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역량들
▶ 데카르트의 후험적 증명
데카르트의 후험적 증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내 안에 무한히 완전한 존재인 신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스스로 만들어 가질 리가 없다. 따라서 원인은 밖에 형상적으로 있어야 한다. 2) 신 관념을 가진 내가 실존한다. 나를 실존하게 만든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한다.
1)에서의 공리는 관념이 가지는 표상적 실재성은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실체를 나에게 보여주는 관념은 양태, 즉 우유성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관념보다 큰 어떤 것이며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무한하고 전능하고 모든 것의 창조자인 지고한 신을 지고한 존재로 이해하는 이러한 신의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내게 보여주는 관념보다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완전한 것을, 자기 안에 더 많은 실재성을 포함하는 것은 덜 완전한 것, 덜 실재성을 포함하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데카르트 『성찰』3]
어떤 관념이 있고, 그 관념에 대상이 있다. 이 관념이 갖는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표상적’이라는 것은 정신 안에 재현된[표상된objective] 것이라는 의미다. 이에 비해 ‘형상적’은 정신 밖에, 자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과 그 관념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의 형상적 실재성은 비례한다.
예를 들면 돌멩이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이 있다. 돌멩이에 대한 관념은 개구리의 관념보다 표상적 실재성이 작다. 사물로서의 돌멩이가 갖는 형상적 실재성은 사물로서 개구리가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 작다. 이는 대응 관계/비례 관계로서 실재성이 크다는 것은 더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관념의 원인이 만약 다른 관념이라고 할 때, 그 관념에도 원인이 있으므로 계속 관념의 원인을 좇아 가다보면 최초의 관념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것이 실재성이 가장 큰, 무한하게 완전한 신 관념이다.
신 관념이 가지고 있는, 신 관념에 들어있는 표상적 실재성은 어떤 다른 관념보다도 더 큰 실재성, 완전성을 갖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무언가가 자연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발상이다.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에서 생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마침내 첫 번째 관념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관념의 원인은 자연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원형arche type이다. 거기에는 관념 속에 표상적으로 있는데 지나지 않는 실재성 혹은 완전성이 형상적으로, 현실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데카르트, 『성찰』]
관념이 갖는 실재성이 표상적 실재성이고 그 관념의 원인, 자연 안에 존재하는 사물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인데 최초의 관념은 실재성이 가장 크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원인의 실재성도 가장 커야 한다.
대상을 재현하는(represent) 관념의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한다. 사물이 있고 사물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다는 인식은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고 데카르트도 그에 따르고 있다.
→ 스피노자는 여기에 역량을 도입해 역량이 크므로 실재성과 완전성도 크다고 설명한다.
▷ 칸트에게 인식 대상이란?
칸트는 objective를 ‘객관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칸트에게는 관념이 있고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사물 자체는 없다. 그는 나에게 나타나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물 자체가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사물 자체의 성격이 칸트에 오면 완전히 달라진다.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이 완전히 분리된다. 초감각적인 것은 이념으로 실천철학에서 이성적 존재가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목표와 관련된다. 그리고 감각 가능한 것만이 나에게 현상하는 것, 주어진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초감각적인 것, 즉 이데아도 인식의 대상이었다. 감각적인 것은 외관appearance으로, 즉 본질=이데아가 왜곡된 것을 말한다. 감각의 왜곡되고 일그러진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성이 필요하다. 이성의 인식 대상이 본질, 즉 이데아이다. 초감각적인 것이 인식의 대상이다.
하지만 칸트에게 초감각적인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의 대상은 감각적인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에게 나타난 것밖에 없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할 때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다른 능력은 지성이 정해준 보조 역할을 한다. 이성이 주가 되는 것은 실천이성에서이다. 여기서 이성은 도덕 영역에서 입법을 한다/주재한다. 이것을 실천이성의 관심이라고 하는데 이성의 관심에 따라 각각의 능력이 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 데카르트의 실재성, 스피노자의 역량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가장 큰 표상적 실재성이다. 신 관념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리가 없다. 그 원인이 내 정신 밖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이다. 그것이 신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다.
