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note[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20201009

권순모
2020-10-14
조회수 328

10/9

 

7장 두 가지 역량과 신 관념

 

▶ 『에티카』 2부 정리7이 제기하는 문제

 

- 정리[명제]7 : 관념의 질서와 결합[연관, 연결connection]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이고 이것을 스피노자는 ‘결과로서 생긴 모든 사물의 관념은 그 결과를 생기게 한 원인의 인식에 의존한다.’로 증명한다. 그리고 따름정리[보충명제]에 따르면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행위/작용 역량과 동일하다[동등하다]. 신의 무한한 본성에서 형상적으로 생기는 모든 것은 신의 관념에서 표상적으로 생긴다.’

- 주석 :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동일한 실체다. 그것은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때로는 저런 속성으로 파악된다. 연장의 양태와 이[=사유] 양태의 관념은 동일한 것이며, 단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 우리들이 자연을 연장 속성에서 생각하든 사유 속성에서 생각하든 아니면 어떤 다른 속성에서 생각하든, 우리는 하나의 ① 동일한 질서 즉 ②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결/연관/결합, 다시 말해 ③계기하는 동일한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

→ 3중의 동일성 : ① 질서의 동일성 ② 연관의 동일성, 원리의 동등성 ③ 존재론적 동일성

: 『에티카』에서는 ①,②,③이 ‘즉’, ‘다시 말해’로 연결되어 있어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3중의 동일성은 긍정하나 모든 속성에서 동일한 변양을 표현하는 양태들 간의 동일성은 긍정하지 않는다고 본다(131).

이어진 주석은 다음과 같다. ‘① 사물이 사유의 양태로 고찰되는 한 전체 자연의 질서나 원인의 연결은 오직 사유 속성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사물이 연장의 양태로 고찰되는 한 전체 자연의 질서는 연장 속성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② 나는 다른 속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① 인식론적 평행론, ② 존재론적 평행론

: 사물과 관념이 대응한다. 사물은 어떤/특정한 속성의 양태이고, 관념은 사유 속성의 양태인데 이것들이 서로 대응한다.[→인식론적 평행론], 그리고는 인식론적 평행론을 일반화, 즉 확대 적용시켜 ‘다른 속성도 마찬가지다’라는 존재론적 평행론으로 나아간다.

⇒ 여기서 ‘왜 인식론적 평행론을 경유해 존재론적 평행론으로 나아가는가’, 즉 1) ‘왜 곧바로 존재론적 평행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와 함께 2) ‘두 가지 평행론이 양립 가능하냐?’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 심신평행론, 인식론적 평행론, 존재론적 평행론

 

- 심신평행론 : 정신은 사유 속성의 양태이고, 신체는 연장 속성의 양태로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다.

- 인식론적 평행론 : 어떤 속성이든 상관없이[연장 속성이 아니더라도] 그 속성의 양태와 사유 속성의 양태는 대응한다.

- 존재론적 평행론 : 사유 속성의 양태를 포함한 모든 속성의 양태는 동일하다.

 

 

▶ ‘두 가지 평행론이 양립 가능하냐?’의 문제

 

신=실체―속성―양태

                              A ― a ― 관념 a’

                              B ― b ― 관념 b’

                              C ― c ― 관념 c’

                              D ― d ― 관념 d’

                              ⋮     ⋮        ⋮

                                사유 ― 관념

 

- 실체=자신을 표현, 속성=표현, 본질=표현된 것

- 속성=자신을 표현, 양태=표현, 변양=표현된 것

 

