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5스피노자와 표현문제
14장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한 양태에서 표현의 두 번째 트라이어드 : 본질, 변용 능력, 이 능력을 실행하는 변용들
① 기계론–운동–외연적 부분들[현상] : 외연량의 자연학
② 역학–힘 or 능력 : 힘의 자연학
③ 형이상학 –본질 -강도 : 강도량의 자연학
▶ 역본설dynamisme : 전통철학부터 내려온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기원한다. 본질이 현실태로 이행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역학이라고 번역해도 상관은 없다. 다만 dynamisme과 dynamic 각각을 구분해야 하기에 역본설과 역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유한 양태의 표현적 트라이어드[유한 양태의 첫 번째 트라이어드]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본질이 표현되는 특징적 비比, [3] 이 비比 아래 포섭되어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 외연적 부분들.
유한 양태의 두 번째 트라이어드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본질이 표현되는 일정한 변용 능력. 본질이 비에 표현되는 것처럼 변용 능력으로도 표현된다. [3]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채우는] 변용들. 여기서 변용은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으로 나뉜다.
두 트라이어드를 대응시켜보면 [1] 본질, [2] 비 또는 변용 능력 [3] 외연적 부분들 또는 변용 능력이다. 그래서 등가물이라고 한 것이다.
유한 양태의 세 번째 트라이어드는 [1] 양태의 본질이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된다. [2] 이 비比는 변용 능력을 표현한다. [3] 이 비比는 갱신되는 부분들에 의해 구현되고 이 능력은 가변적 변용, 즉 수용적이고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된다. 이것이 양태의 완전한 트라이어드이다. 앞의 두 개의 트라이어드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스피노자한테는 본질들의 형이상학, 신의 역학, 현상들의 기계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렇게 세 가지로 구별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자연학적, 즉 물리학적이다. [1] 양태들의 본질들에 대응되는 강도량의 자연학, 본질‧역량 정도‧강도는 항상 같은 것이다. [2] 외연량의 자연학, 다시 말해 기계론, [3] 힘의 자연학, 다시 말하면 역본설/역학.
비比는 변용 능력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두 가지 물음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신체의 구조(fabrica)는 어떠한가?”, 이것은 신체를 특징짓는 비에 관한 질문이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변용 능력에 관한 질문이다. 그래서 신체를 특징짓는 비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 변용 능력은 분리되지 않는다. 비에 따라서 변용 능력이 달라진다. 신체의 구조는 신체의 비의 합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변용 능력이다.
실체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
신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을 비교해 보면, 신 즉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potentia)과 본질의 동일성[신의 본질=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다. 신은 potestas, 즉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능력을 가진다. 신의 이 변용 능력은 영원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실행된다. 반면 실존 양태는 일정한 역량의 정도의 본질을 갖고 매우 많은 방식으로[a great number of, 큰 수=제한된 것과 관련된 무한] 변용될 능력을 가지며,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실행된다.
실존 양태와 신적 실체의 차이는 무엇인가? ① “무한히 많은 방식”과 “매우 많은 방식”의 차이 : 매우 큰 수는 제한된 것에 관계된다. 그리고 무한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더 혹은 덜 큰 무한이 있다. 반면에 신의 무한은 절대적 무한으로 제한이 없다.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무제한적으로 변용된다.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
② 신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의 차이 : 신은 자신이 변용의 원인이므로 무언가의 작용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변용은 능동/작용action이다. 즉 신의 모든 변용들은 그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며/펼쳐지며, 따라서 신의 변용은 모두 능동이다. 다른 것의 작용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실존 양태의 변용은 1차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수동/정념passion이다. 따라서 실존하는 유한 양태에 관해 제기되는 중요한 물음은 “실존하는 유한 양태는 능동적 변용을 가질 수 있느냐? 가질 수 있으면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이다. 스피노자는 이 장 이후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많은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화두로서 “윤리적인” 질문이다. 실천과 관련된 질문으로서 이는 “인간이 어떻게 능동적이 될 수 있느냐?”,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정동 혹은 감정
③ “변용”이라는 말 자체의 내용에 관련된 차이 : 신의 변용은 양태, 양태의 본질, 실존 양태이다. 여기서 양태와 양태의 본질을 나눈 것은 양태의 본질이 본질 자체로 실존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양태의 변용은 2차 변용, 변용의 변용이다. 신의 변용이 양태이고 그 양태의 변용이므로 변용의 변용인 것이다. 우리 신체의 변용은 신체적 이미지이고, 우리의 정신 안에 있는 변용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 혹은 상상이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변용이 있다. 바로 감정(affectus)이다. 이것은 변용 관념에서 파생된다. 어떤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으로부터 어떤 감정이 파생되어 나온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둘이 구별된다. 그런데 감정은 곧 변용이고 관념이라는 얘기가 뒤에 나온다. 엄밀하지 않게 보면 감정도 관념인데 엄밀하게 보면 관념에서 파생되는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기본적으로 신체 구성의 현실적/현재 상태를 나타낸다. 그 이전 관계나 이후 관계와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와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현재 상태를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전 상태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부적합한 관념과 수동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양태에게 주어지는 변용은 두 종류다. ① 신체의 상태 그리고 신체의 상태를 지시하는 관념. ② 신체의 변이 그리고 신체의 변이를 함축하는 관념. 상태는 변이의 한 순간이다. 그래서 변이를 나타내는 관념이 있다.
