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6장. 시간성과 통속적 시간 개념의 근원으로서의 시간 내재성
발제: muse
제78절. 전술한 현존재의 시간적 분석의 불완전성
시간성이 과연 그리고 어떻게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실존의 존재 구성틀로서의 역사성이 ‘근본에 있어’ 시간성이다 라는 점을 제시했다. 역사와 자연에 관한 학문들에서 ‘시간 요인’이 나타난다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현존재가 그 모든 주제적인 탐구에 앞서 이미 ‘시간을 고려하여’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현사실이다.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면서 그때마다의 현존재는 ‘시간’을 ‘가지고’있거나 또는 ‘시간이 없거나’한다. 이 시간은 현존재의 시간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존재의 모든 행동관계는 그의 존재, 다시 말해서 시간성에서부터 해석되어야한다.
우리는 비록 역사의 시간적 성격에 관해 해석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모든 역사화가 ‘시간 속에서’ 경과한다는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는 못했다. 일상적인 현존재 이해는 모든 역사가 ‘시간 내재적으로’ 일어나는 역사화라고만 알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역사성에 관한 실존론적-시간적 분석 과정에서 본래적인 현존재 이해에만 논의를 집중시킨 나머지 그 일상적인 이해에는 아무런 발언권도 부여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존재를 바로 그의 현사실성에 있어 투명하게 해명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다. 분석론이 마땅히 그런 이념을 가진다면, 그것은 역사에 관한 (‘실존론적-시간적’이 아니라) ‘존재적-시간적’ 해석에도 분명하게 그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본 장에서는 현존재가 시간을 고려하고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이 일상적인 현사실을 현상학적 시야의 중심에 놓고 분석을 수행해나갈 것이다.
제79절. 현존재의 시간성과 시간의 배려
현존재는 그에게 그의 존재에서 바로 이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로서 실존하고 있다. 기획투사에서 그는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내던져져 ‘세계’에 맡겨진다. 현존재는 염려로서 존재하지만, 빠져있으면서 내던져진 기획투사의 단일성 안에 실존하면서 그 존재자는 ‘거기에’로 열어 밝혀져 있다.
존재자들 곁에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밖으로 말한다. 이런 배려는 시간성에, 정확히는 ‘기대하고-간직하는 현재화’의 양태에 근거하고 있다. 배려하는 계산함, 계획함, 예비함, 예방함 등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에 - 그 일이 발생해야한다. 그 에 앞서 - 저 일은 끝장을 보아야하고. 지금은 - 그 당시 실패해서 놓친 것이 만회되어야 한다.
‘그때에’, 기대하고, ‘그 당시’는 간직하면서 ‘지금’에서는 (존재자를)현재화하면서 말한다. 그러나 ‘그때에’에는 ‘지금은 아직 아님’이 암암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당시’에도 ‘지금은 이미 아님’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시간성은 항상 기대하고-간직하는-현재화의 삼중적 통일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때에’과 ‘그 당시’는 모두 ‘지금’과 관련해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화가 우리의 일상에서 특유의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평균적 일상성은 ‘기대하지 않는 망각’에 지배되고 있고 그래서 결국 현재 중심적 생활로 귀착되는데, 이런 편중이 일상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우리는 “지금, , 지금, …”이라고 끝없이 말하는 것이다. p.529
그러나 ‘그때에’는 모두 그 자체로 ‘~할, 그때’이다. ‘그 당시’는 모두 그 자체로 ‘~한, 그 당시’이다. 모든 ‘지금’은 ‘~하는, 지금’이다. ‘지금’, ‘그 당시’, ‘그때에’이 연관구조를 시점기록가능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점기록가능성은 달력상의 날짜와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지 않더라도, 시점기록가능성은 현존재의 시간 배려에 구조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시점기록가능성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현존재는 왜 배려된 것을 말하면서 대개 음성은 안 내지만 ‘....하는 지금’, ‘...할 그때에’를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는가? 해석하며 ......에 대해서 말함이 자신을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찾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것들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고,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춥다”고 한 마디만 말할 때도 그 말은 이미 ‘~하는, 지금’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성의 자기 해석이 가능케 되는 이유는, 시간성이 즉자적으로 탈자적-지평적 개방성을 갖고 있고 이 개방성에 근거하여 자신에 대해 언제나 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간”이라 부르는 현상이란 알고 보면 이렇게 자기를 해석하는 현재화를 뜻하고 있다 p. 531
이상의 논의를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지금’, ‘그때에’, ‘그 당시’로써 해석된 것에는 본질적으로 시점기록가능성의 구조가 속해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를 해석하는 시간성’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는 때’(~하는)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그때에’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게 될 때’(~할)를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덧붙여 말하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지금’이 (존재자 자체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존재자의 현재화를 해석하는 시점기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는, 지금’에는 이미 현재의 탈자적 성격이 놓여 있다.
이처럼 ‘~하는, 지금’, ‘~할, 그때에’, ‘~한, 그 당시’의 시점기록가능성은 시간성의 탈자적 구성틀의 반영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그때에’, ‘그 당시’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근원적인 시간성에서 마치 줄기처럼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p.531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은 시점기록가능성과 함께 비주제적으로 이해되고 있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은 채로 이해되고 있다.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탈자적 통일성도 시점기록가능성도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 속에서 그때마다 이미 현존재가 그 자신에게 세계-내-존재로서 열어 밝혀져 있고, 이 열어 밝힘성과 더불어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곧, 현존재의 자기 열어 밝힘과 존재자의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실존론적 근거는 바로 탈자적 시간성이 되는 셈이다.
기대함이 ‘그때에’에서 자신을 이해하면서 해석하고 또 기대는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현재화하는 ‘지금’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때에’을 언명하는 때는 언제나 이미 ‘지금은 아직 아님’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기대작용이 가 닿는 곳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지만 그 작용이 행해지는 시점은 ‘지금’이기에, 기대작용이 행해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기대작용이 가 닿는 도래의 시점은 ‘지금은 아직 아님’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그때에’, 이를 현재화하는 기대는 ‘그때까지’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그때까지’를, 즉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다’를 ‘그 사이’로서 해석한다. 물론 이 ‘그 사이’도 시점기록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동안에’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배려는 ‘동안에’에 속해 있는 때들을 더 상세히 언명하여, ‘동안에’ 자체를 다시 기대하면서 분류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동안에’을 기대하고-현재화하면서, 배려는 또한 ‘존속함’을 분류파악한다. 이러한 지속은 시간성의 자기 해석에서 드러나는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그 시간은 ‘펼쳐져 있음(폭)을 갖는 것’으로서 비주제적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기대하면서-간직하는 현재화가 ‘펼쳐져 있음(폭)을 갖는 동안에’을 해석하는 것은, 기대하면서-간직하는 현재화가 다름 아닌 ‘역사적 시간성의 탈자적 뻗쳐있음’으로서 —비록 그 자체로서 인식되어 있진 않더라도— 이미 그 자신에게 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p. 532
그런데 여기에서 시점기록가능성 외에 ‘언명되는’ 시간이 갖는 또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즉, 단지 ‘동안에’만 펼쳐져 있음(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지금’, ‘그때에’, ‘그 당시’도 모두 시점기록가능성의 구조와 함께 변화하는 ‘펼쳐져 있음(폭)의 펼쳐져 있음(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대하고-간직하며-현재화하는 배려는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하고 자신에게 시간을 언명한다. 이 때 그 시간은 환경세계적으로 배려되는 사건과 존재자들, 곧 ‘하루 종일’ ‘쫓아다니는 그것에서부터 배려하며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그때마다의 양태에서 시점기록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가 그러한 것들만 기대하고 거기에 너무 몰입하는 나머지, 진짜 중요한 본래의 자신은 기대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경우에 현존재가 자신에게 허용한 시간이 은폐되어 버리고, 그 시간이 무수한 구멍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은폐된 시간 구멍들로 인해 하루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구멍 뚫린 시간을 연결하지 못함은 잘게 쪼갬이 아니라 ‘그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지고 탈자적으로 뻗쳐있는 시간성’의 양태이다 p. 533
우리는 앞에서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을 시간성의 시간화 양태와 관련해서 성격지었다. 그 때 비본래적 실존의 비결단성은 ‘기대하지 않고-망각하는 현재화’의 양태에서 시간화한다. 결단을 내리지 자는 오직 자신이 배려하는 일상의 것만을 기대하고 거기에만 정신없이 몰두하는 나머지, 그렇게 배려하는 것에 자신을 망각하고, 그래서 자신의 시간도 상실한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가 늘 하는 말은 이것이다. “나는 시간이 없다.”
이와 같이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상실하며 그래서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는 반면에, 결단성 속에 있는 본래적 실존은 정반대로 결코 시간을 상실하는 법이 없으며 그래서 ‘항상 시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결단성의 시간성에서 현재는 순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간이 상황을 본래적으로 현재화하는 때는, 그런 현재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재화는 기존하는 도래 속에 확고하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주도권은 현재화가 아니라 도래에 있는 것이다.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순간적 실존은 ‘운명적인, 전체적인 뻗쳐있음’으로서 자신을 시간화한다. 그리고 이 뻗쳐있음은 ‘자기의 본래적인, 역사적인 지속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사실적으로 내던져져 있는 현존재가 자신에게 시간을 ‘주거나’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탈자적으로 뻗쳐 있는 시간성으로서의 그에게 이러한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는 ‘거기에’의 열어 발혀져 있음과 더불어 ‘시간’이 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열어 밝혀져 있는 자로서 현사실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방식으로 실존하며 현존재는 공공의 평균적인 이해성 안에 머물고 있다. 물론 시점기록가능성의 ‘~하는, 지금’, ‘~할, 그때에’, ‘~한, 그 당시’ 역시 그런 일상적인 서로-함께-있음 속에서 해석되고 말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어떻게든 이해되고 있다. 해석되고 말해지는 그때그때의 현존재의 시간은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공공화되어 있다. 배려는 그것을 자신에게 주는 그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알고 있지 않고, 배려는 사람들이 계산하는 주어져있는 ‘시간’을 배려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p. 535
제80절. 배려된 시간과 시간내재성
공공 시간의 현상적 성격에 대해 더 자세히 규정하고자 한다.
