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8스피노자와표현문제
13장 양태의 실존
양태의 실존은 어떤 것인가 : 실존과 외연적 부분들
양태의 실존은 매우 많은 수의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많은 수’는 우리식의 표현이고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매우 큰 수a great number of/grands nombres”를 의미한다. 여기서 ‘매우 많다’는 것은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또한 수도 편의상의 표현으로 수적으로 많은 게 아니라 양적으로 크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부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강도적 부분, 이것이 본질이고 역량이다. 12장에 나오는 내생적 양태들, 강도적‧내생적 부분들. 본질 자체가 실존을 갖는다고 할 때,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도 그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할 때 그 본질의 실존이 바로 내생적 실존이다. 속성 안에 담겨 있는 상태로 실존할 때 그것을 내생적 실존이라고 한다. 2) 외연적 부분. 13장은 외생적 실존에 대해 말한다. 양태는 외연적 부분을 무한히 많이 가질 때 실존한다.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할 때 양태가 실존한다. 이것은 물체나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해당된다. 평행론에 따르면 물체/신체이면서 동시에 영혼이다. 모든 신체는 합성된 신체이고 합성된 신체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단순 신체, 단순 물체]로 이루어진다. 신체가 무한히 단순히 많은 신체로 합성되는 것처럼 영혼도 무한히 많은 단순 관념들로 합성된다.
양태의 본질과 양태의 실존을 구별하면 첫째 양태의 본질은 일정 정도의/특정한 강도, 환원 불가능한 역량 정도degré다. 둘째 양태는 자신의 본질 혹은 역량 정도에 상응하는 매우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할 때 실존한다.
외연량, 두 번째 형식의 양
양태적 양적 무한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강도적인 무한과 외연적인 무한이 있다.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번째 양태적-양적 무한, 즉 외연적인 무한이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적인 예를 제공한다. 두 개의 비동심원, 즉 중심이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거리의 부등성들의 합은 지정가능한 모든 수를 초과한다/넘어선다. 즉 양적으로 무한하다.
▶ 중심이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거리의 부등성들의 합은 지름, 반지름의 합이 아니다. 큰 원에서 작은 원으로 선을 그렸을 때 큰 원에 해당하는 선분에서 작은 원에 해당하는 선분을 뺀 것을 말한다. 무한히 많은 지름을 그려서 다 더하면 무한하다. 외연적 무한을 이렇게 설명해도 된다. 그런데 왜 굳이 원을 두 개 그리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빼라고 했을까?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본질은 역량의 정도인데 역량의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를 갖는다. 다시 말하자면 역량의 정도, 즉 본질은 최대치에서 최소치를 뺀 값이다. 그래서 비동심원 사이에 포함된 거리의 부등성들이 그 본질을 구현하는 어떤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턱이다. 최소 문턱과 최대 문턱의 차이가 본질에 해당하는 값이다.
이 무한한 양은 부정적인(‘~이 아니다’)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불변적이지 않다/일정하지 않다. 늘 똑같지 않다/한결같지 않다. 즉 양이 풍선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한다. 그래서 더 크거나 더 작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무한은 무한인데 값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더 큰 무한일 수도 있고 더 작은 무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중심이 다른 두 원 사이에 포함된 총 공간에는 이 공간의 절반에 있는 것보다 두 배 더 많은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총 공간의 절반에 있는 부분들의 수도 지정가능한 모든 수보다 더 크다”. 총 공간에 있는 부분들도 무한하지만 그것을 반으로 잘랐을 때의 부분들도 무한하다. 그런데 절반에 있는 부분들의 무한보다 총 공간에 있는 부분들의 무한이 더 크다. 무한에는 크기의 차이가 있다. 가령 어떤 공간/원 안에 무한히 많은 부분/점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자른 반원 안에 있는 부분들도 무한하다. 그렇다면 그 무한성은 두 배의 차이가 난다. 이렇게 더 크다 혹은 더 작다라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외연적 무한을 사고할 수 있다. 둘째, “무제한적illimité”이지 않다. 제한이 없는 게 아니다. 즉 제한적이다. 한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두 비동심원 사이에 포함된 거리들의 최대치와 최소치가 있고, 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인 거리들은 제한된 공간, 한정된 공간에 관련된다. 합성된 신체들은 무한히 많은 부분/단순신체로 합성되어 있는데, 그 무한히 많은 단순신체들은 유한한 양태를 합성하므로 한계를 갖는다. 양태가 표현하는 본질, 역량의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셋째, 외연적 양은 부분들의 다수성에 의해서 무한한 것이 아니다. 부분들의 수가 무한히 많아서 무한한 것이 아니다. 수적 무한이 아니고 양적 무한이다. 언제나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수를 초과한다.
양과 수의 차이
양태들의 존재는 양적이지만 수적이지는 않다. 첫째, 양태적 무한, 즉 강도적 무한은 본질, 역량 정도로, 무한의 계열을 이룬다. 그것은 외생적 부분들로 분할될 수 없다. 내생적으로 포함하는 강도적 부분들, 즉 양태들의 본질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만 수로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생산 원리와도 분리된다. 수는 양을 상상하는 방식이거나 양태를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다. 강도적 무한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만 분리가 가능하다. 수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반면에 두 번째 무한, 외연적 무한은 실존물들을 합성하는 외생적 부분들[=단순 신체]로 분할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외생적 부분들은 언제나 무한 집합을 이룬다. 외생적 부분들의 합은 언제나 지정가능한 모든 수를 초과한다. 수를 지정할 수 없다. 무한히 큰 수이다. 실존 양태들은 수로 설명할 수 없다.
