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비정상인들 : 1974~1975,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75년 3월 5일 강의」 발제
(가정을 매개로 한 소아 섹슈얼리티의 의학화)
2021.04.21. 양진아
- 18세기에 와서 기존의 쾌락의 몸에 대한 담론의 강조를 완화시키는 경향이 생김.
영혼 및 몸과 욕망을 통제할 임무를 사물과 장소에 떠넘기는 거대한 자리 옮김의 한가운데에서 자위 행위의 담론이 생겨남. 처음에는 트리엔트적 가톨릭 형태의 양심 지도나 대형 교육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겨났지만 나중에는 가톨릭 국가(프랑스)에서도 나타남.
-자위 행위의 담론
자위 행위에 대한 텍스트, 책, 팜플렛, 전단 등이 갑자기 나오기 시작.
*주목할 점 1. 욕망과 쾌락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부재하는 담론이라는 점. (전시대 기독교적 살의 담론과 차이)/ 성인의 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로지 자위행위만이 문제. (성의 정신병리학과 성적 심리학이 아직 아님)
*주목할 점 2. 자위행위에 관한 담론이 과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기 보다는 권고, 충고, 명령과 같은 (반자위)캠페인의 형태를 띰. (예를 들어 어린이의 자위 행위 방지책,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인 논설문 등)
18세기에 이런 캠페인이 어떻게 갑자기 솟아 올랐을까?
반 위셀의 성 억압의 역사 :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쾌락의 기관’이었던 몸이 생산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행의 도구가 되었고,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쾌락 기관으로서의 몸은 억압되고 생산 도구로서의 몸이 정립되고 코드화 되었다.“
<- 푸코의 반박
: 분석은 틀리지 않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캠페인을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다. 심리학적이고 네거티브한 것이 못마땅하다. 억압, 억제를 분석의 중심에 둔다든가 쾌락기관, 수행 도구 같은 개념 사용이 그러하다. 역사 과정의 機制를 설명해 줄 수 없다. 반자위 행위 캠페인이 사회사 내부에서 포지티브하고 구성적인 효과를 가져온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반자위 캠페인이 몸을 억압하고 수행 도구화 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설명 못함.
1. 왜 이 캠페인이 일반적인 성행동이 아니라 자위 행위만을 문제로 삼는가.
2. 왜 이 캠페인이 근로하는 연령층이 아니라 부르주아계층의 소아,청소년만을 상대로 했는가.
반위셀의 분석대로 캠페인이 몸을 억압하고 생산하는 몸을 고양시키는게 목적이라면 노동계급, 성년의 섹슈얼리티를 문제삼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부즈주아계층의 소아와 청소년의 자위행위가 문제였다.
왜? 알아보기 위해 캠페인의 주제 뿐 아니라 전술 또는 전술의 지표가 되는 주제들을 봐야.
반자위캠페인은.. 자위 행위를 금지시키기 위해 어린이들을 죄인으로 몬다. 그것은 어린이를 죄인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의 신체적 전환이나 병리학에 대한 주의 환기가 목적이다. 신체 증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남
전면적 질병이라는 과학적 허구 : 가능한 모든 질병 또는 수많은 징후들이 어린 자위 행위자에게 한데 모여 나타남.
예를 들어 19세기 초반 의료계의 바이블 의료과학사전(by 세뤼리에)에서 자위행위로 시력을 잃고 몸에서 냄새가 나고 피부가 흙빛이 되고 혀가 흔들리고 두 눈이 퀭하게 되고... 마침내 죽음이 온다.
2. 확립된 질병학 카테고리 안에 자위 행위를 병적 원인으로 기재하여 넣는 병인론적 코드화 : 전면적 질병이라는 과학적 공상이 당시 의료 담론의 과학적 규범과 부합되는 정식 의료 문헌에서도 발견됨
예를 들어 당시 권위있는 의사들은 자위 행위를 모든 질병의 가능한 원인으로서 제시. 뇌염, 척수염, 뼈의 질병, 눈병, 폐병 등의 원인
3. 의사들 자신의 행동과 지휘 하에 일종의 우울증적 주제와 자위 행위의 결과로서의 신체 증상을 환자의 말, 존재, 감각, 그리고 몸 자체 안에 구성하는 일
: 당시 의학 논문, 팜플렛, 소책자에서 발견되는 ‘환자 문예’라는 문학장르에서 자위행위를 고백하고 그것으로 인한 병적 증상을 서술함
이러한 반자위 캠페인은 자위 행위를 일종의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多形의 병인론으로 정착시킴. 또 반자위 캠페인은 자위 행위 즉 성적 금기를 죽음에까지 이르는 모든 병리학과 연관 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반자위 캠페인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사망 원인이 소년 시절의 자위 행위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보인다. 자위 행위는 이제 모든 질병의 보편적인 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자위 캠페인을 통해 자기 질병에 대한 환자 자신의 책임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병에 대한 주체 자신의 병리학적 책임은 이전에도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이 시기에 이중으로 변형된다. 성병에만 한정되었던 성적 책임이 이제는 모든 질병으로 확대된 것이다. “자가-에로티시즘의 발견견과 병리적 책임 소재 사이에 상호 침투현상”
이제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생명과 질병, 죽음에까지도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자위 행위의 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다.
