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두 가지 역량과 신 관념(2)
- 어떤 조건에서 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긍정하는가? 이 질문은 인식론적 평행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속성과 실존 역량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던진 것이다. 바로 신이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갖는다는 조건에서다. 한편 신에 대해 사유 역량을 긍정하는 조건은 신이 사유 속성을 갖는다는 데 있다.
- 어떤 속성도 신에게 귀속되는 절대적 실존 역량을 비우지/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몇몇 속성으로 실존 역량 모두가 충족이 안 된다. 연장적이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으면서 실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신을 구성하는 무한한 많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 다른 속성도 있다는 것으로, 다른 속성으로도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 각각의 속성들은 무한하게 완전한 본질을 표현한다. 이 본질들은 형상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에 형상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속성들 각각의 존재적 형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이란 실존 및 작용 역량을 말한다. 반면 표상적 본질은 사유 역량을 말한다. 속성들 각각이 표현하는 형상적 본질들은 속성의 본질이 아니라 실체의 본질로서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본질로서 표현된다.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이고, 본질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실체 안에서 모두 동일시된다. 그래서 절대적 본질이라고 한다.
- 각각의 형상/형식은 절대자를 표현한다/전개한다. 절대자는 무한히 많은 형상들/속성들을 소유한다. 정확히 얘기하면 속성들이 표현한 본질들을 담고 있다. 신의 절대적 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이다. 첫 번째 역량,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은 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다. 실존 역량이 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라고 긍정하는 것은 무한히 많은속성들의 무한성이라는 조건에서다. 다시 말해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갖는다. 이 조건에서 실존 및 작용 역량과 신의 본질이 동일시될 수 있다. 이것이 속성들의 동등성 원리이다.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각각 어떤 특정한 본질을 표현하고 그것은 모두 신의 본질이고 절대자의 본질이고 속성들 각각은 동등하다. 속성들은 그것들이 조건짓는 실존 및 작용 역량과 관련해서(140쪽 번역오류) 동등하다.
- 사유 속성은 무한히 많은 속성의 하나로서 신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하고 사유 속성의 양태들은 대상에 대한 관념으로 대상과 항상 관계를 맺으므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 신은 자신을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형상적이 아닌 표상적으로 표현한다. 신의 본질은 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들에서는 형상적이고 신의 본성을 재현하는 관념에서는 표상적이다. 그래서 형상적 본질과 표상적 본질이 있다.
- 신의 본성을 필연적으로 재현하는 관념이 곧 신 관념이다. 신 관념은 무엇인가? 신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자 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념이다. 신 관념은 모든 속성들을 재현한다. 그래서 신 안에서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신 관념 안에서 표상적으로 구별된다. 무한한 속성으로 구성된 실체처럼 신 관념도 하나다. 표상적으로 구별되지만 신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신 관념도 하나다. 표상적 본질은 절대자의 두 번째 역량으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말한다. 첫 번째 역량=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이다. 실존은 항상 작용/행위[agir행동하다, 작용하다]와 붙어 다닌다. 사유 역량은 이해하는/인식하는 역량이라고도 한다. 표상적 본질인 사유 역량은 절대자의 두 번째 역량이다.
- 우리가 어떤 존재, 즉 신을 모든 사물의 원인/만물의 원인이로 설정/가정하면 신 관념은 모든 관념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신과 모든 사물과의 관계 및 신 관념과 모든 관념과의 관계는 같아진다. 이렇게 관계를 설정하면 문제가 생긴다. 신은 실체인데 신 관념은 양태다!? 관계상으로 보면 신 관념도 실체여야 하는데 실체가 아닌 것이 실체와 대등한 지위에 서버린다. 이 난점을 거짓 모순 혹은 의사모순이라고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역량논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신 관념의 복합적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
- 신의 본질은 형상적으로는 실존 역량이고 표상적으로는 사유 역량이다. 어떤 조건에서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긍정하느냐?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갖는다는 조건에서이다. 이번에는 다시 질문한다. 어떤 조건에서 신에게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긍정하느냐? 사유 속성은 무한히 많은 속성 중 하나다. 역량으로 가면 달라진다.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은 동등하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신은 사유 속성을 가져야 하고, 사유 속성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유 속성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해서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귀속시킬 수 있다. 사유 역량은 사유 속성 외에 다른 조건을 갖지 않는다. 사유 역량의 조건에 대해, 혹은 신 관념의 가능성에 대해 스피노자가 물을 때가 있다. 사유 역량의 조건은 신 관념의 가능성과 같다. [테크닉컬한 표현이 반복되지만]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긍정한다고 하는 것은 곧 신은 혹은 신 관념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고 각각의 관념들=사유 속성의 양태들도 사유 역량을 갖는다. 그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사실은 우리는 인식 주체가 사유 역량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관념이 사유 역량을 갖는다. 관념에 대해서 사유 역량을 긍정한다. 어떤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 관념에 상응하는 사유역량/인식 역량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헤매는 지점은 우리는 인식을 인식 주체의 활동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17세기 고전주의 철학에는 관념의 자기 긍정이 있다. 정신 안에서 관념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즉 관념이 사유 역량 또는 인식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다.
- 또 하나 구별할 것은 ‘우리가 가지는 관념’이 있고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양태로서의 인간들의 신체/물체corps이면서 영혼이고 사물chose=thnig이면서 관념이다. 실체가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무한히 많은 사물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때 속성들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사물이다. 관념도 어떤 면에서는 사물이다. 형상적으로 보면 사물이고 표상적으로 보면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idée que nous sommes/thing that we are/우리는 ~~이다]은 사물인 동시에 관념이고 신체인 동시에 영혼/정신이다. 여기서 관념은 곧 영혼/정신이다. 이때 관념은 무한히 많은 관념들로 합성된 복합 관념이다. 우리의 신체가 무한히 많은 작은 신체로 합성된 복합신체인 것처럼 우리의 정신/영혼은 하나의 관념인데, 이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관념은 무한히 많은 관념들로 합성되어 있다. 그래서 관념들의 다발이라고 한다.
- 우리는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사유 속성, 연장 속성, 즉 연장적 실존과 사유적 실존 외에 다른 실존도 가능하다. 그런데 인식으로 넘어가면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 사유 속성이 사유 역량을 커버한다. 한편 실존 역량을 커버하려면 무한히 많은 속성이 필요하다.