스피노자는 신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다른 표상적 실재성보다 크고 그 원인이 되는 신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 다른 사물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다고 가정한다면, 왜 큰지를 묻고 답한다. 그것은 신 관념의 사유 역량이 크기 때문이고 신이 갖는 실존 작용 역량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소론』 단계의 후험적 증명에서는 사유역량을 경유한다. 『소론』의 증명이 후험적 증명인 것은 ‘내가 신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즉 유한한 존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로 신이 왜 실재성이 크고 완전성이 큰지 설명하지 않고 내가 유한한 존재인데 유한한 존재인 나한테 무한히 큰 실재성을 가지는 관념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후험적 증명이다. 이와 달리 왜 신이 가장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지,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지를 바로 설명하는 것이 선험적 증명이다. 『윤리학』에서는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설명한다.
데카르트에게 선험적 증명은 다음과 같다. 신은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이다.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가 실존하지 않으면 완전성을 결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완전성을 결여한다는 것은 실존도 완전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보다 더 완전한 존재, 실존까지 하는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이는 앞의 가장 완전하다는 것과 모순된다. 따라서 무한한 완전한 존재는 실존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
모든 가능성들의 집합/모든 실재성의 질료/모든 필연성의 형식
→ 세 가지를 다 지칭하는 말이 ‘존재’이고 ‘신’이다.
사물들은 모든 면face/부분에서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사물들의 집합이 신=이미지다. 우리도 이미지고, 사물도 이미지다. 이미지들은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모든 면/부분에서 계속 변화한다. 그것들의 총체가 내재성이다. 그것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신은 screen이다. 우리는 그 스크린에 비춰진 이미지다.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내가 이미지이면 나를 구성하는 원자, 분자 모두 이미지다. 신은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따라서 내 안을 구성하는 원자들도 신이다.
모든 가능성의 집합/실재성의 질료/필연성의 형식을 동시에 지칭하는 신은 original한 존재다. 17세기에 신으로 표현했으니 이제 나(들뢰즈)에게 신이란 말이 필요 없으니 그것을 plan평면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n차원의 평면이다.
이미지들의 무한집합이 있다. 이미지들의 모든 면/부분들은 다른 이미지들과 관련해서 상관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므로 이 이미지들은 분할 가능하다. 그것을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으므로 그 이미지들은 n개의 면들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n개 차원과 n개의 항을 가진 집합이고 그런 집합을 plan이라고 부르겠다. 여기서 plan은 2차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n차원의 plan이다. 이미지들이 구별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많은 차원을 갖는다. 이미지들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존재와 나타남이 동시에 일어난다/일치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이 plan 위에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들의 무한집합인데 이것이 또한 plan이다.
[이미지는 스피노자의 양태에 해당한다.] 여러분은 이 plan의 한 이미지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도 이 plan의 다른 이미지다. 테이블도 이미지 중 하나다. 이미지는 계속 움직이고 서로 상호작용한다.[원본 없이 이미지가 시뮬라르크]
들뢰즈에게 신이란 [모든] 가능성에서 필연적으로 실존[실재성]이 따라 나오는 존재여야 한다. 가능한 것, 필연적인 것, 실재성인 것의 총체가 신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이미지다.
▷ 들뢰즈의 1980.11.25. 강의에 따르면 17세기 화가들은 신을 소재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은 신을 이용해서 형태의 해방을 이뤄내고 형태가 삽화와 아무 관련 없는 지점까지 형태를 밀고 나간다. 형태가 속박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광적인 순수한 춤에 뛰어든다. 신을 그릴 때는 이것이 가능하다. 원본에 충실할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가 기독교에 종속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이용해서 선과 색의 해방이 이뤄진다. 이것을 철학, 즉 스피노자에까지 적용된다. 마침내 철학에서도 개념의 해방이 이뤄진다. 이는 스피노자를 염두에 둔 언급일 것이다.
