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note[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20201106

관리자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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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표현과 관념(2)

 

▶ 참 le vrai/거짓le faux(by 들뢰즈 1980년 12월 2일 강의)

들뢰즈는 1)판단의 질적 규정으로서의 참/거짓과 2) 사물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참/거짓을 구별한다.

- 판단의 질적 규정으로서의 참/거짓의 예를 들어보자. 흰색 테이블이 있다. 이 테이블이 흰색이라고 하면 참이 된다. 하지만 노란색이라고 하면 거짓이 된다. 이것은 관념과 사물의 일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금화를 예로 들면, 금화라는 판단이 틀린/거짓 판단이 되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1)도금: 내용물은 금이 아닌데 겉에만 금을 칠한 경우다. 2) 이물질이 섞이면서 금화와 금화 안의 금의 함량이 다른 경우다. 3) 함량은 같은데 공식적인/합법적으로 제작되지 않고 위조된 경우다. 이처럼 사물과 관념의 일치 여부를 따지는 것, 금화에 대한 관념이 있고 그 관념과 실재의 사물이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을 판단의 체계라고 한다.

- 사물의 존재 방식으로서 참/거짓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은 명확하지 않다. 금화의 예를 드는데 금화에 산을 떨어뜨렸을 때 진짜가 아니면 부식이 되거나 변화가 일어난다. 진짜 금화면 산을 넣는 물리화학적 시험épreuve을 견딘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과는 다르다. 사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로 도공은 도자기를 구워 두드려 봄으로써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즉 물리화학적으로 시험을 통해 진위를 가린다.

- 들뢰즈가 말하는 참/거짓, 진/위, 옳은/그른 판단, 맞는/틀린 판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것들과 다르다. 그는 사람도 authentic 여부를 계량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실존의 차원에서 authentic 여부를 따져볼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제3자가 아니라 본인이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하루 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이것을 authentic하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빠름과 느림을 계속 놓치고 자연스러운 리듬을 타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실존양식의 관점, 삶의 방식의 관점에서 역량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예로 드는 것이 있는데, 목사가 고상한 설교를 하다가 여자아이/남자아이가 지나가자 곁눈질을 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의 규정으로서의 참/거짓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으로의 참/거짓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초월적 가치를 설정하고 사물이나 존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모순/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을 두고 참/거짓을 따진다. 아마도 ~인척하는 것이 authentic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는 선(善)과 같은 상위의 일자(一者)를 상정하고 그에 비춰서 존재를 판단하는 철학과는 다른 관점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내재적 실존 양식의 관점에서 사물의 존재 방식의 참/거짓을 구별한다.

-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노예라는 실존 양식에서만 보고 느끼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강자의 실존양식에서만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떤 실존 양식을 갖느냐에 따라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재적 실존 양식이다. 이것의 방향성에 따라 역량은 증가해 무한대로 가거나 감소해 0으로 떨어진다. 자기 역량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실존양식이 무한하게 커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감기를 예로 들어 역량의 증감을 설명한다. 감기에 걸리면 외부 바이러스가 나의 신체 내부에 침투해 어떤 부분을 파괴하려 한다. 그러면 나의 신체의 온 힘이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집중되면서 나의 역량은 감소한다.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나의 역량이 0로 향한다. 이처럼 변용 능력은 항상 100% 실행되므로 변동이 능동적/수동적으로 수행되느냐가 문제다. 감기 바이러스는 수동적 변용으로 역량이 0에 가까워지는 상태로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든다. 이처럼 하나의 개체는 역량들의 꾸러미로서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다른 역량들은 마비/부동화되고 온 힘이 여기에 투자된다.

 

▶ (167) 우리는 우리의 이해역량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원인들에 의해서 인식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해 역량을 인식하지 않는다. → 문맥에 맞게 고치면 “우리의 이해 역량을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 역량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원인에 의해서 인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해/인식 역량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것들을 원인을 통해서 인식하게 된다. 원인을 통해 인식하려면 그보다 먼저 자신의 인식/이해 역량을 인식해야 한다.