- ‘우리가 갖는 관념’은 우리에게 일어난 것, 일어난 일에 대한 관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affection에 대한 관념이다. 결과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신 안에 있는 그대로의 관념이다. 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관념, 즉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우리가~이다]은 우리의 본질에 대한 관념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과/변용에 대한 인식만 갖는다.
-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은 동등하다. 사유 역량이 우위에 있지 않다. 사유 속성과 그 나머지 속성들끼리도 동등하다. 그런데 사유 속성의 경우에는 다른 속성들과 다르다. 형상적 본질만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이처럼 무한히 많은 관념들이 중복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은 ‘무한’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의 차원에서는 더 많고 덜 많고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우주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로 구성된다. 그에 상응하는 무한히 큰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무한히 작은 관념들로 구성된다. 내재라는 것은 어떤 신체나 물체가 전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어떤 관념도 전 우주에 상응하는 무한한 관념의 일부로서 바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재성은 초월자를 상정하기 않는 개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지 않는 순수한 본질은 없다. 또한 데카르트처럼 정신적 실체가 육체적 실체가 우월하다고 하는 식의 주장도 스피노자에게는 없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이 있고 정신적 실체들이 있고 물체적 실체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위계가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모든 속성들은 동등하다.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설계는 종전의 위계적인 세계관을 깨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 사유 역량의 특수한 지위는 미스테리로 해결이 쉽지 않다. 들뢰즈도 이 난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하지 않으면 불가해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가령 ‘신의 복합적 지위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식론적 평행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의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또한 들뢰즈는 자주 “논쟁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한다. 철학은 논쟁이 아니라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solution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다.
- 사유 속성만으로 사유 역량의 조건이 된다. 성급하게 스피노자주의가 비일관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가지 동등성 원리를 혼돈할 때만 비일관적으로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속성들의 동등성,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동등성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비일관성으로 보였던 것이 일관성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사유 속성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두 번째 역량, 즉 사유 역량과 관련해서다. 사유 역량은 모든 속성들이 조건짓는 역량=실존 역량과 동등한 역량이다. 사유 속성은 혼자서 사유 역량을 감당한다. 여기서 모순도 없고 궁극적 사실이 있다.
- 사유 속성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모순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속성들의 등등성을 상정하고 그 다음 동등성에 반하는 능력과 기능을 사유 속성에 부여했다면 모순이 된다. 사유 역량이 속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유 속성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했다면 모순이 된다. 하지만 다른 영역인 역량으로 넘어오면 달라진다. 정리하자면, 속성들이 동등하다. 사유 속성은 그것의 일부다. 그리고 속성들의 동등성의 영역이 아닌 역량의 영역에는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만 있고 둘은 동등하다.
- 사유속성과 사유 역량의 관계와 모든 속성과 실존 역량의 관계는 같다. 다시 말해 사유 역량의 조건은 사유 속성이고 실존 역량의 조건은 모든 속성들이다.
- 사유 역량과 사유 속성의 관계에서 세 가지 귀결이 나온다. 1) 사유 역량은 표상적인 모든 것, 즉 관념에 대해서 긍정된다. 모든 관념은 일정 정도의 사유 역량을 가진다.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신의 절대적 사유 역량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 신 관념은 사유의 양태일 뿐이고 소산적 자연의 일부다. 신 관념도 관념이므로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 형상적 존재다. 속성 안의 존재가 형상적 존재다. 또한 관념은 일단 어떤 대상의 관념이므로 표상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물 자체로서 존재가 형상적 존재인데 관념도 사물로 보므로 형상적 존재다[être있다/없다가 아니라 ~이므로 있다, ~임의 의미를 갖는다].
▶모든 관념에 어떤 사물이 대응한다. 모든 사물에 어떤 관념이 대응한다.
- 관념에 대응하는 어떤 사물이 다른 속성들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물에 대응하는 어떤 관념이 있다. 관념도 무한히 많은 속성의 양태 중 하나이므로 관념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 관념의 관념은 어떤 관념에 대한 관념이고 그것이 의식이다. 관념과 대상의 관계는 관념의 관념과 관념의 관계와 같다. 관념과 대상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관념의 관념과 관념의 관계도 동일하므로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 사이에는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동일한 것의 표현이다. 연장속성, 사유속성만 놓고 보면 연장속성의 양태인 물체와 사유 속성의 양태인 관념 간에는 형상적 구별이 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인데 이름만 다르다. 연장 속성으로는 물체이고 사유 속성은 관념이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의 관계도 이와 같다.
- 물체a, 물체b..와 이에 대응하는 관념 a, 관념 b....는 수적으로 구별되지만 물체 a와 관념 a는 형상적으로 구별된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 있다. 양자는 신체와 관념의 관계와 같으며 사고상으로만 구별된다.
- 우리는 인식을 주체의 활동으로만 생각한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념이 있고 관념이 가지는 사유 역량이 있다. 데카르트는 인식 주체를 발견하나 끝까지 밀고가지 못했다. 데카르트를 이어받은 것은 칸트다. 들뢰즈는 데카르트를 고전주의 시대에 완전하게 편입시키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스콜라 철학과 고전주의에 각각 한발을 걸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유의 잔재가 있다. 유비, 고차성 등등의 개념을 갖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엇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감각적 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을 감각할 때 내 손이 불과 같은 색깔로 바뀐다. 인식과 인식된 것과 인식하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 신 안에 있는 그대로의 관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서 빠져 나간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그 영향을 받아서 생긴 어떤 흔적, 자국, affection, 이미지, 기호만을 인식한다. 그래서 원인과 분리된 결과에 대한 인식/부적합한 인식만을 갖는다. 그 결과에 대한 인식 안에 원인에 대한 포지티브한 면이 함축되어 있다. 그 함축된 면을 찾아내는 게 2종 인식이다. 우리가 태양이 200미터 거리에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은 태양이 우리 신체에 미친 영향의 결과다. 우리에게는 이것에 대한 인식만 가능하다.
들뢰즈, 『스피노자, 실천철학』 4장 개념 색인
▶ 지성(무한한 지성, 신 관념)
지성은 무한하지만 사유 속성의 양태일 뿐이므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속성이다.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에티카는 신의 지성에 대한 이중의 비판을 수행한다. 신의 지성은 가능태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한 지성의 위상은 세 명제 안에 들어있다. 1. 신은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2. 신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3. 신은 자신을 이해하고 만물을 이해하는 형식/형상을 생산한다. 이 세 가지 명제는 각자 나름대로 가능태는 없다는 것, 가능태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처럼 신은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능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 신은 자신의 본성 혹은 자신의 본질의 필연성을 이해할 뿐이고, 2) 자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이해하며, 3) 자기 자신과 사물들에 대한 그러한 이해를 필연적으로 생각한다. 이해를 생산한다는 것은 곧 관념=사유의 양태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명제가 내세우는 필연성은 같은 것이 아니며, 지성의 위상도 달라진다.
