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8스피노자와표현문제
▶ 외생적/외연적 구별과 내생적/강도적 구별
모든 puissance는 서로 안에 있다. procession/emanation유출에 의해서 다음 puissance들이 이전의 puissance들 안에 있게 되고, 앞의 puissance들은 conversion에 의해 다음 conversion들의 안에 있게 된다. degré가 낮은 puissance들은 이전 puissance 안에 포함되어 있고 degré가 높은 puissance들은 degré가 낮은 puissance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puissance 간의 상호 함축 관계/상호 내부성을 aion[영원성, 영원한 시간]이라고 한다.
이처럼 puissance들은 서로 안에 있지만 구별된다. 이것은 외생적 구별이 아니라 내생적[자기 안의/자체적인] 구별이다.
distinct = distingué[외생적 구별] ≠ se distinguer [대명동사/강도적 구별, 자체 내의 구별]
예를 들어 칠판과 칠판 지우개의 구별은 외생적 구별이다. 이와 달리 자체 내의/내부적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강도적 구별이다. 강도적 구별은 외생적/외연적 구별과 다르다. 들뢰즈가 자주 쓰는 표현인 partés extra partés[부분 바깥쪽의 부분]은 외연적인 것이다. 외연적인 것은 부분과 부분이 중첩되지 않고 외재한다. 반면에 강도적인 것은 중첩되어 있거나 포개져 있다. 이것이 양자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전체 공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사람, 책, 물병 등등-은 서로 외재한다.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게 외연 또는 연장이다. 동시에 두 개의 물체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못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외연적 구별과 다른 강도적 구별을 설명하고자 대명동사 se distinguer[자가구별/자기구별]를 끌어들인다. puissance들의 구별은 자가구별이라는 것이다. se distinguer는 직역하면 ‘스스로를 구별짓다/자신을 구별짓다’가 된다. 그런데 단순히 구별짓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puissance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내부적으로 자기구별을 하는/구별짓고 있는 과정[en train de se distinguer]에 있다.
현실화된actual multiplicité는 모두 외생적인 구별의 적용 대상이 된다. puissance들은 그렇지 않다. puissance들 사이에는 외생적 구별이 없다. puissance들은 하나로서 함께 뭉쳐 있지만 그 안에서 구별이 있다[=distinct하지는 않지만 se distinguer하다].
▶신플라톤주의 시간관과 핵심 개념으로서의 nûn
들뢰즈는 nûn을 이야기하면서 순수과거, 순수미래 등을 설명한다. nûn은 영혼의 종합이다. 그래서 시간을 종합으로 정의한 사람은 칸트이지만 들뢰즈는 칸트 이전에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먼저 정의했다고 본다. nûn은 어떤 순간이나 찰라로, 시간을 전제하지 않는다. nûn은 특권적 시간으로 ‘지금 이순간’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현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을 뜻하는 aion과 지금 이순간을 뜻하는 nûn은 무관하지 않다. nûn은 aion 안에서의 내적 구별이다. nûn은 시간이 자기 내부 안에서 자기를 구별하는 과정se distinguer이다.
플라톤적 시간관은 천체의 운동/세계의 운동에 시간을 종속시켰다. 천체 운동을 측정하는 단위가 시간이었다. 시간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 변수였다. 천체 운동이 먼저 있고 시간은 이것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수단이 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은 세계의 운동의 척도 또는 세계의 운동의 수number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시간을 영원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영원의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강도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계의 숫자는 외연적인 개념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시간이 아니다.
nûn는 ‘지금 이순간’인데 시간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구성하는 종합이다. nûn은 순수한 지금으로 nûn에 의해서 시간이 구성된다./발생한다. 그 시간의 종합을 수행하는 것이 영혼이다. 여기서의 영혼이 개개인의 영혼인지 아니면 세계의 영혼인지는 모호하다. 역량의 정도[puissance degré]는 내부적으로 안에서 구별되는데 그것 또한 nûn이다. 구배도 강도적인 분화[=내적인 구별은 있되, 외적 구별은 없는]를 의미하니 nûn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nûn은 곧 puissance degré들로 이것들이 과거와 미래를 현행적으로 구성한다/구별짓는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간은 nûn 안에서의 미래와 과거의 내적 구별의 산물이다. procession과 conversion이 계속 일어나는 과정에서 현재, 미래, 과거가 구성된다.
순수과거는 한번도 현존한 적이 없는 과거다. 순수미래는 결코 현존하지 않을 미래다. 플라톤의 상기론에서의 기억의 초월적 실행과 비슷하다. 기억의 초월적 실행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은 감각, 지각 등의 능력faculty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경험적 실행은 다른 능력faculty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 어제 만난 사람을 다시 볼 수도 있고 기억할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경험적 실행이다. 하지만 초월적 실행에서는 오로지 기억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과거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전의 현재를 과거라고 생각한다. 현재가 현재를 밀어내면서 현재가 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과거 말고 현재한 적이 없는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11장. 내재성과 표현의 역사적 요소들(3)
스피노자의 위계이론
신플라톤주의에는 유출의 위계[ 1N → 1N-1 → 1N-2…]가 있다. 이것은 분화에 의한 생산이다. 즉 생산은 구별과 분화[ 1N → 1N-1 → 1N-2…]를 통해 일어난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형상적 구별 또는 실재적 구별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실체의 존재론적 통일성unité[실체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다]과 속성들의 질적인 복수성multiplicité을 화해 또는 양립시킨다. 모든 사물/양태의 생산 이전에는 속성들의 구별이 있다. 즉 속성들의 구별은 생산 이전의 구별로서 곧 실체의 구성/합성과 동일한 것이다. 양태들의 생산은 분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때 분화는 질적 분화가 아니고 순수하게 양적인 분화이다. 이때 비로소 생산이 시작된다.