시간의 공공화는 추후에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가 탈자적-시간적인 자로서 각기 그 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져 있고 실존에 이해하는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p.535 시간은 현존재의 일상적 배려에서 이미 공공화 되어 있다. 우리의 시간 배려는 근본적으로는 천문학적 일력적 시간계산이라고 알고 있는 시간배려의 지평 안에서 일어난다. 시간 계산에서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중요한 것을 시간의 양화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더 근원적으로 시간을 계산에 넣는 현존재의 시간성에서부터 개념파악 해야 한다. ‘공공의 시간’은 ‘그 안에서’ 손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시간임이 입증된다. 이것은 이러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를 시간내재적인 것이라고 명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 곧 염려에 근거하고 있고,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에 내던져진 자로서 빠져있음의 상태로 실존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이미 시간을 ‘공적으로 이용하고 계산하는 시간’으로서 해석하면서 배려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 계산 속에서 시간이 공공화 하면서 자신을 시간화 하고 있다. 이처럼 현존재의 염려가 시간 계산의 필연적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재의 내던져짐성은 공공적으로 시간이 ‘주어져’ 있기 위한 근거이다. p. 536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이다. 곧, 이 존재자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에 내던져진 자로서[내던져짐성] 그것들에 의존해 있으면서[빠져있음] 그의 세계-내-존재 가능을 기대한다[기투]. 그러한 기대는, 이 존재 가능성을 궁극목적으로 하여 하나의 탁월한 사용사태를 갖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바로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계산에 넣는’ 식으로 기대한다. 특히 아직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의 원시적 현존재에겐 아마도 태양이 그 어떤 것에 가장 어울릴 것이다. 일상적으로 존재자들을 배려하는 세계-내-존재는 그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자연의 빛, 곧 태양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에게는 세계의 현사실적 열어 밝힘성과 함께 자연이 발견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자연에 의존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연에서 일어나는 낮과 밤의 교체에도 내맡겨져 있다. 물론 낮은 태양의 빛에서 비롯하는 밝음으로써 현존재가 존재자들을 보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반대로 밤은 그 시각 가능성을 앗아가 버린다.
배려된 ‘그때에’은 일상적인 환경세계적 사용사태 속에서 바로 일출에 입각하여 시점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출에 입각한 ‘그때에’의 시점기록은 ‘~할 시간’이기도 한다. 현존재가 ‘해가 뜨면, 그때에’이라고 자주 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시점기록할 때 그의 배려는 태양의 ‘손안에 있음. 도구적 존재’를 사용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양이 선사해주는 빛과 열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이 같은 시점기록으로부터, 현존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 척도인, 곧 날(일, 하루)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시간성은 본질적으로 유한하다. 때문에, 그의 날들은 이미 헤아려지고 있는 셈이다.
‘낮인, 동안가 배려하는 기대함에게 배려되어야 할 그것의 ’그때에’를 예비하며(미리 앞서)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는, 시간화 하면서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현존재가 이 천체(태양)의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지나감을 고려한다. 이러한 태양의 운행 사건이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에서부터 앞서 윤곽 잡힌 채 시점 기록되는 시간 해석에 근거해서 일종의 매일 매일의 시간이 된다. p. 537
이처럼 태양과 그 자리들에 입각한 공공적 시점기록은 그 공공성 덕분에 누구나 ‘계산에 넣을 수’ 있는 것이고, 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어떤 척도를 사용한다. 시점기록은 시간측정이라는 의미로 시간을 계산하며 시간 측정기, 즉 ‘시계’를 필요로 한다.
내던져진 자로서, ‘세계’에 내맡겨져 있는 채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현존재의 시간성과 더불어 또한 이미 ‘시계’와 같은 것을 발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서, 어떤 손 안의 것을, 그 규칙적 반복됨을 기대하면서 현재화 하는 가운데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손안의 것이 발견되어있다.
손안의 것 곁에 내던져져 있음은 시간성에 근거한다. 시간성이 시계의 근거이다. 그러나 시계의 현사실적 필연성의 가능 조건으로서, 시간성은 그와 동시에 (현존재가 그 시간성에 근거하여 시계를 발견하고 있기에) 시계의 발견 가능성의 가능 조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 내부자적 존재자를 발견되어 있음과 더불어 만나게 되는 태양의 운행을 기대하며-간직하는 현재화만이 오직, 자기를 해석하는 현재화로서, 공공의 주위 세계적 손 안의 것에부터 시점기록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p.538
시간 측정에서 배려되고 있는 시간을 좀 더 완벽하게 성격 규정해 보자.
‘그때에’의 시점기록은 자체 안에 이것을 포함한다. 즉 ‘날이 밝으면, 그때에, 하루 일을 할 시간이다.’ 배려 속에서 해석된 시간은 언제나 이미 ‘~을 위한 시간’으로서 이해되어 있다. 그때그때의 ‘이것저것을 하는 지금’은 ‘~을 하기 위해 적당한 지금’이거나 ‘그것을 위해 적당하지 않은 지금’이다. 곧, 모든 ‘지금’은 단순히 ‘~하는, 지금’─곧, 시점기록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적당함 내지 부적당함의 구조(사용사태?)에 의해 규정된다. 배려의 기대하며 간직하는 현재화는 시간을 (사용사태의) ‘무엇을 위해서’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며 이 ‘무엇을 위해서’는 그 나름의 궁극적으로 현존재의 존재가능의 ‘그 때문에’에 고정되어있다. 공공의 시간은 이러한 ‘위하여-연관’과 더불어 우리가 앞에서 유의미성이라고 알게 된 그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유의미성이 세계의 ‘세계성’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공의시간은 ‘~을 위한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세계 성격을 띤다.
시간성의 시간화에서 공공화되는 시간을 세계 시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시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것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에서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p.540
배려된 시간은 네 가지 구조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1) 시점기록가능성, 2) 펼쳐져 있음(폭) 3) 공공성, 4) 세계성.
자연적 시계, 곧 태양의 열어 밝힘성—이 열어 밝힘성은 물론 현존재의 염려에 속해 있다. 또한 동시에 배려된 시간의 어떤 공공화가 포함되어 있다. 곧, 탁월한 유형의 공공화, 현사실적 현존재에 의해 언제나 이미 수행되고 있는 공공화, 시간 계산을 개선하고 시계 이용을 정밀화하는 가운데 더욱 강화되고 있는 그런 공공화이다. p.540
원시적 현존재는 현재의 존재자들을 비교할 때, 후자의 현존재의 가장 두드리진 특징은 아마도 ‘전기 빛의 발명’일 것이다. 진보한 현존재는 밤조차 낮으로 변형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밤은 그 의미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이다. 달빛과 별빛이 과거에 지녔던 유용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점을 다른 각도에서 입증하고 있다. 또한 어떤 특별한 측정도구를 발명한 덕분에, 진보한 현존재는 고대인처럼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서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태양이 아니라 측정도구, 곧 시계라는 손 안의 것에 즉해 시간을 직접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가 몇 시인가?’와 ‘시간이 몇 시인가?’는 우리에겐 이미 동일한 의미의 두 문장이다. ‘해가 어디에 떠 있는가?’와 ‘시간이 몇 시인가?’가 저 고대의 현존재에게 같은 의미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진보한 현존재가 사용하는 인공적 시계는 저 ‘자연적’ 시계(태양)를 향해 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적인 시간 계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니까. 이렇게 시계도구가 필수적으로 태양을 향해 조정되어 있다면, 이 도구의 사용조차 근원적으로는 현존재의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거기의 열어 밝힘성과 함께 비로소 배려된 시간의 시점기록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이 일상적인 시계 이용에서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하더라도.
그러나 원시적 현존재 또한 하늘을 직접 바라보지 않아도 태양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발전된 수단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바로 자기 몸의 그림자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예컨대 고대의 ‘농부 시계’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림자가 몇 발 정도 길어지면, 거기에서 만나도록 하자.” 이런 공공적 시간 규정에서 ‘장소’의 위도상의 동일함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다. 현존재는 이런 시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데 그가 곧 일정한 방식으로는 그 시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해시계의 경우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해볼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어째서 시계 바늘의 그림자가 해시계의 숫자판 위에서 취하는 위치에서 시간과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인가? 분명히 그림자도 시간이 아니고, 나누어진 궤도도 시간 자체가 아니고 그들 상호의 공간적 연관도 시간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시계와 또한 모든 회중 시계에 즉해 직접 읽어내고 있는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p.541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계를 보는 것’이 그저 단순히 눈앞의 도구를 그 변화에서 고찰하며 시계 바늘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시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말한다. 지금 몇 시이다, 지금 .....할 시간이다, ....하기까지 지금은 시간이 있다 시계를 보는 것은 자기에게 시간을 줌 안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이끌려지고 있다. 시계를 보며 시간에 자기를 맞추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지금을-말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자명한 사태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거의 의식하거나 고려하지 못할 정도이다. 따라서 지금을-말함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시점기록가능성, 펼쳐져 있음(폭), 공공성, 세계성과 같은 시간 배려의 구조적 구성계기들 또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542
지금을-말함은 간직하는 기대함과의 통일성에서 시간화 되고 있는 그런 현재화의 말하는 분류파악이다. 이 같이 시계를 이용할 때 수행되는 시점기록은, 또한 어떤 눈앞의 것의 탁월한 현재화로서 입증된다. 곧 밝혀지듯이, 이 눈앞의 것은 ‘척도’를 말한다. 그러나 시점기록은 단지 눈앞의 것과의 연관을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관 취함 자체가 측정의 성격을 갖는다. 척도가 측정되어야 할 길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이해되어 있다.
