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Tubingen: Max Niemeyer Verlag,1977.
발제: 김쫑 (3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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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Dasein und Zeitlichkeit (49~57절)
제1장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와 죽음을 향한 존재
Das Mögliche Ganzseit des Daseins und das Sein zum Tode.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
§49. Die Abgrenzung der existenzialen Analyse des Todes gegenüber möglichen anderen Interpretationen des Phänomens
죽음은 삶의 한 현상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죽음의 본질이 삶의 존재론적 본질에서부터 규정되는가 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끝남을 우리는 끝나버림이라고 이름했다. 그러나 사망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자기의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명칭으로서 통용된다고 했다. 따라서 현존재는 결코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오직 그가 사망하는 동안에만 삶을 다할 수 있다.(331)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그 모든 생물학과 생명의 존재론에 앞서 놓여 있다.
사망의 ‘유형학’은 삶을 다함이 체험되는 상태와 방식들에 대한 성격부여로서 이미 죽음의 개념을 전제한다.
사망의 ‘심리학’은 사망 자체에 대해서보다 오히려 ‘사망하는 자의 ‘삶’에 대해서 해명하고 있다.
죽음의 분석은 그때그때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서 어떻게 현존재 안으로 들어서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순수 차안적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죽음의 차안적 존재론적 해석이, 모든 존재적-피안적 사변에 앞서 놓여 있다. (332)
죽음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아래 논의됨직한 것도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의 구역 밖에 있다. 어떻게, 언제, 죽음의 의미 등에 대한 물음들은 죽음의 존재성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일체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론은 생물학, 심리학, 변신론 및 신학 등에서의 죽음보다 순서상, 앞에 높여 있다. 실존론적 문제들은 오로지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333)
제50절 죽음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를 앞서 그려봄
§50. Die Vorzeichnung der existenzial-ontologischen Struktur des Todes.
죽음이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또는 종말을 향한 존재)은 이 성격들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현존재의 종말을 미완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이미) 말했다. 아직 아님은 현존재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그런 어떤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은 현존재의 앞에 닥쳐 있다. 죽음은 아직 눈앞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아니며 최후의 미완도 아니요, 차라리 일종의 ‘앞에 닥침’이다.
죽음은 현존재 자신이 각기 그때마다 떠맡아야 할 존재 가능성이다. 죽음은 더 이상-거기에-존재하지-않는다는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이러한 가능성으로서 자기 앞에서 닥쳐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지시되어 있는 셈이다.(335) 그리고 이때의 현존재에서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연관들이 끊어진다. 이렇듯 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밝혀진다. 현존재는 실존할 때, 이미 이 가능성 안으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던져 있음이 더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불안이라는 처해 있음에서이다. 삶이 끝장이다..라는 공포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는 현존재의 근본적 처해 있음이며, 종말을 향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다.(336)
현존재는 실존하고 있는 동안 현사실적으로 죽고 있는데, 대개 빠져 있음의 방식으로 그렇다. 실존, 현사실성, 빠져 있음(Existenz, Faktizität, Verfallen)이 종말을 향한 존재를 성격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한다. 죽음[사망]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의 관점에서는 염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 염려는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명칭이다..라는 테제를 뒷받침하는 현상적 확증이 놓여 있다.(337) 그리고 이 연관은 뭣보다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구체화, 즉 그의 일상성에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제51절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51. Das Sein zum Tode und die Alltäglichkeit des Daseins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일상성의 자기 자신은 그들인데, 그들은 잡담에서 밖으로 말해지고 있는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잡담이, 일상적 현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향한 존재를 자신을 위해서 해석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일상적인 ‘서로 함께’라는 공공성은 죽음을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으로, 세계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주지의 사건으로 만나고 있다.(338)
공공의 현존재 해석은 ‘사람은 죽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이렇게 꾸며댈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의 ‘그들’이란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은 하나의 [다반사적]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본질적으로 대리될 수 없이 나의 죽음인 그 죽음이 ‘그들’이나 만나게 되는 공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뒤바뀐다.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339) 그런 식으로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준다. 동시에 그들은 현존재를 그의 죽음에서 몰아내는 이러한 안정감으로써, 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처신해야 하는 방식을 암암리에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한과 명망을 높인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에 대한 용기가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공포로 애매하게 되어버린 불안을, 자신 있는 현존재는 가져서는 안 되는 나약함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런 태연한 무관심의 형성은 현존재를 그의 고유한 무연관적 존재가능에서부터 소외시킨다. 유혹, 안정 및 소외는 빠져 있음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 것들이다. 죽음 앞에서의 도피(340), 종말 앞에서의 회피라는 양태, 다시 말해서 그의 종말을 향한 존재 안에 있다는 이 현사실을, 현존재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사망의 경우로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은폐한다. 현존재에게는, 평균적인 일상성에서도 이러한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비록 오직 그의 실존의 극단적인 가능성을 거슬러서 방해받지 않은 무관심의 배려라는 양태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거기에서 회피하는 현존재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현상학적으로 기획투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341)
제52절 일상적인 종말을 향한 존재와(▶ 일상적인, 종말을 향한 존재; 종말을 향한 일상적인 존재와;) 죽음의 온전한 실존론적 개념
§52. Das alltägliche Sein zum Ende und der volle existenziale Begriff des Todes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해명은, 사람이 한 번은 죽지만, 그러나 당장은 아직 아니다..라는 그들의 잡담 속에 머물렀다. 이 일상성은 죽음의 확실성을 애매하게 시인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사망을 더욱더 은폐하면서 확실성을 완화하여 죽음에 내던져져 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이다.
