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9스피노자와표현문제
16장 윤리적 세계관
영혼과 신체의 능동-수동 반비례 원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선언은 중요하다. 기존 철학자들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전통철학에 따르면 감각은 착각/가상illusion을 발생시킨다. 이 가상을 해소하려면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감각, 즉 신체에서 착각에 의해 illusion이 생기므로 결국 오류의 원천은 감각/신체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 혹은 정신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신체와 영혼이 다르지 않다. 이성 혹은 정신에 의해 신체를 교정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한편 전통철학에 따르면 신체는 영혼의 주의를 흩뜨리고 영혼이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하게 한다. 이러한 도덕적인 세계관을 지배하는 원리는 영혼과 신체 중 하나가 작용할 때 다른 하나는 작용을 받는다는 데에 있다. 데카르트의 실재적 작용 원리에 따르면 신체와 영혼 둘 사이에는 실재적 작용이 가능하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도 비슷하다. 영혼과 신체가 작용을 주고 받는데 영혼이 신체의 일탈행위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과 신체의 능동-수동 반비례 원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대 : 평행론의 실천적 의의
평행론이 독창적 이론이라면 그 이유는 실재적 작용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쪽의 능동이 다른 한쪽의 수동이라는 도덕적 원리를 뒤집기 때문이다. 영혼에서 수동passion인 것은 신체에서도 수동이고, 영혼에서 능동action인 것은 신체에서도 능동이다. 신체에 대한 영원의 우월성, 고차성, 목적성은 배제된다. 영혼이 신체를 교정한다고 할 때는 목적의식 같은 것이 있는데 스피노자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없다. 신체의 계열과 영혼의 계열을 맞추기 위해 신의 초월성을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신체와 영혼의 계열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신을 불러들인다. 기회원인론이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도 그러하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면 영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르면 신체가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작용하고 작용 받는 소질[능력]이 클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다. 신체의 역량이 크면 클수록 영혼 또는 정신의 역량도 그만큼 크다. 신체의 역량은 작용을 하고 작용을 받는 역량이고 영혼의 역량은 지각하는 역량이다. 신체의 작용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외부 원인에 의존하지 않을수록] 정신은 그만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역량의 견지에서 사유하기 위해 신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모델이 된다. 이 모델은 연장에 비해 사유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비해 의식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사유가 훨씬 더 넓은 지평이다. 의식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사유는 속성으로 의식과 무의식, 감정, 영혼, 정신 등 신체적이지 않은 모든 것=비신체적인 것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신체의 능동-수동은 영혼의 능동-수동과 나란히 간다고 하는 역량 이론은 윤리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평행론의 귀결은 도덕을 윤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자연권 : 역량과 권리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신체적[물질적] 개체와 종種과 유類의 새로운 개념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물음의 생물학적 의미는 17장과 18장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개체를 정의할 때는 개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유나 종과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개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밭 가는 말과 경주하는 말의 관계보다 밭 가는 말과 밭 가는 소의 관계가 더 가깝다. 할 수 있는 게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16장에서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갖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만을 이야기한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체의 자연권이다. 자연권 이론은 이중적 동일성을 갖는다. 즉 능력과 능력 실현/행사effectuation는 같다. 또한 이 능력 실현/행사는 권리와 같다. 종전에는 능력은 결핍의 상태, 즉 잠재태로서 현실태로 이행해야 완전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력은 곧 능력의 실행/행사이다. 실행되지 않는 능력은 없고 그것은 매순간 실행된다. 또한 능력을 실행/행사하는 것은 능력을 가진 자의 권리이다. 법/법칙이란 말은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자연 법칙[자연법]은 능력의 준칙norme이다. 즉 권리와 능력과 능력 실현은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자와 무분별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과 심신상실자, 강자와 약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 생각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같다는 얘기인가? 자연권의 차원, 각자 자기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변용의 종류에 차이가 있다. 변용에 따라서 역량도 다르고 역량에 따라서 권리도 다르다.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변용이 다르기 때문에 노예라는 조건에서만 말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자유인의 조건에서만 말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자연권과 고대 자연법의 네 가지 대립
키케로에 따르면, 고대의 자연법 이론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1° 어떤 존재의 본성을 그것의 완전성에 의해 정의한다. 여기서 본성=본질은 실현되지 않은 본질이다. 이것을 실현하려면 의무가 필요하다. 의무는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태어나면서부터/천성상으로/본성상으로] 이성적이고 사회적이다.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한다. 이것을 교정해야 한다. 2° [홉스나 사회계약론의 자연상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소한 것인데], 자연 상태는 본성에 부합하는 이성적 삶이다. 자연상태는 본성 상태이기도 하다. 좋은 사회란 자연에 부합하는 삶, 사회 상태 이전의 상태가 아니다.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상정한 고대 도시국가처럼 자신 본성에 따라 살고 이성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회다. 3° 자연 상태에서 일차적인 것은 의무다. 왜냐하면 본질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능력들은 잠재태이므로 자연적 능력들이 봉사해야 하는 목적에 따라서 이 능력들을 결정하고 실현하는 이성의 행위와 뗄 수 없다. 여기서 자연적 능력은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나는 능력을 말한다. 4° 현자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의무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자이다. 현자는 각자에게 돌아가는 활동과 직무의 최선의 판단자다. 들뢰즈는 강의를 통해 고대 자연법이론의 네 가지 명제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1) 사물은 본질에 따라 정의되고 그 본질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정의한다. 2) 자연법칙은 전(前)사회적이지 않다. 자연법칙은 가능한 좋은 사회에서 본질에 부합하는 삶이다. 3) 의무는 본질을 실현하는 조건이므로 일차적인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4) 따라서 성직자이든 군주이든 현자이든 우월한 누군가한테 권한이 있다.
