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정신의학의 권력] 6강

권순모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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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의 권력 6강 1973년 12월 12일

 

- 정신요양원의 규율과 가정 모델의 접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설 발견

19세기 정신요양원이 규율권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가까운 미시권력 모델에 기초해 기능했다는 것 / 그 규율권력은 그 자체가 가정권력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음 / 가정모델이 규율체계로 접합되는 것은 1860~80년대 즈음.

정신의학의 실천 속에서 가정이 문제시되는 현상이 서로를 지탱하는 두 절차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남 (비정상성의 이익, 규칙위반의 이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구성 / 가정의 내적 규율화)

절차들의 증거 : 어린이나 어른을 위한 메종드상테가 확장 / 정신의학적 기술이 가정교육 내부 자체에 활용

그 결과 어린이가 두 가지 의미에서 정신의학적 개입의 중심적 표적이 됨 -> 직접적 의미에서 정신의학에 접속되는 영리 시설은 실제로 자신의 이익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내놓으라고 가정에 요구 / 유년기는 간접적 방식으로 정신의학에 의한 개입의 중심이 되고 표적이 됨.

1860년대 즈음 정신요양원과 가정의 접속을 훌륭하게 표명한 시설(클레르몽-앙-와즈 정신요양원) -> 도 행정과 시설 창립자 사이의 합의 -> 도로부터 지원받는 대신 도의 가난한 정신이상자들을 클레르몽의 시설이 수용한다는 것.

정신요양원이 두 개로 나뉨, 콜로니라 불리는 僞足을 뻗침. 이 콜로니는 노동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입주자로 구성 -> 그들이 유용할 수 있다는 구실, 노동은 그들의 치유에 유용하다는 구실 아래 농업노동의 엄격한 체제 속에 놓임 / 또 하나의 위족. 가정이 직접 보내오는 비싼 입원비를 지불하는 유복한 사람들을 위한 입원시설이 가정모델에 따라 세워짐

1천 명 남짓 환자 수용 클레르몽 정신요양원, 100~150명 남녀 노동부과 농장, 유료 입원시설(1850~1860년 사이에 확립) / 시설 전체가 매우 면밀하며 정치한 방식으로 기능

1) 경제회로 : 도의 보조금 -> 농장 운영에 필요한 사람들이 가난한 환자들 중 징집 -> 농장에서의 이익을 통해 작은성이 만들어지고 유지 -> 거기에 입원비를 내는 사람들이 들어와 그 입원비가 체계 전체의 책임자 이익 구성.(보조금, 노동, 착취, 이익)

2) 완벽한 축소판 사회 : 정신요양원에는 농장의 프롤레타리아트 예비군 존재, 농장에는 생산적 노동의 장, 노동과 이익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지내는 시설 / 각각의 수준들에 독자적 건축양식이 대응(정신요양원 건축, 노예제와 식민지화 모델을 따르는 농장, 관리동과 작은성)

3) 두 유형의 권력 : 두 가지 규율권력(전통적이고 부정적인 권력, 예속지배하는 (노동하게 하는) 권력), 작은 성에 입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실화된 가정 모델의 권력

4) 세 유형의 정신의학적 개입 내지 정신의학적 조작이 있어서, 역시 이상의 세 가지 수준에 대응(가두기, 노동하게 만들기, 가정 모델로 개별화하는 실천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가장 특징적 요소는 정신의학의 지식과 치료법이 노동 능력을 가진 입원자들의 노동과 결합되는 방식 / 질병분류학적인 분류는 치료를 위한 그 어떤 처방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고, 순전히 노동을 위해 개개인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데 사용

이 시설이 1860년대 경 가정과 규율 사이에 이뤄진 조화의 최초 형태와 가장 완전한 도달점을 동시에 표현하고, 규율로서의 정신의학적 지식의 전개 역시 표현하기 때문

 

다음의 예. 지금까지도 가정화되어 있지 않은 규율의 공간, 1820~30년 사이에 구성되어 정신요양원 제도의 거대한 토대를 구성하게 되는 규율체계가 어떻게 해서, 그리고 어떤 한도 내에서 치료의 효과를 갖는 것으로 간주됐느냐 / 이 규율의 공간은 도대체 무엇을 통해 치유를 가져다준다고 생각됐던 것일까?

