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1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들뢰즈 강의 1984년 3월 20일
신플라톤주의적 변증법, 계열변증법. 이 계열은 0으로 향하고 그것의 출발점은 1N, 즉 분유가능한 일자다. 첫 번째 puissance에서 두 번째 puissance가 나와서 첫 번째 puissance를 분유한다. 두 번째 puissance에 정신-존재, 사유-존재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두 번째 puissance의 층위에는 존재와 사유의 unité가 있다. 이 unité를 noûs라고 부른다. 두 번째 puissance,1N-1은 첫 번째 puissance, 1N을 분유한다. 1N-1에서 세 번째puissance, 1N-2가 나온다. 세 번째 puissance는 정신-존재를 분유하는데 ‘영혼’(pshukhê)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puissance는 영혼을 분유하는 퓌지스, 자연, 현상들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언제나 존재 위에 일자를 세우려는 탁월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깊이와 절연하지 않았다. 계열변증법은 깊이의 변증법이다. 플라톤은 깊이를 길이로 환원시켰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길이는 sans-fond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1N은 가장 심층이지만 분유가능한 일자다. 그 자체가 다른 어떤 것, 즉 sans-fond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분유불가능한 일자다. 그것은 만지면 뒤로 물러서고 존재의 안개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의 기능/역할은 무엇인가? 분유불가능한 일자는 분유할 것을 준다. 분유불가능한 일자가 없다면, 존재의 분유도, 존재가 분유하는 분유가능한 일자도 없을 것이다.
1N-2,, 즉 영혼은 다음 것들을 생산하고 이전 것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하다. 영혼은 계열변증법에서 일종의 핵심 위치를 갖는다. 영혼은 흘러나온다/흘러넘친다. 영혼은 자신을 증여한다[증여철학]. 영혼은 자기 뒤에 오는 것으로 향한다. 영혼은 분유할 것을 준다. 영혼 다음에 오는 것, 자연에게 준다. 영혼은 자신을 증여함으로써 자연 안에 흘러나온다. 자연을 생산한다. 생산-창조poliesis다. 이것은 매우 종교적이다. 그들은 성인들이었다.[들뢰즈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철학자이자, 시인이자, 교수였다고 본다. 이처럼 철학자이자 시인인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다.]이 poliesis에 의해서 영혼은 자기 뒤에 오는 하위 puissance를 생산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을 발출 또는 유출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puissance degré는 자기 안에 머문다Manence. 이것이 내재인과의 공통점이다. 그리스어로 Manence는 hypostase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잠재태이지만 현실태와 대립하는 잠재태가 아니다. 현실태는 잠재태의 표현이다. 1N → 1N-1 → 1N-2이라는 생산의 계열은 유출 혹은 발출이라고 하고 자기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conversion이라 한다. conversion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분자적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회귀 운동의 의미로 쓰였다. 한편, 개종이라는 뜻도 있는 바, 신에게 돌아간다는 뉘앙스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직접 상속받은 철학자는 쿠자누스, 라이프니츠이다. conversion에서 puissance3은 puissance2로 귀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puissance3은 puissance2에서 나오지만 puissance3은 puissance1로 귀의한다. 왜 그것은 강도인가? 각각의 puissance degré는 unité[하나의 덩어리, 통일체]이다. 각 unité는 잠재적 multiplicité이다. multiplicité는 다음 puissance의 형태로 현실화되는데, 이 puissance는 바로 그 순간 unité로 기능한다. 이 unité는 다시 잠재적 multiplicité, 다음 degré의 multiplicité를 함유한다. 칸트의 강도 이야기는 독창적인 칸트의 발견이 아니라 중세시절에 있었던 것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30도는 15도의 2배가 아니다. 30도 안에는 15도의 2배가 들어 있지만 잠재적으로 들어있다. 15도에 15도를 더한다고 해도 30도가 되지 않는다. multiplicité는 언제나 현행적인 크기다. 반면에 강도량은 깊이다. 부분들을 더해서 전체량이 나오면 외연량이다. 강도량에서는 그렇지 않다. puissance의 사다리를 내려갈수록 multiplicité는 점점 더 현실적이 되어 간다. 넓이, 즉 외연량은 점점 더 모습을 나타낸다. 이 표현은 『차이와 반복』에도 여러번 나온다.