유한 양태들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 양태가 실존하지 않아도 양태의 본질은 실존한다. 00이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00의 본질은 속성 안에 실존한다. 이것이 내생적/강도적 구별이다. 최초의 파리 안에 앞으로 도래할 모든 파리가 함축되어 있었다. 앞으로 분화될/전개될 개체의 형상form은 이미 태초에 우주가 만들어졌을 때 모두 만들어졌다. 라이프니츠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유한 양태의 본질에서는 역량puissance이 작은 것이 역량이 큰 것에 의존하는 위계적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무한한 집합collection, 상호 내포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 안에서 각각의 본질은 다른 본질들과 화합한다/함께 어우러진다.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서로 어우러진다. puissance들은 모두 서로 안에 있으므로 하나로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내적인 구별만 있다. 이 점은 신플라톤주의와 비슷한 측면이다.
양태가 실존함으로써 외연적 구별을 획득할 때도 실존 양태들은 신이 직접 원인이다. 본질들의 원인도 신이다. 무한양태, 유한양태의 본질, 실존 유한양태 모두 신이 직접적 원인이다. 신플라톤주의처럼 신에서 puissance1이 나오고 puissance1에서 puissance2가 나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하는 유한양태들은 속성 외에 다른 실존 양태와도 관련된다. 실존하는 유한양태들끼리는 서로 작용을 주고 받는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다. 그런데 실존양태A가 실존양태B에게 작용을 가하게끔 결정하는 것이 바로 신이다. 결국은 원인이 신인 것이다. 신은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puissance이다. 한 양태를 그것에 작용을 가한 원인과 함께 고려하기만 하면 이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리로서의 신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 즉 한 양태와 이 양태의 원인인 다른 양태를 함께 고려하면 이 인과관계의 원리로서의 신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 양태 간의 인과관계를 결정하는 원리는 신이다. 이 신에 도달하려면 어떤 양태를 그 양태의 원인과 함께 고려하면 된다. 신은 실존하는 양태들에 대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원인이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sans-fond[분유불가능한 일자]→분유가능한 일자→noûs→영혼→퓌지스…이렇게 가다가 유한양태에 도달한다. 이 경우 유한양태의 원인이 sans-fond이라면 매우 멀리 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의 많은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은 실존 양태들에 대해서조차 결코 원격 원인이 아니다. 1) 신은 무한한 변양 자체로 변화되는 한에서 신은 생산한다[무한양태]. 2) 신이 특수한 변양으로 변용되는 한에서 신은 생산한다[유한양태]. 또한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의 위계를 신 자체 안의 양상modality의 위계로 대체한다/대신한다. 어떤 양상으로든 신은 매개 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결과로서 직접 생산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퓌지스가 영혼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이 직접 생산한다고 본다.
동등성의 원리와 표현의 여러 가지 의미
표현 1) 실체는 자기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즉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무한히 많은 속성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실체의 구성/합성/논리적 구성으로 생산이 아니다. 동등성 원리① 실체는 모든 속성들과 동등하다. 실체는 속성들을 모두 합친 것과 똑같다. 실체를 구성하는 속성들에는 우열이 없다. 연장 속성이 사유 속성보다 더 열등하지 않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동등하다. 데카르트에게는 사유 속성이 연장 속성보다 더 우월하다. 신플라톤주의도 영혼에서 퓌지스가 나오고 영혼은 정신에서 나온다고 본다. 즉 영적인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본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와 같은 우월성이 없다.
표현 2) 실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실체는 신관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신은 자신을 펼칠 때 자신을 이해한다. 이 표현은 표상적/재현적이다. 자연 안에서 사물들이 생산될 때 그에 상응하는 관념들도 같이 만들어진다. 동등성 원리 ② 신 관념에 상응하는 사유 역량과 속성들에 상응하는 실존 역량이 동등하다. 앞서 평행론에서도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의 동등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사유 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들과 상응하는 것이 실존 및 작용 역량이고 사유역량은 사유 속성에 상응한다. 신은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때 사물들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사유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때 사물들에 대응하는 관념들이 생긴다.
표현 3) 실체는 자신을 다시 표현한다. 실체는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번에는 속성들이 양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이 때 양태들의 생산이 일어난다. 이 표현은 양태들 자체의 생산이다. 신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사물들을 생산하면서 자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comprehension포함한다/포개어 접는다]. 사물도 관념도 접혀서 포개진다. 신은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을 통해서 생산한다. 신의 본질을 이해하는/접어 포개는 관념을 통해서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사유한다. 이 표현은 양적이다. 양태들 자체가 양적이라 그렇다. 양적 표현은 두 가지 형식form을 갖는다. a. 강도적 형식 : 양태의 본질의 경우에는 강도적 형식을 갖는다. 본질의 형식은 강도적 형식이다. b. 외연적 형식 : 양태들이 실존으로 이행하는 경우에는 외연적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강도적 형식과 외연적 형식은 양적인 표현이다. 동등성 원리③ 양태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질적 형상[=속성]과 동일한 질적 형상을 내포한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 등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자신 안에 양태를 내포하는데 그 형상은 다르지 않다. 데카르트의 유한지성과 무한지성에서처럼 무한과 유한이라는 유비적인 고차성이 스피노자에게는 없다. 그가 볼 때 연장이든 사유든 모두 무한하다.
12장 양태의 본질 :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
부분, 질‧강도량‧외연량, 두가지 무한 양태
속성은 영원하고 무한한 질이다. 이런 의미의 속성은 분할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각의 속성-질은 특정한 조건에서는 분할 가능한 무한한 양을 갖는다. 속성은 양태적으로 분할된다. 즉 양태적으로 distinct한 부분을 갖는다.