두 번째 양태적 무한 이론은 무엇에 관계되는가? 외연적 무한은 양태들의 본질이 아니라 실존에 관련된다. 본질에 관련된 무한은 강도적 무한이다.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만이 아니라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합성된 양태는 매우 많은 수[매우 큰 수]의 부분들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매우 큰 수”는 모든 수를 다 넘어서는/초과하는 다수성을 뜻한다. 사실은 수가 아닌 것이다. 무한한 양을 이야기한 것이다. 역량 정도가 이전 양태의 두 배인 어떤 양태를 생각하면, 이전 양태의 두 배가 더 많은 부분들로 합성된다. 이렇게 위로 올라가면/더하면 무한히 많은 무한 집합들, 모든 집합들의 집합=우주 전체가 된다. 가장 작은 합성된 신체라고 하더라도 무한히 많은 단순한 신체들로 합성되어 있다. 무한집합이다. 이 무한집합을 두 개 합쳐서 더 큰 무한집합을 형성한다. 피가 유미/카일과 림프가 합성된 하나의 신체라고 할 때, 유미와 림프 각각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신체다. 두 무한집합들이 합쳐 피를 구성한다. 심장, 폐, 허파 등은 무한 집합이고 각각이 또한 무한히 많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 이것들을 모두 합치면 인간의 신체가 된다. 인간, 동물, 식물의 신체들을 계속 합치다보면 무한히 많은 무한집합들에 도달하게 된다. 즉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신체다. 그래서 실존 양태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갖는다. 반면 양태의 본질 혹은 역량 정도는 언제나 한계[최대와 최소]를 형성한다. 여기서 최대치를 넘어가면 다른 양태가 되고 최소치보다 더 내려가면 다른 양태가 되거나 죽는다. 즉 문턱인 것이다.
단순 신체들
▶ 물체? 신체? : 스피노자의 사유에서는 신체가 맞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신체와 영혼을 동시에 갖는다. 즉 신체이면서 영혼이다. 신체이면서 정신이다. 탁자에도 영혼/정신이 있다. 정신이 있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신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보통 물체라고 할 때는 정신이나 영혼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물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외연적 부분들이 어디서 오는가. 1) 원자들은 아니다. 원자들은 진공을 내포하는데 스피노자 체계에는 진공이 없다. 입자들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2) 잠재적 항들도 아니다. 무한하게 분할 가능한 잠재적 항=무한정자는 이를테면 잠재적 무한이다. 마지막 항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쪼개도 더 작게 쪼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현실적actual 무한은 말 그대로 현행적으로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궁극적인 외연적 부분들은 현행적/현실적 무한의 무한히 작은 현실적 부분들이다. 여기서 ‘무한히 작은 부분’은 들뢰즈에 따르면 수학에서의 미분소dx에 해당한다. 그것은 그 자체는 값을 갖지 않지만 무한소들 사이의 비/관계가 형성될 때 값을 갖게 된다. 무한히 작아서 한없이 0에 가까운, 즉 단순신체다. 속성은 강도량만이 갖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외연량도 갖는다. 이 무한한 외연량은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로 현실적으로/현행적으로 분할된다. 이 외연적 부분들은 강도적/내생적 부분들이 아니라 서로 외재하는 외연적/외생적 부분들이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외생적 부분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룰 때 이 집합에 상응하는 비가 있다. 입자들이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 아래 결합된다/모인다. 그럴 때 하나의 신체가 된다. 양태가 실존하는 것이다. 양태가 실존한다고 할 때 무한히 많은 현실적 부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일정한 비 아래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저런 한정된/특정된 비比 아래서 이 외생적 부분들은 이런저런 역량 정도, 즉 이런저런 양태의 본질에 상응하는 무한 집합들을 형성한다. 이 무한집합에는 크기 차이가 있다. 더 클 수도 있고 덜 클 수도 있다. 무한한 부분들은 언제나 어떤 역량 정도에 대응/상응한다. 역량 정도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degré가 아무리 낮을지라도, 본질이 아무리 작은 것의 본질일지라도 거기에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상응한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모든 정도degré들을 포괄하는 역량=전능에 대응한다.
연장 속성은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로 현실적으로 분할되는 양태적 외연량을 갖는다. 달리 말하면 연장 속성은 양태적 외연량을 갖는데 이 양태적 외연량은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로 분할된다. 잠재적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분할된다. 쉽게 말하면 현실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 신체들은 오로지 운동과 정지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무한히 많은 입자들은 자체의 고유성을 갖지 않는다.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단순신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그래서 단순신체들은 항상 무한집합들을 이룬다. 단순신체는 항상 무한한 전체를 이뤄 다닌다. 이것들은 개별적 실존이 아니고 무한집합의 일부분들이다. 각각의 무한집합은 운동과 정지의 비比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의 무한집합을 정의하는 것은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라는 것이다. 무한집합을 구성하는 입자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의 비, 이 일정한 비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거기에 해당하는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운동과 정지 비比 아래서 하나의 무한 집합은 이런저런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게 된다. 그리고 연장 안에서 양태의 실존을 구성한다. 피를 구성하는 림프를 특징짓는 운동과 정지의 비, 유미를 특징짓는 운동과 정지의 비, 이 두 비가 어우러져 더 상위의 비를 구성하면 혈액이 된다. 이것도 넓혀가다 보면 전우주에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단순한 신체들에 대응하는 본질들을 찾을 필요는 없다
단순 신체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 집합의 일부로만 존재한다. 단순 신체에 해당하는 본질은 없다. 단순 신체들이 모여서 무한 집합을 형성할 때 그 무한 집합에 해당하는 본질이 있다.
