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
5장 역량들
▶ 잠재태는 곧 현실태다.
‘다르게 할 수도 있다’, 즉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가능태는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태는 없다. 잠재태puissance는 곧 현실태acte다. 여기서 현실태는 행위다. 행위가 곧 역량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곧 나의 역량이자 권리다. 장님이 볼 수 없는 것은 돌멩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운동과 정지의 구성비
구성비는 나를 구성하는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비를 말한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역량의 구성비가 달라진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것과 성장해서 할 수 있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량이 곧 구성비는 아니다. 역량・변용 능력과 (빠름과 느림/운동과 정지의) 구성비는 서로 대응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을 하고 늙어서 죽는 것은 정상분포곡선(⌒)을 그린다. 그러므로 아이의 역량보다 어른의 역량이 크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원인에 의해 일반적인global 구성비가 파괴되면 죽는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특징적인 구성비가 바뀌면 개체는 없어진다. 그 개체를 특징짓는 역량이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비는 그것을 구성하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구성비로 되어 있다. 전체 구성비를 합성하는compose 구성비들의 global ensemble에서 작은 구성비가 깨지면 잠깐 아프고 마는 것이다. 가령, 배탈이 나면 구성비가 깨졌다가 병이 낫게 되면 구성비는 본래로 돌아온다.
▶ 역량
개체를 규정하는 본질은 역량들의 꾸러미다. 즉 개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총집합으로서 역량은 그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의 진폭을 오간다. 나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즉 나의 역량과 다른 사람의 역량이 다르다. 변용 능력이 다른 것이다. affect란 역량의 증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기쁨을 느낄 때 역량과 슬픔을 느낄 때 역량은 다르다. 최소치의 하한선을 뚫고 밑으로 나가면 와해되거나 다른 존재가 된다. 최대치의 상한선을 뚫고 위로 나가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 기쁨을 온전하게 형상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단계가 가장 이성적인 단계이다. 스피노자 이전의 합리론자들에게는 인간은 다 이성적으로 태어난다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적/사회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변용능력과 실존양식
변용능력은 본래 채운다remplir는 의미를 갖고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수동적 변용으로 채워지냐 능동적 변용으로 채워지냐가 관건이다. 수동적 변용의 비율이 크면 이를테면 노예적 사람이다.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지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얼마큼 더 늘릴 것인가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고 그 능동적 변용의 비를 formal하게 늘리는 단계까지 가면 이성적인 사람이 된다. 지복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변용능력은 수동적 변용들로도 채워지고 능동적 변용들로도 채워지면서 비율이 달라진다. 변용능력이 수동적 변용들로 많이 채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슬픔을 많이 느끼고 우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실존양식이다. 좋은 실존 양식과 나쁜 실존양식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막 사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삶에 순응해서 산다.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조직화해서 바꾸려 하지 않고 하루를 그냥저냥 살아간다. 이렇게 대부분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노예적 실존양식에서 벗어나 능동적 변용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성의 노력이고 그것이 좋은 실존양식이다.
▶ 고전적 자연권 이론
고전적 자연권 이론은 키케로가 취합해서 정리했다. 스피노자는 홉스가 제시한 자연권 이론을 이어받아 수정했다. 고전적 자연권 이론에서는 본질에 부합하는 삶이 이성적인 삶이고 곧 자연상태nature(=본성)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허용되는 행동을 결정해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현자들이다. 또한 자연 상태에서 1차적인 것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다. 의무는 본질에 부합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들의 집합체를 뜻한다.
▶ 데카르트도 스피노자처럼 잠재태와 현실태의 구별을 없앴다.
▶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명사와 동사로 쓰이는 pouvoir[=can=poss[라틴어]에 est를 붙여 단어를 만들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능력, 즉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원래 단어를 “더럽혀”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을 barbarism이라고 한다.
