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2스피노자와표현문제
15장 세 가지 질서와 악의 문제
▶ determination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결정의 의미 : A는 B가 ~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 경우 A는 B 행위의 원인이다[기계론적 인과법칙, 운동 전달 법칙]. 그래서 결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2) 규정의 의미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주체chose’이다.”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규정, ‘나는 존재한다’는 미규정(I am~),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는 규정된 것이라 본다. 이때 규정은 한정의 의미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소크라테스가 개도 고양이도 외계인도 아니고 사람인 것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대상의 성격을 한정한다. 그런데 ‘~~다’에 해당하는 보어, 술어, 빈사/빈어가 늘어날수록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의 범위는 줄어든다. 반비례 관계다.
▶들뢰즈의 경우, composition이 combination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au sens fort mot 말의 본래 뜻으로] 두 개의 신체가 합성되어 하나의 신체를 합성할 때 쓴다. 예를 들어 카일과 림프 각각의 비가 있으면서 제3의 비의 상위의 개체를 형성할 때 쓴다. 이때 combination을 쓰지는 않는다.
▶variation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원뿔곡선이 원 혹은 타원 혹은 쌍곡선이 될 때 이것들을 모두 varit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는 변동이 아니라 변이형이라 해야 한다. 2) 변용 능력이 동일한데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이 반비례해서 달라진다고 할 때는 변동이라고 해야 한다.
▶ratio 비? 관계? rapport constitutive를 해석할 때 ‘구성 관계’는 어색하다. 구성비라고 하는 게 무난하다. 관계로 해석하는 근거는 비라고 하면 정해진 숫자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는 양을 상상하는 방식이고 허구이다. 이 비는 양적인 것으로 탄성을 갖는다
▶ 스피노자에게 무의식? 스피노자에게는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무의식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한히 많은 역량’이 무의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작은 지각’이라며 무의식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두 사람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무의식 이론은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보는데 그는 의식과 무의식을 대립 관계로 파악했다. 반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섬과 같은 것이 의식이라고 보았다. 융에게는 그것이 원형이다. 들뢰즈는 융을 프로이트보다 훨씬 높게 평가한다.
전 우주의 얼굴
속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먼저, 자신의 절대적 본성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직접 무한 양태), 그 다음 변양된 것으로서 자신을 표현하고(간접 무한 양태), 끝으로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실존하는 유한 양태). 직접 무한 양태는 연장에서는 운동과 정지이고 사유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다. 간접 무한 양태는 연장에서는 전 우주의 형상figure[=라틴어 facies, 얼굴]로 실존양태들의 결정을 규제하는 운동과 정지 비들의 집합/총합이다. 사유에서는 실존양태들의 관념들로서의 관념들의 결정을 규제하는 관념의 비이다. 즉 간접 무한 양태에는 ‘비’가 들어가고 이것은 실존 양태들과 관련된다.
운동과 정지의 비比[간접 무한 양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양태들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두 번째는 외연적 부분들[유한양태, 실존양태]을 일시적으로 포섭하는 것. 운동과 정지의 비는 본질과도 관련되고 실존하는 유한양태하고도 관련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첫 번째 관점에서는 운동과 정지는 모든 비를 포괄하는데, 속성 안에 있는 본질을 포함한다.
▶운동과 정지의 동시적 내재성[immanence]: 내재성을 영어로 presence로 번역한 것은 co-presence/공현존의 의미일 것이다. 운동 안에 정지가 있고 정지 안에 운동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정지는 운동의 극한이라고 말한다. 사실 정지는 없는 것이고 무한히 작은 운동으로 0에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는 다양한 비比들이 외연적 부분들의 무한 집합을 결집시킨다./무리를 짓는다. 이때 이 비比들은 양태들이 실존으로 이행하는 조건을 결정한다. 이 비比들 각각이 실존 개체의 형식[형상form]을 구성한다. 외연적 부분들 자체에는 form이 없다. 이 외연적 부분들이 무한집합을 이루어 어떤 비를 구현할 때 form을 갖고 개체를 이룬다. 이때 비는 개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런데 모든 비는 다른 비比 안에 합성되고 제3의 비比 아래서 상위 정도[등급]의 개체를 형성한다. 가령 우리 신체만 봐도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이 있고 또 그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이 있다. 이와 반대 방향으로 가면 나의 신체를 포함한 다른 많은 신체들을 형성하는 공통의 상위 신체에 있다. 이렇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전 자연, 전 우주가 거대한 하나의 신체에 이르게 된다,. 비의 차원에서 보면 비들이 합성이 되어서 제3의 비를 형성하고 그 비들이 다시 합성이 되어 제3의 비를 형성하면서 계속 올라가면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비가 있다. 우주 전체는 단 하나의 실존 개체다. 이 개체는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하지만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전 우주의 얼굴facies totius universi”이다.