들뢰즈 강의 1984년 2월 28일
시간의 존재 이유는 영혼이다. 시간은 영혼에 의존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간은 운동의 수 또는 척도다. 시간은 형상form의 부속물로 형상에 의존한다. 단일평면mono-plan관념은 이집트의 관념이었다. 이에 따르면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밖에 없다. 이집트인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면서 호수를 하늘에서만 본 관점으로, 사람 얼굴은 옆면을 그린다. 그래서 mono-plan이라고 한다. 이것은 깊이, 부피, 입방체 관념이 없어서이다. 그리스인들은 plan의 다중성/복수성을 발견한다. 여러 개의 plan이 관계를 맺는다. 방향이 다르게 교차한다. 이것은 입방체의 발견이다. 이집트인들은 입방체를 감췄으나 그리스인들은 입방체를 해방시켰다. 이렇게 발견하는 즉시 길들인다. 깊이를 수직 plan에 종속시킨다. 그리스의 사원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대체한다. 이것은 입방체의 승리다. 이것은 plan들의 교차의 승리다. 깊이가 있다면 그것은 plan으로 환원된다. 그들은 깊이를 입방체 안에 가두었다. 3차원은 전면/전경과 수직을 이루는 plan으로 정의된다. 깊이가 수직 paln에 의해 정의된다. 깊이는 으르렁거린다. 야수인 깊이를 철장 우리 안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플라톤에게는 두 가지 분할이 있었다. 1)넓이에 따른 분할(cata pathos)이다. 가로로 분할한다. 2) 길이에 따른 분할(cata mécos)이다. 세로로 분할한다. 플라톤은 깊이를 단순한 mécos로 축소/환원시켰다. bathos를 mécos로 환원시켰다. 플라톤에게는 bathos에 따른 분할은 없었다. 넓이와 길이에 따른 분할만 있었다. bathos에 따른 분할[ 1N → 1N-1 → 1N-2…]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이 했다. 그리스인들에게 깊이는 가능한 길이다. 플라톤은 깊이(bathos)를 길이(mécos)의 형태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플라톤도 bathos를 썼지만 mécos로 환원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에게 깊이는 전면과 수직을 이루는 plan, 즉 길이에 다름 아니었다. 플라톤에게 빛은, 깊이(bathos)가 전면과 수직을 이루는 면, 즉 길이로 환원되는 것처럼, 세계 안에 갇힌, 입방체 혹은 구 안에 담긴 매질로 환원된다.
플로토니스에게 새로운 것은 bathos의 발견이다. 그것은 두 차원으로 환원 불가능한 심층의 발견이다. 길이와 넓이로 환원 불가능한, 고로 plan으로 환원 불가능한, 전면/전경으로 환원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plan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깊이의 발견[그리스 미술과 플라톤 철학, 비잔틴 예술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서로 각각 대응한다]. 플로티노스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기여는 어떤 차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공간의 모든 차원들의 모태인 순수한 깊이의 발견이다. sans-fond으로서의 심층의 발견. 끝없이/한없이 깊어지는 fond.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일자는 존재 이상이다. 일자는 존재 너머에 있다. 존재 너머의 일자는 sans-fond이다. 플라톤의 형상form은 뻣뻣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플로티노스의 형상은 빛이므로 유연하게 구부러져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 고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넓이에 따른 분할이 sans-fond의 puissance로서의 깊이에 따른 분할에 종속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전복/역전이다.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플라톤의 일자와 완전히 다르다. sans-fond 자체다. 빛은 매질이 아니라 sans-fond의 직접적 유출이다. 플로티노스에게 sans-fond은 광원이다. 빛이 sans-fond의 첫 번째 puissance이고 영혼은 sans-fond에서 파생되는 두 번째 puissance이다. 플로티노스에게 형상들은 순수하게 광학적이다. 빛의 形相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에게도 적용된다. 일차적인 것은 빛의 형상이다. 시간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혁명은 이것을 뜻한다. 시간이 세계의 운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운동은 영혼의 운동이고 빛의 운동이다. 영혼은 빛의 형상形象figure이다. 시간은 영혼의 운동의 표현이다. 빛의 형상의 리듬이다. 시간을 탄생시키는 것은 영혼의 운동이다.
