게 ‘죽음을 향한 존재’를 성립케하는 불안은, 어떤 점에서는 파악될 수 있고saisir 이해할 수 있는 것인 반면에, (레비나스의) ‘출구 없고’, ‘대답 없는‘, 밤의 공포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다. (104)
베르그송에 따르면, 부정은 하나의 다른 존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한 존재를 거부하는 정신의 운동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띤다. 부정이 존재 전체에 적용될 때, 이 부정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것, 그것은 의식에게는 어둠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둠의 공간에서 의식은 작용으로서, 이 어둠에 대한 의식으로서 머문다. 그러므로 [존재 전체에 대한] 전체 부정은 불가능할 것이고, 무를 사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무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존재자의 필연성, 존재하는 ‘어떤 것’의 필연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의 모든 비판에서 베르그송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접근하며, 하나의 잔류하는 존재자에 도달한다. 존재하는 꺼져가는 희미한 빛을 지니고 있는, 의식이 빠져드는 어둠은 또한 내용으로서 이해된다. 모든 내용의 부정을 통해서 얻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 채로 있다.
부재의 현전으로서의 어둠은 순수하게 현재하는 내용이 아니다. 분위기가 문제다. 이 분위기는 확실히 뒤늦게 어떤 내용으로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비인격적인 사건, 밤과 있음이라는 비명사적인 것이다. (105)
존재는 부여받은 대상이거나, 포착되거나 위치지어진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밤과 비극을 통해 접근한 극단적인 상황 속에 나타난 불가결한 것, 비인격적인 장, 소유자도 없고 주인도 없는 터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존재 속에 부정과 소멸과 무는 긍정과 창조와 생존으로서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또한 비인격적 사건들이다. 부재의 현전 또는 있음은 모순을 초월해 있다. 모순을 포함하고 지배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란 무가 한계 짓는 내용. 이때 무는 여전히 존재의 종말이자 한계로서, 즉 존재의 모든 가장자리에 철썩이는 바다로서 검토된다. (106)
이 ‘무’가 간격이자 중단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을까.(가능하다) 잠잘 수 있는 힘, 중지할 수 있는 힘, 판단 중지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의식이, 이 간격으로서의 ‘무’가 자리 잡는 장소가 아닐까.(그렇다) (107)
Levinas, Emmanuel, ‘Existence Sans Monde’De l'existence à l'existant, 1947; 3rd, LibrairiePhilosophique, J.Vrin, 1993.
에마뉘엘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2003.
발제: 김쫑(04.04.19)
3. 세계 없는 존재 Existence Sans Monde
1. 이국 정서 L’exotisme (예술론) - ( )은 발제자가 덧붙인 것
주어진 세계의 일부이자, 지식의 대상이자, 유용한 대상인, 사물들은 하나의 내재성un intérieur을 지시한다. 이 대상들은 실천의 연쇄 고리 속에서 파악되었(거머쥐어졌)으며pris 여기서 이 대상들의 이타성 altérité은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예술은 이 대상들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주며, 이를 통해 주체에 귀속되지 않고 떨어져 나오게 해준다. (원시예술은 대상 자체의 자리를 대상의 이미지로 그려냄-추상화, 이는 대상보다 못한 존재-베르그송).(83)
우리와 사물 사이에, 사물의 이미지를 개입시키는 이런 방식(예술)과 우리가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본질적으로 변형시킨다. 이 변형은 그 상황이나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이국정서exotisme에서 기인한다. 이는 관조 자체에 la contemplation même 변형을 가져오고 ‘대상들’은 바깥에 있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84) 예술은, 대상의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나는데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형식formes 자체의 부재이다. 이는 외재성이, 형상formes이 이뤄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재 La réalité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étranger이다.
세계는 소리, 색채, 말 등, 지각 속에서Dans la perception 주어진다.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주관적 의미를 갖는다. 예술 운동은 감각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대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던renvoi(참조하던) 성질을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sense-perception, sensation) 속에서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produit l'effet esthétique.(85)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 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미감적 사건, 우리는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한다. 음악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 음악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음악 소리는 대상의 질서와는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 관계들이자 종합들일 수 있다. 색채와 사물의 관계 또한 그렇다. 말은 의미와 분리될 수 없으나 (목)소리의 질료성이 음악성으로 환원되게끔 해준다.(86) 말이 의미의 다양성과 결합되거나, 다른 말과의 이웃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애매성이 있는 한에서 말은, 그 객관적 의미로부터 분리되어 감각적인 것의 요소로 되돌아간다. 이때 말은, 의미한다signifier는 사실 자체로 기능한다. 의미 뒤에서 ‘사유’는 시가 지닌 음악성 속에서 길을 잃는다. 이런 시의 음악성은 사유가 젖혀놓는 것, 사유가 벗어나는 것과 관계를 가지고 변화해 나간다.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조각(로댕)도 마찬가지이다. (렌즈로 클로즈업 기법을 이용한) 영화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또 다른)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이 사물은 외면과 내면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나온다.(88)
이러한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이제 내재성의 겉봉으로 나타난다. 초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정물화, 풍경화는 그것들의 질료적 겉봉이 표현하는 하나의 고유한 내재적 삶을 가진다. 그리고 대상들에 깃들여 있는 영혼과는 별도로 이른바 예술가의 세계를 표현한다. 위고가 되었든, 들라크루아가 되었든 예술가의 영혼과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작품의 이국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alter ego로 유지되는 한에서 예술작품의 이국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 재현된 실재는, 그 실재가 감싸고 있는 영혼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재현된 모습의 실재 자체에 의해서 그 감각과 관련되는 것이다.(90) 현대 회화를 통한 물질의 재현에서, 세계로부터의 형식/형상 없애기deformation, 즉 발가벗기기는 유달리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연속성의 단절, 부서진 선 선호, 비례 무시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단순하고 절대적인, 발가벗겨진 요소들, 존재의 융기 또는 존재의 부스럼이다. 이러한 추락chute에서 대상들은 질료적 대상이라는 그것들이 힘을 주장하며, 물질성의 절정에까지 다다른다. 그림은 시를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자체를 절대적으로 만든다.
