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프루스트와 기호들] 1부 - 4장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

권순모
20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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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기호들

제 4 장.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 (pp.6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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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그것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방출 양태 때문에 이 기호들은 물질적이다. 이 기호들은 자신들의 소유주인 대상 속에 절반쯤 싸여있다. 감각적 성질은 여전히 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p.69)


*뱅퇴이유의 소악절

 음조는 완전히 정신적인 하나의 실재물entité을 덮고 있는 <음향이라는 외관>이다. 반면 피아노는 이와는 본성상 완전히 다른 건반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이미지로서 공간속에 위치할 뿐이다. <……소악절의 강요에 의해서 소악절이 모습을 나타내는 데 필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악절의 인상 자체가 비물질적이다. (p.70)


*라베르마의 몸짓

 그녀의 몸짓은 어떤 본질 혹은 어떤 이데아를 굴절시키는 투명한 육체를 이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정신에 거역하는, 영적인 것이 빠져 나간 물질의 찌꺼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p.70)


 예술의 기호 외의 다른 기호들은 물질적이다. 그것들만의 고유한 전개 양식 혹은 펼침[설명]의 양식 때문이기도 하다. 확실히 현재와 과거의 두 인상은 완전히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들은 물질적으로 두 가지 인상이다. 감각적 기호의 질서 가운데 덜 <물질적인> 것은 기억이 아니라 욕망과 상상력에 도움을 청한다. (pp.70-71)


 예술은 우리에게 참된 통일을 가능케 해준다. 하나의 비물질적인 기호와 하나의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와의 통일 말이다. 본질이 예술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한, 본질이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기호와 의미의 합일을 일컫는다. (p.71)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기호들은 아직은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그 기호들의 의미는 늘 다른 [물질적인] 사물 속에 [감싸여] 있으며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이 있는 것이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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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차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différence이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즉 <삶에서, 여행에서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한 다양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p.72)


 본질이란 주체의 중심에 있는 어떤 최종적인 성질의 현존으로서, 주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여기서 본질은 내재적 차이,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는 ‘질적인 차이différence qualitative’ 이다. 이런 점에서 프루스트는 라이프니츠주의자이다. 본질들은 진정한 모나드 monade[단자(單子)]들이며 각각의 모나드는 각각이 세계를 표현하는 관점에 의해 정의된다. 각각의 관점은 그 자체가 모나드 내부의 궁극적 성질을 나타낸다. 관점은 차이 자체이며 우리의 유일한 문은 완전히 정신적이다. (p.72)


 우리에게는 예술적인 상호 주관성만이 있을 뿐이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p.73)


 뱅퇴이유조차 소악절을 창조했다기보다는 <베일을 벗겨 드러낸 것이다dévoiler>. (p.73) (역주.3) <……누군가 눈에 보이지 않는 탐색자가 그 성스런 세계에 접근하여 그 하나를 가져와서는 잠시 그것을 지상에 빛나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게 되고 매혹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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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질과 주체의 구별, 영혼 불멸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논거


 모든 주체는 각각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표현한다. 하지만 관점이란 차이 자체, 절대적인 내재적 차이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주체는 절대적으로 다른 [각각의] 세계를 표현하고, 그것을 표현한 주체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세계: 우리를 속이는 투영(投影), 모든 세계를 획일화해 버리는 경계). [주체에 의해] 표현된 세계는 주체와 뒤섞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본질이 자기 자신의 현존existence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현존과 분명하게 구별되듯이 [주체에 의해 표현된] 세계는 주체로부터 구별된다. (p.74)


 세계는 주체 자체의 본질로서가 아니라, 존재l'Etre의 본질로서 또는 주체에게 드러나는 영역으로서의 존재의 본질로서 표현된다. 본질은 실로 한 주체 가운데 있는 최종적 성질이다. 이 성질은 주체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주체와는 별도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 즉 그것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의 인식되지 않은 성질>이다. 본질이 주체 속에 감싸이고 자기가 [주체로 둘둘] 휘감겨지게 함으로써,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도 본질이며 이러한 본질들이 개별자들을 구성한다. 본질은 단순히 개별적인 것만이 아니라 개별화를 수행하는 자이다. (pp.74-75)


 본질들은 우리의 <인질들>이며 우리가 죽으면 함께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들이 영원하다면 우리도 어떤 방식으로든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질들은 죽음의 가능성을 줄인다. [이런 영혼 불멸의] 유일한 논거 혹은 유일한 가능성은 미적인 성격의 것이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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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질의 세계, 시간 자체의 복합적인 상태


 감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는 언제나 세계 일반의 시작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절대적인 근원적 시작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처럼 이 세상에는 아직 그들 둘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한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둘 말고는 아무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루스트는 이를 <자연의 근원적 요소들의 끊임없는 재창조>라고 일컫는다. (p.76)


 본질은 시간 자체의 탄생이다.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전개développement, 모든 펼침déploiement, 모든 <설명explication>에 선행하는 근원적인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서 몇몇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복합complication>이라는 심오한 단어를 사용했다. 복합은 일자(一者, l‘Un) 속에서 다자(多者, le multiple)들을 전개시키고, 다자들을 일자 속에 정립한다. (p.76) (역주.7) 복합 개념에 대한 설명. 들뢰즈 철학에서 <복합>이란 말은 두 가지 점에 유념해서 이해해야 한다. p.77 참고.