아이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사춘기 이전의 자위 행위에 주목하고, 거기에 내인성 원인이 없고, 외인성 원인만이 있다고 봄.
자위행위의 죄는 외부적 사건,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특히 소아에 대한 성인들의 유혹. (목욕을 시킬 때 부모나 선생의 부주의하고 비의도적인 자극. “부주의하게 간질이는 손”)
->처음부터 반자위캠페인은 소아에 대한 성인들의 유혹을 겨냥한 것.
여기에서 성인은 한 집안에 동거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이다. 하인, 가정부, 가정교사, 숙부, 숙모, 사촌.....
자위행위의 죄는 어린아이가 집 한가운데의 불건전한 공간에 있는 것. 자위행위는 부모가 아이들의 양육을 직접 떠맡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으므로 부모의 유죄로 귀착된다.
반자위 행위 켐페인의 설교 대상은 부모였다. 부모를 문제삼기
- 때문에 가정공간의 새로운 구성이 요구되었다. 지속적인 감시의 공간으로서의 가정.
: 모든 매개인을 제거하는 것. 하인을 감시하거나 없애고, 아이들을 성적으로 완전히 금욕적인 가정 공간에 혼자 두는 것.
: 그리고 어린아이의 신체는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아이의 행동, 신체적인 현상에 대한 감시
어린아이가 쾌락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몸과 어른의 몸을 더 잘 밀착시키기 위해 일련의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어린아이의 손과 어른의 손을 끈으로 매달고 자거나, 형의 방에서 의자에 자기 몸을 묶는 아이)
아이의 몸에 즉각적, 직접적,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모의 몸을 밀착시키는 제재를 가하도록 함. 매개자 없이 부모들의 몸에 의해 아이들의 몸이 감시되도록 함. < 이것이 캠패인의 중심적 목표. 즉 새로운 갖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이제(18세기 말) 귀족, 부르주아 가정들은 핵가족화 됨. 관계망 속의 가정이 아니라 세포핵-가정, 캥거루 -가족이 됨
어린이의 성을 추적하고 금지하는 것이 가정 구성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됨
접촉과 시선 및 감시의 근친상간이 근대 가족의 기초였다.
이러한 가족 형태에서 부모는 자식에 대한 전권을 가지게 됨. 자위행위를 도덕적 주제로 삼아 새가정 새윤리의 제1 신조로 삼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자위 행위를 부도덕이 아니라 질병의 영역에 기입해 넣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부과된 내적 통제는 외부의 의학적 통제와 연결되었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는 의사-환자의 관계와 동질적. 부모-자식 관계는 의사-환자 간의 관계를 연장시킨 것이 되어야 했다. 부모는 보건요원이 되고, 부모의 통제는 의학적 위생적 권력의 종속적인 존재가 됨.
합리성의 이름으로 가정에 외부적인 의학적 앎과 권력에 투입됨.
어린아이의 병(자위행위)이 부모에 의해 발견되면 의사가 개입해서 치료한다. 치료를 위한 고백을 해야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의사에게 해야만 했다.
어린이의 성, 자위 행위가 부모의 지속적인 통제, 인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성은 동시에 외부의 의사에게 행하는 고백, 혹은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가정의 권력이 의학 권력과 연결되면서 가정은 자위행위 방지를 위한 의학적 앎의 전수자가 되어야 했다. 의사가 어린이에게 처방을 내리면 가정은 그것을 충실하게 따라야 했다. 그래서 치료를 명분으로 거세, 유사 거세가 행해짐(자위 행위와 소아에 대한 육체적 박해)
->가정을 매개로 한 의학과 성의 접촉.
