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1강 1979년 3월 28일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
지난 강의에서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적이지 않은 품행의 영역, 즉 결혼, 자녀교육, 범죄성에 어떻게 경제주의적 분석을 적용했는지를 살폈다. 그것은 이와 같은 경제적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고 경제적 모델이 어떤 발견에 유용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모든 문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틀, 도식, 모델을 경제적 행위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위자 일반에 적용하는 것, 즉 결혼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에게 애정과 시간을 쏟고 할애하는 사회적 행위자 일반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또한 얼마나 결실을 얻을 수 있을까? 이는 미국 신자유주의 논의에서 고전적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텍스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인간행동』(1949)이다.
비경제적 영역에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틀을 일반화하는 데 있어 쟁점은 경제 분석 대상을 양자택일적 목적에 희소 자원을 최적으로 할당하는 것을 함의하는 모든 행동과 동일시한다는 점에 있다. 즉 경제 분석 대상은 수단, 방책, 도구의 전략적 선택을 함의하는, 목적성이 있는 모든 합리적 행동과 동일시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행동양식에 일반화된 모델
미국 신자유주의자 중 가장 급진적인 베커는 경제 분석의 대상은 정의되고 이해되는 합리적 행동을 넘어 확장될 수 있고 경제 법칙・분석은 비합리적 품행, 즉 한정된 목표에 희소 자원을 최적으로 할당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 품행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경제 분석은 한 개인의 행동이 현실에 대해 우연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그 정박 지점과 효율성을 완벽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환경의 가변항 내에서의 변화에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든 품행=“현실을 수용하는” 모든 행위는 경제 분석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현실을 수용하는 자다. 그리고 합리적 품행은 환경의 가변항 내에서의 변화를 감수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해 우연적이지 않은 방식, 즉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든 품행을 말한다. 이로써 경제학은 환경의 변수에 대한 반응의 체계성에 관한 과학으로서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경제 분석, 그리고 행동양식과 관련된 여러 기술
경제학이 환경의 변수에 대한 반응의 체계성에 관한 과학으로 정의될 때, 미국에서 현재 유통되고 유행하고 있는 행동양식에 관한 일련의 기술 전체는 완전하게 경제학에 통합될 수 있다. 스키너는 가장 순수하고 엄밀하며 엄격한 형태로서 가장 상식에서 벗어난 형태의 행동양식에 관한 기술을 발견한다. 그것은 행동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극의 작용이 강화 메커니즘을 통해 어떻게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알아내는 것이고 그런 반응의 체계성을 기록하고 그로부터 출발해 행동양식의 다른 변수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심리학은 베커의 경제학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18세기에 출현한 새로운 통치 이성의 기본 요소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18세기 출현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권력 행사, 통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건드려서는 안 되고 자유 방임되어야 주체 혹은 대상이다. 즉 방임을 규칙으로 하는 통치의 상대방이다. 반면 베커의 정의에 따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현실의 수용자, 혹은 환경의 변수 내에서의 변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자다. 그는 조종 가능하고 인위적으로 환경에 도입한 체계적 변화에 체계적으로 반응하는, 즉 환경에 작용을 가하고 환경적 변수를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통치성의 상관물이다.
레옹 왈라스(1834-1910)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 이전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의 역사적 개관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18세기에 정식화되는 새로운 통치 이성의 상대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이론이나 개념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고전주의자인 레옹 왈라스와 빌프레도 파레토에 와서야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개념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전에도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개념은 사용되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데이비트 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출현의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경험론과 경험주의 철학에서 활용하는 주체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존 로크와 함께 등장하는 영국 경험론은 서구 철학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 영혼과 신체의 대립, 타락이나 죄의 표식을 갖는 섹슈얼리티의 중심 내지 그 핵의 현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가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동시에 양도 불가능한 개인적 선택의 주체로서의 주체를 생산했다.
우선, 환원 불가능의 문제를 데이비드 흄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개인은 왜 어떤 것을 행하고 어떤 것을 행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베이는 것과 타인이 죽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경우 손가락을 베도록 강요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손가락이 베이는 것을 타인의 죽음보다 선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주체와 관계에서 환원불가능한 선택이며 양도불가능한 선택이다. 이처럼 원자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체 자신에 준거하는 선택의 원리, 이것이 이해관계다. 즉 영국 경험론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해관계의 원리이자 출발점,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의 공간으로서의 주체를 탄생시켰다.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의지의 형태로 출현한 것이다.
