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3성찰-제4성찰 (이현복 역, 문예 출판사, pp. 56-90)
제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내가 사유하는 것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이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명석 판명한 지각 이외에 다름아니다(56-57).
그러나 내가 전에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나중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발견된 것이 많이 있다(57). […] 나에게 아주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신이 나에게 잘못을 범할 수 있는 본성(natuam)을 부여할 수도 있다[…](58). […]그러므로 이런 의심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기만자일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59).
먼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모든 생각들을 몇 종류로 나누고, 그 중 어떤 것에 본래적인 진리와 거짓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59). 내 생각들 가운데는 흡사 [인간, 키마이라, 하늘, 천사, 신과 같은]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 있[다]. [그 외에] 또 다른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혹은 정념으로, 다른 것은 판단으로 불린다(60). 이제 관념에 관해 말해 본다면, 관념 그 자체만을 고찰하고 어떤 다른 것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관념은 본래 거짓일 수 없다(60). 또한 의지나 정념 자체에 있어서도 거짓을 겁낼 필요가 없다. […]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판단 뿐인데, 여기에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판단에 있어서 발견되는 가장 주요하고 흔한 오류는,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외부에 있는 사물과 유사하거나 일치한다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60).
여기서는 특히 이른바 내 외부에 현존하는 사물로부터 오는 것으로 간주되는 관념에 대해, 내가 왜 이런 관념이 외부 사물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근거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61). (1) 관념은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관념은 원치 않아도 나에게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61). (2) [사유와 존재의 유사성에 대해] 자연이 나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면], [이는] 어떤 자발적 충동에 의해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는 것들이 아니다.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는 것들, 예컨대 내가 의심하는 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 등은 결코 의심될 수 없다. 이 자연의 빛만큼 신뢰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또 그것이 참이 아니라고 나에게 가르쳐 줄 만한 어떤 능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충동에 관해 말하자면, […] 이것을 신뢰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이런 관념이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내 외부에 있는 사물에서 유래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관념을 산출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관념이 설령 나와 다른 사물에서 유래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그 관념이 이 사물과 유사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많은 경우에 이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자주 보았다(pp. 62-63, 태양의 예 참고). […] 나와 다른 어떤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믿음은 확실한 판단이 아니라 단지 맹목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이런 관념이 있는 사물 가운데 내 외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이 있다. 즉, 이런 관념이 사유 양태인 한에서는, 그것 간에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그것 모두 똑같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관념은 이런 것을, 다른 관념은 저런 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에서는, 이 관념들은 서로 아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실체를 나타내고(exhibent) 있는 관념은 단지 양태 혹은 우연적 성질을 나타내고 있는 관념보다 더 큰 어떤 것이고, 이른바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신의 관념, 즉 내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지전능하고, 자신 이외의 만물의 창조자인 최고의 신을 인식하게 되는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나타내고 있는 관념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63-64). […]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완전한 것, 즉 더 많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64).
[…] 관념이 어떤 특정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면, 이는 그 관념이 갖고 있는 표상적 실재성과 적어도 동등한(tantumdem)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는 원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는 있지만, 이런 소급은 그러나 무한히 계속될 수 없으며, 마침내 제일의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른바 원형(archetypi)과 같은 것이며, 관념 속에 그저 표상적으로만 있는 모든 실재성이 이 원형 속에는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아주 분명해진다(66).
그렇다면 이로부터 무엇이 귀결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서 그 표상적 실재성이 대단히 커서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사물도 현존하고 있음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66).
관념의 종류.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는 나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관념이 있[고], 또한 다른 관념들, 즉 신,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 천사, 짐승, 마지막으로 나와 유사한 다른 인간을 표현하는 관념이 있다(67). 다른 인간, 짐승 혹은 천사[는] 나 자신, 물질적인 사물 및 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합성될 수 있다(67). 그러나 물질적 사물의 관념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에 있어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야기될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 이 관념에 있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극히 적다. […] 빛, 색깔, 소리, 냄새, 맛, 뜨거움, 차가움 및 다른 촉각적 성질은 나에게 아주 애매 모호하게 생각되므로 나는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즉 내가 이것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어던 사물의 관념인지 아니면 사물이 아닌 것의 관념인지를 알지 못한다(67-68). (데카르트는 이를 ‘질료적 허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이런 관념이 참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극히 적은 실재성만을 나에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하지 않는 거소가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이런 관념이 왜 나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68). [연장적 실체]에 관해서는, 즉 실체, 지속, 수 및 이와 유사한 것은 내 자신의 관념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69). [나와 연장적인 것은] 양자가 실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연장, 형태, 위치 및 운동은, 내가 오직 사유하는 거ㅓㅅ인 한 내 안에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한 실체의 양태에 불과하므로 그리고 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그것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69).