죽음의 확실성이란 어떤 문제인가? 현존재는 열어밝혀져 있으며-열어밝히는, 발견하는 존재자로서 본질적으로 진리 안에 있다. 그러나 확실성은 진리 안에 근거하거나 또는 진리에 똑같이 근원적으로 속한다. 확실성이라는 표현은 진리라는 용어처럼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342) 진리는 현존재의 행동관계로서 열어밝히면서 존재할 정도를 말한다. 여기에서부터 파생된 뜻이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인 것으로 여김이 진리 안에 머무름으로써 충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발견된 존재자 자체에 근거하고 있고 이렇게 발견된 존재자에 대한 존재로서 이 존재자에 대한 그것의 적합성에서 투명해졌을 때이다.
존재자의 상이함과 더불어 열어밝힘의 주도적 경향과 범위에 따라 진리의 양식이 변하고 그로써 확실성도 변한다. 죽음에 대한 확실함의 분석에서 하나의 탁월한 현존재확실성이 나타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을 은폐한다. 이러한 현사실적 은폐의 경향이 ‘현존재는 현사실적 현존재로서 비진리 안에 있다’는 테제를 입증하고 있다. (343) 죽음의 확실성과 그것의 앞에 닥침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적 규정에서 다시금, 현존재의 존재 양식과 그에 속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를 오인하는 일상성의 특징이 드러난다.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삶을 다함이 ‘단지’ 경험적으로 확실하다면, 그것은 죽음의 확실성에 대해서 결정하지 못한다.(344) 죽음은 확실히 온다. 하지만 아직 당장은 아니다..라는 말로써 그들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부인한다. 이렇게 그들은 죽음이 어느 순간에건 가능하다..라는 이 죽음의 확실성의 고유함을 은폐한다.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언제’의 무규성은 같이 간다.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는 이 무규정성에 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무규정성을 피해간다. 그리고 무규정성의 은폐는 확실성도 함께 은폐한다. (345)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고 확실하며 그리고 그 자체로서 무규정적이고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이다. 자기를 앞질러..에서 취한 아직-아님의 현상은, 염려구조 일반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실존하는 전체존재를 반대하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이 ‘자기를-앞질러’가 그러한 종말을 향한 존재를 이제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염려가 이 존재자의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과 연관될 때, 올바르게 성립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면서(346) 그가 그의 생명을 마치는 순간에 도달하지 않은 한, 현사실적으로 죽고 있으며 그것도 끊임없이 죽고 있다. 죽음 앞에서의 일상적인 빠져 있는 도피는 일종의 비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비본래성은 그 밑바탕에 가능한 본래성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는 현존재의 실존적 가능성을 뜻한다. 그 가능성 자체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제53절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획투사
§53. Existenzialer Entwurf eines eigentlichen Seins zum Tode
현사실적으로 현존재는 우선 비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안에 머물고 있다.(347) 이제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의 실존론적 구성이 기획투사될 수 있어야 한다.
현존재는 열어밝혀져 있음에 의해서, 즉 처해 있는 이해에 의해서 구성된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는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인 가능성 앞에서 회피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도피 속에서 그 가능성을 은폐할 수도 없고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바꾸어 해석할 수도 없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죽음을 향한 존재를 하나의 가능성을 향한 존재로서 특징짓는 것이다. 손안의 것과 눈앞의 것의 영역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즉 성취 가능한 것, 지배 가능한 것, 유통 가능한 것 등이 그것이다. 어떤 가능한 것으로 배려하며 나가-있음은 가능한 것을 처리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348) 손안에 있는 도구를 배려하는 실현(제작하다, 마련하다, 바꿔놓는다 등으로)은 실현된 것이 또한 여전히 사용사태의 존재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나 상대적일 뿐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분명히 그 실현으로 배려하며 나가-있음의 성격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죽음은 가능의 것으로 가능한 손안의 것이나 눈앞의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이다.