고전적 치유 : 피넬의 가짜재판, 조지프 메이슨 콕스의 옴이 드러나도록 해 치료하는 방식

착오를 교정하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치유? 검토 필요 / 광인의 착오와 광인이 아닌 자의 착오는 생각의 엉뚱함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님

착오를 깨뜨리고 바로잡는 방법이 광인의 착오로 규정함. 광인이란 그 착오가 논증을 통해 바로잡히지 않는 자 -> 논증이 진실을 산출하지 않는다. 논증과 다른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잘못된 판단을 진실된 것으로서 유효하게 만들고, 거꾸로 현실을 미친 판단에 적합하도록 변형시키는 방법. -> 즉, 그것은 잘못된 판단을 조정해 논증을 통해 수정하고 쫓아버리는 것이 아님. 현실 왜곡, 조작해 현실을 망상의 위치로 불러들임. 망상이 현실로 가득 참

 

정신과 의사는 진실을 다루는 자가 아니라 착오가 진실이 되도록 현실을 다루는 자 / 정신요양원의 규율공간에서 일하게 될 정신과 의사는 광인이 말하는 것의 진실에 관심 기울이지 않고 현실로 이동.

(피넬이나 콕스와 달리)이제 정신과 의사는 현실을 밀수입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에 강제력을 부여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이 광기를 제압하고 광기를 완전히 관통해 광기를 광기로서 소멸시킬 수 있게 하는 자. 정신과 의사는 현실적인 것에 그것이 광기에 부과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추가적 권력을 확보하고, 거꾸로 광기로부터 그것이 현실적인 것을 벗어나려는 힘을 제거하려 하는 그런 자.

19세기 이래 정신과 의사는 현실적인 것을 강화하는 자, 현실적인 것의 초권력을 전담하는 자 / 피넬, 콕스가 여전히 진실의 문제를 치료의 핵심 그 자체에 위치시키고, 광인과의 관계의 한복판에 위치시키며, 의사와 환자의 대결에서 진실의 문제를 확실히 출현시키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정신의학의 권력은 진실에 대한 물음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만 제기.

즉, 진실의 문제는 치료에서 작용하지 않음. 정신의학적 실천에 일단 의학적 실천으로서의 지위가 부여되자마자, 정신의학적 과학을 적용한 것이라는 토대가 부여되자마자 진실의 문제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해결

 

정신의학의 권력이란 의학적 과학 내지 정신의학의 이름 아래 결정적인 방식으로 획득되어 유지되는 하나의 진실의 이름으로, 현실적인 것을 광기에 부과하는 그런 추가적 권력

- 19세기 정신의학의 역사의 일반적 특징

1) 정신의학의 실천이 만든 담론 (1) 임상의학적 혹은 분류학적 담론, 질병분류학적 담론이라 부를 수 있는 .. 광기를 하나의 질병, 일련의 정신질환으로 묘사하고 각각의 질환에 대해 그 징후, 진행추이, 진단, 예후 진단 등 서술 시도.

(2) 병리해부학 지식. 광기의 토대 혹은 그 기질적 상관물에 대한 물음, 광기의 병인이나 광기와 신경학적 변형의 관계 등에 관계된 문제를 제기하며, 거기서 더 이상 의학적 담론과 유사한 담론이 아니라 실제로 정신의학의 실천에 물질적 보증을 부여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병리해부학 내지 병태생리학 담론을 구성하려는 것

- 19세기 정신의학 실천의 발전을 살펴보면 -> 요컨대 한편으로는 이 실천이 여러 종류의 질병에 관한 질병분류학적 담론과 기질적 상관물에 관한 병리해부학적 담론이라는 두 가지 담론의 표식 아래 놓이고, 소위 그 보증들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됨 / 두 담론의 보호 아래 정신의학의 실천이 발달. but 다른 한편으로 이 실천은 그 담론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그 담론들을 준거로, 참조체계로, 그리고 이른바 거기에 확실히 자신을 고정시켜야 하는 것으로만 사용.

- 두 담론은 소위 진실이 결정적 방식으로 부여되고 결코 문제화되기를 원치 않는 정신의학의 실천에, 그저 단순히 진실을 보증해줄 뿐.

