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존재와 시간] 63절-67절

권순모
2020-05-12
조회수 260

2020-05-12 발제자: 황수진

발제 범위: 《존재와 시간》63절 – 67절

※참고 자료: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글방, 1998.

 

제63절 염려의 존재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획득한 해석학적 상황과

실존론적 분석론 일반의 방법적인 성격

선구적 결단성(결의성).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과 더불어 현존재가 그의 가능한 본래성과 전체성과 관련되어 현상적으로 드러내보여졌다.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다시 말해서 그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가능과 연관되어 앞서 가짐에로 데려와졌다(413).

지금까지 달려온 현존재분석론의 길은 초두에 그냥 던져놓은 논제, 즉 우리가 각기 그 자신인 그 존재자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 것이다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근거는 염려 자체 안에 놓여 있다. “세계”의 우선적으로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빠져 있는 존재는 일상적인 현존재 해석을 이끌고 있으며 존재적으로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를 은폐하며, 그로써 이 존재자에게 향해 있는 존재론에 적합한 지반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413).

그러므로 현존재의 존재양식이 현상적 제시의 근원성을 목표로 정한 존재론적 해석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해석이 이 존재자의 존재를 그 존재자 자신의 고유한 은폐의 경향을 거슬러 장악하는 일이다(414). 따라서 실존론적 분석은 일상적인 해석의 요구 도는 만족감과 편안한 자명성에 대해서는 부단히 일종의 폭력성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414).

만일 현존재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존재가능이고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들에 대한 자유존재이고 그리고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오직 이 가능성들에 대한 자유 또는 그것을 거스른 비자유 속에서 실존한다면, 이 경우 존재론적 해석은 존재적 가능성들(존재가능의 방식들)과는 다르게 근거를 놓을 수 있고 이 존재적 가능성들을 그것들의 존재론적 가능성들에로 기획투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일 현존재가 대개 자신을 “세계”의 배려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해석한다면, 이 경우 그것의 반대방향에서 획득한 존재적-실존적 가능성들의 규정과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실존론적 분석은 그러한 존재자에 적합한 열어밝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기획투사의 폭력성은 현존재의 현상적 실상을 엇갈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이 되지 않는가?(415)

실존이념. 실존의 가능성들을 “폭력적”으로 앞서 제시해야 함이 방법적으로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그 제시가 과연 자유로운 임의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실존론적] 해석은 도대체 “전제된” 실존의 이념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취하고 있는가? […] 우리가 현존재는 “빠져 있고” 그렇기에 존재가능의 본래성을 이러한 존재경향을 거슬러 그에게서부터 탈취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의 시야는 어디를 향해 있으면서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비록 희미하기는 해도—“전제된” 실존이념의 빛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416)

실존이념의 형식적 게시는 현존재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존재이해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 존재이해는 아무런 존재론적 투명성 없이 다음을 밝혀 보였다: 우리가 현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그 존재자는 각기 나 자신이고 그것도 그 존재자에게 이 존재자로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가능으로서 그렇다. 현존재는, 비록 충분한 존재론적 규정성이 없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다(416-417).

실존과 실재성의 구분. 그리고 그 구분의 토대가 되는 실존이념. 단초로 설정된 실존이념은 현존재 이해 일반의 형식적 구조를 실존적으로 구속력 없이 앞서 윤곽잡고 있다. 이 이념의 인도 아래 가장 가까운 일상성에 대한 예비분석이 수행되었고 염려에 대한 최초의 개념적 제한규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염려구조의 제한규정은 실존과 실재성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구별을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여기서 실존과 실재성의 구분은 손안의 존재와 눈앞의 존재라는 현존재의 두 존재 양식에 상응하는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은 제43절 272페이지 참조하시길).

해석학적 순환. 존재론적으로 해명된 존재 일반의 이념은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 이해를 정리 작업함으로써만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417) 그렇지만 이 존재이해는 오직 실존이념을 실마리로 삼아서 현존재를 근원적으로 해석하는 근거 위에서만 근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417-418)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증명에서의 “순환”은 결코 “회피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그 분석론이 도대체 “추론의 논리학”의 규칙에 따라서 증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환은] 염려의 근본 구조이다.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각기 그때마다 이미 자신을 자기 실존의 특정한 가능성에로 기획투사했으며 그러한 실존적 기획투사에서 존재론 이전으로 실존과 존재와 같은 것이 함께 기획투사되었다(418).