부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양태적 부분은 외연적이 아니라 강도적 부분이다. 어떤 때 그것은 역량puissance의 부분이다. 즉 내생적인 혹은 강도적 부분들, 진정한 degré들, 역량과 강도intensity의 degré들이다. 2) 외생적 혹은 외연적 부분들, 서로 외재하고, 바깥에서 서로에게 작용하는 부분들, 외연적 부분이 있다. 가장 단순한 물체(dx, 무한소, 한없이 0에 가까운 최소단위)들은 연장의 궁극적인 분할이다. 연장을 무한히 잘게 쪼개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분할, 부분이 가장 단순한 물체다. 무한히 작은 입자라고 보면 된다. 들뢰즈가 좋아하는 분자[identity가 없음]에 해당한다. 외연을 연장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면 사유 속성 안에도 가장 단순한 물체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 통상의 관념을 쪼개다 보면 가장 단순한 물체에 대응하는 관념의 최소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각능력이다. 예를 들어 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있고 이것들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는데 이것이 지각능력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백혈구가 인지하고 공격한다. 이것이 최소관념, 관념의 최소치다.
속성이 분할 가능한 두 가지 양으로 변용된다. 강도적 양은 강도적 부분들로 분할되고, 외연적 양은 외연적 부분들로 분할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속성들의 질적 무한과 함께 양태의 양적 무한에 주목했다. 그가 메이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것들은 원인에 의해 무한하다[속성들의 질적 무한]. 강도적인 부분들은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고 유한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어떤 것들은 무한하다고 또는 무한정하다고 할 수 있다[외연적 부분의 무한성?] 이때 무한은 어떤 수와도 등치될 수 없다/똑같을 수 없다.’ 고 썼다. 예를 들어 한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입자들이 있다고 할 때 여기서 무한을 특정한 수로 특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외연적인 부분의 무한들도 있다.
양태의 본질
스피노자가 양태의 본질, 특수한 또는 개별적singulière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양태의 본질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다. 수학적 구조도 아니다. 형이상학적 실체(실재?)entités, 자연학적[=물리학적인] 실재, 자연학적인 사물이다.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본질은 본질로서 실존을 갖는다는 것이다. 양태의 본질은 해당 양태의 실존과 혼동되지 않는 실존을 갖는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아도 그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 그것은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비-실존 양태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존하지 않는 양태는 바로 그 양태의 본질이다. 본질만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 다른 철학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다. 통상의 철학에서는 본질을 가능태라고 한다. 본질은 실현되려고 하는데 본질이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해서 실현이 되면 현실태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본질 그 자체가 현실태라고 본다. 가능태로 있던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흰색의 무한히 많은 degré들이 있다. 이 중에서 실재적인 degré는 유한하다. 현재 실재적이지 않은 상태의 흰색의 degré가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본질이 실존한다. 외연적인 부분을 획득해서 현실화되지 않은 채 그냥 본질 자체로서 실재하는 흰색 degré가 있다.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현행화되고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본질은 가능태라고 말할 수 없으며, 비-실존 양태가 그의 본질에 의해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띤다고도 말할 수 없다. 비실존하던 것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던 것이 다른 양상modality으로 실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에게 본질 혹은 개체monad는 논리적 가능성이며 특정한 형이상적métaphysique 실재성, 즉 신에게 실존을 요청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령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널 수도 있고 건너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 세계가 경합한다. 그 중 하나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실존하게 되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실존으로 이행하는 세계랑 불공가능한 세계가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본질은 가능성이 아니다. 본질에 고유한 실재적 실존을 소유한다. 비-실존 양태는 무엇인가를 결여하거나 요청하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은 순수하게 자연학적인/물리학적인 실재이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간의 대립은 첨예하다.
본질과 실존
본질에 필연적으로 실존이 수반될 때는 본질의 원인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의 원인은 신이다. 그래서 본질의 원인에서 결과적으로 생기는/결과하는 최종 규정으로서 본질에 덧붙여지는 것이 실존이다. 본질은 실존을 갖는다. 혹은 자연학적/물리학적 실재성을 갖는다. 신은 본질들의 작용 원인이다. 이 두가지 명제가 스피노자에게는 하나로 합쳐진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론과 언뜻 보면 비슷하나 그렇지 않다. 데카르트가 신이 본질까지도 생산한다고 말할 때는 신이 어떤 법칙에도 구속되지 않고 가능태까지 창조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데카르트한테 본질이 가능태인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본질은 가능태가 아니다. 본질은 원인에 의해서 본질에게 귀속되는/돌아가는 온전하게 현실적인 실존을 갖는다. 가능태로서의 실존이 아니라 현실적인actual 실존을 갖는다.
양태들의 본질들의 구별 문제
본질들이 서로 하나로 엉켜붙어 있다면/화합을 한다면, 그것은 본질들끼리 서로 상호 간의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본질들은 하나의 총체적 체계, 현실적으로 무한한 집합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흰색의 무한히 많은 degré들은 하나의 집합을 형성한다. 각각의 본질 안에 모든 본질들의 생산이 전부 포함된다. 흰색의 degré 하나 안에 다른degré 전부가 들어간다.
양태의 본질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데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나의 무한집합을 이루는데 어떻게 개별적/단수일 수 있는가? 이것이 스피노자에게 많은 난점을 일으킨다. 이것이 개체성 문제이자 실재성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소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양태들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 한, 즉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는 양태들이 속성과 구별되지 않고 양태들끼리도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태들의 본질들 자체로는 어떤 개체성 원리를 갖고 있지 않다. 개체화는 양태의 실존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본질에 의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가 실존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이를 해석하자면 ‘1)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 양태의 본질은 속성 안에 담겨진 채로만 실존한다. 2)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 그 양태의 본질 관념은 구별되는/별개의 실존을 함축할 수 없다’라고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구별되다”는 “담겨 있다”와 대립한다. 속성 안에 담겨 있을 때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그 속성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별은 외생적 구별이다. 논증에 따르면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 안에 담겨 있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에는 양태의 본질과 속성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본질끼리의 구별도 없다. 여기서 구별이 없다는 것은 외생적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로서만 실존하던 것들이 속성 안에 담겨 있기를 멈추고 외연적 부분을 획득해서 실존으로 이행하면 지속이 생긴다. 즉 태어나서 죽는다. 이처럼 지속에 의해서 실존적 양태들은 외생적 개체화를 갖는다.