: 그때까지 의학과 성의 관계는 멀고도 간접적인 것. 성에 대한 의료 행위를 한 것은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가정 안에, 가정과 함께 지속적인 성의학을 만들어 내고 성의 의학화를 가속화시키며 가정의 공간 속에 의학적 개입 혹은 의학적 기술을 들여왔다.
: 그러면서 19세기 초반부터 성의 등급에서 정상과 비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정이 섹슈얼리티를 구분하고 결정하는 원칙이 되었고 비정상을 교정하는 원칙이 되었다.
왜 사람들은 자위행위를 부모 자식 간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켰을까?
핵가족화는 곧 어린이의 몸을 완전히 책임지고 보호하라는 것을 의미.
보호는 1. 어린이들이 죽지 않기 위해서 2. 어린이를 감시하고 교정하기 위해서
반자위캠패인 십자군 운동은 좀 더 큰 십자군 원정(자연주의 교육)의 한 항목이었다.
자연주의 교육 : 자연의 교육자인 부모에게 기본적으로 어린이의 모든 교육을 일임한다는 것
-1760~80년대 독일 프랑스에서 반자위캠패인이 일어나던 시기에 사람들은 국가의 교육, 혹은 구가에 의해 통제되는 교육을 대대적으로 주장함.
가정에 아이들의 몸을 책임지라고 한 그 시기에 국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함. 물론 같은 연령대가 아니다. 여기에는 교환의 논리가 작동한다. 가정에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면 국가 교육 체제 속에 아이를 집어 넣겠다는 것.
<-어린아이의 성적인 몸이 어떤 의미에서 교환적인 화폐가 됨
어린이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견고하고 정서적이며 실체적인 핵가족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미끼 삼아 권력은 가정으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빼내어 규격화된 교육 공간으로 이동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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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메커니즘을 보라고 하지만 권력 메커니즘의 수혜자, 주체에 시선이 쏠린다.
- 안전해질수록 포위 당한다.
안전장치(도덕률, 규범, 법)의 강화에 동반하는 포위의 강화.
그러한 권력의 효과의 이면에 권력에 포섭 당하는 자가 받는 현실적인 손해?!
-개인의 몸을 포위하는 의학 권력 메커니즘이 여러 영역으로의 확장(학교 등)
->중간과정 없이 이식 받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괴리, 대항품행
미셸 푸코, 비정상인들 : 1974~1975,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75년 3월 5일 강의」 발제
(가정을 매개로 한 소아 섹슈얼리티의 의학화)
2021.04.21. 양진아
- 18세기에 와서 기존의 쾌락의 몸에 대한 담론의 강조를 완화시키는 경향이 생김.
영혼 및 몸과 욕망을 통제할 임무를 사물과 장소에 떠넘기는 거대한 자리 옮김의 한가운데에서 자위 행위의 담론이 생겨남. 처음에는 트리엔트적 가톨릭 형태의 양심 지도나 대형 교육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겨났지만 나중에는 가톨릭 국가(프랑스)에서도 나타남.
-자위 행위의 담론
자위 행위에 대한 텍스트, 책, 팜플렛, 전단 등이 갑자기 나오기 시작.
*주목할 점 1. 욕망과 쾌락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부재하는 담론이라는 점. (전시대 기독교적 살의 담론과 차이)/ 성인의 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로지 자위행위만이 문제. (성의 정신병리학과 성적 심리학이 아직 아님)
*주목할 점 2. 자위행위에 관한 담론이 과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기 보다는 권고, 충고, 명령과 같은 (반자위)캠페인의 형태를 띰. (예를 들어 어린이의 자위 행위 방지책,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인 논설문 등)
18세기에 이런 캠페인이 어떻게 갑자기 솟아 올랐을까?
반 위셀의 성 억압의 역사 :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쾌락의 기관’이었던 몸이 생산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행의 도구가 되었고,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쾌락 기관으로서의 몸은 억압되고 생산 도구로서의 몸이 정립되고 코드화 되었다.“
<- 푸코의 반박
: 분석은 틀리지 않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캠페인을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다. 심리학적이고 네거티브한 것이 못마땅하다. 억압, 억제를 분석의 중심에 둔다든가 쾌락기관, 수행 도구 같은 개념 사용이 그러하다. 역사 과정의 機制를 설명해 줄 수 없다. 반자위 행위 캠페인이 사회사 내부에서 포지티브하고 구성적인 효과를 가져온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반자위 캠페인이 몸을 억압하고 수행 도구화 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설명 못함.
1. 왜 이 캠페인이 일반적인 성행동이 아니라 자위 행위만을 문제로 삼는가.