▶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외연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강도의 운동을 가져왔지 ‘존재 너머 일자’라는 개념을 가져오지는 않았다고 본다. ‘존재 너머 일자’란 기독교 전통과 연결된 초월적 일자로 모든 도덕과 판단 철학의 근본 원리를 뜻한다. 스피노자도 들뢰즈도 이것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처럼 초월성을 상정하고 있는바, 플라톤과는 반대로 분유되는 쪽에서 원리를 찾기 위해 sans-fond을 가져왔다.
11장. 내재성과 표현의 역사적 요소들(2)
- 유출과 내재 간에 차이가 큰데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는가? 내재인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유출인과 합류한다. 첫 번째 유출이 내재의 관념을 제공한다. 일자에서 noûs 혹은 존재가 유출된다. noûs에서도 새로운 실체가 유출된다. 1N,, 1N-1 [noûs], 1N-2, 1N-3 [피지스], 각각이 hypostasis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자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물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분유가능한 일자에서 noûs가 나오지만 분유가능한 일자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고 noûs에서 피지스가 나오지만 noûs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 플로티노스에게도 존재의 동등성이 있다. 다마키우스에 따르면 다자는 일자 안에 집중하고 일자는 다자 안에 현존한다. 다자와 일자 간의 상호내재성이 있다는 것이다.
- 포개다/복합하다complicare와 펼치다expliquer 개념 쌍은 중세를 거치면서 중요해진다. 만물은 그들을 포개는 신에 현존하고 신은 만물에 현존한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계기적이고 결과가 원인에 종속되던 유출물의 계열이 이 때는 서로 상관적인 두 가지 운동의 공-현존으로 대체된다/바뀐다. 신은 사물들을 자기 안에 포개고 있으면서 사물은 신을 펼친다. 실체들hypostse의 위계가 존재의 동등성으로 대체된다. 분유는 그 원리가 유출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뀐다. 표현이 원리가 된다. 표현은 복합, 펼침, 내속inherence, 내포implication를 포함한다. 여기서 스피노자 이전에 존재한 표현 개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표현의 이런 측면들은 내재성의 범주들이기도 하다.
- 표현 관념에서 새로운 내재성의 원리가 긍정된다. 내재성의 원리란 일자가 다자를 포개고 있고 일자는 다자를 통해 펼쳐진다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나 중심이 있고 어디에도 원주가 없는 원의 은유가 신플라톤주의의 구와 방사를 대체한다. 신과 세계 사이의 표현관계는 존재의 동등성의 근거가 된다.
- 신플라톤주의자들에서 내재인은 유출인에 종속되어 있다. 모든 것이 절대자에서 파생하고 모든 것이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제1원리, 유출인, 초월적 목적, 존재 위의 일자를 전제한다. 중세, 르네상스, 종교 개혁기를 거쳐 신플라톤주의가 극단적으로 진화되고서야 내재인이 유출인에서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중요성을 갖게 된다.
- 표현주의적 경향=내재인이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는 이유/역사적 상황이 있다. 기독교는 존재를 제1원리로 삼는 존재론적 요청에 의해 표현주의적 경향을 촉진/조장하는 반면 신 존재의 초월성을 유지하라는 더 강력한 요청에 의해 표현주의적 경향을 억압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주 신의 초월성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존재의 동등성 원리를 유비로 해석한다. 표현불가능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초월적 신이라는 것이다. 야콥 뵈메(Jakob Böhme)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을 말한다. 일자가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은 유한한 존재들 안에도 일자가 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럼에도 창조주 신의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표현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의 존재 위의 일자, 존재 너머의 일자를 강조한 것이 기독교 철학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은 유출과 창조의 관점에서 교정된 이론적 한계로 나타났다.