17세기는 빛의 세기다. 빛을 통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기본적으로 1종 인식의 세계는 어둠, 밤이다. 2종 인식은 대명천지이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일의성만 있다. 2종 인식에서는 인과관계에 이해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파악하는 데 시각과 촉각을 사용했다. 17세기에 오면 오로지 시각만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평행론 = 사유역량과 실존 작용 역량의 동등성
▶ 스피노자의 후험적 증명과 선험적 증명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양의 이유, 근거가 되는 것이 역량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실재성의 양, 즉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의 양만 가지고 비교했다. 스피노자는 『소론』에서 무한한 것을 인식할 수 역량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 스스로 그 역량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사유 역량을 경유한다. 하지만 『윤리학』에 가면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실존역량 자체만 놓고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실재성 양만으로 후험적 증명을 한다.
스피노자는 실재적 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역량을 끌고 온다. 『소론』에서는 무한한 것을 인식할 역량으로 가지고 증명한다. 『윤리학』에서는 인식 역량을 경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험적 증명이 선험적 증명을 야기한다. 선험적 증명은 ‘유한한 존재에 무한한 존재를 인식할 역량이 있다’라고 시작하지 않고 바로 무한한 존재에서 시작한다. 『소론』에서만 해도 신에서 출발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윤리학』에서는 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실체-속성-양태를 정의한 후 정의 6에 처음 신이 등장한다.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 즉 『윤리학』에서는 신을 전제하지 않는 증명을 찾고자 한다. 더 이상 신관념,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선험적 증명으로 나아갔다.
▷ 분유(分有)는 인간은 절대한 무한한 신의 사유 역량의 일부분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체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신의 갖고 있는 실존 작용 역량의 일정부분도 나누어 갖는다.
▷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신과 실체에 대해서 필연적이라는 것은 본질에서 필연적 실존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고 양태들이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다른 원인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 개체와 신
개체 = 1[외연]/∞[내포], 신=∞[외연]/1[내포]
개체의 역이 신이다. 여기서 내포는 술어이고 전통철학에서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체 = 1[외연]/∞[내포]를 일단 동물에서 시작해 적용해보면, 사자보다는 동물이 외연이 크다.→ 동물의 외연을 1000이라고 하고 내포도 1000이라고 가정한다. → 동물 중 사자는 극히 일부이므로 외연을 10으로 가정할 수 있고 내포는 동물 중에서 갈기가 있고 포효하고 꼬리에 털이 있는 사자들의 특징들이 플러스가 되어 내포가 10000이 된다고 하자. 다시 사자에서 사하라의 사자를 보면 외연은 다시 줄어 5가 되고 내포는 더 늘어난다. 그런데 사자 중에서도 특정 사자는 1마리밖에 없다. 여기까지 도달하려면 내포가 무한대로 늘어나게 된다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히 갈 수 없으므로 어느 순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후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처럼 내포가 무한대가 되고 외연이 1이 되어야 개체에 도달할 수 있다. 개체는 고유명사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신이 된다. 이것은 외연이 무한대라는 것은 모든 게 신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왜 내포가 1일까? 내포는 어떤 존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라이프니츠는 개체적 실체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바로 개체적 실체가 1/∞이다. 똑같은 물방울조차도 내포가 다르다. 그것을 구별하려면 내포를 무한대로 늘려야 한다. 내포 안에는 시간, 공간 등 주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언제, 어디, 무엇]이 다 들어간다. 신에 대해서는 모든 모나들의 모나드라고 말한다. 모나드 각각 무한한 관점이 있다. 각각의 관점에서 모나드가 표현하는 세계는 공통세계인데 모나드 각각이 그것을 다 다르게 표현한다. clear하고 distinct하게 표현하는 region이 다르다. 똑같은 세계를 표현하되 밝게 표현하는 region이 있다. 그것에 의해서 구별이 된다. 그것은 곧 관점이 다르다는 의미다. 신은 모든 관점들의 관점이다.
모나드에 창이 없다는 것은 모나드 개념 안에 모든 사건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므로 창이 없는 것이다. 모나드 개념 안에 다 담겨 있다. 그렇게 외부의 작용을 받을 이유가 없어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고유명사는 다 모나드이다. 심지어 똑같이 생긴 물방울조차도 모나드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똑같은 공통세계를 다르게 표현한다. 각자에게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록 이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예정조화]. 내 모나드 안에 타자가 들어있고 타자의 모나드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 과거의 사건은 물론 미래의 사건도 들어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다양성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다.