▶ ‘운동과 정지의 총비율’에서 비율을 들뢰즈는 proportion이라고 쓴다. ‘운동과 정지의 비’에서 비는 rapport라고 쓴다. proportion와 rapport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rapport를 굳이 관계라고 다르게 번역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두 비比는 합성될 수 없는가
모든 비比들은 무한하게 합성되어 전우주의 얼굴을 형성한다. 그런데 비比들은 아무렇게나 합성되지 않는다. 아무 비比가 다른 아무 비比와 합성되지는 않는다. 비比는 부분들을 포섭하기 시작할 때 합성되고, 부분들을 포섭해서 비가 구현되기를 멈출 때 분해된다. 분해와 파괴는 ‘두 비比가 직접 합성되지 않는 경우, 둘 중 하나의 비比에 포섭되었던 부분들이 다른 비比의 부분들을 첫 번째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몸 속에 독이 들어와 혈액을 파괴할 때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들이 독의 비와 합성되는 비 아래 들어간 것이다. 배탈, 병 등은 우리 신체의 부분들이 다른 신체의 비 아래 들어간 것인데 이렇게 보면 분해나 파괴는 없는 것이다. 다른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比들의 질서[order차원]에서 모든 것은 합성이다. 분해나 파괴는 없다. 죽어서 썩어 시체가 되면 미생물들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생성이다. 독이 피를 분해할 때, 그것은 단지 피의 부분들이 독의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이 된 것이다. 분해는 합성의 이면이다. 분해와 파괴를 이야기하려면 비의 질서가 아니라 마주침/만남의 차원에서의 외연적 부분들이 문제가 된다. 실존하는 물체들은 그 자체 외연적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기 때문에 차츰차츰/부분부분으로 마주친다. 따라서 둘 중 한 물체의 부분들이 다른 비比를 취하도록 결정될 수 있다. 이 때 분해나 파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양태의 트라이어드에 대응하는 세 가지 질서 : 본질, 비比, 마주침
본질=역량 정도, 비比=힘, 마주침=기계론. 비比의 질서는 그 자체로 하면 순전히 합성의 질서다. 비 자체로 보면 합성만 있는 것이다. 이 비比의 질서가 파괴를 결정한다면 이것은 물체들/ 혹은 신체들이 비比의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마주침의 질서]에 따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의 질서”라는 개념은 복합적이다. 세 층위가 있다.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이 본질이 표현되는 비比, [3] 이 비比 아래 포섭된 외연적 부분들. 이 층위들 각각에 자연의 질서가 대응한다. 자연에 질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역량 정도들에 의해 규정되는, 본질들의 질서가 있다. 이 질서는 총 화합[=일치, 어우러짐, 무한히 많은 흰색의 degré]의 질서다. 둘째, 비比들의 질서는 사뭇 다르다. 법칙에 따른 합성의 질서다. 모든 비가 무한하게 합성되지만 아무 비가 다른 아무 비와 합성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마주침의 질서가 있다. 이것은 부분적이고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화합과 불화의 질서다. 실존하는 물체들은 외연적 부분들에 의해 부분부분 만나기 때문에 안 맞을 수 있다. 서로 만난 두 개의 물체가 합성되는 비比를 갖고 있으면 화합이 되고 합성되지 않아서 하나가 다른 것의 비比를 파괴할 때 불화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음식물이 몸 속에 들어와서 신체의 특징적 비 아래 포섭이 되어 합성이 일어나면 화합이나, 음식의 관점에서 보면 파괴이고 불화다. 음식물은 파괴되면서 슬퍼하고 그것을 먹은 인간은 기뻐한다. 이 마주침의 질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결정한다/규정한다. [1] 어떤 양태가 언제 실존으로 이행하는지, [2] 이 양태가 실존을 지속하는 기간, [3] 이 양태가 언제 죽거나 파괴되는지. 마주침의 질서는 외연적 부분들끼리 서로 작용을 주고 받으면서 결정된다. 마주침의 질서는 “자연의 공통 질서”의 하나인 동시에 “외생적extrinsèques 규정”[↔ 내생적intrinsèque 규정=본질]과 “우연한 마주침”의 질서이자 수동/정념들의 질서다.
스피노자에게 우연한 마주침이란 테마의 중요성
마주침의 질서는 공통 질서이다. 모든 실존 양태들이 그것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동/정념들과 외생적 규정들의 질서이다. 우리가 만나는 외부 물체들에 의해 일어나는/생산되는 변용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부 물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수동적인 질서다. 끝으로, 그것은 “우연한 마주침들”(fortuitus occursus)의 질서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과 대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우발성contingence은 없다. 마주침의 질서는 나름대로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 마주침의 질서의 필연성은 외연적 부분들의 필연성이고 외연적 부분들의 외적 결정의 필연성이다. 하지만 비比들의 질서에 비해 우연적이다. 여기서 우연성은 상대적 우연성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는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만남의 구성의 비만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세 번째 질서의 존재는 온갖 종류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마주침의 질서와 비比들의 질서는 같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합성되는 비比를 가진 신체들의 마주침 ─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다 혹은 돕다
“마주침”의 두 가지 경우가 구별되어야 한다. 첫 번째 경우, 나의 비比와 합성되는 비比를 가진 물체와 마주친다. 이 때 ① 나의 본성과 합치하는/부합하는 변용이 일어나면서 ② 기쁨을 느낀다. 동시에 ③ 우리의 작용 역량=활력을 증가시키거나 돕는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므로 여전히 수동적인 변용이고 무능한 상태다. 이것을 또 나누면, ① 마주친 물체가 나를 합성하는 비들 중 하나와 합성하는 경우가 있다. ② 두 물체의 특징적 비가 전체와 전체끼리 잘 맞으면 제3의 비가 형성된다.
▶ 나와 잘 맞는 물체와 합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défaut=기본값이다. 이것을 막는 장애물들이 존재하는 바, 이것을 뚫고 나가는 것이 능동적 변용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고 혁명인 것인 바, 이것이 défaut에 해당된다. 본래 무의식적인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관념, 규범, 도덕을 비롯한 권력장치가 막고 있을 때 굳이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도 뚫고 나가려는 성향을 갖는다.
어떻게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의 구별에 기쁜 정념과 슬픈 정념의 구별이 더해지는가?