- 속성 A, B, C, D…가 있을 때, 그것의 양태인 a, b, c, d…는 실체의 변양, 즉 하나의 동일한 변양의 표현이다. 하나의 변양이 속성에 따라 달라지면서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양태 a, b, c, d…는 동일하고 존재론적으로 하나이고 속성상으로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유 속성이 나오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면 a의 관념a’이 있고 b의 관념b’가 있고 c의 관념c’가 있다. d의 관념d’가 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관념을 같은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속성의 양태와 사유 속성 양태인 관념이 대응한다고 하면 무한히 많은 속성의 양태 각각에 대응하는 관념들이 계속 생겨야 한다. 그러면 원리의 동등성이 깨진다. 하지만 존재론적 평행론에 따르면, 즉 모든 속성은 동등하다고 했으므로 사유 속성과 다른 속성은 동등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취른하우스는 ‘무한한 속성이 있다고 하면서 사유 속성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게 분명한데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 어떤 속성의 양태가 주어지면 사유 속성의 한 관념이 그것에 대응한다. 인식론적 평행론은 상이한 속성의 모든 양태에 의해 표현된 변양의 통일성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특성 속성의 양태와 오로지 그 양태만을 재현하는 관념에 의해 형성된 개체의 단순한 통일성으로 인도한다. 여기서 개체는 어떤 속성의 양태와 양태를 재현하는 관념을 묶어 가리키는 말이다. 신체라고 하지 않고 개체라고 한 이유는 신체는 심신평행론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사물을 합친 것 또한 개체라고 한다.

 

- 인식론적 관점에 따르면 하나의 동일한 개체가 특정[속성의] 양태에 의해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관념에 의해 표현된다. 존재론적 관점에 따르면 단 하나의 동일 변양이 속성을 달리하는 모든 대응 양태들에 의해 표현된다. 사유 속성의 양태와 그에 대응하는 다른 속성의 양태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표현한다. 사유속성은 상이한 속성들의 양태들의 수만큼의 서로 환원불가능한 관념들을 가져야 하고, 나아가 속성들의 수만큼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이 특권은 존재론적 평행론의 모든 요구들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들뢰즈는 이것을 의사 pseudo 모순일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난제를 역량[사유 역량] 문제로 풀어간다. 실존 및 작용 역량과 사유 역량은 동등하고 또한 속성의 동등성 원리와 역량의 동등성 원리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신관념

 

- 정리 7 사물의 질서와 연결=관념의 질서와 연결의 근거로 ‘결과의 인식은 원인의 인식에 의존한다’를 제시한다. 여기서 결과와 원인은 무엇인가? 스피노자 이전에는 원인은 사물로, 결과는 관념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관념을 갖게 된 것은 그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결과가 관념이고 원인이 신 관념이라면 이것을 그대로 대응시켜 어떤 사물이 있으면 원인은 신이 된다.

 

- 결과의 인식은 원인의 인식에 의존한다[인식을 함축한다.]

                    결과      원인

                      │          │

                    관념    신관념

                     사물       신

 

- 신관념은 사유 속성의 양태다. 신에게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귀속시킬 때, 즉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귀속시키는 조건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다. 무한히 많은 속성들이 있기 때문에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가진다. 그런데 사유 역량을 귀속시킬 때는 사유 속성만을 가지고 귀속시킨다. 이 때 신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갖는 조건은 사유 속성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에 대응하는 관념은 신관념이다.

 

- 신관념은 하나의 (직접무한) 양태로서 사유 속성에 속한다. 양태이지만 지위가 다른 양태와 다르다. 왜 문제가 되냐면 우리가 실존 역량을 귀속시킬 때는 무한한 속성들이 있다는 게 조건이 된다. 그런데 사유 역량을 신에게 귀속시킬 때는 사유 속성만 가지고 이야기한다. 신의 표상적 본질과 형상적 본질이 있다. 형상적 본질은 무한한 속성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표상적 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사유 역량인데 이것은 사유속성에 의해서만 조건지어진다.

 

- 무한한 지성은 신관념의 형상적 존재다. 여기서 관념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의 양태 중 하나로서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다.

