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제 44절-48절
요약: muse
『존재와 시간』 제44절 현존재, 열어 밝혀져 있음, 진리
* “철학은 예로부터 진리와 존재를 함께 놓아왔다.”(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281) 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진리를 존재와 결부시켜 사유했었음을 언급하며 진리와 존재에 대한 연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태 자체”에 이끌려 물음을 계속하게끔 강제되었고, …파르메니데스는 그 자체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에 따르게끔 강제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진리’자체에 강제되어 연구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의 연구를 ‘진리’에 관한 철학적 사색이라고 불러, 철학 자체를 진리의 학이라고까지 규정한 바 있다.”
* ‘진리’는 “사태”, “자기를 내보이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진리는 사태 자체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281) “다시 말하면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보다는 ‘존재자가 자기의 모습을 스스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진리현상으로 부각된다.
. 전통적 진리개념과 그 존재론적 기초
진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진리의 최초의 정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세가지 테제
1) 진리의 “자리”는 발언 (판단 )이다.
2) 진리의 본질은 판단과 그 대상의 “일치”에 있다.
3)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그 근원적인 자리인 판단에
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일치”로서의 진리의 정의도 궤도에 올려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해석에 대하여』에서 영혼의 ‘체험’, 즉 노에마타(표상)는 사물에의 동화[일치]라고 말한다.”(p290)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발언이 결코 진리에 대한 명시적인 본질로서 제시된 것이 아닌데도 그 후에 진리의 본질을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고 정식화하여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은 중세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사악 이스라엘리(Isaac Israeli), 아비켄나(Avicenna),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치면서 이제 진리는 “아데쿠아티오(adaequatio, 동화, 일치) 대신에 코레스폰덴티아(correspondentia, 상응, 대응)나 콘베니엔티아(convenientia, 합치)”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 이러한 진리의 개념은 근세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진리의 대응설을 소박한 실재론으로 규정하며, 칸트가 대응설 또는 일치설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칸트를 옹호하기도 했었지만,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신칸트학파가 칸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대응설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브렌타노(Franz Brentano)가 이미 앞서 파악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브렌타노가 이미 주목을 요한 바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 역시 칸트가 진리 대응설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칸트가 초월론적 변증론의 도입부에서 “진리 또는 가상은 직관되는 한에서의 대상 속에 있지 않고, 사유되는 한에서의 대상에 대한 판단 안에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진리와 가상이 구별되는 것은 결국 판단 속에서이기 때문에, 칸트 역시도 발언과 일치를 근거로 하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일치’라는 용어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은 즉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일치’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연관’이라는 형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p291)개개의 모든 일치는 모든 연관이기에, ‘진리’역시도 지성과 사물의 연관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개개의 모든 연관이 일치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기호는 [그 기호에 의해서] 가리켜지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가리킴은 일종의 연관이지만, 기호와 [그것에 의해서] 가리켜지고 있는 것의 일치는 아니다”
* 모든 일치가 진리의 정의 속에서 확정된 콘베니엔티아[합치]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물론 6이라는 수는 16-10과 일치하지만 그 둘은 ‘많음의 얼마만큼’이라는 관점에서 같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같음을 일치의 한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치 안에는 그 구조상 ‘……라는 관점에서’와 같은 어떤 것이 속한다”고 보았다.
* 마찬가지로 “‘진리의 연관’을 해명할 때에도, ‘어떤 관점에서 지성과 사물은 일치하는가?’에 대한 연관항의 고유함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사물 사이에 같음의 양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과 사물의 관계성격은 ‘그대로-그렇게라고 규정될 수밖에 없다.
** 인식에 대한 개념 검토: 흔히 “지성의 활동으로서의 인식은 그것이 자신의 대상과 일치할 때 참이라고 불리고 그렇지 않을 때 거짓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인식은 ‘판단들’로서 성립된다. 그런데 “판단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구별되어야 한다. 실제의 심리적 경과로서의 판단함과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판단된 것.” 다시 간결하게 말해서 ‘실제의 심리적 경과로서의 판단함’을 ‘판단작용(판단행위, 판단수행)’이라 한다면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판단된 것’을 판단작용에 의하여 얻어진 ‘판단내용’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판단작용을 통해 얻은 판단내용에 대해 참이라고 말하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내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판단내용은 이미 관념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관념적 판단내용은 일치의 관계 안에 서 있게 되는데 따라서 이 일치관계는 관념적 판단내용과 그것에 대해서 판단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실제의 사물 사이의 연관에 해당하는 것이다.”(292쪽)
* 왜 관념적인 내용과 실재적인 판단수행 사이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에 휩싸이며 “그 관련은 분명히 성립되어야 한다”(p.293)고 말한다.