둘째, 이러한 존재 가능적인 것의 실현의 배려가, 삶의 다함의 초래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 그로써 현존재는 실존하며,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기 위한 바로 그 지반을 자신에게서 박탈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러한 행동관계란, ‘죽음에 대한 생각’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존재가 앞에서 성격규정한 가능성 그 자체를 이해하며 열어밝혀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약화되지 않고 가능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가능성으로서 형성되어야 하고, 그 가능성과의 행동관계에서 가능성으로서 견뎌내어져야 한다. (349) 그러한 가능성을 향한 존재를 우리는 용어상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봄’이라고 파악한다. 하지만 가능한 것으로 가까이 감은, 현실적인 것을 배려하며 마음대로 처리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것의 의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향한 존재의 가장 가까운 가까움은 현실적인 것과는 가능한 한 먼 것이다.(350) 미리 달려가봄은 가장 고유한 극단적인 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임이 입증된다. 미리 달려가 보는 열어밝힘이 그 자체로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순수하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성격들이 이 열어밝힘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이해함이 일차적으로 어떤 의미를 멍하니 받아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투사에서 드러나는 존재가능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351)
그런데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 가능성이다. 죽음은 그저 고유한 현존재에게 무차별하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로 하여금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이 개별화는, 모든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있음과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현존재는 그가 자신을 기획투사하는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무연관적인 가능성을 건너뛸 수 없는 것이다.(352)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봄이 그 가능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함께 열어밝히기 때문에, 미리 달려가봄 안에는 전체적 현존재를 실존적으로 앞서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시 말해서 전체적 존재가능으로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353)
그러나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개별화는 존재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한 단적인 위협을 열린 채 견지할 수 있는 처해 있음은 불안이다. 불안 속에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의 가능한 불가능성의 무 앞에 처해 있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안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불안을 겁먹은 두려움으로 바꿔놓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불안에 대한 겁이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실존론적으로 기획투사된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성격규정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게 그들 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 속에 있는 자신이다.(355) 지금까지 존재론적인 가능성에서만 기획투사된 죽음으로 달려가봄이, 입증된 본래적인 존재가능과 본질적인 연관 안에 서게 된다. (357)
제2장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과 결단성
Die daseinsmässige Bezeugung eines eigentlichen Seinkönnens und die Entschlossenheit
제54절 본래적 실존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문제
§54. Das Problem der Bezeugung einer eigentlichen existenziellen Möglichkeit
이제 탐구조사되어야 할 것은, 현존재 자신이 그의 실존적 가능성 증명해 보여야 하는 현존재의 본래적 가능성이다. 증명은 본래적인 자기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본래적인 자기존재는 그들의 한 실존적 변양으로 규정되는데, 이 변양이 실존론적으로 제한규정되어야 한다.(357) 그들은 이러한 존재가능성의 장악을 현존재로부터 언제나 박탈했다. 선택 없이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서 끌려다니게 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빠뜨리는데,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 세워질 수 있다.
현존재가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상실해버린 바로 그 존재양식을 가지고 그들에서부터 자신을 되찾아옴은 즉 자신을 본래적인 자기-존재로 실존적으로 변양시키는 일은 선택의 만회로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의 만회란 이 선택을 선택한,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서부터 하나의 존재가능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그들 속에 상실해버렸으니,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현존재가 그 자신에게 그의 가능한 본래성에서 ‘내보여져야’ 된다. 그런 하나의 자기존재가능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한 증거로서 요구주장되고 있는 것은, 현존재의 일상적 자기해석에게는 ‘양심의 소리Stimme des Gewissens’로 알려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358) 양심이 그 실존론적 기초와 주조에서 소급추적되어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존재구성틀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현존재의 현상으로서 드러내보여야 한다. 양심은 오직 현존재의 존재양식 안에만 있으며, 각기 그때마다 오직 현사실적 실존과 함께 그리고 이 실존 안에서 현사실로서 알려진다.(358) 양심은 ‘어떤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즉 양심은 열어밝힌다. 양심에 대한 더 철저한 분석은 양심을 부름으로서 밝혀준다. 부름은 말의 한 형태이다.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자기존재가능으로 불러내는 성격을 가지며, 그것도 가장 고유한 탓이 있으므로 불러세움의 방식으로 그렇다. 양심의 불러냄을 이해함은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으로 밝혀진다. 이는 자기존재의 선택을 실존적으로 선택함에 놓여 있으며 이것을 그 실존론적인 구조에 상응하게 결단성이라고 이름한다. (360)
제55절 양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들
§55. Die exitenzial-ontologischen Fundamente des Gewissens
양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에게 어떤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양심은 현존재를 열어밝히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실존론적 현상들의 범위에 속한다. 존재자는 자신의 ‘거기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안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더불어 현존재는 그 자신에 대해서 ‘거기에’ 있는데, 자신에게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존재가능을 열어밝힌 식으로 그렇다. 현존재는 그가 자신을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기획투사했거나 그들 속에 몰입하면서 자신에게 그들의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 의한 가능성들을 앞서 주도록 내버려둔 이상 자기 자신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알고 있다. (361) 그런데 이러 앞선 제공은 현존재가 이해하는 더불어 있음으로서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음으로 해서 실존론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말을 듣는 가운데 자신의 고유한 자기는 들어넘긴다. 즉 자기의 말을 들어넘겨버러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들어넘기고 있는 이 자기 자신 말이다. 이러한 귀기울이 단절되어야 한다. 그 기귀울임을 중단시키는 어떤 들음의 가능성이 현존재 자신에 의해서 현존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부름’은 소동 없이 애매하지 않게 호기심에 매이지 않게 불러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부르면서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양심이다.