사실, 시계를 보면서 우리는 측정된 수치를 직접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어냄이 도대체 가능하려면, 우선은 측정되어야 할 그 시계의 길이 ‘안에’ 척도가 이미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현존재는 이 점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선은 그 길이 ‘안에’ 척도가 이미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현존하고 있어야 하고 현존재는 척도의 현존 빈도(얼마나 자주 현전해 있는가)를 이미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현존하는 시계 길이 안에 포함된 현존하는 척도를 현재화함으로써, ‘측정함’이라는 행위가 시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척도의 이념에는 본질적으로 불변성이 놓여 있다. 척도의 불변성이란, ‘척도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 대해 그 항구성에 있어 눈앞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척도는 언제 어디서나 불변하는 눈앞의 것을 말한다.
결론을 내리면, 시간 측정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의 공공화가 이루어지는데, 또한 이 공공화에 따라 시간은 바로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으로 만나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계 이용에서 마주치는 시간은 흡사 전재하는 지금 다양성의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시간성은 세계-내-존재에게 공간의 열어 밝힘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공간적 현존재는 그때그때 발견된 저기에 입각해서 자신에게 현존재적 여기를 지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성에 근거하여 배려된 시간은 시점기록가능성의 관점에서 언제나 현존재가 취하는 어떤 장소에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이 애초부터 공간과 결부되어 ‘시간은 항상 이미 시-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의 시간성이야말로, 시점기록이 공간적-장소적인 것에 자신을 묶을 수 있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 그리하여 이 공간적인 것이 하나의 척도로서 모든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점이 사태의 진실에 가깝다. 과학자들이 시간과 결부되어 있다고 추정하는 그 ‘공간’을, 우리는 오직 시간성에 근거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성은 단지 배려된 시간의 공공화뿐 아니라, 또한 공간의 공공성—공간은 언제나 모든 이에 대해 동일한 척도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공간에 맞추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없을 것이다—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 셈이다.
시간성은 현존재를 역사적인 존재자로서 구성한다. 그리고 시계 이용과 시간 계산은 동일한 시간성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시계 이용은 어느 정도는 그 자체로 역사적이라고, 또한 모든 시계가 그 자체로 ‘역사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 관찰과 시계 이용에 의한 시간 측정 속에서 시간은 공공화되고 있지만, 그것이 비록 (태양과 그림자 간의 위치 또는 시계 바늘과 숫자판 간의 위치와 같은) 공간적 척도관계들에 입각하여 시점기록 된다고 하여 공간으로 변화되는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시점기록된 ‘지금’이 (시계와 같은) 어떤 공간적 사물의 공간 길이와 장소 변화에 입각하여 수(적으로 (따라서 양적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 측정의 실존론적-존재론적 본질을 발견해서도 안 된다. 시간의 본질은 결코 공간 또는 공간화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 측정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유형의 현재화에 있다. 이 현재화가 분석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간적’ 눈 앞의 것에 입각한 시점기록은 시간의 공간화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추정상의 이 공간화야말로 사실은 그 눈앞의 것의 현재화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지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그 현존성에 있어 항구적 구속력을 갖는 그런 불변하는 눈앞의 것으로서 ‘척도’의 현재화이다. 그러나 정확히 바로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곧, 시간 측정은 본질적, 필연적으로 ‘지금을-말함’의 구조를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이 측정에서 전재적이고 현존하는 척도를 획득하면서 측정된 것 그 자체, 곧 시간 자체는 망각되어 버리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공간적, 전재적 길이와 수 외에는 현존재의 시선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시간 측정은 어떤 특별한 유형의 시간의 공공화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간’이라고 알고 있는 현상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공공화된 시간을 말한다. 배려 안에서 모든 사물에게는 ‘자신의 시간’이 할당된다. 그리하여 사물은 시간을 ‘가지게’ 되고, 또한 다른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그러하듯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이는 오직 사물이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곧, 시간 내부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이 모든 사물과 모든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시간 내부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담고 있는 이 시간을 ‘세계 시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세계의 열어 밝힘성과 함께 세계 시간은 공공화되며, 그래서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포함하여)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시간적으로 배려하는 존재함’은 모두 이런 존재자를 ‘시간 안에서’ 마주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p. 545
‘ 그 안에서’ 눈앞의 것이 움직이고 정지하는 시간은 “객관적”이 아니다. ‘객관적’이란 표현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자체존재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주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이란 표현이 ‘주체’ 안에 ‘눈 앞에 있음“이나 ‘발생함’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오히려 세계 시간은 모든 가능한 객체 보다 ‘더 객관적’인데 이 시간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가능 조건으로서, 세계의 열어 밝혀져 있음과 함께 언제나 이미 탈자적-지평적으로 ‘객관화되기’(‘공공화되고)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심리적인 것, 곧 내적 감성의 형식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비로소 물리적인 것의 시간을 규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의 시간 경험을 사고한 바 있는데, 하이데거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 시간은 심리적인 것에 즉해 직접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물리적인 것에 즉해서도 직접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우선 ’시간‘은 다른 곳이 아닌 하늘에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그 시간에 맞추면서 시간을 발견하게 되는 그곳에서 나타나며 그래서 ’시간‘은 심지어 하늘과 동일시되기까지 한다. p .545
그러나 또한 세계 시간은 모든 가능한 주체보다 ‘더 주체적’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염려라는 현존재의존재를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의 존재’라는 잘 이해된 의미에서 이 존재를 비로소 함께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인 동시에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 곧 세계, 곧 세계 시간이 없이 단지 염려만으로 현존재의 존재를 온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 이처럼 염려의 자기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세계 시간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계 시간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가장 객관적인 동시에 가장 주관적인 어떤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제 1) ‘시간성은 탈자적-지평적인 것으로서 세계 시간을 시간화하고 있다’는 점, 2) ‘세계 시간은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의 시간 내재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은 비록 시간 속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다 . 왜냐하면 시간적인 존재자는 오직 현존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건, 생성하고 소멸하건, 이념적으로 존립하건 상관없이, 모두 비시간적이다.
세계 시간은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명확히 통찰할 때 상식이 빠져들기 쉬운 주관성과 객관성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곧, (1) 어떻게 일상적 현존재가 가장 가까운 존재 이해로부터 ‘시간’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는가 (2) 어느 정도까지 이런 시간 개념과 그 지배가 개념에서 의미되고 있는 것을 근원적인 시간에서부터 다시 말해서 시간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존재에게 가로막고 있는가
제81절. 시간 내재성과 통속적 시간 개념의 발생
일상의 둘러보는 배려에게 시간은 어떻게 보여 지는가? 사람들이 분명하게 시간으로 자신을 맞추는 행동관계는 ‘시계 이용’이다. 그런데, 시계 이용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움직이는 시계 바늘의 현재화’이다. 우리는 시계 바늘의 위치들의 이동 경과를 현재화하면서 좇으면서 헤아린다. 물론 이 같은 현재화는 기대하는 간직함의 탈자적 통일성 속에서 시간화된다. 그래서 현재화하면서 ‘그 당시’를 간직하다는, 곧 <지금을-말하면서 ‘이전에’의,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지금은 아님’의 지평에 열려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현재화에서 시간화되는 그것이 곧 시간이다. 이 정의는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정의를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곧 이전과 이후의 지평에서 만나는 운동에 서 헤아려진 것이다.” (<자연학>, A11, 219 b 1 이하 참조.) 이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끄집어 내온 그 실존론적-존재론적 지평이 제한 규정되면 매우 ‘자명한’ 것이며 바르게 길어내어진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하였지만, 그 시간의 ‘근원’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시간 해석은 ‘자연스러운’ (곧, 일상적이고 통속적이며 상식적인) 존재 이해의 방향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p. 547
시간에 대한 많은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었지만 그 논의들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 내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어떻게 시간이 둘러보는 배려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그 현상을 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사고 지평 내에서는, 시간은 아무리 새롭게 사유되고 해석된다 하더라도 결국 ‘헤아려진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곧,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나 그림자의 현재화 속에서 밖으로 말해진 것 또는 비록 비주제적이기는 하지만-의미된 것이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등 헤아려진 것은 지금들이다. 시계 이용에서 보여지는 세계시간을 ‘지금’을 중심으로 ’보이는‘세계 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간 배려가 ‘더욱 자연스럽게’ 시간을 계산하면 할수록, 이 배려는 그만큼 더욱 시간 그 자체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려된 도구(곧, 시계)에 스스로를 상실한다. 배려는 그런 자연스러운 계산과 더불어 ‘지금, 그때에, 그 당시’를 그 만큼 더 많이 말하게 될 것이다. p. 548
배려된 시간의 첫 번째 본질 계기로서 시점기록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이 근거는 시간성의 탈자적 구성틀이다. 지금의 구조에는 유의미성이 속한다. 유의미성은 세계의 세계성을 형성하고 있기에, 결국 배려된 시간은 세계 시간으로 명명될 수 있었지만 시간을 ‘지금의 연속’으로 보는 통속적인 시간 해석에서는 시점기록가능성이나 유의미성, 세계성과 같은 것이 결여되어있고 그것들을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시점기록가능성과 유의미성이 근거하는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구성틀이 그런 시간 해석의 지배 하에서는 평준화된다. .
