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5스피노자와표현문제
17장 공통 개념
▶ 들뢰즈 철학사의 큰 틀
형상[본질] – 가능태 – 사유 - 영혼 – 자발성의 형식[오성(개념 or 범주)] -- 언표[말하기]
질료[외관] – 현실태 – 연장 – 물질 – 수용성의 형식[직관(시공간)] – 가시성[보기]
들뢰즈는 위의 구도로 철학사의 큰 줄기를 그리고 있다. 플라톤의 형상과 질료는 달리 말하면 본질과 외관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가면 가능태와 현실태가 된다[첫번째 단절]. 데카르트로 가면 사유와 연장이 된다. 둘다 현실태이므로 이때가 되면 가능태가 사라진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영혼[모나드]과 물질[신체]이 있다[두번째 단절]. 칸트로 가면 자발성 형식[오성(개념 or 범주), 수용성의 형식[직관(시공간)]이 나타나는데 이때가 되면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 밖은 없다. 푸코로 가면 사물을 지각하는 조건으로서 언표 가능한 것, 볼 수 있는 것이 제시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의 자발성의 형식과 수용성의 형식부터 사물을 지각하는 조건이 제시된다. 푸코의 언표 가능한 것/볼 수 있는 것은 조건 또는 형식에 해당한다. 들뢰즈에게 조건과 형식은 거의 동의어다. 우리가 말을 하는 조건이 바로 언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아무 말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 특정한 방식으로만 말하게끔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가시성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방식으로 혹은 특정한 것만 봄을 의미한다. 그 조건이 바로 언표 가능한 것, 가시성인 것이다. 푸코는 처음에 담론적 형성/비담론적 형성을 사용했다가 이것들을 폐기하고 언표와 가시성을 제시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말을 누군가가 말한 것이 아니라 말하기의 조건으로 파악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파이프와 말로 옮길 때의 파이프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계열과 말의 계열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블랑쇼도 자주 언급한다.
그런데 푸코의 말과 사물 사이에 다이어그램이 있다. 칸트의 자발성의 형식과 수용성의 형식 사이에는 도식이 있다. 도식과 다이어그램도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 가면 언표행위의 배치와 기계적 배치, 그 사이에 추상기계가 제시된다. 양자 사이에 있는 다이어그램과 추상기계는 form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무정형, 비형식이므로 양쪽에 다 걸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블랑쇼에게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만 있는데 푸코에게는 둘 사이에 다이어그램이 있다는 본다. 푸코는 다이어그램이라는 표현을 한두 번 밖에 쓰지 않았으나 들뢰즈는 빈도수와 중요도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다이어그램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다이어그램을 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다. 언표와 가시성은 굳어진 것이고 다이어그램은 마그마 같은 것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에 대해 역사적 아프리오리라고 한다. 칸트에게서 아프리오리는 선험적인 것이고 초역사적인 것이므로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바로 이 칸트의 선험적인 것을 푸코가 역사화, 상대화시킨 것이라고 본다. 각 시대별로 지층화된 형식이 모두 다르다. 우리가 말하고 사물을 지각하고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조건이 시대마다 다르다. 이것이 에피스테메다. 이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려면 다이어그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화가 되지 않고 칸트처럼 영원불멸하게 된다. 다이어그램은 운동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외관은 외양, 가상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칸트로 가면 본질과 외관 구별이 없어진다. 칸트에게는 나타난 것=현상만 있다. 현상 뒤에 본질은 없다. 현상의 조건이 있다. 현상과 조건으로 변화하면서 헤겔 철학[장막 뒤에 아무 것도 없다. 외관의 본질에 배후가 없다는 뜻, 정신현상학 집필] 이래 현상학으로 이어진다.
▶ “표현” : 『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잠재적인 차원에서는 미분비와 특이성만 있다. 이것이 현실화되는 것이 표현이다. 이것이 현실화될 때 다른 것들이 안에 접혀 들어간다. 들뢰즈는 분화, 적분, 현실화를 같은 말로 본다. 이것이 곧 표현이다.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이 표현인 것이다. 잠재성은 모두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성, 미분비[=차이]만 현실화된다.
첫 번째 물음 : 어떻게 우리는 최대한의 기쁜 정념을 경험하게 되는가?
두 종류의 수동/정념들 사이의 구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기쁜 정념들은 우리를 활동/작용 역량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슬픈 정념들은 우리를 활동/작용 역량에서 멀어지게 한다. 에티카의 첫 번째 물음은 “최대한의 기쁜 정념으로 변용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답은 “도시에서 발견하는 이성의 노력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발생 원리의 측면에서의 이성이다. 활동 측면의 이성에서 이성의 첫 번째 단계에는 수동/정념 중에서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여전히 수동이니까 작용/활동 역량에서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가까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쁜 정념을 늘리기 위해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이성의 첫 번째 노력이다.
