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부적합성(2)
▷ 형상은 perspective가 없거나 perspecive 밖에 있는 것이다.
개념, 형상form, eidos은 perspective가 없다. 3은 작은 수일까 큰 수일까? 보통은 작은 수라고 생각하는데, 2에 비해 큰 수라고 하면 퍼스펙티브가 있는 것이다. 만일 작은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작은, 무엇과 비교해도 작은 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큰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무엇과 비교해서 큰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큰 수여야 한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침대는 form을 빼고 보면 나무이거나 돌이다. 하지만 나무로 되었던지 돌로 되어 있던지 간에 침대는 침대 자체다.
이처럼 경험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어떤 것이 form인데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칸트의 이데Idee 역시 같은 의미다. 이데는 곧 경험 속에 상응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가령 경험 속에서 삼각형은 색도 있고 모양도 다르다. 이것들을 다 없애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을 둘러싸는 세 개의 각이라는 개념이고 이데아로 이것은 경험 속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 직선도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고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이데를 문제적 심급이라고 부른다. 이데는 기존의 개념 아래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 플라톤에게는 초월적 가치이고 들뢰즈에게는 내재적인 어떤 순수 질료[≒미분화된 상태의 어떤 것, 『안티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알의 구배=미분화된 알의 상태, 잠재 형상]이다. 그것들은 경험 속에서 만날 수 없는 것, 즉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의 차이만 있다.
들뢰즈는 형상을 이야기하면서 입방체=정육면체를 예로 든다. 우리는 입방체의 세 면의 이미지만을 지각한다. 그래서 어느 쪽에서 보는지에 따라, 즉 perspective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육면을 모두 보려면 돌려보거나 뒤집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입방체를 6개의 정사각형을 가진 도형이라고 사유한다. 이것이 곧 입방체의 개념 혹은 형상이다. 그것은 지각된 것이아니라 ‘사유된 것’이다. 이것이 정신의 눈으로 본 입방체다. 지각은 보통 perspective에 좌우되지만 이데아, 개념, 에이도스, 형상은 perspective와 관계가 없다. perspective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perspective가 없는 것, perspective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 인간이라는 개념은 경험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데아나 형상이다. 들뢰즈는 개념, 형상, 에이도스, 이데아는 같은 것, 즉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본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보편자 역시 일반성을 갖는 개념이고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것들은 특수한particular 것들이다. Idee가 아닌 관념idee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고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의 관념을 가리킨다.
▶ 부적합한 관념은 표현적이지 않은, 비표현적 관념이다. 왜냐면 결론이 두 전제-형상적 전제와 질료적 전제-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상적 전제는 사유 역량이고 질료적 전제는 원인이 되는 어떤 관념+신의 본질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념들은 그들의 원인을 표현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 역량을 통해 설명될 수도 없어 부적합하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부적합한 관념을 갖는 조건에서 태어난다/조건에 놓인다. 이것이 스피노자와 합리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유와 진리를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권리라고 보고 스피노자는 최종적으로 이르러야 하는 도달점으로 본다.
▶ 태양이 200보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오류는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하는 동안 실제 거리=참거리와 상상의 원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어떤 조건에서 무엇 때문에 태양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지를 알면 오류가 아니다.
▶ 이미지는 원인을 표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즉 원인이 되는 관념을 표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이미지의 원인은 우리 안에 이미지를 파생시키지만 우리한테 주어지지는 않는 관념이다. 이미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흔적, 자국, 변용이다. 2) 비유적 의미에서 이미지는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가령 우리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 자체도 이미지이고 그 변화에 대한 관념도 이미지다. 여기서는 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이미지는 원인을 표현하지 않는 관념이다. 그 원인은 다른 관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인은 질료 원인이다. 이미지는 질료원인만이 아니라 형상원인도 표현할 수 없다. 형상원인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인식 역량에 의해서 설명되지/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제 없는 결론인 것이다. 이미지에는 전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 쉽게 말하면 원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
▶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는가? 진리는 구성되는 것이고 창조되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는 원리상/원칙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을 생산해 외적 필연성의 연쇄/인과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획득하는 것이다. 간혹 “스피노자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데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잘못된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필연성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필연성은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실존이 따라나온다는 의미를 지닌다. 양태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필연적 연쇄를 구성한다. 그 때문에 스피노자의 영감은 경험론적이다.
