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note[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20201120

권순모
2020-12-04
조회수 149

11/20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 칸트와 들뢰즈의 Idée

칸트는 모든 도덕관념을 이념Idée라고 본다. 예를 들어 순수한 innocence는 경험 속에 그 대상이 없다. 오로지 이노센스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칸트는 두 종류의 프리젠테이션, 직접 프리젠테이션과 간접 프리젠테이션이 있다고 본다. 삼각형 개념은 삼각형 이미지를 그려 직접 대응시킬 수 있다. 이것이 직접 프리젠테이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념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없다. innocence라는 개념, 신이라는 관념은 이미지를 통해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없고 간접적으로만 보여줄 수 있다. 직접 프리젠테이션이 가능하려면 도식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도식은 작도 규칙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념에는 도식이 없다. 삼각형의 개념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도 규칙이 있지만 이념에는 그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sens를 의미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너무 크거나 작아서 그런 차원의 것이라 설명한다. 무한, 신, 순진무구와 같은 Idée를 순수 질료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내재화시킨다. 무한, 신, 순진무구는 이념으로 자연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것을 생산하거나 인식하게 해주는 규칙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를 인식하게 하는 규칙이 없다. 『차이와 반복』에는 오로지 감각만 할 수 있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른 faculty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현기증, 약에 취한 상태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초감각적 경험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도취도 이에 해당한다. 반면 개념에 의한 파악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칸트에게 Idée는 실천의 문제, 도덕의 문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반도덕주의자인 들뢰즈에 오면 그 역할이 바뀐다. 그가 볼 때 순전히 의무감, 즉 Idée로만 행동하는 사람은 경험상 없다.

 

10장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자기원인으로서의 신 : 일의성

데카르트한테는 ‘신이 만물의 원인이다’ 할 때의 원인과 ‘신이 자기원인이다’라고 할 때의 원인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자는 작용인이고 후자는 형상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두 원인은 같은 것이다.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다.

1)작용인transitive cause타동인, 원인이 자기 밖으로 나가 결과를 만든다. 작용인은 창조인에 해당한다. 신은 만물을 창조할 때 자기 밖으로 나가 창조하고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조물주 신이 원인이라고 할 때는 작용인을 가리킨다.

2)유출인emanatic cause 신플라톤주의, 발출인, 원인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고 자기 밖에 결과를 만든다.

3)내재인immanent cause 스피노자, 둔스 스투코스, 원인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고 결과는 원인  안에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의 본질이 신의 실존의 원인이라고 할 때 이것은 작용인이 아니라 형상인이다. 이처럼 작용인과 형상인은 다르다. 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형상인은 본래 결과와 공존하므로 결과와 분리되지 않는 내재적 본질이다[←내재인]. 그런데 신의 실존이 작용인을 갖지 않는 이유, 그리고 본질과 일체가 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신의 실존이 작용인을 갖게 되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된다. 그러면 신은 피조물과 다를 게 없어진다.

신의 본질이 곧 실존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데카르트는 신의 광대함, 넘쳐 흐름, 무한성 등 단순한 특성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고유성/특성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광대하고 무한하다는 것은 속성의 술어에 해당한다. 그는 신, 실체에 대해서는 절대적 무한이라고 하고 속성에 대해서는 상대적 의미에서 무한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특성은 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에게는 자기원인이 그 자체로 도달되고 신의 본성에 직접 근거할 수 있는 이유가 없다. 자기원인에 직접 도달할 수 있는 이유가 데카르트에게는 없는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적 본성과 고유성, 절대성과 무한성을 구별함으로써 그 이유를 발견한다. 신적 본성은 절대적인 것이고 속성들은 고유한 것으로 무한하다. 즉 신적 본성이 절대성이고 고유성이 무한성인 것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무한히 많은 속성에서 이유를 찾는다. 속성들은 신의 절대적 본성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형상적 요소들이다. 그래서 이 속성들이 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동시에 신의 실존을 구성한다. 이 속성들은 신의 본질을 표현할 때 본질에서 파생되는 신의 실존도 같이 표현한다. 실체가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의 무한한 속성이 바로 신의 실존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실존과 본질이 일체를 이룬다. 신의 실체와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속성들은 실체를 유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기원인으로 만드는 positive한 이유들이다. 실체는 속성들을 통해서 자기 원인이 된다.