인간은 수동적인 변용 혹은 정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이것은 곧 양태의 조건이기도 하다. 앞에서는 어떻게 능동적 변용을 가질 수 있는가를 질문을 했다면 이번에는 ‘부적합한 관념 외에 다른 것을 가질 수 있냐?’라고 질문한다. 둘은 같은 질문이다. ‘어떻게 수동적 감정 말고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냐?’ 역시 ‘능동적 감정을 느낄 수 있냐?’와 같은 질문이다. 부적합한 관념은 우리가 그 관념의 원인 아닐 때의 관념이다. 수동적 관념=정념은 우리가 그 감정의 원인이 아닐 때의 관념이다. 우리의 변용 능력은 우리의 실존 초기부터/태어날 때부터 부적합한 관념과 수동적 감정에 의해 실행된다/채워진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변용능력이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감정에 의해 실행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질문이다.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감정과의 연관성은 우리가 관념의 원인이고 감정의 원인일 때 능동/작용이 된다. 우리 안의 적합한 관념은 형상적으로 우리가 원인인 관념이다. 우리가 적합한 원인인 감정은 능동/작용이다. 고유하게 윤리적인 물음은 방법론적 물음과 연결된다. ① “우리는 어떻게 능동적인 데 도달하는가?”, 이것이 윤리적 물음이다. ②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들을 생산하는 데 도달하는가?” 이것이 방법론적 물음이다. 두 질문은 연관되어 있다.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으면 능동적이 될 수 있다.
유한 양태의 실존적 변이[비율의 증감variation]
실존적 변이 혹은 표현적 변이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어떤 양태의 변용 능력이 수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될 때 변용 능력 자체는 작동받는 힘으로 나타난다. 신체에서는 작용받는 힘 혹은 역량이고 영혼에서는 상상하는 역량 또는 수동적 감정을 느끼는 역량이다.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때 변용 능력은 작용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비율은 달라진다. 이 비율에 무관하게 변용 능력 자체는 일정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가설에 도달한다. 1)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비율만 달라진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작용하는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이 반비례한다. 이 두 가지가 비율이 바뀌면서 변용 능력을 구성한다.
2) 변용 능력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왜냐하면 변용 능력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관점에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실존 양태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비比가 고무풍선처럼 탄성을 갖고 있다. 성장, 노화, 병. 성장하면서 비가 다르고 병에 걸리면 비가 달라진다. 우리는 같은 개체/개인을 분간하기 어렵다. 한 신체를 특징짓는 비比의 변화는 변용 능력에서도 확인한다. 비가 변하므로 변용 능력도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과 비比에 형성과 변형의 폭 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실존이다.
▶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의 최대치-최소치=본질
외연적 부분들이 비 아래 포섭이 된다는 것은 그 비에 맞춰지는 것, 리듬에 따르는 것이다. 입자들이 출렁거리며 운동하는 리듬에 부분들이 따르고 그 리듬 속에 본질이 표현된다. 본질은 비로도 표현되고 변용 능력에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비와 변용 능력은 상응 관계에 있다. 비에 표현되는 게 본질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고 탈이 난다는 것은 신체 일부분의 비가 깨졌음을 뜻한다. 신체가 독의 비에 포섭될 때는 중독이 되는 것이고 신체가 영양분 섭취할 때는 영양분의 부분들이 나를 특징짓는 비 아래 포섭되는 것이다. 장기 이식도 신체가 합성하는 비가 맞아야 가능하다.
외연적 부분들은 단순 신체로 무한히 작은 입자다. 사실상 거의 값이 0에 가까워 독립적으로 실존하지 않고 무한집합으로 다닌다. 그것들이 형성하는 것이 합성이다. 결합 혹은 조합은 항 대 항의 결합 혹은 조합을 의미한다. 여기서 항은 독립적 실존을 갖는다. 하지만 합성은 독립적 실존을 갖지 않는다. 이것이 내재성의 plan이다. 내재성의 plan에는 독립적 실존을 갖지 않는 입자들의 운동과 정지만 있다. 그것이 기관 없는 신체이다.
▶ 비동심원(by 들뢰즈 강의)
외부 원과 내부 원이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까지의 거리에는 차이가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까지 최대거리와 최소거리가 있다. 스피노자는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가는 선분들의 합을 고려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부등한 거리의 차이의 합을 고려하라고 했다. 여기서 거리의 부등성은 거리의 차이를 의미하며 합은 제한된/한계를 갖는 무한을 나타낸다. 원 테두리 안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거리의 차이를 합치면 무한히 큰 수가 나온다.
본질은 역량 정도이고 역량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이고 강도량이다. 역량 정도는 차이 자체다.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 자체다.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 각각 역시 그것을 특징짓는 비들이 있다. 우리는 비들의 합이 아니라, 비들 사이의 차이들의 합이다. 본질, 즉 역량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두 개의 문턱 사이에 놓여 있다. 진드기는 포식했을 때 최대 문턱에 이르고 포식한 후 최소 문턱에 이르러 죽는다.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곧 미분비이다. 독립적인 실존을 갖지 않는 것들이 관계를 맺어서 형성되는 비이다. 비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도 각각의 비는 미분소( dx/dy)이다. 이것들은 값이 없고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둘이 붙을 때 값을 갖는다. 이것이 무한집합들과 무한집합들 사이의 비이다. 무한히 많은 입자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각각의 입자들은 값을 갖지 않는 무한한 dx, 무한한 dy이다. 비는 곧 리듬이고 파동이다.