[순환논증오류에 대한 혐의]는 1. 이해 자체가 현존재의 존재의 한 근본양식을 형성하고 있음, 2. 이 존재가 염려로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오인할 때만 성립된다(419).

실존론적 분석의 존재론적 “진리”는 근원적인 실존적 진리의 근거 위에서 형성된다. 기초존재론적 문제틀—존재물음 일반을 예비하면서—추구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실존론적인 진리는 염려의 존재의미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다. 이 존재의미의 규명을 위해서는 염려의 전체 구조요소를 축소시킴 없이 마련해놓는 것이 필요하다(420).

 

제64절 염려와 자기성

 염려의 구성계기들, 즉 실존성, 현사실성 그리고 빠져 있음의 통일성이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존재론적으로 제한규정하는 것을 처음으로 가능케 했다(420). 염려구조가 실존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되었다: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하나의 세계) 안에 있음(420-421). 염려구조는 가능한 전체존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실존적 존재가능의 가능조건이다.

통일성. 구조 전체의 전체서으이 분류는 더욱더 풍부해졌으며 따라서 이 전체성의 통일성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은 한층 더 절박해졌다. 우리는 어떻게 이 통일성을 개념파악해야 하는가? 분명히 오직, 현존재 자신이 그의 본질적인 가능성들 자체에서의 이 존재로 존재한다는 식으로만, 각기 그때마다 내가 이 존재자인 식으로만 그럴 것이다(421).

염려와 자기성. 타인에 대한 염려로서의 심려에 대응되는 “자기염려”라는 표현이 동어반복이라는 테제가 올바르다면, 염려는 자체 안에 이미 자기라는 현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 경우 현존재의 자기성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문제는 염려와 자기성 사이의 실존론적 “연관”에 대한 물음으로 첨예화된다(422).

나라고-말한다. 일상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라고-말한다에서 자신을 밖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로써 이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순한 것으로서 그 “나”는 또한 다른 사물의 규정이 아니고 그 자체 술어가 아니라 절대적인 “주체(주어)”일 뿐이다. 분명히 칸트는 ‘나라고-말한다’에서 주어진 현상적 실상을 엄밀히 따르면서, […] 영혼의 실체에 대한 존재적 테제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단지 ‘나’에 대한 잘못된 존재적 설명이 퇴치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결코 자기성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획득되는 것도 아니고 확보되거나 긍정적으로 준비되는 것도 아니다. 그 역시 다시금 동일한 부적합한 실체 존재론에 떨어지고 만다.  

나는 사유한다. ‘나는 사유한다’에 대한 칸트의 분석. “나”는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이 ‘나’로써 “사유의 초월론적 주체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표상되고 있지 않다”. “의식 자체는 표상이 아니고……표상 일반의 형식이다”. “나는 사유한다”는 “모든 경험에 붙어 있고 그것을 선행하는 통각의 형식”이다(423).

칸트의 분석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나’를 존재적으로 실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았으며, 둘째, ‘나’를 “나는 사유한다”로서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나’를 주체로 파악하며 그로써 존재론적으로 부적합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424). ‘나’를 존재론적으로 주체로 규정함은 ‘나’를 일종의 언제나 이미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단초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유하는 사물’의 실재성으로 이해된다(425).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 [칸트의 분석이] 실체적인 것으로 되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 칸트 자신은 언제나 거듭, ‘나’는 나의 표상과 연관된 채 남아 있는 표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표상들이 그에게는 ‘나’에 의해서 “수반되는” “경험적인 것”, 즉 “내”가 거기에 “붙들려”있는 현상들이다. [칸트는]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것을 사유한다”의 존재론적 “전제”가 ‘자기’의 근본규정성임을 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것을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경우 거기에는 말없이 세계가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나라고-말함’은 각기 그때마다 “나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로서의 ‘나’인 그런 존재자를 의미한다. ‘나라고-말함’에서 현존재는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 밖으로 말한다(426).