들뢰즈는 『소론』의 구절을 외생적 구별의 의미로 읽으면 본질들에 구별이 없는 것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외생적 구별은 없지만 내성적 구별/내생적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실존하는 사물들의 본질들이 구별된다고 전제하는/가정하는 한에서만 사물들을 구별할 수 있다. 본질이 구별되어야 사물을 구별할 수 있다. 본질은 그 사물의 ‘~임’이다. 어떤 개체가 ‘~이다’라고 할 때의 ‘~임’의 구별이 있어야 사물이 구별된다. 그래서 사물의 구별은 본질의 구별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면 외생적 구별은 내생적 구별을 전제한다. 따라서 어떤 양태의 본질은 해당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도 그 자체로 개별적일 수가 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흰색은 가변적인 강도를 갖는다. 어떤 모양figure이 벽에 그려지면 벽에 모양이 덧붙여지는 식으로 강도들이 흰색에 덧붙여지는 게 아니다. 외생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강도들의 degré들은 내생적 규정이고 흰색의 내생적 양태들이고 흰색의 다양한/가변적인 degré들이 계속 바뀌는 와중에도 흰색은 계속 흰색으로 남아있다. 흰색의 degré가 달라도 우리는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 식의 내생적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둔스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본질을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양태들의 본질들은 내생적 양태들 혹은 강도량들이다. 그래서 질[속성]의 강도들로서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과도 구별되고, 상이한 강도의 degré들로서는 서로 구별된다. 내생적 개체와 내생적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들, 양태들의 본질들의 차이는 내생적이다. 그리고 순전히 양적인 차이다. 왜냐면 외연량이 아니라 강도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적 구별은 외관/겉모습apprearence이 아니라[전통 철학에서는 항상 본질과 외관의 구별이 있었다. 외관의 배후에 본질이 있다. 외관은 항상 본질의 왜곡이다. 본질의 세계와 외관/가상의 세계가 있다. 본질들의 세계가 참된 세계이고 가상적 세계가 거짓 세계다] 내적인 차이이고 강도의 차이다. 각각의 유한한 존재는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강도량에 따라서, 각각의 역량의 degré에 따라서 절대자/신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게 개체화는 질적인 개체화도 외생적 개체화도 아니다. 그것은 양적-내생적 개체화이고 강도적 개체화다. 이 양적 분화, 양적 개체화 이론을 이어받는 철학자들이 포스트 칸트주의자-피히테, 셸링, 헤겔-들이다. 그들은 칸트를 비판하면서 양적 개체화 이론을 전개한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 안에 담겨 있을 때는 외생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생적으로/자체적으로 구별된다. 자기 구별이 있다.
속성은 모든 양태의 본질들을 담고/함유하고 복합한다/접어서 포개고 있다. 이 속성 안에는 모든 양태의 본질들이 강도량에 대응하는 degré들의 무한한 계열로서 담겨/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분할가능하지 않다. 외연적/외생적 구별로는 분할이 안된다는 것이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서로 분리가 안된다. 전적인 화합에 의해 정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태들의 본질들은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내성적 구별에 의해 구별된다. 모든 본질들은 각각의 생산 안에 포함된다. 어떤 puissance가 잠재적 multiplicité를 함유한다. 그것이 현실화되면 하나의 unité가 되고 그 unité가 다음 degré의 puissance들을 multiplicité로 함유하는 식이 반복되는 것과 비슷하다. 흰색의 degré 안에는 다양한 흰색의 degré들이 잠재적 multiplicité로 들어가 있다. 외생적으로는 구별이 안되지만 내생적으로/자체적으로 구별되면서 한데 엉겨붙어 있다. 이것이 본질들의 복합의 체계, 즉 본질들이 한데 포개져 있는 체계다.
양적 표현
양태들의 본질들은 무한한 계열의 부분들이고 이때 부분들은 외연적/외생적 부분이 아니라 강도적/내생적 부분들이다. 양태의 본질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강도적 부분이다. 부분들의 합이 전체가 되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강도들의 degré를 모두 더한다고 강도 전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양태의 본질은 표현 능력을 갖는다. 양태의 본질의 지위 문제는 스피노자주의의 고유한 문제다. 그것은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의 문제다. 속성들은 그 자체로는 분할 불가능한 무한한 형상들 혹은 질들이다. 유한자, 즉 속성의 양태는 실체도 질도 아니다. 외관도 아니다. 유한자는 양태다. 양적이다. 양적인 구별을 갖는다. 실체적 질=속성은 무한한 양태적-강도적 양을 갖고, 이 양태적-강도적 양은 무한히 많은 내생적 양태들로 분할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유한자, 유한양태다. 속성 안에 내생적 양태들이 담겨 있는데 이것들은 속성 자체의 강도적 부분들이고 신의 역량의 부분들이다. 양태들은 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역량의 degré에 따라서 각각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게 유한자의 개체화는 유나 종에서 개체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개체화가 무한한 질=속성에서 양으로 가는데, 이 양은 환원 불가능한 내생적이고 강도적인 부분들로 분할되는 양이다. 그것이 강도이고 역량이고 본질이다.
▶ 개체의 본질
본질이라 함은 통상 유나 종의 본질을 의미한다. 개체의 본질을 정의한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밖에 없다. 두 철학자는 개체마다 본질이 따로 있다고 본다. 라이프니츠의 monad는 개체적인 개념notion, 정신적 존재, 형이상학적인 존재다. 먼저 유의 본질을 정의한 상태에서 유에 포섭되는 개체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 패턴이다. 인간의 본질, 새의 본질 등등 종이나 유의 본질을 먼저 상정한다. 하지만 스피노자한테는 그런 식의 본질은 없다 유의 본질도 종의 본질도 없다. 그러므로 경주마와 쟁기마는 같은 종이지만 본질이 다르다. 역량 degré가 다르다. 경주마에게 밭을 갈라고 하면 3시간만(3일?)에 쓰러진다고 한다.