 영원성은 그들에게 시간 자체의 복합적인 상태이다. 이 우주는 내재적 복합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하강하는 펼쳐짐explication의 질서에 따라 조직된다. (p.78)


*샤를뤼스의 복합적인 상태

 샤를뤼스의 천재성은 그를 <복합적인> 상태로 만드는 모든 영혼을 흡수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샤를뤼스는 끊임없이 근원적인 기호들, 해석자가 해독해야 할, 다시 말해 전개expliquer시켜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이다. (p.78)


 예술가로서의 주체는 본질 자체 속에 감싸여 있는 복합적인 근원적 시간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이 근원적 시간은 모든 계열들과 모든 차원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의 의미가 있다. 되찾은 시간은 순수한 상태로 예술의 기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잠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기억을 넘어서 있다. 예술은 본질에 관한 능력인 순수 사유에 호소한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p.79)


 프루스트에게 초시간적인 것이란 탄생의 상태에 있는 이 시간과 이 시간을 되찾아 내는 예술가로서의 주체이다. 예술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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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떻게 본질이 예술 작품 속에서 육화하는가?


 본질은 질료 속에서 육화한다. 이 질료는 가연적(可延的)이며,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단어, 소리, 색깔 이 모두를 가로질러 표현되는 것은 자유로운 질료이다. (p.79)


*정신화된 질료: 돌덩어리들의 기하학, 직선들의 평행선 / *기체적 질료: 고도[높이]


 예술은 질료의 진정한 변환이다. 근원적인 세계의 성질을 굴절시키기 위해 예술 속에서 질료는 정신화spiritualiser되고 물리적 환경들은 비물질화dématérialiser된다. 그리고 물질을 이렇게 다루는 일은 오로지 <문체 style>를 통해 이루어진다. (p.80-81) (역주.12) 문체란 기술technique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다. 문체란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는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본질은 결코 하나의 대상과 뒤섞이지 않고 서로 완전히 다른 두 대상을 결합시킨다. 그 본질을 구성하는 궁극적 성질은 서로 다른 두 대상의 <공통적 성질>로서 표현된다. 말하자면 문체란 본질적으로 은유métaphore이다. 그리고 은유는 본질적으로 변신métamorphose이다. (p.81)


 물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고 본질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서, 본질 자체를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들의 불안정한 대립, 근원적 복합, 근원적인 요소들의 투쟁과 교환을 재생산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문체인 것이다. 하지만 문체는 연속적이고 굴절된 탄생이고, 본질들에 적합한 질료들 속에서 되찾은 탄생이다. 문체는 인간이 아니다. 문체는 본질 자체이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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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차이와 반복이라는 본질의 두 힘


 본질은 특정하고 개별적일 뿐 아니라, 개별화시키는 활동도 한다. 본질 자체는 본질 자신이 육화되는 장소인 질료들을 개체화시키며 또 규정한다. 다시 말해 본질이란 본래 차이이다. 그러나 또한 본질에게 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동일해지는 능력이 없다면, 본질은 다양하게 만드는 능력, 다양해질 능력도 없을 것이다. 본질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아무것도 그것에 대체될 수 없는 이상, [본질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궁극적 차이인 본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차이와 반복은 겉으로만 대립될 뿐이다. (p.82)


 이는 차이란 한 세계의 성질로서, 가지각색의 환경들을 가로지르고 다양한 대상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자동 반복을 통해서만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복은 하나의 근원적인 차이에 단계들degrés을 구성해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다양성도 역시 근본적인 반복의 층위niveaux들을 이룬다. (p.83)


 차이와 반복은 뗄 수 없고 서로 상관적인 본질의 두 힘puissance이다. 반복이란 차이의 힘이며, 마찬가지로 차이란 반복의 힘이기 때문이다. (p.83)


 삶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두 힘을 갖추고 있지 않다. 삶은 그 두 힘의 가치를 깎아 내리면서만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가장 낮은 층위와 가장 약한 단계에서만 본질을 재생산한다. (p.83)


*늙어가는 예술가 <두뇌의 노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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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술적 특권의 표현 방식, 본질의 변형 법칙들


 첫째, 예술에서 질료들은 정신화되고 환경들은 비물질화된다.

 둘째, 이 기호들의 의미는 하나의 본질, 이 기호들의 모든 능력 속에서 확립되는 본질이다.

 셋째, 기호와 의미, 본질과 변화한 물질은 완벽한 합치 속에서 뒤섞이고 통일된다.


 본질은 예술의 영역에서만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세계의 목적이고 견습생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종착점이다. (p.84)


 본질은 일단 드러나게 되면 다른 영역들 속에서도 육화하며 그때부터 이 다른 영역들은 예술작품에 통합될 것이다. 거기에서 본질은 근원적인 몇 가지 성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성질들을 얻는데, 이 새 성질들은 점점 더 본질에 거역하는 이 질료들 속으로 본질이 하강함을 표현한다. 삶의 [여러] 규정들에 상응하는 본질의 변형 법칙들이 있는 것이다.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