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카프카, 마이너문학을 위하여] 6장 계열의 증식

권순모
2020-05-04
조회수 113

(들뢰즈와 문학기계 세미나)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20200413 발제: muse



6장: 계열의 증식

(권력 문제)

**배치의 이 기능은 그것을 분해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 간의 연계를 고려함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소송』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큰 계열 속에 등장한다 .(그리고 『성』에서 모든 사람은 성과 어떤 관계가 있다). 큰 계열은 하위-계열들로 분할되고, 이 각각의 하위-계열들도 나름대로 일종의 무제한적인 정신분열적 증식을 한다.->계열들의 증식은 막다른 골목에서 막혀 버린 상황의 봉쇄를 푼다.



** 분신과 3인조는 자주 나타나지만 둘은 혼동되지 않는다. 가족의 기원한 주체의 삼각형화는 표상되는 다른 두 항과 관련하여 주체의 위치(아버지-어머니-아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언표행위주체와 언표주체로의 주체분열은 표상하는 두 주체 중 하나 내지 두 주체 모두에 대한 주체의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카프카의 분신은 대부분 두 명의 형제 내지 두 명의 관료라는 주제와 관련된다. 그것이 한 사람은 움직이지만 다른 한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경우든, 두 사람 모두 동일한 운동을 하는 경우든 간에 말이다.



** 듀오와 트리오가 상호침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분신들 중 하나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분신에게 운동을 이양하는/대행시키는 데 만족하는 경우에, 문자 그대로 관료적인 이 관성[무기력]은, 아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공상[황당무계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족 삼각형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프카는 이런 의미에서 관료주의 정신은 가정 교육에서 직접 발출하는 사회적 덕목이라고 말한다. 관료적 분신은 가족 삼각형을 참조하고, 가족 삼각형은 다시 관료적 삼각형들로 대체될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이 모든 인물/형상들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1) 어떤 때는 「변신」에서처럼 가족 삼각형이 주어질 때 다른 본성의 한 항이 추가되거나 대신한다 : 지배인은 그레고어 몰래[문 뒤로] 와서 가족에 끼어든다. 2) 어떤 때는 비록 일시적지만 관료 트리오가 일제히 자리를 잡고 가족의 자리를 차지한다 : 「변신」에서 지배인의 등장/침입은 오직 그 순간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3) 『소송』은 선재하는 가족 삼각형은 없지만(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다), 우선 한 항이, 그 다음 다른 항 ─ 이 둘은 경찰의 분신들로 기능한다 ─ 이 침입하고, 그 다음 제3항, 경찰반장에 의해 그들이 삼각형화된다. 그리고 이 비가족적 삼각형의 변신/변형이 일어나서 그 삼각형이 다시 은행 직원들의 관료적 삼각형, 몰래 엿보는 이웃사람들의 장소/위치적 삼각형, 뷔르스트너 양과 ─ 사진에 있는 ─ 그녀의 친구들의 에로틱한 삼각형이 된다.

**삼각형뿐만 아니라 분신의 경우에도,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으로 소급되거나 상호 침투하는 경우에도, 무언가 봉쇄된 채 남는 것이 있다. (편지와 동물 소설은 이 봉쇄되는 것을 알아내는데 실패한다.) 이것은 장편소설로 해결하려고 했던 주요 문제 중 하나이다. 카프카 소설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분신과 삼각형이 장편소설에서는 오직 초반부에만 있다. 처음부터 매우 흔들리고 매우 탄력적이고 변형 가능해서, 항들을 갈라지게 해서 형식을 부수는 계열들에 열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는 「변신」과 정반대로, 「변신」에서는 누이도 형제처럼 가장 배타적인 가족 삼각형화의 의기양양한 회귀/귀환에 의해 가로막힌다. 그런데 『아메리카(실종자)』에서 이미 그는 ‘증식하는 계열’이라는 해결책을 예감했고, 『소송』에서, 그 뒤에 『성』에서 그 해결책을 완전하게 소유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소설이 끝날 이유가 없었다. 발자크 식의 사회적 계보도 원치 않고, 플로베르 식의 상아탑도 원치 않으며, 그에게는 다른 블록 개념이 있기에 디킨스 식의 “블록”도 원치 않는다. 클라이스트가 카프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클라이스트의 문제는 “전쟁 문학이란 무엇인가” 여서 “마이너 문학이 무엇인가?”하는 카프카의 문제와 문관하지는 않지만 똑같지는 않다.