두 번째 물음 : 어떻게 우리는 능동적 변용을 경험하게 되는가?
에티카의 두 번째 물음: “자기 안에 능동적 변용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단계는 수동적 단계로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수동적 단계, 정념에서 벗어나서 작용/활동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passion에는 수동과 정념이라는 뜻이 같이 있어 하나만 쓰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수동의 의미가 강하고 어떤 때는 정념의 의미가 강할 때가 있다. “기쁜 수동”이란 번역은 어색하고 부정확하다.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
능동적 기쁨과 수동적 기쁨의 구별은 사고 상의 구별이다.[어떤 하나를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실재적/실질적 구별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사고상의 구별은 추상에 해당된다.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을 사고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두 감정은 원인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수동적 기쁨은 우리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능동적 기쁨은 우리의 작용 역량 자체에서 파생되고 우리 안의 적합한 관념에서 따라 나온다. 쉽게 얘기하면 원인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수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그것과 구별되는 능동적 기쁨을 야기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수동적 기쁨을 이용해서/축적해서 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동적 기쁨은 마주침의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 원인을 모른다. 구성비에 대한 원인을 알아야 능동적 기쁨이 야기된다. 비의 합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일반적이다/아니다는 기능이다. 추상관념과 구별한다. 일반성은 기능을 말한다. 보편성은 일반과 추상 모두 포괄한다. 스피노자가 공격하는 것은 보편 개념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보편 개념이다. 즉 추상적 보편 개념이다. 보편 개념 중 일반적인 개념은 유지한다. 그 일반성은 공통개념의 일반적 기능. 즉 기쁨을 가져다준다, 역량을 증가시킨다 등을 뜻한다. 들뢰즈는 삼각형 중에 직각, 예각, 둔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삼각형이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만일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추상관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삼각형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각의 비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삼각형에 적용되는 기능이고 비의 관계다. 세 각의 비에 대한 관념/개념이다. 종이 앞면과 뒷면을 따로 떠올릴 수는 있으나 분리시킬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추상이다. 그리고 어디가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앞면과 뒷면이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추상이다. 분리되지 않는 것을 분리시키는 조작이 바로 추상이다.
신체들의 화합, 비比들의 합성, 합성의 공통성 ─ 더 혹은 덜 일반적인 관점
한 신체를 합성하는 여러 개의 비와 다른 신체를 합성하는 여러 개의 비가 완전히 다 맞다고 가정해보자. 카일과 림프가 합성되어 피가 된다는 것을 예로 든다. 카일을 특징짓는 비와 림프를 특징짓는 비가 합쳐지면 제3의 비가 만들어진다. 이때 제3의 비가 카일의 비와도 합치가 되고 림프의 비와도 합치가 되면서 상위의 신체/개체가 형성된다. 공통개념의 첫 번째 특징은 원인을 표현한다. 두 번째 특징은 전체와 부분에 공통적이다. 부분과 부분끼리 공통적이면 안 되고 두 개의 부분이 형성하는 제3의 신체=전체와 두 개의 부분 간에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두 신체는 전체의 부분들과 같고, 전체는 이 부분들과 관련해서 일반적 기능[=공통개념의 일반성]을 수행하며 구조/얼개의 동일성을 갖는다. 점점 덜 화합하는 혹은 상반되는 신체들을 가정해 보자. 아주 일반적인/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구성비는 직접 합성되지 않고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만 여전히 합성의 유사성 혹은 공통성이 있다. 전 자연에서는 모든 비比가 합성된다. 분해 또한 합성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모든 신체들에 유효한 합성의 유사성’을 보인다. 합성의 유사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공통 개념들 : 일반성에 따른 다양성
실존 양태들에서의 ‘합성의 유사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의 합성의 유사성・공통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이 가장 유용하다. 이것은 두 신체 사이의 공통개념이다. 이 중 하나가 나의 신체로 이것과 다른 어떤 신체 사이의 공통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다. 이 공통개념은 양태들 사이의 화합을 이해시켜준다. 신체가 화합/합치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이유, 즉 외면적인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인식을 준다. 반대편 극에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있다. 이것은 연장, 사유 속성에 대한 개념이다. 특정 신체의 관점이 아니라 일반적, 전 자연적인 관점에서 서로 합치하는 유사성 혹은 공통성을 나타낸다. 이 공통 개념들도 유용성이 있는데, 덜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화합, 합치를 이해시키는 것과는 달리 불합치/불화/부조화를 이해시켜준다. 그 불화의 내적 필연적 이유를 준다. 그리고 어떤 관점으로부터 두 신체 사이의 화합이 멈추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어떻게 왜 상반성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공통 개념은 일반 관념이지만 추상 관념은 아니다 ─ 추상 관념에 대한 비판