‘지금’은 시간 측정의 배려 속에서 셈해지고 있지만, 또한 그때마다 이미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의 배려 속에서 함께 이해되고 있다. 이 배려는 자신을 주도해가는 특정한 존재 이해의 지평 내에서 ‘지금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들도 일정한 방식으로 함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지금들이 지나가버리고 이 지나가버린 것이 곧 과거를 만든다. 지금이 도래하고 이 도래하는 지금들이 곧 ‘도래’를 제한 규정한다. 과거가 형성되는 근거도, 도래가 형성되는 근거도 오로지 지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 시간을 지금-시간으로 보는 이런 통속적 해석의 지배 하에서는, 세계니 유의미성이니 시점기록가능성이나 하는 것은 은폐 될 수밖에 없다. p.549
시간의 펼쳐져 있음이 시간 배려에서 공공화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의 지평적 뻗쳐있음에서부터 이해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탈자적 뻗쳐있음은 눈앞의 것의 연속성에 는 전혀 낯선 것이지만 그 나름 눈앞에 있는 지속적인 것에 이르는 접근의 가능 조건을 나타낸다. p..550
통속적 시간 해석의 주 논제는 ‘시간은 무한하다’인데 세계시간 그리고 시간성 일반의 평준화와 은폐를 가장 철저하게 보여준다. 시간은 ’양쪽 방향으로 끝이 없다“ 이러한 시간 논제는 오직 눈앞에 있는 지금의 경과라는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자체-존재에 방향을 잡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때 완전한 지금의 현상이 시점기록가능성, 세계성, 펼쳐져 있음, 현존재적인 공공성과 관련하여 은폐되고 알아볼 수 없는 파편으로 가라앉고 만다. 시간을 끝까지 사유하는 것도 각기 그 때마다 여전히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사람들은 시간이 무한이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자신의 본래적인 실존 앞에서 도망하는 현존재의 은폐하는 도피가 알려져 있으며 배려된 도피에는 죽음 앞에서의 도피가, 다시 말해서 세계-내-존재의 종말로부터 눈을 돌림이 놓여있다. p.551
통속적인 해석은 시간의 흐름을 일종의 되돌릴 수 없는 잇달음이라고 규정한다. 왜 시간은 되돌려질 수 없는가? 지금의 흐름에만 향하는 시선에서는, 왜 지금의 연속이 한 번도 다시 반대의 방향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지를 통찰할 수 없다. 되돌릴 수 없음은 그 근거를 공공의 시간이 시간성에서 유래한다는 데에 두고 있다. 이 시간성의 시간화는 일차적으로 도래적이어서 탈자적으로 그 종말로 ‘가며’ 그래서 그 자체 이미 종말에 와 ‘있는’ 것이다. p.553
지금 시간이 단지 가능한 해석의 순서에서만 일차적으로 시간성에 방향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비로소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시간성에서 현재화되기 때문에 지금-시간이 시간성에서 파생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시간성을 근원적인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은 일차적으로 도래에서부터 시간화된다. 이와는 반대로 통속적인시간 이해는 시간의 근본 현상을 지금에서 보며 그것도 완전한 구조가 잘려나간 사람들이 ‘현재’라고 일컫고 있는 순수한 지금에서 보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이러한 지금에서부터 본래적 시간성에 속하는 탈자적- 지평적 순간의 현상을 해명하거나 또는 도출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망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p.554
통속적인 시간 경험이 우선 대개 단지 ‘세계 시간’만을 알고 있더라도 그 경험은 분명히 동시에 또한 언제나 세계 시간에게 ‘영혼’과 ‘정신’과의 탁월한 연관을 제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영혼(마음) 이외에, 영혼의 마음 이외에, 헤아리는 것을 본성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없다면, 즉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므로 내게는 시간이 연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의 연장인지는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혼의 연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상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통속적 시간 개념의 밖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헤겔도 통속적으로 이해된 시간과 정신과의 연관을 끄집어내려고 분명하게 시도했는데, 이에 반해서 칸트에게는 비록 시간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사유한다‘의 옆에 결속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시간과 정신 사이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p.555 명확한 근거 제시는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본 앞의 해석과 세계 시간의 근원을 이 시간성에서부터 제시한 것을 간접적으로 명료하게 하는데 적합하다.
82절 시간과 정신의 관련에 대한 헤겔의 결해에 대비하여 시간성과 현존재 그리고 세계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연관을 구별함
이제까지의 시간성의 이념을 헤겔의 시간 개념과 대비하여 구별하는 것이 당연한 까닭은 헤겔은 시간개념이 통속적 시간이해의 가장 극단적이면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개념적 형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ㄱ) 헤겔의 시간개념
통속적 시간이해에 대한 최초의 전승된, 주제적인 상세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발견된다. 공간이 변증법적으로 그것이 무엇인 그 점에서 사유된다면, 공간의 이러한 존재가 헤겔에 의하면 시간으로서 드러난다. 공간은 자연의 자기 바깥 존재(자기 밖에 있음)의 매개 없는 무차별성이다. 공간은 공간 안에서 구별 가능한 점들의 추상적 다수성이라는 것이다. 점은 공간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하고 있는 한, 공간의 부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러한 부정으로서( 점 역시 공간이다) 그 자체 공간 안에 남아있는 p.557식으로 그렇다.
그러나 헤겔이 말했듯이 공간은 점이 아니라 ‘점성’(정확성)이다. ‘부정성은 점으로서 공간과 관련을 맺고 공간 안에서 선과 면이라는 자신의 규정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 부정성은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에서는 대자적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규정들로 있지만 동시에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 안에서 정립하면서, 이때 정지해 있는 나란히 있음에 대해서는 무차별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렇게 대자적으로 정립되면, 부정성이 곧 시간이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정립함으로써 점은 그것이 그 안에서 서있는 잇달아 있음을, 즉 이제는 부정된 부정의 영역으로서의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을 정립한다. 무차별성으로서의 점성의 지양은 다른 점들을 향해서 ‘자기를 뻗친다.’점성‘으로서의 이러한 부정의 부정이 헤겔에 의하면 곧 시간이다. 점의 대자적 지기정립의 가능조건은 지금이다. 공간의 순수 사유가 각기 그때마다 지금과 지금들의 자기 밖에 있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공간이 시간으로’ 있는‘ 것이다. 시간은 있다는 점에서는 있지 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있는 그런 존재, 직관된 생성이다. 시간은 단적으로 찰나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지양하는 구별들이 외부적인, 그러나 자시 자신에게 외부적인 그런 구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시간은 ‘직관된 생성’이다. 생성은 발생일뿐만 아니라 소멸이다. 존재가 ‘넘어가거나’ 또는 ‘무가 넘어간다. 이것은 시간의 존재는 지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p. 559
또한 시간을 성격 규정함은 ‘관념적’이기는 해도 눈앞의 것으로서 직관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헤겔이 시간을 '직관된 생성‘이라고 이름 할 때 그 시간 안에서는 발생도 소멸도 우위를 점하지 않고 있다. 헤겔은 시간을 생성으로 성격 규정할 때도 이 생성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표상을 넘어서는 ’추상적‘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추상적 의미로 이해함은 시간견해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 시간을 부정의 부정<다시 말해서 점성(정확성)>으로 규정한 데에 있다. p. 561
ㄴ)시간과 정신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 분석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비-자아의 파악으로서---개념 파악하는 것이다. 비-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있다.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한다.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 하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의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정신은 필연적으로 그 본질 p.563상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이 단적으로 평준화된 세계시간의 의미로도 개념파악 되기 때문에 눈앞의 것으로 정신과 마주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비로소 처음으로 ‘시간 속으로’ 떨어져 들어와야 한다. 이러한 떨어짐과 시간을 지배하며 본래적으로는 시간 밖에 존재하는 정신의 실현이 존재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둠에 싸여있다. 이렇듯 헤겔은 평준화된 시간의 근원을 밝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과연 도대체 정신의 본질 구성틀이 부정의 부정으로서가 아니고 다르게도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전혀 검토되지 않은 채 놔두고 있다. 가능하다면 근원적인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일 것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사실적으로 내던져져 있는 실존 자체의 ‘구체화’에서 시작하여, 실존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밝혀보였다. ‘정신은 이제야 비로소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간성의 근원적인 시간화로서 실존하고 있다. ’정신‘은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사실적 실존은 빠져 있는 실존으로서 근원적인 본래의 시간성에서부터(이미 시간 안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떨어짐 자체도 그 실존론적 가능성을 시간성에 속하는 이 시간화의 한 양태 안에 가지고 있다.
83절 현존재의 실존론적-시간적 분석론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기초존재론적 물음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인데, 이 해석학은 실존에 대한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의 끝을, 거기에서부터 그것이 발원하며 거기에로 그것이 되돌아가는 거기에다 고정해놓았다. ‘존재’ 와 같은 그런 것은, 이해로서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그런 존재이해 안에서 열어 밝혀져 있다. 비록 비개념적이기는 하지만 선행적으로 열어 밝혀진 존재가 현존재로 하여금 실존하는 세계-내-존재로서 존재자와, 즉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뿐 아니라 실존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존재를 열어 밝히며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도대체 현존재적으로 가능한가? 이 물음은 그 대답을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전체성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성틀은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탈자적 시간성의 근원적인 시간화의 방식이 그 자체 존재 일반이 탈자적 기획투사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6장. 시간성과 통속적 시간 개념의 근원으로서의 시간 내재성
발제: muse
제78절. 전술한 현존재의 시간적 분석의 불완전성
시간성이 과연 그리고 어떻게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실존의 존재 구성틀로서의 역사성이 ‘근본에 있어’ 시간성이다 라는 점을 제시했다. 역사와 자연에 관한 학문들에서 ‘시간 요인’이 나타난다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현존재가 그 모든 주제적인 탐구에 앞서 이미 ‘시간을 고려하여’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현사실이다.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면서 그때마다의 현존재는 ‘시간’을 ‘가지고’있거나 또는 ‘시간이 없거나’한다. 이 시간은 현존재의 시간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존재의 모든 행동관계는 그의 존재, 다시 말해서 시간성에서부터 해석되어야한다.