 

▶ 속성들은 본성을 구성하고 실존도 구성하고 본질을 표현하는 동시에 실존도 표현한다.

 

일의성과 내재성

자기원인과 작용인은 데카르트에게는 의미가 다르게 쓰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같은 의미라는 것은 일의적이라는 것이다. 만물을 생산하는 원인과 신이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고 할 때의 원인은 같은 원인이다. 신은 필연적으로 생산한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속성들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산한다.

일의성의 두 측면 1)원인의 일의성. 2) 속성의 일의성. 1)작용인이라고 할 때의 원인과 자기원인이라고 할 때 원인은 한가지 의미다. 2)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할 때의 속성과 양태들이 속성을 함축하거나 내포한다고 할 때의 속성은 같다. 신의 속성이라고 할 때의 속성과 양태들이 속성을 함축/내포되었다고 할 때의 속성이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주의는 부정신학과의 전투, 즉 다의성, 탁월성, 유비에 기대는 모든 방법과의 전투와 분리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존재에 부정을 도입하는 것[=부정신학, 부정적인 방식으로 신을 인식하는 것. 신은 ~가 아니다]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부정이 잔존하는 거짓 긍정 개념[=유비, 인간의 지성은 유한한 지성이고 신의 지성은 무한한 지성이다. 신은 선하지 않다. 여기서 선하지 않음은 인간이 선하지 않음의 선함이 아니다. 다른 의미로 선하다. 이 다른 의미는 인간의 선함이라는 의미보다 더 고차적인/우월한 의미다. 신이 무한하게 선하다는 긍정이다. 이 안에는 인간적 선함에 대한 부정이 들어 있다. 그래서 부정이 잔존한다survive고 하고 거짓 긍정 개념conception[觀]이라고 한다]도 비판한다. 스피노의 내재성 개념이 갖는 의미는 다른 게 아니다. 원인과 속성의 이중적 일의성. 1) 작용인과 형상인의 통일성/동일성=원인의 일의성 2)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과 피조물(양태)의 본질에 내포된 속성의 동일성=속성의 동일성. 즉 내재성이 바로 이 이중의 동일성을 의미한다/표현한다.

원인의 일의성이 갖는 의미는 자기원인과 작용인이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게 아니라, 자기원인과 작용인 둘 다 원인인 것에 대해 같은 의미로 이야기된다/쓰인다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존재의 일의성을 이야기하면서 ‘존재란 말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한편 속성들의 일의성이 갖는 의미는 실체와 양태가 동일한 존재 혹은 동일한 완전성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체의 완전성과 양태의 완전성이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게 아니라. 존재가 자기 안에 있는 것=실체와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실체가 만들어낸 결과물로서의 양태에 대해 형상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야기된다. 존재라는 말을 쓸 때, 즉 실체가 존재한다고 할 때와 양태가 존재한다고 할 때 존재의 의미는 다르지 않고 형상적으로 같다. 여기서 형상은 속성을 이야기한다. 전자=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과 후자=양태의 본질에 내포된 속성은 동일한 속성들이다. 이것들이 바로 공통적 존재이다. 그래서 내재성은 일의성 이론이 취하는 새로운 형상figure이다. 종합방법은 자연적으로 이 공통 존재[=속성] 혹은 내재인의 정립position으로 이어진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 분석적인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원인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인식을 갖기 전에 결과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인식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나를 실존하게 하는 원인을 인식하기 전에 내가 사유하는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사유하는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결과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명석판명한 인식을 갖는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결과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원인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는데 그 원인은 혼동된 인식이다. 따라서 결과에 대한 명석 판명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혼돈된 인식을 전제/내포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원인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원인에 대한 인식이 결과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추론하는 방식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결과에 대한 명석한 인식에서 출발해 이 결과에 대한 인식에 내포되어 있는/전제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을 규명한다. 그렇다면 결과가 의존하는 원인이 결과 안에 있지 않으면 결과는 우리가 지금 인식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결과 안에 함축/내포되어 있다. 만약에 원인이 결과 안에 있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는 다른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에게 두 테마가 연결되어 있다. : 1) 명석 판명한 관념의 충분성 2) 결과에 대한 인식에서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데카르트 방법의 불충분성

스피노자에 따르면, 데카르트처럼 결과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할 때 결과에서 고찰하는 것 말고는 원인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적합인 인식을 얻지 못한다. 즉 결과에 대한 인식에서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만족스럽게 갈 수 없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명석판명한 관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합한 관념까지 가야 한다.