각각의 외연적 부분마다 본질을 찾을 필요는 없다. 외연적 부분은 단순 신체, 미분소, 가장 작은 입자들을 가리킨다. 이것들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강도强度다. 외연적 부분들과 강도들(강도적 부분들)은 결코 일대일, 항 대 항으로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강도라 하더라도 모든 강도에는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대응한다. 외연적 부분들의 무한집합과 강도가 대응 관계다. 그래서 가장 작은 본질에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대응한다.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합성되지 않은 실존 양태는 없다. 본질 또는 역량 정도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모든 실존 양태는 현실적으로 무한히 합성되어 있다. 엄격히 말해 단순한 부분들은 고유한 본질도 실존도 갖지 않는다. 단순 신체들은 고유한 본질, 실존이 없다. 서로 관계를 맺어 일정한 비 아래 놓여야 본질이나 실존을 갖는다. 항상 무한집합을 이루고 이 경우에만 여기에 해당하는 본질이나 실존을 갖는다. 그래서 내적인 본질 혹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어떻게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가?’ 특정한/어떤 운동과 정지의 비比 아래서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은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거나 양태에 속하게 된다. 만약에 이 비를 따르지 않으면 다른 비를 따르게 되는 건데 그러면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칼을 쓰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그 살점은 더 이상 내 신체에 속하지 않게 된다.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을 표현하는 비와는 다른 비를 가진 신체가 들어와서 우리 몸의 비를 파괴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식중독에 걸리면 비가 일시적으로 깨지면서 다른 비로 표현이 되면서 일시적으로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운동과 정지의 비比 아래 들어갈 때, 양태가 “실존하게 된다” 혹은 실존으로 이행한다. 이 비比가 구현/실행되는 한/동안 그 양태는 계속해서 실존한다. 이 특정 비가 실행되지 않으면 그 양태는 실존을 멈추게 된다.
실존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이 매 순간 갱신된다. 세포들이 계속 죽고 만들어지는 것처럼. 갱신된 부분들은 계속 일정비比에 의해 정의되는 한 집합은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따라서 실존 양태는 엄청난 연속적인 변이를 겪는다. 그럼에도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비는 유지된다.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의 무한 집합에 동일한 비比가 존속하는 한 그 양태는 계속해서 실존한다.
유한 양태에서 표현의 첫 번째 트라이어드 : 본질, 특징적 비比, [특정한 비 아래 놓이는] 외연적 부분들
양태의 본질(역량 정도)은 단계적인/계단적인 어떤 비比 속에/비를 통해서 영원히 표현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그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되어야만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이 비 말고 다른 비比 아래 들어갈 수도 있다. 이것은 양태들 상호 간의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비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되면 다른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며 다른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 크고 작은 무한집합에 적분된다. 들뢰즈적 언어에 따르면 ‘통합’은 곧 적분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실존 이론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1) 역량의 정도 혹은 강도인 개별singular 본질, 2)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로 합성된 특수한particular 실존, 3) 개체의 형상/형식form,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무한집합을 형성하면 일정한 형식을 갖는다. 개체적 형식은 다른 말로 하면 특징적 혹은 표현적[본질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비比다. 실존 양태의 본질은 역량의 정도다. 이 역량의 정도, 본질은 어떤/일정한 비比 속에 표현된다. 이 비比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포섭하고 있다. 자기 아래 두고 있다. 스피노자의 정식: “하나의 동일한 본성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이 본성[본질]의 요구에 따라 서로 들어맞도록 강제되는” 부분들.
양태의 본질과 본질이 표현되는 비는 구별해야 한다. 양태의 본질은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되지만,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에 의해서 양태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양태들 간의 상호 관계, 혹은 외연적 부분들 간의 상호관계이다. 외연적 부분들은 바깥에서 상호 결정된다. 상호 작용을 통해 어떤 비 아래에 들어갈지 결정이 된다. 외생적 결정만을 갖는다. 본질에 의해서 실존이 결정되는 것은 실체 또는 신밖에 없다. 양태들은 외연적 부분들의 상호 결정에 의해 실존한다. 이와 같은 외연적 부분들의 상호작용의 법칙을 기계론적 법칙이라고 한다.
비比들의 합성 및 분해 법칙
기계론적 법칙들은 무엇인가?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의 전달 법칙이다. 단순 신체들은 무한히 많은 비들 중 하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비比 아래서 어떤 집합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총비율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이 비比들은 합성과 분해의 법칙에 따라 형성되고 와해된다. 합성과 분해의 법칙에 따라 비들이 합성되고 분해되는 예로는 유미/카일과 림프가 있다. 이것은 두 개의 비가 직접 합성될 수 있는 경우다. 이전의 두 비比가 합성되어서 제3의 비比 아래서 한 신체[카일]의 부분들이 다른 신체[림프]의 부분들에 맞춰진다. 이것들이 제3의 신체, 상위의 신체를 형성한다. 모든 탄생 혹은 모든 형성 과정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모두 ‘실존으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부분들은 서로 다른 두 비比 아래서 마주친다. 즉 각자 다른 비 아래에 있는 상태에서 마주친다. 두 개의 비比 각각이 다른 양태의 본질에 대응한다. 두 비比가 합성되어서 마주치는 부분들이 제3의 비比 아래 들어간다. 이때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한다. 카일과 림프의 각 부분들이 마주쳐서 하나의 비/제3의 비에 들어가 피라는 신체가 실존한다. 두 비比가 직접 합성가능하지 않을 경우/비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마주치는 신체들이 서로 무관심하거나, 둘 중 하나가 다른 신체의 비比를 분해하여 다른 신체를 파괴한다. 독이 그렇다. 영양섭취는 반대 방향으로의 작용에 해당한다. 파괴이지만 파괴된 신체의 비가 거기에 맞춰진다.