▶속성, 그리고 사유 속성
A, B, C, D … 수많은 속성이 있다. 각각의 속성은 신의 혹은 실체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리고 A, B, C, D… 속성 모두 형상적 본질과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갖고 있다. 이것들을 다 합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이 된다. 하지만 사유 속성은 성격이 다르다. 사유 속성도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런데 A, B, C, D…속성의 양태는 사물들이다. 관념도 사물로 생각해야 한다. 일단,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을 놓고 보면, 사유 속성의 양태는 관념이다. 연장 속성의 양태는 물체이다. 이 두 가지는 대응한다. 관념은 형상적 실재성을 갖는 동시에 물체에 대한 관념으로서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 사유 속성은 이중적이다.
A 속성 a′, a″, ‴…
B 속성 b′, b″, b‴…
C 속성 c′, c″, c‴…
즉 사유 속성은 a.b,c…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다른 속성과는 지위가 다르다. 또한 사유 역량과 실존 및 작용 역량은 동일하다. 사유 속성의 양태는 관념이고 관념들은 인식 역량을 갖는다. 컵의 관념은 인식 역량을 갖는 동시에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갖는다.
▶ ~에 대한 관념인가? ~의 관념인가?
plan이 바뀐 듯? 신 또는 실체는 존재다. 신 또는 실체의 양태는 존재방식이다. 중간에 존재 형식이 있다. 바로 속성이 존재의 형식, 존재의 양태다. 사유 형식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연장 형식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plan이 바뀐다.
컵의 관념인가? 컵에 대한 관념인가? 컵의 관념은 사유속성으로 볼 때는 관념인데 연장속성으로 볼 때 물체다. 정신과 물체가 동일한 것인데 사유속성의 틀에서 보면 정신이라고 하고 연장속성의 틀에서 보면 물체다.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할 때는 관념을 사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물과 동일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비소에게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비소한테도 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소 안에 양태들로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만물에는 영혼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게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테제 중 하나다. 그렇다면 반복하지만 컵에 대한 관념인가? 컵의 관념인가? 정신은 관념의 다발이다. 정신이라는 용기가 있어 거기에 관념이 담기는 게 아니라 관념들은 연쇄한다. 이것을 정신이라고 한다. 관념이 연쇄한 것이 나의 정신의 전체이다. 그렇다면 비소에도 관념의 다발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게 맞다. 바위에도 영혼이 있는데 역량이 너무 작아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테이블에도 인지능력이 있으나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물체는 운동과 정지의 빠름과 느림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 물체에 상응하는 정신의 느림과 빠름의 비가 있다. 예를 들어 사자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끊임없이 운동을 한다. 사자의 정신 안에도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있고 이것들은 끊임없이 운동한다.
그런데 17세기 철학자들은 운동의 반대가 정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운동이 가장 작아진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나한테는 신체가 있고 영혼이 있다. 테이블에도 신체와 영혼이 있다. 관념한테 사유 역량, 인식 역량이 있다고 할 때 내가 가진 관념에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관념들이 있고 관념들마다 인식 역량이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관념이 일정한 사유역량을 가진다는 것은 사유속성의 양태인 한에서 모든 관념은 일정한 인식역량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인식 역량을 갖는 게 관념인데 과연 관념은 누구의 관념인가? 내가 가진 사물에 대한 관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식은 “함께 태어나다”를 뜻하는 con+naître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정신, 인간과 세계, 사물과 개념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는 나팔을 인식하고 나무는 침대를 인식한다. 바다는 배를 인식하고 도끼는 나무를 인식한다. 불은 자기가 가열해 익히는 음식, 자기가 녹이는 구리, 자기가 불태운 로마를 인식한다. 그렇게 함께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서로를 인식한다. 즉 알아본다.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이 감각적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결국 형상적 관점에서 서로 비슷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손을 데면 열을 인식하면서 노랗게 되어 불의 색과 비슷해진다. 눈도 어떤 색깔을 갖고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 인식론적 근원, 뿌리가 원천으로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사물한테는 인식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5장 역량들
▶ 데카르트의 후험적 증명
데카르트의 후험적 증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내 안에 무한히 완전한 존재인 신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스스로 만들어 가질 리가 없다. 따라서 원인은 밖에 형상적으로 있어야 한다. 2) 신 관념을 가진 내가 실존한다. 나를 실존하게 만든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한다.