우리는 비록 역사의 시간적 성격에 관해 해석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모든 역사화가 ‘시간 속에서’ 경과한다는 사실을 미처 고려하지는 못했다. 일상적인 현존재 이해는 모든 역사가 ‘시간 내재적으로’ 일어나는 역사화라고만 알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역사성에 관한 실존론적-시간적 분석 과정에서 본래적인 현존재 이해에만 논의를 집중시킨 나머지 그 일상적인 이해에는 아무런 발언권도 부여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존재를 바로 그의 현사실성에 있어 투명하게 해명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다. 분석론이 마땅히 그런 이념을 가진다면, 그것은 역사에 관한 (‘실존론적-시간적’이 아니라) ‘존재적-시간적’ 해석에도 분명하게 그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본 장에서는 현존재가 시간을 고려하고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이 일상적인 현사실을 현상학적 시야의 중심에 놓고 분석을 수행해나갈 것이다.
제79절. 현존재의 시간성과 시간의 배려
현존재는 그에게 그의 존재에서 바로 이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로서 실존하고 있다. 기획투사에서 그는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내던져져 ‘세계’에 맡겨진다. 현존재는 염려로서 존재하지만, 빠져있으면서 내던져진 기획투사의 단일성 안에 실존하면서 그 존재자는 ‘거기에’로 열어 밝혀져 있다.
존재자들 곁에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밖으로 말한다. 이런 배려는 시간성에, 정확히는 ‘기대하고-간직하는 현재화’의 양태에 근거하고 있다. 배려하는 계산함, 계획함, 예비함, 예방함 등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에 - 그 일이 발생해야한다. 그 에 앞서 - 저 일은 끝장을 보아야하고. 지금은 - 그 당시 실패해서 놓친 것이 만회되어야 한다.
‘그때에’, 기대하고, ‘그 당시’는 간직하면서 ‘지금’에서는 (존재자를)현재화하면서 말한다. 그러나 ‘그때에’에는 ‘지금은 아직 아님’이 암암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 당시’에도 ‘지금은 이미 아님’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시간성은 항상 기대하고-간직하는-현재화의 삼중적 통일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때에’과 ‘그 당시’는 모두 ‘지금’과 관련해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현재화가 우리의 일상에서 특유의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평균적 일상성은 ‘기대하지 않는 망각’에 지배되고 있고 그래서 결국 현재 중심적 생활로 귀착되는데, 이런 편중이 일상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우리는 “지금, , 지금, …”이라고 끝없이 말하는 것이다. p.529
그러나 ‘그때에’는 모두 그 자체로 ‘~할, 그때’이다. ‘그 당시’는 모두 그 자체로 ‘~한, 그 당시’이다. 모든 ‘지금’은 ‘~하는, 지금’이다. ‘지금’, ‘그 당시’, ‘그때에’이 연관구조를 시점기록가능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점기록가능성은 달력상의 날짜와는 무관하다.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지 않더라도, 시점기록가능성은 현존재의 시간 배려에 구조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시점기록가능성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현존재는 왜 배려된 것을 말하면서 대개 음성은 안 내지만 ‘....하는 지금’, ‘...할 그때에’를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는가? 해석하며 ......에 대해서 말함이 자신을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찾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것들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고,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춥다”고 한 마디만 말할 때도 그 말은 이미 ‘~하는, 지금’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성의 자기 해석이 가능케 되는 이유는, 시간성이 즉자적으로 탈자적-지평적 개방성을 갖고 있고 이 개방성에 근거하여 자신에 대해 언제나 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간”이라 부르는 현상이란 알고 보면 이렇게 자기를 해석하는 현재화를 뜻하고 있다 p. 531
이상의 논의를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지금’, ‘그때에’, ‘그 당시’로써 해석된 것에는 본질적으로 시점기록가능성의 구조가 속해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를 해석하는 시간성’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는 때’(~하는)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그때에’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게 될 때’(~할)를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덧붙여 말하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지금’이 (존재자 자체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존재자의 현재화를 해석하는 시점기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는, 지금’에는 이미 현재의 탈자적 성격이 놓여 있다.
이처럼 ‘~하는, 지금’, ‘~할, 그때에’, ‘~한, 그 당시’의 시점기록가능성은 시간성의 탈자적 구성틀의 반영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그때에’, ‘그 당시’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근원적인 시간성에서 마치 줄기처럼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p.531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은 시점기록가능성과 함께 비주제적으로 이해되고 있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은 채로 이해되고 있다.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탈자적 통일성도 시점기록가능성도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 속에서 그때마다 이미 현존재가 그 자신에게 세계-내-존재로서 열어 밝혀져 있고, 이 열어 밝힘성과 더불어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곧, 현존재의 자기 열어 밝힘과 존재자의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실존론적 근거는 바로 탈자적 시간성이 되는 셈이다.
기대함이 ‘그때에’에서 자신을 이해하면서 해석하고 또 기대는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현재화하는 ‘지금’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그것이 ‘그때에’을 언명하는 때는 언제나 이미 ‘지금은 아직 아님’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기대작용이 가 닿는 곳은 미래의 어느 시점이지만 그 작용이 행해지는 시점은 ‘지금’이기에, 기대작용이 행해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기대작용이 가 닿는 도래의 시점은 ‘지금은 아직 아님’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그때에’, 이를 현재화하는 기대는 ‘그때까지’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그때까지’를, 즉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다’를 ‘그 사이’로서 해석한다. 물론 이 ‘그 사이’도 시점기록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동안에’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배려는 ‘동안에’에 속해 있는 때들을 더 상세히 언명하여, ‘동안에’ 자체를 다시 기대하면서 분류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동안에’을 기대하고-현재화하면서, 배려는 또한 ‘존속함’을 분류파악한다. 이러한 지속은 시간성의 자기 해석에서 드러나는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그 시간은 ‘펼쳐져 있음(폭)을 갖는 것’으로서 비주제적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기대하면서-간직하는 현재화가 ‘펼쳐져 있음(폭)을 갖는 동안에’을 해석하는 것은, 기대하면서-간직하는 현재화가 다름 아닌 ‘역사적 시간성의 탈자적 뻗쳐있음’으로서 —비록 그 자체로서 인식되어 있진 않더라도— 이미 그 자신에게 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p. 532
그런데 여기에서 시점기록가능성 외에 ‘언명되는’ 시간이 갖는 또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즉, 단지 ‘동안에’만 펼쳐져 있음(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지금’, ‘그때에’, ‘그 당시’도 모두 시점기록가능성의 구조와 함께 변화하는 ‘펼쳐져 있음(폭)의 펼쳐져 있음(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대하고-간직하며-현재화하는 배려는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하고 자신에게 시간을 언명한다. 이 때 그 시간은 환경세계적으로 배려되는 사건과 존재자들, 곧 ‘하루 종일’ ‘쫓아다니는 그것에서부터 배려하며 자신에게 시간을 허용하는 그때마다의 양태에서 시점기록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가 그러한 것들만 기대하고 거기에 너무 몰입하는 나머지, 진짜 중요한 본래의 자신은 기대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경우에 현존재가 자신에게 허용한 시간이 은폐되어 버리고, 그 시간이 무수한 구멍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은폐된 시간 구멍들로 인해 하루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구멍 뚫린 시간을 연결하지 못함은 잘게 쪼갬이 아니라 ‘그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지고 탈자적으로 뻗쳐있는 시간성’의 양태이다 p. 533
우리는 앞에서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을 시간성의 시간화 양태와 관련해서 성격지었다. 그 때 비본래적 실존의 비결단성은 ‘기대하지 않고-망각하는 현재화’의 양태에서 시간화한다. 결단을 내리지 자는 오직 자신이 배려하는 일상의 것만을 기대하고 거기에만 정신없이 몰두하는 나머지, 그렇게 배려하는 것에 자신을 망각하고, 그래서 자신의 시간도 상실한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가 늘 하는 말은 이것이다. “나는 시간이 없다.”
이와 같이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상실하며 그래서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는 반면에, 결단성 속에 있는 본래적 실존은 정반대로 결코 시간을 상실하는 법이 없으며 그래서 ‘항상 시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결단성의 시간성에서 현재는 순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간이 상황을 본래적으로 현재화하는 때는, 그런 현재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재화는 기존하는 도래 속에 확고하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주도권은 현재화가 아니라 도래에 있는 것이다.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순간적 실존은 ‘운명적인, 전체적인 뻗쳐있음’으로서 자신을 시간화한다. 그리고 이 뻗쳐있음은 ‘자기의 본래적인, 역사적인 지속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사실적으로 내던져져 있는 현존재가 자신에게 시간을 ‘주거나’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탈자적으로 뻗쳐 있는 시간성으로서의 그에게 이러한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는 ‘거기에’의 열어 발혀져 있음과 더불어 ‘시간’이 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열어 밝혀져 있는 자로서 현사실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방식으로 실존하며 현존재는 공공의 평균적인 이해성 안에 머물고 있다. 물론 시점기록가능성의 ‘~하는, 지금’, ‘~할, 그때에’, ‘~한, 그 당시’ 역시 그런 일상적인 서로-함께-있음 속에서 해석되고 말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어떻게든 이해되고 있다. 해석되고 말해지는 그때그때의 현존재의 시간은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공공화되어 있다. 배려는 그것을 자신에게 주는 그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알고 있지 않고, 배려는 사람들이 계산하는 주어져있는 ‘시간’을 배려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p. 535
제80절. 배려된 시간과 시간내재성
공공 시간의 현상적 성격에 대해 더 자세히 규정하고자 한다.