기계론적 법칙들을 통해서 정의된 물질 개념은, 현대 예술의 몇몇 형식 속에서 볼 수 있는 최상급의 물질성과는 거리가 멀다. 사용되기 위한 물질적 대상이나 어떤 장식의 일부를 이루는 물질적 대상은, 사용이나 장식 자체로 인하여 이미 하나의 형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형상은 대상의 벌거벗음을 우리 앞에서 감추어버린다. 존재의 물질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것의 형상 없는 우글거림grouillement의 발견이다. (92)
2. 존재자 없는 존재 Existence sans existant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모든 존재들, 즉 사물들과 인간들이 무로 되돌아간다고 상상해 보았을 때, 무로의 이러한 되돌아감을 모든 사건 바깥에 위치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밤과 침묵으로서의 무라면,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다. ‘무언인가 일어난다’의 무규정성은 주체의 무규정성이 아니며, 어떤 명사와도 관계가 없다. 동사의 비인격적 형식 속의 삼인칭 대명사처럼, 이 무규정성은 잘 인식되지 않는, 행동의 주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동 자체의 특성을 지칭한다. 이를테면 이 행동은 주인이 없고 익명적이다. 존재의 이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그러나 꺼버릴 수도 없는 연소(燃燒), 그것은 무 자체의 한복판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그런 것, 우리가 있음이라는 용어로 부들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 형식을 가지기를 거부하는‘있음’은 ‘존재 일반’이다. 존재의 익명적 흐름은 주체, 인격 또는 사물 등 모두를 침략하고 침몰시키낟. 우리가 존재자들existants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객체의 구별은 존재 일반에 접근하는 성찰의 출발점이 아니다. (93)
밤 속에서 우리는 어둠에 얽매여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것도 아님rien은 순수 무로서의 아무 것도 아님이 아니다. 이 있음은 이것, 저것을 말하는 부재의 대립 항도 아니다. 사유를 통해서는 이 현전을 포착할 수 없다. 이 현전은 거기에la 있다. 이 있음 일반은 비가 온다 il pleut (it rains), 덥다 il fait chaud (it’s hot)에서 볼 수 있는 비인격적 형식이고 있음은 본질적인 익명이다. 더 이상 세계는 없다.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자아가 사라진, 자발적인 주도권도 없이 익명적으로 모든 자들on이 참여하는 존재의 사실 자체만 남는다. (94) 존재는 힘의 장으로서, 어떤 인격에게도 속하지 않는, 어떤 무거운 분위기ambiance로서 머물고, 또한 이 존재에 균열을 내는 부정의, 한복판 자체로 회귀하는, 그리고 그 부정의 모든 단계들로 회귀하는 보편으로 남는다. 밤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고 어둠이 내용물로서 투명성을 채우고 꽉 채우고 있다. 밤의 공간 안의 점들은 서로 연관을 맺지 않고 그저 우글거리고 있다.(95)
낮의 부재, 부재는 불안정성이 된다. 불안정성은 밤이 은폐하는 낮의 세계의 사물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불안정성은 확실히 아무것도 접근하지 않고 아무것도 오지 않으며 아무것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감각’의 이러한 침묵, 고유함, 무는 절대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희미한 위협을 구성한다.
이러한 불분명함 속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 곧 ‘있음’의 위협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흑의 침략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닫아걸고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은신처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 밤의 공간은 우리가 존재를 향해 접근하는 일을 도와주는 대신에 우리를 존재에게 내맡겨 버린다. 때론 한낮에 나타나는 밤도 있다. 빛을 받은 대상들이 마치 황혼 무렵에 걸쳐 있는 듯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여행 끝에 지칠 대로 지쳐서 찾은 비실재적인, 꾸며낸 그런 도시에서처럼 사물들과 존재들이, 마치 그것들이 더 이상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 않는 듯, 존재의 카오스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 우리에게 다가올 때 말이다. (96) 이 물질성은 밤을 가로지르며 불면증 속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하나의 단조로운 현전처럼 사물들이 나타나게 한다.