양태들의 실존으로의 이행과 양태들의 실존과 종말을 결정하는 것은 비比들의 합성 및 분해 법칙이다. 합성과 분해의 법칙들은 어떤 비比가 실행/구현되거나 반대로 실행되기를 멈추는 조건을 결정한다. 그래서 본질과 비比를 구별해야 한다. 본질은 외연적 부분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비比는 외연적 부분들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 본질은 오로지 강도적 부분들하고만 관계된다. 비 속에 본질이 표현되지만 비의 실행을 결정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비들은 자체의 법칙들에 따라 합성되고 분해된다. 본질들의 질서는 총체적 합치/어우러짐에 의해 정의된다. 본질들 간에는 불화가 없다. 흰색의 무한한 degré끼리 상충되거나 부딪히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degré 안에 무한히 많은 degré가 포개져있다. 하지만 비들의 질서는 다르다. 모든 비比는 무한하게 조합되기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조합되지는 않는다. 직접 합성되는 비가 있고 합성되지 않는 비가 있다. 비의 질서와 본질의 질서는 다르다. 비의 질서는 본질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과 실존의 구별의 의미
양태의 실존은 양태의 본질에서 파생되지 않는다. 양태가 실존하게 될 때, 비比를 합성하는 기계론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강제하는 기계론적 법칙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결정된다. 양태의 실존으로의 이행은 가능태에서 실재로의 이행이 아니다. 본질이 가능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처에 존재의 유일한 양상으로서의 필연성/인과관계가 있다. 필연성에는 본질의 층위와 양태의 실존의 층위라는 두 층이 있다. 실존 양태는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한에서의 본질 자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와 보어만 보면 ‘실존 양태는 본질 자체이다’? 하지만 단서가 붙는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한다는 한에서의 본질.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기계론적 법칙에 따른다는 얘기다. 본질이 그것의 원인에 의해 실존하는 것처럼 양태도 그것의 원인에 의해 실존한다. 양태의 원인은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이 양태에 속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래서 인과성의 두 가지 형식 때문에 양태의 position의 두 가지 유형, 양태적 구별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본질의 실존을 결정하는 인과성과 2)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인과성이 있다. 본질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쉽게 말해 신이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기계론적 법칙, 외연적 부분들 간의 상호 인과성의 법칙이다.
실존 양태들의 구별 문제
양태의 본질을 고려할 때 그것을 강도적 실재성이다. 양태의 본질들은 내생적 구별에 따라서만 속성과 구별되고 상호 간에도 구별된다. 양태의 본질들은 외생적으로는 구별이 안된다. 그것이 강도적인 차원의 구별이다. 양태들은 실존으로 이행할 때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하면서 속성과 외생적으로 구별되고, 서로 외생적으로 구별된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내성적 구별만 있고 실존 양태들은 외생적 구별만 있다. 본질의 존재는 강도적 존재를, 실존의 존재는 외연적 존재를 말한다. 내생적/외생적, 강도적/외연적 이렇게 구별된다.
어떻게 실존 양태는 속성과 외생적으로 구별되는가
본질의 존재(본질의 실존)는 신의 속성 안에 본질의 위치/자리position다.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했을 때, 실존의 존재(사물 자체의 실존)는 역시 본질의 position이지만 속성 밖의 외생적 position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속성 밖에 놓인다는 것이 아니라 속성과는 외생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본질의 존재는 속성과 구별이 안 된다. 양태적 본질은 내생적으로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양태의 위치를 둘로 나뉜다. 양태들은 속성 밖에 놓이더라도 양태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외생적 position은 실체적 position이 아니고 양태적 position이다.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해서 외생적 position을 가져도 내재성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내재성의 관점에서 양태들은 실존으로 이행해도 실체에 속하고 실체 안에 담겨 있기를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실체에 속하고 실체 안에, 속성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더 탐구할 필요가 없다.
외연량은 강도량 못지않게 속성에 속한다. 이 외연량은 고유하게 양태적인 외부성의 형식이다. 그렇다면 강도량은 내부성의 형식이다. 강도량이든 외연량이든 속성에 속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외연량은 외부성의 형식이다. 실존 양태들을 속성에 외부적인 것으로, 서로 외부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속성과 구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연량은 모든 실존 양태들처럼 속성 안에 담겨 있다. 속성 안에 담겨 있음은 그대로 유지된다. 속성 밖의 외생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어떤 외연적 부분을 획득해서 속성과 구별된다는 것이지 속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아니다. 내생적인 양태들의 본질은 속성과 아예 구별이 안된다. 본질끼리도 구별이 안된다. 이것이 내생적 position이다. 양태들의 본질들이 외생적 position을 갖게 되면 속성과도 구별되고 양태들 서로 간에도 구별된다. 하지만 속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실존 양태와 펼침
외생적인 양태적인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장에 내생적 양태적 구별, 본질들의 구별이 나온다. 이 내생적 양태적 구별과 대비되는 외생적 양태적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생적 position의 대상이 될 때 양태들은 그전에는 본질이 단지 속성 안에 담겨 있기만 할 때의 형식=포개진/복합된 형식으로 실존하기를 멈추고 펼침의 형식으로 실존한다. 그래서 양태들은 속성을 펼치고, 각각은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일정한 방식으로 속성을 펼친다. 다시 말해 각각의 실존 양태는 그것을 특징짓는 비比 아래서, 다른 방식들과 외생적으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속성을 펼친다. 그래서 속성은 자기가 포개거나 담고있는/함유하는 양태의 본질들을 통해, 양태들의 본질의 역량 정도에 따라 자신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속성은 이제 실존 양태들을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하는데, 실존 양태들은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본질에 대응하는 비比에 따라 속성을 펼친다. 양태적 표현 전체는 이러한 포갬과 펼침의 이중 운동이다. 포갬은 양태의 본질에 해당하고 펼침은 양태의 실존에 해당한다.
