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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표현과 관념(1)
▶신과 신 관념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에는 또 원인이 있다. 이렇게 무한히 가는 것을 무한퇴행/무한소급이라고 한다. 이렇게 가다 보면 만물의 원인인 신에 이른다. 관념도 동일하다. 어떤 관념이 있으면 그 관념의 원인인 다른 관념이 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신 관념에 도달한다. 신이 모든 사물의 원인이듯 신 관념은 모든 관념의 원인이다. 그런데 관념의 원인이 다른 관념이라고 단순하게 도식화를 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관념의 원인이 하나가 아니고 무한히 많을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관념의 원인이 다른 관념이라고 할 때 이를 근인(近因)/근접 원인이라고 한다. 스피노자 이전의 철학 체계에서는 신 관념을 원인(遠因)/원격 원인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곧 초월적 신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내재적 신이 매 순간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원인이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인이 바로 신인 것이다.
▶ 관념과 관념의 관념
관념과 관념의 관념에 대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해석해보면, 바다의 수면 아래에 있는 개별 물방울에 해당하는 대한 지각, 즉 무의식 중에서 어떤 것[관념]이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관념의 관념]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바다에 그물을 던져 건져 올린 물고기는 바닷속에서나 수면 위에서나 동일한 물고기인 것처럼 관념과 관념의 관념은 구별되지만 결국은 같은 것이다. 관념의 관념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있던 관념이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 상태로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열과 빛을 쏘아 나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평상시에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아 뜨거워”하고 의식할 때가 있다. 작용은 계속하는 있는데/그 영향은 계속 일어나는데 의식을 못하다가 의식을 하면 관념의 관념이 된다.
▶관념의 대상
관념의 대상은 고정된 물체나 사물이 아니다. 대상은 어떤 대상[사물]이 우리에게 초래하는 결과/효과다. 사물이 아니라 효과가 바로 대상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효과에 대해서 갖는 관념이다.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변용되는 한에서/영향을 받은 한에서 신체와 영혼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즉 신체와 영혼이 변용되는 한에서 그것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 인식
인식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물체/신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A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B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서로 섞인다. 바로 섞이는 과정에 일어나는 반응, 작용의 결과/효과가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인식을 외부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질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뜨거운 불이 내 손을 달구면 나는 뜨겁다는 지각을 갖게 된다. 즉 나와 불이 유사해진다. 불의 감각적 질을 수용해 내 손이 노랗게 되거나 빨갛게 되는 것이다.
인식은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사물이 나에게 자신들을 impose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 중심적인 인식과는 다르다. 현상학적 인식은 주체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현상학의 최초의 시기(first moment)는 칸트다. 두 번째는 헤겔이다. “장막 뒤에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현상만/나타나는 것만 있다.” 세 번째는 후설이다. 하지만 17세기에는 주체가 구성하는 게 인식이 아니고 사물이 나한테 impose하는 것이 인식이라고 본다.
▶ 들뢰즈의 참/진리
기존의 플라톤부터 시작되는 합리주의 철학의 인식론적 전통에 따르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가 곧 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관념이 곧 대상이고 대상이 곧 관념이다. 그러면 참/진리는 무엇이냐? 실재와 상상이 있다고 하자. 잠정적이지만 실재를 본질, 상상을 외관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참은 실재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다. 실재와 상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반면 거짓은 실재와 상상을 혼동하는 것이다.
구별과 혼동 모두 이미지 안에서 일어난다. 이미지는 사실 변용이다. 이미지에는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고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갖는다고 할 때 이미지에는 두 측면이 있고 이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게 참이고 진리이다. 이미지 안에서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은 어떤 것을 재현하는 능력/가치이고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은 변양의 표현이다. 이미지는 어떤 것을 재현하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신체와 영혼의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한다.
그런데 실재와 상상이 식별 불가능해지는 영역/지대가 다시 말해 본질과 외관의 구별이 없어지는 영역/지대가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나는 본질을 없애면서 외관도 같이 없앴다”고 한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하는 게 곧 진리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17세기의 다른 철학자들도 우리는 정념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이미지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이미지 안에서 재현의 극pole과 변양의 극, 양극을 구별하는 게 진리다’라고 본다. 이미지 안에 변양을 표현하는 측면이 있고 재현하는 측면을 있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참 또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다.
