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9장

권순모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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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9강 1976년 3월 3일

박우현

 

역사적 앎의 전술적 일반화

 

- 프랑스 혁명 무렵으로 시기를 옮겨 역사적-정치적 담론, 역사적-정치적 장의 구성을..

- 이 특정한 순간에 두 개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데,

1) 귀족적 반동과 연결된 이 담론이 어떻게 일반화됐는가.

2) 이 전술이 세 개의 상이한 전투와 대응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세 개의 전술을 산출해 세 개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방식.

--> (1) 민족성(언어현상, 문헌학과 관계), (2) 사회계급(경제적 지배, 정치경제학과 관계) (3) 인종 (생물학적 종별화와 선택, 역사적 담론과 생물학적 문제계와 관계)(231~232)

 

역사적 앎의 전술적 일반화. 어떻게 18세기 초 귀족적 반동에서 탄생했던 것이 18세기 말에는 어떤 관점을 취하든 모든 정치투쟁에서 사용되는 일반적 도구로 바뀔 수 있었는가?

 

불랭빌리에는 민족적 이원성을 역사의 이해가능성의 원리로 삼음.

이해가능성은 세 가지 의미

1) 전투, 전쟁, 정복, 침략 등 최초의 갈등을 발견하는 것, 즉 다른 모든 전투나 전쟁이나 대결을 그 직접적인 결과로서 파생시킬 수 있는 또는 힘 관계에서 일련의 자리바꿈이나 수정이나 역전에 의해 파생되는 최초의 갈등, 호전적 핵심을 발견하는 것이었음. 즉 역사 속에 퇴적되어온 모든 싸움을 관통하는 거대한 투쟁의 계보학.

 

2) 배반을, 본성에 반하는 동맹(야합)을, 한쪽의 계략과 다른 쪽의 비겁을, 모든 특혜를, 차마 말할 수 없는 계산을, 이런 변형을 가능케 했던 모든 용서할 수 없는 망각을,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를테면 근본적인 관계와 대결의 변조를 포착해야만 했음.

 

3) 모든 전술적 자리바꿈, 모든 역사적-도덕적 횡령의 너머에서 선한 동시에 참이기도 한 힘관계를 재발견하고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힘관계를 발견하고자 했음.

 

이 기획은 불랭빌리에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정식화 (232~234)

 

헌법, 혁명, 그리고 순환적 역사

 

∴ 역사의 이해가능성의 분석이라는 기획에는 세 가지 과제

--> 전략적 끈을 다시 잇는 것, 도덕적 분할들의 끈을 추적하는 것, 정치와 역사의 구성점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왕국의 구성 순간을 엄정하게 복원하는 것.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구성). 헌법은 어떤 시점에서 정식화된 법률의 명시적 전체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님. / 역사적 정합성과 상황을 지닌 어떤 것, 법률의 차원보다는 힘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 문서의 차원보다는 균형의 차원에 있는 어떤 것의 재발견이 문제 / 즉, 힘관계, 비율의 균형과 작용, 안정적인 비대칭성, 알맞은 불평등 같은 것. (234)

 

불랭빌리에에서부터 가능해졌던 것

--> 구성이라는 개념과 혁명이라는 개념의 짝짓기 / 힘관계에 의해 순환적 역사철학 같은 어떤 것이, 특히 역사는 이런 원(圓)을 따라서 전개된다는 관념이 거기에 재도입됨.(235)

--> 순환적 시간의 철학으로서의 역사철학은 구성과 힘관계라는 이 두가지 개념이 작동됐던 18세기부터 가능해졌음.

 

미개인과 야만인

 

좋은 것이자 참인 구성점을 역사 속에서 찾으며 불랭빌리에가 하고 싶었던 것은 ?

 

- 불랭빌리에와 그 후계자들의 커다란 적수는 자연, 자연인 / 두가지 의미로 이해된 자연인, 미개인이 커다란 적수.