20210108스피노자와표현문제
13장 양태의 실존
양태의 실존은 어떤 것인가 : 실존과 외연적 부분들
양태의 실존은 매우 많은 수의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갖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많은 수’는 우리식의 표현이고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매우 큰 수a great number of/grands nombres”를 의미한다. 여기서 ‘매우 많다’는 것은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또한 수도 편의상의 표현으로 수적으로 많은 게 아니라 양적으로 크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부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강도적 부분, 이것이 본질이고 역량이다. 12장에 나오는 내생적 양태들, 강도적‧내생적 부분들. 본질 자체가 실존을 갖는다고 할 때,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도 그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할 때 그 본질의 실존이 바로 내생적 실존이다. 속성 안에 담겨 있는 상태로 실존할 때 그것을 내생적 실존이라고 한다. 2) 외연적 부분. 13장은 외생적 실존에 대해 말한다. 양태는 외연적 부분을 무한히 많이 가질 때 실존한다.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할 때 양태가 실존한다. 이것은 물체나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해당된다. 평행론에 따르면 물체/신체이면서 동시에 영혼이다. 모든 신체는 합성된 신체이고 합성된 신체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단순 신체, 단순 물체]로 이루어진다. 신체가 무한히 단순히 많은 신체로 합성되는 것처럼 영혼도 무한히 많은 단순 관념들로 합성된다.
양태의 본질과 양태의 실존을 구별하면 첫째 양태의 본질은 일정 정도의/특정한 강도, 환원 불가능한 역량 정도degré다. 둘째 양태는 자신의 본질 혹은 역량 정도에 상응하는 매우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할 때 실존한다.
외연량, 두 번째 형식의 양
양태적 양적 무한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강도적인 무한과 외연적인 무한이 있다.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번째 양태적-양적 무한, 즉 외연적인 무한이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적인 예를 제공한다. 두 개의 비동심원, 즉 중심이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거리의 부등성들의 합은 지정가능한 모든 수를 초과한다/넘어선다. 즉 양적으로 무한하다.
▶ 중심이 다른 두 개의 원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거리의 부등성들의 합은 지름, 반지름의 합이 아니다. 큰 원에서 작은 원으로 선을 그렸을 때 큰 원에 해당하는 선분에서 작은 원에 해당하는 선분을 뺀 것을 말한다. 무한히 많은 지름을 그려서 다 더하면 무한하다. 외연적 무한을 이렇게 설명해도 된다. 그런데 왜 굳이 원을 두 개 그리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빼라고 했을까?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본질은 역량의 정도인데 역량의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를 갖는다. 다시 말하자면 역량의 정도, 즉 본질은 최대치에서 최소치를 뺀 값이다. 그래서 비동심원 사이에 포함된 거리의 부등성들이 그 본질을 구현하는 어떤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턱이다. 최소 문턱과 최대 문턱의 차이가 본질에 해당하는 값이다.
이 무한한 양은 부정적인(‘~이 아니다’)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불변적이지 않다/일정하지 않다. 늘 똑같지 않다/한결같지 않다. 즉 양이 풍선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한다. 그래서 더 크거나 더 작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무한은 무한인데 값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더 큰 무한일 수도 있고 더 작은 무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중심이 다른 두 원 사이에 포함된 총 공간에는 이 공간의 절반에 있는 것보다 두 배 더 많은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총 공간의 절반에 있는 부분들의 수도 지정가능한 모든 수보다 더 크다”. 총 공간에 있는 부분들도 무한하지만 그것을 반으로 잘랐을 때의 부분들도 무한하다. 그런데 절반에 있는 부분들의 무한보다 총 공간에 있는 부분들의 무한이 더 크다. 무한에는 크기의 차이가 있다. 가령 어떤 공간/원 안에 무한히 많은 부분/점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자른 반원 안에 있는 부분들도 무한하다. 그렇다면 그 무한성은 두 배의 차이가 난다. 이렇게 더 크다 혹은 더 작다라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외연적 무한을 사고할 수 있다. 둘째, “무제한적illimité”이지 않다. 제한이 없는 게 아니다. 즉 제한적이다. 한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두 비동심원 사이에 포함된 거리들의 최대치와 최소치가 있고, 이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인 거리들은 제한된 공간, 한정된 공간에 관련된다. 합성된 신체들은 무한히 많은 부분/단순신체로 합성되어 있는데, 그 무한히 많은 단순신체들은 유한한 양태를 합성하므로 한계를 갖는다. 양태가 표현하는 본질, 역량의 정도는 최대치와 최소치의 차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셋째, 외연적 양은 부분들의 다수성에 의해서 무한한 것이 아니다. 부분들의 수가 무한히 많아서 무한한 것이 아니다. 수적 무한이 아니고 양적 무한이다. 언제나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수를 초과한다.
양과 수의 차이
양태들의 존재는 양적이지만 수적이지는 않다. 첫째, 양태적 무한, 즉 강도적 무한은 본질, 역량 정도로, 무한의 계열을 이룬다. 그것은 외생적 부분들로 분할될 수 없다. 내생적으로 포함하는 강도적 부분들, 즉 양태들의 본질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만 수로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생산 원리와도 분리된다. 수는 양을 상상하는 방식이거나 양태를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다. 강도적 무한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만 분리가 가능하다. 수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반면에 두 번째 무한, 외연적 무한은 실존물들을 합성하는 외생적 부분들[=단순 신체]로 분할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외생적 부분들은 언제나 무한 집합을 이룬다. 외생적 부분들의 합은 언제나 지정가능한 모든 수를 초과한다. 수를 지정할 수 없다. 무한히 큰 수이다. 실존 양태들은 수로 설명할 수 없다.