2. 왜 이 캠페인이 근로하는 연령층이 아니라 부르주아계층의 소아,청소년만을 상대로 했는가.
반위셀의 분석대로 캠페인이 몸을 억압하고 생산하는 몸을 고양시키는게 목적이라면 노동계급, 성년의 섹슈얼리티를 문제삼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부즈주아계층의 소아와 청소년의 자위행위가 문제였다.
왜? 알아보기 위해 캠페인의 주제 뿐 아니라 전술 또는 전술의 지표가 되는 주제들을 봐야.
반자위캠페인은.. 자위 행위를 금지시키기 위해 어린이들을 죄인으로 몬다. 그것은 어린이를 죄인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의 신체적 전환이나 병리학에 대한 주의 환기가 목적이다. 신체 증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남
전면적 질병이라는 과학적 허구 : 가능한 모든 질병 또는 수많은 징후들이 어린 자위 행위자에게 한데 모여 나타남.
예를 들어 19세기 초반 의료계의 바이블 의료과학사전(by 세뤼리에)에서 자위행위로 시력을 잃고 몸에서 냄새가 나고 피부가 흙빛이 되고 혀가 흔들리고 두 눈이 퀭하게 되고... 마침내 죽음이 온다.
2. 확립된 질병학 카테고리 안에 자위 행위를 병적 원인으로 기재하여 넣는 병인론적 코드화 : 전면적 질병이라는 과학적 공상이 당시 의료 담론의 과학적 규범과 부합되는 정식 의료 문헌에서도 발견됨
예를 들어 당시 권위있는 의사들은 자위 행위를 모든 질병의 가능한 원인으로서 제시. 뇌염, 척수염, 뼈의 질병, 눈병, 폐병 등의 원인
3. 의사들 자신의 행동과 지휘 하에 일종의 우울증적 주제와 자위 행위의 결과로서의 신체 증상을 환자의 말, 존재, 감각, 그리고 몸 자체 안에 구성하는 일
: 당시 의학 논문, 팜플렛, 소책자에서 발견되는 ‘환자 문예’라는 문학장르에서 자위행위를 고백하고 그것으로 인한 병적 증상을 서술함
이러한 반자위 캠페인은 자위 행위를 일종의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多形의 병인론으로 정착시킴. 또 반자위 캠페인은 자위 행위 즉 성적 금기를 죽음에까지 이르는 모든 병리학과 연관 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반자위 캠페인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사망 원인이 소년 시절의 자위 행위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보인다. 자위 행위는 이제 모든 질병의 보편적인 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자위 캠페인을 통해 자기 질병에 대한 환자 자신의 책임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병에 대한 주체 자신의 병리학적 책임은 이전에도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이 시기에 이중으로 변형된다. 성병에만 한정되었던 성적 책임이 이제는 모든 질병으로 확대된 것이다. “자가-에로티시즘의 발견견과 병리적 책임 소재 사이에 상호 침투현상”
이제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생명과 질병, 죽음에까지도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자위 행위의 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다.
아이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사춘기 이전의 자위 행위에 주목하고, 거기에 내인성 원인이 없고, 외인성 원인만이 있다고 봄.
자위행위의 죄는 외부적 사건,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특히 소아에 대한 성인들의 유혹. (목욕을 시킬 때 부모나 선생의 부주의하고 비의도적인 자극. “부주의하게 간질이는 손”)
->처음부터 반자위캠페인은 소아에 대한 성인들의 유혹을 겨냥한 것.
여기에서 성인은 한 집안에 동거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이다. 하인, 가정부, 가정교사, 숙부, 숙모, 사촌.....
자위행위의 죄는 어린아이가 집 한가운데의 불건전한 공간에 있는 것. 자위행위는 부모가 아이들의 양육을 직접 떠맡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으므로 부모의 유죄로 귀착된다.
반자위 행위 켐페인의 설교 대상은 부모였다. 부모를 문제삼기
- 때문에 가정공간의 새로운 구성이 요구되었다. 지속적인 감시의 공간으로서의 가정.
: 모든 매개인을 제거하는 것. 하인을 감시하거나 없애고, 아이들을 성적으로 완전히 금욕적인 가정 공간에 혼자 두는 것.