- 표현적 내재성은 유출 테마와 접목하는데 내재성을 부분적으로 조장하고 부분적으로 억압한다. 유비의 조건에서 창조론과 연결된다. 문제는 피분유자 쪽에서 분유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그들을 모델로 삼거나 감각계로 내려가게 하는 하위 심급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이데아 자체가 범형적이다.example 분유는 모방이기는 한데 모방의 원리가 모델 혹은 모방되는 것에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비 관념에 물들어 있어서 신적인 존재와 유한적 존재의 동등성을 상정하기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부했다[신적 존재 : 피조물=무한 : 유한]
-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보나벤투라 등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전통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유출의 전통과 모방의 전통. 이 두 갈래 길이 표현 개념에서 합쳐진다. 이것을 스코투스 에우리게나에서 보인다. 한편으로 펼침-표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모방]-표현이라는 이중적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거울, 모델, 닮음, 다른 한편으로는 씨앗, 나무, 나뭇가지다. 표현 관념은 발생을 하는 순간 억압되는 상황을 계속 맞이한다. 유출과 창조 테마에서는 내재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 초월성이 항상 수반된다.
- 스피노자의 의의는 내재성을 원리로서 긍정하고 표현을 유출인이나 범형인에 대한 종속에서 빼낸 데 있다. 더 이상 표현이 유출되는 것도 아니고 모방하는 것도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되려면 스피노자처럼 일의성에 관점에 서야한다. 신은 자기 원인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물의 원인이다. 형상적으로 실존하는 대로 생산하고 표상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형상으로 사물을 생산한다. 즉 신의 형상과 사물의 형상은 다르지 않다. 이와 달리 다르다고 보는 게 유비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은 양태의 형상적 본질을 담고 있다. 이는 형상의 공통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사성은 원인과 결과에 공통질=속성에 의해 정의되는 일의성에 속한다. 표현적 유사성은 모방적 유사성이나 범형적 유사성이 아니다. 실체와 양태, 원인과 결과는 공통형상들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인식된다.
- 스피노자는 표현의 영역과 기호의 영역을 대립시킨다. 유일하게 적합한 인식은 표현적 인식 이고 기호, 유비에 의한 인식은 부적합한 인식이다. 기호에는 지시적 기호, 명령적 기호, 계시/해석적 기호가 있다. 이런 기호에 의한 인식은 1종 인식이고 부적합한 인식으로 표현적이지 않다. 지시는 표현이 아니라, 원인을 표현하지 않는 혼동된 인식이다. 명령은 표현이 아니라 자연 법칙을 계명이라고 믿게 하는 혼돈된 인상이다. 계시는 표현이 아니라 표현 불가능한 것의 culture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것(지성, 의지)과 유사한 규정을 신에게 돌려서, 신에게도 무한한 지성과 의지가 있고 그와 격이 다른 우리의 지성, 의지는 유한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비이고 고차성/탁월성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만약 신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 지성의 의미와 피조물이 갖고 있는 지성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 신도 사유하고 인간도 사유한다. 신도 연장적이고 인간도 연장적이다.
- 표현이 유출의 흔적을 제거해야 했다. 유출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에게 생산은 구별과 분화를 통해 일어난다. 구별은 구별되지 않는 것[분유불가능한 일자, 표현 불가능한 것]을 상정한다. 스피노자는 반대로 일의성과 관련해서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념, 수적이지 않는 질적 복수성이라는 관념으로 존재론적 통일성과 속성들의 질적인 복수성을 양립시킨다. 속성은 탁월한 통일성/상위의 unité으로 생겨나서 질적으로 하락하며[1N에서 1N-1] 생산하는 유출이 아니다.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하나의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실체는 역설적 구별이 생겨나게 하는 일자[분유불가능한 일자]가 아니다. 속성들의 구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실체의 질적 합성과 동일한 것이다. 양태/사물을 생산하기 전에 구별 자체가 실체의 합성이다.