스피노자는 보편자 전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라는 특정 개념만 공격한다. 또한 스피노자는 일반적인 유와 종 개념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유와 종의 추상적 규정만 공격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추상 관념은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들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적인 구성 상태를 지시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 추상 관념은 사물들 사이에서 감각적인 차이들만 붙잡는다. 추상은 공통성을 뽑아내는 것이므로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따르면 모든 개념적 사유에 감각이 선행한다. 순수한 개념적 사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순수이성”은 인식을 담당한다. 도덕과 관련된 것은 실천이성이 담당한다. 순수이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지성=오성이다. 실천이성에 넘어오면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순수이성에서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스피노자에서 조프루아 생띨레르까지
스피노자의 대원리 : 감각적 형태나 기능이 아니라 구조를 고려할 것. “구조”란 신체의 부분들 간의 비比들의 체계다. 기관이 아니고 불변적인[입자는 variable하지 않고 값을 갖지 않고 0에 가깝다는 의미] 해부학적 요소들이다. 가장 단순한 신체, 부정형의 입자들이 무한집합을 이뤄 어떤 형태/형식을 갖게 되면서 하나의 신체 또는 개체가 된다. 그 무한히 많은 입자들이 형성하는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비에 따라서 기관의 형태와 기능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극미동물부터 고등동물까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이 조프루아 생띨레르Geoffroy Saint-Hilaire가 말한 합성의 공통성・통일성이다. 들뢰즈식으로 보면 분자적 수준까지 내려가면 모든 생명체는 똑같다. 특정동물에서는 한 기관의 형태와 기능이 부분들 사이의 비에 의존한다. 궁극에 가면 전체 자연이 자연 전체가, 부분들 사이의 비比만 달라지는 하나의 동물이다. 들뢰즈는 공통개념이 생물학적 관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공통개념은 자연철학에서 진정으로 이념적 역할을 한다’라는 언급에 나오는 ‘이념’은 잠재성 차원의 특이성이나 미분비를 가리킨다.
공통 개념은 필연적으로 적합하다
공통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일반적 관념으로서 필연적으로 “적합하다.”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나의 신체와 몇몇 외부 신체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은 이 신체들 각각에 “똑같이” 존재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갖는데 신 안에 있는 그대로 갖는다. 이 증명들은 공통개념 일반이 필연적으로 적합한 두 측면의 근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공통 개념들은 형상적으로는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되고, 질료적으로는 그들의 작용인으로서 신 관념을 표현하는 관념들이다. 원인을 표현하고 부분과 전체에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어떻게 우리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 공통 개념과 표현
위에서는 사변적 고찰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실천적 고찰을 한다. 앞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적합한 관념들에 이를 수 있는지 물었었다. 1) 외부 신체가 우리 신체에 초래한 결과를 지시하는 변용관념이 있고 이 외부 신체가 우리에게 초래한 효과들과 이것으로부터 외부 신체와 우리의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출발점은 외부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효과/결과다. 결국은 1종 인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적합한 관념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공통개념을 형성해서 우리는 능동적이 되고 이 공통개념의 형성은 우리의 활동/작용 역량의 형상적/온전한 소유에 진입할 수 있다. 이것이 이성의 두 번째 시기이다. 여기서 첫 번째 시기에는 수동적 기쁨, 수동적 변용이 해당된다. 이것을 발판으로 공통개념을 형성하면 여기서 능동적 기쁨이 파생된다. 이는 발생의 측면에서 이성은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달리 말하면 기쁜 역량을 최대한 늘리려는 노력에 해당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활동/능동적 자체의 측면에서 보면 공통 개념들을 형성/착상하려는 노력, 화합과 불화 자체를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해당된다. 첫 번째 시기는 화합과 불화를 지각해서 이에 따라 마주침을 조직하는 것이고 두 번째 시기는 화합과 불화를 그 자체로 지성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때 이성을 이용해 우리의 작용 역량 혹은 이해 역량의 소유에 도달하고, 이성적인 존재들이 된다. 3) 공통 개념이 다른 적합한 관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른 적합한 관념이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에 대한 인식이다. 3종 인식으로 가는 것이다. 신의 본질 자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준다.