기쁨을 느끼면 우리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어떤 것을 욕망하도록, 다시 말해 상상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결정한다. 이것이 코나투스이다. 기쁨이라는 감정 자체가 본성과 맞는 어떤 것을 욕망하도록 만든다. 기쁨의 감정이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고 이 기쁨 자체와 이 기쁨을 안겨주는 대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욕망하고 상상하고 행하도록 결정한다. 기쁨의 감정에 의해서 더 큰 기쁨을 느끼기 위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과 기쁨이 연쇄되고 다른 정념들과 사랑이 연쇄된다. 『에티카』에 따르면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과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있다.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서로 연쇄가 되는 경우에 우리의 작용 역량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변용 능력이 실행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작용 역량을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100%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합성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물체들 간의 마주침
두 번째 경우는 나의 비比와 합성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물체와 마주칠 때. 이때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나의 본성에 반反하는 수동적 변용이 내 안에서 생산한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슬픔의 감정으로 나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킨다.
슬픈 정념과 자연 상태
그 자체로서의 본질들 사이에는 투쟁, 갈등, 대립이 없다. 양태들의 투쟁은 본질들의 투쟁이 아니다.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변용들은 서로 연쇄되면 우리의 작용 역량이 점점 감소하고 역량의 가장 낮은 정도로 향해간다. 그러나 이 관점은 권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여전히 추상적이다. 변용의 두 선(기쁜 변용들의 선과 슬픈 변용들의 선)은 부단히 서로 간섭한다.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의 연쇄와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의 연쇄가 완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부단히 간섭한다. 어떤 대상이 슬픔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기쁜 정념들을 경험하게 되는가?
우리가 실존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좋은 마주침을 가질 기회가 사실은 별로 없다. 아주 가끔씩만 좋은 마주침을 갖고 아주 자연스럽게 기쁨을 겪게 된다. 이것이 자연적인 우리의 실존의 조건이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좋은 마주침을 가질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다. 기쁨에는 부분적 기쁨과 간접적 기쁨이 있다. 부분적 기쁨은 어느 한 부분에서 역량이 증가하는데 비해 다른 많은 부분들에서는 역량이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간접적 기쁨은 내가 싫어하는, 나랑 맞지 않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주의의 첫 번째 원리, 즉 수동/정념과 능동/작용,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대립이 출발점이다. 이것은 거의 실질적 대립이다.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 작용 받는 역량과 작용하는 역량의 비율이 반비례하면서 변동한다. 더 심층으로 가면 실질적 대립은 그저 부정/제한일 뿐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단지 본질의 제한이고 작용 역량의 제한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수동적 변용들은 작용 역량의 가장 낮은 정도들을 함축한다. 수동적 변용도 나름은 우리의 작용 역량이지만, 함축된 역량이고 표현되지 않은 역량이고 펼쳐지지 않은 역량이다[역량에 제한이 가해진 상태]. 수동적 변용들도 나름대로는 우리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지만 이 능력을 최소화시킨다. 우리의 작용 역량이 수동적 변용의 흔적에 매달린다. 가령, 감기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 역량이 거기에 집중되면서 기운이 없고 졸린 상태가 된다.
능동/작용들과 수동/정념들의 대립 때문에 스피노자주의의 두 번째 원리를 구성하는 다른 대립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능동과 수동의 대립이 있고 수동 안에 기쁜 변용과 슬픈 변용이 있다. 수동적 변용 중에서 기쁨을 도약대로 삼아서 다음 단계, 2종인식, 능동적 단계로 점프를 해야한다. 우리가 기쁨으로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의 작용 역량에 가까이 다가간다. 수동적이지만 기쁜 변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수동적 변용이다. 어떻게 우리는 능동적 변용을 생산하는데 도달하는가? 이 이전에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기쁜 수동적 변용을 최대한 많이 늘려야 하는가?
선악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
악은 작용 역량의 감소와 비比의 분해이다. 악은 한 양태를 특징짓는 비比의 파괴 또는 분해다. 따라서 악은 어떤 실존 양태의 특수한 관점에서만 말할 수 있다.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다. 각각 양태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쁜 것은 악이다. 그것이 양태마다 다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 이 구별만 있다. 악은 이러저런 양태의 관점에서 나쁜 것이다. 다음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악”에 대해 말한다. [1] 다른 사물의 작용으로 우리의 신체가 파괴될 때, 혹은 [2] 우리와 닮은 존재가 파괴될 때.
나쁜 마주침 혹은 비比의 분해로서의 악 – 중독의 메타포
악은 언제나 나쁜 마주침이다. 나랑 비가 맞는/합성되는 신체와의 마주침이 좋은 마주침이고 합성되지 않는 신체와의 마주침은 나쁜 마주침이다. 인간이 겪는 악은 언제나 소화불량, 음독, 중독 같은 유형의 것이다.