키케로의 테제에 대비해 홉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자연 법칙은 목적론적 완전성에 관계되지 않고, 일차적 욕망, 즉 가장 강한 욕구에 관계된다. 들뢰즈는 강의에서 ‘사물은 본질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역량에 의해 정의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욕구가 역량이고 코나투스이고 곧 자연권이다. 역량이 곧 자연권이다. 고대 자연법 이론에서 사물을 본질에서 정의한다면 홉스는 역량에서 정의한다. 2° 이성은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자연 상태는 사회 이전 상태이다. 고대철학에서는 좋은 시민 사회에서 본질에 부합하는 상태가 자연 상태이다. 하지만 홉스에 따르면 누구도 이성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종교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종교 이전, 사회 이전 상태가 자연 상태다. 3° 고대자연법에서 일차적인 것이 의무였다면 홉스에게서는 능력 또는 권리다. 의무는 역량의 긍정, 능력의 행사, 권리의 보존에 비해 이차적이다. 고대자연법 테제에서는 본질이 잠재태였고 실현해야 했다. 홉스에게는 역량 자체가 현실태이다. 4° 권한은 오직 나한테만 있다. 나의 권리에 대해 결정을 내릴 권한이 누구에게도 없다. 각자 자신에게 있다.우리가 우리의 자연권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자의 권한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더 큰 악에 대한 공포나 더 큰 선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우리가 동의해서이다. 더 큰 악에 대한 공포와 더 큰 선에 대한 희망이 사회 형성의 동기다.
자연 상태와 마주침에 맡겨짐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만한 상태가 아니다. 홉스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은 큰 물고기의 권리라고 보았다. 내가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의 권리라고 보았다. 자연 상태는 무서운 곳이고 살만한 곳이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우연한 마주침에 따라 되는대로 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에게 폭력적인 마주침을 가질 수도 있고 나에게 해가 되는 마주침을 가질 수 있고 나의 신체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
이성의 첫 번째 측면 :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자연 상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려면 마주침[만남]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혼자서는 나쁜/폭력적인 마주침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성적인 association을 만들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매혹당한다[알튀세, 발리바, 마트롱, 마슈레/네그리 등].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만 자연상태는 살만한 곳이 된다. 모든 나쁜 마주침을 피하지 못하므로 이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으로 정의상 최대한의 기쁜 변용에 도달할 권리가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본성상 비슷한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association을 형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유익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일 수 밖에 없고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은 인간들의 연합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윤리적 차이 : 이성적이고 자유롭고 강한 인간
모든 존재자들이 각자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자연에는 윤리적 차이가 있다. 이성적인 사람과 무분별한 사람의 차이, 현자와 무지한 사람의 차이,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 강자와 약자의 차이. 이것들은 다 등가적이지만 차이가 있다. 윤리적 차이는 이들의 코나투스/욕구/욕망을 결정하는 변용의 종류에 관한 것이다. affection이 다르다. 마지막에 가서는, ‘자유롭고 강하고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의 작용 역량의 소유, 그리고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변용의 내적인 현존[자기 안에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변용이 있다]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작용 역량의 소유는 사실은 정의상, 원칙적, 권리상으로 그런 것이지 실재로 소유하지는 못한다. 소유에 가까워질 뿐이다. 완전한 소유는 없다. 이성적이 되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은 인생의 막바지/말년에 가서야/죽기 직전에 가능하다. 노예 또는 약자는 부적합한 관념을 갖고 부적합한 관념에서 파생되는 정념만 갖는다. 윤리적 차이는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예비적인 층위가 있다. 능동과 수동이 있고 수동 중에서는 기쁜 수동/변용과 슬픈 수동/변용이 있다. 자유롭고 강한 인간은 기쁜 변용들,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변용들을 갖는다. 노예 또는 약자는 슬픈 정념, 그들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키는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변용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성 또는 자유의 두 시기/단계를 구별해야 한다. [1] 최대한의 기쁜 수동적 변용들을 맛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시기/단계. 수동적 변용 중 기쁨을 늘리려는 단계 [2] 작용 역량이 아주 커져서 능동적인 변용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 시기/단계.
아담
기독교, 이성주의, 합리주의 전통에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은 가장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죄를 짓고는 완전성을 상실한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아담은 가장 불완전한 상태의 존재로 무능하고 예속된 상태, 무분별한 인류의 유년기에 해당한다. 아담은 마주침의 우연에 몸을 맡기는, 조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슬프고 약하고 노예적이고 무지한 존재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이성적인,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은 없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에 약했기 때문에 원죄 신화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상상력만 강하고 지성의 힘이 약한 사제처럼 헛된 상상만 하고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의 무능을 보여준다. 그는 지성의 힘, 사유하는 힘, 자연법칙을 이해하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시를 자연법칙이 아니라 금지 도덕법칙으로 상상했다.