스피노자의 위계이론
스피노자에게도 위계가 있다. 하지만 이전 철학의 위계와는 다르다. 양태들의 생산이 분화를 통해 일어나지만 순전히 양적인 분화다. 강도량에 따른 분화다. 즉 깊이에 따른 분화다. 양태적 구별은 수적 구별이지 않고 강도적이므로 양적 구별이다. 속성들은 신의 절대적 역량에 상응하는 역동적 질이다. 양태의 본질은 어떤 질=속성의 일정 degré, 일정 양이다. 그래서 양태는 신의 역량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외연적이 아닌 강도적 부분을 가리킨다. 신은 양적 분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인간은 모든 특권을 상실한다. 인간은 양적으로만 구별되며 인간에게 고유한 질은 없다. 양태에 상응하는 양에 따라 양태들은 분할된다. 각각의 양태들은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신으로부터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일자와의 거리에 따른 위계가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동일 속성의 양태들은 신적 실체를 언제나 ‘직접적으로’ 분유하는 그들의 본질 각각의 양에 따라 양적으로 구별된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매개가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이 곧바로 양태를 생산한다. 스피노자에게도 직접 무한 양태[무한한 지성, 운동과 정지], 간접 무한 양태[세계,우주의 얼굴, 자연법칙], 유한 양태가 있는데 이것은 위계는 아니다. 간접 무한 양태의 경우에 변양되는[=양태화된] 속성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최초의 변양은 매개 원인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 modification과 mode
- 실체의 affection = modification변양/존재론적으로 볼 때 실체의 양태 생산
- 속성의 affection = mode :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의 관념, 연장 속성으로서의 물체/신체
ex. ‘나는 관념이자 신체이다’라고 하면 mode, ‘나는 하나의 존재다/양태이다’라고 할 때는 실체의 modification이다.
20201211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들뢰즈 강의 1984년 3월 20일
신플라톤주의적 변증법, 계열변증법. 이 계열은 0으로 향하고 그것의 출발점은 1N, 즉 분유가능한 일자다. 첫 번째 puissance에서 두 번째 puissance가 나와서 첫 번째 puissance를 분유한다. 두 번째 puissance에 정신-존재, 사유-존재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 두 번째 puissance의 층위에는 존재와 사유의 unité가 있다. 이 unité를 noûs라고 부른다. 두 번째 puissance,1N-1은 첫 번째 puissance, 1N을 분유한다. 1N-1에서 세 번째puissance, 1N-2가 나온다. 세 번째 puissance는 정신-존재를 분유하는데 ‘영혼’(pshukhê)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puissance는 영혼을 분유하는 퓌지스, 자연, 현상들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언제나 존재 위에 일자를 세우려는 탁월한 시도를 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깊이와 절연하지 않았다. 계열변증법은 깊이의 변증법이다. 플라톤은 깊이를 길이로 환원시켰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길이는 sans-fond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1N은 가장 심층이지만 분유가능한 일자다. 그 자체가 다른 어떤 것, 즉 sans-fond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분유불가능한 일자다. 그것은 만지면 뒤로 물러서고 존재의 안개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의 기능/역할은 무엇인가? 분유불가능한 일자는 분유할 것을 준다. 분유불가능한 일자가 없다면, 존재의 분유도, 존재가 분유하는 분유가능한 일자도 없을 것이다.