부름을 우리는 ‘말의 양태’로서 파악한다. 부름으서의 양심의 성격부여는 법정으로 표상된 하나의 그림도 아니고 음성적 발성도 아니다. (362) 소리는 오히려 이해하게 해 줌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부름의 열어밝힘의 경향에는 충격의 계기, 즉 따로 떼어내어 세움의 계기가 있다. 부름은 먼 데서 와서 먼 데로 간다.(363)
제56절 양심의 부름의 성격
§56. Der Rufcharakter des Gewissens
부름이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은 현존재에게 기껏해야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계기에 불과할 것이다. 부름은 일상적-평균적으로 배려하면서 자기를 언제나 이미 이해하는 그런 현존재를 적중시킨다. 자기를 향한 부름은 그들 – 자신에게서 오직 ‘자기’만이 부름을 받고 들음에로 이끌려오기에 그들은 그 자체로 무너져내린다. 현존재의 공공의 해석을(364) 간과하면서, 부름은 공공의 명예에만 집착하는 ‘그들’을 무의미 속으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부름에서 그러한 피난처와 은신처를 빼앗기고 부름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부름은 또한 부름 받은 자기 안에서 일종의 자기대화를 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부름받은 자기를 토의에 붙이는 것이 아니다. 부름은 어떠한 발성도 필요치 않다.
양심은 한결같이 오로지 침묵의 양태로만 말한다. (365) 양심에서 ‘착각’은 부름이 잘못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름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그 방식에서 비로소 생긴다.
우리는 양심을 부름이라고 특징지었는데, 이 부름은 ‘그들’-자신을 자기 자신에게로 불러내는 것이다.
제57절 양심은 곧 염려의 부름
§57. Das Gewissen als Ruf der Sorge
양심은 현존재의 자기를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다.(366) 부름을 부르는 자는 단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한사코 멀리한다. 자신을 고찰이나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의 존재의 양식에 반하는 것이다. 부르는 자가 독특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일정의 긍정적인 특징이다. 오직 부르는 자로서만 듣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말한다.
부름은 절대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계획되지도, 준비되지도, 의도적으로 수행되지도 않는다. 기대에 반해서, 심지어의지에 반해서 그것이 부른다.(367) 부름은 나에게서 와서 나 위로 덮쳐온다.(368) 부름은 침묵이라는 섬뜩한 양태에서 말한다. 그들 공공의 잡담으로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이 잡담에서부터 실존하는 존재가능의 침묵하고 있음으로 되불러들이는 것이다.
현존재는 부르는 자이며 동시에 부름받는 자이다..라는 명제는 그 형식적 공허함과 자명성을 상실했다. (370) 양심은 스스로를 염려의 부름으로서 드러냈다. 부르는 자는 자신의 존재 가능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는 현존재이다. 양심의 불러냄은 ‘나쁜[가책받는]’양심에서 유래하는가 아니면 ‘착한[떳떳한]’ 양심에서 유래하는가? 이러한 의구심들은 당연하다. 그러나 통속적인 존재적 양심이해를 존재론적 해석을 위한 일차적 기준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2) 양심이 무엇을 입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부름에 진정으로 상응하게 듣는다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가 충분하게 분명히 한정될 때 비로소 그 완전한 규정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37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Tubingen: Max Niemeyer Verlag,1977.