공통 개념들의 형성 순서는 덜 일반적인 것에서 더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공통개념의 생물학적 의미와 실천적 기능을 간과하면 안 된다. 공통개념을 수학적으로만 보거나 사변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에티카 2부만 보면 사변적 관점에서 공통 개념을 고찰한다. 연장 안의 모든 물체는 공통적이라고 보는 등. 사변적 관점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공통 개념들의 형성의 원인과 순서는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다. 실천적 기능의 성격[본성]도 마찬가지다.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하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수동적 기쁨은 우리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에티카』 2부에서 논리적 질서/차원에서의 공통 개념의 해명은 가장 보편적인 것들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나쁜 변용, 즉 우리에게 맞지 않는 신체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슬픈 변용을 일으킬 때, 공통개념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공통적인 것에 의해서 두 신체가 불화하는 경우는 없다. 공통적인 것 때문에 불화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기쁜 수동적 변용을 겪을 때는 기쁜 변용 자체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형성하는 최초의 공통 개념들은 가장 덜 보편적인 것, 우리 신체와 직접 화합하며 우리 신체를 기쁨으로 변용시키는 다른 신체와 우리 신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통 개념들의 형성의 순서/질서를 고려하면, 가장 덜 보편적인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째 측면에서의 이성 : 공통 개념들의 형성
우리가 우리 신체와 화합하는 신체와 마주칠 때, 즉 기쁜 수동적 변용을 겪을 때, 이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의 관념을 형성하도록 유도된다. 에티카 5부에서 스피노자가 기쁜 정념들에 특권을 부여한다. 작용 역량이 현실태로 이행하고 우리에게 본유적인/생득적인 것의 소유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방해가 제거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역량을 증가시키고 기쁨을 느끼고 역량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있으므로 이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한다. 왜 기쁜 정념들의 축적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선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감정들이 “확실해야[확고해야]” 한다. 우리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키는 슬픈 정념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첫 번째 노력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단순한 수동/정념들의 연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쁜 정념은 여전히 효과/결과에 대한 인식이고 부적합한 개념들에서 생기는 인식이다. 따라서 기쁜 정념들을 이용하여 외부 신체와 우리 신체 사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두 번째 시기다. 이 축적을 이용하여 우리가 적합한 관념을 소유하게 하는 진정한 “도약”이 필요하다. 기쁜 정념의 단순한 축적만으로 안되고 이를 발판으로 도약해야 한다.
공통 개념의 실천적 의미 : 우리에게 능동적 기쁨을 준다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면 이때 정신은 이 적합한 관념에서 파생되는 관념들의 적합한 원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이다. 우리의 정신이 혼자 힘으로 이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며, 이 관념에서 어떤 감정이 파생되는데 이것은 수동적이지 않은 능동적인 변용-관념 혹은 감정이다. 변용관념에도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있다.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사고상에 의해 구별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하면 능동적 감정이 된다는 것이다. 수동/정념인 감정은 명석 판명한(적합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즉시 수동/정념이기를 멈춘다. 그 수동적 기쁨이었던 것이 능동적 기쁨으로 전화된다. 수동적 기쁨에 능동적 기쁨이 덧붙여지고 능동적 기쁨과 수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능동적 기쁨에서 이성에 속하는 욕망들이 생겨난다. 이성의 욕망들이 비이성적 욕망들을 대신한다. 이성적 연쇄가 욕망들의 비이성적 연쇄를 대신한다. 이것만 놓고 보면 스피노자는 합리주의자, 이성주의자다.
스피노자가 묘사하는 활동 전체는 네 시기를 제시한다. 1) 수동적 기쁨을 느끼는 시기, 2) 수동적 기쁨을 이용해 공통 개념(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시기 3) 이 공통 개념에서 능동적 기쁨이 파생되는 시기, 4) 이성적 욕망이 비이성적 욕망을 대신하는 시기. 기쁜 정념을 이용하여 수동/정념들이 우리 자신의 가장 작은 부분만 차지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변용 능력이 실행되게 만드는 것.
어떻게 우리는 가장 덜 일반적인 공통 개념으로부터 가장 일반적인 공통 개념을 형성하는가
우리 신체와 화합하지 않고 우리를 슬픔으로 변용시키는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이 공통 개념은 일반적인 관점을 내포하므로 보편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기능을 갖는다. 왜 불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공통 개념이 우리에게 불화를 이해시킬 때, 거기서 다시 능동적 기쁨의 감정이 파생된다. 이해를 하면 즉 원인을 알면 능동적 기쁨이 생겨난다.
불가피한 슬픔을 이해하기
첫째 최대한의 기쁜 정념들을 맛보려고 애쓴다(이성의 첫 번째 노력). 둘째, 기쁜 정념들을 이용해서 공통 개념을 형성한다(이성의 두 번째 노력). 셋째 모든 경우들에 적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을 형성한다. 여기까지 이르려면 반드시 앞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형성의 순서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더 보편적인 것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먼저 갈 수 있다면 공통개념이 없어도 될 수 있다. 모든 공통 개념은 같은 사변적 내용을 갖는다. 일반성을 내포한다. 같은 실천적 기능을 갖는다. 형성 조건을 고려하면 사변적 역할과 실천적 역할이 다르다. 가장 덜 보편적인 것들에서 출발한다. 몇몇 지점에서 능동성을 정복하게 되면 덜 유리한 경우에도 공통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공통 개념의 견습[수습과정]apprentissage 의 문제가 중요하다.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순수사변, 개념적 이해로 바로 직행할 수 없다.