▶ “실존하는 대로”라는 것은 탁월성, 고차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존할 때랑 사물 양태를 생산할 때 form이 똑같다는 것이고 또한 form을 달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 철학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면 신의 실존은 무한한 form이어야 하고 양태들은 유한한 form이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깼다. 존재 형식 혹은 존재 형상의 일의성을 가정하면서 신이 실존할 때 또는 자신을 이해할 때의 form과 사물을 생산할 때의 form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또한 신의 의지로 사물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본질에서 따라 나온다고 본다.
▶ 잠재성과 가능성
(스피노자) 가능한 실존은 필연적인 실존이 아니다. 신, 또는 신적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하지만 양태들은 가능한 실존만 한다. 외부 작용이 있어야 실존이 시작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의 지성 안에 모든 가능성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어떤 것만 실존으로 이행하고 다른 것은 실존할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라이프니츠에게 잠재성과 가능성은 완전히 다르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잠재성의 차원이 있고 가능 실재의 차원이 따로 있다. 그는 불공가능성의 개념을 갖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가령, 아담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가능성도 있고 건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둘 중 하나만 realize가 된다. 이렇게 realize된 것 안에서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된다. 카이사르라는 개체 개념 안에 모든 사건들이 다 들어 있다고 할 때 그 사건들은 잠재적인 것이다. 그것과 가능 실재 구별은 차원을 완전히 달리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모든 가능한 것을 real한 것으로 보았다. 실재적인 것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가능성 범주 자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가능하다’는 말을 쓰더라도 다른 철학자들이 쓰는 가능성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가능성 개념을 아예 없앴다. 가능한 것은 다 실재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없는 것이다.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없다는 얘기다. 그 조건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지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신은 내재하는 원인이다.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잠재태의 집합이다. 결코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다. 신은 가능한 모든 것들의 총체다.
내재인 : 원인은 결과 안에, 결과는 원인 안에 있다.
타동인=작용인=창조인 :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게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간다.
유출인 : 원인은 자기 안에 있고 결과는 밖으로 나간다.
▶라이프니츠의 공가능성/불공가능성
라이프니츠가 카이사르라는 개체 안에 모든 사건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인간은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느냐는 반박에 맞서 공가능성/불공가능성을 끌고 온다. 건너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실존하게 된 세계와 공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가 실존하려고 경합하다가 결국 하나만 실존하고 나머지는 아예 삭제된다는 것이다. 건너지 않을 수 있었는데 건넜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설혹 안 건너도 그것은 신의 뜻이다.
신이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을 때 일어날 사건들의 계열, 건너지 않았을 때의 일어날 사건의 계열, 즉 전체 세계의 가능성을 창조했으나, 언제 건널지를 정해 놓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바로 인간의 자유를 개입시킬 여지가 생겨난다. 라이프니츠와 아르노 간에 오고간 편지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경우에 그 뒤로 이어질 사건들의 총체가 하나의 세계, 낳지 않았을 경우에 이어질 사건들의 총체인 다른 세계가 있다. 이처럼 신은 가능한 세계를 만들 뿐 사건 하나하나를 결정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관점에서 최선인 것으로 체스의 최선의 수에 해당한다.
▶ 선험적 증명
속성은 역량을 양태들에게 귀속시키는 조건이다. 즉 속성은 유한 양태들에게 일정 정도의 역량을 귀속시키는 조건이다. 실체는 역량을 귀속시키는 조건들(=속성)의 총체를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면 실체에는 양태들에게 귀속된 일정한 역량들이 모두 귀속되어야 한다.
속성을 통해 양태들에게 일정 정도의 역량이 귀속된다. 즉 양태들마다 역량이 다른데 역량의 일정한 양degree를 귀속시키는 조건이 속성이다. 실체는 모든 속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실체에게는 양태들에게 귀속된 역량들이 모두 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갖는다. 그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은 그것에 대응하는 변용 능력을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무한히 많은 양태로 채운다[실행한다].
→ 실체는 모든 속성을 선험적으로 소유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 귀속된다.
▶ 후험적 증명 : [항상 유한양태에서 출발] 유한한 존재는 일정 정도의 역량을 소유한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양태는 다른 외부 사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갖는 실체가 필연적으로 실존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 유한양태에 일정정도 역량이 있는데 그 역량을 가진 유한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가진 실체도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한다.