1N-2,, 즉 영혼은 다음 것들을 생산하고 이전 것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하다. 영혼은 계열변증법에서 일종의 핵심 위치를 갖는다. 영혼은 흘러나온다/흘러넘친다. 영혼은 자신을 증여한다[증여철학]. 영혼은 자기 뒤에 오는 것으로 향한다. 영혼은 분유할 것을 준다. 영혼 다음에 오는 것, 자연에게 준다. 영혼은 자신을 증여함으로써 자연 안에 흘러나온다. 자연을 생산한다. 생산-창조poliesis다. 이것은 매우 종교적이다. 그들은 성인들이었다.[들뢰즈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철학자이자, 시인이자, 교수였다고 본다. 이처럼 철학자이자 시인인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다.]이 poliesis에 의해서 영혼은 자기 뒤에 오는 하위 puissance를 생산한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을 발출 또는 유출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puissance degré는 자기 안에 머문다Manence. 이것이 내재인과의 공통점이다. 그리스어로 Manence는 hypostase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잠재태이지만 현실태와 대립하는 잠재태가 아니다. 현실태는 잠재태의 표현이다. 1N → 1N-1 → 1N-2이라는 생산의 계열은 유출 혹은 발출이라고 하고 자기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conversion이라 한다. conversion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분자적 무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회귀 운동의 의미로 쓰였다. 한편, 개종이라는 뜻도 있는 바, 신에게 돌아간다는 뉘앙스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직접 상속받은 철학자는 쿠자누스, 라이프니츠이다. conversion에서 puissance3은 puissance2로 귀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puissance3은 puissance2에서 나오지만 puissance3은 puissance1로 귀의한다. 왜 그것은 강도인가? 각각의 puissance degré는 unité[하나의 덩어리, 통일체]이다. 각 unité는 잠재적 multiplicité이다. multiplicité는 다음 puissance의 형태로 현실화되는데, 이 puissance는 바로 그 순간 unité로 기능한다. 이 unité는 다시 잠재적 multiplicité, 다음 degré의 multiplicité를 함유한다. 칸트의 강도 이야기는 독창적인 칸트의 발견이 아니라 중세시절에 있었던 것을 취합해 정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30도는 15도의 2배가 아니다. 30도 안에는 15도의 2배가 들어 있지만 잠재적으로 들어있다. 15도에 15도를 더한다고 해도 30도가 되지 않는다. multiplicité는 언제나 현행적인 크기다. 반면에 강도량은 깊이다. 부분들을 더해서 전체량이 나오면 외연량이다. 강도량에서는 그렇지 않다. puissance의 사다리를 내려갈수록 multiplicité는 점점 더 현실적이 되어 간다. 넓이, 즉 외연량은 점점 더 모습을 나타낸다. 이 표현은 『차이와 반복』에도 여러번 나온다.
들뢰즈 강의 1984년 2월 28일
시간의 존재 이유는 영혼이다. 시간은 영혼에 의존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간은 운동의 수 또는 척도다. 시간은 형상form의 부속물로 형상에 의존한다. 단일평면mono-plan관념은 이집트의 관념이었다. 이에 따르면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밖에 없다. 이집트인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면서 호수를 하늘에서만 본 관점으로, 사람 얼굴은 옆면을 그린다. 그래서 mono-plan이라고 한다. 이것은 깊이, 부피, 입방체 관념이 없어서이다. 그리스인들은 plan의 다중성/복수성을 발견한다. 여러 개의 plan이 관계를 맺는다. 방향이 다르게 교차한다. 이것은 입방체의 발견이다. 이집트인들은 입방체를 감췄으나 그리스인들은 입방체를 해방시켰다. 이렇게 발견하는 즉시 길들인다. 깊이를 수직 plan에 종속시킨다. 그리스의 사원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대체한다. 이것은 입방체의 승리다. 이것은 plan들의 교차의 승리다. 깊이가 있다면 그것은 plan으로 환원된다. 그들은 깊이를 입방체 안에 가두었다. 3차원은 전면/전경과 수직을 이루는 plan으로 정의된다. 깊이가 수직 paln에 의해 정의된다. 깊이는 으르렁거린다. 야수인 깊이를 철장 우리 안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플라톤에게는 두 가지 분할이 있었다. 1)넓이에 따른 분할(cata pathos)이다. 가로로 분할한다. 2) 길이에 따른 분할(cata mécos)이다. 세로로 분할한다. 플라톤은 깊이를 단순한 mécos로 축소/환원시켰다. bathos를 mécos로 환원시켰다. 플라톤에게는 bathos에 따른 분할은 없었다. 넓이와 길이에 따른 분할만 있었다. bathos에 따른 분할[ 1N → 1N-1 → 1N-2…]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이 했다. 그리스인들에게 깊이는 가능한 길이다. 플라톤은 깊이(bathos)를 길이(mécos)의 형태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플라톤도 bathos를 썼지만 mécos로 환원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에게 깊이는 전면과 수직을 이루는 plan, 즉 길이에 다름 아니었다. 플라톤에게 빛은, 깊이(bathos)가 전면과 수직을 이루는 면, 즉 길이로 환원되는 것처럼, 세계 안에 갇힌, 입방체 혹은 구 안에 담긴 매질로 환원된다.