미개인이란? 선하든 악하든 법학자들이나 법의 이론가들이 사회 이전에,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그로부터 사회체가 구성되는 요소로 상정하는 자연인

불랭빌리에 등이 푸닥거리하고 싶었던 것은 미개인의 또 다른 측면. 즉 경제학자들에 의해 발명된 이상적 요소로서의 자연인, 역사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자신의 이익에만 이끌려 행동하고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다른 생산물과 교환하는 인간. / 즉, 이론적-법적 미개인 ,계약을 맺고 사회를 창설하기 위해 숲에서 나온 미개인, 교환과 물물교환을 할 운명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미개인 / 미개와 교환의 이 짝은 18세기 법이론뿐 아니라 19~20세기 인류학에서도 발견. / 18세기 법사상에서 이 미개인은 본질적으로 교환하는 인간

- 미개인은 교환자, 즉 법의 교환자 또는 재화의 교환자인 것. 법의 교환자로서 미개인은 사회와 주권을 창설. 재화의 교환자로서 미개인은 경제체이기도 한 사회체를 구성. 미개인은 18세기 아래로 기초적 교환의 주체.

 

미개인에 맞서 불랭빌리에가 개시한 역사적, 정치적 담론은 미개인처럼 기초적 인물이지만 아주 상이하게 구성된 야만인을 내세움(237) / 야만인은 미개인과 대립

- 본질적으로 미개인은 미개상태에서는 다른 미개인들과 더불어 늘 미개하지만, 사회적 유형의 관계에 들어서자마자 미개한 존재이기를 그침 / 야만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문명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특정지어지며 정의될 수 있는 자

- 자신이 그 외부에 있고 그것에 맞서 투쟁하게 되는 문명이라는 지점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야만인은 존재하지 않음. / 문명이라는 지점에 대해 야만인은 반목상태에 있으며 영구적 전쟁관계.

늘 국가의 국경을 짓밟는 야만인, 도시의 성벽을 두드리는 자! / 자신이 속한 자연이라는 배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야만인은 자신이 부딪치게 될 문명이라는 배경에서만 생겨남

- 야만인은 사회를 창설함으로써가 아니라 문명에 침투해 문명을 불사르고 파괴함으로써만 역사 속에 진입하는 것. 따라서 야만인과 미개인의 첫 번째 (대립)지점, 차이는 이 문명과의 따라서 선행하는 역사와의 관계라고 생각.

- 야만인은 미개인처럼 교환의 벡터가 아님. 야만인은 지배의 백터! 야만인에게 소유관계는 이차적인 것. 야만인은 선행하는 소유물만을 탈취함. / 야만인의 자유는 다른 자들의 잃어버린 자유에만 의존. 자신이 유지하는 권력과의 관계에서도 야만인은 미개인과 달리, 결코 자신의 자유를 양보하지 않음. (238~239)

 

미개인은 남아돌 정도의 자유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목숨, 안전, 소유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유를 양보하기도 함. (하지만) 야만인은 결코 자신의 자유를 양보하지 않음. / 야만인에게 통치의 모델은 필연적으로 군사적 통치이며, 미개인을 특징짓는 시민적 양도의 계약에는 조금도 의존하지 않는 통치. 18세기에 불랭빌리에 유형의 역사가 수립했던 것은 이 야만인이라는 인물

- 따라서 우리시대 법학적-인류학적 사유.. 목가적이고 미국적인 유토피아주의에서까지.. 미개인이 늘 선하다고 간주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음. / 야만인은 악독한 존재 -> 교환의 인간과 자연의 인간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야만인은 지독히도 거만한 존재이자 비인간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 야만인은 역사의 인간이고, 약탈과 방화의 인간이며, 지배의 인간(240)

 

야만인의 세 검열: 역사적 담론의 전술들

 

정치적 도구로 사용됐던 이 역사적-정치적 장에서 18세기에 수립된 거대한 전술들의 특징은 각 전술들이 블랭빌리에의 분석에서 제시된 네 가지 요소를 어떻게 가동시켰느냐에 따라 구분될 수 있음. 구성(헌법), 혁명, 야만, 지배

- 구성적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어떻게 야만적 지배를 여과해야 할까? 라는 문제.