(욕망, 선분, 선 )



**삼각형을 무제한 변형시킴으로써, 분신들을 무한정 증식시킴으로써, 카프카는 내재성의 장을 열었다. 그의 시대에는 다만 문을 두드리고 있을 뿐인 그런 세력들, 사회적 흐름들, 그런 힘들에 대한 분해와 분석·예지로서 기능하게 될 그런 내재성의 장을 말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는 분신들이나 삼각형을 경유할 필요가 없고, 기본 인물이 직접 증식된다. (항들이 탈주선 위로 분배되고, 인접한 선분들을 따라 그 선 위로 나아가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이원적 이나 삼각형 형식을 상실하며, 이 항들은 더 이상 법의 위계화 된 대표자로 정확히 나타나거나 오직 그런 것만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사법의 배치의 에이젼트, 연결 톱니바퀴가 되는데, 이때 각 톱니바퀴는 욕망의 한 위치에 대응하고, 모든 톱니바퀴와 모든 위치는 계기(繼起)적인 연속성들에 의해 소통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보기가 되는 것은 “최초 심문” 장면이다. 거기서 법정은, 판사가 꼭지점에 있고 그것을 기점으로 하는 두 변(좌변과 우변)이 있는 삼각형 형식을 상실하고, 하나의 연속적 선 위에 늘어서는데, 이 선은 단지 양편을 “묶는/연결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움직이는 수사관/감독관, 어리석은 경찰반장들과 예심판사들, ─ 필수적이고 많은 수행원들, 즉 시종, 서기, 헌병, 그리고 다른 보조인, 심지어 형리[사형집행인]까지 거느리고 있는 ─ 고위직 판사들”을 이웃하게 함으로써 연장된다. 그리고 이 최초 심문 이후, 사무실들의 인접성이 점점 삼각형들의 위계를 대신해 간다.

**권력은 곧 욕망이다. 결핍-욕망이 아니라, 충만이자 행사/실행이자 작동으로서의 욕망 : 권력의 가장 하급 관리들에서까지 그렇다. 배치인 한에서 욕망은 기계의 톱니바퀴들 및 부품들과, 기계의 권력[성능]과 엄밀하게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권력에 대해 갖는 욕망은 이 톱니바퀴들에 대한 매혹, 이 톱니바퀴들 중 어떤 것을 작동시키고 싶은 욕구, 그 자신이 이 톱니바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 ─ 혹은 하는 수 없이, 이 톱니바퀴들이 처리/가공하는 재료,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하나의 톱니바퀴인 재료이고 싶은 욕구 ─ 일 뿐이다. )

** 작동자와 질료: 억압하려는 욕망과 억압받으려는 욕망. 그러나 문제는 이 둘의 관계보다 더 복잡하다. 억압은 억압하는 자에게나 억압받는 자에게나 욕망-권력의 이런저런 배치, 기계의 이런저런 상태에서 연원한다. 왜냐하면 기묘한 합작에는 위계보다는 접속의 경우에 더욱더 질료 못지않게 기계작동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무한한 초월성인 권력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선분적이고 선형적인 것이며, 인접성에 의해 작동한다. 각각의 선분은 권력이다. 그것은 욕망의 형상인 동시에 하나의 권력이다.

** 카프카는 단지 기술 기계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술 기계들이 더 복합적인 배치의 지수일 뿐임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배치는 기계 운전자들, 부품들, 재료/질료, 기계화된 인사/직원들, 형리들과 희생자들, 권력자들과 무능력자들을 하나의 집합적 전체 안에 공존시킨다. 욕망은 스스로 흐르지만 매번 완벽하게 규정된다. 관료제적 에로스, 자본가적 에로스, 파시스트적 에로스는 모두 권력의 한 선분일 뿐이다. 가변적인 인접성에 따라 소통되는 모든 선분들. 욕망은 기본적으로 다의적이고, 다의성은 사실상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욕망이다.

** 권력과 대립되는, 권력의 기계와 대립되는 혁명적 욕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프카에게는 사회적 비판이 의도적으로 부재하다. 『아메리카(실종자)』에서, 가장 가혹한 노동 조건은 K의 비판보다는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강화시킨다. 카프카는 체코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과 가까이 지내지만 그 길로 접어들지도 않고 노동자들의 행렬과 마주칠 때 카프카는 『아메리카』에서 K가 보이는 것과 같은 무관심을 보인다. 카프카에게 러시아 혁명은 전복과 재생/부흥이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선분의 생산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팽창/전파는 지독한 연기 없이 일어나지 않는 전진, 선분의 발아, 성장/증가이다. 카프카는 분명 자신을 어느 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우호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혁명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온갖 끈으로 문학적 표현 기계에 묶여 있고, 자신이 그 기계의 톱니바퀴이자 기사[기계공]이자 공무원/관리이자 희생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양한 사회적 운동들은 사실 전복이나 혁신이 아닌 새로운 선분의 생산이다.