비比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블레이은베르흐의 첫 번째 오해
비比의 질서에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연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합성만 있다. 합성되는 비比들의 관점에서 보면 비比들의 합성은 모두 좋은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서는 악이 없다. 독과 접촉한 나의 신체의 어느 부분들이 유독성 물체의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를 취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내 신체의 일부가 다른 비 안에 포섭되어 합성된 것이므로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악은 비比들의 합성이나 합성의 법칙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양태의 관점에서는 나쁠 수 있으나, 모든 마주침에서는 그 자체로는 좋은 비比들의 합성이 일어난다. 마주침들의 총 질서에서 보면 비比들의 총질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느 특정 양태의 관점이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본질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블레이은베르흐의 두 번째 오해
본질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죽음 또는 파괴를 생각해 보자. 이때 우리의 비比는 분해된다. 우리의 비比는 외연적 부분들을 포섭하기를 멈춘다. 외연적 부분들이 우리를 떠나 다른 비에 포섭된다. 그런데 외연적 부분들은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본질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갖고 있어 외연적 부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우리 신체와 비슷한 신체를 파괴할 때를 생각해보자. ‘팔을 든다, 주먹을 쥔다, 팔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인다’는 때리는 행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신부님의 이러한 행동을 때리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행위 자체만 보면 인간 신체가 그를 특징짓는 비比를 보존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이 행동은 본질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행동은 “인간 신체의 구조에 의해 생각되는 덕virtue=능력이다.” 이 행동action 자체는 그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positive한 것이다. 만약 이 행동이 공격적이라면, 다른 신체를 정의하는 비比를 위협하거나 파괴한다면, 이때는 본질의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의도에 악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도의 악의는 사실 행동의 이미지를 이 행동에 의해 파괴되는 비比를 가진 물체의 이미지에 연결하는 것일 뿐이다. 이 행동이 의존하는 비比와 결합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만 “악”이 있다. 네로와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였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템네스트라와 합성될 수 없는 비比에 들어갔다. 이 경우 오레스테스가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는다. 반면에 네로는 이유 없이 아그리피나를 죽였다. 자신의 비比와 합성 불가능한 비比 아래서 아그리피나를 포착하기 위해서, 아그리피나의 이미지를, 그녀를 파괴할 행동의 이미지에 연결하기 위해서 네로에게는 악의가 필요했다. 이처럼 오레스테스에는 악의가 없었고 네로에게는 악의가 있었다. 두 경우 모두 합성 불가능한 비比 아래서의 두 신체가 만났다. 그래서 같은 동작의 비와 합성되는 합성되는 비를 가진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면 덕이다. 그리하여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 신부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악과 마주침의 질서 : 장님의 예와 블레이은베르흐의 세 번째 오해
악은 세 번째 질서인 마주침의 질서에서만 나타난다. 악이 대단한 어떤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작용 역량이 감소할 때, 실존 양태는 더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어떤 사람이 더 나은 조건을 박탈당하면 그것은 악이 아니냐?’라고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더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에는 박탈이 없다’고 답한다. 어떤 사람이 맹인이 된다. 조금 전에 선善에 대한 욕망으로 고무되었던 어떤 사람이 정욕[관능적 욕구]에 사로잡힌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그 사람이 더 나은 상태를 박탈당했다고 말할 아무 이유도 없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본성이 같지 않은 것들의 비교와 하나의 동일한 것의 상이한 상태의 비교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은 스피노자에게 적용할 수 없는 비판이다. 보는 것이 돌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는 것은 맹인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게 된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본질이 가질 수 없는 순간성을 어떤 존재의 본질에 돌린다’고 비판한다. 즉 순간성은 영원한 것으로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스피노자가 순간성을 본질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고려된 순간에 그것 안에 있다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어떤 사물의 본질에 속한다.”는 비판이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존재는 어느 순간에 그가 소유하는 본질에 따라서 언제나 최대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순간순간 소유하는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존재는 어느 순간에 그의 본질에 속하는 변용에 따라서 언제나 최대한 완전하다’고 한다. 순간순간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본질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블레이은베르흐는 “본질에 속한다”와 “본질을 구성한다”를 혼동한다. 변용은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속한다. 내가 겪는 변용들은 나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한에서 매 순간 나의 본질에 속한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는 한 양태의 본질은 어느 순간에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변용에 따라서 최대한 완전하다. 어떤 변용에 의해서 나의 능력이 실행되었으면 다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수 없다. 양립불가능성. 맹인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1] 아직 빛에 대한 감각이 있는 맹인 [2] 빛에 의한 변용을 전부 상실한 맹인. 전자의 경우, 빛의 감각에 따라 행동[작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맹인이다.이 경우에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단지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의 비율만 달라진 것이다. 수동적 변용 능력이 높아진 것이다. 변용 능력이 본질인데 그것은 그대로이나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의 비율이 달라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변용 능력이 실질적으로 줄어든다. 변용 능력에는 탄성이 있어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실존 양태는, 그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고 이 능력을 실존과 양립 가능한 한계 내에서 변동시키는 변용들에 따라서 최대한 완전하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1] 변용 능력은 매 순간 필연적으로 실행된다는 “필연론적” 착상과 [2] 작용 역량의 변동과 함께 변용 능력 자체가 변동한다는 “윤리적” 착상 사이에 어떤 모순도 나타나지 않는다. 박탈은 없지만 더 큰 안전성과 덜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 있다. 변용능력의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를 오간다. 최대치 문턱을 넘어가거나 최소치 문턱 아래로 가는 경우가 있다. 스페인 시인이 글 쓰는 역량을 상실하면 그것은 물리적이지는 않지만 죽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질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애벌레와 나비는 동일한 본성을 가진 동일한 개체인가? 스피노자에게 본질이 없다는 것은 유의 본질, 종의 본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마다 본질이 있는데 그 본질은 결국 그 개체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테제의 의미
악은 어느 경우에도 표현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합성의 법칙도, 비比들의 합성도, 본질도, ‘실존에서 더 나은 상태의 박탈’도 표현하지 않는다. 합리론자들에게는 악은 없고 선만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선도 악도 없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다. 신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면 보면 신개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처럼 개별 양태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고 하면 신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된다.
도덕적 대립을 윤리적 차이로의 대체하기
각각의 실존 양태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이럴 경우 상대주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때는 훌륭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구분된다. 훌륭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있다. 좋은 실존 양식이 있고 나쁜 실존 양식이 있다. 역량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마주침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절대적 좋음이다.