자연 상태와 이성 상태
이성 상태와 자연 상태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1] 자연 상태는 이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별개의 상태, 다른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이성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데 자연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다. 두 상태가 상충되거나 충돌할 수 있다. [2] 이성 상태는 자연 상태와 다른 차원/질서가 아니다. 이성은 자연 또는 본성에 반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은 인간이 자신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킴으로써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이다. 이성 상태는 자신의 역량에 상응하는 자연권을 향유하는 고등한 신체와 영혼의 형성이다. 두 개체가 자신들을 합성하는 비比들을 모두 합성시키면, ‘두 배 더 큰 자연권을 갖는 두 배 더 큰 개체’가 만들어진다. 가장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두 개의 개체가 있다고 상정할 때 이 둘이 완벽하게 비들이 맞아 합쳐지면 더 큰 역량을 갖는/큰 자연권을 갖는 상위의/우월한 개체를 형성할 수 있다. 이 대목이 코뮨주의자들이 열광했던 부분이다. 이성 상태는 자연권을 조금도 박탈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성 상태는 자연권의 차수를 올린다.[자연권을 적분한다]
▶ elever à puissance 2 : 22
두 개의 개체가 미분소 상태로 있다. 이 미분소 두 개가 합쳐서 적분이 되면 1차 방정식이 2차 방정식이 되듯 차수가 높아진다. 들뢰즈가 간혹 수학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가져다 쓰는데 번역할 때 놓치는 경우가 많다.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녹색이 있다고 치자. 노랑과 파랑은 지각될 수 있지만 노랑과 파랑 각각의 지각은 한없이 작아져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노랑과 파랑이 녹색을 규정하는 미분비에 들어간다. 두 개의 신체가 합성이 되어 하나가 된다면 그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의 신체를 규정하는 지각이 한없이 작아져서 두 신체가 제3의 신체를 규정하는 미분비 속에 들어간다. 노랑과 파랑도 자기 나름대로 이미 규정되어 있지만 포착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의식에서 빠져 나가 dj/db에 각각 들어간다. 이 둘의 관계는 미분관계이지만 이 미분관계를 맺어서 제3의 신체를 형성하는 것은 적분이다. 이것으로 들뢰즈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파도의 지각, 허기도 이렇게 설명한다. 개별적인 허기가 있다. 소금이 부족해서 느끼는 소금 허기를 비롯해 단백질 허기, 탄수화물 허기 등이 각각 미분관계에 들어가서 어느 순간 총괄적인 허기가 되고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미분관계에 들어가 적분이 되면 global한 허기가 된다. 미세지각들은 의식이 발생하기 위한 발생적 요소/필요조건이다. 의식의 미분소다. 포스트칸트주의자인 마이몬, 피히테 등도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라이프니츠를 가져와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설명의 준거로 삼았다.
이성적 지각이 도래하려면 이전에 거대/거시 지각[=의식적 지각]을 무너뜨리고 다음의 거대지각을 예비하는 미세지각들의 무한집합을 적분해야 한다. 미세지각들의 적분이 의식적 지각을 발생시키고 다른 미세지각들이 이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의식적 지각을 발생시킨다. 미분이 되고 적분이 되고 이것이 반복된다.
▶ 이 책에서 비실재적인 것은 actual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에게 real은 actual과 actual하지 않은 것 모두를 포괄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real과 actual이 혼용되거나 혹은 다른 책하고 다르게 쓰인 경우가 발견된다.
▶ puissance잠재태, 역량 /acte 현실태, 행위 :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잠재태가 곧 가능태다. 이처럼 쿠자누스 이전 사람들에게 puissance는 오늘날의 possible, acte는 real에 해당한다. 쿠자누스 이후에는 puissance가 acte가 된다. 들뢰즈는 possible과 real을 구별하고 real에서 잠재태와 현실태를 나눈다. 이때 잠재태는 현실화되지 않지만 항상 있는 것이다.
이성의 노력을 돕는 심급의 필요성
인간들은 어떻게 합성되는 비比 아래서 서로 마주치고 이성적 연합을 형성하는데 도달할 수 있느냐? 이성과 제휴하고 이성의 형성을 예비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다른 종류의 역량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 또는 도시의 역량이다.
도시 : 시민 상태와 이성 상태의 차이점과 유사점
도시=시민 상태, 사회 상태는 이성적 연합=이성 상태와 다르다. 1° 도시의 형성 동기는 희망과 공포다. 이성의 변용affection/감정[이성적으로 느끼는 감정]/자기 변용[passion적인 요소를 다 걷어내고 이성이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 오로지 원인이 자기 안에만 있는 것]은 우리의 비比와 완벽하게 합성되는 비比 아래서 다른 인간에 의해 우리 안에 생산된 변용이다. 2° 이성의 이상理想으로서의 전체tout는=이성적 연합은 합성되는 비比, 자연적으로 더해지는 역량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것은 이상적인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양도하고 각각의 개인들이 포기한 권리들의 합으로 혜택을 받는 자가 있다. 3° 이성은 윤리적 구별의 원리다. 윤리적 구별은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를 말한다.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사람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구별의 원리가 이성이다. 시민 상태는 그렇지 않다. 시민 상태에서는 법에 대한 복종 여하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들과 부정의한 사람들을 구별한다.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권리를 각자 갖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맡긴다.