20210205스피노자와표현문제
17장 공통 개념
▶ 들뢰즈 철학사의 큰 틀
형상[본질] – 가능태 – 사유 - 영혼 – 자발성의 형식[오성(개념 or 범주)] -- 언표[말하기]
질료[외관] – 현실태 – 연장 – 물질 – 수용성의 형식[직관(시공간)] – 가시성[보기]
들뢰즈는 위의 구도로 철학사의 큰 줄기를 그리고 있다. 플라톤의 형상과 질료는 달리 말하면 본질과 외관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가면 가능태와 현실태가 된다[첫번째 단절]. 데카르트로 가면 사유와 연장이 된다. 둘다 현실태이므로 이때가 되면 가능태가 사라진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영혼[모나드]과 물질[신체]이 있다[두번째 단절]. 칸트로 가면 자발성 형식[오성(개념 or 범주), 수용성의 형식[직관(시공간)]이 나타나는데 이때가 되면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 밖은 없다. 푸코로 가면 사물을 지각하는 조건으로서 언표 가능한 것, 볼 수 있는 것이 제시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의 자발성의 형식과 수용성의 형식부터 사물을 지각하는 조건이 제시된다. 푸코의 언표 가능한 것/볼 수 있는 것은 조건 또는 형식에 해당한다. 들뢰즈에게 조건과 형식은 거의 동의어다. 우리가 말을 하는 조건이 바로 언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아무 말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 특정한 방식으로만 말하게끔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가시성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방식으로 혹은 특정한 것만 봄을 의미한다. 그 조건이 바로 언표 가능한 것, 가시성인 것이다. 푸코는 처음에 담론적 형성/비담론적 형성을 사용했다가 이것들을 폐기하고 언표와 가시성을 제시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말을 누군가가 말한 것이 아니라 말하기의 조건으로 파악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파이프와 말로 옮길 때의 파이프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계열과 말의 계열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블랑쇼도 자주 언급한다.
그런데 푸코의 말과 사물 사이에 다이어그램이 있다. 칸트의 자발성의 형식과 수용성의 형식 사이에는 도식이 있다. 도식과 다이어그램도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 가면 언표행위의 배치와 기계적 배치, 그 사이에 추상기계가 제시된다. 양자 사이에 있는 다이어그램과 추상기계는 form을 갖지 않는다. 이렇게 무정형, 비형식이므로 양쪽에 다 걸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블랑쇼에게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만 있는데 푸코에게는 둘 사이에 다이어그램이 있다는 본다. 푸코는 다이어그램이라는 표현을 한두 번 밖에 쓰지 않았으나 들뢰즈는 빈도수와 중요도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다이어그램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다이어그램을 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다. 언표와 가시성은 굳어진 것이고 다이어그램은 마그마 같은 것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에 대해 역사적 아프리오리라고 한다. 칸트에게서 아프리오리는 선험적인 것이고 초역사적인 것이므로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들뢰즈는 바로 이 칸트의 선험적인 것을 푸코가 역사화, 상대화시킨 것이라고 본다. 각 시대별로 지층화된 형식이 모두 다르다. 우리가 말하고 사물을 지각하고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조건이 시대마다 다르다. 이것이 에피스테메다. 이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려면 다이어그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화가 되지 않고 칸트처럼 영원불멸하게 된다. 다이어그램은 운동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외관은 외양, 가상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칸트로 가면 본질과 외관 구별이 없어진다. 칸트에게는 나타난 것=현상만 있다. 현상 뒤에 본질은 없다. 현상의 조건이 있다. 현상과 조건으로 변화하면서 헤겔 철학[장막 뒤에 아무 것도 없다. 외관의 본질에 배후가 없다는 뜻, 정신현상학 집필] 이래 현상학으로 이어진다.
▶ “표현” : 『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잠재적인 차원에서는 미분비와 특이성만 있다. 이것이 현실화되는 것이 표현이다. 이것이 현실화될 때 다른 것들이 안에 접혀 들어간다. 들뢰즈는 분화, 적분, 현실화를 같은 말로 본다. 이것이 곧 표현이다.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이 표현인 것이다. 잠재성은 모두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성, 미분비[=차이]만 현실화된다.
첫 번째 물음 : 어떻게 우리는 최대한의 기쁜 정념을 경험하게 되는가?
두 종류의 수동/정념들 사이의 구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기쁜 정념들은 우리를 활동/작용 역량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슬픈 정념들은 우리를 활동/작용 역량에서 멀어지게 한다. 에티카의 첫 번째 물음은 “최대한의 기쁜 정념으로 변용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답은 “도시에서 발견하는 이성의 노력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발생 원리의 측면에서의 이성이다. 활동 측면의 이성에서 이성의 첫 번째 단계에는 수동/정념 중에서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여전히 수동이니까 작용/활동 역량에서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가까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쁜 정념을 늘리기 위해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이성의 첫 번째 노력이다.
두 번째 물음 : 어떻게 우리는 능동적 변용을 경험하게 되는가?