20210122스피노자와표현문제
15장 세 가지 질서와 악의 문제
▶ determination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결정의 의미 : A는 B가 ~하는 것을 결정한다. 이 경우 A는 B 행위의 원인이다[기계론적 인과법칙, 운동 전달 법칙]. 그래서 결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2) 규정의 의미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주체chose’이다.”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규정, ‘나는 존재한다’는 미규정(I am~),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는 규정된 것이라 본다. 이때 규정은 한정의 의미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소크라테스가 개도 고양이도 외계인도 아니고 사람인 것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대상의 성격을 한정한다. 그런데 ‘~~다’에 해당하는 보어, 술어, 빈사/빈어가 늘어날수록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의 범위는 줄어든다. 반비례 관계다.
▶들뢰즈의 경우, composition이 combination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au sens fort mot 말의 본래 뜻으로] 두 개의 신체가 합성되어 하나의 신체를 합성할 때 쓴다. 예를 들어 카일과 림프 각각의 비가 있으면서 제3의 비의 상위의 개체를 형성할 때 쓴다. 이때 combination을 쓰지는 않는다.
▶variation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원뿔곡선이 원 혹은 타원 혹은 쌍곡선이 될 때 이것들을 모두 varitation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는 변동이 아니라 변이형이라 해야 한다. 2) 변용 능력이 동일한데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이 반비례해서 달라진다고 할 때는 변동이라고 해야 한다.
▶ratio 비? 관계? rapport constitutive를 해석할 때 ‘구성 관계’는 어색하다. 구성비라고 하는 게 무난하다. 관계로 해석하는 근거는 비라고 하면 정해진 숫자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는 양을 상상하는 방식이고 허구이다. 이 비는 양적인 것으로 탄성을 갖는다
▶ 스피노자에게 무의식? 스피노자에게는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무의식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한히 많은 역량’이 무의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작은 지각’이라며 무의식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두 사람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무의식 이론은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보는데 그는 의식과 무의식을 대립 관계로 파악했다. 반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섬과 같은 것이 의식이라고 보았다. 융에게는 그것이 원형이다. 들뢰즈는 융을 프로이트보다 훨씬 높게 평가한다.
전 우주의 얼굴
속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먼저, 자신의 절대적 본성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직접 무한 양태), 그 다음 변양된 것으로서 자신을 표현하고(간접 무한 양태), 끝으로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실존하는 유한 양태). 직접 무한 양태는 연장에서는 운동과 정지이고 사유에서는 무한한 지성이다. 간접 무한 양태는 연장에서는 전 우주의 형상figure[=라틴어 facies, 얼굴]로 실존양태들의 결정을 규제하는 운동과 정지 비들의 집합/총합이다. 사유에서는 실존양태들의 관념들로서의 관념들의 결정을 규제하는 관념의 비이다. 즉 간접 무한 양태에는 ‘비’가 들어가고 이것은 실존 양태들과 관련된다.
운동과 정지의 비比[간접 무한 양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양태들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두 번째는 외연적 부분들[유한양태, 실존양태]을 일시적으로 포섭하는 것. 운동과 정지의 비는 본질과도 관련되고 실존하는 유한양태하고도 관련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첫 번째 관점에서는 운동과 정지는 모든 비를 포괄하는데, 속성 안에 있는 본질을 포함한다.
▶운동과 정지의 동시적 내재성[immanence]: 내재성을 영어로 presence로 번역한 것은 co-presence/공현존의 의미일 것이다. 운동 안에 정지가 있고 정지 안에 운동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정지는 운동의 극한이라고 말한다. 사실 정지는 없는 것이고 무한히 작은 운동으로 0에 가까운 것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는 다양한 비比들이 외연적 부분들의 무한 집합을 결집시킨다./무리를 짓는다. 이때 이 비比들은 양태들이 실존으로 이행하는 조건을 결정한다. 이 비比들 각각이 실존 개체의 형식[형상form]을 구성한다. 외연적 부분들 자체에는 form이 없다. 이 외연적 부분들이 무한집합을 이루어 어떤 비를 구현할 때 form을 갖고 개체를 이룬다. 이때 비는 개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런데 모든 비는 다른 비比 안에 합성되고 제3의 비比 아래서 상위 정도[등급]의 개체를 형성한다. 가령 우리 신체만 봐도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이 있고 또 그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이 있다. 이와 반대 방향으로 가면 나의 신체를 포함한 다른 많은 신체들을 형성하는 공통의 상위 신체에 있다. 이렇게 계속 올라가다 보면 전 자연, 전 우주가 거대한 하나의 신체에 이르게 된다,. 비의 차원에서 보면 비들이 합성이 되어서 제3의 비를 형성하고 그 비들이 다시 합성이 되어 제3의 비를 형성하면서 계속 올라가면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비가 있다. 우주 전체는 단 하나의 실존 개체다. 이 개체는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하지만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전 우주의 얼굴facies totius universi”이다.