도시와 이성의 이상理想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스피노자는 도시를 집합적 인격, 공통의 신체와 공통의 영혼, “같은 사유에 의해 인도되는 대중”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코뮨이다. 또한 이것은 사회계약론이나 홉스가 이야기하는 제3자가 아니라 상위의 신체, 더 큰 신체에 해당한다. 즉 두 개의 신체가 합쳐져 두 배 더 큰 하나의 신체가 되는 경우 또는 노랑과 파랑이 합쳐 초록이 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좋은 도시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도시나 마찬가지로, 본성을 변질[타락]시키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따금 감지할 수 없는 많은 원인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좋은 도시라면 이런 것들이 이야기될 수 있다. 자연권의 포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적 변용에 따라 결정/결심[인간의 경우, determination]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통적이고 집합적인 변용을 따른다. 더 큰 신체가 되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된다. 핵심은 공통적 집합적 변용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개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며,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고 자신의 이익을 돌보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즉 개개인은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거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권을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권을 보존한다. 다른 한편, 이성의 변용은 도시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식하고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역량은 양도 불가능한 자연권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을 위태롭게 하는 순간에 폭력 관계가 복원된다. 어쨌든 도시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며, 이성적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다.
윤리학은 능력과 역량의 견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 윤리와 도덕의 대립
참된 자연 법칙들은 능력의 준칙들normes이다. 능력의 준칙은 합성되는 비 아래에서 신체가 마주쳐 역량이 증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맞는 것과 합성되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피하려고 하고 합성되는 비를 가진 신체와 마주침을 조직하려고 하는 것이 이성의 준칙이고 능력의 준칙이다. 도덕 법칙은 일종의 신비화/미신화[ 집단기만]를 내포한다.도덕법칙은 자연법칙이나 삶의 준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덕적인 금지나 의무로 해석한다. 우리가 자연 법칙, 다시 말해 삶의 준칙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그것을 지시와 금지로 해석하게 된다. 물론 이성의 준칙/규범/규칙/계명만 봐도 의무가 아니라 영혼의 힘과 작용 역량에 관한 삶의 준칙들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성의 준칙이 평범한 도덕 법칙과 일치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윤리학은 감정과 행동과 의도를 초월적 가치에 관계시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행정, 의도가 전제하는 혹은 내포하는 실존 양식에 관계시키는 것이다. 노예적인 실존양식이냐, 자유인의 실존양식이냐의 차이다. 내재적 실존 양식에 의한 설명 방법이 초월적 가치에의 의존을 대신한다. 들뢰즈는 이것이 윤리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니체와 철학』에서도 윤리적 차이로서 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에 주목한다.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기
할 수 있는 것=역량의 끝까지 가는 것은 고유하게 윤리적인 과제[임무]다. 자기 능력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1] 작용 역량이 증가하도록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능동적인 역량을 증가하는 쪽으로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기쁨을 더 많이 느끼는 기쁜 수동적 변용을 늘리는 것이다. [2] 능동적 변용들을 생산할 정도로까지 이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철학의 실천적 의의
이러한 윤리적 착상[윤리적 세계관]에는 근본적인 비판적 측면이 있다. 모든 신화, 모든 신비화[집단기만], 모든 미신을 비판하는 데 있다. 미신은 우리를 우리의 작용 역량과 분리시킨다. 미신의 원천은 슬픈 정념의 연쇄, 공포, 공포와 연쇄되는 희망, 환상으로 인도하는 불안이다. 루크레티우스처럼 스피노자도 미신에 대한 비판, 슬픔에 대한 가치 절하, 슬픔에 대한 고발을 실천했다. 들뢰즈에게 사제와 권력자와 노예는 삼위일체다. 권력자는 인민들의 슬픔을 필요로 하고 사제는 그 슬픔을 전파하고 노예는 그 슬픔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슬픔을 매개로 한 삼자동맹인 것이다. 슬픈 정념들의 가치절하/평가절하, 슬픈 정념을 배양하는 사제와 이용하는 권력에 대한 고발이 철학의 실천적 대상이다. 에티카에 따르면 슬픔은 모두 나쁘고 우리를 노예로 만들며, 슬픔을 함축하는 모든 것은 폭군=전제군주를 표현한다.
긍정과 기쁨
에티카 4부의 주석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기쁨과 기쁜 정념에 근거하는 고유하게 윤리적인 인간 개념[인간관]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슬픔의 정념에만 근거하는 미신적 또는 풍자적 인간관/인간개념과 대립시킨다. 그는 풍자에는 슬픔이 기본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이용하는 슬픈 정념을 불러일으킴으로써만 지배[군림]할 수 있는 억압적 권력자들을 고발한다./들춰낸다.
슬픔을 함축하는 한에서 모든 정념은 그 자체로는 나쁘다. 기쁜 변용에 더 많이 의지할수록 도시는 그만큼 더 좋다. 자유에 대한 사랑이 더 우세해야 한다. 이성의 유일한 계명은 최대한의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의 능동적 기쁨과 연쇄시키라는 것이다. 결국 수동적 기쁨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능동적인 기쁨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오직 기쁨만이 우리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수동적 변용이요, 오직 기쁨만이 능동적 변용이 될 수 있다. 기쁨과 실천의 관계는 긍정 자체와 사변의 관계와 같다. 실천에서의 기쁨과 사변/사색에서의 긍정은 같은 관계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사변적 긍정과 실천적 기쁨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순수 긍정의 철학이면서 이 긍정에 상응하는 기쁨의 철학이다.