 

▶ 『소론』은 신에서 시작한다. 『지성개선론』과 『에티카』에서는 가능한 어떻게 빨리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신에 도달하는 수단은 각각 다르다. 『지성개선론』에서는 기하학적 도형, 사고상의 존재를 통해, 『에티카』에서는 공통개념, 즉 속성을 통해 신에 도달한다.

 

▶ 전체와 부분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기만 하면 이 어떤 것이 신에 대한 명석판명할 뿐만 아니라 적합한 관념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여기서 어떤 것은 바로 속성=공통형상=신과 피조물의 공통 형상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신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준다.

 

▶ 1) 신의 실존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2) 신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인식시킨다. 이와 같은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인식은 겉으로 보면 모순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1) 신의 실존은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고 공통개념, 즉 속성들을 통해 인식된다. 2) 유비, 기호 등이 없어도 신과 피조물의 공통형상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공통형상은 곧 공통적인 속성으로 신은 모든 속성을 소유하며 양태와 피조물은 신의 속성을 함축한다.

 

▶ 가장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속성이고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두 신체/물체 사이의 공통된 것에 대한 개념이다.

 

▶(154) 관념은 규정된(한정된/일정한) 인식역량, 이해 역량을 갖는다. 이것은 개체가 아니라 관념이 갖는 것이다. 내가 어떤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에 따라서 내가 갖는 인식/이해역량이 달라진다. 관념은 영혼이고 정신이기도 하다. 영혼과 정신도 관념인 것이다. 형상적 측면에서 고려된 관념이 갖는 것이 이해/인식역량이고

 

▶ 반성reflection[≒반영<반사]은 관념의 관념으로서 무한한 관념의 연쇄이기도 하다.

 

▶ 참된 관념이 있다고 할 때 그 참된 관념이 사물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따질 필요가 없다. 원인을 표현하기 때문에 참된 관념이라 하기 때문이다.

 

▶ presentation은 지각에 해당하고 representation은 개념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데려다가 혹은 그림으로 보여주면 presentation이다. 포유동물 등 개념을 동원해서 코끼리를 설명하면 representation이다. 즉 다른 개념을 매개로 설명하는 방식이 representation이다. 삼각형을 정의할 때 공간, 각이라는 개념을 써서 공간을 둘러싼 세 각이라고 하면 representation이다. 발생적 정의도 representation에 해당할 듯하다. 예를 들어 반원, 도형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구를 설명하면 발생적 정의다. 『지성개선론』에 따르면 삼각형, 원, 구에 대해 발생적 정의를 내리는 순간 그것들의 특성들이 따라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신에 대해 발생적 정의를 내리면 신으로부터 모든 특성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특성들이 양태들이 된다. 발생적 정의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것은 본성/본질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미지의 양극에는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하는 측면과 재현representation의 측면이 있다. 태양이 200보 거리에 있다고 지각하는 것은 태양이 우리 신체에 미친 효과/변용affection이다. 이 affection에 대한 관념이 이미지다. 이 이미지 안에는 positive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태양의 본질이고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원인인 태양의 구성비와 신체의 구성비가 달라 구성비가 혼합되어 일어나는 결과물이 affection이다. 혼합의 세계인 변용 안에는 태양의 본질이 함축되어 감싸여 있다 이것이 representation이다. 여기서 representation은 개념이나 형상/본질과 비슷한 의미다.

 

▶[들뢰즈, 1983년 11월 8일 시네마 강의] 17세기 내내 양극의 긍정이 있었다. 데카르트부터 말브량슈까지 재현와 변양의 양극에 대한 명시적 구별이 발견된다. 이미지에는 실재에 상응하는 것으로 representation이 있다. 또한 이미지에는 상상/가상imaginary에 상응하는 것으로 나의 신체/영혼의 변양을 표현하는 측면이 있다. 태양이 나의 신체에 작용을 가해서 내 신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변양의 측면이 있고 한편으로 태양을 재현하는 측면이 있다. 감각sensation을 예를 들면 이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동시에 변양을 함축하는 이미지다. 바로 이 이미지에서 재현에 관련되는 관념과 나의 신체/영혼의 변양을 표현하는 것을 분간하는 것이 진리의 과제다. 그것은 구별로서의 진리로 진리가 곧 구별인 것이다. 만일 두 측면을 혼동하면 그것이 오류다.