- 대략적으로 정신의학의 권력은 -> 진실의 문제가 나와 광기 간에 제기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그것은 나, 정신의학이 이미 하나의 과학이라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 만약 내가 과학으로서 내 자신이 말하는 바에 대해 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질 권리가 있더라도, 또 만약 내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아무튼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결정하건, 저질러진 잘못을 정정하는 것은 과학으로서의 나, 오직 나뿐.

- 진실담론과 정신의학의 실천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지 않은 이유, 서로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현실적인 것의 힘을 증대시킨다고 하는 정신의학의 권력에 본질적인 기능에서 기인 /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진실에 관한 물음이 결코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19세기의 정신의학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위장의 문제였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음

 

- 여기서 논의하는 위장은 19세기 정신의학의 역사적 문제였던 위장은 광기에 내재하는 위장. 즉 그것은 광기가 스스로에 대해서 하는 위장이며, 광기가 광기를 위장하는 방식, 히스테리가 히스테리를 위장하는 방식, 진짜 징후가 사실은 기만하는 한 방식이 되고 가짜 징후가 실제로 아픈 것으로 위장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 모든 것이 19세기 정신의학에게 해결 불가능한 문제, 한계를 발생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정신의학을 실패로 이끌어가서 거기로부터 몇 가지 새로운 전개가 생겨남

- 정신의학 曰 : 나는 광인인 당신과 마주해 진실 문제 제기하지 않음. 왜냐하면 나는 내 지식에 입각해 내 범주에서 출발해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 내가 광인인 당신과 관련해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내가 이 진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

광기 曰 : 당신이 이미 완성된 지식에 입각해 진실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테면 하시오. 나는 내 안에 거짓말을 놓아두겠음. 그 결과 당신이 내 징후를 다룰 때, 당신은 덫에 걸릴 것. 왜냐하면 내 징후의 중심 그 자체에는 어둠과 거짓말의 작은 핵이 있어 그것을 통해 나는 당신에게 진실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것이기 때문.

 

위장의 이론적 문제가 논의대상이 아니고 실제로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거부했던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서 광인이 거짓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거부했던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서 광인이 거짓의 문제를 통해 응수하는 이 절차의 문제. 위장이라는 거짓. 광기를 위장하는 광기, 바로 이것이 정신의학의 권력과 대면하는 광인들의 대항권력 /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항하는 전쟁의 도구가 발견.

진실의 문제가 광인들에 의해 확실하게 정신의학에 부과됐던 것

19세기 일반적 위장 현상은 환자들이 정신의학적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절차로서만이 아니라 정신의학의 체계와 정신요양원의 체계 내부 자체에서 벌이는 투쟁의 절차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진실의 문제가 다시 제기됨

정신분석학은 정신의학으로부터의 최초의 거대한 후퇴로 해석될 수 있음. 즉 징후상에서 논의되던 것의 진실 문제, 혹은 징후상에서의 진실과 거짓의 작용이라는 것이 정신의학의 권력에 무리하게 부과된 그 계기로 정신분석학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정신분석학이 이 최초의 패배에 대해 최초의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대응한 것은 아닌지를 아는 것이 될 것.

탈정신의학화를 최초로 행하고, 진실의 문제와 관련해 정신의학의 권력을 처음으로 휘청이게 만든 것은 이 위장자들

히스테리의 문제, 정신과 의사들이 19세기에 히스테리의 수렁에 빠진 그 방식을, 사소한 과학적 착오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인식론적 장애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 ->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설명 부정 -> 히스테리가 아닌 위장을 본다면, 인식론상의 문제나 지식에서의 장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일면으로 본다면, 또 위장이 광인들의 입장에서 현실만을 그들에게 부과하려 하는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 강력하게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은밀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정신의학의 역사는 이제 정신과 의사와 그 지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추적할 수 있을 것.

정신의학의 역사를 이렇게 다시 다룬다면, 제도가 실제로 폭력의 장인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제도주의적 관점은 무엇인가 감출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즉 정신과 의사들이 재차 부과하려 했던 이 현실의 권력, 위장자들이 묻는 거짓에 의해 덫에 걸린 현실의 권력에 대해, 그 문제를 명확히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