시간의 공공화는 추후에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가 탈자적-시간적인 자로서 각기 그 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져 있고 실존에 이해하는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p.535 시간은 현존재의 일상적 배려에서 이미 공공화 되어 있다. 우리의 시간 배려는 근본적으로는 천문학적 일력적 시간계산이라고 알고 있는 시간배려의 지평 안에서 일어난다. 시간 계산에서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중요한 것을 시간의 양화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더 근원적으로 시간을 계산에 넣는 현존재의 시간성에서부터 개념파악 해야 한다. ‘공공의 시간’은 ‘그 안에서’ 손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시간임이 입증된다. 이것은 이러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를 시간내재적인 것이라고 명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 곧 염려에 근거하고 있고,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에 내던져진 자로서 빠져있음의 상태로 실존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이미 시간을 ‘공적으로 이용하고 계산하는 시간’으로서 해석하면서 배려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 계산 속에서 시간이 공공화 하면서 자신을 시간화 하고 있다. 이처럼 현존재의 염려가 시간 계산의 필연적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재의 내던져짐성은 공공적으로 시간이 ‘주어져’ 있기 위한 근거이다. p. 536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이다. 곧, 이 존재자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에 내던져진 자로서[내던져짐성] 그것들에 의존해 있으면서[빠져있음] 그의 세계-내-존재 가능을 기대한다[기투]. 그러한 기대는, 이 존재 가능성을 궁극목적으로 하여 하나의 탁월한 사용사태를 갖는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바로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계산에 넣는’ 식으로 기대한다. 특히 아직 시계가 발명되기 이전의 원시적 현존재에겐 아마도 태양이 그 어떤 것에 가장 어울릴 것이다. 일상적으로 존재자들을 배려하는 세계-내-존재는 그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자연의 빛, 곧 태양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에게는 세계의 현사실적 열어 밝힘성과 함께 자연이 발견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자연에 의존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연에서 일어나는 낮과 밤의 교체에도 내맡겨져 있다. 물론 낮은 태양의 빛에서 비롯하는 밝음으로써 현존재가 존재자들을 보는 일을 가능하게 하고, 반대로 밤은 그 시각 가능성을 앗아가 버린다.
배려된 ‘그때에’은 일상적인 환경세계적 사용사태 속에서 바로 일출에 입각하여 시점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출에 입각한 ‘그때에’의 시점기록은 ‘~할 시간’이기도 한다. 현존재가 ‘해가 뜨면, 그때에’이라고 자주 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시점기록할 때 그의 배려는 태양의 ‘손안에 있음. 도구적 존재’를 사용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태양이 선사해주는 빛과 열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 이 같은 시점기록으로부터, 현존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 척도인, 곧 날(일, 하루)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시간성은 본질적으로 유한하다. 때문에, 그의 날들은 이미 헤아려지고 있는 셈이다.
‘낮인, 동안가 배려하는 기대함에게 배려되어야 할 그것의 ’그때에’를 예비하며(미리 앞서)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는, 시간화 하면서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현존재가 이 천체(태양)의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지나감을 고려한다. 이러한 태양의 운행 사건이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에서부터 앞서 윤곽 잡힌 채 시점 기록되는 시간 해석에 근거해서 일종의 매일 매일의 시간이 된다. p. 537
이처럼 태양과 그 자리들에 입각한 공공적 시점기록은 그 공공성 덕분에 누구나 ‘계산에 넣을 수’ 있는 것이고, 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어떤 척도를 사용한다. 시점기록은 시간측정이라는 의미로 시간을 계산하며 시간 측정기, 즉 ‘시계’를 필요로 한다.
내던져진 자로서, ‘세계’에 내맡겨져 있는 채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있는 현존재의 시간성과 더불어 또한 이미 ‘시계’와 같은 것을 발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서, 어떤 손 안의 것을, 그 규칙적 반복됨을 기대하면서 현재화 하는 가운데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손안의 것이 발견되어있다.
손안의 것 곁에 내던져져 있음은 시간성에 근거한다. 시간성이 시계의 근거이다. 그러나 시계의 현사실적 필연성의 가능 조건으로서, 시간성은 그와 동시에 (현존재가 그 시간성에 근거하여 시계를 발견하고 있기에) 시계의 발견 가능성의 가능 조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 내부자적 존재자를 발견되어 있음과 더불어 만나게 되는 태양의 운행을 기대하며-간직하는 현재화만이 오직, 자기를 해석하는 현재화로서, 공공의 주위 세계적 손 안의 것에부터 시점기록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p.538
시간 측정에서 배려되고 있는 시간을 좀 더 완벽하게 성격 규정해 보자.
‘그때에’의 시점기록은 자체 안에 이것을 포함한다. 즉 ‘날이 밝으면, 그때에, 하루 일을 할 시간이다.’ 배려 속에서 해석된 시간은 언제나 이미 ‘~을 위한 시간’으로서 이해되어 있다. 그때그때의 ‘이것저것을 하는 지금’은 ‘~을 하기 위해 적당한 지금’이거나 ‘그것을 위해 적당하지 않은 지금’이다. 곧, 모든 ‘지금’은 단순히 ‘~하는, 지금’─곧, 시점기록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적당함 내지 부적당함의 구조(사용사태?)에 의해 규정된다. 배려의 기대하며 간직하는 현재화는 시간을 (사용사태의) ‘무엇을 위해서’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며 이 ‘무엇을 위해서’는 그 나름의 궁극적으로 현존재의 존재가능의 ‘그 때문에’에 고정되어있다. 공공의 시간은 이러한 ‘위하여-연관’과 더불어 우리가 앞에서 유의미성이라고 알게 된 그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유의미성이 세계의 ‘세계성’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공의시간은 ‘~을 위한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세계 성격을 띤다.
시간성의 시간화에서 공공화되는 시간을 세계 시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시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것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에서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p.540
배려된 시간은 네 가지 구조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1) 시점기록가능성, 2) 펼쳐져 있음(폭) 3) 공공성, 4) 세계성.
자연적 시계, 곧 태양의 열어 밝힘성—이 열어 밝힘성은 물론 현존재의 염려에 속해 있다. 또한 동시에 배려된 시간의 어떤 공공화가 포함되어 있다. 곧, 탁월한 유형의 공공화, 현사실적 현존재에 의해 언제나 이미 수행되고 있는 공공화, 시간 계산을 개선하고 시계 이용을 정밀화하는 가운데 더욱 강화되고 있는 그런 공공화이다. p.540
원시적 현존재는 현재의 존재자들을 비교할 때, 후자의 현존재의 가장 두드리진 특징은 아마도 ‘전기 빛의 발명’일 것이다. 진보한 현존재는 밤조차 낮으로 변형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밤은 그 의미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이다. 달빛과 별빛이 과거에 지녔던 유용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점을 다른 각도에서 입증하고 있다. 또한 어떤 특별한 측정도구를 발명한 덕분에, 진보한 현존재는 고대인처럼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서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태양이 아니라 측정도구, 곧 시계라는 손 안의 것에 즉해 시간을 직접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가 몇 시인가?’와 ‘시간이 몇 시인가?’는 우리에겐 이미 동일한 의미의 두 문장이다. ‘해가 어디에 떠 있는가?’와 ‘시간이 몇 시인가?’가 저 고대의 현존재에게 같은 의미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진보한 현존재가 사용하는 인공적 시계는 저 ‘자연적’ 시계(태양)를 향해 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적인 시간 계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니까. 이렇게 시계도구가 필수적으로 태양을 향해 조정되어 있다면, 이 도구의 사용조차 근원적으로는 현존재의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거기의 열어 밝힘성과 함께 비로소 배려된 시간의 시점기록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이 일상적인 시계 이용에서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하더라도.
그러나 원시적 현존재 또한 하늘을 직접 바라보지 않아도 태양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발전된 수단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바로 자기 몸의 그림자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예컨대 고대의 ‘농부 시계’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림자가 몇 발 정도 길어지면, 거기에서 만나도록 하자.” 이런 공공적 시간 규정에서 ‘장소’의 위도상의 동일함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다. 현존재는 이런 시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데 그가 곧 일정한 방식으로는 그 시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해시계의 경우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해볼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 우리는 어째서 시계 바늘의 그림자가 해시계의 숫자판 위에서 취하는 위치에서 시간과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인가? 분명히 그림자도 시간이 아니고, 나누어진 궤도도 시간 자체가 아니고 그들 상호의 공간적 연관도 시간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시계와 또한 모든 회중 시계에 즉해 직접 읽어내고 있는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p.541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계를 보는 것’이 그저 단순히 눈앞의 도구를 그 변화에서 고찰하며 시계 바늘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시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말한다. 지금 몇 시이다, 지금 .....할 시간이다, ....하기까지 지금은 시간이 있다 시계를 보는 것은 자기에게 시간을 줌 안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서 이끌려지고 있다. 시계를 보며 시간에 자기를 맞추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지금을-말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자명한 사태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거의 의식하거나 고려하지 못할 정도이다. 따라서 지금을-말함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시점기록가능성, 펼쳐져 있음(폭), 공공성, 세계성과 같은 시간 배려의 구조적 구성계기들 또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542
지금을-말함은 간직하는 기대함과의 통일성에서 시간화 되고 있는 그런 현재화의 말하는 분류파악이다. 이 같이 시계를 이용할 때 수행되는 시점기록은, 또한 어떤 눈앞의 것의 탁월한 현재화로서 입증된다. 곧 밝혀지듯이, 이 눈앞의 것은 ‘척도’를 말한다. 그러나 시점기록은 단지 눈앞의 것과의 연관을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관 취함 자체가 측정의 성격을 갖는다. 척도가 측정되어야 할 길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이해되어 있다.