**그러면 카프카는 어떻게 혁명을 일으키는가? 카프카는 체코에서의 독일어처럼 한다.

그 언어는 여러 가지로 탈영토화된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탈영토화의 길로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데 이는 과잉/과다, 뒤집기, ‘두텁게/무성하게 하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직선 위에 흐르게/풀어지게 하는, 언어의 분할/분절을 앞서가고 그것을 이끄는/재촉하는 절제에 의해서 그렇다. 표현은 내용을 끌고 가야 하며, 내용에서도 [표현에서와] 같은 것을 해야 한다. 『소송』에서 등장하는 계열의 증식이 이 역할을 한다.

세계의 역사는 영원회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고 점점 단단해지는 선분들의 발아로 이루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분성의 속도, 이 선분 생산의 속도를 가속할 것이고, 선분화된 계열들을 재촉하고 부풀릴 것이다. 비판은 완전히 무용하다. 현실적/현행적이지 않지만 이미 실재하는 잠재적 운동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순응주의자들, 관료들은 끊임없이 운동을 이런저런 지점에서 멈춰 세운다). 이미 실재하는 잠재적 운동을 따르는 것은 극약처방식 전술/정치가 아니며, 문학적 풍자는 더욱 아니며, SF는 더욱 아니다.

**이 가속 혹은 선분 증식의 방법은 유한한 것, 인접한 것, 연속적인 것, 무제한적인 것을 결합한다. 이 방법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 파시즘적 욕망, 관료주의적 욕망, 타나토스[죽음 본능]까지, 모든 것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선분들의 급해진 연쇄를 끊는 공식적 혁명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선분들의 재촉[서두름]을 앞지르는 문학 기계, 즉 아메리카주의, 파시즘, 관료주의 등의 “악마적 세력들”이 완전히 구성되기 전에 그들을 추월하는 문학 기계에 의지할 것이다 : 카프카의 말처럼 거울보다 시계가 앞서/빨리 간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간에, 혹은 그런 종류의 욕망들 간에도 정확한 구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미래에 어떤 선들이라도 같이 드러나길 바라면서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되기와는 다른 요소로 이행했다. 동물-되기가 이미 출구를 파놓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거기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미 절대적 탈영토화가 작동했음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아주 느린 것이었고, 그나마 그 극중의 하나에서만 그랬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잡히고 재영토화되며, 재삼각형화 되었다. 카프카에게 동물-되기는 가족적인 사건이었다. 계열이나 선분의 압력으로 인해 우리는 극히 기이하기까지 한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욕망은 공존하는 두 가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이런 선분, 저런 사무실, 이런 기계 내지 저런 기계 상태 속에서 포착되고, 이런 내용의 형식에 사로잡히며 저런 표현 형식으로 결정화 된다. 동시에 한편으로 욕망은 모든 선을 따라 나아가고, 해방된 표현을 인도하고 탈형식화된 내용을 유도하며, 사법 내지 내재성의 장의 무제한성에 도달한다. 기계란 단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응고물 뿐이라는 발견 속에서, 또한 욕망은 끊임없이 그것을 해체하며 숙인 고개를 다시 든다는 그러한 발견 속에서 출구를, 정확하게 출구를 발견하면서 말이다. (자본주의, 파시즘,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 카프카가 “비판”에 전념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강렬한 투쟁)



** 이 욕망의 두 가지 공존하는 상태는 법의 두 가지 상태이다. 1) 한편으로 법은 끊임없이 유한한 선분을 뒤흔들고 그것을 완전한 대상으로 만들고 여기저기서 결정화하는, 편집광적인 초월적 법이다. 2) 다른 한편으로 법은 편집광적인 법의 모든 배치를 분해하는 “기법/방법”, 반-법, 사법으로 기능하는, 내재적인 분열증-법이다

** 내재 배치의 발견과 그것의 분해는 같다. 기계적 배치를 분해하는 것은 동물-되기가 택할/따를 수도 창조할 수도 없었던 탈주선을 실제로 창조하고 택하는/따르는 것이다. 기계적 배치를 분해하는 것은 동물-되기와는 전혀 다른 선, 전혀 다른 탈영토화인 것이다. 글쓰기는 하나의 기계인데, 글쓰기 기계는 때로는 자본주의 기계나 관료주의 기계나 파시즘 기계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수수한/조촐한 혁명적 선을 그리는 (다른 것들처럼 상부구조가 아니고, 다른 것들처럼 이데올로기가 아닌) 기계이다.

** 카프카의 변함없는 관념 : 심지어 혼자인 기계공에게 있어서도, 문학적 표현 기계는, 좋든 싫든 간에 집단 전체에 관련될 조건 속에서 내용을 앞지르고 재촉할 수 있다. 반(反)서정성 : 세계 자체를 회피하거나/멀리하거나 세계를 어루만지는/애무하는 대신에, “세계를 움켜쥐고” 그것을 탈주/탈출시키기.