발제: 김쫑 (3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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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Dasein und Zeitlichkeit (49~57절)
제1장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와 죽음을 향한 존재
Das Mögliche Ganzseit des Daseins und das Sein zum Tode.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
§49. Die Abgrenzung der existenzialen Analyse des Todes gegenüber möglichen anderen Interpretationen des Phänomens
죽음은 삶의 한 현상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죽음의 본질이 삶의 존재론적 본질에서부터 규정되는가 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끝남을 우리는 끝나버림이라고 이름했다. 그러나 사망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자기의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명칭으로서 통용된다고 했다. 따라서 현존재는 결코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오직 그가 사망하는 동안에만 삶을 다할 수 있다.(331)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그 모든 생물학과 생명의 존재론에 앞서 놓여 있다.
사망의 ‘유형학’은 삶을 다함이 체험되는 상태와 방식들에 대한 성격부여로서 이미 죽음의 개념을 전제한다.
사망의 ‘심리학’은 사망 자체에 대해서보다 오히려 ‘사망하는 자의 ‘삶’에 대해서 해명하고 있다.
죽음의 분석은 그때그때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서 어떻게 현존재 안으로 들어서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순수 차안적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죽음의 차안적 존재론적 해석이, 모든 존재적-피안적 사변에 앞서 놓여 있다. (332)
죽음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아래 논의됨직한 것도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의 구역 밖에 있다. 어떻게, 언제, 죽음의 의미 등에 대한 물음들은 죽음의 존재성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일체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론은 생물학, 심리학, 변신론 및 신학 등에서의 죽음보다 순서상, 앞에 높여 있다. 실존론적 문제들은 오로지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333)
제50절 죽음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를 앞서 그려봄
§50. Die Vorzeichnung der existenzial-ontologischen Struktur des Todes.
죽음이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또는 종말을 향한 존재)은 이 성격들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현존재의 종말을 미완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이미) 말했다. 아직 아님은 현존재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그런 어떤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은 현존재의 앞에 닥쳐 있다. 죽음은 아직 눈앞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아니며 최후의 미완도 아니요, 차라리 일종의 ‘앞에 닥침’이다.
죽음은 현존재 자신이 각기 그때마다 떠맡아야 할 존재 가능성이다. 죽음은 더 이상-거기에-존재하지-않는다는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이러한 가능성으로서 자기 앞에서 닥쳐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지시되어 있는 셈이다.(335) 그리고 이때의 현존재에서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연관들이 끊어진다. 이렇듯 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밝혀진다. 현존재는 실존할 때, 이미 이 가능성 안으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던져 있음이 더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불안이라는 처해 있음에서이다. 삶이 끝장이다..라는 공포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는 현존재의 근본적 처해 있음이며, 종말을 향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다.(336)
현존재는 실존하고 있는 동안 현사실적으로 죽고 있는데, 대개 빠져 있음의 방식으로 그렇다. 실존, 현사실성, 빠져 있음(Existenz, Faktizität, Verfallen)이 종말을 향한 존재를 성격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한다. 죽음[사망]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의 관점에서는 염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 염려는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명칭이다..라는 테제를 뒷받침하는 현상적 확증이 놓여 있다.(337) 그리고 이 연관은 뭣보다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구체화, 즉 그의 일상성에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제51절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51. Das Sein zum Tode und die Alltäglichkeit des Daseins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일상성의 자기 자신은 그들인데, 그들은 잡담에서 밖으로 말해지고 있는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잡담이, 일상적 현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향한 존재를 자신을 위해서 해석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일상적인 ‘서로 함께’라는 공공성은 죽음을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으로, 세계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주지의 사건으로 만나고 있다.(338)
공공의 현존재 해석은 ‘사람은 죽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이렇게 꾸며댈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의 ‘그들’이란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은 하나의 [다반사적]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본질적으로 대리될 수 없이 나의 죽음인 그 죽음이 ‘그들’이나 만나게 되는 공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뒤바뀐다.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339) 그런 식으로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준다. 동시에 그들은 현존재를 그의 죽음에서 몰아내는 이러한 안정감으로써, 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처신해야 하는 방식을 암암리에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한과 명망을 높인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에 대한 용기가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공포로 애매하게 되어버린 불안을, 자신 있는 현존재는 가져서는 안 되는 나약함인 것처럼 제시한다. 그런 태연한 무관심의 형성은 현존재를 그의 고유한 무연관적 존재가능에서부터 소외시킨다. 유혹, 안정 및 소외는 빠져 있음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 것들이다. 죽음 앞에서의 도피(340), 종말 앞에서의 회피라는 양태, 다시 말해서 그의 종말을 향한 존재 안에 있다는 이 현사실을, 현존재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사망의 경우로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은폐한다. 현존재에게는, 평균적인 일상성에서도 이러한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비록 오직 그의 실존의 극단적인 가능성을 거슬러서 방해받지 않은 무관심의 배려라는 양태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거기에서 회피하는 현존재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현상학적으로 기획투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341)
제52절 일상적인 종말을 향한 존재와(▶ 일상적인, 종말을 향한 존재; 종말을 향한 일상적인 존재와;) 죽음의 온전한 실존론적 개념
§52. Das alltägliche Sein zum Ende und der volle existenziale Begriff des Todes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해명은, 사람이 한 번은 죽지만, 그러나 당장은 아직 아니다..라는 그들의 잡담 속에 머물렀다. 이 일상성은 죽음의 확실성을 애매하게 시인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사망을 더욱더 은폐하면서 확실성을 완화하여 죽음에 내던져져 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이다.