일상적 ‘나라고-말함’과 본래적 ‘나라고-말함’. [현존재의] 일상적인 자기해석은 자기 자신을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어] 자신을 잘못 본다. 이러한 “도피적인” ‘나라고-말함’은 […] 현존재의 빠져 있음에 의해서 그렇다(427). 자기임은 실존론적으로 오직 본래적인 자기존재가능에서만, 다시 말해서 염려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의 본래성에서만 읽어낼 수 있다. […]자기의 지속성은 결단을 내리지 않은 빠져 있음의 비자립성[비자기-지속성]에 대한 본래적 반대가능성이다. 자기-지속성[=자립성]은 실존론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을 의미한다(428). 

 

제65절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염려의 의미로써 존재론적으로 무엇이 추구되고 있는가?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가?(429) 염려의 의미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 경우 다음을 말한다: 현존재에 대한 근원적이고 실존론적인 해석의 밑바탕에 놓여 있으면서 그 해석을 주도하고 있는 기획투사를 추적하여 그 기획투사된 것 안에서 이것의 ‘그리로’를 드러내놓는 것이다. 기획투사된 것은 현존재의 존재이며, 그것도 본래적인 전체존재가능으로서의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그것 안에서 열어밝혀진 현존재의 존재이다(430).

존재자가 “의미를 지닌다”고 우리가 말할 때, 이것은 그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서 접근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430). 존재자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존재자의 모든 존재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존재이해의 ‘그리로’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431).

도래. […]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은 가장 고유한 탁월한 존재가능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현존재가 […] 실존하기 때문이다. 탁월한 가능성을 견지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로 다가오도록 함은 도래[미래]의 근원적인 현상이다(431). “도래”는 여기에서 아직 “현실적”이 되지 않은, 이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될 그런 지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런 옴이다(431-432).

기재. 앞질러 달려가봄이 현존재를 본래적으로 도래적으로 만드는데, 앞질러 달려가봄 자체가, 현존재가 존재하면서 도대체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서 그의 존재에서 도대체 도래적인 한에서만, 가능하게 되는 식으로 그렇다. 오직 현존재가 도대체 ‘나는 존재해-왔다’로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는 도래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올 수 있으며 그래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도래적이면서 본래적으로 존재해왔음으로 존재한다.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앞질러 달려갑봄은 가장 고유한 기재[존재해옴]로 이해하며 되돌아옴이다(432).

현재.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이 ‘거기에’의 그때마다의 상황을 열어 밝혀주어서, 실존은 행위하면서 현사실적으로 주위세계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을 둘러보며 배려한다. 상황의 손안의 것 곁에 결단을 내려 존재함은, 다시 말해서 주위세계적으로 현전하는 것을 행위하면서 만나게 함은 오직 이 존재자를 현재화함에서 가능하다. 

시간성. 도래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결단성은 자신을 현재화하면서 상황으로 데려온다. 기재는 도래에서 발원하며, 그래서 존재해온 (더 적합하게는, 존재해오고 있는) 도래가 현재를 자기 자신에서부터 내보낸다(432). 이런 식으로 존재해오며-현재화하는 도래로서 통일적인 현상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이름한다(433).

염려구조의 근원적인 통일성은 시간성 안에 놓여 있다. ‘자기를 앞질러’는 도래에 근거하고 있다. ‘……안에 이미 있다’는 그 자체로 기재를 알려주고 있다. ‘……곁에 있음’은 현재화에서 가능해진다(434). “잎에”와 “앞질러”는 도래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러한 것으로서 도래는, 현존재가 그에게 바로 그의 조재가능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실존성의 일차적 의미는 도래이다(434).

순간 눈빛(Augenblick). […] 배려되고 있는 손안의 것과 눈앞의 것에 빠져 있음이 일차적으로 그 안에 근거하고 있는 현재화는 시간성의 근원적인 양태에 있어 도래와 기재에 포함된 채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결단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을 바로 빠져 있음에서부터 되찾아왔으며, 그래서 열어밝혀진 상황을 향한 “순간 눈빛” 속에서 그만큼 더 본래적으로 “거기에” 존재한다(435).