이해관계의 주체와 법권리 주체의 이질성
(1) 사법적 의지로 환원 불가능한 이해관계 : 이해관계와 법적 의지는 양립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의 윌리엄 블랙스톤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계약 이전의 이해관계는 자연상태에서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계약은 이해관계라는 경험적 원리에 기반해 성립된다. 이때 형성되는 사법적 의지, 계약을 통해 구성되는 법 권리의 주체는 순화되고 타산적이거나 합리화된 이해관계의 주체다. 하지만 흄에 따르면 계약이 성립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혼자이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해관계가 침해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계약 후에 그것을 지키는 것은 왜일까요? 블랙스톤에 따르면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계약의 ‘의무’라는 초월성에 종속되어 계약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법권리의 주체가 되어 계약을 따른다. 반면 흄에 따르면 계약 이행은 계약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이 있는 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계약의 출현으로 이해관계의 주체가 법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법권리의 주체가 이해관계의 주체를 대신하는 일도 없다. 이해관계의 주체는 법률이 존재하는 내내 존재하고 언제나 법권리의 주체를 넘어서고 그것을 포위하며, 언제나 그것이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 따라서 이해관계의 주체는 법권리의 주체, 법적 의지로 환원불가능하다.
또한 법권리의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법권리의 주체는 자연법에서 출발한다. 즉 자연법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양도하는 원칙을 수용할 때 법권리의 주체가 된다. 법권리의 주체는 부정성을 수용하는 주체, 자기 포기를 수용하는 주체이고 자기 자신의 분열을 수용해 일정 수준에서는 상당수의 자연적 직접적 권리를 소유하지만, 다른 수준에서는 자연적 직접적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을 통해 전자에 중첩된 법권리의 주체로 자신을 구축하게 되는 자이다. 이러한 주체의 분할, 첫 번째 주체와 관련한 두 번째 주체의 초월적 실존, 양자 간의 부정성, 포기, 제한의 관계, 이것들이 법권리 주체의 변증법 혹은 역할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 운동 내에서 법률과 금기가 출현한다.
(2) 시장과 계약의 역전 논리 :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영국의 경제학자, 버너드 맨더빌 같은 이론가들은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에서는 한 개인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하라고 결코 요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밀어붙일 때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보존될 뿐만 아니라 증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권리 주체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기주의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대하고 어떤 초월성도 없고 각자의 의지가 자연발생적이고 의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지 및 이해관계와 조화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것은 계약의 법이론에서 발견되는 포기, 초월성, 의지적인 연결을 둘러싼 변증법과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다. 시장과 계약은 서로 완전히 역전된 방식으로 기능하고 실제 서로 다른 두 구조를 갖고 있다.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해관계의 강화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증대적이고 유익한 가치를 발생시키도록 하는 이해관계의 주체를 가리킨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18세기의 호모 주리디쿠스 혹은 호모 레갈리스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사법적 모델과 관련된 두 번째 혁신
1) 경제 주체와 정치 권력의 관계 : 법권리의 주체와 경제 주체는 정치권력과 맺는 관계에서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경제적 인간 문제는 법적 인간이나 법권리의 주체라는 형상, 요소에 의해 권력의 기초 및 행사에 대해 제기되는 물음과 전혀 다른 유형의 질문을 던진다.
2) 니콜라 드 콩도르세 :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1793)에 따르면 사회 속 개인의 이해관계의 특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정치적 사건을 비롯한 무수한 것들에 의존하는 이해관계가 있다. 둘째 “눈에 보이는 혼돈 속에서 그래도 도덕 세계의 일반적 법칙에 의해 각자가 벌이는 자신을 위한 노력이, 만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 즉 각자가 제어할 수도 명시할 수도 없는 하나의 전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사물의 흐름이며 세계의 흐름인 전체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적 인간은 개인을 의존이라는 형태로 우발적 사건에 연결하고 또한 개인을 생산이라는 형태로 다른 사람의 이익에 연결하거나, 개인의 이익과 다른 사람의 생산을 연결하기도 하는 일정한 영역 속에 자리잡는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비의지적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의도하지 않게 타인을 위해 생산하는 이득도 비의지적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무한정적인 것 안에서 이중으로 놓인다. 한편으로는 이해관계가 의존하는 사건은 관통되거나 총체화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신의 고유한 이득을 생산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해 생산하게 되는 이득 역시 총체화할 수 없는 무한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중의 비의지적인 것, 이중의 무한정적인 것, 이중의 총체화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이것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행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계산에 기초하고 그것에 정합성과 효과를 부여하며, 그것을 현실 내에 기입해 모든 세계와 최적의 방법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기 계산을 초월하는 모든 것에서 그 계산의 긍정적 특징을 끌어내는 체계를 볼 수 있다.