죽음의 확실성이란 어떤 문제인가? 현존재는 열어밝혀져 있으며-열어밝히는, 발견하는 존재자로서 본질적으로 진리 안에 있다. 그러나 확실성은 진리 안에 근거하거나 또는 진리에 똑같이 근원적으로 속한다. 확실성이라는 표현은 진리라는 용어처럼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342) 진리는 현존재의 행동관계로서 열어밝히면서 존재할 정도를 말한다. 여기에서부터 파생된 뜻이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인 것으로 여김이 진리 안에 머무름으로써 충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발견된 존재자 자체에 근거하고 있고 이렇게 발견된 존재자에 대한 존재로서 이 존재자에 대한 그것의 적합성에서 투명해졌을 때이다.
존재자의 상이함과 더불어 열어밝힘의 주도적 경향과 범위에 따라 진리의 양식이 변하고 그로써 확실성도 변한다. 죽음에 대한 확실함의 분석에서 하나의 탁월한 현존재확실성이 나타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을 은폐한다. 이러한 현사실적 은폐의 경향이 ‘현존재는 현사실적 현존재로서 비진리 안에 있다’는 테제를 입증하고 있다. (343) 죽음의 확실성과 그것의 앞에 닥침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적 규정에서 다시금, 현존재의 존재 양식과 그에 속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를 오인하는 일상성의 특징이 드러난다.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삶을 다함이 ‘단지’ 경험적으로 확실하다면, 그것은 죽음의 확실성에 대해서 결정하지 못한다.(344) 죽음은 확실히 온다. 하지만 아직 당장은 아니다..라는 말로써 그들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부인한다. 이렇게 그들은 죽음이 어느 순간에건 가능하다..라는 이 죽음의 확실성의 고유함을 은폐한다.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언제’의 무규성은 같이 간다.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는 이 무규정성에 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무규정성을 피해간다. 그리고 무규정성의 은폐는 확실성도 함께 은폐한다. (345)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고 확실하며 그리고 그 자체로서 무규정적이고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이다. 자기를 앞질러..에서 취한 아직-아님의 현상은, 염려구조 일반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실존하는 전체존재를 반대하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이 ‘자기를-앞질러’가 그러한 종말을 향한 존재를 이제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염려가 이 존재자의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과 연관될 때, 올바르게 성립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면서(346) 그가 그의 생명을 마치는 순간에 도달하지 않은 한, 현사실적으로 죽고 있으며 그것도 끊임없이 죽고 있다. 죽음 앞에서의 일상적인 빠져 있는 도피는 일종의 비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비본래성은 그 밑바탕에 가능한 본래성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는 현존재의 실존적 가능성을 뜻한다. 그 가능성 자체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제53절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획투사
§53. Existenzialer Entwurf eines eigentlichen Seins zum Tode
현사실적으로 현존재는 우선 비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안에 머물고 있다.(347) 이제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의 실존론적 구성이 기획투사될 수 있어야 한다.
현존재는 열어밝혀져 있음에 의해서, 즉 처해 있는 이해에 의해서 구성된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는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인 가능성 앞에서 회피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도피 속에서 그 가능성을 은폐할 수도 없고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바꾸어 해석할 수도 없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죽음을 향한 존재를 하나의 가능성을 향한 존재로서 특징짓는 것이다. 손안의 것과 눈앞의 것의 영역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즉 성취 가능한 것, 지배 가능한 것, 유통 가능한 것 등이 그것이다. 어떤 가능한 것으로 배려하며 나가-있음은 가능한 것을 처리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가능성을 없애버리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348) 손안에 있는 도구를 배려하는 실현(제작하다, 마련하다, 바꿔놓는다 등으로)은 실현된 것이 또한 여전히 사용사태의 존재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나 상대적일 뿐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분명히 그 실현으로 배려하며 나가-있음의 성격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죽음은 가능의 것으로 가능한 손안의 것이나 눈앞의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이다.