20210129스피노자와표현문제
16장 윤리적 세계관
영혼과 신체의 능동-수동 반비례 원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선언은 중요하다. 기존 철학자들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전통철학에 따르면 감각은 착각/가상illusion을 발생시킨다. 이 가상을 해소하려면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감각, 즉 신체에서 착각에 의해 illusion이 생기므로 결국 오류의 원천은 감각/신체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 혹은 정신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신체와 영혼이 다르지 않다. 이성 혹은 정신에 의해 신체를 교정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한편 전통철학에 따르면 신체는 영혼의 주의를 흩뜨리고 영혼이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하게 한다. 이러한 도덕적인 세계관을 지배하는 원리는 영혼과 신체 중 하나가 작용할 때 다른 하나는 작용을 받는다는 데에 있다. 데카르트의 실재적 작용 원리에 따르면 신체와 영혼 둘 사이에는 실재적 작용이 가능하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도 비슷하다. 영혼과 신체가 작용을 주고 받는데 영혼이 신체의 일탈행위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혼과 신체의 능동-수동 반비례 원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대 : 평행론의 실천적 의의
평행론이 독창적 이론이라면 그 이유는 실재적 작용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쪽의 능동이 다른 한쪽의 수동이라는 도덕적 원리를 뒤집기 때문이다. 영혼에서 수동passion인 것은 신체에서도 수동이고, 영혼에서 능동action인 것은 신체에서도 능동이다. 신체에 대한 영원의 우월성, 고차성, 목적성은 배제된다. 영혼이 신체를 교정한다고 할 때는 목적의식 같은 것이 있는데 스피노자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없다. 신체의 계열과 영혼의 계열을 맞추기 위해 신의 초월성을 도입하는 경우가 있다. 신체와 영혼의 계열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신을 불러들인다. 기회원인론이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도 그러하다. 칸트도 마찬가지다. 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면 영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르면 신체가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작용하고 작용 받는 소질[능력]이 클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그만큼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다. 신체의 역량이 크면 클수록 영혼 또는 정신의 역량도 그만큼 크다. 신체의 역량은 작용을 하고 작용을 받는 역량이고 영혼의 역량은 지각하는 역량이다. 신체의 작용이 자신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외부 원인에 의존하지 않을수록] 정신은 그만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역량의 견지에서 사유하기 위해 신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모델이 된다. 이 모델은 연장에 비해 사유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비해 의식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사유가 훨씬 더 넓은 지평이다. 의식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사유는 속성으로 의식과 무의식, 감정, 영혼, 정신 등 신체적이지 않은 모든 것=비신체적인 것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신체의 능동-수동은 영혼의 능동-수동과 나란히 간다고 하는 역량 이론은 윤리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평행론의 귀결은 도덕을 윤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자연권 : 역량과 권리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신체적[물질적] 개체와 종種과 유類의 새로운 개념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물음의 생물학적 의미는 17장과 18장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개체를 정의할 때는 개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유나 종과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개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밭 가는 말과 경주하는 말의 관계보다 밭 가는 말과 밭 가는 소의 관계가 더 가깝다. 할 수 있는 게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16장에서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갖는 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만을 이야기한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체의 자연권이다. 자연권 이론은 이중적 동일성을 갖는다. 즉 능력과 능력 실현/행사effectuation는 같다. 또한 이 능력 실현/행사는 권리와 같다. 종전에는 능력은 결핍의 상태, 즉 잠재태로서 현실태로 이행해야 완전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능력은 곧 능력의 실행/행사이다. 실행되지 않는 능력은 없고 그것은 매순간 실행된다. 또한 능력을 실행/행사하는 것은 능력을 가진 자의 권리이다. 법/법칙이란 말은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자연 법칙[자연법]은 능력의 준칙norme이다. 즉 권리와 능력과 능력 실현은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자와 무분별한 사람, 이성적인 사람과 심신상실자, 강자와 약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 생각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같다는 얘기인가? 자연권의 차원, 각자 자기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변용의 종류에 차이가 있다. 변용에 따라서 역량도 다르고 역량에 따라서 권리도 다르다.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려고 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변용이 다르기 때문에 노예라는 조건에서만 말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자유인의 조건에서만 말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자연권과 고대 자연법의 네 가지 대립
키케로에 따르면, 고대의 자연법 이론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1° 어떤 존재의 본성을 그것의 완전성에 의해 정의한다. 여기서 본성=본질은 실현되지 않은 본질이다. 이것을 실현하려면 의무가 필요하다. 의무는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태어나면서부터/천성상으로/본성상으로] 이성적이고 사회적이다.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한다. 이것을 교정해야 한다. 2° [홉스나 사회계약론의 자연상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소한 것인데], 자연 상태는 본성에 부합하는 이성적 삶이다. 자연상태는 본성 상태이기도 하다. 좋은 사회란 자연에 부합하는 삶, 사회 상태 이전의 상태가 아니다.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상정한 고대 도시국가처럼 자신 본성에 따라 살고 이성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회다. 3° 자연 상태에서 일차적인 것은 의무다. 왜냐하면 본질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능력들은 잠재태이므로 자연적 능력들이 봉사해야 하는 목적에 따라서 이 능력들을 결정하고 실현하는 이성의 행위와 뗄 수 없다. 여기서 자연적 능력은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나는 능력을 말한다. 4° 현자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의무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자이다. 현자는 각자에게 돌아가는 활동과 직무의 최선의 판단자다. 들뢰즈는 강의를 통해 고대 자연법이론의 네 가지 명제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1) 사물은 본질에 따라 정의되고 그 본질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정의한다. 2) 자연법칙은 전(前)사회적이지 않다. 자연법칙은 가능한 좋은 사회에서 본질에 부합하는 삶이다. 3) 의무는 본질을 실현하는 조건이므로 일차적인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4) 따라서 성직자이든 군주이든 현자이든 우월한 누군가한테 권한이 있다.