있음이 만들어내는 가벼운 소리 frolement, 그것이 공포이다. 밤 속에서 암시된 있음, 대상들의 집합소의 기능, 즉 존재(자)들에게 접근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없는 공간 그 차체에서 오는, 규정되지 않은, 위협 같은 공포(97).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은 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의식은 존재의 주인이며, 밤의 익명성 속에서 이미 하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의식 속에서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깨어 있는 상태vigilance 속에, 참여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참여라는 개념은, 성스러운 것sacré 이 불러일으킨 느낌들을 기술하는 범주들을 파괴하는 데 있다. 대상과 마주하고 있는 주체의 느낌들로 머문다. (98) 성스러운 대상이 지닌 감각적 성질들은 이 대상이 내뿜는 정서적 힘 및 이 정서의 본성 자체와 공통점이 없다. 이 대상의 감각적 성질들이 ‘집합적 표상들’의 운반자들이라는 점은 [이 감각적 성질들과 정서적 힘 사이의] 불균형과 부적합성을 설명해 준다. 이는 또한 플라톤의 개물(個物)(genre) 개념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신비적 참여에서는 [개별적] 항들의 동일성[정체성]이 사라져버린다. 명사성substantivite 자체를 구성해 주는 것을 잃어버린다. 하나의 항이 다른 항에 참여하는 것은 속성을 공유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항은 다른 것[타자, l’autre]으로서 존재한다. 원시 종교에서 성스러운 것의 비인격성은, 신의 출현을 준비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있음의 개념은 우리를 신보다는 차라리 신의 부재로, 모든 존재자의 부재로 인도한다.
공포는 결코 죽음에 대한 불안이 아니다. 원시인들은 죽음을 자연적 사실로 복 그에 대해 무관심했다. 공포 속에서 주체는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존재에 대한 느낌으로서의 ‘구토’는 여전히 비인격화가 아니다. 반면 공포는 주체의 주체성, 주체가 가진, 존재자로서의 특별성을 전복시킨다. 공포는 있음으로의 참여이다. 있음은 소멸 속에서마저도 죽음의 불가능성, 존재의 보편성이다. 공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듯 이 부정의 한가운데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사건이다. (100) 유령이다. 유령들은 존재와 무의 한계 위에서 부단히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존재와 무의 이 한계에서 존재는, 마치 대지의 거품처럼 무 자체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101)
존재는 무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있음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밤의 공포는 우리에게 죽음의 위험을 드러내지 않으며, 심지어 괴로움의 위험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이데거적인 불안의 순수한 무는 있음을 구성하지 않는다. 무에 대한 불안과는 반대되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있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재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어떤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부터의 시달림이 있고, 그런 어떤 것에게로의 떠맡겨짐이 있다. 첫 햇살에 밤이 사라질 때 [익명적인]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님rien으로 나타난다. 공포는 영속적인 실재에 대해, 존재의 ‘출구 없음’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다.(103)
하이데거에게 ‘죽음을 향한 존재’를 성립케하는 불안은, 어떤 점에서는 파악될 수 있고saisir 이해할 수 있는 것인 반면에, (레비나스의) ‘출구 없고’, ‘대답 없는‘, 밤의 공포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다. (104)
베르그송에 따르면, 부정은 하나의 다른 존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한 존재를 거부하는 정신의 운동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띤다. 부정이 존재 전체에 적용될 때, 이 부정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것, 그것은 의식에게는 어둠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둠의 공간에서 의식은 작용으로서, 이 어둠에 대한 의식으로서 머문다. 그러므로 [존재 전체에 대한] 전체 부정은 불가능할 것이고, 무를 사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무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존재자의 필연성, 존재하는 ‘어떤 것’의 필연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의 모든 비판에서 베르그송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접근하며, 하나의 잔류하는 존재자에 도달한다. 존재하는 꺼져가는 희미한 빛을 지니고 있는, 의식이 빠져드는 어둠은 또한 내용으로서 이해된다. 모든 내용의 부정을 통해서 얻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 채로 있다.
부재의 현전으로서의 어둠은 순수하게 현재하는 내용이 아니다. 분위기가 문제다. 이 분위기는 확실히 뒤늦게 어떤 내용으로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비인격적인 사건, 밤과 있음이라는 비명사적인 것이다. (105)
존재는 부여받은 대상이거나, 포착되거나 위치지어진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밤과 비극을 통해 접근한 극단적인 상황 속에 나타난 불가결한 것, 비인격적인 장, 소유자도 없고 주인도 없는 터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존재 속에 부정과 소멸과 무는 긍정과 창조와 생존으로서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또한 비인격적 사건들이다. 부재의 현전 또는 있음은 모순을 초월해 있다. 모순을 포함하고 지배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출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란 무가 한계 짓는 내용. 이때 무는 여전히 존재의 종말이자 한계로서, 즉 존재의 모든 가장자리에 철썩이는 바다로서 검토된다. (106)
이 ‘무’가 간격이자 중단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을까.(가능하다) 잠잘 수 있는 힘, 중지할 수 있는 힘, 판단 중지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의식이, 이 간격으로서의 ‘무’가 자리 잡는 장소가 아닐까.(그렇다)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