3)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 스미스가 『국부론』(1776)에서 선보인 보이지 않는 손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상관물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주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상한 역학이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주체는 그 자신을 초월하는 총체 내에 있으며 이 총체는 그의 이기적인 선택의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절차에 자리한 섭리의 신이 몰래 점유하고 있는 장소로 상인, 시장, 배, 짐마차, 대로가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세계에는 본질적인 투명성이 있다는 관념에 기반한다. 만약 절차의 총체가 각각의 경제적 인간을 벗어난다고 해도, 총체가 어떤 종류의 시선에 대해 완전히 투명한 지점이 있다는 관념이며, 그런 시선을 가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시선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그 시선이 보는 바에 따라 분산된 모든 이해관계의 실을 연결시키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르고 결국에는 그것이 만인에게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데 결국 산업 전체가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만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인이 이익이 완전히 상인의 관심사가 되지 않는 게 최악은 아니다. 상인들이 공공 이익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집단적 이익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각각의 행위자들이 ‘총체’를 전혀 몰라야 한다. 각자에게 집단적인 결과의 수준에서 불확실성이 존재해야 하며, 그 결과로 긍정적인 집단적 결과를 실질적으로 얻는다. 애매모호함과 맹목성은 모든 경제 주체에게 필수적이다. 경제적 전략 내에서 계산되지 않는 집단적인 선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비가시성 원칙의 핵심이다. 통상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섭리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나 비가시성의 요소 역시 중요하다. 어떤 경제주체도 집단적인 선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비가시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경제 주체는 물론 어떤 정치 주체도 몰라야 한다. 경제 세계는 주권자에게 불명료해야 하고 불명료할 수 밖에 없다. 불명료성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는 것을 경제의 메커니즘이 함유하고 있으므로 각자를 자유방임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은 자연이 인간의 핵심에 새겨 넣은 이 동학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권력과 통치가 개인의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나아가 주권자가 경제 메커니즘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전체화하고 인위적이나 의지적으로 조합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는 것 역시 불가능해야 한다. 여러 이해관계를 자연발생적으로 조합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일체의 개입을 금지하고 경제절차를 전체화하려는 모든 형태의 돌출된 시선을 금지한다.
4) 경제세계의 총체화와 불가능성 : 퍼커슨은 『시민사회사』(1767)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이익을 얻으면 얻을수록 개인은 국부의 총량을 증대시킨다. ...행정이 아주 교묘하고 치밀하게 이 대상에 손을 뻗을 때마다 그것은 이익 증대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불만을 토로하는 주체들을 증가시킬 뿐이다. 상인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잊고 국민적 기획에 종사할 때마다 환각과 망상의 때는 가까워진다”
“상업과 부에 관해서는 개별적인 이해관계가 통치의 모든 사변보다 확실한 안내가 된다. 어떤 국가(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할 세련된 계획을 세우며 상인과 근시안적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정치가들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겨졌다. 다른 나라(영국)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자신의 것을 찾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놔뒀다. 후자는 각자의 단기적 전망과 활발한 산업을 통해 번영하는 식민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엄청난 기획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실현됐을 뿐이다”
실천으로 이해되는 경제, 통치의 개입 유형으로 이해되는 경제, 그리고 국가 내지 주권자의 행동형태의 유형으로서 이해된 경제는 모두 단기적 전망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며 만약 장기적 전망, 포괄적이고 전체화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주권자가 있다면 이 주권자는 망상만을 볼 뿐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18세기 중엽에 경제절차의 정치적 전체화에 관한 오류 추리를 고발했다.
5) 주권자의 필연적 무지 :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주권자는 무지할 수 있으며 무지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정의의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본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각자가 자기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자유방임은 주권자에게도 이롭다. 만일 주권자가 경제절차의 총체를 감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통제불가능한 행정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권자가 실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합리성은 절차의 전체성의 인식불가능성에 의해 포위되어 있고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 절차 내부에서 가능한 합리성의 유일한 작은 섬이고 경제절차의 통제불가능성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원자론적 행동양식의 합리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렇듯 경제적 세계는 본성상 불투명하고 전체화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은 무신론적 학문이고 전체화할 수 없는 학문이다. 또한 통치해야 할 국가의 전체성에 대한 주권자적 관점이나 주권자의 관점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도 하다는 것을 표명한 학문이다. 경제학은 국가 내부에서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는 주권자의 법률적 형식을 사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경제절차로 대체한다. 자유주의는 이해관계에 기반한 경제 주체를 특징짓는 전체화가 불가능한 다양성과 법률적 주권자의 전체화하는 통일성 간에 본질적인 양립불가능성이 정식화되었을 때에 시작되었다.