키케로의 테제에 대비해 홉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자연 법칙은 목적론적 완전성에 관계되지 않고, 일차적 욕망, 즉 가장 강한 욕구에 관계된다. 들뢰즈는 강의에서 ‘사물은 본질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역량에 의해 정의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욕구가 역량이고 코나투스이고 곧 자연권이다. 역량이 곧 자연권이다. 고대 자연법 이론에서 사물을 본질에서 정의한다면 홉스는 역량에서 정의한다. 2° 이성은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자연 상태는 사회 이전 상태이다. 고대철학에서는 좋은 시민 사회에서 본질에 부합하는 상태가 자연 상태이다. 하지만 홉스에 따르면 누구도 이성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종교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종교 이전, 사회 이전 상태가 자연 상태다. 3° 고대자연법에서 일차적인 것이 의무였다면 홉스에게서는 능력 또는 권리다. 의무는 역량의 긍정, 능력의 행사, 권리의 보존에 비해 이차적이다. 고대자연법 테제에서는 본질이 잠재태였고 실현해야 했다. 홉스에게는 역량 자체가 현실태이다. 4° 권한은 오직 나한테만 있다. 나의 권리에 대해 결정을 내릴 권한이 누구에게도 없다. 각자 자신에게 있다.우리가 우리의 자연권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자의 권한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더 큰 악에 대한 공포나 더 큰 선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우리가 동의해서이다. 더 큰 악에 대한 공포와 더 큰 선에 대한 희망이 사회 형성의 동기다.
자연 상태와 마주침에 맡겨짐
자연 상태는 인간이 살만한 상태가 아니다. 홉스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은 큰 물고기의 권리라고 보았다. 내가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의 권리라고 보았다. 자연 상태는 무서운 곳이고 살만한 곳이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우연한 마주침에 따라 되는대로 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에게 폭력적인 마주침을 가질 수도 있고 나에게 해가 되는 마주침을 가질 수 있고 나의 신체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다.
이성의 첫 번째 측면 :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
자연 상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려면 마주침[만남]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혼자서는 나쁜/폭력적인 마주침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성적인 association을 만들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매혹당한다[알튀세, 발리바, 마트롱, 마슈레/네그리 등].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만 자연상태는 살만한 곳이 된다. 모든 나쁜 마주침을 피하지 못하므로 이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으로 정의상 최대한의 기쁜 변용에 도달할 권리가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본성상 비슷한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association을 형성해야 한다. 자신에게 유익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일 수 밖에 없고 마주침을 조직하려는 노력은 인간들의 연합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윤리적 차이 : 이성적이고 자유롭고 강한 인간
모든 존재자들이 각자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자연에는 윤리적 차이가 있다. 이성적인 사람과 무분별한 사람의 차이, 현자와 무지한 사람의 차이, 자유인과 노예의 차이, 강자와 약자의 차이. 이것들은 다 등가적이지만 차이가 있다. 윤리적 차이는 이들의 코나투스/욕구/욕망을 결정하는 변용의 종류에 관한 것이다. affection이 다르다. 마지막에 가서는, ‘자유롭고 강하고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의 작용 역량의 소유, 그리고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변용의 내적인 현존[자기 안에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변용이 있다]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작용 역량의 소유는 사실은 정의상, 원칙적, 권리상으로 그런 것이지 실재로 소유하지는 못한다. 소유에 가까워질 뿐이다. 완전한 소유는 없다. 이성적이 되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은 인생의 막바지/말년에 가서야/죽기 직전에 가능하다. 노예 또는 약자는 부적합한 관념을 갖고 부적합한 관념에서 파생되는 정념만 갖는다. 윤리적 차이는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예비적인 층위가 있다. 능동과 수동이 있고 수동 중에서는 기쁜 수동/변용과 슬픈 수동/변용이 있다. 자유롭고 강한 인간은 기쁜 변용들,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변용들을 갖는다. 노예 또는 약자는 슬픈 정념, 그들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키는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변용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성 또는 자유의 두 시기/단계를 구별해야 한다. [1] 최대한의 기쁜 수동적 변용들을 맛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시기/단계. 수동적 변용 중 기쁨을 늘리려는 단계 [2] 작용 역량이 아주 커져서 능동적인 변용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 시기/단계.
아담
기독교, 이성주의, 합리주의 전통에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은 가장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죄를 짓고는 완전성을 상실한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아담은 가장 불완전한 상태의 존재로 무능하고 예속된 상태, 무분별한 인류의 유년기에 해당한다. 아담은 마주침의 우연에 몸을 맡기는, 조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슬프고 약하고 노예적이고 무지한 존재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이성적인,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은 없다.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에 약했기 때문에 원죄 신화가 생긴 것이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상상력만 강하고 지성의 힘이 약한 사제처럼 헛된 상상만 하고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의 무능을 보여준다. 그는 지성의 힘, 사유하는 힘, 자연법칙을 이해하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시를 자연법칙이 아니라 금지 도덕법칙으로 상상했다.