▶ 삼항 관계triad[3항 1조의 의미]
1)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1장] ① 실체는 자신을 표현한다. ② 속성은 표현이다. ③ 본질은 (실체의 본질로서) 표현된 것이다.
2)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4장] 완전・무한・절대 ① 모든 존재 형식[형상]=속성들은 똑같이 완전하다[존재 형식의 완전성]. ② 존재 형식 각각은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무한]. ③ 모든 존재 형식, 즉 모든 속성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 제한없이 긍정된다[절대]. = 모든 속성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의 속성들이다. = 모든 속성들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3)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5장] ① 실체의 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이다. ② 실체는 자기 힘으로 실존하는 가장 실재적인 존재다[=가장 실재적이라는 실재성・완전성이 가장 크다는 의미, 자기 스스로 실재하므로 원인이 밖에 없기 때문, but 양태는 자기 바깥에 원인이 있음]. ③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변용 능력이 대응하는데 변용능력은 무한한 많은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이다[←이 문제는 6장의 신의 생산의 충분이유와 연결]
6장 평행론에서의 표현
▶실재적/실질적 정의와 명목적 정의
- 원의 실재적/발생적 정의 : 한쪽 끝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 끝이 움직여 제자리로 돌아오면 원이 된다.← 자와 같은 척도가 없이 컴퍼스만 가지고 하는 작도법에 의한 정의다.
- 원의 명목적 정의 : 한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이것은 원의 하나의 특성에 불과하다.
실재적/실질적 정의에서는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대상이 가능한지를 보여 주려면 모순이 없어야 한다. 반면 명목적 정의란 대상의 가능성은 보여주지 않고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정의다. 즉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을 있어야 실재적 정의이고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못하면 명목적 정의다. 예를 들어 최대수, 최대속도는 개념 자체가 모순적이다.
모순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실재적 정의이고 실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실재적 정의이다. 모순이 없어야 실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인식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명목적 정의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가 대표적인 명목적 정의다. 이것을 통해 삼각형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삼각형이 어떻게 발생, 실존하는지는 볼 수는 없다. 또한 유니콘을 뿔 달린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존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의다. 사각의 원은 모순을 포함하므로 실질적 정의가 될 수 없다.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재가 가능하고 실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에티카 1부 정의6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체다”는 실질적 정의다.
▶ 고전 논리학의 3원칙 : 동일률, 비모순율, 배중률[제3자 배제의 원리]
동일률 : A=A이다.
비모순율 : A는 not A가 아니다.
배중률 : A와 A가 아닌 것이 동시에 될 수 없다. ex. 정신인 동시에 정신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고전 논리학에서 세 원칙은 가능한 것들만 가지고 사유한 것이다. 실재의 여부는 안중에 없다. A의 존재 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moi = moi
데카르트가 최초로(?) 이전과 다른 사유를 한다. 그의 ‘나는 나다’는 ‘A는 A이다’와 다르다. 데카르트는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고 본다.
의심하는 나moi = 생각하는 나moi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도 나는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에서부터 가능이 아니라 실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고전적 논리학처럼 A=A라면 A의 존재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유니콘의 관념 또는 표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유니콘의 실존 여부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550원 짜리 동전에 대한 표상은 그것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가질 수 있다. 고전 논리학에서는 표상만 가지고 따진다.
라이프니츠는 실존/실재할 수 있는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진짜 사유이고 철학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최초로 한 것이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생각하는 나=존재하는 나는 동일하다. 그냥 고전 논리학에서 A=A라고 할 때는 A가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순전한 논리적 가능성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존재하는 나라고 할 때는 실존하는 것의 대한 사유가 된다. 실존하는 것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가 17세기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 들뢰즈 철학에서의 수학의 중요성 : 입체와 사영의 관계
라이프니츠[데자르그의 기하학/사영기하학 원용]는 평행론을 전개하면서 위와 같은 입체와 사영pojection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은 원뿔의 projection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들은 모두 projection이라는 게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신이고 우리는 projection만 볼 수 있다. projection은 계속 변신하는 데 우리는 변신 중에 있는 대상만 지각한다. 이와 같이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계속 형태를 바꾸는 대상을 라이프니츠는 objectile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한테는 object는 없고 objectile만 있다. objectile이 원이었다가 쌍곡선이었다가 포물선이 되었다가 계속 바뀌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각형이 계속 돌고 있을 때도 우리는 어느 한 면만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입체와 사영 관계를 설명하며 projection과 원래 도형이 평행하다는 평행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평행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실체를 모두 양태로 만들어버린 것은 곧 모두 프로젝션을 만든 것이라고 비판한다.