통치이성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
정치적・사법적 세계와 경제적 세계는 18세기부터 이질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세계로 나타났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법률적 주권자, 개인의 자연적 법권리에 입각해 법권리를 소유하고 실정적 법권리를 기초하는 주권자에게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무능력하다.’고 말할 것이다. 호모 주리디쿠스는 주권자에게 ‘나는 법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네게 그 중 몇 개를 위임했다. 너는 그 외 다른 것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주권자도 역시 경제절차의 전체성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통치이성의 역사에서 경제에 주권자가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경제적 주권자의 부재 내지 불가능성은 통치실천, 경제문제, 사회주의, 계획화, 복지경제학을 통해 제기되었다. 19-20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 사상과 신자유주의 사상의 모든 회귀와 반복은 경제적 주권자의 존재 불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반대로 계획화, 통제경제,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등은 정치경제학이 경제적 주권자를 정의할 수 있는 지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주권자를 실격시키는 기능과 역할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주권자의 가능성 자체를 실격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내치국가에 대한 거부다. 내치국가 즉 국가이성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는 17세기부터 중상주의적인 정책과 더불어 법권리 주권자 또는 법권리에 따르는 주권자이면서 자신이 주권을 행사하는 신민을 관리하고 개인, 단체, 국가 사이의 경제절차를 관리하는 주권자를 구성하고자 했다. 내치국가, 즉 17-18세기의 몇몇 주권자의 의지적이고 중상주의적인 정책에 의해 작동되는 국가는 경제적 주권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즉 경제적 자유주의는 총체적인 정치적 기획의 실격, 즉 국가와 주권에 연결된 정치적 이성의 실격을 제시했다.
한편 보이지 않는 손은 중농주의자와 대립했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시장과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상품이 가장 쉽게 가장 좋은 가격으로 살 사람이 나타나는 장소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이며 통치나 국가 혹은 주권자가 이것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즉 중농주의는 주권자의 권력을 경제에 행사하기 위한 행정적 규제 전체에 대해 엄격히 비판했다. 그들에 따르면 주권자는 원리상, 권리상, 사실상 나라 전체 토지의 소유자이자 생산물의 생산자로서 한 나라의 생산 및 경제활동 전체에 적합한 자이다.
생산의 경로와 지대 구성을 매우 정확하게 추적하는 ‘경제표’는 주권자에게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주고 그에 따라 경제절차를 통제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경제표는 주권자에게 경제절차의 총체성과 관련된 투명성의 원리로서의 분석 원리를 제공한다. 주권자는 경제표라는 총체적 지식의 이름 아래 경제 주체의 자유라는 원리를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성, 지식, 진실을 필연성에 따라 승인한다. 그리고 ‘경제표’ 덕분에 경제절차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주권자는 경제교육을 충분히 받은 시민과 ‘경제표’에서 원리를 발견하는 경제적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중농주의자에게 자유방임의 원칙, 경제 주체에 필요한 자유의 원칙은 주권자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투명성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경제 주체에 대해 자유를 남겨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절차의 전체성을 일별하고 경제 지식을 시민과 공유하는 명증성의 빛을 뚫고 가는 정치적 주권이 있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중농주의자의 완전한 경제적 자유와 절대적 전제주의의 역설적 이념에 대한 비판이다. 중농주의적 의미에서의 주권자도 전제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술과 관련된 측면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스미스의 자유주의 이론을 정치경제학의 출발 지점으로 간주한다면 결국 경제학은 통치합리성이라는 것에 대한 행동 지침 및 완전한 프 로그램화가 아니다. 정치경제학은 곧 학문이고 지식의 유형이며 인식의 방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이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통치의 학문이 될 수 없고 또 통치는 경제학의 원리, 법 행동규칙 또는 내적 합리성으로서 취할 수 없다. 경제학은 통치술과 관련해서 측면적인 학문이다. 경제학을 가지고 통치해야 하고 경제학자들의 곁에서 통치해야 하며 경제학자들의 말을 경청하며 통치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학이 통치합리성 자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1강 1979년 3월 28일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
지난 강의에서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적이지 않은 품행의 영역, 즉 결혼, 자녀교육, 범죄성에 어떻게 경제주의적 분석을 적용했는지를 살폈다. 그것은 이와 같은 경제적 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고 경제적 모델이 어떤 발견에 유용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모든 문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틀, 도식, 모델을 경제적 행위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위자 일반에 적용하는 것, 즉 결혼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에게 애정과 시간을 쏟고 할애하는 사회적 행위자 일반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또한 얼마나 결실을 얻을 수 있을까? 이는 미국 신자유주의 논의에서 고전적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관련된 최초의 텍스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인간행동』(1949)이다.