▶ ‘운동과 정지의 총비율’에서 비율을 들뢰즈는 proportion이라고 쓴다. ‘운동과 정지의 비’에서 비는 rapport라고 쓴다. proportion와 rapport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rapport를 굳이 관계라고 다르게 번역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두 비比는 합성될 수 없는가
모든 비比들은 무한하게 합성되어 전우주의 얼굴을 형성한다. 그런데 비比들은 아무렇게나 합성되지 않는다. 아무 비比가 다른 아무 비比와 합성되지는 않는다. 비比는 부분들을 포섭하기 시작할 때 합성되고, 부분들을 포섭해서 비가 구현되기를 멈출 때 분해된다. 분해와 파괴는 ‘두 비比가 직접 합성되지 않는 경우, 둘 중 하나의 비比에 포섭되었던 부분들이 다른 비比의 부분들을 첫 번째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몸 속에 독이 들어와 혈액을 파괴할 때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들이 독의 비와 합성되는 비 아래 들어간 것이다. 배탈, 병 등은 우리 신체의 부분들이 다른 신체의 비 아래 들어간 것인데 이렇게 보면 분해나 파괴는 없는 것이다. 다른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比들의 질서[order차원]에서 모든 것은 합성이다. 분해나 파괴는 없다. 죽어서 썩어 시체가 되면 미생물들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생성이다. 독이 피를 분해할 때, 그것은 단지 피의 부분들이 독의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이 된 것이다. 분해는 합성의 이면이다. 분해와 파괴를 이야기하려면 비의 질서가 아니라 마주침/만남의 차원에서의 외연적 부분들이 문제가 된다. 실존하는 물체들은 그 자체 외연적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기 때문에 차츰차츰/부분부분으로 마주친다. 따라서 둘 중 한 물체의 부분들이 다른 비比를 취하도록 결정될 수 있다. 이 때 분해나 파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양태의 트라이어드에 대응하는 세 가지 질서 : 본질, 비比, 마주침
본질=역량 정도, 비比=힘, 마주침=기계론. 비比의 질서는 그 자체로 하면 순전히 합성의 질서다. 비 자체로 보면 합성만 있는 것이다. 이 비比의 질서가 파괴를 결정한다면 이것은 물체들/ 혹은 신체들이 비比의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마주침의 질서]에 따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자연의 질서”라는 개념은 복합적이다. 세 층위가 있다.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이 본질이 표현되는 비比, [3] 이 비比 아래 포섭된 외연적 부분들. 이 층위들 각각에 자연의 질서가 대응한다. 자연에 질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역량 정도들에 의해 규정되는, 본질들의 질서가 있다. 이 질서는 총 화합[=일치, 어우러짐, 무한히 많은 흰색의 degré]의 질서다. 둘째, 비比들의 질서는 사뭇 다르다. 법칙에 따른 합성의 질서다. 모든 비가 무한하게 합성되지만 아무 비가 다른 아무 비와 합성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마주침의 질서가 있다. 이것은 부분적이고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화합과 불화의 질서다. 실존하는 물체들은 외연적 부분들에 의해 부분부분 만나기 때문에 안 맞을 수 있다. 서로 만난 두 개의 물체가 합성되는 비比를 갖고 있으면 화합이 되고 합성되지 않아서 하나가 다른 것의 비比를 파괴할 때 불화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음식물이 몸 속에 들어와서 신체의 특징적 비 아래 포섭이 되어 합성이 일어나면 화합이나, 음식의 관점에서 보면 파괴이고 불화다. 음식물은 파괴되면서 슬퍼하고 그것을 먹은 인간은 기뻐한다. 이 마주침의 질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결정한다/규정한다. [1] 어떤 양태가 언제 실존으로 이행하는지, [2] 이 양태가 실존을 지속하는 기간, [3] 이 양태가 언제 죽거나 파괴되는지. 마주침의 질서는 외연적 부분들끼리 서로 작용을 주고 받으면서 결정된다. 마주침의 질서는 “자연의 공통 질서”의 하나인 동시에 “외생적extrinsèques 규정”[↔ 내생적intrinsèque 규정=본질]과 “우연한 마주침”의 질서이자 수동/정념들의 질서다.
스피노자에게 우연한 마주침이란 테마의 중요성
마주침의 질서는 공통 질서이다. 모든 실존 양태들이 그것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동/정념들과 외생적 규정들의 질서이다. 우리가 만나는 외부 물체들에 의해 일어나는/생산되는 변용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부 물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수동적인 질서다. 끝으로, 그것은 “우연한 마주침들”(fortuitus occursus)의 질서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우연은 필연과 대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우발성contingence은 없다. 마주침의 질서는 나름대로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 마주침의 질서의 필연성은 외연적 부분들의 필연성이고 외연적 부분들의 외적 결정의 필연성이다. 하지만 비比들의 질서에 비해 우연적이다. 여기서 우연성은 상대적 우연성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는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만남의 구성의 비만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세 번째 질서의 존재는 온갖 종류의 문제를 제기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마주침의 질서와 비比들의 질서는 같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합성되는 비比를 가진 신체들의 마주침 ─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다 혹은 돕다
“마주침”의 두 가지 경우가 구별되어야 한다. 첫 번째 경우, 나의 비比와 합성되는 비比를 가진 물체와 마주친다. 이 때 ① 나의 본성과 합치하는/부합하는 변용이 일어나면서 ② 기쁨을 느낀다. 동시에 ③ 우리의 작용 역량=활력을 증가시키거나 돕는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므로 여전히 수동적인 변용이고 무능한 상태다. 이것을 또 나누면, ① 마주친 물체가 나를 합성하는 비들 중 하나와 합성하는 경우가 있다. ② 두 물체의 특징적 비가 전체와 전체끼리 잘 맞으면 제3의 비가 형성된다.
▶ 나와 잘 맞는 물체와 합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défaut=기본값이다. 이것을 막는 장애물들이 존재하는 바, 이것을 뚫고 나가는 것이 능동적 변용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고 혁명인 것인 바, 이것이 défaut에 해당된다. 본래 무의식적인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관념, 규범, 도덕을 비롯한 권력장치가 막고 있을 때 굳이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도 뚫고 나가려는 성향을 갖는다.
어떻게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의 구별에 기쁜 정념과 슬픈 정념의 구별이 더해지는가?