라이프니츠에게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 스피노자에게 작용 역량과 피동 역량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서 두 층위가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의 테제에 따르면 “파생적 힘”은 이중적이다. 작용하는 힘과 작용 받는 힘,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 그런데 능동적 힘은 장애물을 만나는가 외력을 만나는가에 따라 “죽어” 있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런데 더 깊은 층위에서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묻는다. 이 두 힘이 별개의 힘이냐? 별개의 힘이 아니다. 능동적 힘만이 권리상 실재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이다. 수동적 힘은 자율적 힘이 아니라 능동적 힘의 제한이다. 실재하는 것은 능동적 힘이고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을 제한하는 것이다.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의 제한이고 본질의 제한이다. 즉 라이프니츠는 어떤 층위에서는 두 가지의 별개의 힘이 있다고 하고 어떤 층위에서는 힘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다음 테제를 제시한다. 어떤 층위에서는 작용받는 역량과 작용하는 역량이 상관적으로 변한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작용 받은 역량이 적극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작용 받는 힘은 작용하는 힘의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이다. 두 역량이 상관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자연학적으로는 참인데 형이상학적으로는 참이 아니다. 왜냐면 작용 받는 역량은 제한이고 negative하고 본질의 층위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작용 역량은 적극적이고 실재적인가
작용 역량은 변용 능력의 유일한 실재적·적극적·긍정적 형식이다. 작용 역량만이 변용 능력의 positive한 형식이다. positive는 플러스(+)를 의미한다[작용받는 역량negative(-)]. 능동적 변용들은 변용 능력을 실재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작용 역량 단독으로 변용 능력이다. 변용 능력=작용 역량.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은 서로 상관적으로 변하면서 변용 능력을 구성한다. 작용 받는 역량은 작용 역량의 제한이기에 작용 역량은 곧 변용 역량이다. 그래서 작용 역량이 단독으로 본질을 표현한다. 본질은 작용 역량과 같고 작용 역량은 변용 능력과 같다. 형이상학적인 층위에서 보면 본질=작용 역량=변용 능력이다. 자연학적 층위에서는 두 가지 힘이 있지만 형이상학적 층위에서는 한가지 힘만 있다.
자연학적 착상 : 우리의 변용 능력은 언제나 실행된다
두 가지 근본적 착상이 양립한다. 자연학적 착상에 따르면, 변용 능력은 일정하다. 윤리학적 착상에 따르면, 변용 능력은 극단적 한계들 내에서만 일정하다. 수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때는 변용 능력은 최소화되고 우리의 역량 정도와 분리된다. 반대로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면 변용 능력은 최대화화된다. 변용 능력에는 최대치와 최소치가 있다. 따라서 유한 양태의 표현적 변이들은 단지 변용affection의 기계론적 변이들만이 아니다. 변용 능력의 역학적[역동적] 변이[힘 자체가 변할 수 있다]이자 본질 자체의 “형이상학적” 변이[본질 자체도 변할 수 있다]이다. 어느 순간 그것에 속하는 변용들에 따라 본질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윤리학적 착상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된다
윤리학적 물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변용을 할 수 있는지도 우리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우리의 변용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 수동적 변용들로 실행된다. 이것을 능동적 변용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가다 보면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동적 변용의 비율이 훨씬 더 크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죽는다. 몇몇 예외적인 사람들은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높인다.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높이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과 통한다. 능동적이 되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산다.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른 채. 대부분 인간은 작용 받을 때만 자신이 실존한다고 느낀다. 수동적인 인간이고 노예인 것이다. “(무지한 사람은)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주의 비판, 그 비판의 애매성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양태 이론은 피조물에게서 능동성, 역동성, 개체성 등을 모두 박탈하는 수단이다. 양태는 실체의 가상, 환영, 가상의 사영射影들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이와 같은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은 틀린 것이다. 양태 관념은 피조물에게서 고유한 역량을 박탈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물들이, 양태들이 어떻게 신의 역량을 “분유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핵심은 사물 또는 양태 자체에 고유의 역량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양태는 고유한 힘, 내속하는 힘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그렇지 않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공통점 : 데카르트에게 반대하는 새로운 자연주의 기획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공통의 기획을 갖고 있다. 새로운 “자연주의”이다. 데카르트의 수학적이고 기계론적인 학문 기획의 결과는 자연에서 잠재성virtualit, 잠재력potentialité, 내재적 능력 등을 박탈해서 자연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연장에 관한 논의에 따르면 연장은 자동력이 없고 형태와 위치 변화만 있다. 물체 자체의 고유성은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반데카르트주의적 반발/반작용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공통 전선이다. 힘 또는 역량을 지닌 자연의 권리를 복원하는 것이 반데카르트주의적 반작용이다. 그러면서도 데카르트의 기계론의 성과는 보존한다.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자연주의적 프로그램은 자연에 고유한 힘을 되돌려주는 데 있다. 스피노자의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라이프니츠는 ‘물체에서 모든 일은 형태와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에서 말하는 물체의 경우 어떤 형태와 어떤 운동인가? 왜 그 형태, 그 운동인가? 이것을 설명하려면 형태와 운동보다 더 심층의 어떤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계론은 물체의 본성 혹은 본질 관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기계론에는 물체의 본성 혹은 본질 관념이 없다. 그러므로 특정한 형태, 특정한 운동,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그것의 이유, 그것의 충분 이유로서의 본질, 본성 관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철학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 세 층위
데카르트에게는 기계론과 형이상학 두 층위밖에 없다. 게다가 형이상학에서는 존재를 자연 밖의 것, 신에게 있는 것으로 본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하나의 층위를 더 추가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은 세 층위에서 실현된다. [1] 물체에서 모든 일은 형태와 운동에서 일어난다. 이는 데카르트의 성과를 받아들인 것이다. [2] 운동은 주어진 어느 순간의 물체의 변별적 표시를 갖고 있지 않다. 운동 자체가 힘을 전제한다. 이 힘이 없으면 물체도 물체의 형태도 구별되지 않는다. 기계론적 법칙들 자체가 물체들의 내밀한 본성을 전제한다. 여기서 기계론적 법칙이란 운동의 법칙을 말한다. 물체의 본성, 본질로서의 힘이 있어야 운동과 물체의 구별됨을 설명할 수 있다. [3] 파생적 힘은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에 관련된다.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은 원초적/근원적 힘 혹은 개체적 본질이다. 이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이 파생적 힘들의 원천이다. 즉 라이프니츠에게는 기계론, 역학, 형이상학의 세 층위가 있다. ①형태와 운동만 있는 기계론의 층위, ②작용하는 힘과 작용받는 힘의 역학의 층위, ③ 파생적 힘의 원천이 되는 개체의 본질, 혹은 원초적/근원적 힘. 여기서 원초적 힘은 본질, 물체의 본성이다.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기계론, 역학, 본질의 세 층위가 있다. ①기계론은 무한하게 합성된 실존 물체/신체들을 규제한다. ②이 기계론은 변용 능력의 역학 이론[역본설]에 관련된다. ③ 작용하고 작용 받는 역량의 변이에서 표현되는 특수 본질 이론[형이상학]에 관련된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세 번째 층위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모든 것은 메타자연학=형이상학이 아니라 자연학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강도량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안 쓴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기계론, 힘, 본질, 세 층위가 구별된다. 그런데 스피노자주의가 피조물들에게서 모든 능력과 모든 능동성을 박탈한다고 주장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두 철학자 사이의 진짜 대립은 악·섭리·종교 문제, 철학의 역할의 실천적 개념화에 관한 실천적 이유에 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진정한 대립 : 코나투스