비경제적 영역에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틀을 일반화하는 데 있어 쟁점은 경제 분석 대상을 양자택일적 목적에 희소 자원을 최적으로 할당하는 것을 함의하는 모든 행동과 동일시한다는 점에 있다. 즉 경제 분석 대상은 수단, 방책, 도구의 전략적 선택을 함의하는, 목적성이 있는 모든 합리적 행동과 동일시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행동양식에 일반화된 모델
미국 신자유주의자 중 가장 급진적인 베커는 경제 분석의 대상은 정의되고 이해되는 합리적 행동을 넘어 확장될 수 있고 경제 법칙・분석은 비합리적 품행, 즉 한정된 목표에 희소 자원을 최적으로 할당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 품행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경제 분석은 한 개인의 행동이 현실에 대해 우연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그 정박 지점과 효율성을 완벽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환경의 가변항 내에서의 변화에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든 품행=“현실을 수용하는” 모든 행위는 경제 분석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현실을 수용하는 자다. 그리고 합리적 품행은 환경의 가변항 내에서의 변화를 감수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해 우연적이지 않은 방식, 즉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든 품행을 말한다. 이로써 경제학은 환경의 변수에 대한 반응의 체계성에 관한 과학으로서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경제 분석, 그리고 행동양식과 관련된 여러 기술
경제학이 환경의 변수에 대한 반응의 체계성에 관한 과학으로 정의될 때, 미국에서 현재 유통되고 유행하고 있는 행동양식에 관한 일련의 기술 전체는 완전하게 경제학에 통합될 수 있다. 스키너는 가장 순수하고 엄밀하며 엄격한 형태로서 가장 상식에서 벗어난 형태의 행동양식에 관한 기술을 발견한다. 그것은 행동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극의 작용이 강화 메커니즘을 통해 어떻게 여러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알아내는 것이고 그런 반응의 체계성을 기록하고 그로부터 출발해 행동양식의 다른 변수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심리학은 베커의 경제학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18세기에 출현한 새로운 통치 이성의 기본 요소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18세기 출현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권력 행사, 통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건드려서는 안 되고 자유 방임되어야 주체 혹은 대상이다. 즉 방임을 규칙으로 하는 통치의 상대방이다. 반면 베커의 정의에 따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현실의 수용자, 혹은 환경의 변수 내에서의 변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자다. 그는 조종 가능하고 인위적으로 환경에 도입한 체계적 변화에 체계적으로 반응하는, 즉 환경에 작용을 가하고 환경적 변수를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통치성의 상관물이다.
레옹 왈라스(1834-1910)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 이전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의 역사적 개관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18세기에 정식화되는 새로운 통치 이성의 상대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이론이나 개념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고전주의자인 레옹 왈라스와 빌프레도 파레토에 와서야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개념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이전에도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개념은 사용되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데이비트 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출현의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경험론과 경험주의 철학에서 활용하는 주체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존 로크와 함께 등장하는 영국 경험론은 서구 철학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 영혼과 신체의 대립, 타락이나 죄의 표식을 갖는 섹슈얼리티의 중심 내지 그 핵의 현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가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동시에 양도 불가능한 개인적 선택의 주체로서의 주체를 생산했다.
우선, 환원 불가능의 문제를 데이비드 흄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개인은 왜 어떤 것을 행하고 어떤 것을 행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베이는 것과 타인이 죽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경우 손가락을 베도록 강요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손가락이 베이는 것을 타인의 죽음보다 선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주체와 관계에서 환원불가능한 선택이며 양도불가능한 선택이다. 이처럼 원자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체 자신에 준거하는 선택의 원리, 이것이 이해관계다. 즉 영국 경험론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해관계의 원리이자 출발점,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의 공간으로서의 주체를 탄생시켰다. 이해관계가 처음으로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의지의 형태로 출현한 것이다.