▶ 합리주의는 rationalism이므로 이성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성주의자에게 진리와 자유는 갖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권리다. 이성주의자들의 기본 아이디어는 감각에 의해 생긴 가상/착각illusion을 이성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자들과 경험주의자들의 인식론적 차이점이다. 이성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선천적 권리가 있었으나 그 권리를 상실하고 오류에 빠짐으로써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면 이성에 의해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이성주의자의 관심사는 아담 전통과 부합한다. 이에 따르면 아담은 자유롭고 완전한 존재이나 타락으로 인해 자유와 완전성을 상실하게 되므로 그것을 이성에 의해 회복해야 한다. 이와 달리 경험주의자들은 인간들은 가끔 참을 이해하고 가끔 서로를 이해하고 가끔 속박에서 해방되며 자유와 진리는 마지막에 가서 출현한다고 본다. 자유와 진리는 많은 배움과 수련을 거쳐 도달해야 하는 최종 도달점이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존재,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가장 자유롭고 가장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저 거기에 가까워질 뿐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은 경험주의의 힘을 재발견에서 합리주의에 봉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칸트와 전통적 합리주의의 차이점
독단적/전통적 합리주의, 즉 이성주의에서는 감각에 의해 발생하는 illusion을 이성에 의해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반면 칸트에 따르면 illusion은 이성 자체에서 생긴다. 이성이 흐려져서 illusion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또렷한 각성 상태에서의 이성이 illusion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데Idee이고 괴물이다. 칸트에 따르면 자아, 세계, 신이 대표적인 illusion이다. 이 illusion은 이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이성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자기 비판,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다. 이성이 만들어낸 이데/illusion 중에는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이 있다. 비합법적인 것은 제거하고 합법적인 것은 남겨 두어야 한다.
▷ 경험론자들은 이성 자체의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최종적인 목적은 모두 자연/본성nature의 목적이다. 또한 인간에게만 있는 문화는 자연/본성의 목적을 실현하는 보조적/간접적/우회적 수단이다. 반면 이성론자는 이성 자체의 목적, 문화의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본다. 전통적 합리주의자에게 이성 자체의 목적은 이성 밖, 이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 즉 선, 정의 등이다. 반면 칸트는 이성 고유의 목적이 있다고 본다.
▶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이를 수 있는가? 부적합한 관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 원인에 대한 인식의 결핍/결여를 함축한다. 2) 원인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으나 원인을 함축한다. 부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함축하는 결과다. 1)의 측면에서 보면 부적합한 관념은 거짓이다. 2)의 측면에서 보면 무언가 positive한 것, 참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부적합한 관념 안에 positive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은 그것이 원인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이 내리쬐어 밀랍이 녹았다. 태양의 본성/본질 때문에 녹은 것이다. 반면 태양열 때문에 점토가 딱딱해지는데 그것도 태양의 본성/본질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물만 보면그 원인을 알 수 없다. 태양이 사물을 녹게 만드는지, 딱딱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흘러내림과 단단해짐은 결과/효과effect이고 변용affection이다. 이것의 원인은 태양열이다. 더 확장시키면 태양의 구성비와 점토 또는 밀랍의 구성비의 관계가 원인이 된다. 단단해졌든 흘러내리든 그 안에는 원인이 함축되어 있다.
태양이 200보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즉 이미지를 만든다. 이 변용관념은 원인을 표현할 수 없다. 즉 태양의 본성 혹은 본질을 설명하지 않는다. 태양의 본성 혹은 본질이 원인이다. 하지만 태양의 본질. 즉 원인을 함축하기 때문에 부적합한 관념에는 positive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지시/표시indication이고 사인/징조/징후/기호다. 그래서 positive한 어떤 것을 통해서 원인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 부적합한 관념은 우리의 사유역량에 의해 설명되지 않지만 그것을 함축한다.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원인을 표현하지 않지만 그것을 함축한다.