코나투스 개념을 두고 두 철학자가 갈라진다. 라이프니츠에게 코나투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자연학적으로는 물체/신체가 운동하려는 경향. [2] 형이상학적으로는 본질이 실존하려는 경향. 스피노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양태의 본질은 “가능태”가 아니므로 실존하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전부tout ce qu'elles sont다. 결여가 없다. 따라서 양태의 본질은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함축하지 않는다. 코나투스는 양태의 본질인 바, 이 본질은 실존한 다음에 양태가 갖는 본질이다. 본질 자체의 실존, 즉 강도적 차원의 실존은 아니다. 실존한 다음에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경향성이 코나투스인 것이다. 단순 신체의 코나투스는 ‘자기에게 결정된 상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고 합성 신체의 코나투스는 신체를 정의하는 운동과 정지의 비比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코나투스의 결정으로서의 변용
실존 양태의 코나투스와 양태의 변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변용에 의해 코나투스가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정념은 우리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시키는가
변용은 코나투스 혹은 본질을 결정한다.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변용에 의해 결정되는 코나투스는 “욕망”이다. 실존 양태에 한해서 본질은 욕망이다. 수동적 변용은 아무리 낮더라도 우리의 작용 역량의 한 정도를 함축한다. 만약에 수동적 변용에 의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된다면 그 이유는 작용 역량이 부동화되고, 고착화되고, 수동적 변용에 투여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감기에 걸려 나의 신체와 비가 맞지 않는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것과 싸우기 위해 작용 역량이 집중 투여된다. 그런데 이 때 나의 작용 역량이 제한되므로 기력이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코나투스는 작용 역량과 동일하다. 코나투스의 변이들은 작용 역량의 역학적[역동적] 변이다.
표현적 자연 : 목적성 있는 자연주의인가, 목적성 없는 자연주의인가?
모든 실천적 대립들이 파생되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진짜 차이는 무엇인가? 기계론이 두 가지 방식으로 지양된다. ①역량의 변이에 의해 정의되는 변용 능력의 역본설에 관련된다[두번째 층위]. ②역량 정도로 정의되는 개별 본질들의 설정positionn에 관련된다[세번째 층위]. 기계론이 역본설과 본질 이론에 의해 지양된다. 라이프니츠는 사물에게 내속하는 고유한 힘이 있음을 인정할 때 개체의 본질[모나드]을 실체로 만든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체의 본질들은 양태의 본질이고 사물들 자체를 유일 실체의 양태들로 만든다. 이 차이는 여전히 부정확하다. 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기계론은 부분적으로 초월적으로 머물러 있는 목적성의 요구들에 관련된다. 그의 예정조화설에 따르면 신의 섭리가 중요하며 신은 항상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어떤 본질이 현실화되는지는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즉 라이프니츠에게는 기계론과 목적성 사이에 일치, 조화가 있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기계론이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순수 인과성의 요구들에 관련된다. 바로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이 두 철학자 간의 진짜 차이다. 라이프니츠와 다르게 스피노자의 역본설과 “본질주의”는 목적성을 배제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의 기능은 역본설에서 목적론적 의미를 떼어냄으로써 역본설의 참모습[역본설이 무엇인지]을 보여준다.
양태의 완전한 트라이어드. [1] 양태의 본질은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된다. [2] 이 비比는 변용 능력을 표현한다. [3] 이 변용능력은 가변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된다. 이 표현의 세 층위들 사이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합목적적 대응도 도덕적 조화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내재인의 상이한 결과들의 필연적 연쇄만 있다.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은 “자연학적”이다. [1] 강도량의 자연학, [2] 외연량의 자연학, [3] 힘의 자연학
▶ 코나투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경향성이다. 스피노자는 ‘노력’이라는 말을 쓰지만 들뢰즈는 노력에는 의지가 개입된다고 보면서 사용을 피한다. 감기에 걸렸을 때 이를 물리치려는 경향이 코나투스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게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에 의해 내 신체가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운동이 코나투스다. 나와 비가 잘 맞는 신체와 합성하려는 경향도 코나투스다. 신체의 현재의 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도 코나투스다.
▶ 변용이 본질을 결정한다.
변용에 따라 본질이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순간 그 순간에 변하는 변용에 따라 양태의 본질이 변할 수 있다[본질의 순간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본질은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를 오가며 변한다. 또한 능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되는지, 수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들뢰즈는 자유의지를 싫어한다.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는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가령,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중력의 작용을 덜 받을 수는 있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신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뭔가 탈이 났을 때야 알게 된다. 이성적이 되는 것도 능력이고 미치는 것도 능력이다. 미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고 게다가 그것을 하고 싶은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정신과 신체가 나란히 평행해서 간다.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면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X./상상조차 수동이거나 외부 원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20210115스피노자와 표현문제
14장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한 양태에서 표현의 두 번째 트라이어드 : 본질, 변용 능력, 이 능력을 실행하는 변용들
① 기계론–운동–외연적 부분들[현상] : 외연량의 자연학
② 역학–힘 or 능력 : 힘의 자연학
③ 형이상학 –본질 -강도 : 강도량의 자연학
▶ 역본설dynamisme : 전통철학부터 내려온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기원한다. 본질이 현실태로 이행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역학이라고 번역해도 상관은 없다. 다만 dynamisme과 dynamic 각각을 구분해야 하기에 역본설과 역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유한 양태의 표현적 트라이어드[유한 양태의 첫 번째 트라이어드]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본질이 표현되는 특징적 비比, [3] 이 비比 아래 포섭되어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 외연적 부분들.