태양에 대해서 내가 이미지를 가질 때 태양을 나와 독립적인 물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측면이 이미지에 있다고 할 때 과학 시간에서 배운 태양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재현한다고 할 때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을 이미지라고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재현/표상representation은 사실 형상form이다. 실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form에 대한 인식이다. form은 perspective 바깥에 있거나 또는 perspective가 없는 것이다. perspective라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form은 누가 어디서 보든 똑같은 것이다.
△ △ ▲
이것은 삼각형의 개념이 아니다. 삼각형에 대한 이미지다. 이 이미지 안에는 삼각형의 개념을 재현한 측면이 있다. 공간을 둘러싼 세 각이 개념이자 형상이다. 이것은 다른 삼각형에도 있다. 그리고 흰색과 검정색은 변양이다. 여기서 형상은 본질이다. 본질이 있기 때문에 삼각형이라고 한다. 정신의 눈으로 본 사물을 뜻하는 에이도스eidos는 형상, 본질에 해당한다. 삼각형의 본질/형상/form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삼각형의 이미지에서 삼각형의 form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삼각형은 다양하다. 그것들의 다양한 이미지에 공통적으로 있는 에센스를 추출하는 것이므로 정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유의 할 것은 실재/본질/형상과 상상/외관이 이미지를 구성한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재와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이미지에 있다고 봐야 한다. 실재와 상상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에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과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
거짓은 형상form을 갖지 않는다. 참만이 형상을 갖는다는 것이 17세기 철학자들에게 공리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형상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어떤 상대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마이라Chimaera는 사자 머리와 몸통을 갖고 있는데 몸통에 양의 머리가 더 있고 꼬리는 뱀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용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키마이라에게는 form이 없다. form이 무한히 많다고 하면 그게 있는 거냐 없는 거냐’라고 묻자 상대는 ‘나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며 돌아섰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상상의 측면이다. 거짓은 form이 없는 것이라고 할 때 키마이라처럼 form이 없는데 여기에 form을 부여하면 거짓이고 오류가 된다. 참의 form과 거짓의 form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form이 없는 것을 form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게 거짓이고 오류다.
▶개념과 진리
들뢰즈에 따르면 개념concept은 affect와 percept(perception과 다름)와 분리할 수 없다. 개념 안에는 affect와 percept가 항상 따라 붙는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전에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지각하게 만들고 affect를 바꾸는 것이다. affect를 바꾼다는 것은 역량의 증감,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변이passage)을 의미한다. 실존역량의 증감은 생명력force of life에 밀접히 관계한다. 개념이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더 지각하게 만들지 못하고 affect를 바꾸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제로다.
진리는 선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고 구성하는 것이다. 참된 것/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다. 역량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점점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지각 대상을 늘리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르게 지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지각 방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실체 등 여러 개념은 우리가 사물을 다르게 지각하게 만들고 역량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도 한다. 생명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니체는 ‘도취’라고 한다. 생명력을 증가시키는 도취인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개념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사랑은 위대한/크나큰grand 사랑을 뜻한다.
▶시간과 진리
실존역량이 큰 상태에서 이행하며 지각할 수 있는 것을 점점 더 많게, 점점 다르게 하는 것을 시간의 perspective라고 한다. 그렇게 공간적 perspective를 버리고 시간적 perspective에 도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신체 상태가 역량이 아주 작은 상태인 사람도 있고 큰 상태의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벡터가 증가하는 쪽으로 가느냐 감소하는 쪽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약해도 증가하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니체가 이야기하는 강자이고 주인이다. 니체도 병약했고 스피노자도 병약했지만 항상 상승의 벡터를 탔다. 병약한 사람도 상승의 벡터를 타면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것을 니체는 무거운 affect, 가벼운 affect로 표현한다. 실존역량이 증가하는 게 가벼운 affect다. 이는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와 관련이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거의 무게중심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무게중심에 가까울수록 무게중심과 동화/동일시/일체가 되면서 가벼워진다.