*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인식함’은 ‘심리적인 것’으로서 지향성의 구조를 가진다고 보았다. 우리들의 인식이 대상과 일치할 수도 있고, 즉 그 대상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 그렇게’줄 수도 있고, 또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일치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에서 (실제적인)판단수행과 (관념적인)판단내용의 구 별로 소급해 간다고 해서 논의가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식함 자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해명이 불가피하다는 점만을 분명히 해줄 뿐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분석은 동시에 인식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진리의 현상도 시야로 데려오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진리가 인식자체에 있어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인식함이 스스로를 참인 것으로 입증할 때이다. 이러한 자기입증이 인식에게 인식의 진리를 보증해준다.”(293쪽) “따라서 입증이라는 현상적 연관 안에서 일치의 관련이 보여져야 할 것이다.”(293쪽)
* 발언은 자신이 발언하고 있는 존재자 자체를 그 존재자가 존재하는 그대로 내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을 통해서 입증해야 하는 것은 ‘심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존재자 자체가 어떻게 발견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 발언의 참임(진리)은 발견하면서-있음(Entdeckend-sein)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한 존재자 (주체)가 다른 한 존재자(객체)에 동화된다는 의미에서 인식함과 대상 사이의 일치의 구조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발견하면서-있음으로 서의 참임은 다시금 존재론적으로 오직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거기에서 우리가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을 인식한 바 있는 이 [세계-내-존재라는] 현상이 진리라는 근원적인 현상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는 망치를 사용하면서 이미 망치를 망치로서 발견하고 있고 그것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판단을 통해서 존재자가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통한 존재자의 개시는 오히려 이렇게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자의 개시를 토대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닌가? 284)
ㄴ)진리의 근원적 현상과 진리개념의 파생성
* “참임(진리)은 발견하면서-있음”(295쪽)이다. :자의적으로 보이는 이 정의는 고대 철학의 가장 오랜 전통이 예감했고 현상학 이전의 방식으로 이해했던 바로 그것에 대한 필연적인 해석을 간직하고 있다.(296)
제시된 진리의 정의는 전통을 털어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근원적으로 내 것으로 만듦이다.( 297)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의 참임은 현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이러한 발견함 자체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층 더 근원적인 의미로 ‘참’이라고 칭해져야 할 것이다.(297쪽) 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는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이차적 의미에서 ‘참’이다. 일차적으로 ‘참’인 것, 다시 말해서 발견하면서 있는 것은 현존재이다. 이차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발견하는-존재(발견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발견된 존재(발견되어 있음)를 말한다.(297쪽)
여기서 ‘발견하는-존재(발견함)’가 더욱 근원적인 진리라는 점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의 열어밝혀져 있음으로 존재하고, 열어밝혀진 것으로서 열어밝히고 발견하고 있는 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참’이다.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라는 명제의 온전한 실존론적 의미(298쪽)
(1)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열어밝혀져 있음 일반’이 속한다. (2) 또한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는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구성요소로서 ‘내던져져 있음’이 속한다.(298쪽) 현존재의 현사실적 ‘열어밝혀져 있음’, 즉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이미 나의 이 현존재로서 하나의 특정한 세계 안에 그리고 특정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특정한 범위 안에 있다는 것.”(298쪽) (3)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속하는 ‘기획투사’에서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열어밝혀진다. “이러한 본래적인 열어밝혀져 있음은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현상을 본래성의 양태에서 보여준다.”(299쪽)(4)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에는 ‘빠져있음’이 속한다. 발견되고 열어 밝혀진 것은 잡담,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에 의해서 위장되고 은폐된 양태 속에 놓여 있다. 존재자에게로 향한 존재가 소멸되지는 않지만 뿌리가 뽑혀 있다. 존재자는 완전히 은폐되어 있지는 않지만, 발견되자마자 동시에 위장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발견된 것이 다시 위장과 은폐 속으로 되 가라 앉고 만다”(299쪽) 비본래성의 양태에서의 발견이 이러하다면, 그것은 비진리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빠져 있기에, 그의 존재구성틀 상 ‘비진리’ 안에 있다.”(299쪽) 파르메니데스를 인도한 진리의 여신이 그를 두 갈래길, 즉 발견의 길과 은폐의 길 앞에 세웠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 존재는 각기 그 때마다 이미 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진리의 현상에 대한 실존론적- 존재론적 해석에서 얻은 성과 1.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는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며, 이 열어밝혀져 있음에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도 속한다. 2. 현존재는 똑같이 근원적으로 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다.”(300~301쪽) (현존재는 진리와 비진리 안에 등근원적으로 존재한다, 302)
*발언은 해석에, 이해에, 그리고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301쪽)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발견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자신을 ‘발견된 존재자에 대한 발언’에서 밖으로 말한다. 이때 ‘발견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이 발언에 보존되고, 이러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이 발언에 보존되어 있는 방식에서 ‘발견된 존재자’는 함께 나누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발언에 보존되어 밖으로 말해져 함께 나누어지게 된 ‘발견된 존재자’는 “흡사 수용되고 계속 얘기될 수 있는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이 된다.”(301쪽) 말해진 것을 듣고 말함으로써 자기 것을 만들어진다.”(302쪽)
*연관의 입증은 눈앞의 것들 사이의 연관으로 이해되고, 때문에 이 연관 자체도 눈앞에 있음의 성격을 얻게 된다. 이렇게 발언과 존재자의 연관은 “두 눈앞의 것의 눈앞의 일치로서 드러나게 된다.”(303쪽)
(하이데거는 판단과 대상 사이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을 존재자 자체에 대한 생각 내지 판단과 존재자 자체에 대한 직관의 일치로 해석한다. 295. 판단이 존재자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생활 세계에서 이미 교섭하고 있는 존재자와 어떻게든 이미 일치했다는 것, 다시 말해 이러한 존자가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있다는 것, 존재자와의 선술어적 만남이 이미 일정한 진리를 갖는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299)
ㄷ) 진리의 존재양식과 진리의 전제
*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존재양식에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305) 여기서 상관성은 ‘주관성’이라 해석하고 그 주관적임이 “주관의 임의에 맡겨짐”으로 해석하는 것은 안된다.