이해관계의 주체와 법권리 주체의 이질성
(1) 사법적 의지로 환원 불가능한 이해관계 : 이해관계와 법적 의지는 양립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의 윌리엄 블랙스톤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계약 이전의 이해관계는 자연상태에서 위협을 당한다. 그리고 계약은 이해관계라는 경험적 원리에 기반해 성립된다. 이때 형성되는 사법적 의지, 계약을 통해 구성되는 법 권리의 주체는 순화되고 타산적이거나 합리화된 이해관계의 주체다. 하지만 흄에 따르면 계약이 성립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혼자이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해관계가 침해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계약 후에 그것을 지키는 것은 왜일까요? 블랙스톤에 따르면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계약의 ‘의무’라는 초월성에 종속되어 계약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법권리의 주체가 되어 계약을 따른다. 반면 흄에 따르면 계약 이행은 계약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이 있는 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계약의 출현으로 이해관계의 주체가 법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법권리의 주체가 이해관계의 주체를 대신하는 일도 없다. 이해관계의 주체는 법률이 존재하는 내내 존재하고 언제나 법권리의 주체를 넘어서고 그것을 포위하며, 언제나 그것이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 따라서 이해관계의 주체는 법권리의 주체, 법적 의지로 환원불가능하다.
또한 법권리의 주체와 이해관계의 주체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법권리의 주체는 자연법에서 출발한다. 즉 자연법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양도하는 원칙을 수용할 때 법권리의 주체가 된다. 법권리의 주체는 부정성을 수용하는 주체, 자기 포기를 수용하는 주체이고 자기 자신의 분열을 수용해 일정 수준에서는 상당수의 자연적 직접적 권리를 소유하지만, 다른 수준에서는 자연적 직접적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을 통해 전자에 중첩된 법권리의 주체로 자신을 구축하게 되는 자이다. 이러한 주체의 분할, 첫 번째 주체와 관련한 두 번째 주체의 초월적 실존, 양자 간의 부정성, 포기, 제한의 관계, 이것들이 법권리 주체의 변증법 혹은 역할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 운동 내에서 법률과 금기가 출현한다.
(2) 시장과 계약의 역전 논리 :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영국의 경제학자, 버너드 맨더빌 같은 이론가들은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에서는 한 개인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하라고 결코 요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밀어붙일 때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보존될 뿐만 아니라 증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권리 주체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기주의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대하고 어떤 초월성도 없고 각자의 의지가 자연발생적이고 의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지 및 이해관계와 조화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것은 계약의 법이론에서 발견되는 포기, 초월성, 의지적인 연결을 둘러싼 변증법과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다. 시장과 계약은 서로 완전히 역전된 방식으로 기능하고 실제 서로 다른 두 구조를 갖고 있다.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해관계의 강화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증대적이고 유익한 가치를 발생시키도록 하는 이해관계의 주체를 가리킨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18세기의 호모 주리디쿠스 혹은 호모 레갈리스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사법적 모델과 관련된 두 번째 혁신
1) 경제 주체와 정치 권력의 관계 : 법권리의 주체와 경제 주체는 정치권력과 맺는 관계에서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경제적 인간 문제는 법적 인간이나 법권리의 주체라는 형상, 요소에 의해 권력의 기초 및 행사에 대해 제기되는 물음과 전혀 다른 유형의 질문을 던진다.
2) 니콜라 드 콩도르세 :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1793)에 따르면 사회 속 개인의 이해관계의 특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정치적 사건을 비롯한 무수한 것들에 의존하는 이해관계가 있다. 둘째 “눈에 보이는 혼돈 속에서 그래도 도덕 세계의 일반적 법칙에 의해 각자가 벌이는 자신을 위한 노력이, 만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 즉 각자가 제어할 수도 명시할 수도 없는 하나의 전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사물의 흐름이며 세계의 흐름인 전체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적 인간은 개인을 의존이라는 형태로 우발적 사건에 연결하고 또한 개인을 생산이라는 형태로 다른 사람의 이익에 연결하거나, 개인의 이익과 다른 사람의 생산을 연결하기도 하는 일정한 영역 속에 자리잡는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비의지적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의도하지 않게 타인을 위해 생산하는 이득도 비의지적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무한정적인 것 안에서 이중으로 놓인다. 한편으로는 이해관계가 의존하는 사건은 관통되거나 총체화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신의 고유한 이득을 생산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위해 생산하게 되는 이득 역시 총체화할 수 없는 무한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중의 비의지적인 것, 이중의 무한정적인 것, 이중의 총체화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이것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행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계산에 기초하고 그것에 정합성과 효과를 부여하며, 그것을 현실 내에 기입해 모든 세계와 최적의 방법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기 계산을 초월하는 모든 것에서 그 계산의 긍정적 특징을 끌어내는 체계를 볼 수 있다.