에티카의 두 번째 물음: “자기 안에 능동적 변용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단계는 수동적 단계로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수동적 단계, 정념에서 벗어나서 작용/활동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passion에는 수동과 정념이라는 뜻이 같이 있어 하나만 쓰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수동의 의미가 강하고 어떤 때는 정념의 의미가 강할 때가 있다. “기쁜 수동”이란 번역은 어색하고 부정확하다.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
능동적 기쁨과 수동적 기쁨의 구별은 사고 상의 구별이다.[어떤 하나를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실재적/실질적 구별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사고상의 구별은 추상에 해당된다.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을 사고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두 감정은 원인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수동적 기쁨은 우리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능동적 기쁨은 우리의 작용 역량 자체에서 파생되고 우리 안의 적합한 관념에서 따라 나온다. 쉽게 얘기하면 원인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수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그것과 구별되는 능동적 기쁨을 야기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수동적 기쁨을 이용해서/축적해서 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동적 기쁨은 마주침의 우연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 원인을 모른다. 구성비에 대한 원인을 알아야 능동적 기쁨이 야기된다. 비의 합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일반적이다/아니다는 기능이다. 추상관념과 구별한다. 일반성은 기능을 말한다. 보편성은 일반과 추상 모두 포괄한다. 스피노자가 공격하는 것은 보편 개념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보편 개념이다. 즉 추상적 보편 개념이다. 보편 개념 중 일반적인 개념은 유지한다. 그 일반성은 공통개념의 일반적 기능. 즉 기쁨을 가져다준다, 역량을 증가시킨다 등을 뜻한다. 들뢰즈는 삼각형 중에 직각, 예각, 둔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삼각형이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만일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추상관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삼각형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각의 비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삼각형에 적용되는 기능이고 비의 관계다. 세 각의 비에 대한 관념/개념이다. 종이 앞면과 뒷면을 따로 떠올릴 수는 있으나 분리시킬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추상이다. 그리고 어디가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앞면과 뒷면이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추상이다. 분리되지 않는 것을 분리시키는 조작이 바로 추상이다.
신체들의 화합, 비比들의 합성, 합성의 공통성 ─ 더 혹은 덜 일반적인 관점
한 신체를 합성하는 여러 개의 비와 다른 신체를 합성하는 여러 개의 비가 완전히 다 맞다고 가정해보자. 카일과 림프가 합성되어 피가 된다는 것을 예로 든다. 카일을 특징짓는 비와 림프를 특징짓는 비가 합쳐지면 제3의 비가 만들어진다. 이때 제3의 비가 카일의 비와도 합치가 되고 림프의 비와도 합치가 되면서 상위의 신체/개체가 형성된다. 공통개념의 첫 번째 특징은 원인을 표현한다. 두 번째 특징은 전체와 부분에 공통적이다. 부분과 부분끼리 공통적이면 안 되고 두 개의 부분이 형성하는 제3의 신체=전체와 두 개의 부분 간에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두 신체는 전체의 부분들과 같고, 전체는 이 부분들과 관련해서 일반적 기능[=공통개념의 일반성]을 수행하며 구조/얼개의 동일성을 갖는다. 점점 덜 화합하는 혹은 상반되는 신체들을 가정해 보자. 아주 일반적인/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구성비는 직접 합성되지 않고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만 여전히 합성의 유사성 혹은 공통성이 있다. 전 자연에서는 모든 비比가 합성된다. 분해 또한 합성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모든 신체들에 유효한 합성의 유사성’을 보인다. 합성의 유사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공통 개념들 : 일반성에 따른 다양성
실존 양태들에서의 ‘합성의 유사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비의 합성의 유사성・공통성에 대한 관념이 공통개념이다.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이 가장 유용하다. 이것은 두 신체 사이의 공통개념이다. 이 중 하나가 나의 신체로 이것과 다른 어떤 신체 사이의 공통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다. 이 공통개념은 양태들 사이의 화합을 이해시켜준다. 신체가 화합/합치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이유, 즉 외면적인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인식을 준다. 반대편 극에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있다. 이것은 연장, 사유 속성에 대한 개념이다. 특정 신체의 관점이 아니라 일반적, 전 자연적인 관점에서 서로 합치하는 유사성 혹은 공통성을 나타낸다. 이 공통 개념들도 유용성이 있는데, 덜 보편적인 공통개념이 화합, 합치를 이해시키는 것과는 달리 불합치/불화/부조화를 이해시켜준다. 그 불화의 내적 필연적 이유를 준다. 그리고 어떤 관점으로부터 두 신체 사이의 화합이 멈추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어떻게 왜 상반성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공통 개념은 일반 관념이지만 추상 관념은 아니다 ─ 추상 관념에 대한 비판