* 진리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주어져] 있다. 진리는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이므로, 현존재가 없이는 열어 밝혀져 있음, 발견, 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에 발견하면서 있는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우선하고 있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 모순율, 진리 일반은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역시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
진리(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들은 현존재가 그것들을 열어 밝힌 이후에 비로소 진리가 된다. 하이데거의 진리에 대한 일차적 이차적인 구분들이 진리가 서로 다른 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측면에 대한 서술로 생각해 보자. 진리를 눈앞에 있는 것들의 연관(일치)이라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방식 이전에, 그것을 발견하며 있는 현존재가 우선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발견되어 있는 것은 발견하고 있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진리라는 현상에서 발견함과 발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 존재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때의 법칙들은 참 혹은 거짓이 아니었을 뿐이다. 뉴턴이라는 현존재가 발견된 존재자로부터 법칙들을 이끌어 내고, 그 이후에 그 법칙들을 통해 그 존재자들을 참, 거짓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현상에서 발견된 것 이전에 현존재가 일차적으로 우선한다고 한다고 해서,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있다.
*데카르트 식의 사유 실체로서 연장 실체와 무관한, 관념적 주체와 같은 것이 먼저 생각되고 난 이후에 세계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이미 그 세계 안에 있다. 그리고 진리는 이러한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이고,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
근원적 의미에서 진리는 발견하면서 있음이므로, 현존재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는 진리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
* ‘전제하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어떤 존재자의 존재의 근거로 이해함’(306)이다. 진리 없이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있을 수 없다. 현존재는 자기를 앞질러 있음으로, 자신의 존재 가능이 문제가 되는데, 오로지 현존재에게만 가능한 이러한 실존의 성격은 자기를 앞서 정립함으로서 자기 이해가 우선 수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와 같은 것이 현존재 자신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라면, 이것들을 열어 밝힘 이전에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다시금 전제되어야 하며, 진리의 전제가 ‘이미 주어져 있다’(307).
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45절 현존재에 대한 예비 기초분석의 성과와 이 존재자에 대한 근원적인 실존론적 해석의 과제
“현존재를 염려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한 것”은 이 “존재론적 해석의 근원성”을 지니지 못한다.(312)
**현존재에 대한 예비분석의 성과, 즉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이다”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313) 지금까지의 앞서 봄은 일상성에 단초를 두어, 비본래적 실존함의 분석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봄이 근원적이려면 본래적 존재가능의 실존론적 구조가 필요하다. 적합하지 않기는 앞서 가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염려가 현존재구성틀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이라고 주장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현존재는 “그가 실존하는 한, 존재 가능적으로 각기 그때마다 아직 있지 않은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313)
* 지금까지의 현존재에 대한 분석은 근원적이지 않다. 현존재의 근원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현존재의 존재를 본래성과 전체성에서 실존론적으로 밝혀야한다.
* 세계-내- 존재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현존재적으로 오직 실존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안에만 있다.
*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 시간의 근원을 해명하면 시간성의 본질적인 시간화의 가능성이 드러날 것이다. 존재 일반의 의미의 기획투사는 시간의 지평 안에서 수행될 수 있다. (360) (왜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이고 역사적일 수 있으며 또 역사적 현존재로서 역사학을 형성 할 수 있는지도 이해될 수 있다, 318)
제1장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와 죽음을 향한 존재
제46절 현존재적인 전체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임
* 관건은 실존하는 존재자를 그의 전체존재에서 접근하는 일인데, 이는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은 염려인데, 이 염려가 전체존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염려의 일차적 계기는 “자기를 앞질러”이다. 이는 현존재가 그때마다 자기 자신 때문에 실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아직 “현실적”이 되지 않은 존재가능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의 본질에는 일종의 부단한 미완결성이 있는 것이다.(317) 이 미완결성, 혹은 유보 상태를 제거할 경우, 즉 현존재가 전체를 획득할 경우, 그는 그의 존재를 상실해버린다. 이 전체성을 경험할 수 없음은 인식능력의 불완전이 아닌, 존재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현존재에게서 존재전체성을 읽어내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존재전체성의 과제를 위해서는 “종말”과 “전체성”의 존재 구성틀 또한 실존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존재적 종말에 와 있음을 존재론적으로 성격 부여하는 일”과,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개념을 획득하는 일”이 필요하다.(319)
제47절 타인의 죽음의 경험가능성과 전체 현존재의 파악가능성
(죽음에 대해 실존론적 분석을 한다는 것은,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는 ‘실존의 형식적 이념’을 분석을 주도하는 근본적인 시각으로 하면서, 즉 예시를 삼으면서 죽음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323)
*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에 도달하는 일이자, 현존재의 거기에 존재함을 상실하는 일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죽음을, 즉 거기에 존재함에서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넘어감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없다. 이 때 눈에 띄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있음이므로, 타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경험함을 통해 현존재전체성을 존재론적으로 한정하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 타인의 사망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현존재로서의 존재자가 시체, 즉 눈앞에-있음으로서의 물체사물로 전환되는 존재현상이다. 이 고인이 유족이 있을 경우, 그는 장례, 매장,묘제의 방식으로 손 안의 것으로서 배려의 대상이 된다. 시체는 생명의 이념에 방향잡힌 해부학적 이해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사물 그 이상의 것이다. 또한 고인의 유족들은 경의를 표하는 심려의 양태 속에 고인과 더불어 있으므로,고 인은 주위세계적 손안의 도구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와의 존재관계는 배려하며 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인이 뒤에 남겨 놓은 세계에서부터 그와 더불어 있음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죽은 자와 더불어 있음은 우리가 타인의 본래적 종말을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자들도 또한 상실을 경험하지만, 이는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과는 다르다. 타인의 죽음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 또한 종말에 이름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현존재의 종말에 이름을 구성하고 현존재에게 전체성을 부여하는 존재가능의 층위에서 이 대리가능성은 완전히 부서진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322) 사망함에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이 존재론적으로 각자성과 실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322) 끝남과 그에 의해서 구성된 현존재의 전체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대리란 없다.”(323)
타인의 죽음을 통해 현존재의 전체존재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죽음이 실존론적 현상으로 제시되었다는 성과를 획득한다. 또한 현존재적인 끝남을 단순한 생명의 종말(끝나버림) 및 의학적인 사망의 개념과 구분해야 한다.