▶ 실존역량과 권력의 반비례
들뢰즈에 따르면, 공통개념의 형성은 실존역량의 증가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이 모여 더 큰 집단을 형성해서 권력(들뢰즈는 pouvior가 아닌 puissance를 사용)을 잡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지각하게 해주지 않는다. 실존역량을 증가시켜 주지 않는다. 권력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의 시력을 제한시킨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잘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권력 밖에 있어야 한다. 실존역량이 증가한다는 것과 점점 더 많은 것을 지각하게 된다는 것과 점점 가벼워진다는 것, 이 세 가지는 같이 간다. 권력을 갖는 것은 반대로 가는 것이다.
▶ 고대 철학과 현대철학의 진리관
고대 철학과 현대 철학은 진리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고대철학은 진리를 선재하는 참된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현대철학은 진리를 창조하는 것으로 본다. 베르그송, 화이트헤드는 진리를 창조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 진리를 창조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때 항상 질문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고 자신이 대답한다. 모든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정의한다. 스피노자의 진리관은 불확실하다. 그는 적합한 인식이 원인을 표현하는 인식이라고 본다. 스피노자가 17세기 고전주의 철학자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적합한 인식’일 것이다. 17세기 진리관의 암묵적 전제는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원한다는 것이고 도그마틱한 사유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은 reality가 아니라 affection이다. 욕망은 대상이 없다. 욕망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이 거짓이다. 그것은 affection과 representation을 혼동하는 것이다. 욕망은 뭔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욕망한다/희망한다는 대상이 있어도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 개념, 지각 affect(실존역량의 증가)는 철학의 삼위일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국 소설가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제임스는 “지각없는 개념은 없다. 나는 개념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 ‘참된 관념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form을 ‘형상’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논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형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일괄해서 형상이라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논리적 형식주의는 ‘정신적 자동장치’를 말한다. 관념들끼리는 서로 연쇄되고 재현한 대상과 무관하게 연역된다. 관념이 재현하는 대상과 독립적으로 관념들끼리 연쇄되는 형식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곤란하다.
▶ 8장의 적합한 관념은 9장 부적합한 관념, 17장 공통개념과 함께 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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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표현과 관념(1)
▶신과 신 관념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에는 또 원인이 있다. 이렇게 무한히 가는 것을 무한퇴행/무한소급이라고 한다. 이렇게 가다 보면 만물의 원인인 신에 이른다. 관념도 동일하다. 어떤 관념이 있으면 그 관념의 원인인 다른 관념이 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신 관념에 도달한다. 신이 모든 사물의 원인이듯 신 관념은 모든 관념의 원인이다. 그런데 관념의 원인이 다른 관념이라고 단순하게 도식화를 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관념의 원인이 하나가 아니고 무한히 많을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관념의 원인이 다른 관념이라고 할 때 이를 근인(近因)/근접 원인이라고 한다. 스피노자 이전의 철학 체계에서는 신 관념을 원인(遠因)/원격 원인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곧 초월적 신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내재적 신이 매 순간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원인이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인이 바로 신인 것이다.
▶ 관념과 관념의 관념
관념과 관념의 관념에 대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 해석해보면, 바다의 수면 아래에 있는 개별 물방울에 해당하는 대한 지각, 즉 무의식 중에서 어떤 것[관념]이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관념의 관념]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바다에 그물을 던져 건져 올린 물고기는 바닷속에서나 수면 위에서나 동일한 물고기인 것처럼 관념과 관념의 관념은 구별되지만 결국은 같은 것이다. 관념의 관념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있던 관념이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 상태로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열과 빛을 쏘아 나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평상시에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아 뜨거워”하고 의식할 때가 있다. 작용은 계속하는 있는데/그 영향은 계속 일어나는데 의식을 못하다가 의식을 하면 관념의 관념이 된다.
▶관념의 대상
관념의 대상은 고정된 물체나 사물이 아니다. 대상은 어떤 대상[사물]이 우리에게 초래하는 결과/효과다. 사물이 아니라 효과가 바로 대상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효과에 대해서 갖는 관념이다.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변용되는 한에서/영향을 받은 한에서 신체와 영혼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즉 신체와 영혼이 변용되는 한에서 그것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 인식
인식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물체/신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A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B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서로 섞인다. 바로 섞이는 과정에 일어나는 반응, 작용의 결과/효과가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인식을 외부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질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뜨거운 불이 내 손을 달구면 나는 뜨겁다는 지각을 갖게 된다. 즉 나와 불이 유사해진다. 불의 감각적 질을 수용해 내 손이 노랗게 되거나 빨갛게 되는 것이다.