▶ 적합한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변용 관념 안에 있는 positive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것은 첫걸음, 시작이다. 이 positive한 어떤 것으로부터 공통개념을 형성해야 한다. positive한 것을 발판으로 변용시키는 물체, 다시 말해서 영향을 미치는 물체와 변용되는 신체, 다시 말해서 영향을 받는 신체에 공통적인 것, 다시 말해 외부 물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적합한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이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공통개념은 외부 물체 관념 안에 있는 그대로 우리 신체 안의 관념 안에 있다. 신 안에 있는 대로[같은 form으로] 우리 안에 있다. 공통개념은 신을 표현하고[신의 본질/본성을 표현하고]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된다. 곧 공통개념에서 적합한 관념이 파생된다. 이 복합적 메커니즘은 부적합한 관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시킨다. 가장 적은 부분만 차지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주 없앨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슬픔은 피할 수 없다.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슬픔을 최소화하려면 다른 기쁨을 늘려야 한다. 나에게 슬픔을 주는 것과의 마주침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과의 마주침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대신에 최소화시킬 수 있다. 기쁨을 주는 마주침을 최대화시키고 나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과의 마주침을 최대한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요컨대 우리 스스로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에 이르러야 한다. 조건 자체를 바꿔야 한다. 부적합한 관념을 갖는 조건에서 벗어나서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명석판명한 관념의 불충분성
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표현하고 우리 역량에 의해 설명되고 부적합한 관념은 그 반대다.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을 적합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스피노자 진리론의 의도다. 명석판명은 참된 관념 즉 여전히 부적합한 관념 안에 있는 positive한 것을 재인식하게, 즉 알아볼 수 있게 할 뿐이다. 명석판명은 재인식에만 쓸모가 있다. 재인식은 곧 알아본다는 의미다.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면 명석판명한 관념을 넘어선다. 명석판명에는 충분 이유가 없고 적합성에서만 충분이유를 발견한다.
▷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한 관념 중 대표적인 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의심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이다.’고 주장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왜 의심할 수 없냐면 의심한다는 것이 곧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데 의심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명석판명한/참된 관념이라고 하는 것 중 하나다.
▶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은 일종의 표현이다.” 인식은 representation이 아니라 expression이다. 원인을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공통점이자 반데카르트적 반발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1)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관념을 관념의 재현적 내용으로 국한시킨다. 더 심층적인 표현적 내용까지 상승하지 못한다. 즉 관념의 재현적 내용에 그치고 표현적 내용에는 도달하지 못한다.2) 관념의 심리적 의식의 형식[‘나는 생각한다]을 넘어서지 못했다. 관념들이 서로 연쇄되는 논리적 형식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심리적 의식의 형식에 그치고 논리적 형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3)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 “정신적 자동장치”인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참된 것이 관념 안에 현존한다는 것만 알려줬다. 그런데 참된 관념 안에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 앎이 무슨 소용인가?
▶ 스피노자 관념 이론의 세 가지 요소
1) 재현적 내용은 더 심층적인 표현적 내용과 관련해 외관이다. 2) 심리적 의식의 형식은 논리적 형식에 비해 피상적이다. 3) 정신적 자동장치는 논리적 형식과 표현적 내용의 통일이다. 이와 같은 기본 테제는 반데카르트적 반발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공통테제이기도 하다.
▶명석판명한 관념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본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를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스피노자도 라이프니츠를 비판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명석판명은 어떤 대상을 재인식하게 할 뿐이고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명석판명이라는 개념/관념은 본질에도 원인에도 도달하지/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비판도 같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에 따르면 명석판명은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원인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게 하지 않는다. 명석판명은 미규정된indeterminated 인식만 준다.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주체chose’이다.”
: 나는 생각한다 – 규정
: 나는 존재한다 – 미규정, ‘I am나는 ~이다’는 미규정된 실존
: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규정된 것
칸트는 규정, 미규정, 규정된 것 세 가지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미규정이 규정에 의해 규정되려면 어떤 형식으로 가능한가를 누락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규정, 미규정에 ‘규정 가능’을 추가해서 규정된 것으로 간다. 칸트에게 어떤 형식이란 곧 시간이라는 형식이다. 칸트에게 코기토는 시간적 코기토이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공간적 코기토다.
▷ 칸트 철학과 전통 철학의 차이점
칸트의 이념Idee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다르다. 칸트의 이데는 이성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illusion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다. 플라톤이 말하는 선, 정의와 같은 이데아는 존재보다 더 위에 있는 가치, 즉 일자(一者)다. 칸트의 이데는 그것과는 다르다.