원뿔곡선 중앙의 점은 관점을 가리킨다.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각각의 도형들이고 그것들 간의 연관connetion만 알 수 있다. project와 project 간의 관계를 profile[측면, 수직사영]이라고 한다. 모나드는 동일한 전체 세계를 표현하지만 특정한 부분만 clear하고 distinct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구별 가능하다. 어느 관점에서 보냐에 따라서 도시가 달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관점은 원뿔곡선 중앙의 꼭지점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야 비로소 연관관계를 모두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objectile은 profile만 실존하는 대상이라고 보았다.
▶ perspectivism[by 미셸 세르]
perspectivism은 진리의 variation이 아니라 variation의 진리가 주체에게 나타나는 조건이다. 즉 variation[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의 진리가 주체에게 나타나는 조건이 perspectivism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주체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게 아니다. 주체마다 진리의 variation이 있다는 게 perspectivism이 아니다. 중앙의 꼭지점은 주체가 variation을 파악하는 조건이다. 여기서는 대상이 objectile로 변했듯이 주체도 subjet에서 superjet으로 바뀐다[by 화이트헤드]. 어떤 관점에 들어가면 그것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variation[transfomation, metamorphose, 의미 : 변신<형태 변화]이 진리다.
9/25
9/18
5장 역량들
▶ 잠재태는 곧 현실태다.
‘다르게 할 수도 있다’, 즉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가능태는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태는 없다. 잠재태puissance는 곧 현실태acte다. 여기서 현실태는 행위다. 행위가 곧 역량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곧 나의 역량이자 권리다. 장님이 볼 수 없는 것은 돌멩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운동과 정지의 구성비
구성비는 나를 구성하는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비를 말한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역량의 구성비가 달라진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것과 성장해서 할 수 있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량이 곧 구성비는 아니다. 역량・변용 능력과 (빠름과 느림/운동과 정지의) 구성비는 서로 대응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을 하고 늙어서 죽는 것은 정상분포곡선(⌒)을 그린다. 그러므로 아이의 역량보다 어른의 역량이 크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원인에 의해 일반적인global 구성비가 파괴되면 죽는다. 또한 개체를 구성하는 특징적인 구성비가 바뀌면 개체는 없어진다. 그 개체를 특징짓는 역량이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비는 그것을 구성하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구성비로 되어 있다. 전체 구성비를 합성하는compose 구성비들의 global ensemble에서 작은 구성비가 깨지면 잠깐 아프고 마는 것이다. 가령, 배탈이 나면 구성비가 깨졌다가 병이 낫게 되면 구성비는 본래로 돌아온다.