그러므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신의 관념뿐이며, 이 관념이 나 자신에서 나올 수 있는 지를 고찰해보자.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그러므로 […]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된다(69).
유한과 무한. 나 자신이 실체인 한 나는 실체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관념은 무한 실체의 관념일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 하기 때문이다(70). 또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이 아니라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 무한 실체 속에는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 즉 신에 대한 지각은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앞선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의 관념은 어쩌면 질료적으로 허위이며, 따라서 무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해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와 반대로 신의 관념은 극히 명석 판명하며,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의 관념보다 그 자체적으로 더 참된 관념은 없으며, 이 관념보다 허위의 의혹을 덜 받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70). 이 존재자의 관념이 앞에서 말한 차가움의 관념처럼 실재적인 어떤 것도 나에게 나타내지 못한다고는 가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념[신의 관념]은 또한 극히 명석 판명하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고 참된 것으로, 또 어떤 완전성을 동반하는 것으로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이 관념 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71).
유한한 것인 나에게 파악되지 않는 다는 것은 무한한 것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 내가 이 무한한 것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관념들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가장 명석 판명한 관념이기 위해서는, […]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 내가 모르고 있는 다른 많은 것이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신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잠재성이 극대화되어 완전히 현실태가 된다고 할 때, 나는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72). […]이런 것은 신의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신의 관념에는 가능적인 것이란 전혀 없으며, 또 점진적은 증가라는 것도 불완전성의 가장 확실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신은 그 완전성에 그 어떤 것도 추가될 수 없을 정도로 현행적으로 무한하다고 나는 생각한다(72). [또한] 관념의 표상적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무와 다름 아닌 가능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즉 형상적인 것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음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73).
그러므로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존재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에도 현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서 나왔는가? 물론 나 자신에서, 아니면 부모로부터, 아니면 신보다 덜 완전한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73).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 내 안에 있는 관념이 지닌 모든 완전성을 나에게 주었을 것이고, 이로써 나 자신이 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저 커다란 것을 내 자신에서 얻었다면 훨씬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신의 관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74).
시간. […] 내 삶의 시간 전체는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부분 각각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그래서 내가 방금 전에 현존했다고 해서 지금 내가 현존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지금 이 순간이 나를 새롭게 창조해야, 즉 나를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본성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면, 어떤 사물을 매순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작용은 아직 현존하지 않는 사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 들어가는 것과 똑같다는 것은 분명하다(75). [창조력 혹은 보존 능력에 관하여] 나는 사유하는 것 이외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그런 힘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고 있으며, 바로 이로부터 나는 나와 다른 어떤 존재자에 의존되어 있음을 아주 분명히 알게 된다(75).
원인 속에는 결과 속에 있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정도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또 신의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내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75).
마지막으로 부모에 관해 말하자면, […] 그들은 사실 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내가 사유하는 것인 한 결코 나를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정신만[인] 나에 어떤 성향만을 넣어 주었을 뿐이다(77).
이제 검토될 것은, 내가 어떻게 신의 관념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관념을 감각에서 끌어 내지 않았다(77).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내 안에 그 관념을 심어 놓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77-78). 신이 실제로 현존하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지금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즉 내가 내 안에 신의 관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78).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은 기만자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기와 기만은 어떤 결함에 의거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기 때문이다(78).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내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매번 주목할 때마다 비의존적이고 완전한 존재자, 즉 신에 대한 극히 명석 판명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의 간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즉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신은 현존하고, 내 현존 전체는 매순간 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분명하게 결론 짓는다(80). 그리고 이미 나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물을 지니고 있는 참된 신을 이렇게 관상하는 것으로부터 나머지 다른 사물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길을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1) 신이 나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소임이나 기만 속에는 어떤 불완전성이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내 안에 어떤 판단 능력이 있음을 경험하는데, 이 능력은 […] 분명히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신은 나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므로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나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다는 것도 확실하다.
무(비존재자)와 신(존재자) 사이에 위치한 나. 내가 오직 신만을 생각하고, 내 생각을 오직 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동안은 오류나 거짓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범하는 무수히 많은 오류의 근원지는?] 나는 이를 테면 신과 무, 즉 최고의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중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내가 최고 존재자에 의해 창조된 것인 한 나를 속이거나 오류를 유도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나는 무 즉 비존재자를 어느 정도 분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81-82). 오류는 내 속에 원래 있어야 할 인식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나의 본성은 아주 약하고 제한되어 있는 반면, 신의 본성은 광대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아주 많은 것을 신이 할 수 있음은 극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사람들이 흔히 목적으로부터 끌어 내는 모든 종류의 원인은 자연적 사물들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한다. 신의 목적을 알아 내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기 때문이다(83).