사실, 시계를 보면서 우리는 측정된 수치를 직접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읽어냄이 도대체 가능하려면, 우선은 측정되어야 할 그 시계의 길이 ‘안에’ 척도가 이미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현존재는 이 점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선은 그 길이 ‘안에’ 척도가 이미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현존하고 있어야 하고 현존재는 척도의 현존 빈도(얼마나 자주 현전해 있는가)를 이미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현존하는 시계 길이 안에 포함된 현존하는 척도를 현재화함으로써, ‘측정함’이라는 행위가 시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척도의 이념에는 본질적으로 불변성이 놓여 있다. 척도의 불변성이란, ‘척도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 대해 그 항구성에 있어 눈앞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척도는 언제 어디서나 불변하는 눈앞의 것을 말한다.
결론을 내리면, 시간 측정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의 공공화가 이루어지는데, 또한 이 공공화에 따라 시간은 바로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으로 만나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계 이용에서 마주치는 시간은 흡사 전재하는 지금 다양성의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시간성은 세계-내-존재에게 공간의 열어 밝힘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공간적 현존재는 그때그때 발견된 저기에 입각해서 자신에게 현존재적 여기를 지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성에 근거하여 배려된 시간은 시점기록가능성의 관점에서 언제나 현존재가 취하는 어떤 장소에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이 애초부터 공간과 결부되어 ‘시간은 항상 이미 시-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의 시간성이야말로, 시점기록이 공간적-장소적인 것에 자신을 묶을 수 있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 그리하여 이 공간적인 것이 하나의 척도로서 모든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 되고 있다는 점이 사태의 진실에 가깝다. 과학자들이 시간과 결부되어 있다고 추정하는 그 ‘공간’을, 우리는 오직 시간성에 근거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성은 단지 배려된 시간의 공공화뿐 아니라, 또한 공간의 공공성—공간은 언제나 모든 이에 대해 동일한 척도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공간에 맞추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없을 것이다—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한 셈이다.
시간성은 현존재를 역사적인 존재자로서 구성한다. 그리고 시계 이용과 시간 계산은 동일한 시간성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시계 이용은 어느 정도는 그 자체로 역사적이라고, 또한 모든 시계가 그 자체로 ‘역사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 관찰과 시계 이용에 의한 시간 측정 속에서 시간은 공공화되고 있지만, 그것이 비록 (태양과 그림자 간의 위치 또는 시계 바늘과 숫자판 간의 위치와 같은) 공간적 척도관계들에 입각하여 시점기록 된다고 하여 공간으로 변화되는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시점기록된 ‘지금’이 (시계와 같은) 어떤 공간적 사물의 공간 길이와 장소 변화에 입각하여 수(적으로 (따라서 양적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 측정의 실존론적-존재론적 본질을 발견해서도 안 된다. 시간의 본질은 결코 공간 또는 공간화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 측정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유형의 현재화에 있다. 이 현재화가 분석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간적’ 눈 앞의 것에 입각한 시점기록은 시간의 공간화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추정상의 이 공간화야말로 사실은 그 눈앞의 것의 현재화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지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 그 현존성에 있어 항구적 구속력을 갖는 그런 불변하는 눈앞의 것으로서 ‘척도’의 현재화이다. 그러나 정확히 바로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곧, 시간 측정은 본질적, 필연적으로 ‘지금을-말함’의 구조를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이 측정에서 전재적이고 현존하는 척도를 획득하면서 측정된 것 그 자체, 곧 시간 자체는 망각되어 버리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공간적, 전재적 길이와 수 외에는 현존재의 시선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시간 측정은 어떤 특별한 유형의 시간의 공공화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간’이라고 알고 있는 현상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공공화된 시간을 말한다. 배려 안에서 모든 사물에게는 ‘자신의 시간’이 할당된다. 그리하여 사물은 시간을 ‘가지게’ 되고, 또한 다른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그러하듯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이는 오직 사물이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곧, 시간 내부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이 모든 사물과 모든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시간 내부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담고 있는 이 시간을 ‘세계 시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세계의 열어 밝힘성과 함께 세계 시간은 공공화되며, 그래서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포함하여)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시간적으로 배려하는 존재함’은 모두 이런 존재자를 ‘시간 안에서’ 마주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p. 545
‘ 그 안에서’ 눈앞의 것이 움직이고 정지하는 시간은 “객관적”이 아니다. ‘객관적’이란 표현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자체존재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은 “주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이란 표현이 ‘주체’ 안에 ‘눈 앞에 있음“이나 ‘발생함’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오히려 세계 시간은 모든 가능한 객체 보다 ‘더 객관적’인데 이 시간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가능 조건으로서, 세계의 열어 밝혀져 있음과 함께 언제나 이미 탈자적-지평적으로 ‘객관화되기’(‘공공화되고)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심리적인 것, 곧 내적 감성의 형식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야만 비로소 물리적인 것의 시간을 규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의 시간 경험을 사고한 바 있는데, 하이데거는 다르다. 오히려 세계 시간은 심리적인 것에 즉해 직접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물리적인 것에 즉해서도 직접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우선 ’시간‘은 다른 곳이 아닌 하늘에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그 시간에 맞추면서 시간을 발견하게 되는 그곳에서 나타나며 그래서 ’시간‘은 심지어 하늘과 동일시되기까지 한다. p .545
그러나 또한 세계 시간은 모든 가능한 주체보다 ‘더 주체적’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염려라는 현존재의존재를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의 존재’라는 잘 이해된 의미에서 이 존재를 비로소 함께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인 동시에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 곧 세계, 곧 세계 시간이 없이 단지 염려만으로 현존재의 존재를 온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 이처럼 염려의 자기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세계 시간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계 시간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가장 객관적인 동시에 가장 주관적인 어떤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제 1) ‘시간성은 탈자적-지평적인 것으로서 세계 시간을 시간화하고 있다’는 점, 2) ‘세계 시간은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의 시간 내재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은 비록 시간 속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다 . 왜냐하면 시간적인 존재자는 오직 현존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건, 생성하고 소멸하건, 이념적으로 존립하건 상관없이, 모두 비시간적이다.
세계 시간은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명확히 통찰할 때 상식이 빠져들기 쉬운 주관성과 객관성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곧, (1) 어떻게 일상적 현존재가 가장 가까운 존재 이해로부터 ‘시간’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는가 (2) 어느 정도까지 이런 시간 개념과 그 지배가 개념에서 의미되고 있는 것을 근원적인 시간에서부터 다시 말해서 시간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존재에게 가로막고 있는가
제81절. 시간 내재성과 통속적 시간 개념의 발생
일상의 둘러보는 배려에게 시간은 어떻게 보여 지는가? 사람들이 분명하게 시간으로 자신을 맞추는 행동관계는 ‘시계 이용’이다. 그런데, 시계 이용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움직이는 시계 바늘의 현재화’이다. 우리는 시계 바늘의 위치들의 이동 경과를 현재화하면서 좇으면서 헤아린다. 물론 이 같은 현재화는 기대하는 간직함의 탈자적 통일성 속에서 시간화된다. 그래서 현재화하면서 ‘그 당시’를 간직하다는, 곧 <지금을-말하면서 ‘이전에’의,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지금은 아님’의 지평에 열려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현재화에서 시간화되는 그것이 곧 시간이다. 이 정의는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정의를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곧 이전과 이후의 지평에서 만나는 운동에 서 헤아려진 것이다.” (<자연학>, A11, 219 b 1 이하 참조.) 이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끄집어 내온 그 실존론적-존재론적 지평이 제한 규정되면 매우 ‘자명한’ 것이며 바르게 길어내어진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하였지만, 그 시간의 ‘근원’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시간 해석은 ‘자연스러운’ (곧, 일상적이고 통속적이며 상식적인) 존재 이해의 방향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p. 547
시간에 대한 많은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었지만 그 논의들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 내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어떻게 시간이 둘러보는 배려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그 현상을 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사고 지평 내에서는, 시간은 아무리 새롭게 사유되고 해석된다 하더라도 결국 ‘헤아려진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곧,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나 그림자의 현재화 속에서 밖으로 말해진 것 또는 비록 비주제적이기는 하지만-의미된 것이다.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등 헤아려진 것은 지금들이다. 시계 이용에서 보여지는 세계시간을 ‘지금’을 중심으로 ’보이는‘세계 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간 배려가 ‘더욱 자연스럽게’ 시간을 계산하면 할수록, 이 배려는 그만큼 더욱 시간 그 자체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려된 도구(곧, 시계)에 스스로를 상실한다. 배려는 그런 자연스러운 계산과 더불어 ‘지금, 그때에, 그 당시’를 그 만큼 더 많이 말하게 될 것이다. p. 548
배려된 시간의 첫 번째 본질 계기로서 시점기록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이 근거는 시간성의 탈자적 구성틀이다. 지금의 구조에는 유의미성이 속한다. 유의미성은 세계의 세계성을 형성하고 있기에, 결국 배려된 시간은 세계 시간으로 명명될 수 있었지만 시간을 ‘지금의 연속’으로 보는 통속적인 시간 해석에서는 시점기록가능성이나 유의미성, 세계성과 같은 것이 결여되어있고 그것들을 은폐하고 있다. 오히려 시점기록가능성과 유의미성이 근거하는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구성틀이 그런 시간 해석의 지배 하에서는 평준화된다. .