시간성은 도대체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시간화한다(시숙한다는 표현도 사용하는 것 같아요)(435). 도래, 기재, 현재는 “자기를 향해”, “……에로 돌아와”, “……를 만나게 함”이라는 현상적 성격들을 보여준다. ‘……를 향해, ……에로, ……곁에’의 현상들은 시간성을 단적으로 엑스타티콘(탈자, 자기 밖에 나가 있음)으로서 드러낸다. 시간성은 그 자체에 있어 그 자체에 대해서 근원적인 “자기 밖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격지은 도래, 기재, 현재라는 현상들을 시간성의 탈자태들이라고 이름한다. 시간성은 앞서 먼저 하나의 존재자이고 그 다음 자기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탈자태들의 통일성에서의 시간화인 것이다(436).  

시간성의 유한성.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은 본래적인 도래에서부터 시간화되며, 그래서 그것이 도래적으로 존재해오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현재를 깨워놓는 것이다.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일차적 현상은 도래이다(436).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의 의미를 형성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성이 일차적으로 시간화하는 본래적인 도래는 이로써 그 자체가 유한한 도래임이 밝혀진다(438).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도래의 유한성 그리고 그로써 시간성의 유한성을 간과하거나 또는 그것이 “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려는 유혹은 통속적인 시간이해가 끊임없이 밀쳐들어옴으로 해서 발생한다(438-439). 오직 근원적인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만, “파생된” 시간이 무한한 것으로 시간화될 수 있는 것이다(439).

 

제66절 현존재의 시간성과 거기에서 발원하는 실존론적 분석을

더 근원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과제들

전통적인 시간 개념의 형성. 일상성과 역사성에 대한 시간적 해석은 시야를 충분히 넓게 근원적인 시간에로 고정시켜서, 근원적 시간 자체를 일상적 시간경험의 가능성과 필연성의 조건으로서 발견해야 한다. 현존재는, 그에게 그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로서 자신을, 일차적으로—명시적으로거나 또는 그렇지 않게—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다. 염려는 우선 대개 둘러보는 배려이다. 자기 자신 때문에 자신을 사용하면서 현존재는 자신을 “소모한다”. 자신을 소모하면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면서 현존재는 시간을 가지고 계산한다(440). 둘러보며-계산하는 배려가 우선 시간을 발견하며 시간 계산의 형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시간을 가지고 계산함은 세계-내-존재에게 구성적이다. 우리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시간규정성을 시간내재성이라고 이름한다. 이 시간내재성에서 우선 존재적으로 발견된 “시간”이 통속적이고 전통적인 시간개념의 형성의 토대가 된다(441).

현존재의 시간성을 일상성과 역사성 그리고 시간내재성으로 정리작업하고 나면, 그것이 비로소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의 뒤엉켜 있음을 가차없이 통찰하게끔 할 것이다. […] 현존재의 존재는 그의 포괄적인 존재론적 투명성을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 다시 말해서 손안에 있지도 눈앞에 있지도 않고 그저 “존립하기”만 하는 그런 존재자의 해명된 존재의 지평에서야 비로소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존재의 변형들에 대한 해석은 그에 앞서 충분히 해명된 존재 일반의 이념을 필요로 한다(441).

 

제4장

시간성과 일상성

제67절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의 근본구성계기

그리고 그 구성틀에 대한 시간적 해석을 앞서 윤곽지음

일상적 현존재에 대한 시간적 해석은 열어밝혀져 있음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곧 이해, 처해 있음, 빠져 있음 그리고 말 등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주목하면서 파헤쳐보여야 할 시간성의 시간화의 양태들이 세계-내-존재의 시간성을 규정하기 위한 지반을 제공한다. […]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세계-내-존재의 시간성이 곧 동시에 현존재의 특수한 공간성의 기초임이 입증된다. 거리없앰과 방향잡음의 시간적인 구성이 보여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 전체는 그 안에 현존재의 비본래성이 존재론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시간성의 시간화의 가능성을 밝혀주며 그리고 어떻게 일상성의 시간적 성격이, 즉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 사용해온 “우선 대개”의 시간적 의미가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로 이끈다(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