20201218스피노자와표현문제
▶ 외생적/외연적 구별과 내생적/강도적 구별
모든 puissance는 서로 안에 있다. procession/emanation유출에 의해서 다음 puissance들이 이전의 puissance들 안에 있게 되고, 앞의 puissance들은 conversion에 의해 다음 conversion들의 안에 있게 된다. degré가 낮은 puissance들은 이전 puissance 안에 포함되어 있고 degré가 높은 puissance들은 degré가 낮은 puissance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puissance 간의 상호 함축 관계/상호 내부성을 aion[영원성, 영원한 시간]이라고 한다.
이처럼 puissance들은 서로 안에 있지만 구별된다. 이것은 외생적 구별이 아니라 내생적[자기 안의/자체적인] 구별이다.
distinct = distingué[외생적 구별] ≠ se distinguer [대명동사/강도적 구별, 자체 내의 구별]
예를 들어 칠판과 칠판 지우개의 구별은 외생적 구별이다. 이와 달리 자체 내의/내부적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강도적 구별이다. 강도적 구별은 외생적/외연적 구별과 다르다. 들뢰즈가 자주 쓰는 표현인 partés extra partés[부분 바깥쪽의 부분]은 외연적인 것이다. 외연적인 것은 부분과 부분이 중첩되지 않고 외재한다. 반면에 강도적인 것은 중첩되어 있거나 포개져 있다. 이것이 양자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전체 공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사람, 책, 물병 등등-은 서로 외재한다.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게 외연 또는 연장이다. 동시에 두 개의 물체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못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외연적 구별과 다른 강도적 구별을 설명하고자 대명동사 se distinguer[자가구별/자기구별]를 끌어들인다. puissance들의 구별은 자가구별이라는 것이다. se distinguer는 직역하면 ‘스스로를 구별짓다/자신을 구별짓다’가 된다. 그런데 단순히 구별짓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puissance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내부적으로 자기구별을 하는/구별짓고 있는 과정[en train de se distinguer]에 있다.
현실화된actual multiplicité는 모두 외생적인 구별의 적용 대상이 된다. puissance들은 그렇지 않다. puissance들 사이에는 외생적 구별이 없다. puissance들은 하나로서 함께 뭉쳐 있지만 그 안에서 구별이 있다[=distinct하지는 않지만 se distinguer하다].
▶신플라톤주의 시간관과 핵심 개념으로서의 nûn
들뢰즈는 nûn을 이야기하면서 순수과거, 순수미래 등을 설명한다. nûn은 영혼의 종합이다. 그래서 시간을 종합으로 정의한 사람은 칸트이지만 들뢰즈는 칸트 이전에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먼저 정의했다고 본다. nûn은 어떤 순간이나 찰라로, 시간을 전제하지 않는다. nûn은 특권적 시간으로 ‘지금 이순간’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현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을 뜻하는 aion과 지금 이순간을 뜻하는 nûn은 무관하지 않다. nûn은 aion 안에서의 내적 구별이다. nûn은 시간이 자기 내부 안에서 자기를 구별하는 과정se distinguer이다.
플라톤적 시간관은 천체의 운동/세계의 운동에 시간을 종속시켰다. 천체 운동을 측정하는 단위가 시간이었다. 시간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 변수였다. 천체 운동이 먼저 있고 시간은 이것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수단이 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은 세계의 운동의 척도 또는 세계의 운동의 수number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시간을 영원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영원의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강도 개념을 만들어냈다. 시계의 숫자는 외연적인 개념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시간이 아니다.
nûn는 ‘지금 이순간’인데 시간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구성하는 종합이다. nûn은 순수한 지금으로 nûn에 의해서 시간이 구성된다./발생한다. 그 시간의 종합을 수행하는 것이 영혼이다. 여기서의 영혼이 개개인의 영혼인지 아니면 세계의 영혼인지는 모호하다. 역량의 정도[puissance degré]는 내부적으로 안에서 구별되는데 그것 또한 nûn이다. 구배도 강도적인 분화[=내적인 구별은 있되, 외적 구별은 없는]를 의미하니 nûn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nûn은 곧 puissance degré들로 이것들이 과거와 미래를 현행적으로 구성한다/구별짓는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간은 nûn 안에서의 미래와 과거의 내적 구별의 산물이다. procession과 conversion이 계속 일어나는 과정에서 현재, 미래, 과거가 구성된다.
순수과거는 한번도 현존한 적이 없는 과거다. 순수미래는 결코 현존하지 않을 미래다. 플라톤의 상기론에서의 기억의 초월적 실행과 비슷하다. 기억의 초월적 실행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은 감각, 지각 등의 능력faculty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경험적 실행은 다른 능력faculty으로도 파악될 수 있다. 어제 만난 사람을 다시 볼 수도 있고 기억할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경험적 실행이다. 하지만 초월적 실행에서는 오로지 기억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과거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전의 현재를 과거라고 생각한다. 현재가 현재를 밀어내면서 현재가 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과거 말고 현재한 적이 없는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11장. 내재성과 표현의 역사적 요소들(3)
스피노자의 위계이론
신플라톤주의에는 유출의 위계[ 1N → 1N-1 → 1N-2…]가 있다. 이것은 분화에 의한 생산이다. 즉 생산은 구별과 분화[ 1N → 1N-1 → 1N-2…]를 통해 일어난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형상적 구별 또는 실재적 구별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실체의 존재론적 통일성unité[실체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다]과 속성들의 질적인 복수성multiplicité을 화해 또는 양립시킨다. 모든 사물/양태의 생산 이전에는 속성들의 구별이 있다. 즉 속성들의 구별은 생산 이전의 구별로서 곧 실체의 구성/합성과 동일한 것이다. 양태들의 생산은 분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때 분화는 질적 분화가 아니고 순수하게 양적인 분화이다. 이때 비로소 생산이 시작된다.