자연 상태와 이성 상태
이성 상태와 자연 상태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1] 자연 상태는 이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별개의 상태, 다른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이성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데 자연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다. 두 상태가 상충되거나 충돌할 수 있다. [2] 이성 상태는 자연 상태와 다른 차원/질서가 아니다. 이성은 자연 또는 본성에 반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은 인간이 자신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킴으로써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이다. 이성 상태는 자신의 역량에 상응하는 자연권을 향유하는 고등한 신체와 영혼의 형성이다. 두 개체가 자신들을 합성하는 비比들을 모두 합성시키면, ‘두 배 더 큰 자연권을 갖는 두 배 더 큰 개체’가 만들어진다. 가장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두 개의 개체가 있다고 상정할 때 이 둘이 완벽하게 비들이 맞아 합쳐지면 더 큰 역량을 갖는/큰 자연권을 갖는 상위의/우월한 개체를 형성할 수 있다. 이 대목이 코뮨주의자들이 열광했던 부분이다. 이성 상태는 자연권을 조금도 박탈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성 상태는 자연권의 차수를 올린다.[자연권을 적분한다]
▶ elever à puissance 2 : 22
두 개의 개체가 미분소 상태로 있다. 이 미분소 두 개가 합쳐서 적분이 되면 1차 방정식이 2차 방정식이 되듯 차수가 높아진다. 들뢰즈가 간혹 수학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가져다 쓰는데 번역할 때 놓치는 경우가 많다.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녹색이 있다고 치자. 노랑과 파랑은 지각될 수 있지만 노랑과 파랑 각각의 지각은 한없이 작아져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노랑과 파랑이 녹색을 규정하는 미분비에 들어간다. 두 개의 신체가 합성이 되어 하나가 된다면 그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의 신체를 규정하는 지각이 한없이 작아져서 두 신체가 제3의 신체를 규정하는 미분비 속에 들어간다. 노랑과 파랑도 자기 나름대로 이미 규정되어 있지만 포착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의식에서 빠져 나가 dj/db에 각각 들어간다. 이 둘의 관계는 미분관계이지만 이 미분관계를 맺어서 제3의 신체를 형성하는 것은 적분이다. 이것으로 들뢰즈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파도의 지각, 허기도 이렇게 설명한다. 개별적인 허기가 있다. 소금이 부족해서 느끼는 소금 허기를 비롯해 단백질 허기, 탄수화물 허기 등이 각각 미분관계에 들어가서 어느 순간 총괄적인 허기가 되고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미분관계에 들어가 적분이 되면 global한 허기가 된다. 미세지각들은 의식이 발생하기 위한 발생적 요소/필요조건이다. 의식의 미분소다. 포스트칸트주의자인 마이몬, 피히테 등도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라이프니츠를 가져와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설명의 준거로 삼았다.
이성적 지각이 도래하려면 이전에 거대/거시 지각[=의식적 지각]을 무너뜨리고 다음의 거대지각을 예비하는 미세지각들의 무한집합을 적분해야 한다. 미세지각들의 적분이 의식적 지각을 발생시키고 다른 미세지각들이 이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의식적 지각을 발생시킨다. 미분이 되고 적분이 되고 이것이 반복된다.
▶ 이 책에서 비실재적인 것은 actual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들뢰즈에게 real은 actual과 actual하지 않은 것 모두를 포괄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real과 actual이 혼용되거나 혹은 다른 책하고 다르게 쓰인 경우가 발견된다.
▶ puissance잠재태, 역량 /acte 현실태, 행위 :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잠재태가 곧 가능태다. 이처럼 쿠자누스 이전 사람들에게 puissance는 오늘날의 possible, acte는 real에 해당한다. 쿠자누스 이후에는 puissance가 acte가 된다. 들뢰즈는 possible과 real을 구별하고 real에서 잠재태와 현실태를 나눈다. 이때 잠재태는 현실화되지 않지만 항상 있는 것이다.
이성의 노력을 돕는 심급의 필요성
인간들은 어떻게 합성되는 비比 아래서 서로 마주치고 이성적 연합을 형성하는데 도달할 수 있느냐? 이성과 제휴하고 이성의 형성을 예비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다른 종류의 역량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 또는 도시의 역량이다.
도시 : 시민 상태와 이성 상태의 차이점과 유사점
도시=시민 상태, 사회 상태는 이성적 연합=이성 상태와 다르다. 1° 도시의 형성 동기는 희망과 공포다. 이성의 변용affection/감정[이성적으로 느끼는 감정]/자기 변용[passion적인 요소를 다 걷어내고 이성이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 오로지 원인이 자기 안에만 있는 것]은 우리의 비比와 완벽하게 합성되는 비比 아래서 다른 인간에 의해 우리 안에 생산된 변용이다. 2° 이성의 이상理想으로서의 전체tout는=이성적 연합은 합성되는 비比, 자연적으로 더해지는 역량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것은 이상적인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도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양도하고 각각의 개인들이 포기한 권리들의 합으로 혜택을 받는 자가 있다. 3° 이성은 윤리적 구별의 원리다. 윤리적 구별은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를 말한다.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사람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구별의 원리가 이성이다. 시민 상태는 그렇지 않다. 시민 상태에서는 법에 대한 복종 여하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들과 부정의한 사람들을 구별한다.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권리를 각자 갖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맡긴다.