제48절 미완, 종말, 정체성
* 종말과 전체성의 “변형들”. 이는 종말과 전체성의 개념이 현존재에 얼마만큼 부적합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지시함으로써 그것들의 부적합성이 드러날 것이며, 이를 통해 죽음과 전체성은 실존범주로 변화되어 이해되어야 함이 보여질 것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지금까지 행해진 죽음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세 테제로 정식화된다: 1.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는 한, 그가 존재하게 될 어떤 ‘아직 아님’, 즉 부단한 미완이 속한다. 2. 각기 그때마다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은 자’의 ‘종말에 이름(미완을 존재에 맞추어 제거함)’은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음]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3. 종말에 이름은 그때마다의 현존재를 단적으로 대리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존재양태를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325)
*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 아님’이“속해” 있다는 현상적 실상은 “비전체성”이며, 현존재에게서 지워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미완으로 해석해도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완은 어떤 존재자에게 “속하기는”하지만 아직은 결여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귀속성에 근거한다. 즉 미완은 함께 속해 있는 것(귀속성)이 아직 다 모여 있지 않은 것(결여)이며, 가령 아직 받지 못한 빚의 잔금이 미지불된 상태이다. 이는 잔금의 계속된 입금으로 해소된다. 이런 미완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손안의 것의 존재양식을 지닌다.
* 그러나 이런 미완이 손안의 것의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 미완으로서의 결여는 현존재에게 속하는 ‘아직-아님’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현존재의 ‘아직-아님’이 채워지는 것은 잔금이 비로소 모두 완납되는 총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언제나 그에게 그의 ‘아직-아님’이 속해 있는 식으로” 실존한다.(326)
* 미완으로서의 결여가 ‘아직 아님’을 규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면, “아직 접근 가능하게 되어 있지 않음”은 어떤가?(327)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만월의 예를 든다. 달의1/4이 더 차면 만월이 된다고 할 때, 이 ‘아직-아님’은 미완으로서의 결여의 형식, 즉 달에 속하는 부분들이 아직 다 함께 있지 않음이 아니다. 이는 오로지 지각하는 파악에만 해당된다. 그렇지만 현존재적인 ‘아직-아님’은 파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의 가능한 존재 또는 비존재에 관한 것이다.”(326) 즉 현존재는 그가 아직 아닌 그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아직-아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성[되어감]을 존재양식에 포함하는 존재자를 찾아야 한다.
설익은 열매의 성숙함[익어감]을 생각해보자. 과일의 “스스로 성숙해감이 과일의 존재를 과일로서 성격규정”하며, 따라서 이는 빚과 만월의 예와 다르다.(327) “익어가는 과일은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의 미숙에 대해서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익어가면서 설익음으로 있는 것이다.”(327) 따라서 익어가는 과일의 아직-아님은 과일의 고유한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과일과 연관되어있다.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그의 아직 아님으로 있는 것”으로서 이 익어가는 과일에 상응한다.(327) 하지만 현존재의 ‘아직-아님’은 과일의 미숙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과일은 성숙과 함께 자신을 완성한다. 하지만 현존재의 죽음은 꼭 현존재의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죽음과 함께 성숙에 도달할 필요도 없다. 대개 현존재는 미완성으로 끝나거나 미완성에서 무너진다.
끝남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완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남으로 개념 파악되어야 하는가? 끝남은 중단함을 의미한다. 중단함은 눈앞에 있지 않음으로 넘어감이나(비가 그침의 예) 끝과 함께 비로소 눈앞에 존재함(길이 끝남의 예)을 의미한다. 후자의 끝남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것을 규정하거나 어떤 눈앞의 것의 “마무리”를 구성할 수 있다. 이 마무리는 눈앞의 것이나 손안의 것의 규정으로서만 기능한다.