유한 양태들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 양태가 실존하지 않아도 양태의 본질은 실존한다. 00이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00의 본질은 속성 안에 실존한다. 이것이 내생적/강도적 구별이다. 최초의 파리 안에 앞으로 도래할 모든 파리가 함축되어 있었다. 앞으로 분화될/전개될 개체의 형상form은 이미 태초에 우주가 만들어졌을 때 모두 만들어졌다. 라이프니츠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유한 양태의 본질에서는 역량puissance이 작은 것이 역량이 큰 것에 의존하는 위계적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무한한 집합collection, 상호 내포의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 안에서 각각의 본질은 다른 본질들과 화합한다/함께 어우러진다. 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서로 어우러진다. puissance들은 모두 서로 안에 있으므로 하나로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내적인 구별만 있다. 이 점은 신플라톤주의와 비슷한 측면이다.
양태가 실존함으로써 외연적 구별을 획득할 때도 실존 양태들은 신이 직접 원인이다. 본질들의 원인도 신이다. 무한양태, 유한양태의 본질, 실존 유한양태 모두 신이 직접적 원인이다. 신플라톤주의처럼 신에서 puissance1이 나오고 puissance1에서 puissance2가 나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존하는 유한양태들은 속성 외에 다른 실존 양태와도 관련된다. 실존하는 유한양태들끼리는 서로 작용을 주고 받는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다. 그런데 실존양태A가 실존양태B에게 작용을 가하게끔 결정하는 것이 바로 신이다. 결국은 원인이 신인 것이다. 신은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puissance이다. 한 양태를 그것에 작용을 가한 원인과 함께 고려하기만 하면 이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리로서의 신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 즉 한 양태와 이 양태의 원인인 다른 양태를 함께 고려하면 이 인과관계의 원리로서의 신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 양태 간의 인과관계를 결정하는 원리는 신이다. 이 신에 도달하려면 어떤 양태를 그 양태의 원인과 함께 고려하면 된다. 신은 실존하는 양태들에 대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원인이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sans-fond[분유불가능한 일자]→분유가능한 일자→noûs→영혼→퓌지스…이렇게 가다가 유한양태에 도달한다. 이 경우 유한양태의 원인이 sans-fond이라면 매우 멀리 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의 많은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신은 실존 양태들에 대해서조차 결코 원격 원인이 아니다. 1) 신은 무한한 변양 자체로 변화되는 한에서 신은 생산한다[무한양태]. 2) 신이 특수한 변양으로 변용되는 한에서 신은 생산한다[유한양태]. 또한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의 위계를 신 자체 안의 양상modality의 위계로 대체한다/대신한다. 어떤 양상으로든 신은 매개 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결과로서 직접 생산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퓌지스가 영혼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이 직접 생산한다고 본다.
동등성의 원리와 표현의 여러 가지 의미
표현 1) 실체는 자기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즉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무한히 많은 속성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실체의 구성/합성/논리적 구성으로 생산이 아니다. 동등성 원리① 실체는 모든 속성들과 동등하다. 실체는 속성들을 모두 합친 것과 똑같다. 실체를 구성하는 속성들에는 우열이 없다. 연장 속성이 사유 속성보다 더 열등하지 않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동등하다. 데카르트에게는 사유 속성이 연장 속성보다 더 우월하다. 신플라톤주의도 영혼에서 퓌지스가 나오고 영혼은 정신에서 나온다고 본다. 즉 영적인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본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그와 같은 우월성이 없다.
표현 2) 실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실체는 신관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신은 자신을 펼칠 때 자신을 이해한다. 이 표현은 표상적/재현적이다. 자연 안에서 사물들이 생산될 때 그에 상응하는 관념들도 같이 만들어진다. 동등성 원리 ② 신 관념에 상응하는 사유 역량과 속성들에 상응하는 실존 역량이 동등하다. 앞서 평행론에서도 사유 역량과 실존 역량의 동등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사유 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들과 상응하는 것이 실존 및 작용 역량이고 사유역량은 사유 속성에 상응한다. 신은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때 사물들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사유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때 사물들에 대응하는 관념들이 생긴다.
표현 3) 실체는 자신을 다시 표현한다. 실체는 속성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번에는 속성들이 양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이 때 양태들의 생산이 일어난다. 이 표현은 양태들 자체의 생산이다. 신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은 자신을 이해하는 대로 사물들을 생산하면서 자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이해한다[comprehension포함한다/포개어 접는다]. 사물도 관념도 접혀서 포개진다. 신은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을 통해서 생산한다. 신의 본질을 이해하는/접어 포개는 관념을 통해서 자기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사유한다. 이 표현은 양적이다. 양태들 자체가 양적이라 그렇다. 양적 표현은 두 가지 형식form을 갖는다. a. 강도적 형식 : 양태의 본질의 경우에는 강도적 형식을 갖는다. 본질의 형식은 강도적 형식이다. b. 외연적 형식 : 양태들이 실존으로 이행하는 경우에는 외연적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강도적 형식과 외연적 형식은 양적인 표현이다. 동등성 원리③ 양태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질적 형상[=속성]과 동일한 질적 형상을 내포한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 등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자신 안에 양태를 내포하는데 그 형상은 다르지 않다. 데카르트의 유한지성과 무한지성에서처럼 무한과 유한이라는 유비적인 고차성이 스피노자에게는 없다. 그가 볼 때 연장이든 사유든 모두 무한하다.
12장 양태의 본질 :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
부분, 질‧강도량‧외연량, 두가지 무한 양태
속성은 영원하고 무한한 질이다. 이런 의미의 속성은 분할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각의 속성-질은 특정한 조건에서는 분할 가능한 무한한 양을 갖는다. 속성은 양태적으로 분할된다. 즉 양태적으로 distinct한 부분을 갖는다.
부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양태적 부분은 외연적이 아니라 강도적 부분이다. 어떤 때 그것은 역량puissance의 부분이다. 즉 내생적인 혹은 강도적 부분들, 진정한 degré들, 역량과 강도intensity의 degré들이다. 2) 외생적 혹은 외연적 부분들, 서로 외재하고, 바깥에서 서로에게 작용하는 부분들, 외연적 부분이 있다. 가장 단순한 물체(dx, 무한소, 한없이 0에 가까운 최소단위)들은 연장의 궁극적인 분할이다. 연장을 무한히 잘게 쪼개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분할, 부분이 가장 단순한 물체다. 무한히 작은 입자라고 보면 된다. 들뢰즈가 좋아하는 분자[identity가 없음]에 해당한다. 외연을 연장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면 사유 속성 안에도 가장 단순한 물체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다. 통상의 관념을 쪼개다 보면 가장 단순한 물체에 대응하는 관념의 최소 부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각능력이다. 예를 들어 신체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있고 이것들에 대응하는 관념이 있는데 이것이 지각능력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백혈구가 인지하고 공격한다. 이것이 최소관념, 관념의 최소치다.