플로토니스에게 새로운 것은 bathos의 발견이다. 그것은 두 차원으로 환원 불가능한 심층의 발견이다. 길이와 넓이로 환원 불가능한, 고로 plan으로 환원 불가능한, 전면/전경으로 환원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plan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깊이의 발견[그리스 미술과 플라톤 철학, 비잔틴 예술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서로 각각 대응한다]. 플로티노스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기여는 어떤 차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공간의 모든 차원들의 모태인 순수한 깊이의 발견이다. sans-fond으로서의 심층의 발견. 끝없이/한없이 깊어지는 fond.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일자는 존재 이상이다. 일자는 존재 너머에 있다. 존재 너머의 일자는 sans-fond이다. 플라톤의 형상form은 뻣뻣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플로티노스의 형상은 빛이므로 유연하게 구부러져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 고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넓이에 따른 분할이 sans-fond의 puissance로서의 깊이에 따른 분할에 종속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전복/역전이다.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플라톤의 일자와 완전히 다르다. sans-fond 자체다. 빛은 매질이 아니라 sans-fond의 직접적 유출이다. 플로티노스에게 sans-fond은 광원이다. 빛이 sans-fond의 첫 번째 puissance이고 영혼은 sans-fond에서 파생되는 두 번째 puissance이다. 플로티노스에게 형상들은 순수하게 광학적이다. 빛의 形相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에게도 적용된다. 일차적인 것은 빛의 형상이다. 시간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혁명은 이것을 뜻한다. 시간이 세계의 운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운동은 영혼의 운동이고 빛의 운동이다. 영혼은 빛의 형상形象figure이다. 시간은 영혼의 운동의 표현이다. 빛의 형상의 리듬이다. 시간을 탄생시키는 것은 영혼의 운동이다.
▶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외연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강도의 운동을 가져왔지 ‘존재 너머 일자’라는 개념을 가져오지는 않았다고 본다. ‘존재 너머 일자’란 기독교 전통과 연결된 초월적 일자로 모든 도덕과 판단 철학의 근본 원리를 뜻한다. 스피노자도 들뢰즈도 이것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처럼 초월성을 상정하고 있는바, 플라톤과는 반대로 분유되는 쪽에서 원리를 찾기 위해 sans-fond을 가져왔다.
11장. 내재성과 표현의 역사적 요소들(2)
- 유출과 내재 간에 차이가 큰데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는가? 내재인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유출인과 합류한다. 첫 번째 유출이 내재의 관념을 제공한다. 일자에서 noûs 혹은 존재가 유출된다. noûs에서도 새로운 실체가 유출된다. 1N,, 1N-1 [noûs], 1N-2, 1N-3 [피지스], 각각이 hypostasis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자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물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분유가능한 일자에서 noûs가 나오지만 분유가능한 일자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고 noûs에서 피지스가 나오지만 noûs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 플로티노스에게도 존재의 동등성이 있다. 다마키우스에 따르면 다자는 일자 안에 집중하고 일자는 다자 안에 현존한다. 다자와 일자 간의 상호내재성이 있다는 것이다.