도시와 이성의 이상理想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스피노자는 도시를 집합적 인격, 공통의 신체와 공통의 영혼, “같은 사유에 의해 인도되는 대중”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코뮨이다. 또한 이것은 사회계약론이나 홉스가 이야기하는 제3자가 아니라 상위의 신체, 더 큰 신체에 해당한다. 즉 두 개의 신체가 합쳐져 두 배 더 큰 하나의 신체가 되는 경우 또는 노랑과 파랑이 합쳐 초록이 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좋은 도시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도시나 마찬가지로, 본성을 변질[타락]시키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따금 감지할 수 없는 많은 원인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좋은 도시라면 이런 것들이 이야기될 수 있다. 자연권의 포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적 변용에 따라 결정/결심[인간의 경우, determination]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통적이고 집합적인 변용을 따른다. 더 큰 신체가 되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된다. 핵심은 공통적 집합적 변용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개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며,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고 자신의 이익을 돌보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즉 개개인은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거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연권을 포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권을 보존한다. 다른 한편, 이성의 변용은 도시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식하고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역량은 양도 불가능한 자연권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을 위태롭게 하는 순간에 폭력 관계가 복원된다. 어쨌든 도시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며, 이성적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다.
윤리학은 능력과 역량의 견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 윤리와 도덕의 대립
참된 자연 법칙들은 능력의 준칙들normes이다. 능력의 준칙은 합성되는 비 아래에서 신체가 마주쳐 역량이 증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나에게 맞는 것과 합성되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피하려고 하고 합성되는 비를 가진 신체와 마주침을 조직하려고 하는 것이 이성의 준칙이고 능력의 준칙이다. 도덕 법칙은 일종의 신비화/미신화[ 집단기만]를 내포한다.도덕법칙은 자연법칙이나 삶의 준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덕적인 금지나 의무로 해석한다. 우리가 자연 법칙, 다시 말해 삶의 준칙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그것을 지시와 금지로 해석하게 된다. 물론 이성의 준칙/규범/규칙/계명만 봐도 의무가 아니라 영혼의 힘과 작용 역량에 관한 삶의 준칙들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성의 준칙이 평범한 도덕 법칙과 일치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윤리학은 감정과 행동과 의도를 초월적 가치에 관계시켜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행정, 의도가 전제하는 혹은 내포하는 실존 양식에 관계시키는 것이다. 노예적인 실존양식이냐, 자유인의 실존양식이냐의 차이다. 내재적 실존 양식에 의한 설명 방법이 초월적 가치에의 의존을 대신한다. 들뢰즈는 이것이 윤리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니체와 철학』에서도 윤리적 차이로서 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에 주목한다.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기
할 수 있는 것=역량의 끝까지 가는 것은 고유하게 윤리적인 과제[임무]다. 자기 능력의 끝까지 간다는 것은 [1] 작용 역량이 증가하도록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능동적인 역량을 증가하는 쪽으로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기쁨을 더 많이 느끼는 기쁜 수동적 변용을 늘리는 것이다. [2] 능동적 변용들을 생산할 정도로까지 이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철학의 실천적 의의
이러한 윤리적 착상[윤리적 세계관]에는 근본적인 비판적 측면이 있다. 모든 신화, 모든 신비화[집단기만], 모든 미신을 비판하는 데 있다. 미신은 우리를 우리의 작용 역량과 분리시킨다. 미신의 원천은 슬픈 정념의 연쇄, 공포, 공포와 연쇄되는 희망, 환상으로 인도하는 불안이다. 루크레티우스처럼 스피노자도 미신에 대한 비판, 슬픔에 대한 가치 절하, 슬픔에 대한 고발을 실천했다. 들뢰즈에게 사제와 권력자와 노예는 삼위일체다. 권력자는 인민들의 슬픔을 필요로 하고 사제는 그 슬픔을 전파하고 노예는 그 슬픔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슬픔을 매개로 한 삼자동맹인 것이다. 슬픈 정념들의 가치절하/평가절하, 슬픈 정념을 배양하는 사제와 이용하는 권력에 대한 고발이 철학의 실천적 대상이다. 에티카에 따르면 슬픔은 모두 나쁘고 우리를 노예로 만들며, 슬픔을 함축하는 모든 것은 폭군=전제군주를 표현한다.
긍정과 기쁨
에티카 4부의 주석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기쁨과 기쁜 정념에 근거하는 고유하게 윤리적인 인간 개념[인간관]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슬픔의 정념에만 근거하는 미신적 또는 풍자적 인간관/인간개념과 대립시킨다. 그는 풍자에는 슬픔이 기본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이용하는 슬픈 정념을 불러일으킴으로써만 지배[군림]할 수 있는 억압적 권력자들을 고발한다./들춰낸다.
슬픔을 함축하는 한에서 모든 정념은 그 자체로는 나쁘다. 기쁜 변용에 더 많이 의지할수록 도시는 그만큼 더 좋다. 자유에 대한 사랑이 더 우세해야 한다. 이성의 유일한 계명은 최대한의 수동적 기쁨을 최대한의 능동적 기쁨과 연쇄시키라는 것이다. 결국 수동적 기쁨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능동적인 기쁨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오직 기쁨만이 우리의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는 수동적 변용이요, 오직 기쁨만이 능동적 변용이 될 수 있다. 기쁨과 실천의 관계는 긍정 자체와 사변의 관계와 같다. 실천에서의 기쁨과 사변/사색에서의 긍정은 같은 관계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사변적 긍정과 실천적 기쁨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순수 긍정의 철학이면서 이 긍정에 상응하는 기쁨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