 

▶ 욕망은 실재가 아니다. 욕망은 변양의 한 종류로 신체와 영혼의 변양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대상을 재현하는 게 욕망이 아니다. 욕망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이 오류다.

 

▶ 보통 삼각형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공통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삼각형, 저 삼각형의 본질이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개미라는 종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이 개미, 저 개미의 본질이 있다. 흰색이라는 용어가 흰색의 강도를 다 포괄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흰색이라고 불리는 것은 많은 흰색의 강도 중 하나다. 우리는 흰색의 많은 강도 중 덜 흰 강도부터 가장 더 흰 강도까지 사이에 있는 것을 흰색이라고 통칭한다.

 

▶ 사실상en fait/ 권리상 en droit 보편필연성

‘권리상’은 칸트가 사용한 개념이다. 삼각형의 형상은 권리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의 보편필연성은 어디에나 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리상의 보편필연성은 체험된 것이 아니라 사유된 보편필연성을 의미한다.

 

9장 부적합성

 

▶ 이 장은 우리는 어떻게 관념을 갖는가라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나중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답을 찾는다.

 

▶ 반면교사=반증anti-preuve

 

▶ 우리 영혼 혹은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우리가 갖는 관념은 구별된다. 우리의 영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관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나는 관념이다.’ 또한 나는 관념인 동시에 사물이다. 나는 영혼 또는 정신이자 동시에 신체/물체다. 우리 신체 또는 영혼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 안에 있다. 신이 소유한 관념이다. 우리는 이 관념을 직접적으로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신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도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관념과 함께 갖는다. 그래서 여기서의 신은 다른 관념으로 변용되는 것으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신 안의 모든 관념들은 자신들의 원인과 그 원인을 결정하는 신의 본질을 같이 표현한다. 우리 영혼을 구성하는 관념을 우리는 갖지 못한다. 여기서 관념은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본질에 대한 관념을 바로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삶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 신체 자체가 아니라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신체의 변용),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영혼의 변용)이 문제다. 우리가 관념을 갖는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이고 우리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의 본질/영혼/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 여기서 바로 변용 관념idée de affection/affection-idée이 나온다, 변용 자체가 관념이기도 하다.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에 따라서 affect가 생긴다. 관념을 affect가 전제한다. affect가 나중에 생긴다. 들뢰즈의 예에 따르면, ‘나는 길을 가다가 폴을 만난다. 폴은 나를 괴롭힌다. 폴에 대한 관념이 생기는 순간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이 생긴다.’ 이것은 슬픔으로의 이행으로 감정의 변화에 해당한다. 감정의 변화, 즉 기쁨/슬픔으로의 이행은 활동 역량의 증감을 의미한다.

 

# 들뢰즈의 『경험주의와 주체성-흄에 따른 인간본성에 관한 시론』에는 스피노자와 상통하는 흄이 자주 등장한다. 칸트는 흄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 흄은 모든 지식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에게도 지식은 믿음이다. 합법적/비합법적 믿음/사용은 흄에 근거한 것이다. 흄은 신에 대한 믿음, 자아와 세계에 대한 믿음을 비합법적인 믿음이라고 본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서는 흄과 칸트의 연속성과 단절에 대해 설명한다. 칸트가 기존의 합리론, 경험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칸트의 철학을 합리론이 아니라 비판철학이라 정의하며 그 함의가 무엇인지를 매우 도식적으로 설명한다.

 

▶ 우리는 변용 관념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 또는 우리 자신의 신체 영혼에 대한 인식을 갖는다. 직접적으로 갖는 게 아니라, 신 안의 그대로의 관념을 갖는 게 아니라 변용 관념을 통해 갖는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이 우리 신체와 영혼에 초래한 결과/효과다. 우리가 “나(moi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로 우리 신체와 영혼이 어떤 효과/작용을 받은 한에서 우리가 우리 신체와 영혼에 대해서 갖는 관념이다.