속성이 분할 가능한 두 가지 양으로 변용된다. 강도적 양은 강도적 부분들로 분할되고, 외연적 양은 외연적 부분들로 분할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속성들의 질적 무한과 함께 양태의 양적 무한에 주목했다. 그가 메이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것들은 원인에 의해 무한하다[속성들의 질적 무한]. 강도적인 부분들은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고 유한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어떤 것들은 무한하다고 또는 무한정하다고 할 수 있다[외연적 부분의 무한성?] 이때 무한은 어떤 수와도 등치될 수 없다/똑같을 수 없다.’ 고 썼다. 예를 들어 한 신체를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입자들이 있다고 할 때 여기서 무한을 특정한 수로 특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외연적인 부분의 무한들도 있다.
양태의 본질
스피노자가 양태의 본질, 특수한 또는 개별적singulière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양태의 본질은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다. 수학적 구조도 아니다. 형이상학적 실체(실재?)entités, 자연학적[=물리학적인] 실재, 자연학적인 사물이다.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본질은 본질로서 실존을 갖는다는 것이다. 양태의 본질은 해당 양태의 실존과 혼동되지 않는 실존을 갖는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아도 그 양태의 본질은 그 자체로 실존한다. 그것은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비-실존 양태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존하지 않는 양태는 바로 그 양태의 본질이다. 본질만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 다른 철학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다. 통상의 철학에서는 본질을 가능태라고 한다. 본질은 실현되려고 하는데 본질이 외연적 부분들을 획득해서 실현이 되면 현실태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본질 그 자체가 현실태라고 본다. 가능태로 있던 것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흰색의 무한히 많은 degré들이 있다. 이 중에서 실재적인 degré는 유한하다. 현재 실재적이지 않은 상태의 흰색의 degré가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본질이 실존한다. 외연적인 부분을 획득해서 현실화되지 않은 채 그냥 본질 자체로서 실재하는 흰색 degré가 있다.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현행화되고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본질은 가능태라고 말할 수 없으며, 비-실존 양태가 그의 본질에 의해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띤다고도 말할 수 없다. 비실존하던 것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던 것이 다른 양상modality으로 실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에게 본질 혹은 개체monad는 논리적 가능성이며 특정한 형이상적métaphysique 실재성, 즉 신에게 실존을 요청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령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널 수도 있고 건너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 세계가 경합한다. 그 중 하나가 신의 선택을 받아 실존하게 되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실존으로 이행하는 세계랑 불공가능한 세계가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본질은 가능성이 아니다. 본질에 고유한 실재적 실존을 소유한다. 비-실존 양태는 무엇인가를 결여하거나 요청하지 않는다. 양태의 본질은 순수하게 자연학적인/물리학적인 실재이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간의 대립은 첨예하다.
본질과 실존
본질에 필연적으로 실존이 수반될 때는 본질의 원인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의 원인은 신이다. 그래서 본질의 원인에서 결과적으로 생기는/결과하는 최종 규정으로서 본질에 덧붙여지는 것이 실존이다. 본질은 실존을 갖는다. 혹은 자연학적/물리학적 실재성을 갖는다. 신은 본질들의 작용 원인이다. 이 두가지 명제가 스피노자에게는 하나로 합쳐진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론과 언뜻 보면 비슷하나 그렇지 않다. 데카르트가 신이 본질까지도 생산한다고 말할 때는 신이 어떤 법칙에도 구속되지 않고 가능태까지 창조한다는 것을 이름이다. 데카르트한테 본질이 가능태인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본질은 가능태가 아니다. 본질은 원인에 의해서 본질에게 귀속되는/돌아가는 온전하게 현실적인 실존을 갖는다. 가능태로서의 실존이 아니라 현실적인actual 실존을 갖는다.
양태들의 본질들의 구별 문제
본질들이 서로 하나로 엉켜붙어 있다면/화합을 한다면, 그것은 본질들끼리 서로 상호 간의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본질들은 하나의 총체적 체계, 현실적으로 무한한 집합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흰색의 무한히 많은 degré들은 하나의 집합을 형성한다. 각각의 본질 안에 모든 본질들의 생산이 전부 포함된다. 흰색의 degré 하나 안에 다른degré 전부가 들어간다.
양태의 본질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데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나의 무한집합을 이루는데 어떻게 개별적/단수일 수 있는가? 이것이 스피노자에게 많은 난점을 일으킨다. 이것이 개체성 문제이자 실재성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소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양태들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 한, 즉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는 양태들이 속성과 구별되지 않고 양태들끼리도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양태들의 본질들 자체로는 어떤 개체성 원리를 갖고 있지 않다. 개체화는 양태의 실존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본질에 의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가 실존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이를 해석하자면 ‘1)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 양태의 본질은 속성 안에 담겨진 채로만 실존한다. 2)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 그 양태의 본질 관념은 구별되는/별개의 실존을 함축할 수 없다’라고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구별되다”는 “담겨 있다”와 대립한다. 속성 안에 담겨 있을 때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그 속성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별은 외생적 구별이다. 논증에 따르면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 안에 담겨 있다. 어떤 양태가 실존하지 않는 한에는 양태의 본질과 속성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본질끼리의 구별도 없다. 여기서 구별이 없다는 것은 외생적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로서만 실존하던 것들이 속성 안에 담겨 있기를 멈추고 외연적 부분을 획득해서 실존으로 이행하면 지속이 생긴다. 즉 태어나서 죽는다. 이처럼 지속에 의해서 실존적 양태들은 외생적 개체화를 갖는다.