* 이러한 두 끝남의 양태 중 어느 것도 현존재의 죽음을 적합하게 성격규정하지 못한다. 현존재는 죽음에서 완성되지도, 마무리되어 손안의 것으로서 처리 가능하게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329)” 죽음으로 의미되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떠맡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존재와 시간』 제 44절-48절
요약: muse
『존재와 시간』 제44절 현존재, 열어 밝혀져 있음, 진리
* “철학은 예로부터 진리와 존재를 함께 놓아왔다.”(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281) 철학사에서 파르메니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진리를 존재와 결부시켜 사유했었음을 언급하며 진리와 존재에 대한 연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태 자체”에 이끌려 물음을 계속하게끔 강제되었고, …파르메니데스는 그 자체에 있어서 드러나는 것에 따르게끔 강제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진리’자체에 강제되어 연구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의 연구를 ‘진리’에 관한 철학적 사색이라고 불러, 철학 자체를 진리의 학이라고까지 규정한 바 있다.”
* ‘진리’는 “사태”, “자기를 내보이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진리는 사태 자체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281) “다시 말하면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보다는 ‘존재자가 자기의 모습을 스스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진리현상으로 부각된다.
. 전통적 진리개념과 그 존재론적 기초
진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진리의 최초의 정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세가지 테제
1) 진리의 “자리”는 발언 (판단 )이다.
2) 진리의 본질은 판단과 그 대상의 “일치”에 있다.
3)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그 근원적인 자리인 판단에
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일치”로서의 진리의 정의도 궤도에 올려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해석에 대하여』에서 영혼의 ‘체험’, 즉 노에마타(표상)는 사물에의 동화[일치]라고 말한다.”(p290)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발언이 결코 진리에 대한 명시적인 본질로서 제시된 것이 아닌데도 그 후에 진리의 본질을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고 정식화하여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은 중세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사악 이스라엘리(Isaac Israeli), 아비켄나(Avicenna),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치면서 이제 진리는 “아데쿠아티오(adaequatio, 동화, 일치) 대신에 코레스폰덴티아(correspondentia, 상응, 대응)나 콘베니엔티아(convenientia, 합치)”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 이러한 진리의 개념은 근세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진리의 대응설을 소박한 실재론으로 규정하며, 칸트가 대응설 또는 일치설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칸트를 옹호하기도 했었지만,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신칸트학파가 칸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대응설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브렌타노(Franz Brentano)가 이미 앞서 파악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브렌타노가 이미 주목을 요한 바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 역시 칸트가 진리 대응설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칸트가 초월론적 변증론의 도입부에서 “진리 또는 가상은 직관되는 한에서의 대상 속에 있지 않고, 사유되는 한에서의 대상에 대한 판단 안에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진리와 가상이 구별되는 것은 결국 판단 속에서이기 때문에, 칸트 역시도 발언과 일치를 근거로 하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일치’라는 용어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일치’를 뜻하며, 이것은 즉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일치’는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연관’이라는 형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p291)개개의 모든 일치는 모든 연관이기에, ‘진리’역시도 지성과 사물의 연관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개개의 모든 연관이 일치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기호는 [그 기호에 의해서] 가리켜지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가리킴은 일종의 연관이지만, 기호와 [그것에 의해서] 가리켜지고 있는 것의 일치는 아니다”
* 모든 일치가 진리의 정의 속에서 확정된 콘베니엔티아[합치]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물론 6이라는 수는 16-10과 일치하지만 그 둘은 ‘많음의 얼마만큼’이라는 관점에서 같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같음을 일치의 한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치 안에는 그 구조상 ‘……라는 관점에서’와 같은 어떤 것이 속한다”고 보았다.
* 마찬가지로 “‘진리의 연관’을 해명할 때에도, ‘어떤 관점에서 지성과 사물은 일치하는가?’에 대한 연관항의 고유함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사물 사이에 같음의 양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과 사물의 관계성격은 ‘그대로-그렇게라고 규정될 수밖에 없다.
** 인식에 대한 개념 검토: 흔히 “지성의 활동으로서의 인식은 그것이 자신의 대상과 일치할 때 참이라고 불리고 그렇지 않을 때 거짓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인식은 ‘판단들’로서 성립된다. 그런데 “판단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구별되어야 한다. 실제의 심리적 경과로서의 판단함과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판단된 것.” 다시 간결하게 말해서 ‘실제의 심리적 경과로서의 판단함’을 ‘판단작용(판단행위, 판단수행)’이라 한다면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판단된 것’을 판단작용에 의하여 얻어진 ‘판단내용’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판단작용을 통해 얻은 판단내용에 대해 참이라고 말하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내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판단내용은 이미 관념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관념적 판단내용은 일치의 관계 안에 서 있게 되는데 따라서 이 일치관계는 관념적 판단내용과 그것에 대해서 판단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실제의 사물 사이의 연관에 해당하는 것이다.”(292쪽)
* 왜 관념적인 내용과 실재적인 판단수행 사이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고민에 휩싸이며 “그 관련은 분명히 성립되어야 한다”(p.293)고 말한다.