두 번째 양태적 무한 이론은 무엇에 관계되는가? 외연적 무한은 양태들의 본질이 아니라 실존에 관련된다. 본질에 관련된 무한은 강도적 무한이다.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만이 아니라 에티카에서도 스피노자는 합성된 양태는 매우 많은 수[매우 큰 수]의 부분들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매우 큰 수”는 모든 수를 다 넘어서는/초과하는 다수성을 뜻한다. 사실은 수가 아닌 것이다. 무한한 양을 이야기한 것이다. 역량 정도가 이전 양태의 두 배인 어떤 양태를 생각하면, 이전 양태의 두 배가 더 많은 부분들로 합성된다. 이렇게 위로 올라가면/더하면 무한히 많은 무한 집합들, 모든 집합들의 집합=우주 전체가 된다. 가장 작은 합성된 신체라고 하더라도 무한히 많은 단순한 신체들로 합성되어 있다. 무한집합이다. 이 무한집합을 두 개 합쳐서 더 큰 무한집합을 형성한다. 피가 유미/카일과 림프가 합성된 하나의 신체라고 할 때, 유미와 림프 각각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는 신체다. 두 무한집합들이 합쳐 피를 구성한다. 심장, 폐, 허파 등은 무한 집합이고 각각이 또한 무한히 많은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 이것들을 모두 합치면 인간의 신체가 된다. 인간, 동물, 식물의 신체들을 계속 합치다보면 무한히 많은 무한집합들에 도달하게 된다. 즉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신체다. 그래서 실존 양태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갖는다. 반면 양태의 본질 혹은 역량 정도는 언제나 한계[최대와 최소]를 형성한다. 여기서 최대치를 넘어가면 다른 양태가 되고 최소치보다 더 내려가면 다른 양태가 되거나 죽는다. 즉 문턱인 것이다.
단순 신체들
▶ 물체? 신체? : 스피노자의 사유에서는 신체가 맞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신체와 영혼을 동시에 갖는다. 즉 신체이면서 영혼이다. 신체이면서 정신이다. 탁자에도 영혼/정신이 있다. 정신이 있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신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보통 물체라고 할 때는 정신이나 영혼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물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외연적 부분들이 어디서 오는가. 1) 원자들은 아니다. 원자들은 진공을 내포하는데 스피노자 체계에는 진공이 없다. 입자들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2) 잠재적 항들도 아니다. 무한하게 분할 가능한 잠재적 항=무한정자는 이를테면 잠재적 무한이다. 마지막 항이 있기는 한데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쪼개도 더 작게 쪼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현실적actual 무한은 말 그대로 현행적으로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궁극적인 외연적 부분들은 현행적/현실적 무한의 무한히 작은 현실적 부분들이다. 여기서 ‘무한히 작은 부분’은 들뢰즈에 따르면 수학에서의 미분소dx에 해당한다. 그것은 그 자체는 값을 갖지 않지만 무한소들 사이의 비/관계가 형성될 때 값을 갖게 된다. 무한히 작아서 한없이 0에 가까운, 즉 단순신체다. 속성은 강도량만이 갖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외연량도 갖는다. 이 무한한 외연량은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로 현실적으로/현행적으로 분할된다. 이 외연적 부분들은 강도적/내생적 부분들이 아니라 서로 외재하는 외연적/외생적 부분들이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외생적 부분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룰 때 이 집합에 상응하는 비가 있다. 입자들이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 아래 결합된다/모인다. 그럴 때 하나의 신체가 된다. 양태가 실존하는 것이다. 양태가 실존한다고 할 때 무한히 많은 현실적 부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일정한 비 아래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저런 한정된/특정된 비比 아래서 이 외생적 부분들은 이런저런 역량 정도, 즉 이런저런 양태의 본질에 상응하는 무한 집합들을 형성한다. 이 무한집합에는 크기 차이가 있다. 더 클 수도 있고 덜 클 수도 있다. 무한한 부분들은 언제나 어떤 역량 정도에 대응/상응한다. 역량 정도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degré가 아무리 낮을지라도, 본질이 아무리 작은 것의 본질일지라도 거기에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상응한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모든 정도degré들을 포괄하는 역량=전능에 대응한다.
연장 속성은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로 현실적으로 분할되는 양태적 외연량을 갖는다. 달리 말하면 연장 속성은 양태적 외연량을 갖는데 이 양태적 외연량은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로 분할된다. 잠재적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분할된다. 쉽게 말하면 현실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 신체들은 오로지 운동과 정지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무한히 많은 입자들은 자체의 고유성을 갖지 않는다.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이 ~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단순신체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그래서 단순신체들은 항상 무한집합들을 이룬다. 단순신체는 항상 무한한 전체를 이뤄 다닌다. 이것들은 개별적 실존이 아니고 무한집합의 일부분들이다. 각각의 무한집합은 운동과 정지의 비比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의 무한집합을 정의하는 것은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라는 것이다. 무한집합을 구성하는 입자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의 비, 이 일정한 비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거기에 해당하는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운동과 정지 비比 아래서 하나의 무한 집합은 이런저런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게 된다. 그리고 연장 안에서 양태의 실존을 구성한다. 피를 구성하는 림프를 특징짓는 운동과 정지의 비, 유미를 특징짓는 운동과 정지의 비, 이 두 비가 어우러져 더 상위의 비를 구성하면 혈액이 된다. 이것도 넓혀가다 보면 전우주에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단순한 신체들에 대응하는 본질들을 찾을 필요는 없다
단순 신체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 집합의 일부로만 존재한다. 단순 신체에 해당하는 본질은 없다. 단순 신체들이 모여서 무한 집합을 형성할 때 그 무한 집합에 해당하는 본질이 있다.