▶ 역량
개체를 규정하는 본질은 역량들의 꾸러미다. 즉 개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총집합으로서 역량은 그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의 진폭을 오간다. 나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즉 나의 역량과 다른 사람의 역량이 다르다. 변용 능력이 다른 것이다. affect란 역량의 증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기쁨을 느낄 때 역량과 슬픔을 느낄 때 역량은 다르다. 최소치의 하한선을 뚫고 밑으로 나가면 와해되거나 다른 존재가 된다. 최대치의 상한선을 뚫고 위로 나가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 기쁨을 온전하게 형상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단계가 가장 이성적인 단계이다. 스피노자 이전의 합리론자들에게는 인간은 다 이성적으로 태어난다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적/사회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변용능력과 실존양식
변용능력은 본래 채운다remplir는 의미를 갖고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수동적 변용으로 채워지냐 능동적 변용으로 채워지냐가 관건이다. 수동적 변용의 비율이 크면 이를테면 노예적 사람이다. 능동적 변용들로 채워지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얼마큼 더 늘릴 것인가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고 그 능동적 변용의 비를 formal하게 늘리는 단계까지 가면 이성적인 사람이 된다. 지복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변용능력은 수동적 변용들로도 채워지고 능동적 변용들로도 채워지면서 비율이 달라진다. 변용능력이 수동적 변용들로 많이 채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슬픔을 많이 느끼고 우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실존양식이다. 좋은 실존 양식과 나쁜 실존양식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막 사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삶에 순응해서 산다.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조직화해서 바꾸려 하지 않고 하루를 그냥저냥 살아간다. 이렇게 대부분 수동적 변용들로 채워져 있는 노예적 실존양식에서 벗어나 능동적 변용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성의 노력이고 그것이 좋은 실존양식이다.
▶ 고전적 자연권 이론
고전적 자연권 이론은 키케로가 취합해서 정리했다. 스피노자는 홉스가 제시한 자연권 이론을 이어받아 수정했다. 고전적 자연권 이론에서는 본질에 부합하는 삶이 이성적인 삶이고 곧 자연상태nature(=본성)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허용되는 행동을 결정해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현자들이다. 또한 자연 상태에서 1차적인 것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다. 의무는 본질에 부합하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들의 집합체를 뜻한다.
▶ 데카르트도 스피노자처럼 잠재태와 현실태의 구별을 없앴다.
▶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명사와 동사로 쓰이는 pouvoir[=can=poss[라틴어]에 est를 붙여 단어를 만들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능력, 즉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원래 단어를 “더럽혀”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을 barbarism이라고 한다.
▶ “실존하는 대로”라는 것은 탁월성, 고차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존할 때랑 사물 양태를 생산할 때 form이 똑같다는 것이고 또한 form을 달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 철학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면 신의 실존은 무한한 form이어야 하고 양태들은 유한한 form이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깼다. 존재 형식 혹은 존재 형상의 일의성을 가정하면서 신이 실존할 때 또는 자신을 이해할 때의 form과 사물을 생산할 때의 form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또한 신의 의지로 사물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본질에서 따라 나온다고 본다.
▶ 잠재성과 가능성
(스피노자) 가능한 실존은 필연적인 실존이 아니다. 신, 또는 신적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하지만 양태들은 가능한 실존만 한다. 외부 작용이 있어야 실존이 시작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의 지성 안에 모든 가능성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어떤 것만 실존으로 이행하고 다른 것은 실존할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라이프니츠에게 잠재성과 가능성은 완전히 다르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잠재성의 차원이 있고 가능 실재의 차원이 따로 있다. 그는 불공가능성의 개념을 갖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가령, 아담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가능성도 있고 건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둘 중 하나만 realize가 된다. 이렇게 realize된 것 안에서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 된다. 카이사르라는 개체 개념 안에 모든 사건들이 다 들어 있다고 할 때 그 사건들은 잠재적인 것이다. 그것과 가능 실재 구별은 차원을 완전히 달리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모든 가능한 것을 real한 것으로 보았다. 실재적인 것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가능성 범주 자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가능하다’는 말을 쓰더라도 다른 철학자들이 쓰는 가능성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가능성 개념을 아예 없앴다. 가능한 것은 다 실재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없는 것이다.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없다는 얘기다. 그 조건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지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신은 내재하는 원인이다.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잠재태의 집합이다. 결코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다. 신은 가능한 모든 것들의 총체다.
내재인 : 원인은 결과 안에, 결과는 원인 안에 있다.
타동인=작용인=창조인 :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게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간다.
유출인 : 원인은 자기 안에 있고 결과는 밖으로 나간다.