유한 양태의 두 번째 트라이어드 [1] 역량 정도로서의 본질, [2] 본질이 표현되는 일정한 변용 능력. 본질이 비에 표현되는 것처럼 변용 능력으로도 표현된다. [3] 변용 능력을 실행하는[채우는] 변용들. 여기서 변용은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으로 나뉜다.
두 트라이어드를 대응시켜보면 [1] 본질, [2] 비 또는 변용 능력 [3] 외연적 부분들 또는 변용 능력이다. 그래서 등가물이라고 한 것이다.
유한 양태의 세 번째 트라이어드는 [1] 양태의 본질이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된다. [2] 이 비比는 변용 능력을 표현한다. [3] 이 비比는 갱신되는 부분들에 의해 구현되고 이 능력은 가변적 변용, 즉 수용적이고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된다. 이것이 양태의 완전한 트라이어드이다. 앞의 두 개의 트라이어드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스피노자한테는 본질들의 형이상학, 신의 역학, 현상들의 기계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렇게 세 가지로 구별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자연학적, 즉 물리학적이다. [1] 양태들의 본질들에 대응되는 강도량의 자연학, 본질‧역량 정도‧강도는 항상 같은 것이다. [2] 외연량의 자연학, 다시 말해 기계론, [3] 힘의 자연학, 다시 말하면 역본설/역학.
비比는 변용 능력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두 가지 물음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신체의 구조(fabrica)는 어떠한가?”, 이것은 신체를 특징짓는 비에 관한 질문이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변용 능력에 관한 질문이다. 그래서 신체를 특징짓는 비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 변용 능력은 분리되지 않는다. 비에 따라서 변용 능력이 달라진다. 신체의 구조는 신체의 비의 합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변용 능력이다.
실체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
신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을 비교해 보면, 신 즉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potentia)과 본질의 동일성[신의 본질=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이다. 신은 potestas, 즉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능력을 가진다. 신의 이 변용 능력은 영원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실행된다. 반면 실존 양태는 일정한 역량의 정도의 본질을 갖고 매우 많은 방식으로[a great number of, 큰 수=제한된 것과 관련된 무한] 변용될 능력을 가지며,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실행된다.
실존 양태와 신적 실체의 차이는 무엇인가? ① “무한히 많은 방식”과 “매우 많은 방식”의 차이 : 매우 큰 수는 제한된 것에 관계된다. 그리고 무한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더 혹은 덜 큰 무한이 있다. 반면에 신의 무한은 절대적 무한으로 제한이 없다.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무제한적으로 변용된다.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
② 신의 변용과 양태의 변용의 차이 : 신은 자신이 변용의 원인이므로 무언가의 작용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변용은 능동/작용action이다. 즉 신의 모든 변용들은 그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며/펼쳐지며, 따라서 신의 변용은 모두 능동이다. 다른 것의 작용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실존 양태의 변용은 1차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수동/정념passion이다. 따라서 실존하는 유한 양태에 관해 제기되는 중요한 물음은 “실존하는 유한 양태는 능동적 변용을 가질 수 있느냐? 가질 수 있으면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이다. 스피노자는 이 장 이후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많은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화두로서 “윤리적인” 질문이다. 실천과 관련된 질문으로서 이는 “인간이 어떻게 능동적이 될 수 있느냐?”,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정동 혹은 감정
③ “변용”이라는 말 자체의 내용에 관련된 차이 : 신의 변용은 양태, 양태의 본질, 실존 양태이다. 여기서 양태와 양태의 본질을 나눈 것은 양태의 본질이 본질 자체로 실존을 갖기 때문이다. 반면 양태의 변용은 2차 변용, 변용의 변용이다. 신의 변용이 양태이고 그 양태의 변용이므로 변용의 변용인 것이다. 우리 신체의 변용은 신체적 이미지이고, 우리의 정신 안에 있는 변용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 혹은 상상이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변용이 있다. 바로 감정(affectus)이다. 이것은 변용 관념에서 파생된다. 어떤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으로부터 어떤 감정이 파생되어 나온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둘이 구별된다. 그런데 감정은 곧 변용이고 관념이라는 얘기가 뒤에 나온다. 엄밀하지 않게 보면 감정도 관념인데 엄밀하게 보면 관념에서 파생되는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갖는 관념은 기본적으로 신체 구성의 현실적/현재 상태를 나타낸다. 그 이전 관계나 이후 관계와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와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현재 상태를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전 상태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부적합한 관념과 수동적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양태에게 주어지는 변용은 두 종류다. ① 신체의 상태 그리고 신체의 상태를 지시하는 관념. ② 신체의 변이 그리고 신체의 변이를 함축하는 관념. 상태는 변이의 한 순간이다. 그래서 변이를 나타내는 관념이 있다.