각각의 외연적 부분마다 본질을 찾을 필요는 없다. 외연적 부분은 단순 신체, 미분소, 가장 작은 입자들을 가리킨다. 이것들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강도强度다. 외연적 부분들과 강도들(강도적 부분들)은 결코 일대일, 항 대 항으로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강도라 하더라도 모든 강도에는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대응한다. 외연적 부분들의 무한집합과 강도가 대응 관계다. 그래서 가장 작은 본질에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이 대응한다.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합성되지 않은 실존 양태는 없다. 본질 또는 역량 정도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모든 실존 양태는 현실적으로 무한히 합성되어 있다. 엄격히 말해 단순한 부분들은 고유한 본질도 실존도 갖지 않는다. 단순 신체들은 고유한 본질, 실존이 없다. 서로 관계를 맺어 일정한 비 아래 놓여야 본질이나 실존을 갖는다. 항상 무한집합을 이루고 이 경우에만 여기에 해당하는 본질이나 실존을 갖는다. 그래서 내적인 본질 혹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어떻게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가?’ 특정한/어떤 운동과 정지의 비比 아래서 무한히 많은 단순 신체들은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거나 양태에 속하게 된다. 만약에 이 비를 따르지 않으면 다른 비를 따르게 되는 건데 그러면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칼을 쓰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그 살점은 더 이상 내 신체에 속하지 않게 된다.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을 표현하는 비와는 다른 비를 가진 신체가 들어와서 우리 몸의 비를 파괴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식중독에 걸리면 비가 일시적으로 깨지면서 다른 비로 표현이 되면서 일시적으로 다른 양태에 속하게 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운동과 정지의 비比 아래 들어갈 때, 양태가 “실존하게 된다” 혹은 실존으로 이행한다. 이 비比가 구현/실행되는 한/동안 그 양태는 계속해서 실존한다. 이 특정 비가 실행되지 않으면 그 양태는 실존을 멈추게 된다.
실존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이 매 순간 갱신된다. 세포들이 계속 죽고 만들어지는 것처럼. 갱신된 부분들은 계속 일정비比에 의해 정의되는 한 집합은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따라서 실존 양태는 엄청난 연속적인 변이를 겪는다. 그럼에도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비는 유지된다.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의 무한 집합에 동일한 비比가 존속하는 한 그 양태는 계속해서 실존한다.
유한 양태에서 표현의 첫 번째 트라이어드 : 본질, 특징적 비比, [특정한 비 아래 놓이는] 외연적 부분들
양태의 본질(역량 정도)은 단계적인/계단적인 어떤 비比 속에/비를 통해서 영원히 표현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그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되어야만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한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이 비 말고 다른 비比 아래 들어갈 수도 있다. 이것은 양태들 상호 간의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비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되면 다른 양태의 본질에 대응하며 다른 양태의 실존을 합성하는, 크고 작은 무한집합에 적분된다. 들뢰즈적 언어에 따르면 ‘통합’은 곧 적분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실존 이론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1) 역량의 정도 혹은 강도인 개별singular 본질, 2)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로 합성된 특수한particular 실존, 3) 개체의 형상/형식form,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 무한집합을 형성하면 일정한 형식을 갖는다. 개체적 형식은 다른 말로 하면 특징적 혹은 표현적[본질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비比다. 실존 양태의 본질은 역량의 정도다. 이 역량의 정도, 본질은 어떤/일정한 비比 속에 표현된다. 이 비比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포섭하고 있다. 자기 아래 두고 있다. 스피노자의 정식: “하나의 동일한 본성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이 본성[본질]의 요구에 따라 서로 들어맞도록 강제되는” 부분들.
양태의 본질과 본질이 표현되는 비는 구별해야 한다. 양태의 본질은 특징적 비比 속에 표현되지만,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결정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에 의해서 양태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양태들 간의 상호 관계, 혹은 외연적 부분들 간의 상호관계이다. 외연적 부분들은 바깥에서 상호 결정된다. 상호 작용을 통해 어떤 비 아래에 들어갈지 결정이 된다. 외생적 결정만을 갖는다. 본질에 의해서 실존이 결정되는 것은 실체 또는 신밖에 없다. 양태들은 외연적 부분들의 상호 결정에 의해 실존한다. 이와 같은 외연적 부분들의 상호작용의 법칙을 기계론적 법칙이라고 한다.
비比들의 합성 및 분해 법칙
기계론적 법칙들은 무엇인가? 연장의 경우에는 운동의 전달 법칙이다. 단순 신체들은 무한히 많은 비들 중 하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비比 아래서 어떤 집합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총비율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가운데 이 비比들은 합성과 분해의 법칙에 따라 형성되고 와해된다. 합성과 분해의 법칙에 따라 비들이 합성되고 분해되는 예로는 유미/카일과 림프가 있다. 이것은 두 개의 비가 직접 합성될 수 있는 경우다. 이전의 두 비比가 합성되어서 제3의 비比 아래서 한 신체[카일]의 부분들이 다른 신체[림프]의 부분들에 맞춰진다. 이것들이 제3의 신체, 상위의 신체를 형성한다. 모든 탄생 혹은 모든 형성 과정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모두 ‘실존으로의 이행’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부분들은 서로 다른 두 비比 아래서 마주친다. 즉 각자 다른 비 아래에 있는 상태에서 마주친다. 두 개의 비比 각각이 다른 양태의 본질에 대응한다. 두 비比가 합성되어서 마주치는 부분들이 제3의 비比 아래 들어간다. 이때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한다. 카일과 림프의 각 부분들이 마주쳐서 하나의 비/제3의 비에 들어가 피라는 신체가 실존한다. 두 비比가 직접 합성가능하지 않을 경우/비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마주치는 신체들이 서로 무관심하거나, 둘 중 하나가 다른 신체의 비比를 분해하여 다른 신체를 파괴한다. 독이 그렇다. 영양섭취는 반대 방향으로의 작용에 해당한다. 파괴이지만 파괴된 신체의 비가 거기에 맞춰진다.