나의 오류는, 동시에 작용하는 두 가지 원인에, 즉 내 안에 있는 인식 능력과 선택 능력, 즉 자유 의지, 다시 말해 오성과 의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성에 의해 나는 관념을 지각할 뿐이며, 그런 다음에 이 관념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84).
인식 능력, 오성. 오류는 오성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런 관념이 나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단지 부정적으로, 나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84).
내 안에서 그보다 더 큰 것의 관념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의지, 즉 자유의지뿐이다. 내 안에 있는 의지[는]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 외부의 힘에 의해ㅐ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는 어떠한 신의 은총이나 자연적 인식에 의해서도 감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증대되고 강화된다(85).
신으로부터 받은 내 의지력 그 자체는 내 오류의 원인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광대하고 또 그 유에 있어 완전하기 때문이다(86). 그렇다면 여기서 오류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 의지의 활동 범위가 오성보다 더 넓기 때문에 내가 의지의 활동을 오성이 의해 인식된 범위 안에 묶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인식하지도 않은 것에 의지를 작동시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에 대해 의지는 비결정성의 상태에 있으므로 참된 것과 선한 것에서 쉽게 벗어나고, 이로써 나는 오류를 범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86).
오성의 지각이 의지의 결정보다 언제나 앞서야 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지의 그릇된 사용 속에 오류의 형상을 구성하는 결여가 있는 것이다. 결여는 말하자면 활동 자체 속에, 그것도 나로부터 기인하는 한에서의 활동 자체 속에 내재해 있을 뿐, 신이 나에게 부여한 능력이나 신에게 의존하는 활동 속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88).
오성이 명석 판명하게 보여 주는 것에만 판단을 내리도록 의지를 묶어 둔다면,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명석 판명한 지각은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며, 그 작자는 반드시 신, 말하자면 기만성을 지니지 않고 최고 완전한 신이어야 하고, 그래서 명석 판명하게 인식된 것은 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90).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3성찰-제4성찰 (이현복 역, 문예 출판사, pp. 56-90)
제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내가 사유하는 것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이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명석 판명한 지각 이외에 다름아니다(56-57).
그러나 내가 전에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나중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발견된 것이 많이 있다(57). […] 나에게 아주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신이 나에게 잘못을 범할 수 있는 본성(natuam)을 부여할 수도 있다[…](58). […]그러므로 이런 의심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기만자일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59).
먼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모든 생각들을 몇 종류로 나누고, 그 중 어떤 것에 본래적인 진리와 거짓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59). 내 생각들 가운데는 흡사 [인간, 키마이라, 하늘, 천사, 신과 같은]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 있[다]. [그 외에] 또 다른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 이러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의지 혹은 정념으로, 다른 것은 판단으로 불린다(60). 이제 관념에 관해 말해 본다면, 관념 그 자체만을 고찰하고 어떤 다른 것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관념은 본래 거짓일 수 없다(60). 또한 의지나 정념 자체에 있어서도 거짓을 겁낼 필요가 없다. […]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판단 뿐인데, 여기에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판단에 있어서 발견되는 가장 주요하고 흔한 오류는,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외부에 있는 사물과 유사하거나 일치한다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60).
여기서는 특히 이른바 내 외부에 현존하는 사물로부터 오는 것으로 간주되는 관념에 대해, 내가 왜 이런 관념이 외부 사물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근거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61). (1) 관념은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관념은 원치 않아도 나에게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61). (2) [사유와 존재의 유사성에 대해] 자연이 나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면], [이는] 어떤 자발적 충동에 의해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는 것들이 아니다.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는 것들, 예컨대 내가 의심하는 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 등은 결코 의심될 수 없다. 이 자연의 빛만큼 신뢰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또 그것이 참이 아니라고 나에게 가르쳐 줄 만한 어떤 능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충동에 관해 말하자면, […] 이것을 신뢰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이런 관념이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내 외부에 있는 사물에서 유래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관념을 산출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관념이 설령 나와 다른 사물에서 유래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그 관념이 이 사물과 유사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많은 경우에 이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자주 보았다(pp. 62-63, 태양의 예 참고). […] 나와 다른 어떤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믿음은 확실한 판단이 아니라 단지 맹목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이런 관념이 있는 사물 가운데 내 외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이 있다. 즉, 이런 관념이 사유 양태인 한에서는, 그것 간에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그것 모두 똑같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관념은 이런 것을, 다른 관념은 저런 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에서는, 이 관념들은 서로 아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실체를 나타내고(exhibent) 있는 관념은 단지 양태 혹은 우연적 성질을 나타내고 있는 관념보다 더 큰 어떤 것이고, 이른바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신의 관념, 즉 내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지전능하고, 자신 이외의 만물의 창조자인 최고의 신을 인식하게 되는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나타내고 있는 관념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63-64). […]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완전한 것, 즉 더 많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64).