*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인식함’은 ‘심리적인 것’으로서 지향성의 구조를 가진다고 보았다. 우리들의 인식이 대상과 일치할 수도 있고, 즉 그 대상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 그렇게’줄 수도 있고, 또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일치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에서 (실제적인)판단수행과 (관념적인)판단내용의 구 별로 소급해 간다고 해서 논의가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식함 자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해명이 불가피하다는 점만을 분명히 해줄 뿐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분석은 동시에 인식을 성격규정하고 있는 진리의 현상도 시야로 데려오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진리가 인식자체에 있어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가?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인식함이 스스로를 참인 것으로 입증할 때이다. 이러한 자기입증이 인식에게 인식의 진리를 보증해준다.”(293쪽) “따라서 입증이라는 현상적 연관 안에서 일치의 관련이 보여져야 할 것이다.”(293쪽)
* 발언은 자신이 발언하고 있는 존재자 자체를 그 존재자가 존재하는 그대로 내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을 통해서 입증해야 하는 것은 ‘심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존재자 자체가 어떻게 발견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 발언의 참임(진리)은 발견하면서-있음(Entdeckend-sein)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한 존재자 (주체)가 다른 한 존재자(객체)에 동화된다는 의미에서 인식함과 대상 사이의 일치의 구조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발견하면서-있음으로 서의 참임은 다시금 존재론적으로 오직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거기에서 우리가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을 인식한 바 있는 이 [세계-내-존재라는] 현상이 진리라는 근원적인 현상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는 망치를 사용하면서 이미 망치를 망치로서 발견하고 있고 그것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판단을 통해서 존재자가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통한 존재자의 개시는 오히려 이렇게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자의 개시를 토대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닌가? 284)
ㄴ)진리의 근원적 현상과 진리개념의 파생성
* “참임(진리)은 발견하면서-있음”(295쪽)이다. :자의적으로 보이는 이 정의는 고대 철학의 가장 오랜 전통이 예감했고 현상학 이전의 방식으로 이해했던 바로 그것에 대한 필연적인 해석을 간직하고 있다.(296)
제시된 진리의 정의는 전통을 털어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근원적으로 내 것으로 만듦이다.( 297)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의 참임은 현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이러한 발견함 자체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층 더 근원적인 의미로 ‘참’이라고 칭해져야 할 것이다.(297쪽) 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는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이차적 의미에서 ‘참’이다. 일차적으로 ‘참’인 것, 다시 말해서 발견하면서 있는 것은 현존재이다. 이차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발견하는-존재(발견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발견된 존재(발견되어 있음)를 말한다.(297쪽)
여기서 ‘발견하는-존재(발견함)’가 더욱 근원적인 진리라는 점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신의 열어밝혀져 있음으로 존재하고, 열어밝혀진 것으로서 열어밝히고 발견하고 있는 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참’이다.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라는 명제의 온전한 실존론적 의미(298쪽)
(1)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열어밝혀져 있음 일반’이 속한다. (2) 또한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는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의 구성요소로서 ‘내던져져 있음’이 속한다.(298쪽) 현존재의 현사실적 ‘열어밝혀져 있음’, 즉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이미 나의 이 현존재로서 하나의 특정한 세계 안에 그리고 특정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특정한 범위 안에 있다는 것.”(298쪽) (3)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속하는 ‘기획투사’에서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열어밝혀진다. “이러한 본래적인 열어밝혀져 있음은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현상을 본래성의 양태에서 보여준다.”(299쪽)(4)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에는 ‘빠져있음’이 속한다. 발견되고 열어 밝혀진 것은 잡담,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에 의해서 위장되고 은폐된 양태 속에 놓여 있다. 존재자에게로 향한 존재가 소멸되지는 않지만 뿌리가 뽑혀 있다. 존재자는 완전히 은폐되어 있지는 않지만, 발견되자마자 동시에 위장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발견된 것이 다시 위장과 은폐 속으로 되 가라 앉고 만다”(299쪽) 비본래성의 양태에서의 발견이 이러하다면, 그것은 비진리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빠져 있기에, 그의 존재구성틀 상 ‘비진리’ 안에 있다.”(299쪽) 파르메니데스를 인도한 진리의 여신이 그를 두 갈래길, 즉 발견의 길과 은폐의 길 앞에 세웠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 존재는 각기 그 때마다 이미 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진리의 현상에 대한 실존론적- 존재론적 해석에서 얻은 성과 1.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는 현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며, 이 열어밝혀져 있음에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도 속한다. 2. 현존재는 똑같이 근원적으로 진리와 비진리 안에 있다.”(300~301쪽) (현존재는 진리와 비진리 안에 등근원적으로 존재한다, 302)
*발언은 해석에, 이해에, 그리고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301쪽)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발견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자신을 ‘발견된 존재자에 대한 발언’에서 밖으로 말한다. 이때 ‘발견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이 발언에 보존되고, 이러한 ‘존재자의 발견되어 있음’이 발언에 보존되어 있는 방식에서 ‘발견된 존재자’는 함께 나누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발언에 보존되어 밖으로 말해져 함께 나누어지게 된 ‘발견된 존재자’는 “흡사 수용되고 계속 얘기될 수 있는 일종의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것이 된다.”(301쪽) 말해진 것을 듣고 말함으로써 자기 것을 만들어진다.”(302쪽)
*연관의 입증은 눈앞의 것들 사이의 연관으로 이해되고, 때문에 이 연관 자체도 눈앞에 있음의 성격을 얻게 된다. 이렇게 발언과 존재자의 연관은 “두 눈앞의 것의 눈앞의 일치로서 드러나게 된다.”(303쪽)
(하이데거는 판단과 대상 사이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을 존재자 자체에 대한 생각 내지 판단과 존재자 자체에 대한 직관의 일치로 해석한다. 295. 판단이 존재자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생활 세계에서 이미 교섭하고 있는 존재자와 어떻게든 이미 일치했다는 것, 다시 말해 이러한 존자가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있다는 것, 존재자와의 선술어적 만남이 이미 일정한 진리를 갖는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299)
ㄷ) 진리의 존재양식과 진리의 전제
*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존재양식에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305) 여기서 상관성은 ‘주관성’이라 해석하고 그 주관적임이 “주관의 임의에 맡겨짐”으로 해석하는 것은 안된다.