칸트에게는 상상력, 지성, 이성, 감각 등의 faculty가 있고 각 faculty가 담당하는 대상들이 다르다. 지성은 개념을 담당한다. 상상력은 직관, 소여를 담당한다. 이성은 이데를 담당하는데 바로 이성 자체에서 illusion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데 자체가 문제적 심급이므로 이데가 만드는 illusion에는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이 있다. illusion은 예를 들어 지성이 아닌 이성이 인식을 담당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고 하면 생겨난다. 즉 칸트는 faculty의 위계들을 도식화시키고 그 위계를 넘어 월권을 하면 비합법적 사용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전통 철학에서는 illusion은 감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본질의 세계와 구별해서 현상계, 혹은 감각계라고 부른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계 대부분apperence은 오류다. 이것을 교정하려면 이성이 나서야 한다. 이성이 본질 또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순간에 교정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인식의 모델, 앎의 모델에서는 사유 자체가 본질 자체를 파악하는 것으로, 사유는 곧 인식이다. 반면 칸트에게 인식은 사유의 한 종류로 지성이 담당한다. 이성이 하는 일은 도덕과 관련이 있다. 이성은 실천이성에서 주된 역할을 하고 순수이성에서 보조역할을 한다. 순수이성에서는 지성이 정해준 역할을 이성이 한다. 이성이 인식에 관여하지만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알처럼 충만한 주체였다. 반면 칸트에 와서 시간 형식이 도입되면서 주체는 균열되어 주어(je)와 목적격(moi)이 구별되고 경험적 주체와 초험적 주체로 나뉜다. 여기서 개념과 같은 초험적 주체는 경험적 주체와 달리 무시간적이다. 1)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현상=소여, 즉 시공간형식 2) 초험적 주체가 구성하는 개념형식 간에는 괴리/분열이 생긴다. 소여=시공간형식=수용성의 형식과 개념의 형식=자발성의 형식이 만나려면 매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칸트는 상상력의 도식이라고 부른다. 도식에는 form이 없다. 만약 도식에 form이 있다면 시공간 형식과 개념의 형식을 만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자의 이미지와 사자라는 개념을 보증하는 중간의 도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차이와 반복』에서는 시공간적 뒤나미즘(역동성)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창공에 날고 있는 새가 무슨 새인지 안 보여도 그 새가 비행하는 모양을 보면 무슨 새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그런데 칸트는 도식을 상상력의 미스테리라고 하며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9장 부적합성(2)
▷ 형상은 perspective가 없거나 perspecive 밖에 있는 것이다.
개념, 형상form, eidos은 perspective가 없다. 3은 작은 수일까 큰 수일까? 보통은 작은 수라고 생각하는데, 2에 비해 큰 수라고 하면 퍼스펙티브가 있는 것이다. 만일 작은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작은, 무엇과 비교해도 작은 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큰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무엇과 비교해서 큰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큰 수여야 한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침대는 form을 빼고 보면 나무이거나 돌이다. 하지만 나무로 되었던지 돌로 되어 있던지 간에 침대는 침대 자체다.
이처럼 경험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어떤 것이 form인데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칸트의 이데Idee 역시 같은 의미다. 이데는 곧 경험 속에 상응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가령 경험 속에서 삼각형은 색도 있고 모양도 다르다. 이것들을 다 없애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을 둘러싸는 세 개의 각이라는 개념이고 이데아로 이것은 경험 속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 직선도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고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이데를 문제적 심급이라고 부른다. 이데는 기존의 개념 아래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 플라톤에게는 초월적 가치이고 들뢰즈에게는 내재적인 어떤 순수 질료[≒미분화된 상태의 어떤 것, 『안티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알의 구배=미분화된 알의 상태, 잠재 형상]이다. 그것들은 경험 속에서 만날 수 없는 것, 즉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의 차이만 있다.
들뢰즈는 형상을 이야기하면서 입방체=정육면체를 예로 든다. 우리는 입방체의 세 면의 이미지만을 지각한다. 그래서 어느 쪽에서 보는지에 따라, 즉 perspective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육면을 모두 보려면 돌려보거나 뒤집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입방체를 6개의 정사각형을 가진 도형이라고 사유한다. 이것이 곧 입방체의 개념 혹은 형상이다. 그것은 지각된 것이아니라 ‘사유된 것’이다. 이것이 정신의 눈으로 본 입방체다. 지각은 보통 perspective에 좌우되지만 이데아, 개념, 에이도스, 형상은 perspective와 관계가 없다. perspective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perspective가 없는 것, perspective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 인간이라는 개념은 경험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이데아나 형상이다. 들뢰즈는 개념, 형상, 에이도스, 이데아는 같은 것, 즉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본다. 초월적이라는 것은 경험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보편자 역시 일반성을 갖는 개념이고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것들은 특수한particular 것들이다. Idee가 아닌 관념idee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고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의 관념을 가리킨다.