 

이 문제에 대한 상이한 해결책 -> 역사적 담론의 장에서 역사적-정치적 장에서 상이한 집단, 상이한 이해관계, 전투의 상이한 중심의 전술적 입장을 규정. / 18세기 하나의 문제가 역사적 담론의 총체로 솟아남 --> 혁명과 야만, 혁명에서의 야만의 경제(241~242)

 

- 야만적인 것에 관한 세 개의 커다란 여과기 모델.

1) 첫 번째 여과기 : 극히 엄격하고 절대적인 여과기, 역사 속에 야만적인 것을 전혀 남겨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 프랑스에 군주제를 들여오고 어떤 의미로는 그 운반자였을 수도 있는 게르만족의 침략 따위란 프랑스 군주제의 뒤에 없었음을 보여줘야만 했음. / 귀족의 선조들은 라인강 저편에서 온 정복자가 전혀 아니라는 것. 따라서 귀족을 군주와 다른 신민들 사이에 위치시키는 귀족의 특권들은 아주 뒤늦게 귀족에게 양도됐거나, 혹은 어떤 어두운 경로를 통해 찬탈됐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음. --> 요컨대 이런 입장은 특권을 갖게 된 귀족을 야만적인 유목민 시조와 결부시키는 대신에, 이 야만적 핵심을 교묘히 피하고 사라지게 만들며 귀족을 이른바 허공에 뜨게 만들어냄 --> 군주제의 테제

 

군주제의 테제 기본적 명제는 --> 프랑크족은 결국 불랭빌리에가 철두철미하게 만들어낸 신화이자 환상이라는 것. 프랑크족은 실존하지 않고 무엇보다 우선 침략이라는게 전혀 없었다고 주장.

실제 역사는 ? 부르군디족 고트족 침략. 로마인 속수무책. 로마인은 어떤 소수민족에게 동맹자의 자격으로 도움을 청했는데 그들이 바로 프랑크족 / 프랑크족은 지배와 노략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는 기골이 장대한 야만인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동맹을 맺어 도움을 주는 소수민족으로 받아들여짐.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림. 즉각 갈리아-로마의 시민이 됐을 뿐 아니라 정치권력의 도구도 부여받음. / 침략도 아니고 지배도 아니며, 이민과 동맹. 프랑크족 침략도 없었고, 고유한 법체계나 관습을 지닌 프랑크족 인민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없음. --> 군주제의 테제에서는 프랑크족은 엄청나게 숫자가 많은 갈리아-로마인들 속에 흩어져서 자신들의 관습도 잃었다고 주장.

--> 요컨대 로마 황제의 독재관적 권리를 계승한 왕만이 구조의 정점에 머물렀던 것. 다시 말해 불랭빌리에가 믿었던 것처럼 야만적 유형의 귀족이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며, 처음부터 절대군주제가 있었다고 주장. / 귀족의 침략은 군사적 승리의 결과와 야만인의 침입이 아니라 내적 찬탈의 결과로 분석됨. 정복의 사실은 항상 시인되지만 야만적 풍경도 군사적 승리가 응당 야기할만한 결과도 제거. 귀족은 야만인이 아니라 사기꾼, 정치적 사기꾼인 것. (246~247)

 

2) 두 번째 여과기 : 귀족계급이 누리는 특권의 배타적 성격에서 게르만적 자유, 즉 야만적 자유를 떼어내는 것이 문제가 됨 / 목표가 된 것은 군주제의 로마적 절대주의에 맞서 프랑크족과 야만인들이 가져다준 자유를 계속 강조하는 것. --> 불랭빌리에의 전술과 가까운 테제.