 

▶ 우리 영혼/정신을 구성하는 관념과 우리가 갖는 관념=변용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념이 있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형상 원인으로서 인식역량 또는 우리의 영혼 혹은 정신에 의존한다. 형상 원인이 인식역량이고 영혼 또는 정신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작용/효과와 무관하게 우리 신체에 대한 관념 또는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런 관념들의 형상 원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형상 원인은 우리의 인식역량인데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 영혼을 우리가 갖는 관념의 형상 원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받는 효과가 개입하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외부 사물의 관념들은 우리가 갖는 관념들의 질료 원인이다. 외부사물의 관념들은 신 안에 있는데 이 때 신은 우리 영혼 혹은 정신을 구성하는 한에서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들이 자신의 원인을 표현할 수 있는 조건에서 우리가 우리의 관념들을 소유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인을 표현할 수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념들을 소유한다.

 

▶ 우리가 갖는 변용 관념들은 원인을 함축할 뿐 표현하거나 펼쳐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관념들은 인식역량을 함축하지만 인식 역량에서 펼쳐지지 않고 우연에 의존한다/좌우된다. “함축하다”, “설명하다”, “표현하다”는 실체/속성의 차원에서는 서로 상관항이지만 양태의 수준에서는 함축만 한다.

 

▶ 우리의 변용 관념들은 우리 신체 상태를 지시한다/보여준다/가린킨다indicate. 하지만 외부 물체, 즉 우리 신체와 뒤섞인 다른 신체의 본성/본질을 설명하지 않는다. 태양이 우리 신체에 변용을 일으켜 우리가 변용 관념을 가질 때 이 변용 관념은 태양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관념들은 기호들이다. 변용 관념이 결국 기호sign다. 우리 몸에 새겨진 지시적 이미지이다. 하지만 원인을 표현하지 않으므로 표현적 관념은 아니다. 이해comprehension가 아니라 지각 또는 상상이다. 지각, 상상, 이미지, 변용 관념은 모두 동의어다.

 

▶ 이미지는 둘로 나뉜다. 1)가장 엄밀한precise 의미의 이미지는 나의 신체의 새겨진 자국, 흔적이다. 신체 변용 그 자체이고 어떤 외부 신체/물체가 나의 신체에 초래한 결과/효과다. 2) 비유적 의미에서 이미지는 변용 관념이다. 이때 변용 관념은 결과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식은 재인식reconnaissance에 불과한데, 재인식은 ‘알아본다’는 의미다. ‘이것은 사과야’처럼 알아볼 뿐이지 원인이나 사물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 지시의 특징 : 주된pimary/1차적인 지시체[지시된 것]는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구성 상태, 그것도 우리 신체의 가변적 구성의 순간적 상태다. 여기서 구성은 체질이나 골격이나 구조를 가리킨다. 이러한 신체 구조가 가변적이라는 말이다. 즉 가변적인 구조에서 순간적인/일시적인 상태만을 지시한다. 두 번째/2차적으로 지시된 것은 간접적인 것으로 우리 신체의 상태가 아니라 외부사물의 외관이다. 이 외관은 우리에게 사물을 결과에 의거해 재인식하게 하고 따라서 옳건 그르건 간에 사물의 현전을 긍정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2차적인 지시체는 외부 사물의 외관인데 이 외관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을 그것의 효과/작용의 의거해 재인식할 수 있고 옳건 그르건 사물의 현전을 긍정할 수 있다.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으나 그 사물의 본질까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들은 재인식/알아봄에 쓰인다[~에 쓸모가 있다servir à]. 즉 재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지시적이라는 우연과 마주침의 산물이고 비표현적이고 원인을 표현하지 않고 따라서 부적합한 관념이다.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인식은 이중적이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2) 변용을 우리 안에 산출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결여된 인식은 두 가지로 1)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고 2) 나에게 변용을 일으키는 대상을 모른다. 이처럼 내 안에 변용을 일으키는 대상은 모르지만 그 변용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