첫 번째 명제에 따르면 신은 실존하는 대로 생산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에게 자신을 이해하는 필연성은 실존하는 필연성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신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이해하며 (실체가 속성들에서 무한히 많은 사물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무한히 많은 관념들을 생산한다. 즉 신관념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관념들이 따라나온다. 그리고 실존 및 작용 역량과 동등한 사유 역량이 신 관념에 대응한다. 신의 본성에 대응하는 것이 실존 및 작용 역량이고 신 관념에 대응하는 것이 사유 역량이다.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은 동등하다.
이 특징들을, 세 번째 명제가 긍정하는 것처럼 단지 생산물일 뿐인 무한한 지성의 한낱 양태적인 존재와 어떻게 화해/양립시킬 것인가? 마치 무한한 지성이 많은 관념을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한한 지성 자체가 양태적 존재이다. 양태적 존재들이 양태를 생산한다? 겉으로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신 관념의 역량이 표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이, 같은 질서로, 같은 연관을 갖고 신 관념으로부터 신 안에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2부 명제 7 계) 신의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사물이고 각 속성들의 양태들이고 신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은 관념들이다. 따라서 속성들과 양태들을 표상하는 한에서 신 관념이 재현하는 것, 즉 신의 본성, 신의 본질과 신의 본질에서 따라나오는 것을 재현하는데 신 관념이 갖는 역량과 신 관념이 재현하는 것들이 갖는 역량은 동등하다.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이 동등하다. 그러나 만일 신 관념과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다른 모든 관념들 자체가 형상을 가지 않는다면[신 관념에서 따라 나오는 것들도 형상적 존재를 갖는다], 다시 말해 고유한 형상적 존재를 갖지 않는다면 그 “표상적” 역량은 잠재태로 머물 것이다. 이 경우, 신의 지성이 가능한 것들을 생각한다고 하는 주장과 다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신의 역량은 현실적이다. 형상을 가져야만 잠재태가 아니라 현행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관념의 이 형상적 존재는 사유 속성의 양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신 관념과 무한한 지성은 용어상으로 구별된다. 신 관념은 표상적 존재로 본 관념이고 무한한 지성은 같은 관념을 형상적 존재로 본 것이다. 형상적으로 보면 무한한 지성이고 표상적으로 보면 신 관념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분리를 할 수가 없다.
신 관념과 무한한 지성의 복합적 위상/지위 때문에 신 관념은 신 자체 혹은 실체만큼 통일성을 갖지만, 그 통일성을 양태들에 전달할 수 있다. 신 관념이 양태이므로 양태들과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부 명제 4[무한히 많은 것을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기게 하는 신의 관념은 오로지 유일할 수 있다. 증명 ; 무한한 지성은 신의 속성과 그것의 변용 이외의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은 유일하다. 그러므로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기는 신 관념은 오로지 유일할 수 있다]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복합적 위상 때문에 사유 속성은 여러 가지 특권을 갖는다. 신 관념은 한편으로 절대적 원리이고 다른 한편으로 양태다.
우리의 (유한한) 지성은 신의 지성의 일부로서 자신을 펼친다. 실제로 무한한 지성이 양태라는 것이 우리의 지성과 무한한 지성과의 일치/적합을 설명한다. 우리는 신에 대해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현재의 우리[‘우리가 그것인 바의 ~것’,‘~임’] 안에 함축된 속성들만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적합하며, 적합한 관념은 신 안에 있는 그대로 우리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 자체에 대해서 갖는 관념은, 우리가 그에 대해 인식하는 것의 경우에,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따라서 우리 인식의 절대적으로 적합한 특징은 단지 양태의 상태로 전락한 무한한 지성의 “가치하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포지티브한 근거는 속성들의 일의성에 있다.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들에서 하나의 동일한 형식만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과 무한한 지성은 둘 다 양태들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적으로 있는 그대로 해당 속성들을 표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관념은 적합한 인식에서 근본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신 관념의 역할은 먼저 공통개념과 연관된, 우리가 신 관념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파악되고(2종 인식), 그다음에는 우리가 그것의 일부분인 한에서 신 관념의 고유한 존재에서 파악된다(3종 인식). 즉 신 관념이 적합한 인식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역할은 먼저 공통개념과 연관된 2종 인식에서 파악되고, 나아가 3종 인식인 신 관념의 고유한 존재에서 파악된다.
▶ 정신과 신체(평행론)
에티카에서는 영혼 대신 정신이란 말을 주로 사용한다.
신체는 연장의 양태이고, 정신은 사유의 양태다. 개체는 본질을 갖기 때문에 개체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사유 양태들에서 일차적/근본적인 것, 즉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정신은 상응하는 신체에 대한 관념이다. 관념이 그것의 재현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이 사유 및 다른 관념들과 맺는 관계가, ‘우리가 그것인 바 신체’가 연장 및 다른 신체들과 맺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신체의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사유의 자율운동이 있다[정신적 자동기계]. 모든 것은 신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고, 사물이면서 동시에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체는 영혼을 갖는다. 관념의 재현/표상 능력은 이러한 대응에서 따라 나온다.
동일한 것이 ‘우리의 그것인 바 관념’에만 적용되지 않고 ‘우리가 갖는 관념’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은 우리가 적어도 즉각적으로 갖지 못하는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무한히 많은 다른 관념들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 안에 있는 관념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 즉 우리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이 변용 관념들에 의해서만 우리의 신체와 다른 신체들, 우리의 정신과 다른 정신들을 인식한다. 따라서 신체의 변용과 정신 안의 관념들 사이에 상응/대응이 있고 이 대응에서 관념들은 변용들을 재현한다.
이 대응 체계는 어디서 오는가? 배제되는 것은 신체와 정신 사이의 실재적 작용이다. 사유와 연장에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서만 있다. 실재적 인과성은 없다. 실재적 인과성의 독트린은 데카르트주의자에게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영혼이 신체에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 도덕적 비전과 반대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신체에서 능동인 모든 것이 영혼에서도 능동이고 영혼에서 수동인 모든 것은 신체에서도 수동이다.