스피노자는 보편자 전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보편자라는 특정 개념만 공격한다. 또한 스피노자는 일반적인 유와 종 개념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유와 종의 추상적 규정만 공격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추상 관념은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들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적인 구성 상태를 지시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 추상 관념은 사물들 사이에서 감각적인 차이들만 붙잡는다. 추상은 공통성을 뽑아내는 것이므로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따르면 모든 개념적 사유에 감각이 선행한다. 순수한 개념적 사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순수이성”은 인식을 담당한다. 도덕과 관련된 것은 실천이성이 담당한다. 순수이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지성=오성이다. 실천이성에 넘어오면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순수이성에서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스피노자에서 조프루아 생띨레르까지
스피노자의 대원리 : 감각적 형태나 기능이 아니라 구조를 고려할 것. “구조”란 신체의 부분들 간의 비比들의 체계다. 기관이 아니고 불변적인[입자는 variable하지 않고 값을 갖지 않고 0에 가깝다는 의미] 해부학적 요소들이다. 가장 단순한 신체, 부정형의 입자들이 무한집합을 이뤄 어떤 형태/형식을 갖게 되면서 하나의 신체 또는 개체가 된다. 그 무한히 많은 입자들이 형성하는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비에 따라서 기관의 형태와 기능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극미동물부터 고등동물까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이 조프루아 생띨레르Geoffroy Saint-Hilaire가 말한 합성의 공통성・통일성이다. 들뢰즈식으로 보면 분자적 수준까지 내려가면 모든 생명체는 똑같다. 특정동물에서는 한 기관의 형태와 기능이 부분들 사이의 비에 의존한다. 궁극에 가면 전체 자연이 자연 전체가, 부분들 사이의 비比만 달라지는 하나의 동물이다. 들뢰즈는 공통개념이 생물학적 관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공통개념은 자연철학에서 진정으로 이념적 역할을 한다’라는 언급에 나오는 ‘이념’은 잠재성 차원의 특이성이나 미분비를 가리킨다.
공통 개념은 필연적으로 적합하다
공통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일반적 관념으로서 필연적으로 “적합하다.”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나의 신체와 몇몇 외부 신체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은 이 신체들 각각에 “똑같이” 존재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갖는데 신 안에 있는 그대로 갖는다. 이 증명들은 공통개념 일반이 필연적으로 적합한 두 측면의 근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공통 개념들은 형상적으로는 우리의 사유 역량에 의해 설명되고, 질료적으로는 그들의 작용인으로서 신 관념을 표현하는 관념들이다. 원인을 표현하고 부분과 전체에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이다.
‘어떻게 우리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 공통 개념과 표현
위에서는 사변적 고찰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실천적 고찰을 한다. 앞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적합한 관념들에 이를 수 있는지 물었었다. 1) 외부 신체가 우리 신체에 초래한 결과를 지시하는 변용관념이 있고 이 외부 신체가 우리에게 초래한 효과들과 이것으로부터 외부 신체와 우리의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출발점은 외부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효과/결과다. 결국은 1종 인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적합한 관념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공통개념을 형성해서 우리는 능동적이 되고 이 공통개념의 형성은 우리의 활동/작용 역량의 형상적/온전한 소유에 진입할 수 있다. 이것이 이성의 두 번째 시기이다. 여기서 첫 번째 시기에는 수동적 기쁨, 수동적 변용이 해당된다. 이것을 발판으로 공통개념을 형성하면 여기서 능동적 기쁨이 파생된다. 이는 발생의 측면에서 이성은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달리 말하면 기쁜 역량을 최대한 늘리려는 노력에 해당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활동/능동적 자체의 측면에서 보면 공통 개념들을 형성/착상하려는 노력, 화합과 불화 자체를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해당된다. 첫 번째 시기는 화합과 불화를 지각해서 이에 따라 마주침을 조직하는 것이고 두 번째 시기는 화합과 불화를 그 자체로 지성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때 이성을 이용해 우리의 작용 역량 혹은 이해 역량의 소유에 도달하고, 이성적인 존재들이 된다. 3) 공통 개념이 다른 적합한 관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른 적합한 관념이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에 대한 인식이다. 3종 인식으로 가는 것이다. 신의 본질 자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준다.