인간은 수동적인 변용 혹은 정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이것은 곧 양태의 조건이기도 하다. 앞에서는 어떻게 능동적 변용을 가질 수 있는가를 질문을 했다면 이번에는 ‘부적합한 관념 외에 다른 것을 가질 수 있냐?’라고 질문한다. 둘은 같은 질문이다. ‘어떻게 수동적 감정 말고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냐?’ 역시 ‘능동적 감정을 느낄 수 있냐?’와 같은 질문이다. 부적합한 관념은 우리가 그 관념의 원인 아닐 때의 관념이다. 수동적 관념=정념은 우리가 그 감정의 원인이 아닐 때의 관념이다. 우리의 변용 능력은 우리의 실존 초기부터/태어날 때부터 부적합한 관념과 수동적 감정에 의해 실행된다/채워진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변용능력이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감정에 의해 실행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질문이다. 적합한 관념과 능동적 감정과의 연관성은 우리가 관념의 원인이고 감정의 원인일 때 능동/작용이 된다. 우리 안의 적합한 관념은 형상적으로 우리가 원인인 관념이다. 우리가 적합한 원인인 감정은 능동/작용이다. 고유하게 윤리적인 물음은 방법론적 물음과 연결된다. ① “우리는 어떻게 능동적인 데 도달하는가?”, 이것이 윤리적 물음이다. ② “우리는 어떻게 적합한 관념들을 생산하는 데 도달하는가?” 이것이 방법론적 물음이다. 두 질문은 연관되어 있다. 적합한 관념을 생산할 수 있으면 능동적이 될 수 있다.
유한 양태의 실존적 변이[비율의 증감variation]
실존적 변이 혹은 표현적 변이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어떤 양태의 변용 능력이 수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될 때 변용 능력 자체는 작동받는 힘으로 나타난다. 신체에서는 작용받는 힘 혹은 역량이고 영혼에서는 상상하는 역량 또는 수동적 감정을 느끼는 역량이다.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때 변용 능력은 작용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비율은 달라진다. 이 비율에 무관하게 변용 능력 자체는 일정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가설에 도달한다. 1)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비율만 달라진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변용 능력은 동일한 가운데, 작용하는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이 반비례한다. 이 두 가지가 비율이 바뀌면서 변용 능력을 구성한다.
2) 변용 능력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왜냐하면 변용 능력은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관점에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실존 양태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비比가 고무풍선처럼 탄성을 갖고 있다. 성장, 노화, 병. 성장하면서 비가 다르고 병에 걸리면 비가 달라진다. 우리는 같은 개체/개인을 분간하기 어렵다. 한 신체를 특징짓는 비比의 변화는 변용 능력에서도 확인한다. 비가 변하므로 변용 능력도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과 비比에 형성과 변형의 폭 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실존이다.
▶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의 최대치-최소치=본질
외연적 부분들이 비 아래 포섭이 된다는 것은 그 비에 맞춰지는 것, 리듬에 따르는 것이다. 입자들이 출렁거리며 운동하는 리듬에 부분들이 따르고 그 리듬 속에 본질이 표현된다. 본질은 비로도 표현되고 변용 능력에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비와 변용 능력은 상응 관계에 있다. 비에 표현되는 게 본질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고 탈이 난다는 것은 신체 일부분의 비가 깨졌음을 뜻한다. 신체가 독의 비에 포섭될 때는 중독이 되는 것이고 신체가 영양분 섭취할 때는 영양분의 부분들이 나를 특징짓는 비 아래 포섭되는 것이다. 장기 이식도 신체가 합성하는 비가 맞아야 가능하다.
외연적 부분들은 단순 신체로 무한히 작은 입자다. 사실상 거의 값이 0에 가까워 독립적으로 실존하지 않고 무한집합으로 다닌다. 그것들이 형성하는 것이 합성이다. 결합 혹은 조합은 항 대 항의 결합 혹은 조합을 의미한다. 여기서 항은 독립적 실존을 갖는다. 하지만 합성은 독립적 실존을 갖지 않는다. 이것이 내재성의 plan이다. 내재성의 plan에는 독립적 실존을 갖지 않는 입자들의 운동과 정지만 있다. 그것이 기관 없는 신체이다.
▶ 비동심원(by 들뢰즈 강의)
외부 원과 내부 원이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까지의 거리에는 차이가 있다. 한 원에서 다른 원까지 최대거리와 최소거리가 있다. 스피노자는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가는 선분들의 합을 고려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부등한 거리의 차이의 합을 고려하라고 했다. 여기서 거리의 부등성은 거리의 차이를 의미하며 합은 제한된/한계를 갖는 무한을 나타낸다. 원 테두리 안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거리의 차이를 합치면 무한히 큰 수가 나온다.
본질은 역량 정도이고 역량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이고 강도량이다. 역량 정도는 차이 자체다.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 자체다.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신체들 각각 역시 그것을 특징짓는 비들이 있다. 우리는 비들의 합이 아니라, 비들 사이의 차이들의 합이다. 본질, 즉 역량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두 개의 문턱 사이에 놓여 있다. 진드기는 포식했을 때 최대 문턱에 이르고 포식한 후 최소 문턱에 이르러 죽는다.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곧 미분비이다. 독립적인 실존을 갖지 않는 것들이 관계를 맺어서 형성되는 비이다. 비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도 각각의 비는 미분소( dx/dy)이다. 이것들은 값이 없고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것이고 둘이 붙을 때 값을 갖는다. 이것이 무한집합들과 무한집합들 사이의 비이다. 무한히 많은 입자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각각의 입자들은 값을 갖지 않는 무한한 dx, 무한한 dy이다. 비는 곧 리듬이고 파동이다.