 

▶ 정신적 자동기계

 

-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인식하는 것은 원인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다]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 모든 관념에는 어떤 사물이 대응한다. 2) 관념들의 질서는 사물들의 질서와 동일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 결론을 원인의 인식과 결과의 인식이라는 공리에 의해 설명하고자 한다. 원인의 인식과 결과의 인식은 8장에 자세히 나온다. 인식하는 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역량을 인식하는 것이다.

 

- 정신적 자동장치는 쉽게 말하면 어떤 관념의 원인은 다른 관념이고 어떤 사물의 원인은 다른 사물이라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의 양태이므로 그 원인은 사유 속성에 있다. 즉 관념의 원인은 다른 관념, 즉 신관념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이든 관념의 대상의 원인은 해당 속성에 있다. 물체이면 연장 속성 안의 다른 물체, 특정 속성의 양태는 그 속성 안의 다른 양태에 원인이 있다. 또한 근접 원인은 다른 양태이고 원격 원인, 즉 근본적인 원인은 신이다. 바로 이 점, 정신적 자동장치에서 스피노자의 관점은 고대 전통과 갈라진다.

 

- 스피노자에게서는 관념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에 인과성이 배제된다. 관념이 사물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사물이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체가 움직이는 원인이 정신에 있다고 본다. 관념이 사물의 원인이고 사유 속성의 양태인 관념이 연장 속성의 양태인 물체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인과성을 배제하고 관념의 원인은 오로지 관념인 것으로 본다.


- 평행론의 실천적 의의는 14,15장에 나온다. 들뢰즈는 평행론의 실천적 의의로서 정신에서 능동이면 신체에서도 능동(작용action)이고 신체가 수동이면 정신도 수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들뢰즈는 양태, 속성보다는 실재적 구별과 형상적 구별에 대핸 자주 언급한다. 전통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을 대립으로 설명한다. ‘찬 것과 뜨거운 것, 사랑과 미움. 대립 중에서 가장 큰 대립은 무엇인가 등등..’ 그런데 17세기 사유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대립이 아닌 다양성, 대립이 아닌 구별을 중시하는 데 있다. 실재적 구별은 데카르트가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썼다.

 

▶ 원인에 대한 인식

 

평행론의 제1요소 : 관념이 사물에 대응한다.

평행론의 제2요소 : 사물에 관념이 대응한다.[관념들과 사물들이 동일한 연결을 가지려면 모든 사물에 관념이 하나씩 대응되어야 한다.]

 

- 『소론』에 두가지 공식이 있다. 1) 대응하는 사물이 있지 않으면 어떤 관념도 존재할 수 없다. 2) 사유하는 존재 안에 관념이 없는 사물은 없다. 즉 모든 사물의 관념은 사유자 안에 있다. 관념이 없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다. 사물이 있고 사물에 대한 관념이 사유자 안에 있다.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모든 관념은 사유하는 존재 안에 있다. 여기서 사유하는 자는 신일 수도 있다. 원에 대한 실질적real 정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신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에게는 있다. 그것이 원인에 대한 인식이다

 

▶ 17세기의 보편적 사유의 ‘흐름’에 대한 인식

 

- 17세기에는 개개의 관념을 상정하지 않고 흘러가는 관념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누구의 관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체를 구성하는 작은 신체, 그 작은 신체를 구성하는 더 작은 신체,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결국 무한히 가장 작은 신체에 이른다. 관념 역시 관념을 구성하는 더 작은 관념,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결국 무한히 가장 작은 관념에 이른다. 거기에는 가장 단순한 신체, 가장 단순한 관념이 있다. 즉 미분적 관념과 미분적 신체가 대응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작은 신체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결합해서 확장되면 전 우주라는 신체에 도달한다. 관념도 역시 무한히 많은 작은 관념들을 합치면 전 우주의 관념, 즉 신의 관념이 된다. 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작은 신체들은 계속 운동한다. 우리가 지각 못해도 나의 관념을 구성하는 무한히 작은 관념들도 계속 운동한다.