* 진리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주어져] 있다. 진리는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이므로, 현존재가 없이는 열어 밝혀져 있음, 발견, 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에 발견하면서 있는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우선하고 있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 모순율, 진리 일반은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히 자연의 법칙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역시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
진리(발견되어 있음으로서의 진리)들은 현존재가 그것들을 열어 밝힌 이후에 비로소 진리가 된다. 하이데거의 진리에 대한 일차적 이차적인 구분들이 진리가 서로 다른 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측면에 대한 서술로 생각해 보자. 진리를 눈앞에 있는 것들의 연관(일치)이라는 현상으로 파악하는 방식 이전에, 그것을 발견하며 있는 현존재가 우선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발견되어 있는 것은 발견하고 있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진리라는 현상에서 발견함과 발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에 존재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때의 법칙들은 참 혹은 거짓이 아니었을 뿐이다. 뉴턴이라는 현존재가 발견된 존재자로부터 법칙들을 이끌어 내고, 그 이후에 그 법칙들을 통해 그 존재자들을 참, 거짓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현상에서 발견된 것 이전에 현존재가 일차적으로 우선한다고 한다고 해서,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있다.
*데카르트 식의 사유 실체로서 연장 실체와 무관한, 관념적 주체와 같은 것이 먼저 생각되고 난 이후에 세계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이미 그 세계 안에 있다. 그리고 진리는 이러한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이고,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
근원적 의미에서 진리는 발견하면서 있음이므로, 현존재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있는 진리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
* ‘전제하다’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어떤 존재자의 존재의 근거로 이해함’(306)이다. 진리 없이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있을 수 없다. 현존재는 자기를 앞질러 있음으로, 자신의 존재 가능이 문제가 되는데, 오로지 현존재에게만 가능한 이러한 실존의 성격은 자기를 앞서 정립함으로서 자기 이해가 우선 수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와 같은 것이 현존재 자신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라면, 이것들을 열어 밝힘 이전에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다시금 전제되어야 하며, 진리의 전제가 ‘이미 주어져 있다’(307).
제2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45절 현존재에 대한 예비 기초분석의 성과와 이 존재자에 대한 근원적인 실존론적 해석의 과제
“현존재를 염려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한 것”은 이 “존재론적 해석의 근원성”을 지니지 못한다.(312)
**현존재에 대한 예비분석의 성과, 즉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이다”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313) 지금까지의 앞서 봄은 일상성에 단초를 두어, 비본래적 실존함의 분석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봄이 근원적이려면 본래적 존재가능의 실존론적 구조가 필요하다. 적합하지 않기는 앞서 가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염려가 현존재구성틀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이라고 주장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현존재는 “그가 실존하는 한, 존재 가능적으로 각기 그때마다 아직 있지 않은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313)
* 지금까지의 현존재에 대한 분석은 근원적이지 않다. 현존재의 근원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현존재의 존재를 본래성과 전체성에서 실존론적으로 밝혀야한다.
* 세계-내- 존재의 “종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현존재적으로 오직 실존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안에만 있다.
*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 시간의 근원을 해명하면 시간성의 본질적인 시간화의 가능성이 드러날 것이다. 존재 일반의 의미의 기획투사는 시간의 지평 안에서 수행될 수 있다. (360) (왜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이고 역사적일 수 있으며 또 역사적 현존재로서 역사학을 형성 할 수 있는지도 이해될 수 있다, 318)
제1장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와 죽음을 향한 존재
제46절 현존재적인 전체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임
* 관건은 실존하는 존재자를 그의 전체존재에서 접근하는 일인데, 이는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은 염려인데, 이 염려가 전체존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염려의 일차적 계기는 “자기를 앞질러”이다. 이는 현존재가 그때마다 자기 자신 때문에 실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아직 “현실적”이 되지 않은 존재가능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의 본질에는 일종의 부단한 미완결성이 있는 것이다.(317) 이 미완결성, 혹은 유보 상태를 제거할 경우, 즉 현존재가 전체를 획득할 경우, 그는 그의 존재를 상실해버린다. 이 전체성을 경험할 수 없음은 인식능력의 불완전이 아닌, 존재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현존재에게서 존재전체성을 읽어내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존재전체성의 과제를 위해서는 “종말”과 “전체성”의 존재 구성틀 또한 실존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존재적 종말에 와 있음을 존재론적으로 성격 부여하는 일”과,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개념을 획득하는 일”이 필요하다.(319)
제47절 타인의 죽음의 경험가능성과 전체 현존재의 파악가능성
(죽음에 대해 실존론적 분석을 한다는 것은,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는 ‘실존의 형식적 이념’을 분석을 주도하는 근본적인 시각으로 하면서, 즉 예시를 삼으면서 죽음을 분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323)
*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에 도달하는 일이자, 현존재의 거기에 존재함을 상실하는 일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죽음을, 즉 거기에 존재함에서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넘어감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없다. 이 때 눈에 띄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있음이므로, 타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경험함을 통해 현존재전체성을 존재론적으로 한정하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 타인의 사망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현존재로서의 존재자가 시체, 즉 눈앞에-있음으로서의 물체사물로 전환되는 존재현상이다. 이 고인이 유족이 있을 경우, 그는 장례, 매장,묘제의 방식으로 손 안의 것으로서 배려의 대상이 된다. 시체는 생명의 이념에 방향잡힌 해부학적 이해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사물 그 이상의 것이다. 또한 고인의 유족들은 경의를 표하는 심려의 양태 속에 고인과 더불어 있으므로,고 인은 주위세계적 손안의 도구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와의 존재관계는 배려하며 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인이 뒤에 남겨 놓은 세계에서부터 그와 더불어 있음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죽은 자와 더불어 있음은 우리가 타인의 본래적 종말을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자들도 또한 상실을 경험하지만, 이는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과는 다르다. 타인의 죽음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 또한 종말에 이름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현존재의 종말에 이름을 구성하고 현존재에게 전체성을 부여하는 존재가능의 층위에서 이 대리가능성은 완전히 부서진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322) 사망함에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이 존재론적으로 각자성과 실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이다.(322) 끝남과 그에 의해서 구성된 현존재의 전체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대리란 없다.”(323)
타인의 죽음을 통해 현존재의 전체존재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죽음이 실존론적 현상으로 제시되었다는 성과를 획득한다. 또한 현존재적인 끝남을 단순한 생명의 종말(끝나버림) 및 의학적인 사망의 개념과 구분해야 한다.