▶ 부적합한 관념은 표현적이지 않은, 비표현적 관념이다. 왜냐면 결론이 두 전제-형상적 전제와 질료적 전제-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상적 전제는 사유 역량이고 질료적 전제는 원인이 되는 어떤 관념+신의 본질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념들은 그들의 원인을 표현하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 역량을 통해 설명될 수도 없어 부적합하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부적합한 관념을 갖는 조건에서 태어난다/조건에 놓인다. 이것이 스피노자와 합리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유와 진리를 우리가 갖고 태어나는 권리라고 보고 스피노자는 최종적으로 이르러야 하는 도달점으로 본다.
▶ 태양이 200보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데 오류는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하는 동안 실제 거리=참거리와 상상의 원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어떤 조건에서 무엇 때문에 태양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지를 알면 오류가 아니다.
▶ 이미지는 원인을 표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즉 원인이 되는 관념을 표현할 수 없는 관념이다. 이미지의 원인은 우리 안에 이미지를 파생시키지만 우리한테 주어지지는 않는 관념이다. 이미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흔적, 자국, 변용이다. 2) 비유적 의미에서 이미지는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가령 우리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 자체도 이미지이고 그 변화에 대한 관념도 이미지다. 여기서는 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이미지는 원인을 표현하지 않는 관념이다. 그 원인은 다른 관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인은 질료 원인이다. 이미지는 질료원인만이 아니라 형상원인도 표현할 수 없다. 형상원인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인식 역량에 의해서 설명되지/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제 없는 결론인 것이다. 이미지에는 전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 쉽게 말하면 원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
▶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는가? 진리는 구성되는 것이고 창조되는 것이다. 진리와 자유는 원리상/원칙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을 생산해 외적 필연성의 연쇄/인과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획득하는 것이다. 간혹 “스피노자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데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잘못된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필연성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필연성은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실존이 따라나온다는 의미를 지닌다. 양태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필연적 연쇄를 구성한다. 그 때문에 스피노자의 영감은 경험론적이다.
▶ 합리주의는 rationalism이므로 이성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성주의자에게 진리와 자유는 갖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권리다. 이성주의자들의 기본 아이디어는 감각에 의해 생긴 가상/착각illusion을 이성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자들과 경험주의자들의 인식론적 차이점이다. 이성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선천적 권리가 있었으나 그 권리를 상실하고 오류에 빠짐으로써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면 이성에 의해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이성주의자의 관심사는 아담 전통과 부합한다. 이에 따르면 아담은 자유롭고 완전한 존재이나 타락으로 인해 자유와 완전성을 상실하게 되므로 그것을 이성에 의해 회복해야 한다. 이와 달리 경험주의자들은 인간들은 가끔 참을 이해하고 가끔 서로를 이해하고 가끔 속박에서 해방되며 자유와 진리는 마지막에 가서 출현한다고 본다. 자유와 진리는 많은 배움과 수련을 거쳐 도달해야 하는 최종 도달점이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이성적인 존재,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가장 자유롭고 가장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저 거기에 가까워질 뿐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은 경험주의의 힘을 재발견에서 합리주의에 봉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칸트와 전통적 합리주의의 차이점
독단적/전통적 합리주의, 즉 이성주의에서는 감각에 의해 발생하는 illusion을 이성에 의해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반면 칸트에 따르면 illusion은 이성 자체에서 생긴다. 이성이 흐려져서 illusion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또렷한 각성 상태에서의 이성이 illusion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데Idee이고 괴물이다. 칸트에 따르면 자아, 세계, 신이 대표적인 illusion이다. 이 illusion은 이성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이성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자기 비판,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다. 이성이 만들어낸 이데/illusion 중에는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이 있다. 비합법적인 것은 제거하고 합법적인 것은 남겨 두어야 한다.
▷ 경험론자들은 이성 자체의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최종적인 목적은 모두 자연/본성nature의 목적이다. 또한 인간에게만 있는 문화는 자연/본성의 목적을 실현하는 보조적/간접적/우회적 수단이다. 반면 이성론자는 이성 자체의 목적, 문화의 목적이 따로 있다고 본다. 전통적 합리주의자에게 이성 자체의 목적은 이성 밖, 이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 즉 선, 정의 등이다. 반면 칸트는 이성 고유의 목적이 있다고 본다.