 

종합방법

데카르트는 결과가 어떻게 원인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안되고 결과에 대한 참된 인식이 어떻게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종합방법이다. 그에 따르면 참된 인식은 원인을 통한 인식이다. 즉. 원인에 대한 인식이 참된 인식이다. 원인 자체가 먼저 인식되고 원인 자체가 더 잘 인식되는 한에서만 결과가 인식된다는 것이다.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내므로 원인이 당연히 결과보다 앞선다. 원인에 대한 인식도 결과에 대한 인식보다 앞선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이 테제를 취한다/이어받는다. “결과에 대한 인식은 사실은 원인에 대한 더 완전한 인식의 획득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원인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의미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은 더 완전하다. 즉 적합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 : 원인을 통한 인식

원인을 통한 인식만이 본질을 인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원인은 주어와 빈사의 연결 근거인 중간항이다. ‘Socrates(주어) is mortal(보어/빈사)’에서 주어와 빈사를 연결하는 근거/매개항/중간항은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므로 매개항/중간항이 인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처럼 주어와 빈사를 연결하는 근거인 중간항이 사물에게 귀속되는 특성들이 파생되는 원리 또는 이유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원인을 찾는 것은 곧 중간항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외관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다. 형상인과 질료인을 포괄하는 전체 정의의 구체적 통일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상인과 질료인의 통일성을 긍정한다.


어떻게 원인 자체가 인식되는가

 

▶ 기체(基體)-유(類)-> 유로서의 주어

 

데카르트에 따르면 원인을 통해 인식한다고 하는 종합방법은 성공하지 못한다. 원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방법을 택해야 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기하학적 도형과 같은 사고상의 존재/관념적 존재에 대비되는 실재적 존재들은 추상을 통해 원인, 원리, 중간항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들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징들을 모두 빼고 나면 최종적으로 인간 그 자체만 남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특징을 사상시키면 인간만 남는다. 혼동된 집합, 즉 개별 사례들에서 출발해서 그로부터 보편자=인간을 추상할 수 있다. 그래서 형상인은 감각적이고 혼동된 질료에 기원을 두는 추상적인 종적 특징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징을 사상시키고 최종적으로 남는 종적 특징이 형상인인 것이다.

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종합방법은 야심은 크지만 실재 원인을 인식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혼동된 인식에서 출발해서 그 인식이 우리에게 원인들로 잘못 제시하는 추상으로 상승한다. 반대로 분석방법은 의도가 겸손하다. 그것은 결과에서 명석 판명한 지각을 끌어내기 때문에 원인에 대한 참된 인식을 추론할 수단을 제공한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종합방법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종합방법은 다음 조건에서만 적법하다. 1) 종합방법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서지 않을 때 2) 분석방법의 뒤에 올 때 3) 실재 원인들에 대한 선행적 인식에 의지할 때 종합방법은 적법하다. 하지만 종합방법은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인식시키지 않는다. 종합방법 자체로는 우리에게 인식시켜주는 게 없다. 그러므로 발견의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문제는 종합방법이 즉시 그 자체로 그것이 전제하는 원리들을 인식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가능하다고 본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종합 방법은 참된 발견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입장은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반론을 반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난점을 극복할 수단이 있다고 생각해야 견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분석방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종합방법은 왜 불충분한가? 스피노자는 매우 상이한 기법-종합방법과 분석방법-을 불완전한 지각양식 혹은 지각유형으로 분류하고 똑같이 고발한다. 그리고 정신적 자동장치, 평행론에서 두 방법의 불충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결과에 대한 혼동된 인식으로부터 보편자를 추상하는 것과 데카르트처럼 결과에 대한 명석한 인식으로부터 원인을 추론하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 즉 데카르트 반론을 반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평행론에서 찾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포유동물 등 유와 종 차이에 따른 분류를 추상적 보편자라고 하지만 형상인은 추상적 보편자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 역량이다. 유와 종은 허구들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인식 역량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성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트텔레스는 형상인을 종적 보편자와 동일시하면서 하나의 실재적 존재에서 다른 실재적 존재로 가는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다. 형상인은 우리의 이해역량이고 질료인은 혼동된 감각적 지각이 아니고 하나의 특수한/개별 사물의 관념의 원인에 해당하는 다른 특수한 사물의 관념이다. 관념의 원인은 관념이다. 질료인은 다른 관념이고 형상인은 이해역량이다. 관념의 원인이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 자동장치라는 개념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을 통해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난점을 뛰어넘는 방법을 발견했다.