정신과 신체 평행론은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평행론 일반의 기본적인 케이스다. 그러므로 심신평행론은 인식론적 평행론의 특수한 케이스다. 인식론적 평행론이 심신평행론보다 더 넓은 개념인 것이다. 왜냐면 정신은 사유의 양태, 신체는 연장의 양태인데, 이를 포함한 무한한 속성의 양태와 그에 대응하는 관념의 평행 관계가 있다는 게 인식론적 평행론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결과가 원인을 함축하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는 공리를 내세워 증명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사물도 그것을 존재케 하는 원인 없이는 인식될 수 없으므로 모든 관념에는 어떤 사물이 대응하며, (신은 자신의 본질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므로) 모든 사물에는 하나의 관념이 대응한다. 그러나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평행론은 단지 사유의 양태와 다른 속성의 양태 사이의 등가성, 동일성을 내포할 뿐이다. 그런데 평행론 증명 다음에는 반대로 존재론적 평행론이 이어진다. 첫 번째 평행론[인식론적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 안의 한 관념과 다른 어느 속성 안의 대상이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형성한다. 두 번째 평행론[존재론적 평행론]에 따르면 모든 속성들 안의 양태들은 하나의 동일한 변양을 형성한다. 이 둘의 차이를 취른하우스가 지적했다. 각 속성에서는 하나의 양태가 실체의 변양을 표현하는데 사유 속성에는 여러 양태 혹은 관념이 있어 어떤 것은 속성 A의 해당 양태를 표현하고 다른 것은 속성 B의 해당 양태를 표현한다. 정신은 어떤 변양을 표상하는데 그 변양은 단지 연장에서만이 아니라 무한히 많은 다른 속성의 양태들로 표현된다. 정신이 표현하는 변양/양태가 연장 속성만이 아니라 다른 속성의 양태들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은 왜 단지 연장에 의한 표현(인간 신체)만 지각하고 다른 속성에 의한 다른 모든 표현을 모르는가?
관념들의 이러한 증식은 1.외연상의 특권이다. 이것이 사유 속성의 유일한 특권이 아니다. 2. 반복상의 특권도 있다. 반복상의 특권은 의식을 구성하는 관념의 중복에 있다. 대상을 재현하는 관념 자체는 사유 속성 안에 형상적 존재를 갖고, 따라서 그것을 재현하는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되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이것은 관념이 있고 관념에 대한 관념이 있고 관념의 관념에 대한 관념이 있고 이렇게 계속 간다는 것이다. 첫 번째 특권은 사유 속성 안의 관념에는 A 속성의 양태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고 이 외의 다른 무한한 속성의 양태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는 데 있다. 두 번째 특권은 관념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볼 때 관념의 관념에 대한 관념이 계속 이어지면서 사유 속성 안에서 반복이라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에 있다. 3. 내포comprehension상의 특권이 있다. 사유 속성하의 실체의 한 양태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이 갖는 역량, 즉 실체 자체 및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할 수 있는 역량이 세 번째 특권이다. 사유 속성 안의 양태인 관념이 실체, 실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갓 양태가 실체와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체 및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할 수 있는 역량은 신 관념=무한한 지성의 역량을 의미한다.
사유 속성의 세 가지 특권들은 신 관념 혹은 무한한 지성의 복합적 위상에 기초한다/근거한다. 실제로 신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표상적으로 이해하지만,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있는 만큼 관념들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형상적 존재 안의 각 관념은 다시 다른 관념에 의해 표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특권들은 결코 평행론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 특권들은 오히려 평행론의 통합적 부분들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은 본질의 형상들과 실존의 힘으로서 모든 속성들의 상호 등등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평행론이 근거하는 동등성과 인식론적 동등성은 다른 동등성이다. 인식론적 평행론은 전혀 다른 동등성, 즉 형상적인 실존 역량과 표상적인 사유 역량이라는 두 역량의 동등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평행론에서 존재론적 평행론으로의 이행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여전히 신 관념이다. 왜냐하면 오직 신 관념에 의해서만 실체의 통일성이 양태들에 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행론의 최종 공식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동일한 변양이 각 속성 안의 양태에 의해 표현되고, 각 양태는 사유 속성에서 그 양태를 재현하는 관념과 함께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
평행론에서 사유 속성의 실질적인 특권들은 외관상의 단절과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외관상의 단절은 다음 두 종류다. 1. 실존 양태의 경우에 신체가 정신 연구를 위한 지도적 모델로 삼아지는 방식, 즉 신체가 정신을 연구하기 위한 모델이 되는 방식. 2. 양태의 본질의 경우에 신체와 관계가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정신이 배타적 모델로 삼아지는 방식. 즉 정신을 모델로 삼는 방식. 정신은 부분들로 합성된 매우 복합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이 단절들은 동일한 부분들에 관련되지 않는다. 신체 모델은 실존하는 신체를 함축하는 관념으로서의 정신에, 따라서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정신의 소멸하는 부분들에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갖는 변용-관념들에 적용된다. 변용 관념은 ‘우리가 갖는 관념’이다. 순수 정신 모델은 반대로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으로서의 정신에, 즉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에 따라서 지성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영원한 부분[본질의 영원성]에, 다시 말해 신 관념 및 다른 사물들에 대한 관념들과의 내적 관계에서 취해진,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에 적용된다. 이렇게 이해될 때, 단절은 단지 표면적일 뿐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정신에 비해 신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역량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해서 그것과 평행하게/나란하게 의식에서 빠져나가는 정신의 역량들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다. 즉 신체를 모델로 삼아 정신이 신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르며 정신과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의식을 내세워서 성급하게 신체에 대한 소위 말하는 “영혼”의 지배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에 역량들의 비교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 비교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을 먼저 신체에서 발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가 의식하는 것을 초과하는 것을 정신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도 신체에 비해 정신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개별적 본질이 있는 것처럼 신체의 개별적singular 본질이 있다. 개별적 본질은 유적 본질, 즉 인간 혹은 사자의 본질이 아니라 개개 신체의 본질을 의미힌다. 이 본질은 사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관념(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관념론도 없다. 스피노자는 단지, 인식론적 평행론의 공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양태의 본질은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에 의해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며, 우리로 하여금 이 본질을 그것의 원인에 의해 생각하게 하는 관념이 있다. 이것은 적합한 관념이고 공통개념과 연결된다.
7장 두 가지 역량과 신 관념(2)
- 어떤 조건에서 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긍정하는가? 이 질문은 인식론적 평행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속성과 실존 역량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던진 것이다. 바로 신이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갖는다는 조건에서다. 한편 신에 대해 사유 역량을 긍정하는 조건은 신이 사유 속성을 갖는다는 데 있다.