▶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이를 수 있는가? 부적합한 관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 원인에 대한 인식의 결핍/결여를 함축한다. 2) 원인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으나 원인을 함축한다. 부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함축하는 결과다. 1)의 측면에서 보면 부적합한 관념은 거짓이다. 2)의 측면에서 보면 무언가 positive한 것, 참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부적합한 관념 안에 positive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은 그것이 원인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양이 내리쬐어 밀랍이 녹았다. 태양의 본성/본질 때문에 녹은 것이다. 반면 태양열 때문에 점토가 딱딱해지는데 그것도 태양의 본성/본질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물만 보면그 원인을 알 수 없다. 태양이 사물을 녹게 만드는지, 딱딱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흘러내림과 단단해짐은 결과/효과effect이고 변용affection이다. 이것의 원인은 태양열이다. 더 확장시키면 태양의 구성비와 점토 또는 밀랍의 구성비의 관계가 원인이 된다. 단단해졌든 흘러내리든 그 안에는 원인이 함축되어 있다.
태양이 200보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즉 이미지를 만든다. 이 변용관념은 원인을 표현할 수 없다. 즉 태양의 본성 혹은 본질을 설명하지 않는다. 태양의 본성 혹은 본질이 원인이다. 하지만 태양의 본질. 즉 원인을 함축하기 때문에 부적합한 관념에는 positive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지시/표시indication이고 사인/징조/징후/기호다. 그래서 positive한 어떤 것을 통해서 원인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 부적합한 관념은 우리의 사유역량에 의해 설명되지 않지만 그것을 함축한다.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원인을 표현하지 않지만 그것을 함축한다.
▶ 적합한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변용 관념 안에 있는 positive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것은 첫걸음, 시작이다. 이 positive한 어떤 것으로부터 공통개념을 형성해야 한다. positive한 것을 발판으로 변용시키는 물체, 다시 말해서 영향을 미치는 물체와 변용되는 신체, 다시 말해서 영향을 받는 신체에 공통적인 것, 다시 말해 외부 물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적합한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이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공통개념은 외부 물체 관념 안에 있는 그대로 우리 신체 안의 관념 안에 있다. 신 안에 있는 대로[같은 form으로] 우리 안에 있다. 공통개념은 신을 표현하고[신의 본질/본성을 표현하고]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된다. 곧 공통개념에서 적합한 관념이 파생된다. 이 복합적 메커니즘은 부적합한 관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시킨다. 가장 적은 부분만 차지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슬픔을 아주 없앨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슬픔은 피할 수 없다.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슬픔을 최소화하려면 다른 기쁨을 늘려야 한다. 나에게 슬픔을 주는 것과의 마주침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과의 마주침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대신에 최소화시킬 수 있다. 기쁨을 주는 마주침을 최대화시키고 나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과의 마주침을 최대한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요컨대 우리 스스로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에 이르러야 한다. 조건 자체를 바꿔야 한다. 부적합한 관념을 갖는 조건에서 벗어나서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명석판명한 관념의 불충분성
적합한 관념은 원인을 표현하고 우리 역량에 의해 설명되고 부적합한 관념은 그 반대다.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을 적합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스피노자 진리론의 의도다. 명석판명은 참된 관념 즉 여전히 부적합한 관념 안에 있는 positive한 것을 재인식하게, 즉 알아볼 수 있게 할 뿐이다. 명석판명은 재인식에만 쓸모가 있다. 재인식은 곧 알아본다는 의미다.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면 명석판명한 관념을 넘어선다. 명석판명에는 충분 이유가 없고 적합성에서만 충분이유를 발견한다.
▷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한 관념 중 대표적인 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의심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이다.’고 주장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왜 의심할 수 없냐면 의심한다는 것이 곧 생각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데 의심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명석판명한/참된 관념이라고 하는 것 중 하나다.
▶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은 일종의 표현이다.” 인식은 representation이 아니라 expression이다. 원인을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공통점이자 반데카르트적 반발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1)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관념을 관념의 재현적 내용으로 국한시킨다. 더 심층적인 표현적 내용까지 상승하지 못한다. 즉 관념의 재현적 내용에 그치고 표현적 내용에는 도달하지 못한다.2) 관념의 심리적 의식의 형식[‘나는 생각한다]을 넘어서지 못했다. 관념들이 서로 연쇄되는 논리적 형식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심리적 의식의 형식에 그치고 논리적 형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3)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 “정신적 자동장치”인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참된 것이 관념 안에 현존한다는 것만 알려줬다. 그런데 참된 관념 안에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 앎이 무슨 소용인가?