라이프니츠에게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 스피노자에게 작용 역량과 피동 역량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서 두 층위가 구별된다. 라이프니츠의 테제에 따르면 “파생적 힘”은 이중적이다. 작용하는 힘과 작용 받는 힘,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 그런데 능동적 힘은 장애물을 만나는가 외력을 만나는가에 따라 “죽어” 있을 수도 있고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런데 더 깊은 층위에서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묻는다. 이 두 힘이 별개의 힘이냐? 별개의 힘이 아니다. 능동적 힘만이 권리상 실재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이다. 수동적 힘은 자율적 힘이 아니라 능동적 힘의 제한이다. 실재하는 것은 능동적 힘이고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을 제한하는 것이다. 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의 제한이고 본질의 제한이다. 즉 라이프니츠는 어떤 층위에서는 두 가지의 별개의 힘이 있다고 하고 어떤 층위에서는 힘이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다음 테제를 제시한다. 어떤 층위에서는 작용받는 역량과 작용하는 역량이 상관적으로 변한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작용 받은 역량이 적극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작용 받는 힘은 작용하는 힘의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이다. 두 역량이 상관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자연학적으로는 참인데 형이상학적으로는 참이 아니다. 왜냐면 작용 받는 역량은 제한이고 negative하고 본질의 층위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작용 역량은 적극적이고 실재적인가
작용 역량은 변용 능력의 유일한 실재적·적극적·긍정적 형식이다. 작용 역량만이 변용 능력의 positive한 형식이다. positive는 플러스(+)를 의미한다[작용받는 역량negative(-)]. 능동적 변용들은 변용 능력을 실재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작용 역량 단독으로 변용 능력이다. 변용 능력=작용 역량. 작용 역량과 작용받는 역량은 서로 상관적으로 변하면서 변용 능력을 구성한다. 작용 받는 역량은 작용 역량의 제한이기에 작용 역량은 곧 변용 역량이다. 그래서 작용 역량이 단독으로 본질을 표현한다. 본질은 작용 역량과 같고 작용 역량은 변용 능력과 같다. 형이상학적인 층위에서 보면 본질=작용 역량=변용 능력이다. 자연학적 층위에서는 두 가지 힘이 있지만 형이상학적 층위에서는 한가지 힘만 있다.
자연학적 착상 : 우리의 변용 능력은 언제나 실행된다
두 가지 근본적 착상이 양립한다. 자연학적 착상에 따르면, 변용 능력은 일정하다. 윤리학적 착상에 따르면, 변용 능력은 극단적 한계들 내에서만 일정하다. 수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될 때는 변용 능력은 최소화되고 우리의 역량 정도와 분리된다. 반대로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면 변용 능력은 최대화화된다. 변용 능력에는 최대치와 최소치가 있다. 따라서 유한 양태의 표현적 변이들은 단지 변용affection의 기계론적 변이들만이 아니다. 변용 능력의 역학적[역동적] 변이[힘 자체가 변할 수 있다]이자 본질 자체의 “형이상학적” 변이[본질 자체도 변할 수 있다]이다. 어느 순간 그것에 속하는 변용들에 따라 본질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윤리학적 착상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된다
윤리학적 물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변용을 할 수 있는지도 우리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우리의 변용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 수동적 변용들로 실행된다. 이것을 능동적 변용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가다 보면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동적 변용의 비율이 훨씬 더 크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죽는다. 몇몇 예외적인 사람들은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높인다. ‘능동적 변용의 비율을 높이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과 통한다. 능동적이 되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산다.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른 채. 대부분 인간은 작용 받을 때만 자신이 실존한다고 느낀다. 수동적인 인간이고 노예인 것이다. “(무지한 사람은)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주의 비판, 그 비판의 애매성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양태 이론은 피조물에게서 능동성, 역동성, 개체성 등을 모두 박탈하는 수단이다. 양태는 실체의 가상, 환영, 가상의 사영射影들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이와 같은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 비판은 틀린 것이다. 양태 관념은 피조물에게서 고유한 역량을 박탈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물들이, 양태들이 어떻게 신의 역량을 “분유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핵심은 사물 또는 양태 자체에 고유의 역량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양태는 고유한 힘, 내속하는 힘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들뢰즈가 볼 때 그렇지 않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공통점 : 데카르트에게 반대하는 새로운 자연주의 기획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공통의 기획을 갖고 있다. 새로운 “자연주의”이다. 데카르트의 수학적이고 기계론적인 학문 기획의 결과는 자연에서 잠재성virtualit, 잠재력potentialité, 내재적 능력 등을 박탈해서 자연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연장에 관한 논의에 따르면 연장은 자동력이 없고 형태와 위치 변화만 있다. 물체 자체의 고유성은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반데카르트주의적 반발/반작용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공통 전선이다. 힘 또는 역량을 지닌 자연의 권리를 복원하는 것이 반데카르트주의적 반작용이다. 그러면서도 데카르트의 기계론의 성과는 보존한다.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자연주의적 프로그램은 자연에 고유한 힘을 되돌려주는 데 있다. 스피노자의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라이프니츠는 ‘물체에서 모든 일은 형태와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에서 말하는 물체의 경우 어떤 형태와 어떤 운동인가? 왜 그 형태, 그 운동인가? 이것을 설명하려면 형태와 운동보다 더 심층의 어떤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계론은 물체의 본성 혹은 본질 관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기계론에는 물체의 본성 혹은 본질 관념이 없다. 그러므로 특정한 형태, 특정한 운동,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그것의 이유, 그것의 충분 이유로서의 본질, 본성 관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공유하는 철학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에게 세 층위
데카르트에게는 기계론과 형이상학 두 층위밖에 없다. 게다가 형이상학에서는 존재를 자연 밖의 것, 신에게 있는 것으로 본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하나의 층위를 더 추가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은 세 층위에서 실현된다. [1] 물체에서 모든 일은 형태와 운동에서 일어난다. 이는 데카르트의 성과를 받아들인 것이다. [2] 운동은 주어진 어느 순간의 물체의 변별적 표시를 갖고 있지 않다. 운동 자체가 힘을 전제한다. 이 힘이 없으면 물체도 물체의 형태도 구별되지 않는다. 기계론적 법칙들 자체가 물체들의 내밀한 본성을 전제한다. 여기서 기계론적 법칙이란 운동의 법칙을 말한다. 물체의 본성, 본질로서의 힘이 있어야 운동과 물체의 구별됨을 설명할 수 있다. [3] 파생적 힘은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에 관련된다.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은 원초적/근원적 힘 혹은 개체적 본질이다. 이 순간들의 계열의 법칙이 파생적 힘들의 원천이다. 즉 라이프니츠에게는 기계론, 역학, 형이상학의 세 층위가 있다. ①형태와 운동만 있는 기계론의 층위, ②작용하는 힘과 작용받는 힘의 역학의 층위, ③ 파생적 힘의 원천이 되는 개체의 본질, 혹은 원초적/근원적 힘. 여기서 원초적 힘은 본질, 물체의 본성이다.
