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안전·영토·인구] 6강

권순모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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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안전 영토 인구 6강



1978년 2월 15일





사목의 분석

사목에 대한 연구는 지금 진행 중이므로 부정확한 점과 가설에 지나지 않은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 사목이라는 주제를 조금 강조하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 주권자와 신민의 관계를 지시하기 위한 목자와 무리의 관계가 이집트의 파라오 관련 문헌, 아시리아의 문헌, 히브리인에게서도 매우 집요한 주제로 등장하지만 그리스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문헌과 사유에서 목자와 무리의 관계 문제

그리스에서도 주권자나 정치적 책임자가 신민이나 동료 시민과 맺는 관계를 목자와 무리라는 관계로 다룬 바는 있습니다.

1) 호메로스의 어휘를 들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아가멤논과 관련된 부분, 『오뒷세이아』에서도 백성의 목자라는 제의적 칭호로 왕을 지시합니다. 또한 뤼디거 슈미트가 1967년에 인도-유럽시대의 시적 표현에 관한 쓴 책에 보면 ‘백성의 목자’라는 표현의 많이 나옵니다. 고대 영어로 쓰인 『베오울프』에서도 주권자는 백성의 목자 또는 왕국의 목자로 지칭됐습니다. 이 표현은 일찍이 출현해 뒤늦게까지 존속했습니다.

2) 피타고라스 학파 초기부터 신-피타고라스 학파에 이르는 텍스트에서 목자에 대한 참조가 발견됩니다. a.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용한 어원에 따르면 법은 목자nomeus 에서 온 것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식량을 나눠주고, 무리를 지휘하며, 올바른 방향을 지시하고, 양들이 어떻게 교미해야 좋은 후손을 얻을 수 있는지 말하는 자인 한에서 법의 집행자입니다. 제우스 신에게 노미오스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b.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행정관은 자신의 관할 아래 있는 자들을 사랑하는 자, 복종하고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 이기적이지 않은 자입니다. “법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그의 관할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결정을 내리는 자인 행정관을 목자로 보는 전통은 제한적이나마 고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존재합니다.

3) 전통적인 정치의 어휘로 이뤄진 텍스트 중 오토-프리드리히 그루페가 편집한 아르키타스의 단편에 따르면 목자의 은유는 그리스인에게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히브리인의 영향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예외적으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주로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관한 언급에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정치』에서 아르망 들라트가 주장한 내용, 즉 ‘본보기나 정치적 위인으로서 목자라는 주제는 흔했다는 것’과 상반됩니다. 하지만 들라트의 논지와 주장에는 명확한 준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 문헌인 『이소크라테스 색인』에는 포이멘, 노메우스라는 단어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행정관의 의무를 매우 상세히 서술한 『아레오파고스 연설』에도 행정관에 대해 목자에 가까운 서술을 하면서도 목자의 은유는 없습니다. 데모스테네스에게서도 목자 은유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고전기 정치 어휘라 불리는 것에서 목자의 은유는 희귀한 은유입니다.



중대한 예외, 플라톤의 『정치가』

플라톤은 『크리아티스』, 『법률』, 『국가』, 『정치가』에서 훌륭하고 이상적인 행정관을 목자로 간주합니다. 1) 신들은 원래 인류의 목동, 목자입니다. 시대의 불행이나 험난함이 인류의 조건을 바꿔버리기 이전에 인간을 양육하고 인도하며 식량을 제공하고 품행의 일반 원칙을 부여하며, 인간들의 행복과 안락을 보살핀 것은 신들이었습니다. 2) 신들이 주재하는 인간의 지고한 복락이 끝나고 난 이후, 현재 험난한 시기의 행정관 역시 목자입니다. 행정관-목자는 도시국가의 창설자나 핵심 법률의 입법자가 아니라 종속된 행정관입니다. 3)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목자는 오직 자신의 무리에 헌신할 뿐이지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정치는 목자-무리의 관계라는 형식에 부합하는지 질문하고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정치가를 특징짓는 인식과 기술은 바로 명령하고 지휘하는 기술입니다. 명령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고 누군가의 명령을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수도 있는데, 사자, 전령, 노잡이의 통솔자, 예언자 등이 그렇게 합니다. 2) 자기 자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은 정치가가 합니다. 정치가는 생명 존재의 “무리”에게 명령합니다. 그것은 곧 그 무리의 목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컨대 정치가는 인간의 목자, 즉 도시국가에서 인구를 구성하는 생명존재 무리의 목동입니다.

무리의 목자로서의 정치가라는 친숙한 주제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네 단계를 거쳤습니다.