 

- 이와 같은 17세기 사유는 칸트 이후의 그것과 다르다. 푸코의 경우도 칸트 이전의 사유로 돌아간 셈인데, 푸코는 ‘on[부정대명사, 사람들]’을 중시하는데 ‘on meurt’라고 하며 죽음은 어떤 사람이 고유명사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간다’는 걸 의미한다고 보았다.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 역시 죽음의 행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작은 신체들이 끊임없이 죽고 그러한 죽음이 이어지다 보면 생명도 끝난다는 것이다. 비샤(Bichat, 19세기초에 활약한 의사,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에 반대한 생리학자)는 생명을 죽음에 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사유는 고대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어느 찰나에 죽음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엔트로피 법칙(모든 현상은 항상 전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보다 더 무질서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과도 연결된다.

 

- 칸트 이후 포스트 칸트주의자(셸링, 피히테, 헤겔....) 중에도 칸트가 구축한 체계를 비판하면서 17세기의 라이프니츠를 끌어 온 이들이 있다. 17세기의 사유를 통칭해서 고전주의적 사유라고 하는데 들뢰즈는 그것을 ‘무한에서 출발하는 innocent한 사유방식’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신에 대한 믿음/무한에 대한 믿음과 연관되면서 근대적인 칸트가 정립한 주체 개념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innocent’는 메를르 퐁티가 제시한 개념으로 들뢰즈가 자주 사용한다.

 

▶ 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산하는 것이다.

 

-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 것으로 파악되는 것으로부터 특성들을 연역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는 우리가 아는 일상적 의미의 이해가 아니고 특성들의 연역을 뜻한다. 원의 발생적 정의처럼 신이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이 자신을 이해한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신의 지성 안에 들어오는 무한히 많은 특성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그 결과로 신의 지성에 들어가는 무한히 많은 특성들이 따라 나온다./생겨난다.

 

- 신이 자신의 본질을 이해함에 따라 본질에서 따라나오는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생산한다. 신은 자신의 본질에서 따라 나오는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생산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즉 자기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생산할 수밖에 없다. 즉 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산하는 것이다. 신은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이 무한히 많은 것을 생산할 때 속성의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이 줄줄이 생긴다.

 

▶ 역량 논변으로 : 신 안의 동등한 두 역량

 

- 1) 신은 자신을 이해한다. 2) 자신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3) 무한한 지성을 소유한다[1), 2), 3)은 동어반복] 신은 생산하기 위해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생산하면서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신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생산하는 한에서, 신이 생산하는 모든 것은 신의 무한한 지성 안으로 “들어온다[tomber, 안으로 떨어진다]”. 1) 신이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 본질에서 파생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즉, 신이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곧 그 자신의 본질에서 파생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2)무한한 지성은 신의 속성들을 이해한다[comprendre]. 무한 지성은 어떤 것에 대해 관념을 갖는다. 신의 속성을 이해할 뿐 아니라 신의 변용도 이해한다. 신의 변용, 실체의 변용은 양태이다. 모든 양태들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3) 신이 형성하는 관념, 신이 가지는 관념은 신 자신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면서 또한 속성들에게 형성되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

 

- 신은 자신이 이해한다는 것과 관념을 형성한 무한한 지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신은 자신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즉 자신의 본질에 대한 관념을 가지면서 동시에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이것이 무한한 지성이 갖는 관념이고 그것이 신관념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있는 만큼 사물들의 수만큼 관념들이 존재한다.

 

- 신적 실체에서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사물이라고 불린다. 사물은 신이 속성들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속성에서 신이 자신을 표현할 때 속성들의 양태들은 모두 사물res이다. 사유 속성도 다른 속성과 같다고 보면 사유 속성의 양태도 형상적 존재이고 사물이다. 사물은 그를 양태로 만드는 속성을 통해 자신을 펼친다. 사유 속성의 양태인 관념도 사유 속성을 통해 자신을 펼친다.

