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note[프루스트와 기호들] 20200914

권순모
20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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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기호들 2부 1장 앙티 로고스

변증법

▶ 고대변증법
보통 변증법 하면 헤겔이 정립한 변증법을 떠올리는데 이 장에서 말하는 변증법은 고대의 변증법/변증술/문답술을 말한다. 플라톤의 『대화』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고 여러 직종/직업의 사람들이 등장해 서로 자신이 더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prétendents[지망자들,(~열망하다, ~주장하다prétendre, ~라고 주장하는 사람, ~을 열망하는 사람]라고 부르는데, 구혼자, 신랑감이라는 뜻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떠난 후 많은 남자들이 페넬로페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자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두고 간 활에 시위를 걸어 화살로 열두 개의 도끼자루 구멍을 모두 꿰뚫는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하겠다고 한다. 좋은 신랑감을 선별하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화』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서로 자신이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정의로운지 선별을 해야 한다. 이렇게 선별하는 자는 딸을 둔 아버지의 입장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이와 같은 선별하는 과정, 절차를 변증법이라 했다.

▶ 헤겔의 변증법 명제
-정신은 정신 아닌 것이 아니다.
-자아는 자아 아닌 것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와 칸트에 의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감각적 자연과 초감각적 자연이 분리된다. 이처럼 인간과 세계의 단절을 복원하려고 시도한 철학자들을 포스트 칸트주의자라고 하는데 헤겔, 피히테 등이 이에 속한다. 헤겔은 단절의 복원을 위해 위에서 말한 ‘정신 아닌 것’을 자연이라고 보고, ‘인간 또는 인간의 정신은 자연이 아니다’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정과 반을 거쳐 합으로 산출되는 정신은 자연과 통일된 더 상위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과 자연이 대립한 상태에서 정신이 자연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상위하는=초월하는 변증법적인 지양이 일어난다.

▶ 고대 변증법의 사유 방식
고대 변증법에도 변증법적 지양은 있으나 현대 변증법의 그것과는 다르다.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변증법자들은 세상은 모순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현대 변증법론자들은 세상이 모순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이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가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다고 주장한다.

고대 변증법자들은 세상은 소란하고turmoil 카오스적이며 모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소란하고 카오스적이고 모순적인 세상에서 벗어나서 별도의 정신적인 삶을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본질의 세계이고 이데아의 세계다. 즉 그들은 곧 감각적인sensible 세계에서 초감각적인intelligible 세계로 올라가고자 했다. 바로 이렇게 올라가는 방법이 변증술이다. 이들에게 감각적인 세계는 어둠의 세계이고 본질과 대결하는 appearance 세계다. 그들은 감각세계의 혼란, 혼돈과 싸우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별도의 정신적 삶을 발명 또는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테네와 같은 도시 국가, 기하학이 그런 류의 정신적 삶의 창조에 해당한다. 현대 변증법과 유사한 점도 있으나 문제 해결 방식이 다르다. 철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문제와 헤겔, 피히테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 해결 방식도 다른 것이다.

▶ 이 장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모두 상기réminiscence로 수정해야 한다.

플라톤의 상기설

▶ 플라톤에게는 윤회사상이 있었다. 전생이 있는데 레테의 강을 건너며 전생을 다 잊어버린다. 그 망각되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게 상기다.

기억 faculty의 두 가지 실행
- 경험적/상대적/하위 ordinary 실행
- 초월적/절대적/상위 extraordinary 실행

기억의 경험적 실행은 내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전에 알았던 것, 알고 있었던 것을 잊어버렸다가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살다가 잊어버렸다. 어느날 다시 만나도 기억이 안 나다가 집에 가서 갑자기 생각난다. 이는 경험적 실행으로 보통 기억이라고 하는 것에 해당한다.

기억의 초월적 실행은 영원히 망각되어 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현존한 적이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현존한 적이 없는 것이 바로 이데아이고 형상이다.

▶ 플라톤의 이데아
플라톤은 상기를 통해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침대의 이데아를 말한다. 침대는 침대이기도 하고 침대 아니기도 하다. 나무이기고 하고 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침대의 이데아는 오로지 침대이기만 한 것, 침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 쉽게 말하면 질료적인 것을 다 뺀 것을 말한다. 숫자 3은 통상 작은 수라고 생각하지만 숫자 1에 비하면 크다. 그러므로 3은 오로지 작기 만한 수는 아니다.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상대적인 숫자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오로지 작기만 한 작음의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것에 이데아가 있다. 심지어 어머니 이데아도 있다. 어머니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것이 성모마리아라고 주장한다. 오로지 어머니이기만 한 어머니여야 이데아인데, 통상 어머니는 누구의 딸이고 아내이다. 그런데 성모마리아는 어머니가 있지만 자가생식을 통해 예수를 낳았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어머니의 이데아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 프루스트에서의 경험적 실행과 초월적 실행
프루스트가 말하고자 한 상기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경험적 실행에서는 전에 있었던 일, 만난 적이 있거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마들렌을 먹고 콩브레가 떠오르는데, 이 때 콩브레는 현존한 적이 없는 콩브레이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수과거다. 현재의 어떤 것이 다른 현재로 대체되면서 과거가 되는 일은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프루스트가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였었던 과거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과거다. 마들렌을 먹고 떠올린 콩브레는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원래 알고 있던/현존했던 콩브레가 아니다. 이것이 이를테면 초월적 실행이다. 마들렌을 먹으면서 콩브레를 떠올린 게 초월적 실행이다. 왜냐하면 존재했던 것/알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들렌은 기억을 촉발하는 trigger다. 마들렌을 먹으며 어떤 기억을 떠올렸는가가 중요하고 콩브레는 재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 경험적 실행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상상할 수도 있다. 초월적 실행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기억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를 잊어버렸다가 갑자기 떠올랐다면 전화해서 목소리를 듣거나 만나서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악수를 해서 만날 수도 있다. 다른 감각으로 대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초월적 실행은 기억만 할 수 있다.