1) 최초에 행해진 조잡하고 단순한 구분에 근거한 방법을 비판합니다. 행정관이 무리를 지키는 자라는 주제와 관련해 야생동물과 온순한 동물을 구분하면 인간은 후자에 속합니다....이렇게 계속 세분화하는 것은 불변항으로서의 목자라는 주제가 전적으로 무용하고, 동물에 범주에 속해 있는 가능한 가변항만을 참조토록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지시술=명령하는 기술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2) 목자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만 한다고 하는 비판입니다. 도시국가에서 플라톤은 농민, 빵집 주인, 의사, 체육교사, 교육자 등을 양치기와 관련한 왕의 경쟁자, 인간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한편에는 동물 종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모든 가능한 일련의 분할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도시국가에서 목자의 활동에 연관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활동의 유형학이 있습니다.

3) 어떻게 정치가의 본질 자체를 파악할 것인가가 문제시됩니다. 세계는 행복한 방향으로 돌고 있지만 그 시기가 끝나면 역경이 옵니다. 행복한 방향으로 돌 때 인간 무리의 목자는 신 자신입니다. 신은 목자였기에 정치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최초의 행복이 끝나고 역방향으로 돌 때 시작됩니다. 이제 인간에게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해졌습니다. 플라톤은 정치가들은 신들이 인간 위에 있던 것처럼 다른 인간 무리 위에 있을 수는 없으며 인간의 일부이지 목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4) 목자 모델을 대신해 직조 모델이 제기됩니다. 정치가의 기술은 직조공의 기술과 같은데 목자가 무리 전체를 돌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총괄적으로 돌보는 기술이 아닙니다. 정치가를 돕기 위한 많은 보조기술이 필요합니다. 정치가의 행위는 씨실과 날줄을 엮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 의견이라는 북(방추)입니다. 왕의 기술은 목자의 기술이 아니라 직조공의 기술, 사람들을 “융화와 우애에 기초한 공동체로” 결합시키는 기술입니다. 직조공-정치가는 다른 기술과는 전혀 다른 특유의 기술을 통해 모든 직물 중에서도 가장 멋진 직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설령 사목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도시국가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활동입니다. 사목은 도시국가에 필요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종속적인 활동, 의사, 농부, 체육교사, 교사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자의 활동은 존재하며 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은 제자리에 그래도 놓아둡시다. 의사, 체육교사, 교사의 측면에서 각 활동 자체의 가치와 유효성을 갖는 그대로 말입니다. 정치가를 목자라고 말하지 맙시다. 명령을 하는 왕의 기술은 사목을 통해 정의될 수 없습니다. 결국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사목의 형태를 도시국가 전체의 수준에서 활용하려는 착오를 저지른 셈입니다. 왕은 목자가 아닙니다.”



그리스의 고전적인 정치 어휘에서 목자라는 주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플라톤이 이 주제를 분명히 비판했다는 것 같은 부정적인 징후는 정치에 대한 그리스의 사유와 성찰이 목자라는 주제를 긍정적으로 가치 평가하지 못하도록 배제했다는 아주 명백한 징후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가 중시되는 것은 동방, 히브리인에게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통치인 사목의 역사와 그리스도교의 분리불가능성(서구의 경우)

훗날 사목이 확산되는 거점들을 정치적 사유나 도시국가의 주된 조직형태 안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공동체, 규모가 한정된 단체[피타고라스 학파 같은 철학‧종교 공동체, 교육 공동체, 체육학교 등] 쪽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양심지도의 특정한 형식에도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라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확립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적어도 동방에서 수입된 사목이라는 주제를 헬레니즘 세계 곳곳에 퍼뜨린 일련의 배치‧기술‧성찰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행사되는 특수한 권력 유형의 진원지인 사목의 진정한 역사. 인간에 대한 통치방식의 본보기이자 모형인 사목의 역사, 서구세계가 거쳐 온 사목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시작됩니다. 사목은 역사상 완전히 유래가 없는 과정, 다른 문명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과정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의해 어떤 종교 공동체가 교회로 구축되었습니다. 교회는 일상생활에서 인간을 통치해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살도록 해주겠다고, 그것도 한정된 규모의 집단 도시국가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그렇게 만들어주겠다고 주장한 제도입니다. 교회는 인류 차원에서 구원을 이룬다는 구실로 현실의 삶에서 인간을 일상적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한 종교가 교회로 제도화됨으로써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권력 장치가 형성된 것입니다.