기쁨을 느끼면 우리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어떤 것을 욕망하도록, 다시 말해 상상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결정한다. 이것이 코나투스이다. 기쁨이라는 감정 자체가 본성과 맞는 어떤 것을 욕망하도록 만든다. 기쁨의 감정이 작용 역량을 증가시키고 이 기쁨 자체와 이 기쁨을 안겨주는 대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욕망하고 상상하고 행하도록 결정한다. 기쁨의 감정에 의해서 더 큰 기쁨을 느끼기 위해,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과 기쁨이 연쇄되고 다른 정념들과 사랑이 연쇄된다. 『에티카』에 따르면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과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있다.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서로 연쇄가 되는 경우에 우리의 작용 역량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변용 능력이 실행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작용 역량을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100%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합성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물체들 간의 마주침
두 번째 경우는 나의 비比와 합성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물체와 마주칠 때. 이때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나의 본성에 반反하는 수동적 변용이 내 안에서 생산한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슬픔의 감정으로 나의 작용 역량을 감소시킨다.
슬픈 정념과 자연 상태
그 자체로서의 본질들 사이에는 투쟁, 갈등, 대립이 없다. 양태들의 투쟁은 본질들의 투쟁이 아니다.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변용들은 서로 연쇄되면 우리의 작용 역량이 점점 감소하고 역량의 가장 낮은 정도로 향해간다. 그러나 이 관점은 권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여전히 추상적이다. 변용의 두 선(기쁜 변용들의 선과 슬픈 변용들의 선)은 부단히 서로 간섭한다. 기쁨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의 연쇄와 슬픔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의 연쇄가 완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부단히 간섭한다. 어떤 대상이 슬픔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기쁜 정념들을 경험하게 되는가?
우리가 실존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좋은 마주침을 가질 기회가 사실은 별로 없다. 아주 가끔씩만 좋은 마주침을 갖고 아주 자연스럽게 기쁨을 겪게 된다. 이것이 자연적인 우리의 실존의 조건이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좋은 마주침을 가질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다. 기쁨에는 부분적 기쁨과 간접적 기쁨이 있다. 부분적 기쁨은 어느 한 부분에서 역량이 증가하는데 비해 다른 많은 부분들에서는 역량이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간접적 기쁨은 내가 싫어하는, 나랑 맞지 않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주의의 첫 번째 원리, 즉 수동/정념과 능동/작용,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대립이 출발점이다. 이것은 거의 실질적 대립이다.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 작용 받는 역량과 작용하는 역량의 비율이 반비례하면서 변동한다. 더 심층으로 가면 실질적 대립은 그저 부정/제한일 뿐이다. 수동적 변용들은 단지 본질의 제한이고 작용 역량의 제한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수동적 변용들은 작용 역량의 가장 낮은 정도들을 함축한다. 수동적 변용도 나름은 우리의 작용 역량이지만, 함축된 역량이고 표현되지 않은 역량이고 펼쳐지지 않은 역량이다[역량에 제한이 가해진 상태]. 수동적 변용들도 나름대로는 우리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지만 이 능력을 최소화시킨다. 우리의 작용 역량이 수동적 변용의 흔적에 매달린다. 가령, 감기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 역량이 거기에 집중되면서 기운이 없고 졸린 상태가 된다.
능동/작용들과 수동/정념들의 대립 때문에 스피노자주의의 두 번째 원리를 구성하는 다른 대립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능동과 수동의 대립이 있고 수동 안에 기쁜 변용과 슬픈 변용이 있다. 수동적 변용 중에서 기쁨을 도약대로 삼아서 다음 단계, 2종인식, 능동적 단계로 점프를 해야한다. 우리가 기쁨으로 변용되는 한에서 우리의 작용 역량에 가까이 다가간다. 수동적이지만 기쁜 변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수동적 변용이다. 어떻게 우리는 능동적 변용을 생산하는데 도달하는가? 이 이전에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기쁜 수동적 변용을 최대한 많이 늘려야 하는가?
선악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
악은 작용 역량의 감소와 비比의 분해이다. 악은 한 양태를 특징짓는 비比의 파괴 또는 분해다. 따라서 악은 어떤 실존 양태의 특수한 관점에서만 말할 수 있다.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다. 각각 양태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쁜 것은 악이다. 그것이 양태마다 다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 이 구별만 있다. 악은 이러저런 양태의 관점에서 나쁜 것이다. 다음 두 가지 경우에 우리는 “악”에 대해 말한다. [1] 다른 사물의 작용으로 우리의 신체가 파괴될 때, 혹은 [2] 우리와 닮은 존재가 파괴될 때.
나쁜 마주침 혹은 비比의 분해로서의 악 – 중독의 메타포
악은 언제나 나쁜 마주침이다. 나랑 비가 맞는/합성되는 신체와의 마주침이 좋은 마주침이고 합성되지 않는 신체와의 마주침은 나쁜 마주침이다. 인간이 겪는 악은 언제나 소화불량, 음독, 중독 같은 유형의 것이다.