3)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 스미스가 『국부론』(1776)에서 선보인 보이지 않는 손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상관물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주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상한 역학이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주체는 그 자신을 초월하는 총체 내에 있으며 이 총체는 그의 이기적인 선택의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절차에 자리한 섭리의 신이 몰래 점유하고 있는 장소로 상인, 시장, 배, 짐마차, 대로가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세계에는 본질적인 투명성이 있다는 관념에 기반한다. 만약 절차의 총체가 각각의 경제적 인간을 벗어난다고 해도, 총체가 어떤 종류의 시선에 대해 완전히 투명한 지점이 있다는 관념이며, 그런 시선을 가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시선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그 시선이 보는 바에 따라 분산된 모든 이해관계의 실을 연결시키고 있다.
스미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르고 결국에는 그것이 만인에게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데 결국 산업 전체가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만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인이 이익이 완전히 상인의 관심사가 되지 않는 게 최악은 아니다. 상인들이 공공 이익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집단적 이익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각각의 행위자들이 ‘총체’를 전혀 몰라야 한다. 각자에게 집단적인 결과의 수준에서 불확실성이 존재해야 하며, 그 결과로 긍정적인 집단적 결과를 실질적으로 얻는다. 애매모호함과 맹목성은 모든 경제 주체에게 필수적이다. 경제적 전략 내에서 계산되지 않는 집단적인 선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비가시성 원칙의 핵심이다. 통상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섭리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나 비가시성의 요소 역시 중요하다. 어떤 경제주체도 집단적인 선을 추구하지 않도록 하는 비가시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경제 주체는 물론 어떤 정치 주체도 몰라야 한다. 경제 세계는 주권자에게 불명료해야 하고 불명료할 수 밖에 없다. 불명료성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는 것을 경제의 메커니즘이 함유하고 있으므로 각자를 자유방임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은 자연이 인간의 핵심에 새겨 넣은 이 동학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권력과 통치가 개인의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나아가 주권자가 경제 메커니즘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전체화하고 인위적이나 의지적으로 조합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는 것 역시 불가능해야 한다. 여러 이해관계를 자연발생적으로 조합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일체의 개입을 금지하고 경제절차를 전체화하려는 모든 형태의 돌출된 시선을 금지한다.
4) 경제세계의 총체화와 불가능성 : 퍼커슨은 『시민사회사』(1767)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이익을 얻으면 얻을수록 개인은 국부의 총량을 증대시킨다. ...행정이 아주 교묘하고 치밀하게 이 대상에 손을 뻗을 때마다 그것은 이익 증대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불만을 토로하는 주체들을 증가시킬 뿐이다. 상인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잊고 국민적 기획에 종사할 때마다 환각과 망상의 때는 가까워진다”
“상업과 부에 관해서는 개별적인 이해관계가 통치의 모든 사변보다 확실한 안내가 된다. 어떤 국가(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할 세련된 계획을 세우며 상인과 근시안적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정치가들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겨졌다. 다른 나라(영국)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자신의 것을 찾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놔뒀다. 후자는 각자의 단기적 전망과 활발한 산업을 통해 번영하는 식민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엄청난 기획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실현됐을 뿐이다”
실천으로 이해되는 경제, 통치의 개입 유형으로 이해되는 경제, 그리고 국가 내지 주권자의 행동형태의 유형으로서 이해된 경제는 모두 단기적 전망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며 만약 장기적 전망, 포괄적이고 전체화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주권자가 있다면 이 주권자는 망상만을 볼 뿐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18세기 중엽에 경제절차의 정치적 전체화에 관한 오류 추리를 고발했다.
5) 주권자의 필연적 무지 :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주권자는 무지할 수 있으며 무지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정의의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본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 각자가 자기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자유방임은 주권자에게도 이롭다. 만일 주권자가 경제절차의 총체를 감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통제불가능한 행정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권자가 실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합리성은 절차의 전체성의 인식불가능성에 의해 포위되어 있고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 절차 내부에서 가능한 합리성의 유일한 작은 섬이고 경제절차의 통제불가능성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원자론적 행동양식의 합리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렇듯 경제적 세계는 본성상 불투명하고 전체화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은 무신론적 학문이고 전체화할 수 없는 학문이다. 또한 통치해야 할 국가의 전체성에 대한 주권자적 관점이나 주권자의 관점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도 하다는 것을 표명한 학문이다. 경제학은 국가 내부에서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는 주권자의 법률적 형식을 사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경제절차로 대체한다. 자유주의는 이해관계에 기반한 경제 주체를 특징짓는 전체화가 불가능한 다양성과 법률적 주권자의 전체화하는 통일성 간에 본질적인 양립불가능성이 정식화되었을 때에 시작되었다.