**욕망 또는 법의 이 두 가지 상태를 우리는 여러 마이너 층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공존하는 두 가지 상태를 강조해야 한다. 정확히 미리 이것은 나쁜 욕망이고 저것은 좋은 욕망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관료주의적 덩어리들, 파시즘적 덩어리들 등이 혁명적 동요agitation 속에 아직 또는 이미 들어있는, 수프, 여러 개의 선분으로 이루어진 걸쭉한 죽이다. 오직 운동 속에서만 욕망의 “악마성”과 욕망의 “순수성innocence”을 구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둘 중 하나는 다른 것의 가장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선재하지 않는다. 카프카가 그토록 위험한 것은 그의 무-비판의 힘/역량 때문이다. 하나가 다른 것에 사로잡히는, 공존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고만 말할 수 있다. 1) 하나는 욕망을 거대한 악마적 배치들 속으로 끌어들여서, 추종자들과 희생자들, 간부들과 하급자들을 거의 같은 보조로 끌고 가고, 사무실에서, 감옥에서 묘지에서라도 다시 재영토화함으로써만 인간의 대대적인 탈영토화를 수행하는 운동(편집광적인 법)이다. 2) 다른 하나는 모든 배치를 가로질러 욕망을 흐르게/풀어지게 하고, 어떤 선분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모든 선분을 가볍게 스치며, 출구와 일체가 되는 탈영토화 역량의 순수성을 언제나 가장 멀리 가져가는 운동(분열증-법)이다.

***이 때문에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거대 기계들과 배치들에 대해 아주 이상야릇한 포지션, 그들을 다른 인물들과 구별 짓는 포지션을 갖는다 : 「유형지」의 장교는 [처음에는] 기계공으로, 그 다음에는 희생자로서 기계 안 있는데 반해, 장편소설의 인물들은 기계의 어느 상태에 속해 있고, 그 상태 밖에서는 실존을 상실한다. 그에 반해 K와 그를 둘로 나누는 몇몇 다른 인물들은 언제나 기계에 인접해 있고 언제나 이런저런 선분과 접촉하면서도 언제나 밀어내지고 언제나 밖에 고정/억제되고, 어떤 의미로는 너무 빨라서 “붙잡혀/사로잡혀”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성』에서 K가 그렇다. 인접, 그것이 분열증-법이다. 『소송』에서 K의 분신들 중 하나인 학생은 끊임없이 관청 정리(廷吏)huissier를 앞지르고, 정리가 메시지를 전달/운반하는 사이에 그의 아내를 빼앗는다(“나는 전속력으로 돌아오지만, 학생은 나보다 훨씬 더 빨랐다.”) 운동의 두 가지 상태, 욕망의 두 가지 상태, 법의 두 가지 상태의 이러한 공존은 망설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초월적 기준도 없이 욕망의 다의적 요소들을 떠 옮기는[명확히 하는] 내재적 실험을 의미한다. “접촉”, “인접”은 그 자체가 능동적이고 연속적인 탈주선이다.

**두 가지 상태의 이러한 공존은 「어떤 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송』의 단장(斷章)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1) 한편으로, 빠르고 유쾌한 ‘미끄러짐 혹은 탈영토화 운동’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꿈꾸는 사람의 죽음의 재영토화를 수행한다. 이 텍스트는 아마 단단한 선분(“뿌리 뽑힌 돌”) 위에서의 이 K의 죽음의 재영토화라는 『소송』의 거짓 결말을 해명해 줄 것이다.

**운동, 욕망 내지 법의 이러한 두 가지 상태는 사진과 숙인 고개에서도 다시 발견된다. 표현 형식으로서의 사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부부 생활의 약속 같은 오이디푸스적 현실의 이름으로 기능한다. 또한 그에 상응하는 내용의 형식은 복종의 지표고 재판받는 자 내지 재판하는 자의 행동인 숙인 고개이다. 그러나, 요컨대 욕망의 일종의 인위적 영토성을 표시했던 사진이나 초상화는 이제 상황과 인물의 진동의 중심, 탈영토화 운동을 재촉하는 접속기/접속장치가 된다. 구속적인 형식에서 해방된, 그리고 그와 유사한 ‘내용의 해방’을 유도하는 표현 : 실제로 숙인 머리의 복종은 쳐드는 머리 또는 늘여 뽑는 머리의 운동과 결합된다 ─ 천장 반대로 굽은 그들의 등이 ‘법’을 다락방으로 보내는 경향이 있는 판사들부터, 묘를 밟지 않으려고 “몸을 숙이지/굽히지 않고 미리 몸을 구부리는/내미는” 「어떤 꿈」의 예술가까지. 사진과 머리의 증식은 새로운 계열들을 열어젖히고, 무제한의 내재성의 장만큼 펼쳐지는/연장되는, 그때까지 탐험되지 않은 영역들을 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