▶ 스피노자 관념 이론의 세 가지 요소
1) 재현적 내용은 더 심층적인 표현적 내용과 관련해 외관이다. 2) 심리적 의식의 형식은 논리적 형식에 비해 피상적이다. 3) 정신적 자동장치는 논리적 형식과 표현적 내용의 통일이다. 이와 같은 기본 테제는 반데카르트적 반발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고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공통테제이기도 하다.
▶명석판명한 관념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본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를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스피노자도 라이프니츠를 비판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명석판명은 어떤 대상을 재인식하게 할 뿐이고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명석판명이라는 개념/관념은 본질에도 원인에도 도달하지/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비판도 같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에 따르면 명석판명은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원인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게 하지 않는다. 명석판명은 미규정된indeterminated 인식만 준다.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주체chose’이다.”
: 나는 생각한다 – 규정
: 나는 존재한다 – 미규정, ‘I am나는 ~이다’는 미규정된 실존
: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규정된 것
칸트는 규정, 미규정, 규정된 것 세 가지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미규정이 규정에 의해 규정되려면 어떤 형식으로 가능한가를 누락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규정, 미규정에 ‘규정 가능’을 추가해서 규정된 것으로 간다. 칸트에게 어떤 형식이란 곧 시간이라는 형식이다. 칸트에게 코기토는 시간적 코기토이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공간적 코기토다.
▷ 칸트 철학과 전통 철학의 차이점
칸트의 이념Idee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다르다. 칸트의 이데는 이성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illusion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다. 플라톤이 말하는 선, 정의와 같은 이데아는 존재보다 더 위에 있는 가치, 즉 일자(一者)다. 칸트의 이데는 그것과는 다르다.
칸트에게는 상상력, 지성, 이성, 감각 등의 faculty가 있고 각 faculty가 담당하는 대상들이 다르다. 지성은 개념을 담당한다. 상상력은 직관, 소여를 담당한다. 이성은 이데를 담당하는데 바로 이성 자체에서 illusion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데 자체가 문제적 심급이므로 이데가 만드는 illusion에는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이 있다. illusion은 예를 들어 지성이 아닌 이성이 인식을 담당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고 하면 생겨난다. 즉 칸트는 faculty의 위계들을 도식화시키고 그 위계를 넘어 월권을 하면 비합법적 사용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전통 철학에서는 illusion은 감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본질의 세계와 구별해서 현상계, 혹은 감각계라고 부른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계 대부분apperence은 오류다. 이것을 교정하려면 이성이 나서야 한다. 이성이 본질 또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순간에 교정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인식의 모델, 앎의 모델에서는 사유 자체가 본질 자체를 파악하는 것으로, 사유는 곧 인식이다. 반면 칸트에게 인식은 사유의 한 종류로 지성이 담당한다. 이성이 하는 일은 도덕과 관련이 있다. 이성은 실천이성에서 주된 역할을 하고 순수이성에서 보조역할을 한다. 순수이성에서는 지성이 정해준 역할을 이성이 한다. 이성이 인식에 관여하지만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알처럼 충만한 주체였다. 반면 칸트에 와서 시간 형식이 도입되면서 주체는 균열되어 주어(je)와 목적격(moi)이 구별되고 경험적 주체와 초험적 주체로 나뉜다. 여기서 개념과 같은 초험적 주체는 경험적 주체와 달리 무시간적이다. 1)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현상=소여, 즉 시공간형식 2) 초험적 주체가 구성하는 개념형식 간에는 괴리/분열이 생긴다. 소여=시공간형식=수용성의 형식과 개념의 형식=자발성의 형식이 만나려면 매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칸트는 상상력의 도식이라고 부른다. 도식에는 form이 없다. 만약 도식에 form이 있다면 시공간 형식과 개념의 형식을 만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자의 이미지와 사자라는 개념을 보증하는 중간의 도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차이와 반복』에서는 시공간적 뒤나미즘(역동성)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창공에 날고 있는 새가 무슨 새인지 안 보여도 그 새가 비행하는 모양을 보면 무슨 새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그런데 칸트는 도식을 상상력의 미스테리라고 하며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