--> 털북숭이 무리가 갈리아에 들어옴 — 전사적 게르만족은 아님. 갈리아에 도입된 정치적 사회적 형태는 넓은 의미의 민주주의. 그 어떤 형태의 귀족제도 알지 못하고 시민-병사라는 평등한 인민밖에는 알지 못하는 프랑크족의 야만적 민주주의. / 갈리아에 침입했을 때는 장점이었던 야만적 프랑크족의 탐욕과 이기주의는 정착하자마자 결점 / 권력행사 소홀하고 약탈만 몰두. 왕이 하고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둠. / 프랑크족은 사실상 공화제를 구성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군주제의 신민이라고 믿음.

 

--> 군주의 관리들 — 프랑크족의 야만이 가져다준 일반적 민주주의에서 떠나 군주제적인 동시에 귀족제적인 체제로 들어감. / 귀족계급에 의한 지배와 위협이 점점 더 강해진다고 느낀 카롤루스 대제 --> 마르스 광장과 5월 집회 부활 — 잠시 게르만적 민주주의로 회귀. / 이후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하는 느릿한 과정 / 결국 왕을 만들어낸 귀족들과 봉건제를 만들어낸 왕의 공모에 의해, 군주제와 귀족제라는 쌍둥이 형상이 야만적 민주주의 위에서 생겨남.

 

3) 세 번째 여과기(담론의 세 번째 유형, 분석의 세 번째 유형) : 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

두 개의 야만성을 구별 . 하나는 그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나쁜 야만성, 게르만족의 야만성. 그리고 좋은 야만성, 갈리아족의 야만성 -> 이것만이 진정으로 자유의 담지자.

이로부터 두 개의 중요한 조작 -> 불랭빌리에가 하나로 묶은 자유와 게르만성의 분리. 다른 한편 로마성과 절대주의가 분리 / 선행하는 테제들에서 정도차가 있긴 하지만 프랑크족에 의해 수입됐다고 간주된 자유의 요소들이 로마적 갈리아 속에서 발견되는 것.

 

--> 새로운 테제는 오귀스탱 티에리, 프랑수아 기조와 같은 19세기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의 테제가 되는 테제. 로마인의 정치체계가 사실상 두 층위를 지녔다는 것.

--> 중앙정부의 수준, 로마식 거대행정의 수준에서 적어도 제국 이후부터는 절대권력이 문제가 됨. 하지만 로마인은 갈리아족이 원래 갖고 있었던 자유를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둠. 갈리아적 켈트적 자유의 온상이 도처에.. 로마제국의 유명한 자치도시들에서 계속 기능. / 따라서 자유는 로마적 절대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현상.

--> 푸코 생각에 자유가 역사분석에서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것은 갈리아적 현상이지만, 특히 도시적 현상. 자유는 도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도시에 속해 있었기에 이 자유는 투쟁할 수 있었고 정치적 역사적 힘이 될 수 있었음.

--> 제3신분의 테제 / 도시의 역사, 도시적 제도들의 역사, 부와 그 정치적 효과의 역사가 처음으로 역사분석 속에서 분절될 수 있었기 때문 / 맨 처음으로 늘 왕의 편에 있던 로마성(로마적 성격)이 자유주의의 색깔을 띠게 됨 (249~251)

 

방법의 문제: 부르주아지의 인식 장과 반역사주의

 

이 담론의 중요성은 그것이 역사의 장을 엄청나게 넓혔다는 점. --> 가공할만큼 과거로 소급됨 /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모든 투쟁을 통해 봉건제의 초기부터 15~16세기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으로서 부르주아지가 부분적으로나마 대두되기까지에 이르는 모든 공동체들의 반란을 통해 아래로 확대.

 

-> 역사의 장이 전반적으로 확대 . 바로 이 장에서 19세기 역사가들이 작업을 재개.

(푸코가) 세부내용, 역사의 장 내부에 상이한 전술을 상세히 언급하는 두가지 이유

 

1) 방법상 이유 : 역사적 테제들과 이것들이 내건 정치적 목적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모든 역사적 담론을 꽉 죄는 인식적 씨실이 있는 것. 그런데 이 인식적 씨실이 매우 촘촘하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전혀 아님. 반대로 이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이 다름이 정치적으로 적실한 것일 수 있기 위한 조건.