양태들의 실존으로의 이행과 양태들의 실존과 종말을 결정하는 것은 비比들의 합성 및 분해 법칙이다. 합성과 분해의 법칙들은 어떤 비比가 실행/구현되거나 반대로 실행되기를 멈추는 조건을 결정한다. 그래서 본질과 비比를 구별해야 한다. 본질은 외연적 부분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비比는 외연적 부분들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 본질은 오로지 강도적 부분들하고만 관계된다. 비 속에 본질이 표현되지만 비의 실행을 결정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비들은 자체의 법칙들에 따라 합성되고 분해된다. 본질들의 질서는 총체적 합치/어우러짐에 의해 정의된다. 본질들 간에는 불화가 없다. 흰색의 무한한 degré끼리 상충되거나 부딪히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degré 안에 무한히 많은 degré가 포개져있다. 하지만 비들의 질서는 다르다. 모든 비比는 무한하게 조합되기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조합되지는 않는다. 직접 합성되는 비가 있고 합성되지 않는 비가 있다. 비의 질서와 본질의 질서는 다르다. 비의 질서는 본질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과 실존의 구별의 의미
양태의 실존은 양태의 본질에서 파생되지 않는다. 양태가 실존하게 될 때, 비比를 합성하는 기계론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이 이 비比 아래 들어가도록 강제하는 기계론적 법칙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결정된다. 양태의 실존으로의 이행은 가능태에서 실재로의 이행이 아니다. 본질이 가능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처에 존재의 유일한 양상으로서의 필연성/인과관계가 있다. 필연성에는 본질의 층위와 양태의 실존의 층위라는 두 층이 있다. 실존 양태는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한에서의 본질 자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와 보어만 보면 ‘실존 양태는 본질 자체이다’? 하지만 단서가 붙는다.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한다는 한에서의 본질.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기계론적 법칙에 따른다는 얘기다. 본질이 그것의 원인에 의해 실존하는 것처럼 양태도 그것의 원인에 의해 실존한다. 양태의 원인은 양태를 합성하는 부분들이 양태에 속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을 말한다. 그래서 인과성의 두 가지 형식 때문에 양태의 position의 두 가지 유형, 양태적 구별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본질의 실존을 결정하는 인과성과 2)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인과성이 있다. 본질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쉽게 말해 신이다. 양태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기계론적 법칙, 외연적 부분들 간의 상호 인과성의 법칙이다.
실존 양태들의 구별 문제
양태의 본질을 고려할 때 그것을 강도적 실재성이다. 양태의 본질들은 내생적 구별에 따라서만 속성과 구별되고 상호 간에도 구별된다. 양태의 본질들은 외생적으로는 구별이 안된다. 그것이 강도적인 차원의 구별이다. 양태들은 실존으로 이행할 때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하면서 속성과 외생적으로 구별되고, 서로 외생적으로 구별된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내성적 구별만 있고 실존 양태들은 외생적 구별만 있다. 본질의 존재는 강도적 존재를, 실존의 존재는 외연적 존재를 말한다. 내생적/외생적, 강도적/외연적 이렇게 구별된다.
어떻게 실존 양태는 속성과 외생적으로 구별되는가
본질의 존재(본질의 실존)는 신의 속성 안에 본질의 위치/자리position다.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했을 때, 실존의 존재(사물 자체의 실존)는 역시 본질의 position이지만 속성 밖의 외생적 position이다. 그런데 말 그대로 속성 밖에 놓인다는 것이 아니라 속성과는 외생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본질의 존재는 속성과 구별이 안 된다. 양태적 본질은 내생적으로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양태의 위치를 둘로 나뉜다. 양태들은 속성 밖에 놓이더라도 양태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외생적 position은 실체적 position이 아니고 양태적 position이다. 양태가 실존으로 이행해서 외생적 position을 가져도 내재성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내재성의 관점에서 양태들은 실존으로 이행해도 실체에 속하고 실체 안에 담겨 있기를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실체에 속하고 실체 안에, 속성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더 탐구할 필요가 없다.
외연량은 강도량 못지않게 속성에 속한다. 이 외연량은 고유하게 양태적인 외부성의 형식이다. 그렇다면 강도량은 내부성의 형식이다. 강도량이든 외연량이든 속성에 속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외연량은 외부성의 형식이다. 실존 양태들을 속성에 외부적인 것으로, 서로 외부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속성과 구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연량은 모든 실존 양태들처럼 속성 안에 담겨 있다. 속성 안에 담겨 있음은 그대로 유지된다. 속성 밖의 외생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어떤 외연적 부분을 획득해서 속성과 구별된다는 것이지 속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아니다. 내생적인 양태들의 본질은 속성과 아예 구별이 안된다. 본질끼리도 구별이 안된다. 이것이 내생적 position이다. 양태들의 본질들이 외생적 position을 갖게 되면 속성과도 구별되고 양태들 서로 간에도 구별된다. 하지만 속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실존 양태와 펼침
외생적인 양태적인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장에 내생적 양태적 구별, 본질들의 구별이 나온다. 이 내생적 양태적 구별과 대비되는 외생적 양태적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생적 position의 대상이 될 때 양태들은 그전에는 본질이 단지 속성 안에 담겨 있기만 할 때의 형식=포개진/복합된 형식으로 실존하기를 멈추고 펼침의 형식으로 실존한다. 그래서 양태들은 속성을 펼치고, 각각은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일정한 방식으로 속성을 펼친다. 다시 말해 각각의 실존 양태는 그것을 특징짓는 비比 아래서, 다른 방식들과 외생적으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속성을 펼친다. 그래서 속성은 자기가 포개거나 담고있는/함유하는 양태의 본질들을 통해, 양태들의 본질의 역량 정도에 따라 자신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속성은 이제 실존 양태들을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하는데, 실존 양태들은 어떤 한정된 방식으로=본질에 대응하는 비比에 따라 속성을 펼친다. 양태적 표현 전체는 이러한 포갬과 펼침의 이중 운동이다. 포갬은 양태의 본질에 해당하고 펼침은 양태의 실존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