1)에서의 공리는 관념이 가지는 표상적 실재성은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다.
“실체를 나에게 보여주는 관념은 양태, 즉 우유성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관념보다 큰 어떤 것이며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무한하고 전능하고 모든 것의 창조자인 지고한 신을 지고한 존재로 이해하는 이러한 신의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내게 보여주는 관념보다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완전한 것을, 자기 안에 더 많은 실재성을 포함하는 것은 덜 완전한 것, 덜 실재성을 포함하는 것에서 생길 수 없다.”[데카르트 『성찰』3]
어떤 관념이 있고, 그 관념에 대상이 있다. 이 관념이 갖는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표상적’이라는 것은 정신 안에 재현된[표상된objective] 것이라는 의미다. 이에 비해 ‘형상적’은 정신 밖에, 자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과 그 관념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의 형상적 실재성은 비례한다.
예를 들면 돌멩이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이 있다. 돌멩이에 대한 관념은 개구리의 관념보다 표상적 실재성이 작다. 사물로서의 돌멩이가 갖는 형상적 실재성은 사물로서 개구리가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 작다. 이는 대응 관계/비례 관계로서 실재성이 크다는 것은 더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관념의 원인이 만약 다른 관념이라고 할 때, 그 관념에도 원인이 있으므로 계속 관념의 원인을 좇아 가다보면 최초의 관념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것이 실재성이 가장 큰, 무한하게 완전한 신 관념이다.
신 관념이 가지고 있는, 신 관념에 들어있는 표상적 실재성은 어떤 다른 관념보다도 더 큰 실재성, 완전성을 갖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무언가가 자연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발상이다.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에서 생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마침내 첫 번째 관념에 다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관념의 원인은 자연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원형arche type이다. 거기에는 관념 속에 표상적으로 있는데 지나지 않는 실재성 혹은 완전성이 형상적으로, 현실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데카르트, 『성찰』]
관념이 갖는 실재성이 표상적 실재성이고 그 관념의 원인, 자연 안에 존재하는 사물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인데 최초의 관념은 실재성이 가장 크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원인의 실재성도 가장 커야 한다.
대상을 재현하는(represent) 관념의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한다. 사물이 있고 사물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있다는 인식은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고 데카르트도 그에 따르고 있다.
→ 스피노자는 여기에 역량을 도입해 역량이 크므로 실재성과 완전성도 크다고 설명한다.
▷ 칸트에게 인식 대상이란?
칸트는 objective를 ‘객관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칸트에게는 관념이 있고 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사물 자체는 없다. 그는 나에게 나타나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물 자체가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 사물 자체의 성격이 칸트에 오면 완전히 달라진다.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이 완전히 분리된다. 초감각적인 것은 이념으로 실천철학에서 이성적 존재가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목표와 관련된다. 그리고 감각 가능한 것만이 나에게 현상하는 것, 주어진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초감각적인 것, 즉 이데아도 인식의 대상이었다. 감각적인 것은 외관appearance으로, 즉 본질=이데아가 왜곡된 것을 말한다. 감각의 왜곡되고 일그러진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성이 필요하다. 이성의 인식 대상이 본질, 즉 이데아이다. 초감각적인 것이 인식의 대상이다.
하지만 칸트에게 초감각적인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의 대상은 감각적인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 우리에게 나타난 것밖에 없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할 때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다른 능력은 지성이 정해준 보조 역할을 한다. 이성이 주가 되는 것은 실천이성에서이다. 여기서 이성은 도덕 영역에서 입법을 한다/주재한다. 이것을 실천이성의 관심이라고 하는데 이성의 관심에 따라 각각의 능력이 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 데카르트의 실재성, 스피노자의 역량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가장 큰 표상적 실재성이다. 신 관념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낼 리가 없다. 그 원인이 내 정신 밖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이다. 그것이 신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다.