-> 상이한 주체들이 말하고 전술적으로 대립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이한 주체들이 서로 대면하고 적수의 입장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따라 그 대립이 앎의 차원에서의 대립인 동시에 정치의 차원에서의 대립이기 위해서는 촘촘한 장이, 역사적 앎을 규제하는 촘촘한 그물망이 존재해야만 했음. 앎이 규제적으로 형성될수록 점점 더 거기서 말하는 주체들은 엄격한 대결 노선을 따라 서로 나뉘는 것이 가능해짐 / 역사적, 정치적 장의 내부에서 상이한 담론적 전술의 분배를 강조했던 것.(253~254)

 

2) 사실과 관련된 이유 : 프랑스 혁명의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던 것과 관련 / 마지막 담론을 제외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기획을 역사속에 투입하는데 거의 이해관계가 없었던 것은 당연히 부르주아지와 제3신분. / 그런데 부르주아지와 제3신분이 어쨌든 중세 시대의 중반 전에 힘관계들의 작용속에서 자기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음은 분명

 

-> 18세기 부르주아지는 역사에 대해 지극히 망설이고 지극히 꺼려했던 것. 깊이 살펴보면 역사적이었던 것은 귀족계급. 군주제(왕당파)도 그랬고, 의회파도 마찬가지. 부르주아지는 오랫동안 반역사주의적이며 반역사적인채로 남았음.

 

-> 부르주아지의 반역사적 성격.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남.

우선 18세기 전반 내내 부르주아지는 계몽된 철학이나 기술이나 행정 등에 의한 제한에 근거를 둔 군주제적 권력의 온건한 형식에 대해 매우 호의적. 그리고 18세기 후반 특히 프랑스혁명 전에 부르주아지는 헌법의 복원(재-구성)이 아니라, 반역사적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인 헌법(구성)을 요구함으로써 주위의 역사주의에서 탈피하고자 함. 그래서 자연법이나 사회계약 같은 것에 의존했던 것.

 

-> 18세기 말 곧 프랑스혁명 전과 초기까지 부르주아지의 루소주의는 바로 권력 이론과 권력 분석의 장에서 서로 싸우고 있던 이 다른 정치적 주체들의 역사주의에 대한 응답이었음. 루소주의자라는 것은 미개인에게 호소한다는 것, 계약에 호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야만성이나 그 역사나 이것이 문명과 맺은 관계에 규정된 모든 풍경에서 탈피한다는 것이었음.(254~255)

 

프랑스 혁명에서의 역사적 담론의 재활성화

 

- 물론 부르주아지의 이 반역사주의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남았던 것은 아님. 역사의 재분절을 막을 수 없었음. 삼부회가 소집됐을 때 진정서는 역사적 참조로 가득 채워져 있었음. 그러나 물론 그 근간은 귀족의 그것

 

법적 루소주의에서 출발해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형식이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

 

하나는 로마의 부활, 오히려 로마적 도시국가의 부활.->고풍스럽고 공화적이고 비르투를 중시한 로마의 부활, 자유와 번역을 누리는 갈리아-로마적 도시국가의 부활.

또 하나는 카롤루스 대제의 부활. 프랑크적 자유와 갈리아-로마적 자유의 접합점.

-> 게르만적 왕이자 로마적 황제인 카를로스 대제 --> 카롤링거 왕조의 꿈과 로마의 꿈의 합류 지점이 나폴레옹 제국에서 발견된다는 점.

 

봉건제와 고딕 소설

 

프랑스 혁명 내부에서 역사적 부활의 또다른 형식은 봉건제에 대한 증오 / 불랭빌리에의 테제, 침략설이 뒤집힘.

 

-> 19세기 초반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떤 것이 형성. 인종들의 역사에 입각해 프랑스 혁명이, 이 프랑스 혁명을 가로질렀던(프랑스 혁명 동안에 일어났던) 정치적이고 사회적 투쟁이 재해석됨.

권력 남용과 수탈의 서사인 고딕 소설의 고평가도 봉건제에 대한 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