: 그리고 어린아이의 신체는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아이의 행동, 신체적인 현상에 대한 감시
어린아이가 쾌락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몸과 어른의 몸을 더 잘 밀착시키기 위해 일련의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어린아이의 손과 어른의 손을 끈으로 매달고 자거나, 형의 방에서 의자에 자기 몸을 묶는 아이)
아이의 몸에 즉각적, 직접적,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모의 몸을 밀착시키는 제재를 가하도록 함. 매개자 없이 부모들의 몸에 의해 아이들의 몸이 감시되도록 함. < 이것이 캠패인의 중심적 목표. 즉 새로운 갖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이제(18세기 말) 귀족, 부르주아 가정들은 핵가족화 됨. 관계망 속의 가정이 아니라 세포핵-가정, 캥거루 -가족이 됨
어린이의 성을 추적하고 금지하는 것이 가정 구성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됨
접촉과 시선 및 감시의 근친상간이 근대 가족의 기초였다.
이러한 가족 형태에서 부모는 자식에 대한 전권을 가지게 됨. 자위행위를 도덕적 주제로 삼아 새가정 새윤리의 제1 신조로 삼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자위 행위를 부도덕이 아니라 질병의 영역에 기입해 넣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부과된 내적 통제는 외부의 의학적 통제와 연결되었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는 의사-환자의 관계와 동질적. 부모-자식 관계는 의사-환자 간의 관계를 연장시킨 것이 되어야 했다. 부모는 보건요원이 되고, 부모의 통제는 의학적 위생적 권력의 종속적인 존재가 됨.
합리성의 이름으로 가정에 외부적인 의학적 앎과 권력에 투입됨.
어린아이의 병(자위행위)이 부모에 의해 발견되면 의사가 개입해서 치료한다. 치료를 위한 고백을 해야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의사에게 해야만 했다.
어린이의 성, 자위 행위가 부모의 지속적인 통제, 인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성은 동시에 외부의 의사에게 행하는 고백, 혹은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가정의 권력이 의학 권력과 연결되면서 가정은 자위행위 방지를 위한 의학적 앎의 전수자가 되어야 했다. 의사가 어린이에게 처방을 내리면 가정은 그것을 충실하게 따라야 했다. 그래서 치료를 명분으로 거세, 유사 거세가 행해짐(자위 행위와 소아에 대한 육체적 박해)
->가정을 매개로 한 의학과 성의 접촉.
: 그때까지 의학과 성의 관계는 멀고도 간접적인 것. 성에 대한 의료 행위를 한 것은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가정 안에, 가정과 함께 지속적인 성의학을 만들어 내고 성의 의학화를 가속화시키며 가정의 공간 속에 의학적 개입 혹은 의학적 기술을 들여왔다.
: 그러면서 19세기 초반부터 성의 등급에서 정상과 비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정이 섹슈얼리티를 구분하고 결정하는 원칙이 되었고 비정상을 교정하는 원칙이 되었다.
왜 사람들은 자위행위를 부모 자식 간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켰을까?
핵가족화는 곧 어린이의 몸을 완전히 책임지고 보호하라는 것을 의미.
보호는 1. 어린이들이 죽지 않기 위해서 2. 어린이를 감시하고 교정하기 위해서
반자위캠패인 십자군 운동은 좀 더 큰 십자군 원정(자연주의 교육)의 한 항목이었다.
자연주의 교육 : 자연의 교육자인 부모에게 기본적으로 어린이의 모든 교육을 일임한다는 것
-1760~80년대 독일 프랑스에서 반자위캠패인이 일어나던 시기에 사람들은 국가의 교육, 혹은 구가에 의해 통제되는 교육을 대대적으로 주장함.
가정에 아이들의 몸을 책임지라고 한 그 시기에 국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함. 물론 같은 연령대가 아니다. 여기에는 교환의 논리가 작동한다. 가정에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면 국가 교육 체제 속에 아이를 집어 넣겠다는 것.
<-어린아이의 성적인 몸이 어떤 의미에서 교환적인 화폐가 됨
어린이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견고하고 정서적이며 실체적인 핵가족이 형성되었고 그것을 미끼 삼아 권력은 가정으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빼내어 규격화된 교육 공간으로 이동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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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메커니즘을 보라고 하지만 권력 메커니즘의 수혜자, 주체에 시선이 쏠린다.
- 안전해질수록 포위 당한다.
안전장치(도덕률, 규범, 법)의 강화에 동반하는 포위의 강화.
그러한 권력의 효과의 이면에 권력에 포섭 당하는 자가 받는 현실적인 손해?!
-개인의 몸을 포위하는 의학 권력 메커니즘이 여러 영역으로의 확장(학교 등)
->중간과정 없이 이식 받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괴리, 대항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