[…] 관념이 어떤 특정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면, 이는 그 관념이 갖고 있는 표상적 실재성과 적어도 동등한(tantumdem)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는 원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는 있지만, 이런 소급은 그러나 무한히 계속될 수 없으며, 마침내 제일의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른바 원형(archetypi)과 같은 것이며, 관념 속에 그저 표상적으로만 있는 모든 실재성이 이 원형 속에는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아주 분명해진다(66).
그렇다면 이로부터 무엇이 귀결될 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서 그 표상적 실재성이 대단히 커서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사물도 현존하고 있음이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66).
관념의 종류.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는 나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관념이 있[고], 또한 다른 관념들, 즉 신,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 천사, 짐승, 마지막으로 나와 유사한 다른 인간을 표현하는 관념이 있다(67). 다른 인간, 짐승 혹은 천사[는] 나 자신, 물질적인 사물 및 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합성될 수 있다(67). 그러나 물질적 사물의 관념에 관해 말하자면,
이것에 있어서는 나 자신으로부터 야기될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 이 관념에 있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극히 적다. […] 빛, 색깔, 소리, 냄새, 맛, 뜨거움, 차가움 및 다른 촉각적 성질은 나에게 아주 애매 모호하게 생각되므로 나는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즉 내가 이것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어던 사물의 관념인지 아니면 사물이 아닌 것의 관념인지를 알지 못한다(67-68). (데카르트는 이를 ‘질료적 허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이런 관념이 참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극히 적은 실재성만을 나에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재하지 않는 거소가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이런 관념이 왜 나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68). [연장적 실체]에 관해서는, 즉 실체, 지속, 수 및 이와 유사한 것은 내 자신의 관념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69). [나와 연장적인 것은] 양자가 실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연장, 형태, 위치 및 운동은, 내가 오직 사유하는 거ㅓㅅ인 한 내 안에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한 실체의 양태에 불과하므로 그리고 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그것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69).
그러므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신의 관념뿐이며, 이 관념이 나 자신에서 나올 수 있는 지를 고찰해보자.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그러므로 […]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된다(69).
유한과 무한. 나 자신이 실체인 한 나는 실체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관념은 무한 실체의 관념일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 하기 때문이다(70). 또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이 아니라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 무한 실체 속에는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 즉 신에 대한 지각은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앞선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의 관념은 어쩌면 질료적으로 허위이며, 따라서 무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해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와 반대로 신의 관념은 극히 명석 판명하며,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의 관념보다 그 자체적으로 더 참된 관념은 없으며, 이 관념보다 허위의 의혹을 덜 받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70). 이 존재자의 관념이 앞에서 말한 차가움의 관념처럼 실재적인 어떤 것도 나에게 나타내지 못한다고는 가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념[신의 관념]은 또한 극히 명석 판명하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고 참된 것으로, 또 어떤 완전성을 동반하는 것으로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이 관념 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71).
유한한 것인 나에게 파악되지 않는 다는 것은 무한한 것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 내가 이 무한한 것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관념들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가장 명석 판명한 관념이기 위해서는, […]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 내가 모르고 있는 다른 많은 것이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신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잠재성이 극대화되어 완전히 현실태가 된다고 할 때, 나는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72). […]이런 것은 신의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신의 관념에는 가능적인 것이란 전혀 없으며, 또 점진적은 증가라는 것도 불완전성의 가장 확실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신은 그 완전성에 그 어떤 것도 추가될 수 없을 정도로 현행적으로 무한하다고 나는 생각한다(72). [또한] 관념의 표상적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무와 다름 아닌 가능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즉 형상적인 것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음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73).
그러므로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존재자가 현존하지 않을 때에도 현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서 나왔는가? 물론 나 자신에서, 아니면 부모로부터, 아니면 신보다 덜 완전한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73).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 내 안에 있는 관념이 지닌 모든 완전성을 나에게 주었을 것이고, 이로써 나 자신이 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완전성’이라는] 저 커다란 것을 내 자신에서 얻었다면 훨씬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신의 관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74).