둘째, 이러한 존재 가능적인 것의 실현의 배려가, 삶의 다함의 초래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 그로써 현존재는 실존하며, 죽음을 향해서 존재하기 위한 바로 그 지반을 자신에게서 박탈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러한 행동관계란, ‘죽음에 대한 생각’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존재가 앞에서 성격규정한 가능성 그 자체를 이해하며 열어밝혀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약화되지 않고 가능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가능성으로서 형성되어야 하고, 그 가능성과의 행동관계에서 가능성으로서 견뎌내어져야 한다. (349) 그러한 가능성을 향한 존재를 우리는 용어상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봄’이라고 파악한다. 하지만 가능한 것으로 가까이 감은, 현실적인 것을 배려하며 마음대로 처리하려 하지 않고, 가능한 것의 의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향한 존재의 가장 가까운 가까움은 현실적인 것과는 가능한 한 먼 것이다.(350) 미리 달려가봄은 가장 고유한 극단적인 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임이 입증된다. 미리 달려가 보는 열어밝힘이 그 자체로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순수하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성격들이 이 열어밝힘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이해함이 일차적으로 어떤 의미를 멍하니 받아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투사에서 드러나는 존재가능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351)
그런데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 가능성이다. 죽음은 그저 고유한 현존재에게 무차별하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로 하여금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이 개별화는, 모든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있음과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현존재는 그가 자신을 기획투사하는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무연관적인 가능성을 건너뛸 수 없는 것이다.(352)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봄이 그 가능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함께 열어밝히기 때문에, 미리 달려가봄 안에는 전체적 현존재를 실존적으로 앞서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시 말해서 전체적 존재가능으로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353)
그러나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개별화는 존재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한 단적인 위협을 열린 채 견지할 수 있는 처해 있음은 불안이다. 불안 속에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의 가능한 불가능성의 무 앞에 처해 있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안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불안을 겁먹은 두려움으로 바꿔놓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불안에 대한 겁이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실존론적으로 기획투사된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성격규정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게 그들 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 속에 있는 자신이다.(355) 지금까지 존재론적인 가능성에서만 기획투사된 죽음으로 달려가봄이, 입증된 본래적인 존재가능과 본질적인 연관 안에 서게 된다. (357)
제2장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과 결단성
Die daseinsmässige Bezeugung eines eigentlichen Seinkönnens und die Entschlossenheit
제54절 본래적 실존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문제
§54. Das Problem der Bezeugung einer eigentlichen existenziellen Möglichkeit
이제 탐구조사되어야 할 것은, 현존재 자신이 그의 실존적 가능성 증명해 보여야 하는 현존재의 본래적 가능성이다. 증명은 본래적인 자기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본래적인 자기존재는 그들의 한 실존적 변양으로 규정되는데, 이 변양이 실존론적으로 제한규정되어야 한다.(357) 그들은 이러한 존재가능성의 장악을 현존재로부터 언제나 박탈했다. 선택 없이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서 끌려다니게 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빠뜨리는데,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 세워질 수 있다.
현존재가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상실해버린 바로 그 존재양식을 가지고 그들에서부터 자신을 되찾아옴은 즉 자신을 본래적인 자기-존재로 실존적으로 변양시키는 일은 선택의 만회로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의 만회란 이 선택을 선택한,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서부터 하나의 존재가능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그들 속에 상실해버렸으니,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현존재가 그 자신에게 그의 가능한 본래성에서 ‘내보여져야’ 된다. 그런 하나의 자기존재가능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한 증거로서 요구주장되고 있는 것은, 현존재의 일상적 자기해석에게는 ‘양심의 소리Stimme des Gewissens’로 알려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358) 양심이 그 실존론적 기초와 주조에서 소급추적되어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존재구성틀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현존재의 현상으로서 드러내보여야 한다. 양심은 오직 현존재의 존재양식 안에만 있으며, 각기 그때마다 오직 현사실적 실존과 함께 그리고 이 실존 안에서 현사실로서 알려진다.(358) 양심은 ‘어떤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즉 양심은 열어밝힌다. 양심에 대한 더 철저한 분석은 양심을 부름으로서 밝혀준다. 부름은 말의 한 형태이다.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자기존재가능으로 불러내는 성격을 가지며, 그것도 가장 고유한 탓이 있으므로 불러세움의 방식으로 그렇다. 양심의 불러냄을 이해함은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으로 밝혀진다. 이는 자기존재의 선택을 실존적으로 선택함에 놓여 있으며 이것을 그 실존론적인 구조에 상응하게 결단성이라고 이름한다. (360)
제55절 양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들
§55. Die exitenzial-ontologischen Fundamente des Gewissens
양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에게 어떤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양심은 현존재를 열어밝히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실존론적 현상들의 범위에 속한다. 존재자는 자신의 ‘거기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안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더불어 현존재는 그 자신에 대해서 ‘거기에’ 있는데, 자신에게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존재가능을 열어밝힌 식으로 그렇다. 현존재는 그가 자신을 자기 자신의 가능성으로 기획투사했거나 그들 속에 몰입하면서 자신에게 그들의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 의한 가능성들을 앞서 주도록 내버려둔 이상 자기 자신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알고 있다. (361) 그런데 이러 앞선 제공은 현존재가 이해하는 더불어 있음으로서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음으로 해서 실존론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말을 듣는 가운데 자신의 고유한 자기는 들어넘긴다. 즉 자기의 말을 들어넘겨버러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들어넘기고 있는 이 자기 자신 말이다. 이러한 귀기울이 단절되어야 한다. 그 기귀울임을 중단시키는 어떤 들음의 가능성이 현존재 자신에 의해서 현존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부름’은 소동 없이 애매하지 않게 호기심에 매이지 않게 불러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부르면서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 양심이다.