- 어떤 속성도 신에게 귀속되는 절대적 실존 역량을 비우지/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몇몇 속성으로 실존 역량 모두가 충족이 안 된다. 연장적이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으면서 실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신을 구성하는 무한한 많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 다른 속성도 있다는 것으로, 다른 속성으로도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 각각의 속성들은 무한하게 완전한 본질을 표현한다. 이 본질들은 형상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에 형상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속성들 각각의 존재적 형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형상적 본질이란 실존 및 작용 역량을 말한다. 반면 표상적 본질은 사유 역량을 말한다. 속성들 각각이 표현하는 형상적 본질들은 속성의 본질이 아니라 실체의 본질로서 하나의 동일한 실체의 본질로서 표현된다.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이고, 본질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실체 안에서 모두 동일시된다. 그래서 절대적 본질이라고 한다.
- 각각의 형상/형식은 절대자를 표현한다/전개한다. 절대자는 무한히 많은 형상들/속성들을 소유한다. 정확히 얘기하면 속성들이 표현한 본질들을 담고 있다. 신의 절대적 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이다. 첫 번째 역량,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은 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다. 실존 역량이 신의 본질과 동일한 것이라고 긍정하는 것은 무한히 많은속성들의 무한성이라는 조건에서다. 다시 말해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갖는다. 이 조건에서 실존 및 작용 역량과 신의 본질이 동일시될 수 있다. 이것이 속성들의 동등성 원리이다. 무한히 많은 속성들은 각각 어떤 특정한 본질을 표현하고 그것은 모두 신의 본질이고 절대자의 본질이고 속성들 각각은 동등하다. 속성들은 그것들이 조건짓는 실존 및 작용 역량과 관련해서(140쪽 번역오류) 동등하다.
- 사유 속성은 무한히 많은 속성의 하나로서 신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하고 사유 속성의 양태들은 대상에 대한 관념으로 대상과 항상 관계를 맺으므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 신은 자신을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형상적이 아닌 표상적으로 표현한다. 신의 본질은 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들에서는 형상적이고 신의 본성을 재현하는 관념에서는 표상적이다. 그래서 형상적 본질과 표상적 본질이 있다.
- 신의 본성을 필연적으로 재현하는 관념이 곧 신 관념이다. 신 관념은 무엇인가? 신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자 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념이다. 신 관념은 모든 속성들을 재현한다. 그래서 신 안에서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신 관념 안에서 표상적으로 구별된다. 무한한 속성으로 구성된 실체처럼 신 관념도 하나다. 표상적으로 구별되지만 신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신 관념도 하나다. 표상적 본질은 절대자의 두 번째 역량으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말한다. 첫 번째 역량=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이다. 실존은 항상 작용/행위[agir행동하다, 작용하다]와 붙어 다닌다. 사유 역량은 이해하는/인식하는 역량이라고도 한다. 표상적 본질인 사유 역량은 절대자의 두 번째 역량이다.
- 우리가 어떤 존재, 즉 신을 모든 사물의 원인/만물의 원인이로 설정/가정하면 신 관념은 모든 관념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신과 모든 사물과의 관계 및 신 관념과 모든 관념과의 관계는 같아진다. 이렇게 관계를 설정하면 문제가 생긴다. 신은 실체인데 신 관념은 양태다!? 관계상으로 보면 신 관념도 실체여야 하는데 실체가 아닌 것이 실체와 대등한 지위에 서버린다. 이 난점을 거짓 모순 혹은 의사모순이라고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역량논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신 관념의 복합적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
- 신의 본질은 형상적으로는 실존 역량이고 표상적으로는 사유 역량이다. 어떤 조건에서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긍정하느냐?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갖는다는 조건에서이다. 이번에는 다시 질문한다. 어떤 조건에서 신에게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긍정하느냐? 사유 속성은 무한히 많은 속성 중 하나다. 역량으로 가면 달라진다.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은 동등하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에 대한 대답은 신은 사유 속성을 가져야 하고, 사유 속성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유 속성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해서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귀속시킬 수 있다. 사유 역량은 사유 속성 외에 다른 조건을 갖지 않는다. 사유 역량의 조건에 대해, 혹은 신 관념의 가능성에 대해 스피노자가 물을 때가 있다. 사유 역량의 조건은 신 관념의 가능성과 같다. [테크닉컬한 표현이 반복되지만] 신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긍정한다고 하는 것은 곧 신은 혹은 신 관념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고 각각의 관념들=사유 속성의 양태들도 사유 역량을 갖는다. 그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사실은 우리는 인식 주체가 사유 역량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관념이 사유 역량을 갖는다. 관념에 대해서 사유 역량을 긍정한다. 어떤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 관념에 상응하는 사유역량/인식 역량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헤매는 지점은 우리는 인식을 인식 주체의 활동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17세기 고전주의 철학에는 관념의 자기 긍정이 있다. 정신 안에서 관념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즉 관념이 사유 역량 또는 인식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다.
- 또 하나 구별할 것은 ‘우리가 가지는 관념’이 있고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양태로서의 인간들의 신체/물체corps이면서 영혼이고 사물chose=thnig이면서 관념이다. 실체가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무한히 많은 사물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때 속성들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사물이다. 관념도 어떤 면에서는 사물이다. 형상적으로 보면 사물이고 표상적으로 보면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idée que nous sommes/thing that we are/우리는 ~~이다]은 사물인 동시에 관념이고 신체인 동시에 영혼/정신이다. 여기서 관념은 곧 영혼/정신이다. 이때 관념은 무한히 많은 관념들로 합성된 복합 관념이다. 우리의 신체가 무한히 많은 작은 신체로 합성된 복합신체인 것처럼 우리의 정신/영혼은 하나의 관념인데, 이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관념은 무한히 많은 관념들로 합성되어 있다. 그래서 관념들의 다발이라고 한다.
- 우리는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사유 속성, 연장 속성, 즉 연장적 실존과 사유적 실존 외에 다른 실존도 가능하다. 그런데 인식으로 넘어가면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인식될 수 없다. 사유 속성이 사유 역량을 커버한다. 한편 실존 역량을 커버하려면 무한히 많은 속성이 필요하다.
- ‘우리가 갖는 관념’은 우리에게 일어난 것, 일어난 일에 대한 관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affection에 대한 관념이다. 결과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신 안에 있는 그대로의 관념이다. 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관념, 즉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우리가~이다]은 우리의 본질에 대한 관념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과/변용에 대한 인식만 갖는다.