▶라이프니츠의 공가능성/불공가능성
라이프니츠가 카이사르라는 개체 안에 모든 사건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인간은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느냐는 반박에 맞서 공가능성/불공가능성을 끌고 온다. 건너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실존하게 된 세계와 공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가 실존하려고 경합하다가 결국 하나만 실존하고 나머지는 아예 삭제된다는 것이다. 건너지 않을 수 있었는데 건넜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설혹 안 건너도 그것은 신의 뜻이다.
신이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을 때 일어날 사건들의 계열, 건너지 않았을 때의 일어날 사건의 계열, 즉 전체 세계의 가능성을 창조했으나, 언제 건널지를 정해 놓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바로 인간의 자유를 개입시킬 여지가 생겨난다. 라이프니츠와 아르노 간에 오고간 편지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경우에 그 뒤로 이어질 사건들의 총체가 하나의 세계, 낳지 않았을 경우에 이어질 사건들의 총체인 다른 세계가 있다. 이처럼 신은 가능한 세계를 만들 뿐 사건 하나하나를 결정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관점에서 최선인 것으로 체스의 최선의 수에 해당한다.
▶ 선험적 증명
속성은 역량을 양태들에게 귀속시키는 조건이다. 즉 속성은 유한 양태들에게 일정 정도의 역량을 귀속시키는 조건이다. 실체는 역량을 귀속시키는 조건들(=속성)의 총체를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면 실체에는 양태들에게 귀속된 일정한 역량들이 모두 귀속되어야 한다.
속성을 통해 양태들에게 일정 정도의 역량이 귀속된다. 즉 양태들마다 역량이 다른데 역량의 일정한 양degree를 귀속시키는 조건이 속성이다. 실체는 모든 속성을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실체에게는 양태들에게 귀속된 역량들이 모두 귀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을 갖는다. 그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은 그것에 대응하는 변용 능력을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무한히 많은 양태로 채운다[실행한다].
→ 실체는 모든 속성을 선험적으로 소유한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 귀속된다.
▶ 후험적 증명 : [항상 유한양태에서 출발] 유한한 존재는 일정 정도의 역량을 소유한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양태는 다른 외부 사물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갖는 실체가 필연적으로 실존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 유한양태에 일정정도 역량이 있는데 그 역량을 가진 유한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을 가진 실체도 필연적으로 실존해야 한다.
▶ 삼항 관계triad[3항 1조의 의미]
1)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1장] ① 실체는 자신을 표현한다. ② 속성은 표현이다. ③ 본질은 (실체의 본질로서) 표현된 것이다.
2)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4장] 완전・무한・절대 ① 모든 존재 형식[형상]=속성들은 똑같이 완전하다[존재 형식의 완전성]. ② 존재 형식 각각은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무한]. ③ 모든 존재 형식, 즉 모든 속성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 제한없이 긍정된다[절대]. = 모든 속성들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의 속성들이다. = 모든 속성들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3)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5장] ① 실체의 본질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역량이다. ② 실체는 자기 힘으로 실존하는 가장 실재적인 존재다[=가장 실재적이라는 실재성・완전성이 가장 크다는 의미, 자기 스스로 실재하므로 원인이 밖에 없기 때문, but 양태는 자기 바깥에 원인이 있음]. ③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변용 능력이 대응하는데 변용능력은 무한한 많은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는 능력이다[←이 문제는 6장의 신의 생산의 충분이유와 연결]
6장 평행론에서의 표현
▶실재적/실질적 정의와 명목적 정의
- 원의 실재적/발생적 정의 : 한쪽 끝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 끝이 움직여 제자리로 돌아오면 원이 된다.← 자와 같은 척도가 없이 컴퍼스만 가지고 하는 작도법에 의한 정의다.
- 원의 명목적 정의 : 한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이것은 원의 하나의 특성에 불과하다.
실재적/실질적 정의에서는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대상이 가능한지를 보여 주려면 모순이 없어야 한다. 반면 명목적 정의란 대상의 가능성은 보여주지 않고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정의다. 즉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을 있어야 실재적 정의이고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못하면 명목적 정의다. 예를 들어 최대수, 최대속도는 개념 자체가 모순적이다.