시간. […] 내 삶의 시간 전체는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부분 각각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그래서 내가 방금 전에 현존했다고 해서 지금 내가 현존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지금 이 순간이 나를 새롭게 창조해야, 즉 나를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본성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면, 어떤 사물을 매순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작용은 아직 현존하지 않는 사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 들어가는 것과 똑같다는 것은 분명하다(75). [창조력 혹은 보존 능력에 관하여] 나는 사유하는 것 이외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그런 힘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고 있으며, 바로 이로부터 나는 나와 다른 어떤 존재자에 의존되어 있음을 아주 분명히 알게 된다(75).
원인 속에는 결과 속에 있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정도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또 신의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내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75).
마지막으로 부모에 관해 말하자면, […] 그들은 사실 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내가 사유하는 것인 한 결코 나를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정신만[인] 나에 어떤 성향만을 넣어 주었을 뿐이다(77).
이제 검토될 것은, 내가 어떻게 신의 관념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관념을 감각에서 끌어 내지 않았다(77).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내 안에 그 관념을 심어 놓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77-78). 신이 실제로 현존하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지금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즉 내가 내 안에 신의 관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78).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은 기만자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기와 기만은 어떤 결함에 의거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기 때문이다(78).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내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매번 주목할 때마다 비의존적이고 완전한 존재자, 즉 신에 대한 극히 명석 판명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의 간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즉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신은 현존하고, 내 현존 전체는 매순간 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분명하게 결론 짓는다(80). 그리고 이미 나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물을 지니고 있는 참된 신을 이렇게 관상하는 것으로부터 나머지 다른 사물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길을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1) 신이 나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소임이나 기만 속에는 어떤 불완전성이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내 안에 어떤 판단 능력이 있음을 경험하는데, 이 능력은 […] 분명히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신은 나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므로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나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다는 것도 확실하다.
무(비존재자)와 신(존재자) 사이에 위치한 나. 내가 오직 신만을 생각하고, 내 생각을 오직 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동안은 오류나 거짓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범하는 무수히 많은 오류의 근원지는?] 나는 이를 테면 신과 무, 즉 최고의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중간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내가 최고 존재자에 의해 창조된 것인 한 나를 속이거나 오류를 유도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나는 무 즉 비존재자를 어느 정도 분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81-82). 오류는 내 속에 원래 있어야 할 인식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나의 본성은 아주 약하고 제한되어 있는 반면, 신의 본성은 광대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아주 많은 것을 신이 할 수 있음은 극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사람들이 흔히 목적으로부터 끌어 내는 모든 종류의 원인은 자연적 사물들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한다. 신의 목적을 알아 내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기 때문이다(83).
나의 오류는, 동시에 작용하는 두 가지 원인에, 즉 내 안에 있는 인식 능력과 선택 능력, 즉 자유 의지, 다시 말해 오성과 의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성에 의해 나는 관념을 지각할 뿐이며, 그런 다음에 이 관념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84).
인식 능력, 오성. 오류는 오성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런 관념이 나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단지 부정적으로, 나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84).
내 안에서 그보다 더 큰 것의 관념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의지, 즉 자유의지뿐이다. 내 안에 있는 의지[는]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즉, 어떤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하는 데에—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 외부의 힘에 의해ㅐ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는 어떠한 신의 은총이나 자연적 인식에 의해서도 감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증대되고 강화된다(85).
신으로부터 받은 내 의지력 그 자체는 내 오류의 원인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광대하고 또 그 유에 있어 완전하기 때문이다(86). 그렇다면 여기서 오류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 의지의 활동 범위가 오성보다 더 넓기 때문에 내가 의지의 활동을 오성이 의해 인식된 범위 안에 묶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인식하지도 않은 것에 의지를 작동시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에 대해 의지는 비결정성의 상태에 있으므로 참된 것과 선한 것에서 쉽게 벗어나고, 이로써 나는 오류를 범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86).
오성의 지각이 의지의 결정보다 언제나 앞서야 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지의 그릇된 사용 속에 오류의 형상을 구성하는 결여가 있는 것이다. 결여는 말하자면 활동 자체 속에, 그것도 나로부터 기인하는 한에서의 활동 자체 속에 내재해 있을 뿐, 신이 나에게 부여한 능력이나 신에게 의존하는 활동 속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88).
오성이 명석 판명하게 보여 주는 것에만 판단을 내리도록 의지를 묶어 둔다면,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명석 판명한 지각은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는 없으며, 그 작자는 반드시 신, 말하자면 기만성을 지니지 않고 최고 완전한 신이어야 하고, 그래서 명석 판명하게 인식된 것은 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