-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은 동등하다. 사유 역량이 우위에 있지 않다. 사유 속성과 그 나머지 속성들끼리도 동등하다. 그런데 사유 속성의 경우에는 다른 속성들과 다르다. 형상적 본질만이 아니라 표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이처럼 무한히 많은 관념들이 중복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은 ‘무한’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의 차원에서는 더 많고 덜 많고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우주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로 구성된다. 그에 상응하는 무한히 큰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무한히 작은 관념들로 구성된다. 내재라는 것은 어떤 신체나 물체가 전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어떤 관념도 전 우주에 상응하는 무한한 관념의 일부로서 바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재성은 초월자를 상정하기 않는 개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지 않는 순수한 본질은 없다. 또한 데카르트처럼 정신적 실체가 육체적 실체가 우월하다고 하는 식의 주장도 스피노자에게는 없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이 있고 정신적 실체들이 있고 물체적 실체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위계가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모든 속성들은 동등하다.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설계는 종전의 위계적인 세계관을 깨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 사유 역량의 특수한 지위는 미스테리로 해결이 쉽지 않다. 들뢰즈도 이 난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하지 않으면 불가해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가령 ‘신의 복합적 지위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식론적 평행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의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또한 들뢰즈는 자주 “논쟁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한다. 철학은 논쟁이 아니라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solution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다.
- 사유 속성만으로 사유 역량의 조건이 된다. 성급하게 스피노자주의가 비일관적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가지 동등성 원리를 혼돈할 때만 비일관적으로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속성들의 동등성,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동등성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비일관성으로 보였던 것이 일관성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사유 속성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두 번째 역량, 즉 사유 역량과 관련해서다. 사유 역량은 모든 속성들이 조건짓는 역량=실존 역량과 동등한 역량이다. 사유 속성은 혼자서 사유 역량을 감당한다. 여기서 모순도 없고 궁극적 사실이 있다.
- 사유 속성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모순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속성들의 등등성을 상정하고 그 다음 동등성에 반하는 능력과 기능을 사유 속성에 부여했다면 모순이 된다. 사유 역량이 속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유 속성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했다면 모순이 된다. 하지만 다른 영역인 역량으로 넘어오면 달라진다. 정리하자면, 속성들이 동등하다. 사유 속성은 그것의 일부다. 그리고 속성들의 동등성의 영역이 아닌 역량의 영역에는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만 있고 둘은 동등하다.
- 사유속성과 사유 역량의 관계와 모든 속성과 실존 역량의 관계는 같다. 다시 말해 사유 역량의 조건은 사유 속성이고 실존 역량의 조건은 모든 속성들이다.
- 사유 역량과 사유 속성의 관계에서 세 가지 귀결이 나온다. 1) 사유 역량은 표상적인 모든 것, 즉 관념에 대해서 긍정된다. 모든 관념은 일정 정도의 사유 역량을 가진다.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신의 절대적 사유 역량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을 분유한다.
- 신 관념은 사유의 양태일 뿐이고 소산적 자연의 일부다. 신 관념도 관념이므로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 형상적 존재다. 속성 안의 존재가 형상적 존재다. 또한 관념은 일단 어떤 대상의 관념이므로 표상적 존재이기도 하다. 사물 자체로서 존재가 형상적 존재인데 관념도 사물로 보므로 형상적 존재다[être있다/없다가 아니라 ~이므로 있다, ~임의 의미를 갖는다].
▶모든 관념에 어떤 사물이 대응한다. 모든 사물에 어떤 관념이 대응한다.
- 관념에 대응하는 어떤 사물이 다른 속성들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물에 대응하는 어떤 관념이 있다. 관념도 무한히 많은 속성의 양태 중 하나이므로 관념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 관념의 관념은 어떤 관념에 대한 관념이고 그것이 의식이다. 관념과 대상의 관계는 관념의 관념과 관념의 관계와 같다. 관념과 대상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관념의 관념과 관념의 관계도 동일하므로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 사이에는 사고상의 구별만 있다. 동일한 것의 표현이다. 연장속성, 사유속성만 놓고 보면 연장속성의 양태인 물체와 사유 속성의 양태인 관념 간에는 형상적 구별이 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인데 이름만 다르다. 연장 속성으로는 물체이고 사유 속성은 관념이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의 관계도 이와 같다.
- 물체a, 물체b..와 이에 대응하는 관념 a, 관념 b....는 수적으로 구별되지만 물체 a와 관념 a는 형상적으로 구별된다. 관념과 관념의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 있다. 양자는 신체와 관념의 관계와 같으며 사고상으로만 구별된다.
- 우리는 인식을 주체의 활동으로만 생각한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념이 있고 관념이 가지는 사유 역량이 있다. 데카르트는 인식 주체를 발견하나 끝까지 밀고가지 못했다. 데카르트를 이어받은 것은 칸트다. 들뢰즈는 데카르트를 고전주의 시대에 완전하게 편입시키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스콜라 철학과 고전주의에 각각 한발을 걸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유의 잔재가 있다. 유비, 고차성 등등의 개념을 갖다 썼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엇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감각적 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을 감각할 때 내 손이 불과 같은 색깔로 바뀐다. 인식과 인식된 것과 인식하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 신 안에 있는 그대로의 관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서 빠져 나간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그 영향을 받아서 생긴 어떤 흔적, 자국, affection, 이미지, 기호만을 인식한다. 그래서 원인과 분리된 결과에 대한 인식/부적합한 인식만을 갖는다. 그 결과에 대한 인식 안에 원인에 대한 포지티브한 면이 함축되어 있다. 그 함축된 면을 찾아내는 게 2종 인식이다. 우리가 태양이 200미터 거리에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은 태양이 우리 신체에 미친 영향의 결과다. 우리에게는 이것에 대한 인식만 가능하다.
들뢰즈, 『스피노자, 실천철학』 4장 개념 색인
▶ 지성(무한한 지성, 신 관념)
지성은 무한하지만 사유 속성의 양태일 뿐이므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속성이다.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에티카는 신의 지성에 대한 이중의 비판을 수행한다. 신의 지성은 가능태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한 지성의 위상은 세 명제 안에 들어있다. 1. 신은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2. 신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3. 신은 자신을 이해하고 만물을 이해하는 형식/형상을 생산한다. 이 세 가지 명제는 각자 나름대로 가능태는 없다는 것, 가능태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처럼 신은 자신의 지성 안에서 가능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 신은 자신의 본성 혹은 자신의 본질의 필연성을 이해할 뿐이고, 2) 자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이해하며, 3) 자기 자신과 사물들에 대한 그러한 이해를 필연적으로 생각한다. 이해를 생산한다는 것은 곧 관념=사유의 양태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명제가 내세우는 필연성은 같은 것이 아니며, 지성의 위상도 달라진다.