‘지금’은 시간 측정의 배려 속에서 셈해지고 있지만, 또한 그때마다 이미 손 안의 것과 눈 앞의 것의 배려 속에서 함께 이해되고 있다. 이 배려는 자신을 주도해가는 특정한 존재 이해의 지평 내에서 ‘지금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들도 일정한 방식으로 함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지금들이 지나가버리고 이 지나가버린 것이 곧 과거를 만든다. 지금이 도래하고 이 도래하는 지금들이 곧 ‘도래’를 제한 규정한다. 과거가 형성되는 근거도, 도래가 형성되는 근거도 오로지 지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 시간을 지금-시간으로 보는 이런 통속적 해석의 지배 하에서는, 세계니 유의미성이니 시점기록가능성이나 하는 것은 은폐 될 수밖에 없다. p.549
시간의 펼쳐져 있음이 시간 배려에서 공공화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성의 지평적 뻗쳐있음에서부터 이해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탈자적 뻗쳐있음은 눈앞의 것의 연속성에 는 전혀 낯선 것이지만 그 나름 눈앞에 있는 지속적인 것에 이르는 접근의 가능 조건을 나타낸다. p..550
통속적 시간 해석의 주 논제는 ‘시간은 무한하다’인데 세계시간 그리고 시간성 일반의 평준화와 은폐를 가장 철저하게 보여준다. 시간은 ’양쪽 방향으로 끝이 없다“ 이러한 시간 논제는 오직 눈앞에 있는 지금의 경과라는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자체-존재에 방향을 잡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때 완전한 지금의 현상이 시점기록가능성, 세계성, 펼쳐져 있음, 현존재적인 공공성과 관련하여 은폐되고 알아볼 수 없는 파편으로 가라앉고 만다. 시간을 끝까지 사유하는 것도 각기 그 때마다 여전히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사람들은 시간이 무한이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 자신의 본래적인 실존 앞에서 도망하는 현존재의 은폐하는 도피가 알려져 있으며 배려된 도피에는 죽음 앞에서의 도피가, 다시 말해서 세계-내-존재의 종말로부터 눈을 돌림이 놓여있다. p.551
통속적인 해석은 시간의 흐름을 일종의 되돌릴 수 없는 잇달음이라고 규정한다. 왜 시간은 되돌려질 수 없는가? 지금의 흐름에만 향하는 시선에서는, 왜 지금의 연속이 한 번도 다시 반대의 방향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지를 통찰할 수 없다. 되돌릴 수 없음은 그 근거를 공공의 시간이 시간성에서 유래한다는 데에 두고 있다. 이 시간성의 시간화는 일차적으로 도래적이어서 탈자적으로 그 종말로 ‘가며’ 그래서 그 자체 이미 종말에 와 ‘있는’ 것이다. p.553
지금 시간이 단지 가능한 해석의 순서에서만 일차적으로 시간성에 방향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비로소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시간성에서 현재화되기 때문에 지금-시간이 시간성에서 파생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시간성을 근원적인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은 일차적으로 도래에서부터 시간화된다. 이와는 반대로 통속적인시간 이해는 시간의 근본 현상을 지금에서 보며 그것도 완전한 구조가 잘려나간 사람들이 ‘현재’라고 일컫고 있는 순수한 지금에서 보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이러한 지금에서부터 본래적 시간성에 속하는 탈자적- 지평적 순간의 현상을 해명하거나 또는 도출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망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p.554
통속적인 시간 경험이 우선 대개 단지 ‘세계 시간’만을 알고 있더라도 그 경험은 분명히 동시에 또한 언제나 세계 시간에게 ‘영혼’과 ‘정신’과의 탁월한 연관을 제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영혼(마음) 이외에, 영혼의 마음 이외에, 헤아리는 것을 본성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없다면, 즉 영혼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므로 내게는 시간이 연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의 연장인지는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혼의 연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상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통속적 시간 개념의 밖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헤겔도 통속적으로 이해된 시간과 정신과의 연관을 끄집어내려고 분명하게 시도했는데, 이에 반해서 칸트에게는 비록 시간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사유한다‘의 옆에 결속되지 않은 채 놓여있다. 시간과 정신 사이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p.555 명확한 근거 제시는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본 앞의 해석과 세계 시간의 근원을 이 시간성에서부터 제시한 것을 간접적으로 명료하게 하는데 적합하다.
82절 시간과 정신의 관련에 대한 헤겔의 결해에 대비하여 시간성과 현존재 그리고 세계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연관을 구별함
이제까지의 시간성의 이념을 헤겔의 시간 개념과 대비하여 구별하는 것이 당연한 까닭은 헤겔은 시간개념이 통속적 시간이해의 가장 극단적이면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개념적 형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ㄱ) 헤겔의 시간개념
통속적 시간이해에 대한 최초의 전승된, 주제적인 상세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발견된다. 공간이 변증법적으로 그것이 무엇인 그 점에서 사유된다면, 공간의 이러한 존재가 헤겔에 의하면 시간으로서 드러난다. 공간은 자연의 자기 바깥 존재(자기 밖에 있음)의 매개 없는 무차별성이다. 공간은 공간 안에서 구별 가능한 점들의 추상적 다수성이라는 것이다. 점은 공간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하고 있는 한, 공간의 부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러한 부정으로서( 점 역시 공간이다) 그 자체 공간 안에 남아있는 p.557식으로 그렇다.
그러나 헤겔이 말했듯이 공간은 점이 아니라 ‘점성’(정확성)이다. ‘부정성은 점으로서 공간과 관련을 맺고 공간 안에서 선과 면이라는 자신의 규정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이 부정성은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에서는 대자적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규정들로 있지만 동시에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 안에서 정립하면서, 이때 정지해 있는 나란히 있음에 대해서는 무차별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렇게 대자적으로 정립되면, 부정성이 곧 시간이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정립함으로써 점은 그것이 그 안에서 서있는 잇달아 있음을, 즉 이제는 부정된 부정의 영역으로서의 자기 밖에 있음의 영역을 정립한다. 무차별성으로서의 점성의 지양은 다른 점들을 향해서 ‘자기를 뻗친다.’점성‘으로서의 이러한 부정의 부정이 헤겔에 의하면 곧 시간이다. 점의 대자적 지기정립의 가능조건은 지금이다. 공간의 순수 사유가 각기 그때마다 지금과 지금들의 자기 밖에 있음을 ’사유하기‘ 때문에, 공간이 시간으로’ 있는‘ 것이다. 시간은 있다는 점에서는 있지 않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있는 그런 존재, 직관된 생성이다. 시간은 단적으로 찰나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지양하는 구별들이 외부적인, 그러나 자시 자신에게 외부적인 그런 구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시간은 ‘직관된 생성’이다. 생성은 발생일뿐만 아니라 소멸이다. 존재가 ‘넘어가거나’ 또는 ‘무가 넘어간다. 이것은 시간의 존재는 지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p. 559
또한 시간을 성격 규정함은 ‘관념적’이기는 해도 눈앞의 것으로서 직관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헤겔이 시간을 '직관된 생성‘이라고 이름 할 때 그 시간 안에서는 발생도 소멸도 우위를 점하지 않고 있다. 헤겔은 시간을 생성으로 성격 규정할 때도 이 생성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표상을 넘어서는 ’추상적‘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추상적 의미로 이해함은 시간견해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 시간을 부정의 부정<다시 말해서 점성(정확성)>으로 규정한 데에 있다. p. 561
ㄴ)시간과 정신의 연관에 대한 헤겔의 분석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헤겔은 개념을 사유된 것의 형식으로서 종이라는 직관된 일반자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을---비-자아의 파악으로서---개념 파악하는 것이다. 비-자아의 파악이 일종의 구별을 나타내는 한, 이러한 구별의 파악으로서의 순수 개념에는 구별을 구별함이 놓여있다.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형식적-서술적으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한다. 정신의 전개의 목표는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 하는 것’이다.
자신을 자신의 개념으로 데려오는 정신의 전개의 동요가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에, 자기를 실현하면서 부정의 직접적인 부정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정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있는, 텅 빈 직관으로서의 의식에 표상된 개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기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은 외적으로 직관된 순수 자기, 즉 단지 직관되기만 한 개념이다. 정신은 필연적으로 그 본질 p.563상 시간 안에 나타난다. 시간이 단적으로 평준화된 세계시간의 의미로도 개념파악 되기 때문에 눈앞의 것으로 정신과 마주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은 비로소 처음으로 ‘시간 속으로’ 떨어져 들어와야 한다. 이러한 떨어짐과 시간을 지배하며 본래적으로는 시간 밖에 존재하는 정신의 실현이 존재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둠에 싸여있다. 이렇듯 헤겔은 평준화된 시간의 근원을 밝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과연 도대체 정신의 본질 구성틀이 부정의 부정으로서가 아니고 다르게도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전혀 검토되지 않은 채 놔두고 있다. 가능하다면 근원적인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일 것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사실적으로 내던져져 있는 실존 자체의 ‘구체화’에서 시작하여, 실존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밝혀보였다. ‘정신은 이제야 비로소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간성의 근원적인 시간화로서 실존하고 있다. ’정신‘은 시간 안으로 떨어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사실적 실존은 빠져 있는 실존으로서 근원적인 본래의 시간성에서부터(이미 시간 안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떨어짐 자체도 그 실존론적 가능성을 시간성에 속하는 이 시간화의 한 양태 안에 가지고 있다.
83절 현존재의 실존론적-시간적 분석론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기초존재론적 물음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인데, 이 해석학은 실존에 대한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의 끝을, 거기에서부터 그것이 발원하며 거기에로 그것이 되돌아가는 거기에다 고정해놓았다. ‘존재’ 와 같은 그런 것은, 이해로서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그런 존재이해 안에서 열어 밝혀져 있다. 비록 비개념적이기는 하지만 선행적으로 열어 밝혀진 존재가 현존재로 하여금 실존하는 세계-내-존재로서 존재자와, 즉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뿐 아니라 실존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존재를 열어 밝히며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도대체 현존재적으로 가능한가? 이 물음은 그 대답을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전체성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성틀은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탈자적 시간성의 근원적인 시간화의 방식이 그 자체 존재 일반이 탈자적 기획투사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