기원후 2-3세기경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1천 5백 년 동안 발전되고 무르익은 권력 장치가 교회입니다. 어떤 종교가 교회로 조직됐다는 것, 즉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 교회로 조직됐다는 사실과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이 사목 권력의 형태는 1천 5백 년 동안 상당히 바뀌었습니다. 여러 형태로 부적절해지고 산만해지며 변형되고 통합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폐기되지 않았고 사목의 시대는 18세기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유형, 조직, 기능의 양태 면에서의 사목 권력으로부터, 그러니까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사목 권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목 권력의 중요성, 효력, 도입된 정도는 사목 권력의 주위에서, 사목 권력에 호의적이거나 반발하는 피로 얼룩진 혼란, 저항, 불만, 투쟁, 전투, 전쟁의 강렬함과 다양성에 의거해 측정됩니다. 영지주의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이단 중 하나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를 분열시켰던 논쟁으로서, 대부분 사목 권력의 행사방식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13세기부터 17-18세기까지 전체를 관통한 모든 투쟁은 사목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목 권력에 관련된 투쟁이었습니다.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종교전쟁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던 이 모든 투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통치할 권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상생활‧세부사항‧물질성 안에서 인간을 통치할 권리가 사실상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누가 권력을 가질지, 권력은 누구로부터 얻을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지, 각자가 얼마만큼 자율의 여지를 가질지, 권력을 행사할 자들은 어떤 자격을 지녀야 할지, 그들의 권한은 어떻게 제한될지, 그들에게 대항하려면 무엇에 기대야 할지, 서로에게 어떤 통제가 가해질지 등등.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구세계를 관통한 것은 이 모든 것 사목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거대한 전투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는 사목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와 관련된 대전투라기보다는 사목과 관련된 대전투였고 종교개혁의 쟁점이 사실상 사목 권력의 행사방식이었지만,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두 세계, 즉 개신교 교회의 세계와 반종교개혁이라는 세계 역시 사목 없는 세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3세기에 시작되어 대략 17-18세기에 안정화되는 일련의 소요와 반란은 사목 권력이 두 유형으로 가공할 만큼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 개신교 유형 혹은 개신교 분파로 이뤄진 유형이 있습니다. 위계적으로 더 유연한 만큼 더 섬세한 사목이 됩니다. 2) 완전히 개조된 채 중앙집권적인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일종의 위계 피라미드가 된 반종교개혁 쪽의 사목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통치받을지 알 권리 등 사목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거대한 반란은 사목 권력의 철저한 재조직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봉건적 유형의 정치권력을 혁명을 겪거나 몇몇 흔적을 제외하고는 서구 역사에서 완전히 청산되고 추방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봉건제에 반대하는 혁명은 존재했습니다만 사목에 반대하는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목은 역사로부터 자기 자신을 결정적으로 추방해버리는 심원한 혁명 과정을 아직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사목 역사의 필요성

지금까지 사목의 역사는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사목의 기술을 성찰한 역사, 사목테크닉의 발전과 적용의 역사, 점진적으로 이뤄진 세련화 과정의 역사, 사목 권력의 행사에 결부된 상이한 분석‧지식 유형의 역사 같은 것은 실제로 연구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사목은 그저 어떤 사람들에게 부과된 명령, 이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된 특권의 총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목에 대한 방대한 사유가 존재했고, 이 사유는 법과 제도에 대한 성찰로서만이 아니라 이론적 성찰, 철학적 가치가 있는 성찰로서도 존재했습니다. 사목을 통해 인간을 통치하는 기술을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으로 정의한 최초의 인물은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입니다. 이 정의는 ‘기술의 기술’, ‘영혼의 통솔’이라는 전통적 형태로 18세기까지 전해집니다. ‘영혼의 통솔’, ‘영혼의 통치’야말로 기술의 기술입니다. 니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우스 이전에는 무엇이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이었을까요? 철학이었습니다. 17세기-18세기 이전에 그리스도교화된 서구에서 철학을 계승한 ‘기술의 기술’은 철학도 신학도 아니고 사목이었습니다. 사목이라는 기술을 통해 타인을 통치하는 법을 배웠고 누구에게 통치를 받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이 통치 즉 일상적 통치, 사목적 통치라는 실천이 바로 1천 5백 년 동안 ‘학문 중의 학문’,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으로 고찰되었습니다.