인식은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사물이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사물이 나에게 자신들을 impose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 중심적인 인식과는 다르다. 현상학적 인식은 주체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현상학의 최초의 시기(first moment)는 칸트다. 두 번째는 헤겔이다. “장막 뒤에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현상만/나타나는 것만 있다.” 세 번째는 후설이다. 하지만 17세기에는 주체가 구성하는 게 인식이 아니고 사물이 나한테 impose하는 것이 인식이라고 본다.
▶ 들뢰즈의 참/진리
기존의 플라톤부터 시작되는 합리주의 철학의 인식론적 전통에 따르면 관념과 대상의 일치가 곧 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관념이 곧 대상이고 대상이 곧 관념이다. 그러면 참/진리는 무엇이냐? 실재와 상상이 있다고 하자. 잠정적이지만 실재를 본질, 상상을 외관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참은 실재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다. 실재와 상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반면 거짓은 실재와 상상을 혼동하는 것이다.
구별과 혼동 모두 이미지 안에서 일어난다. 이미지는 사실 변용이다. 이미지에는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고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갖는다고 할 때 이미지에는 두 측면이 있고 이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게 참이고 진리이다. 이미지 안에서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은 어떤 것을 재현하는 능력/가치이고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은 변양의 표현이다. 이미지는 어떤 것을 재현하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신체와 영혼의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한다.
그런데 실재와 상상이 식별 불가능해지는 영역/지대가 다시 말해 본질과 외관의 구별이 없어지는 영역/지대가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나는 본질을 없애면서 외관도 같이 없앴다”고 한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하는 게 곧 진리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17세기의 다른 철학자들도 우리는 정념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이미지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이미지 안에서 재현의 극pole과 변양의 극, 양극을 구별하는 게 진리다’라고 본다. 이미지 안에 변양을 표현하는 측면이 있고 재현하는 측면을 있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참 또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다.
태양에 대해서 내가 이미지를 가질 때 태양을 나와 독립적인 물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측면이 이미지에 있다고 할 때 과학 시간에서 배운 태양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재현한다고 할 때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을 이미지라고 봐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재현/표상representation은 사실 형상form이다. 실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form에 대한 인식이다. form은 perspective 바깥에 있거나 또는 perspective가 없는 것이다. perspective라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form은 누가 어디서 보든 똑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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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삼각형의 개념이 아니다. 삼각형에 대한 이미지다. 이 이미지 안에는 삼각형의 개념을 재현한 측면이 있다. 공간을 둘러싼 세 각이 개념이자 형상이다. 이것은 다른 삼각형에도 있다. 그리고 흰색과 검정색은 변양이다. 여기서 형상은 본질이다. 본질이 있기 때문에 삼각형이라고 한다. 정신의 눈으로 본 사물을 뜻하는 에이도스eidos는 형상, 본질에 해당한다. 삼각형의 본질/형상/form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삼각형의 이미지에서 삼각형의 form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삼각형은 다양하다. 그것들의 다양한 이미지에 공통적으로 있는 에센스를 추출하는 것이므로 정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유의 할 것은 실재/본질/형상과 상상/외관이 이미지를 구성한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재와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이미지에 있다고 봐야 한다. 실재와 상상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에 실재에 대응하는 측면과 상상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
거짓은 형상form을 갖지 않는다. 참만이 형상을 갖는다는 것이 17세기 철학자들에게 공리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형상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어떤 상대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마이라Chimaera는 사자 머리와 몸통을 갖고 있는데 몸통에 양의 머리가 더 있고 꼬리는 뱀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용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키마이라에게는 form이 없다. form이 무한히 많다고 하면 그게 있는 거냐 없는 거냐’라고 묻자 상대는 ‘나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답하며 돌아섰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상상의 측면이다. 거짓은 form이 없는 것이라고 할 때 키마이라처럼 form이 없는데 여기에 form을 부여하면 거짓이고 오류가 된다. 참의 form과 거짓의 form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form이 없는 것을 form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게 거짓이고 오류다.