첫 번째 명제에 따르면 신은 실존하는 대로 생산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에게 자신을 이해하는 필연성은 실존하는 필연성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신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이해하며 (실체가 속성들에서 무한히 많은 사물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무한히 많은 관념들을 생산한다. 즉 신관념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관념들이 따라나온다. 그리고 실존 및 작용 역량과 동등한 사유 역량이 신 관념에 대응한다. 신의 본성에 대응하는 것이 실존 및 작용 역량이고 신 관념에 대응하는 것이 사유 역량이다.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은 동등하다.
이 특징들을, 세 번째 명제가 긍정하는 것처럼 단지 생산물일 뿐인 무한한 지성의 한낱 양태적인 존재와 어떻게 화해/양립시킬 것인가? 마치 무한한 지성이 많은 관념을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한한 지성 자체가 양태적 존재이다. 양태적 존재들이 양태를 생산한다? 겉으로 보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대답은 신 관념의 역량이 표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이, 같은 질서로, 같은 연관을 갖고 신 관념으로부터 신 안에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2부 명제 7 계) 신의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사물이고 각 속성들의 양태들이고 신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은 관념들이다. 따라서 속성들과 양태들을 표상하는 한에서 신 관념이 재현하는 것, 즉 신의 본성, 신의 본질과 신의 본질에서 따라나오는 것을 재현하는데 신 관념이 갖는 역량과 신 관념이 재현하는 것들이 갖는 역량은 동등하다.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이 동등하다. 그러나 만일 신 관념과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다른 모든 관념들 자체가 형상을 가지 않는다면[신 관념에서 따라 나오는 것들도 형상적 존재를 갖는다], 다시 말해 고유한 형상적 존재를 갖지 않는다면 그 “표상적” 역량은 잠재태로 머물 것이다. 이 경우, 신의 지성이 가능한 것들을 생각한다고 하는 주장과 다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신의 역량은 현실적이다. 형상을 가져야만 잠재태가 아니라 현행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관념의 이 형상적 존재는 사유 속성의 양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신 관념과 무한한 지성은 용어상으로 구별된다. 신 관념은 표상적 존재로 본 관념이고 무한한 지성은 같은 관념을 형상적 존재로 본 것이다. 형상적으로 보면 무한한 지성이고 표상적으로 보면 신 관념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분리를 할 수가 없다.
신 관념과 무한한 지성의 복합적 위상/지위 때문에 신 관념은 신 자체 혹은 실체만큼 통일성을 갖지만, 그 통일성을 양태들에 전달할 수 있다. 신 관념이 양태이므로 양태들과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부 명제 4[무한히 많은 것을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기게 하는 신의 관념은 오로지 유일할 수 있다. 증명 ; 무한한 지성은 신의 속성과 그것의 변용 이외의 어떤 것도 파악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은 유일하다. 그러므로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기는 신 관념은 오로지 유일할 수 있다]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복합적 위상 때문에 사유 속성은 여러 가지 특권을 갖는다. 신 관념은 한편으로 절대적 원리이고 다른 한편으로 양태다.
우리의 (유한한) 지성은 신의 지성의 일부로서 자신을 펼친다. 실제로 무한한 지성이 양태라는 것이 우리의 지성과 무한한 지성과의 일치/적합을 설명한다. 우리는 신에 대해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현재의 우리[‘우리가 그것인 바의 ~것’,‘~임’] 안에 함축된 속성들만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적합하며, 적합한 관념은 신 안에 있는 그대로 우리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 자체에 대해서 갖는 관념은, 우리가 그에 대해 인식하는 것의 경우에, 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관념이다. 따라서 우리 인식의 절대적으로 적합한 특징은 단지 양태의 상태로 전락한 무한한 지성의 “가치하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포지티브한 근거는 속성들의 일의성에 있다.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들에서 하나의 동일한 형식만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과 무한한 지성은 둘 다 양태들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적으로 있는 그대로 해당 속성들을 표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관념은 적합한 인식에서 근본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신 관념의 역할은 먼저 공통개념과 연관된, 우리가 신 관념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파악되고(2종 인식), 그다음에는 우리가 그것의 일부분인 한에서 신 관념의 고유한 존재에서 파악된다(3종 인식). 즉 신 관념이 적합한 인식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역할은 먼저 공통개념과 연관된 2종 인식에서 파악되고, 나아가 3종 인식인 신 관념의 고유한 존재에서 파악된다.
▶ 정신과 신체(평행론)
에티카에서는 영혼 대신 정신이란 말을 주로 사용한다.
신체는 연장의 양태이고, 정신은 사유의 양태다. 개체는 본질을 갖기 때문에 개체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사유 양태들에서 일차적/근본적인 것, 즉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정신은 상응하는 신체에 대한 관념이다. 관념이 그것의 재현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이 사유 및 다른 관념들과 맺는 관계가, ‘우리가 그것인 바 신체’가 연장 및 다른 신체들과 맺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신체의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사유의 자율운동이 있다[정신적 자동기계]. 모든 것은 신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이고, 사물이면서 동시에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체는 영혼을 갖는다. 관념의 재현/표상 능력은 이러한 대응에서 따라 나온다.
동일한 것이 ‘우리의 그것인 바 관념’에만 적용되지 않고 ‘우리가 갖는 관념’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은 우리가 적어도 즉각적으로 갖지 못하는 관념이다.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은 무한히 많은 다른 관념들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의 신 안에 있는 관념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우리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 즉 우리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이 변용 관념들에 의해서만 우리의 신체와 다른 신체들, 우리의 정신과 다른 정신들을 인식한다. 따라서 신체의 변용과 정신 안의 관념들 사이에 상응/대응이 있고 이 대응에서 관념들은 변용들을 재현한다.
이 대응 체계는 어디서 오는가? 배제되는 것은 신체와 정신 사이의 실재적 작용이다. 사유와 연장에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서만 있다. 실재적 인과성은 없다. 실재적 인과성의 독트린은 데카르트주의자에게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영혼이 신체에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 도덕적 비전과 반대로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신체에서 능동인 모든 것이 영혼에서도 능동이고 영혼에서 수동인 모든 것은 신체에서도 수동이다.