들뢰즈는 『소론』의 구절을 외생적 구별의 의미로 읽으면 본질들에 구별이 없는 것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외생적 구별은 없지만 내성적 구별/내생적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실존하는 사물들의 본질들이 구별된다고 전제하는/가정하는 한에서만 사물들을 구별할 수 있다. 본질이 구별되어야 사물을 구별할 수 있다. 본질은 그 사물의 ‘~임’이다. 어떤 개체가 ‘~이다’라고 할 때의 ‘~임’의 구별이 있어야 사물이 구별된다. 그래서 사물의 구별은 본질의 구별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면 외생적 구별은 내생적 구별을 전제한다. 따라서 어떤 양태의 본질은 해당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도 그 자체로 개별적일 수가 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흰색은 가변적인 강도를 갖는다. 어떤 모양figure이 벽에 그려지면 벽에 모양이 덧붙여지는 식으로 강도들이 흰색에 덧붙여지는 게 아니다. 외생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강도들의 degré들은 내생적 규정이고 흰색의 내생적 양태들이고 흰색의 다양한/가변적인 degré들이 계속 바뀌는 와중에도 흰색은 계속 흰색으로 남아있다. 흰색의 degré가 달라도 우리는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 식의 내생적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둔스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본질을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양태들의 본질들은 내생적 양태들 혹은 강도량들이다. 그래서 질[속성]의 강도들로서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과도 구별되고, 상이한 강도의 degré들로서는 서로 구별된다. 내생적 개체와 내생적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들, 양태들의 본질들의 차이는 내생적이다. 그리고 순전히 양적인 차이다. 왜냐면 외연량이 아니라 강도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적 구별은 외관/겉모습apprearence이 아니라[전통 철학에서는 항상 본질과 외관의 구별이 있었다. 외관의 배후에 본질이 있다. 외관은 항상 본질의 왜곡이다. 본질의 세계와 외관/가상의 세계가 있다. 본질들의 세계가 참된 세계이고 가상적 세계가 거짓 세계다] 내적인 차이이고 강도의 차이다. 각각의 유한한 존재는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강도량에 따라서, 각각의 역량의 degré에 따라서 절대자/신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게 개체화는 질적인 개체화도 외생적 개체화도 아니다. 그것은 양적-내생적 개체화이고 강도적 개체화다. 이 양적 분화, 양적 개체화 이론을 이어받는 철학자들이 포스트 칸트주의자-피히테, 셸링, 헤겔-들이다. 그들은 칸트를 비판하면서 양적 개체화 이론을 전개한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속성 안에 담겨 있을 때는 외생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생적으로/자체적으로 구별된다. 자기 구별이 있다.
속성은 모든 양태의 본질들을 담고/함유하고 복합한다/접어서 포개고 있다. 이 속성 안에는 모든 양태의 본질들이 강도량에 대응하는 degré들의 무한한 계열로서 담겨/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분할가능하지 않다. 외연적/외생적 구별로는 분할이 안된다는 것이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서로 분리가 안된다. 전적인 화합에 의해 정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태들의 본질들은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내성적 구별에 의해 구별된다. 모든 본질들은 각각의 생산 안에 포함된다. 어떤 puissance가 잠재적 multiplicité를 함유한다. 그것이 현실화되면 하나의 unité가 되고 그 unité가 다음 degré의 puissance들을 multiplicité로 함유하는 식이 반복되는 것과 비슷하다. 흰색의 degré 안에는 다양한 흰색의 degré들이 잠재적 multiplicité로 들어가 있다. 외생적으로는 구별이 안되지만 내생적으로/자체적으로 구별되면서 한데 엉겨붙어 있다. 이것이 본질들의 복합의 체계, 즉 본질들이 한데 포개져 있는 체계다.
양적 표현
양태들의 본질들은 무한한 계열의 부분들이고 이때 부분들은 외연적/외생적 부분이 아니라 강도적/내생적 부분들이다. 양태의 본질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강도적 부분이다. 부분들의 합이 전체가 되는 관계는 아닌 것이다. 강도들의 degré를 모두 더한다고 강도 전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양태의 본질은 표현 능력을 갖는다. 양태의 본질의 지위 문제는 스피노자주의의 고유한 문제다. 그것은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의 문제다. 속성들은 그 자체로는 분할 불가능한 무한한 형상들 혹은 질들이다. 유한자, 즉 속성의 양태는 실체도 질도 아니다. 외관도 아니다. 유한자는 양태다. 양적이다. 양적인 구별을 갖는다. 실체적 질=속성은 무한한 양태적-강도적 양을 갖고, 이 양태적-강도적 양은 무한히 많은 내생적 양태들로 분할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유한자, 유한양태다. 속성 안에 내생적 양태들이 담겨 있는데 이것들은 속성 자체의 강도적 부분들이고 신의 역량의 부분들이다. 양태들은 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역량의 degré에 따라서 각각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게 유한자의 개체화는 유나 종에서 개체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개체화가 무한한 질=속성에서 양으로 가는데, 이 양은 환원 불가능한 내생적이고 강도적인 부분들로 분할되는 양이다. 그것이 강도이고 역량이고 본질이다.
▶ 개체의 본질
본질이라 함은 통상 유나 종의 본질을 의미한다. 개체의 본질을 정의한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밖에 없다. 두 철학자는 개체마다 본질이 따로 있다고 본다. 라이프니츠의 monad는 개체적인 개념notion, 정신적 존재, 형이상학적인 존재다. 먼저 유의 본질을 정의한 상태에서 유에 포섭되는 개체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 패턴이다. 인간의 본질, 새의 본질 등등 종이나 유의 본질을 먼저 상정한다. 하지만 스피노자한테는 그런 식의 본질은 없다 유의 본질도 종의 본질도 없다. 그러므로 경주마와 쟁기마는 같은 종이지만 본질이 다르다. 역량 degré가 다르다. 경주마에게 밭을 갈라고 하면 3시간만(3일?)에 쓰러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