▶개념과 진리
들뢰즈에 따르면 개념concept은 affect와 percept(perception과 다름)와 분리할 수 없다. 개념 안에는 affect와 percept가 항상 따라 붙는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전에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지각하게 만들고 affect를 바꾸는 것이다. affect를 바꾼다는 것은 역량의 증감,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변이passage)을 의미한다. 실존역량의 증감은 생명력force of life에 밀접히 관계한다. 개념이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더 지각하게 만들지 못하고 affect를 바꾸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제로다.
진리는 선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고 구성하는 것이다. 참된 것/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다. 역량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점점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지각 대상을 늘리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르게 지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지각 방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실체 등 여러 개념은 우리가 사물을 다르게 지각하게 만들고 역량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도 한다. 생명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니체는 ‘도취’라고 한다. 생명력을 증가시키는 도취인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개념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사랑은 위대한/크나큰grand 사랑을 뜻한다.
▶시간과 진리
실존역량이 큰 상태에서 이행하며 지각할 수 있는 것을 점점 더 많게, 점점 다르게 하는 것을 시간의 perspective라고 한다. 그렇게 공간적 perspective를 버리고 시간적 perspective에 도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신체 상태가 역량이 아주 작은 상태인 사람도 있고 큰 상태의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벡터가 증가하는 쪽으로 가느냐 감소하는 쪽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약해도 증가하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니체가 이야기하는 강자이고 주인이다. 니체도 병약했고 스피노자도 병약했지만 항상 상승의 벡터를 탔다. 병약한 사람도 상승의 벡터를 타면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것을 니체는 무거운 affect, 가벼운 affect로 표현한다. 실존역량이 증가하는 게 가벼운 affect다. 이는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와 관련이 있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거의 무게중심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무게중심에 가까울수록 무게중심과 동화/동일시/일체가 되면서 가벼워진다.
▶ 실존역량과 권력의 반비례
들뢰즈에 따르면, 공통개념의 형성은 실존역량의 증가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이 모여 더 큰 집단을 형성해서 권력(들뢰즈는 pouvior가 아닌 puissance를 사용)을 잡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지각하게 해주지 않는다. 실존역량을 증가시켜 주지 않는다. 권력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의 시력을 제한시킨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잘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권력 밖에 있어야 한다. 실존역량이 증가한다는 것과 점점 더 많은 것을 지각하게 된다는 것과 점점 가벼워진다는 것, 이 세 가지는 같이 간다. 권력을 갖는 것은 반대로 가는 것이다.
▶ 고대 철학과 현대철학의 진리관
고대 철학과 현대 철학은 진리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고대철학은 진리를 선재하는 참된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현대철학은 진리를 창조하는 것으로 본다. 베르그송, 화이트헤드는 진리를 창조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 진리를 창조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때 항상 질문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고 자신이 대답한다. 모든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정의한다. 스피노자의 진리관은 불확실하다. 그는 적합한 인식이 원인을 표현하는 인식이라고 본다. 스피노자가 17세기 고전주의 철학자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적합한 인식’일 것이다. 17세기 진리관의 암묵적 전제는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원한다는 것이고 도그마틱한 사유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은 reality가 아니라 affection이다. 욕망은 대상이 없다. 욕망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이 거짓이다. 그것은 affection과 representation을 혼동하는 것이다. 욕망은 뭔가를 재현하지 않는다. 욕망한다/희망한다는 대상이 있어도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 개념, 지각 affect(실존역량의 증가)는 철학의 삼위일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국 소설가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헨리 제임스는 “지각없는 개념은 없다. 나는 개념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 ‘참된 관념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form을 ‘형상’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논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형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일괄해서 형상이라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논리적 형식주의는 ‘정신적 자동장치’를 말한다. 관념들끼리는 서로 연쇄되고 재현한 대상과 무관하게 연역된다. 관념이 재현하는 대상과 독립적으로 관념들끼리 연쇄되는 형식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곤란하다.
▶ 8장의 적합한 관념은 9장 부적합한 관념, 17장 공통개념과 함께 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