모순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실재적 정의이고 실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실재적 정의이다. 모순이 없어야 실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인식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명목적 정의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가 대표적인 명목적 정의다. 이것을 통해 삼각형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삼각형이 어떻게 발생, 실존하는지는 볼 수는 없다. 또한 유니콘을 뿔 달린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존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의다. 사각의 원은 모순을 포함하므로 실질적 정의가 될 수 없다.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재가 가능하고 실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에티카 1부 정의6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제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체다”는 실질적 정의다.
▶ 고전 논리학의 3원칙 : 동일률, 비모순율, 배중률[제3자 배제의 원리]
동일률 : A=A이다.
비모순율 : A는 not A가 아니다.
배중률 : A와 A가 아닌 것이 동시에 될 수 없다. ex. 정신인 동시에 정신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고전 논리학에서 세 원칙은 가능한 것들만 가지고 사유한 것이다. 실재의 여부는 안중에 없다. A의 존재 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의 moi = moi
데카르트가 최초로(?) 이전과 다른 사유를 한다. 그의 ‘나는 나다’는 ‘A는 A이다’와 다르다. 데카르트는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고 본다.
의심하는 나moi = 생각하는 나moi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도 나는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에서부터 가능이 아니라 실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고전적 논리학처럼 A=A라면 A의 존재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유니콘의 관념 또는 표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유니콘의 실존 여부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550원 짜리 동전에 대한 표상은 그것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가질 수 있다. 고전 논리학에서는 표상만 가지고 따진다.
라이프니츠는 실존/실재할 수 있는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진짜 사유이고 철학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을 최초로 한 것이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생각하는 나=존재하는 나는 동일하다. 그냥 고전 논리학에서 A=A라고 할 때는 A가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순전한 논리적 가능성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존재하는 나라고 할 때는 실존하는 것의 대한 사유가 된다. 실존하는 것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가 17세기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 들뢰즈 철학에서의 수학의 중요성 : 입체와 사영의 관계
라이프니츠[데자르그의 기하학/사영기하학 원용]는 평행론을 전개하면서 위와 같은 입체와 사영pojection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은 원뿔의 projection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들은 모두 projection이라는 게 라이프니츠의 생각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신이고 우리는 projection만 볼 수 있다. projection은 계속 변신하는 데 우리는 변신 중에 있는 대상만 지각한다. 이와 같이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계속 형태를 바꾸는 대상을 라이프니츠는 objectile이라고 한다. 라이프니츠한테는 object는 없고 objectile만 있다. objectile이 원이었다가 쌍곡선이었다가 포물선이 되었다가 계속 바뀌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각형이 계속 돌고 있을 때도 우리는 어느 한 면만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입체와 사영 관계를 설명하며 projection과 원래 도형이 평행하다는 평행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평행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실체를 모두 양태로 만들어버린 것은 곧 모두 프로젝션을 만든 것이라고 비판한다.
원뿔곡선 중앙의 점은 관점을 가리킨다.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각각의 도형들이고 그것들 간의 연관connetion만 알 수 있다. project와 project 간의 관계를 profile[측면, 수직사영]이라고 한다. 모나드는 동일한 전체 세계를 표현하지만 특정한 부분만 clear하고 distinct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구별 가능하다. 어느 관점에서 보냐에 따라서 도시가 달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관점은 원뿔곡선 중앙의 꼭지점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야 비로소 연관관계를 모두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objectile은 profile만 실존하는 대상이라고 보았다.
▶ perspectivism[by 미셸 세르]
perspectivism은 진리의 variation이 아니라 variation의 진리가 주체에게 나타나는 조건이다. 즉 variation[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의 진리가 주체에게 나타나는 조건이 perspectivism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주체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게 아니다. 주체마다 진리의 variation이 있다는 게 perspectivism이 아니다. 중앙의 꼭지점은 주체가 variation을 파악하는 조건이다. 여기서는 대상이 objectile로 변했듯이 주체도 subjet에서 superjet으로 바뀐다[by 화이트헤드]. 어떤 관점에 들어가면 그것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variation[transfomation, metamorphose, 의미 : 변신<형태 변화]이 진리다.
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