스피노자는 신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다른 표상적 실재성보다 크고 그 원인이 되는 신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이 다른 사물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다고 가정한다면, 왜 큰지를 묻고 답한다. 그것은 신 관념의 사유 역량이 크기 때문이고 신이 갖는 실존 작용 역량이 크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소론』 단계의 후험적 증명에서는 사유역량을 경유한다. 『소론』의 증명이 후험적 증명인 것은 ‘내가 신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즉 유한한 존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로 신이 왜 실재성이 크고 완전성이 큰지 설명하지 않고 내가 유한한 존재인데 유한한 존재인 나한테 무한히 큰 실재성을 가지는 관념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후험적 증명이다. 이와 달리 왜 신이 가장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지, 즉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지를 바로 설명하는 것이 선험적 증명이다. 『윤리학』에서는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설명한다.
데카르트에게 선험적 증명은 다음과 같다. 신은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이다.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가 실존하지 않으면 완전성을 결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완전성을 결여한다는 것은 실존도 완전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보다 더 완전한 존재, 실존까지 하는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이는 앞의 가장 완전하다는 것과 모순된다. 따라서 무한한 완전한 존재는 실존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
모든 가능성들의 집합/모든 실재성의 질료/모든 필연성의 형식
→ 세 가지를 다 지칭하는 말이 ‘존재’이고 ‘신’이다.
사물들은 모든 면face/부분에서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사물들의 집합이 신=이미지다. 우리도 이미지고, 사물도 이미지다. 이미지들은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 모든 면/부분에서 계속 변화한다. 그것들의 총체가 내재성이다. 그것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신은 screen이다. 우리는 그 스크린에 비춰진 이미지다.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내가 이미지이면 나를 구성하는 원자, 분자 모두 이미지다. 신은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따라서 내 안을 구성하는 원자들도 신이다.
모든 가능성의 집합/실재성의 질료/필연성의 형식을 동시에 지칭하는 신은 original한 존재다. 17세기에 신으로 표현했으니 이제 나(들뢰즈)에게 신이란 말이 필요 없으니 그것을 plan평면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n차원의 평면이다.
이미지들의 무한집합이 있다. 이미지들의 모든 면/부분들은 다른 이미지들과 관련해서 상관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므로 이 이미지들은 분할 가능하다. 그것을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으므로 그 이미지들은 n개의 면들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n개 차원과 n개의 항을 가진 집합이고 그런 집합을 plan이라고 부르겠다. 여기서 plan은 2차원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n차원의 plan이다. 이미지들이 구별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많은 차원을 갖는다. 이미지들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존재와 나타남이 동시에 일어난다/일치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이 plan 위에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들의 무한집합인데 이것이 또한 plan이다.
[이미지는 스피노자의 양태에 해당한다.] 여러분은 이 plan의 한 이미지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도 이 plan의 다른 이미지다. 테이블도 이미지 중 하나다. 이미지는 계속 움직이고 서로 상호작용한다.[원본 없이 이미지가 시뮬라르크]
들뢰즈에게 신이란 [모든] 가능성에서 필연적으로 실존[실재성]이 따라 나오는 존재여야 한다. 가능한 것, 필연적인 것, 실재성인 것의 총체가 신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이미지다.
▷ 들뢰즈의 1980.11.25. 강의에 따르면 17세기 화가들은 신을 소재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은 신을 이용해서 형태의 해방을 이뤄내고 형태가 삽화와 아무 관련 없는 지점까지 형태를 밀고 나간다. 형태가 속박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광적인 순수한 춤에 뛰어든다. 신을 그릴 때는 이것이 가능하다. 원본에 충실할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가 기독교에 종속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이용해서 선과 색의 해방이 이뤄진다. 이것을 철학, 즉 스피노자에까지 적용된다. 마침내 철학에서도 개념의 해방이 이뤄진다. 이는 스피노자를 염두에 둔 언급일 것이다.
17세기는 빛의 세기다. 빛을 통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기본적으로 1종 인식의 세계는 어둠, 밤이다. 2종 인식은 대명천지이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일의성만 있다. 2종 인식에서는 인과관계에 이해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파악하는 데 시각과 촉각을 사용했다. 17세기에 오면 오로지 시각만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평행론 = 사유역량과 실존 작용 역량의 동등성
▶ 스피노자의 후험적 증명과 선험적 증명
스피노자는 실재성의 양의 이유, 근거가 되는 것이 역량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실재성의 양, 즉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의 양만 가지고 비교했다. 스피노자는 『소론』에서 무한한 것을 인식할 수 역량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 스스로 그 역량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사유 역량을 경유한다. 하지만 『윤리학』에 가면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실존역량 자체만 놓고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실재성 양만으로 후험적 증명을 한다.