통치이성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
정치적・사법적 세계와 경제적 세계는 18세기부터 이질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세계로 나타났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법률적 주권자, 개인의 자연적 법권리에 입각해 법권리를 소유하고 실정적 법권리를 기초하는 주권자에게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무능력하다.’고 말할 것이다. 호모 주리디쿠스는 주권자에게 ‘나는 법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네게 그 중 몇 개를 위임했다. 너는 그 외 다른 것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주권자도 역시 경제절차의 전체성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통치이성의 역사에서 경제에 주권자가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경제적 주권자의 부재 내지 불가능성은 통치실천, 경제문제, 사회주의, 계획화, 복지경제학을 통해 제기되었다. 19-20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 사상과 신자유주의 사상의 모든 회귀와 반복은 경제적 주권자의 존재 불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반대로 계획화, 통제경제,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등은 정치경제학이 경제적 주권자를 정의할 수 있는 지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주권자를 실격시키는 기능과 역할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주권자의 가능성 자체를 실격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내치국가에 대한 거부다. 내치국가 즉 국가이성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는 17세기부터 중상주의적인 정책과 더불어 법권리 주권자 또는 법권리에 따르는 주권자이면서 자신이 주권을 행사하는 신민을 관리하고 개인, 단체, 국가 사이의 경제절차를 관리하는 주권자를 구성하고자 했다. 내치국가, 즉 17-18세기의 몇몇 주권자의 의지적이고 중상주의적인 정책에 의해 작동되는 국가는 경제적 주권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즉 경제적 자유주의는 총체적인 정치적 기획의 실격, 즉 국가와 주권에 연결된 정치적 이성의 실격을 제시했다.
한편 보이지 않는 손은 중농주의자와 대립했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은 시장과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상품이 가장 쉽게 가장 좋은 가격으로 살 사람이 나타나는 장소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이해관계의 메커니즘이며 통치나 국가 혹은 주권자가 이것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즉 중농주의는 주권자의 권력을 경제에 행사하기 위한 행정적 규제 전체에 대해 엄격히 비판했다. 그들에 따르면 주권자는 원리상, 권리상, 사실상 나라 전체 토지의 소유자이자 생산물의 생산자로서 한 나라의 생산 및 경제활동 전체에 적합한 자이다.
생산의 경로와 지대 구성을 매우 정확하게 추적하는 ‘경제표’는 주권자에게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주고 그에 따라 경제절차를 통제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경제표는 주권자에게 경제절차의 총체성과 관련된 투명성의 원리로서의 분석 원리를 제공한다. 주권자는 경제표라는 총체적 지식의 이름 아래 경제 주체의 자유라는 원리를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성, 지식, 진실을 필연성에 따라 승인한다. 그리고 ‘경제표’ 덕분에 경제절차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주권자는 경제교육을 충분히 받은 시민과 ‘경제표’에서 원리를 발견하는 경제적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중농주의자에게 자유방임의 원칙, 경제 주체에 필요한 자유의 원칙은 주권자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투명성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경제 주체에 대해 자유를 남겨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절차의 전체성을 일별하고 경제 지식을 시민과 공유하는 명증성의 빛을 뚫고 가는 정치적 주권이 있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중농주의자의 완전한 경제적 자유와 절대적 전제주의의 역설적 이념에 대한 비판이다. 중농주의적 의미에서의 주권자도 전제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술과 관련된 측면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스미스의 자유주의 이론을 정치경제학의 출발 지점으로 간주한다면 결국 경제학은 통치합리성이라는 것에 대한 행동 지침 및 완전한 프 로그램화가 아니다. 정치경제학은 곧 학문이고 지식의 유형이며 인식의 방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이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통치의 학문이 될 수 없고 또 통치는 경제학의 원리, 법 행동규칙 또는 내적 합리성으로서 취할 수 없다. 경제학은 통치술과 관련해서 측면적인 학문이다. 경제학을 가지고 통치해야 하고 경제학자들의 곁에서 통치해야 하며 경제학자들의 말을 경청하며 통치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학이 통치합리성 자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