‘영혼의 통치’의 특징 : 포괄적이고 교회조직과 외연을 같이 하며 정치권력과 구별되는 권력

히브리인에게 모든 것은 사목의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목자였고, 유대 백성의 방황은 무리의 방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면 1) 목자와 무리의 관계는 결국 신과 인간의 다양하고 복잡적이며 항구적인 관계의 양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 히브리인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사목 제도가 없었습니다. 목자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 이외에는 목자로 지칭된 적이 없습니다. 신 이외의 목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회에서는 1)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가 됩니다. 2) 이 관계는 법‧규정‧기술‧절차를 갖는 사목 내에서 제도화되는 일정 유형의 관계가 됩니다. 교회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권위의 관계는 특권을 토대로 두게 되고 동시에 무리에 관련된 목자의 임무에도 토대를 두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당연히 목자입니다. 이 목자는 길 잃은 무리를 신에게 데려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며 무리 전체만이 아니라 각각의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입니다. 사도들 역시 목자입니다. 주교들은 사육을 담당하는 자들로 무리를 지키기 위해 양들을 번성시키기 위해 전방에 위치하는 자들로 목자입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사목의 규칙』은 중세 내내 사목제도에 관한 기본 텍스트로서 전범이었습니다. ‘사목서’라고 불리기도 한 이 텍스트에서 주교는 빈번히 목자라고 불립니다. 교구사제들 역시 목자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소교구의 조직을 설치하고 중세에 소교구의 명확한 영토성을 설정했을 때 발생합니다. 주임사제를 목자로 볼 수 있는가입니다. 이 문제는 많은 논쟁을 야기합니다. 개신교 교회는 주임사제는 목자라고 응답하고 가톨릭교회는 집요하게 아니라고 응수합니다. 이렇듯 교회 조직 전체가 그리스도부터 교구사제나 주교에 이르기까지 사목제도라는 체제를 취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권력은 무리에 대한 목자의 권력으로서 부여됩니다. 즉 그런 권력으로 조직됨과 동시에 정당화됩니다. 성사(聖事) 성사에는 견진ㆍ고백ㆍ성세ㆍ병자ㆍ성체ㆍ신품ㆍ혼배의 일곱 가지가 있다.

의 권력, 세례의 권력은 양을 무리로 불러 들인다는 것이고 성체배령 영성체를 일컬음

의 권력은 영적 양식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리를 떠난 양들을 참회를 통해 무리에 재통합하는 권력입니다. 교회의 재판권도 목자의 권력입니다. 재판권이야말로 목자의 자격으로 무리를 오염시킬지 모를 양을 무리에서 추방할 수 있도록 주교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권력은 사목권력입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사목적 통치의 특성은 사목적이라 할 수 있는 권력이 그리스도교 시대 내내 정치 권력과 분리된 채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목 권력은 영혼의 인도가 어떤 개입, 곧 일상의 품행과 생활의 관리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 재산‧부‧사물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개인의 영혼을 돌봅니다. 사목 권력은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까지 대상으로 삼는데,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사제직에 관하여』에서는 주교는 모든 것을 감시해야 하고 천 개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교는 단순히 개인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함께 돌봐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를 돌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목 권력은 하늘을 목적으로 삼지만 사실상 땅의 권력인 권력 형태입니다. 서방교회에는 정치 권력과 완전히 구별되는 권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성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를 “행정관이 아니라 목자로서” 밀라노를 통치하도록 파견했습니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교 역사 전반에 걸쳐 일종의 원칙으로서, 일종의 근본적인 법으로서 존속되어왔습니다.

교회의 사목 권력과 정치 권력 사이에는 간섭, 지지, 중개, 충돌이 있습니다. 사목 권력과 정치 권력의 교차는 서구 전체에서 역사적 현실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목 권력은 형태‧기능‧유형‧ 내적 테크놀로지 면에서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정치 권력과 다른 특수한 권력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목 권력은 동일한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서구에서 그랬듯이 동일한 인물이 사목 권력과 정치 권력을 동시에 행사할 때조차, 교회와 국가 혹은 교회와 정치 권력이 동맹을 맺고 있었을 때조차 그리스도교 서구에서 사목 권력의 특수성은 절대적인 특징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구별이 이뤄진 이유가 역사상 큰 문제이고 수수께끼라는 점입니다.

이 두 유형의 권력, 즉 정치권력과 사목 권력은 어떻게 이런 특수성과 고유한 형상을 보존하게 된 것일까요? 그래도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모든 상호작용에도 불구하고 사목 권력의 특수성은 변함없이 존속했습니다. 왕은 왕이고 목자는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권력을 신비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자로 남아 있었고 왕은 권력을 제왕적인 방식을 행사하는 자로 남아 있었죠. 그리스도교 사목과 황제적 주권의 구별과 이질성은 서구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동방에서는 이런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구 정치권력과 사목 권력의 관계 문제 : 러시아 전통과의 비교

제정 러시아 특유의 몇몇 종교적 주제를 설명하는 알랭 브장송의 『화형된 러시아 황태자』에서는 근대 이전과 근대 러시아 사회에서도 정치 주권에 그리스도적 주제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니콜라이 고골은 1846년 고골이 바실리 주코프스키에세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적 주권자에 관한 찬탄할 만한 이미지와 환기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적 주권자가 서구의 전형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구의 주권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카이사르입니다. 서구의 목자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