스피노자에게도 똑같이 기계론, 역학, 본질의 세 층위가 있다. ①기계론은 무한하게 합성된 실존 물체/신체들을 규제한다. ②이 기계론은 변용 능력의 역학 이론[역본설]에 관련된다. ③ 작용하고 작용 받는 역량의 변이에서 표현되는 특수 본질 이론[형이상학]에 관련된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가 세 번째 층위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모든 것은 메타자연학=형이상학이 아니라 자연학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강도량으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안 쓴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기계론, 힘, 본질, 세 층위가 구별된다. 그런데 스피노자주의가 피조물들에게서 모든 능력과 모든 능동성을 박탈한다고 주장하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두 철학자 사이의 진짜 대립은 악·섭리·종교 문제, 철학의 역할의 실천적 개념화에 관한 실천적 이유에 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진정한 대립 : 코나투스
코나투스 개념을 두고 두 철학자가 갈라진다. 라이프니츠에게 코나투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자연학적으로는 물체/신체가 운동하려는 경향. [2] 형이상학적으로는 본질이 실존하려는 경향. 스피노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양태의 본질은 “가능태”가 아니므로 실존하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전부tout ce qu'elles sont다. 결여가 없다. 따라서 양태의 본질은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함축하지 않는다. 코나투스는 양태의 본질인 바, 이 본질은 실존한 다음에 양태가 갖는 본질이다. 본질 자체의 실존, 즉 강도적 차원의 실존은 아니다. 실존한 다음에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경향성이 코나투스인 것이다. 단순 신체의 코나투스는 ‘자기에게 결정된 상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고 합성 신체의 코나투스는 신체를 정의하는 운동과 정지의 비比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코나투스의 결정으로서의 변용
실존 양태의 코나투스와 양태의 변용은 분리되지 않는다. 변용에 의해 코나투스가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정념은 우리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시키는가
변용은 코나투스 혹은 본질을 결정한다.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변용에 의해 결정되는 코나투스는 “욕망”이다. 실존 양태에 한해서 본질은 욕망이다. 수동적 변용은 아무리 낮더라도 우리의 작용 역량의 한 정도를 함축한다. 만약에 수동적 변용에 의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된다면 그 이유는 작용 역량이 부동화되고, 고착화되고, 수동적 변용에 투여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감기에 걸려 나의 신체와 비가 맞지 않는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것과 싸우기 위해 작용 역량이 집중 투여된다. 그런데 이 때 나의 작용 역량이 제한되므로 기력이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코나투스는 작용 역량과 동일하다. 코나투스의 변이들은 작용 역량의 역학적[역동적] 변이다.
표현적 자연 : 목적성 있는 자연주의인가, 목적성 없는 자연주의인가?
모든 실천적 대립들이 파생되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진짜 차이는 무엇인가? 기계론이 두 가지 방식으로 지양된다. ①역량의 변이에 의해 정의되는 변용 능력의 역본설에 관련된다[두번째 층위]. ②역량 정도로 정의되는 개별 본질들의 설정positionn에 관련된다[세번째 층위]. 기계론이 역본설과 본질 이론에 의해 지양된다. 라이프니츠는 사물에게 내속하는 고유한 힘이 있음을 인정할 때 개체의 본질[모나드]을 실체로 만든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체의 본질들은 양태의 본질이고 사물들 자체를 유일 실체의 양태들로 만든다. 이 차이는 여전히 부정확하다. 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기계론은 부분적으로 초월적으로 머물러 있는 목적성의 요구들에 관련된다. 그의 예정조화설에 따르면 신의 섭리가 중요하며 신은 항상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어떤 본질이 현실화되는지는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즉 라이프니츠에게는 기계론과 목적성 사이에 일치, 조화가 있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기계론이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순수 인과성의 요구들에 관련된다. 바로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이 두 철학자 간의 진짜 차이다. 라이프니츠와 다르게 스피노자의 역본설과 “본질주의”는 목적성을 배제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의 기능은 역본설에서 목적론적 의미를 떼어냄으로써 역본설의 참모습[역본설이 무엇인지]을 보여준다.
양태의 완전한 트라이어드. [1] 양태의 본질은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된다. [2] 이 비比는 변용 능력을 표현한다. [3] 이 변용능력은 가변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된다. 이 표현의 세 층위들 사이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합목적적 대응도 도덕적 조화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내재인의 상이한 결과들의 필연적 연쇄만 있다.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은 “자연학적”이다. [1] 강도량의 자연학, [2] 외연량의 자연학, [3] 힘의 자연학
▶ 코나투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경향성이다. 스피노자는 ‘노력’이라는 말을 쓰지만 들뢰즈는 노력에는 의지가 개입된다고 보면서 사용을 피한다. 감기에 걸렸을 때 이를 물리치려는 경향이 코나투스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게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에 의해 내 신체가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운동이 코나투스다. 나와 비가 잘 맞는 신체와 합성하려는 경향도 코나투스다. 신체의 현재의 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도 코나투스다.
▶ 변용이 본질을 결정한다.
변용에 따라 본질이 달라질 수 있다. 어느 순간 그 순간에 변하는 변용에 따라 양태의 본질이 변할 수 있다[본질의 순간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본질은 최대치와 최소치 사이를 오가며 변한다. 또한 능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되는지, 수동적 변용에 의해 실행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들뢰즈는 자유의지를 싫어한다.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는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가령,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중력의 작용을 덜 받을 수는 있다.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신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뭔가 탈이 났을 때야 알게 된다. 이성적이 되는 것도 능력이고 미치는 것도 능력이다. 미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 때문에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고 게다가 그것을 하고 싶은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정신과 신체가 나란히 평행해서 간다.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면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X./상상조차 수동이거나 외부 원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