▶ 플라톤의 본질로서의 이데아, 그리고 현상세계의 이데아 copy
프루스트가 본질이라는 말을 할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유사점이 있다. 플라톤이 ‘오로지 ~이기만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을 상기라고 한다. 이 점에서 프루스트도 비슷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 세계에서 질quality 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갖는다. 뜨거운 것이 상대적으로 차가운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모순된다. 플라톤은 이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모두가 자기가 정의롭고 선하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이들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했다. ‘정말 정의로운 것은 너희들이 아니다. 현실 세계, 감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아에 있다’는 것이다.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정의로움의 이데아가 있어야 현상계에 있는 것들에 서열을 매길 수 있다. 오로지 정의롭기만 한 것이 기준이 되어서 열등한 세계인 현상계에 있는 정의롭지 못한 것들의 등급을 매겨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이데아의 사본copy만 있을 뿐이다. copy들은 이데아를 열등하고 저급하게 생산한다.

플라톤은 변증술, 문답법을 통해 자기가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정의롭지 않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에 따르면 현자의 임무는 현상계의 prétendents를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로 데려가는 것이다. 먼저 현자가 essence=가지계의 세계로 간 다음 다시 우리가 보는 세계=appearance의 세계=감각의 세계로 내려와서 무지한 중생을 본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의 이미지(by 들뢰즈)

▶ 사유 이미지 역사의 3단계

나는 진리를 원한다.

1) 플라톤=소크라테스 : ‘나는 진리를 원하다’는 곧 나는 속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속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prétendents에게 속고 싶어하지 않았다.

2) 데카르트 : ‘나는 진리를 원한다’는 내가 나를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내가 착각을 하거나 잘못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끊임없이 의심한다. 진리를 오류로 착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 칸트 : ‘나는 진리를 원한다’는 나는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데카르트와 칸트 사이에 종교개혁이 있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가 중요해진다. 칸트는 감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의 단절을 시도한다. 칸트에게 인식 대상은 감각 대상밖에 없다. 초감각 세계, 물 자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초감각적 세계는 도덕적 이성적 존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거기는 이념들이 있고 도덕적 존재들이 공유하는 세계다.

▶ 칸트 철학의 정수는 실천이성

칸트에 이르면 순수이성이 실천이성에 종속된다. 인식보다 도덕이 더 중요해진다. ‘나는 도덕적 존재이고 싶고 내가 타인이 속이는 일이 있더라도 속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적 종으로 인간은 칸트 철학에서 처음 출현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 사람들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남을 속이게 되면서도 타인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의식, 즉 나는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칸트는 인식에는 더 높은 목적, 이성의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처럼 사변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에 대한 관심을 말하는데 이때는 이성이 지성에게 주도권을 맡긴다. 만일 이성이 개입에 나서면 비합법적 사용이 된다. 각 관심 영역별로 어떤 faculty가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가 달라진다.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실천이성, 즉 도덕이다. 이것이 칸트가 이전 합리론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순수이성 비판’만 보고 칸트가 인식론자로 오해하면 안된다. 칸트철학의 정수는 실천이성이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인식 메커니즘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게 인식론적 관심은 부차적 관심이다. 칸트한테는 도덕적 실천적 존재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 ‘나는 무엇을 인식하는가&rsquo=순수이성보다 ‘무엇을 실천하는가&rsquo=실천이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사유의 이미지의 거대한 전환mutation

1) 칸트에 의해 지식이 믿음으로 대체된다. 이미 흄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지식, 인식이 합법적 믿음이냐 아니면 비합법적 믿음이냐가 중요해진다.
2) 바깥의 사유 : 내부가 바깥으로 대체된다. 내적인 것보다 바깥이 더 중요해진다.
3) 나에게 신체를 달라 : 정신이 신체로 대체된다. 정신보다 신체가 중요해진다.[니체]

▶ 비자발적 기억을 통해 불러 일으켜지는 본질은 미리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창조하는 게 예술가이다. 예술을 보고 기쁨을 확장시키기 위해 그것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이 있다. 예술가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철학자는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는 초월적 실행을, 음악가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하는 청각의 초월적 실행을, 화가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시각의 초월적 실행을 행한다. 사유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바로 바깥이며 잠재태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