부름을 우리는 ‘말의 양태’로서 파악한다. 부름으서의 양심의 성격부여는 법정으로 표상된 하나의 그림도 아니고 음성적 발성도 아니다. (362) 소리는 오히려 이해하게 해 줌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부름의 열어밝힘의 경향에는 충격의 계기, 즉 따로 떼어내어 세움의 계기가 있다. 부름은 먼 데서 와서 먼 데로 간다.(363)
제56절 양심의 부름의 성격
§56. Der Rufcharakter des Gewissens
부름이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은 현존재에게 기껏해야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계기에 불과할 것이다. 부름은 일상적-평균적으로 배려하면서 자기를 언제나 이미 이해하는 그런 현존재를 적중시킨다. 자기를 향한 부름은 그들 – 자신에게서 오직 ‘자기’만이 부름을 받고 들음에로 이끌려오기에 그들은 그 자체로 무너져내린다. 현존재의 공공의 해석을(364) 간과하면서, 부름은 공공의 명예에만 집착하는 ‘그들’을 무의미 속으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부름에서 그러한 피난처와 은신처를 빼앗기고 부름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부름은 또한 부름 받은 자기 안에서 일종의 자기대화를 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부름받은 자기를 토의에 붙이는 것이 아니다. 부름은 어떠한 발성도 필요치 않다.
양심은 한결같이 오로지 침묵의 양태로만 말한다. (365) 양심에서 ‘착각’은 부름이 잘못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름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그 방식에서 비로소 생긴다.
우리는 양심을 부름이라고 특징지었는데, 이 부름은 ‘그들’-자신을 자기 자신에게로 불러내는 것이다.
제57절 양심은 곧 염려의 부름
§57. Das Gewissen als Ruf der Sorge
양심은 현존재의 자기를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불러세운다.(366) 부름을 부르는 자는 단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한사코 멀리한다. 자신을 고찰이나 이야기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의 존재의 양식에 반하는 것이다. 부르는 자가 독특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일정의 긍정적인 특징이다. 오직 부르는 자로서만 듣게 되기를 바라는 것을 말한다.
부름은 절대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계획되지도, 준비되지도, 의도적으로 수행되지도 않는다. 기대에 반해서, 심지어의지에 반해서 그것이 부른다.(367) 부름은 나에게서 와서 나 위로 덮쳐온다.(368) 부름은 침묵이라는 섬뜩한 양태에서 말한다. 그들 공공의 잡담으로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이 잡담에서부터 실존하는 존재가능의 침묵하고 있음으로 되불러들이는 것이다.
현존재는 부르는 자이며 동시에 부름받는 자이다..라는 명제는 그 형식적 공허함과 자명성을 상실했다. (370) 양심은 스스로를 염려의 부름으로서 드러냈다. 부르는 자는 자신의 존재 가능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는 현존재이다. 양심의 불러냄은 ‘나쁜[가책받는]’양심에서 유래하는가 아니면 ‘착한[떳떳한]’ 양심에서 유래하는가? 이러한 의구심들은 당연하다. 그러나 통속적인 존재적 양심이해를 존재론적 해석을 위한 일차적 기준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2) 양심이 무엇을 입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부름에 진정으로 상응하게 듣는다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가 충분하게 분명히 한정될 때 비로소 그 완전한 규정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