스피노자는 실재적 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역량을 끌고 온다. 『소론』에서는 무한한 것을 인식할 역량으로 가지고 증명한다. 『윤리학』에서는 인식 역량을 경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험적 증명이 선험적 증명을 야기한다. 선험적 증명은 ‘유한한 존재에 무한한 존재를 인식할 역량이 있다’라고 시작하지 않고 바로 무한한 존재에서 시작한다. 『소론』에서만 해도 신에서 출발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윤리학』에서는 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실체-속성-양태를 정의한 후 정의 6에 처음 신이 등장한다.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 즉 『윤리학』에서는 신을 전제하지 않는 증명을 찾고자 한다. 더 이상 신관념, 사유역량을 경유하지 않고 선험적 증명으로 나아갔다.
▷ 분유(分有)는 인간은 절대한 무한한 신의 사유 역량의 일부분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체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신의 갖고 있는 실존 작용 역량의 일정부분도 나누어 갖는다.
▷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신과 실체에 대해서 필연적이라는 것은 본질에서 필연적 실존이 따라 나온다는 것이고 양태들이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다른 원인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 개체와 신
개체 = 1[외연]/∞[내포], 신=∞[외연]/1[내포]
개체의 역이 신이다. 여기서 내포는 술어이고 전통철학에서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체 = 1[외연]/∞[내포]를 일단 동물에서 시작해 적용해보면, 사자보다는 동물이 외연이 크다.→ 동물의 외연을 1000이라고 하고 내포도 1000이라고 가정한다. → 동물 중 사자는 극히 일부이므로 외연을 10으로 가정할 수 있고 내포는 동물 중에서 갈기가 있고 포효하고 꼬리에 털이 있는 사자들의 특징들이 플러스가 되어 내포가 10000이 된다고 하자. 다시 사자에서 사하라의 사자를 보면 외연은 다시 줄어 5가 되고 내포는 더 늘어난다. 그런데 사자 중에서도 특정 사자는 1마리밖에 없다. 여기까지 도달하려면 내포가 무한대로 늘어나게 된다는 게 들뢰즈의 생각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히 갈 수 없으므로 어느 순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후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처럼 내포가 무한대가 되고 외연이 1이 되어야 개체에 도달할 수 있다. 개체는 고유명사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신이 된다. 이것은 외연이 무한대라는 것은 모든 게 신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왜 내포가 1일까? 내포는 어떤 존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라이프니츠는 개체적 실체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바로 개체적 실체가 1/∞이다. 똑같은 물방울조차도 내포가 다르다. 그것을 구별하려면 내포를 무한대로 늘려야 한다. 내포 안에는 시간, 공간 등 주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언제, 어디, 무엇]이 다 들어간다. 신에 대해서는 모든 모나들의 모나드라고 말한다. 모나드 각각 무한한 관점이 있다. 각각의 관점에서 모나드가 표현하는 세계는 공통세계인데 모나드 각각이 그것을 다 다르게 표현한다. clear하고 distinct하게 표현하는 region이 다르다. 똑같은 세계를 표현하되 밝게 표현하는 region이 있다. 그것에 의해서 구별이 된다. 그것은 곧 관점이 다르다는 의미다. 신은 모든 관점들의 관점이다.
모나드에 창이 없다는 것은 모나드 개념 안에 모든 사건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므로 창이 없는 것이다. 모나드 개념 안에 다 담겨 있다. 그렇게 외부의 작용을 받을 이유가 없어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고유명사는 다 모나드이다. 심지어 똑같이 생긴 물방울조차도 모나드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똑같은 공통세계를 다르게 표현한다. 각자에게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록 이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예정조화]. 내 모나드 안에 타자가 들어있고 타자의 모나드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 과거의 사건은 물론 미래의 사건도 들어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다양성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철학자다.