제48절 미완, 종말, 정체성
* 종말과 전체성의 “변형들”. 이는 종말과 전체성의 개념이 현존재에 얼마만큼 부적합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지시함으로써 그것들의 부적합성이 드러날 것이며, 이를 통해 죽음과 전체성은 실존범주로 변화되어 이해되어야 함이 보여질 것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지금까지 행해진 죽음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세 테제로 정식화된다: 1.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는 한, 그가 존재하게 될 어떤 ‘아직 아님’, 즉 부단한 미완이 속한다. 2. 각기 그때마다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은 자’의 ‘종말에 이름(미완을 존재에 맞추어 제거함)’은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음]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3. 종말에 이름은 그때마다의 현존재를 단적으로 대리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존재양태를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325)
*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 아님’이“속해” 있다는 현상적 실상은 “비전체성”이며, 현존재에게서 지워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미완으로 해석해도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완은 어떤 존재자에게 “속하기는”하지만 아직은 결여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귀속성에 근거한다. 즉 미완은 함께 속해 있는 것(귀속성)이 아직 다 모여 있지 않은 것(결여)이며, 가령 아직 받지 못한 빚의 잔금이 미지불된 상태이다. 이는 잔금의 계속된 입금으로 해소된다. 이런 미완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손안의 것의 존재양식을 지닌다.
* 그러나 이런 미완이 손안의 것의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 미완으로서의 결여는 현존재에게 속하는 ‘아직-아님’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현존재의 ‘아직-아님’이 채워지는 것은 잔금이 비로소 모두 완납되는 총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언제나 그에게 그의 ‘아직-아님’이 속해 있는 식으로” 실존한다.(326)
* 미완으로서의 결여가 ‘아직 아님’을 규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면, “아직 접근 가능하게 되어 있지 않음”은 어떤가?(327)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만월의 예를 든다. 달의1/4이 더 차면 만월이 된다고 할 때, 이 ‘아직-아님’은 미완으로서의 결여의 형식, 즉 달에 속하는 부분들이 아직 다 함께 있지 않음이 아니다. 이는 오로지 지각하는 파악에만 해당된다. 그렇지만 현존재적인 ‘아직-아님’은 파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의 가능한 존재 또는 비존재에 관한 것이다.”(326) 즉 현존재는 그가 아직 아닌 그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아직-아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성[되어감]을 존재양식에 포함하는 존재자를 찾아야 한다.
설익은 열매의 성숙함[익어감]을 생각해보자. 과일의 “스스로 성숙해감이 과일의 존재를 과일로서 성격규정”하며, 따라서 이는 빚과 만월의 예와 다르다.(327) “익어가는 과일은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의 미숙에 대해서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익어가면서 설익음으로 있는 것이다.”(327) 따라서 익어가는 과일의 아직-아님은 과일의 고유한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과일과 연관되어있다.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그의 아직 아님으로 있는 것”으로서 이 익어가는 과일에 상응한다.(327) 하지만 현존재의 ‘아직-아님’은 과일의 미숙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과일은 성숙과 함께 자신을 완성한다. 하지만 현존재의 죽음은 꼭 현존재의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죽음과 함께 성숙에 도달할 필요도 없다. 대개 현존재는 미완성으로 끝나거나 미완성에서 무너진다.
끝남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완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남으로 개념 파악되어야 하는가? 끝남은 중단함을 의미한다. 중단함은 눈앞에 있지 않음으로 넘어감이나(비가 그침의 예) 끝과 함께 비로소 눈앞에 존재함(길이 끝남의 예)을 의미한다. 후자의 끝남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것을 규정하거나 어떤 눈앞의 것의 “마무리”를 구성할 수 있다. 이 마무리는 눈앞의 것이나 손안의 것의 규정으로서만 기능한다.
* 이러한 두 끝남의 양태 중 어느 것도 현존재의 죽음을 적합하게 성격규정하지 못한다. 현존재는 죽음에서 완성되지도, 마무리되어 손안의 것으로서 처리 가능하게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329)” 죽음으로 의미되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떠맡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