1) 종합방법은 반성적이다. 이해역량을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반성적이다. 종합방법이 결과와 관련해 원인을 꾸며내고 가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모든 관념의 원천으로서의 신 관념에 가장 빨리 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행이다. 2) 종합방법은 구성적이고 발생적이다. 원인으로부터 다른 것이 모두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3) 종합방법은 연역적이다. 생산인 동시에 실재의 연역이다. 참된 것의 형상과 질료는 동일시된다. 종합방법의 세 측면, 즉 반성, 발생, 연역을 통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도 넘어서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불충분성을 보완한다.

 

데카르트 관점에서, 자기원인으로서의 신 : 다의성, 탁월성, 유비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존재성에 대한 이론이 나온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방향은 바뀌지만 방향은 달라져도 여전히 radical하다. 자기원인, 자기 안의 원인, 자기 자신에 의한 =내재인은 데카르트한테도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적 본질에 충만한 적극성에 동의하면 신적 본질이 원인과 유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신이 원인을 갖지 않는 positive한 원인, 즉 신이 작용인을 갖지 않는 형상인=자기원인이 있다. 신은 자기원인인데, 그것은 작용인 결과의 원인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의 자기원인이다. 신은 신의 본질이 형상인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원인이다. 이것은 유비에 의한 형상인이다. 즉 신의 본질이 작용인(결과의 원인)인 것과 유비적으로 신의 본질이 신의 실존의 원인이다.

 

작용인 : 결과[열등] = 신의 본질 : 신의 실존[우월]

 

데카르트의 존재 이론은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개념에 기초한다. 1) 다의성. 신은 자기원인이지만 신이 창조한 사물의 작용인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자기원인이다. 그래서 존재라는 의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존재라는 의미는 신적 실체에 쓰일 때와 피조물에 쓰일 때에 다르다. 실체에 쓰일 때와 양태들에 쓰일 때도 다르다. 2) 탁월성/고차성. 신은 모든 실재성 전체를 닮지만 고차적으로 닮는다. 고차적으로 닮는다는 것은 신 자신이 창조하는 사물의 형상과 다른 형상, 즉 더 완전한 형상으로 실재성을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유비.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유비에 의해서 도달되는 것이다. 작용인과의 유비에 의해서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모두는 스콜라주의와 성토마스주의의 유산이다. 이 테제들은 데카르트의 존재, 신, 피조물 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유비의 암묵적 역할은 그의 실체에 대한 정의에서의 범신론적 경향, 일원론적 경향과 같은 종류의 유혹을 충분히 방어하는데 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비가 하는 역할 때문에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분석방법의 기법 자체가 자생적으로 유비적 존재의 정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비는 출발점이었던 다의성과 그것의 도달점이었던 탁월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10장에서는 인식에서의 종합방법과 분석방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종합방법은 연역에 가깝다. 원리나 원인을 찾는 순간 거기서부터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 모든 관념의 원천으로서의 신이 원리가 되고 거기에 최대한 빨리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그로부터 신의 특성, 실체의 양태들이 파생된다. 종합방법은 우리가 원이나 구의 발생적 정의를 내리는 순간 원이나 구의 다른 특성들도 한꺼번에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한 방법이다. 반면에 분석 방법은 귀납법에 가깝다.

10장의 종합방법과 분석방법은 ‘판단’에서의 종합, 분석과 다르다. 분석판단은 주어의 속성들이 주어 개념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판단은 밖으로 나가서 다른 개념과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판단에는 선험적 종합판단과 후험적 종합판단이 있다. ‘이 탁자는 흰색이다.’는 흰색과 탁자 개념을 붙인 것으로 후험적 종합판단이다. ‘직선은 최단거리다’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이 경우 직선이라는 개념 안에 최단거리라는 개념이 안 들어 있다. 최단거리는 사선이나 곡선이랑 비교해야 도출되는 개념이므로 직선 개념 밖으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