비比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블레이은베르흐의 첫 번째 오해
비比의 질서에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연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합성만 있다. 합성되는 비比들의 관점에서 보면 비比들의 합성은 모두 좋은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서는 악이 없다. 독과 접촉한 나의 신체의 어느 부분들이 유독성 물체의 비比와 합성되는 새로운 비比를 취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내 신체의 일부가 다른 비 안에 포섭되어 합성된 것이므로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악은 비比들의 합성이나 합성의 법칙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양태의 관점에서는 나쁠 수 있으나, 모든 마주침에서는 그 자체로는 좋은 비比들의 합성이 일어난다. 마주침들의 총 질서에서 보면 비比들의 총질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느 특정 양태의 관점이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본질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블레이은베르흐의 두 번째 오해
본질들의 질서에서 악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죽음 또는 파괴를 생각해 보자. 이때 우리의 비比는 분해된다. 우리의 비比는 외연적 부분들을 포섭하기를 멈춘다. 외연적 부분들이 우리를 떠나 다른 비에 포섭된다. 그런데 외연적 부분들은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 본질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갖고 있어 외연적 부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우리 신체와 비슷한 신체를 파괴할 때를 생각해보자. ‘팔을 든다, 주먹을 쥔다, 팔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인다’는 때리는 행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신부님의 이러한 행동을 때리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행위 자체만 보면 인간 신체가 그를 특징짓는 비比를 보존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한에서 이 행동은 본질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행동은 “인간 신체의 구조에 의해 생각되는 덕virtue=능력이다.” 이 행동action 자체는 그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positive한 것이다. 만약 이 행동이 공격적이라면, 다른 신체를 정의하는 비比를 위협하거나 파괴한다면, 이때는 본질의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의도에 악의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도의 악의는 사실 행동의 이미지를 이 행동에 의해 파괴되는 비比를 가진 물체의 이미지에 연결하는 것일 뿐이다. 이 행동이 의존하는 비比와 결합되지 않는 비比를 가진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만 “악”이 있다. 네로와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였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템네스트라와 합성될 수 없는 비比에 들어갔다. 이 경우 오레스테스가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는다. 반면에 네로는 이유 없이 아그리피나를 죽였다. 자신의 비比와 합성 불가능한 비比 아래서 아그리피나를 포착하기 위해서, 아그리피나의 이미지를, 그녀를 파괴할 행동의 이미지에 연결하기 위해서 네로에게는 악의가 필요했다. 이처럼 오레스테스에는 악의가 없었고 네로에게는 악의가 있었다. 두 경우 모두 합성 불가능한 비比 아래서의 두 신체가 만났다. 그래서 같은 동작의 비와 합성되는 합성되는 비를 가진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면 덕이다. 그리하여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 신부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악과 마주침의 질서 : 장님의 예와 블레이은베르흐의 세 번째 오해
악은 세 번째 질서인 마주침의 질서에서만 나타난다. 악이 대단한 어떤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작용 역량이 감소할 때, 실존 양태는 더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어떤 사람이 더 나은 조건을 박탈당하면 그것은 악이 아니냐?’라고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더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에는 박탈이 없다’고 답한다. 어떤 사람이 맹인이 된다. 조금 전에 선善에 대한 욕망으로 고무되었던 어떤 사람이 정욕[관능적 욕구]에 사로잡힌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그 사람이 더 나은 상태를 박탈당했다고 말할 아무 이유도 없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본성이 같지 않은 것들의 비교와 하나의 동일한 것의 상이한 상태의 비교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은 스피노자에게 적용할 수 없는 비판이다. 보는 것이 돌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는 것은 맹인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본성이 아니게 된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본질이 가질 수 없는 순간성을 어떤 존재의 본질에 돌린다’고 비판한다. 즉 순간성은 영원한 것으로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스피노자가 순간성을 본질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고려된 순간에 그것 안에 있다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어떤 사물의 본질에 속한다.”는 비판이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스피노자가 ‘존재는 어느 순간에 그가 소유하는 본질에 따라서 언제나 최대한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순간순간 소유하는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존재는 어느 순간에 그의 본질에 속하는 변용에 따라서 언제나 최대한 완전하다’고 한다. 순간순간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본질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블레이은베르흐는 “본질에 속한다”와 “본질을 구성한다”를 혼동한다. 변용은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속한다. 내가 겪는 변용들은 나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한에서 매 순간 나의 본질에 속한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는 한 양태의 본질은 어느 순간에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 변용에 따라서 최대한 완전하다. 어떤 변용에 의해서 나의 능력이 실행되었으면 다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수 없다. 양립불가능성. 맹인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1] 아직 빛에 대한 감각이 있는 맹인 [2] 빛에 의한 변용을 전부 상실한 맹인. 전자의 경우, 빛의 감각에 따라 행동[작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맹인이다.이 경우에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단지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의 비율만 달라진 것이다. 수동적 변용 능력이 높아진 것이다. 변용 능력이 본질인데 그것은 그대로이나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의 비율이 달라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변용 능력이 실질적으로 줄어든다. 변용 능력에는 탄성이 있어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실존 양태는, 그의 변용 능력을 실행하고 이 능력을 실존과 양립 가능한 한계 내에서 변동시키는 변용들에 따라서 최대한 완전하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1] 변용 능력은 매 순간 필연적으로 실행된다는 “필연론적” 착상과 [2] 작용 역량의 변동과 함께 변용 능력 자체가 변동한다는 “윤리적” 착상 사이에 어떤 모순도 나타나지 않는다. 박탈은 없지만 더 큰 안전성과 덜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 있다. 변용능력의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를 오간다. 최대치 문턱을 넘어가거나 최소치 문턱 아래로 가는 경우가 있다. 스페인 시인이 글 쓰는 역량을 상실하면 그것은 물리적이지는 않지만 죽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질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애벌레와 나비는 동일한 본성을 가진 동일한 개체인가? 스피노자에게 본질이 없다는 것은 유의 본질, 종의 본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마다 본질이 있는데 그 본질은 결국 그 개체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테제의 의미
악은 어느 경우에도 표현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합성의 법칙도, 비比들의 합성도, 본질도, ‘실존에서 더 나은 상태의 박탈’도 표현하지 않는다. 합리론자들에게는 악은 없고 선만 있다. 스피노자에게는 선도 악도 없다. 스피노자는 무신론자다. 신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면 보면 신개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처럼 개별 양태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고 하면 신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된다.
도덕적 대립을 윤리적 차이로의 대체하기
각각의 실존 양태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이럴 경우 상대주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때는 훌륭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구분된다. 훌륭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있다. 좋은 실존 양식이 있고 나쁜 실존 양식이 있다. 역량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마주침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절대적 좋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