공통 개념들의 형성 순서는 덜 일반적인 것에서 더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공통개념의 생물학적 의미와 실천적 기능을 간과하면 안 된다. 공통개념을 수학적으로만 보거나 사변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에티카 2부만 보면 사변적 관점에서 공통 개념을 고찰한다. 연장 안의 모든 물체는 공통적이라고 보는 등. 사변적 관점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공통 개념들의 형성의 원인과 순서는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다. 실천적 기능의 성격[본성]도 마찬가지다.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하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수동적 기쁨은 우리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에티카』 2부에서 논리적 질서/차원에서의 공통 개념의 해명은 가장 보편적인 것들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나쁜 변용, 즉 우리에게 맞지 않는 신체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슬픈 변용을 일으킬 때, 공통개념을 형성하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공통적인 것에 의해서 두 신체가 불화하는 경우는 없다. 공통적인 것 때문에 불화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기쁜 수동적 변용을 겪을 때는 기쁜 변용 자체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형성하는 최초의 공통 개념들은 가장 덜 보편적인 것, 우리 신체와 직접 화합하며 우리 신체를 기쁨으로 변용시키는 다른 신체와 우리 신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통 개념들의 형성의 순서/질서를 고려하면, 가장 덜 보편적인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
두 번째 측면에서의 이성 : 공통 개념들의 형성
우리가 우리 신체와 화합하는 신체와 마주칠 때, 즉 기쁜 수동적 변용을 겪을 때, 이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의 관념을 형성하도록 유도된다. 에티카 5부에서 스피노자가 기쁜 정념들에 특권을 부여한다. 작용 역량이 현실태로 이행하고 우리에게 본유적인/생득적인 것의 소유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방해가 제거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본적으로 역량을 증가시키고 기쁨을 느끼고 역량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있으므로 이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한다. 왜 기쁜 정념들의 축적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우선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감정들이 “확실해야[확고해야]” 한다. 우리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키는 슬픈 정념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첫 번째 노력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단순한 수동/정념들의 연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쁜 정념은 여전히 효과/결과에 대한 인식이고 부적합한 개념들에서 생기는 인식이다. 따라서 기쁜 정념들을 이용하여 외부 신체와 우리 신체 사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이성의 두 번째 시기다. 이 축적을 이용하여 우리가 적합한 관념을 소유하게 하는 진정한 “도약”이 필요하다. 기쁜 정념의 단순한 축적만으로 안되고 이를 발판으로 도약해야 한다.
공통 개념의 실천적 의미 : 우리에게 능동적 기쁨을 준다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면 이때 정신은 이 적합한 관념에서 파생되는 관념들의 적합한 원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능동적이다. 우리의 정신이 혼자 힘으로 이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며, 이 관념에서 어떤 감정이 파생되는데 이것은 수동적이지 않은 능동적인 변용-관념 혹은 감정이다. 변용관념에도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있다. 수동적 기쁨과 능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사고상에 의해 구별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을 하면 능동적 감정이 된다는 것이다. 수동/정념인 감정은 명석 판명한(적합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즉시 수동/정념이기를 멈춘다. 그 수동적 기쁨이었던 것이 능동적 기쁨으로 전화된다. 수동적 기쁨에 능동적 기쁨이 덧붙여지고 능동적 기쁨과 수동적 기쁨은 원인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능동적 기쁨에서 이성에 속하는 욕망들이 생겨난다. 이성의 욕망들이 비이성적 욕망들을 대신한다. 이성적 연쇄가 욕망들의 비이성적 연쇄를 대신한다. 이것만 놓고 보면 스피노자는 합리주의자, 이성주의자다.
스피노자가 묘사하는 활동 전체는 네 시기를 제시한다. 1) 수동적 기쁨을 느끼는 시기, 2) 수동적 기쁨을 이용해 공통 개념(적합한 관념)을 형성하는 시기 3) 이 공통 개념에서 능동적 기쁨이 파생되는 시기, 4) 이성적 욕망이 비이성적 욕망을 대신하는 시기. 기쁜 정념을 이용하여 수동/정념들이 우리 자신의 가장 작은 부분만 차지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변용 능력이 실행되게 만드는 것.
어떻게 우리는 가장 덜 일반적인 공통 개념으로부터 가장 일반적인 공통 개념을 형성하는가
우리 신체와 화합하지 않고 우리를 슬픔으로 변용시키는 신체와 우리 신체에 공통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이 공통 개념은 일반적인 관점을 내포하므로 보편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기능을 갖는다. 왜 불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공통 개념이 우리에게 불화를 이해시킬 때, 거기서 다시 능동적 기쁨의 감정이 파생된다. 이해를 하면 즉 원인을 알면 능동적 기쁨이 생겨난다.
불가피한 슬픔을 이해하기
첫째 최대한의 기쁜 정념들을 맛보려고 애쓴다(이성의 첫 번째 노력). 둘째, 기쁜 정념들을 이용해서 공통 개념을 형성한다(이성의 두 번째 노력). 셋째 모든 경우들에 적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을 형성한다. 여기까지 이르려면 반드시 앞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형성의 순서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더 보편적인 것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먼저 갈 수 있다면 공통개념이 없어도 될 수 있다. 모든 공통 개념은 같은 사변적 내용을 갖는다. 일반성을 내포한다. 같은 실천적 기능을 갖는다. 형성 조건을 고려하면 사변적 역할과 실천적 역할이 다르다. 가장 덜 보편적인 것들에서 출발한다. 몇몇 지점에서 능동성을 정복하게 되면 덜 유리한 경우에도 공통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공통 개념의 견습[수습과정]apprentissage 의 문제가 중요하다. 덜 보편적인 공통 개념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순수사변, 개념적 이해로 바로 직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