▶속성, 그리고 사유 속성
A, B, C, D … 수많은 속성이 있다. 각각의 속성은 신의 혹은 실체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리고 A, B, C, D… 속성 모두 형상적 본질과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갖고 있다. 이것들을 다 합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존 및 작용 역량이 된다. 하지만 사유 속성은 성격이 다르다. 사유 속성도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런데 A, B, C, D…속성의 양태는 사물들이다. 관념도 사물로 생각해야 한다. 일단,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을 놓고 보면, 사유 속성의 양태는 관념이다. 연장 속성의 양태는 물체이다. 이 두 가지는 대응한다. 관념은 형상적 실재성을 갖는 동시에 물체에 대한 관념으로서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 사유 속성은 이중적이다.
A 속성 a′, a″, ‴…
B 속성 b′, b″, b‴…
C 속성 c′, c″, c‴…
즉 사유 속성은 a.b,c…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다른 속성과는 지위가 다르다. 또한 사유 역량과 실존 및 작용 역량은 동일하다. 사유 속성의 양태는 관념이고 관념들은 인식 역량을 갖는다. 컵의 관념은 인식 역량을 갖는 동시에 실존 및 작용 역량을 갖는다.
▶ ~에 대한 관념인가? ~의 관념인가?
plan이 바뀐 듯? 신 또는 실체는 존재다. 신 또는 실체의 양태는 존재방식이다. 중간에 존재 형식이 있다. 바로 속성이 존재의 형식, 존재의 양태다. 사유 형식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연장 형식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plan이 바뀐다.
컵의 관념인가? 컵에 대한 관념인가? 컵의 관념은 사유속성으로 볼 때는 관념인데 연장속성으로 볼 때 물체다. 정신과 물체가 동일한 것인데 사유속성의 틀에서 보면 정신이라고 하고 연장속성의 틀에서 보면 물체다.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할 때는 관념을 사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사물과 동일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비소에게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비소한테도 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소 안에 양태들로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만물에는 영혼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게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테제 중 하나다. 그렇다면 반복하지만 컵에 대한 관념인가? 컵의 관념인가? 정신은 관념의 다발이다. 정신이라는 용기가 있어 거기에 관념이 담기는 게 아니라 관념들은 연쇄한다. 이것을 정신이라고 한다. 관념이 연쇄한 것이 나의 정신의 전체이다. 그렇다면 비소에도 관념의 다발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게 맞다. 바위에도 영혼이 있는데 역량이 너무 작아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테이블에도 인지능력이 있으나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물체는 운동과 정지의 빠름과 느림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 물체에 상응하는 정신의 느림과 빠름의 비가 있다. 예를 들어 사자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끊임없이 운동을 한다. 사자의 정신 안에도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있고 이것들은 끊임없이 운동한다.
그런데 17세기 철학자들은 운동의 반대가 정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운동이 가장 작아진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나한테는 신체가 있고 영혼이 있다. 테이블에도 신체와 영혼이 있다. 관념한테 사유 역량, 인식 역량이 있다고 할 때 내가 가진 관념에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관념들이 있고 관념들마다 인식 역량이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관념이 일정한 사유역량을 가진다는 것은 사유속성의 양태인 한에서 모든 관념은 일정한 인식역량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인식 역량을 갖는 게 관념인데 과연 관념은 누구의 관념인가? 내가 가진 사물에 대한 관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식은 “함께 태어나다”를 뜻하는 con+naître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정신, 인간과 세계, 사물과 개념이 일치한다고 보았다.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는 나팔을 인식하고 나무는 침대를 인식한다. 바다는 배를 인식하고 도끼는 나무를 인식한다. 불은 자기가 가열해 익히는 음식, 자기가 녹이는 구리, 자기가 불태운 로마를 인식한다. 그렇게 함께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서로를 인식한다. 즉 알아본다.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이 감각적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결국 형상적 관점에서 서로 비슷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손을 데면 열을 인식하면서 노랗게 되어 불의 색과 비슷해진다. 눈도 어떤 색깔을 갖고 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 인식론적 근원, 뿌리가 원천으로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사물한테는 인식능력이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