 

- 신은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이 생산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신의 지성 안의 관념은 어떤 속성에서 따라 나오는 각각의 양태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신의 지성 안에는 모든 양태들에 대응하는 관념들이 모두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관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양태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속성에서 파생되는 것처럼 관념도 사유 속성=신관념에서 따라 나오며 신이 모든 사물의 원인인 것처럼 신 관념은 모든 관념의 원인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 관념의 복합적 지위가 문제가 될 수 있다.

 

-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신 안에 동등한 두 역량이 있다고 한다. 정리 7에서 역량들의 동등성을 인정함으로써 보충명제가 증명과 연결된다. 신의 사유 역량은 그의 현실적 작용 역량과 동등하다. 이처럼 역량 논변은 신의 실존의 후험적 증명에 쓰이지 않고 인식론적 평행론 증명에 쓰인다. 또한 인식론적 평행론 규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관념과 대상들의 존재의 동일성을 긍정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사유역량과 작용역량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따름정리의 목적이다. 동일한 것이 신의 무한한 본성에서 형상적으로(이러저러한 속성에서) 동시다발로 생기고[따라 나오고]. 신 관념에서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 신은 생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이해한다. 속성들에서 양태들이 나옴과 동시에 그에 대한 관념이 줄줄이 생긴다. 단 하나의 동일한 존재가 실존 및 작용 역량의 측면에서 의존하는 속성에서는 형상적이고, 사유 역량의 측면에서 의존하는 신관념에서는 표상적이다. 속성의 양태는 형상적 존재이고 그것에 대응하는 관념은 표상적 존재다. 어떤 속성의 양태와 그 양태에 대응하는 관념은 두 역량 아래에서 두가지 방식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표현” 개념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다르게 “표현”되지만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 역량과 속성의 구별, 역량의 동등성과 속성의 동등성의 구별

 

- 신에게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귀속시켜야 한다. 다른 한편 사유 역량을 귀속시켜야 한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은 신의 형상적 본질과 동일하다. 혹은 신의 본성에 대응한다. 사유 역량은 표상적 본질과 동일하다. 혹은 신 관념에 대응한다.

 

- 사유 속성은 무한히 많은 속성 중 하나이지만 사유 역량은 실존 및 작용 역량과 동등한 역량이다. 들뢰즈는 역량과 속성의 구별의 본질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은 동등한 두 가지 역량, 즉 실존역량과 사유역량, 달리 말하면 작용[agir행위, 행동] 역량과 인식 역량을 갖고 있다. 속성들은 그렇지 않다. 신은 무한한 속성을 소유하나 우리의 인식이 제한되어 있어 무한한 속성 중 두 가지, 사유와 연장 속성만 인식한다. 반면에 역량은 속성과 다르게 우리의 인식의 한계에 관련되지 않고 우리의 구성 상태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즉 우리의 인식이 제한되어 있고, 우리가 유한 존재이므로 무한 속성 중 두 가지만 인식한다. 하지만 역량은 그렇지 않다[←들뢰즈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 신에 대해서 긍정되는 실존 역량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고 마찬가지로 사유 역량도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즉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과 사유 역량을 소유한다. 이것이 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로부터 무한히 많은 것들이 따라나온다/생겨난다.

 

▶ 어떤 조건에서 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긍정하는가?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무한히 많은 속성을 신이 갖는다는 조건에서 신에 대해 절대적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긍정한다. 신이 사유 속성을 갖는다는 조건에서 신에 대해 절대적 무한한 사유 역량을 긍정한다. 우리는 사유와 연장, 두 속성만을 인식한다. 사유와 연장만으로는 절대적 실존 역량을 비우거나[épuiser고갈시키다, 다 써버리다] 채우기에 충분하지 않다. 즉, 사유와 연장만으로 실존 역량을 다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실존 및 작용 역량을 충족시키려면 신이 사유와 연장을 포함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신이 갖는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