정신과 신체 평행론은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평행론 일반의 기본적인 케이스다. 그러므로 심신평행론은 인식론적 평행론의 특수한 케이스다. 인식론적 평행론이 심신평행론보다 더 넓은 개념인 것이다. 왜냐면 정신은 사유의 양태, 신체는 연장의 양태인데, 이를 포함한 무한한 속성의 양태와 그에 대응하는 관념의 평행 관계가 있다는 게 인식론적 평행론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결과가 원인을 함축하는 것처럼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는 공리를 내세워 증명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사물도 그것을 존재케 하는 원인 없이는 인식될 수 없으므로 모든 관념에는 어떤 사물이 대응하며, (신은 자신의 본질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므로) 모든 사물에는 하나의 관념이 대응한다. 그러나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평행론은 단지 사유의 양태와 다른 속성의 양태 사이의 등가성, 동일성을 내포할 뿐이다. 그런데 평행론 증명 다음에는 반대로 존재론적 평행론이 이어진다. 첫 번째 평행론[인식론적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 안의 한 관념과 다른 어느 속성 안의 대상이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형성한다. 두 번째 평행론[존재론적 평행론]에 따르면 모든 속성들 안의 양태들은 하나의 동일한 변양을 형성한다. 이 둘의 차이를 취른하우스가 지적했다. 각 속성에서는 하나의 양태가 실체의 변양을 표현하는데 사유 속성에는 여러 양태 혹은 관념이 있어 어떤 것은 속성 A의 해당 양태를 표현하고 다른 것은 속성 B의 해당 양태를 표현한다. 정신은 어떤 변양을 표상하는데 그 변양은 단지 연장에서만이 아니라 무한히 많은 다른 속성의 양태들로 표현된다. 정신이 표현하는 변양/양태가 연장 속성만이 아니라 다른 속성의 양태들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은 왜 단지 연장에 의한 표현(인간 신체)만 지각하고 다른 속성에 의한 다른 모든 표현을 모르는가?
관념들의 이러한 증식은 1.외연상의 특권이다. 이것이 사유 속성의 유일한 특권이 아니다. 2. 반복상의 특권도 있다. 반복상의 특권은 의식을 구성하는 관념의 중복에 있다. 대상을 재현하는 관념 자체는 사유 속성 안에 형상적 존재를 갖고, 따라서 그것을 재현하는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되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이것은 관념이 있고 관념에 대한 관념이 있고 관념의 관념에 대한 관념이 있고 이렇게 계속 간다는 것이다. 첫 번째 특권은 사유 속성 안의 관념에는 A 속성의 양태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고 이 외의 다른 무한한 속성의 양태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는 데 있다. 두 번째 특권은 관념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라고 볼 때 관념의 관념에 대한 관념이 계속 이어지면서 사유 속성 안에서 반복이라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에 있다. 3. 내포comprehension상의 특권이 있다. 사유 속성하의 실체의 한 양태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이 갖는 역량, 즉 실체 자체 및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할 수 있는 역량이 세 번째 특권이다. 사유 속성 안의 양태인 관념이 실체, 실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갓 양태가 실체와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재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체 및 실체의 속성들을 표상할 수 있는 역량은 신 관념=무한한 지성의 역량을 의미한다.
사유 속성의 세 가지 특권들은 신 관념 혹은 무한한 지성의 복합적 위상에 기초한다/근거한다. 실제로 신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표상적으로 이해하지만,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있는 만큼 관념들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형상적 존재 안의 각 관념은 다시 다른 관념에 의해 표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특권들은 결코 평행론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 특권들은 오히려 평행론의 통합적 부분들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평행론은 본질의 형상들과 실존의 힘으로서 모든 속성들의 상호 등등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평행론이 근거하는 동등성과 인식론적 동등성은 다른 동등성이다. 인식론적 평행론은 전혀 다른 동등성, 즉 형상적인 실존 역량과 표상적인 사유 역량이라는 두 역량의 동등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평행론에서 존재론적 평행론으로의 이행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여전히 신 관념이다. 왜냐하면 오직 신 관념에 의해서만 실체의 통일성이 양태들에 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행론의 최종 공식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동일한 변양이 각 속성 안의 양태에 의해 표현되고, 각 양태는 사유 속성에서 그 양태를 재현하는 관념과 함께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
평행론에서 사유 속성의 실질적인 특권들은 외관상의 단절과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외관상의 단절은 다음 두 종류다. 1. 실존 양태의 경우에 신체가 정신 연구를 위한 지도적 모델로 삼아지는 방식, 즉 신체가 정신을 연구하기 위한 모델이 되는 방식. 2. 양태의 본질의 경우에 신체와 관계가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정신이 배타적 모델로 삼아지는 방식. 즉 정신을 모델로 삼는 방식. 정신은 부분들로 합성된 매우 복합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이 단절들은 동일한 부분들에 관련되지 않는다. 신체 모델은 실존하는 신체를 함축하는 관념으로서의 정신에, 따라서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정신의 소멸하는 부분들에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갖는 변용-관념들에 적용된다. 변용 관념은 ‘우리가 갖는 관념’이다. 순수 정신 모델은 반대로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으로서의 정신에, 즉 ‘우리가 그것인 바의 관념’에 따라서 지성이라고 불리는 정신의 영원한 부분[본질의 영원성]에, 다시 말해 신 관념 및 다른 사물들에 대한 관념들과의 내적 관계에서 취해진, ‘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에 적용된다. 이렇게 이해될 때, 단절은 단지 표면적일 뿐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정신에 비해 신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역량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해서 그것과 평행하게/나란하게 의식에서 빠져나가는 정신의 역량들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다. 즉 신체를 모델로 삼아 정신이 신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르며 정신과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의식을 내세워서 성급하게 신체에 대한 소위 말하는 “영혼”의 지배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에 역량들의 비교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 비교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을 먼저 신체에서 발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가 의식하는 것을 초과하는 것을 정신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도 신체에 비해 정신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개별적 본질이 있는 것처럼 신체의 개별적singular 본질이 있다. 개별적 본질은 유적 본질, 즉 인간 혹은 사자의 본질이 아니라 개개 신체의 본질을 의미힌다. 이 본질은 사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관념(우리가 그것인 바 관념)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관념론도 없다. 스피노자는 단지, 인식론적 평행론의 공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양태의 본질은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에 의해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체의 본질을 표현하며, 우리로 하여금 이 본질을 그것의 원인에 의해 생각하게 하는 관념이 있다. 이것은 적합한 관념이고 공통개념과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