- 포개다/복합하다complicare와 펼치다expliquer 개념 쌍은 중세를 거치면서 중요해진다. 만물은 그들을 포개는 신에 현존하고 신은 만물에 현존한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계기적이고 결과가 원인에 종속되던 유출물의 계열이 이 때는 서로 상관적인 두 가지 운동의 공-현존으로 대체된다/바뀐다. 신은 사물들을 자기 안에 포개고 있으면서 사물은 신을 펼친다. 실체들hypostse의 위계가 존재의 동등성으로 대체된다. 분유는 그 원리가 유출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뀐다. 표현이 원리가 된다. 표현은 복합, 펼침, 내속inherence, 내포implication를 포함한다. 여기서 스피노자 이전에 존재한 표현 개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표현의 이런 측면들은 내재성의 범주들이기도 하다.
- 표현 관념에서 새로운 내재성의 원리가 긍정된다. 내재성의 원리란 일자가 다자를 포개고 있고 일자는 다자를 통해 펼쳐진다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나 중심이 있고 어디에도 원주가 없는 원의 은유가 신플라톤주의의 구와 방사를 대체한다. 신과 세계 사이의 표현관계는 존재의 동등성의 근거가 된다.
- 신플라톤주의자들에서 내재인은 유출인에 종속되어 있다. 모든 것이 절대자에서 파생하고 모든 것이 그것으로 되돌아가는 제1원리, 유출인, 초월적 목적, 존재 위의 일자를 전제한다. 중세, 르네상스, 종교 개혁기를 거쳐 신플라톤주의가 극단적으로 진화되고서야 내재인이 유출인에서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중요성을 갖게 된다.
- 표현주의적 경향=내재인이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는 이유/역사적 상황이 있다. 기독교는 존재를 제1원리로 삼는 존재론적 요청에 의해 표현주의적 경향을 촉진/조장하는 반면 신 존재의 초월성을 유지하라는 더 강력한 요청에 의해 표현주의적 경향을 억압한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주 신의 초월성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존재의 동등성 원리를 유비로 해석한다. 표현불가능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초월적 신이라는 것이다. 야콥 뵈메(Jakob Böhme)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을 말한다. 일자가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은 유한한 존재들 안에도 일자가 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그럼에도 창조주 신의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표현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의 존재 위의 일자, 존재 너머의 일자를 강조한 것이 기독교 철학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은 유출과 창조의 관점에서 교정된 이론적 한계로 나타났다.
- 표현적 내재성은 유출 테마와 접목하는데 내재성을 부분적으로 조장하고 부분적으로 억압한다. 유비의 조건에서 창조론과 연결된다. 문제는 피분유자 쪽에서 분유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그들을 모델로 삼거나 감각계로 내려가게 하는 하위 심급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이데아 자체가 범형적이다.example 분유는 모방이기는 한데 모방의 원리가 모델 혹은 모방되는 것에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비 관념에 물들어 있어서 신적인 존재와 유한적 존재의 동등성을 상정하기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거부했다[신적 존재 : 피조물=무한 : 유한]
-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보나벤투라 등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전통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유출의 전통과 모방의 전통. 이 두 갈래 길이 표현 개념에서 합쳐진다. 이것을 스코투스 에우리게나에서 보인다. 한편으로 펼침-표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유사[모방]-표현이라는 이중적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거울, 모델, 닮음, 다른 한편으로는 씨앗, 나무, 나뭇가지다. 표현 관념은 발생을 하는 순간 억압되는 상황을 계속 맞이한다. 유출과 창조 테마에서는 내재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 초월성이 항상 수반된다.
- 스피노자의 의의는 내재성을 원리로서 긍정하고 표현을 유출인이나 범형인에 대한 종속에서 빼낸 데 있다. 더 이상 표현이 유출되는 것도 아니고 모방하는 것도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되려면 스피노자처럼 일의성에 관점에 서야한다. 신은 자기 원인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물의 원인이다. 형상적으로 실존하는 대로 생산하고 표상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형상으로 사물을 생산한다. 즉 신의 형상과 사물의 형상은 다르지 않다. 이와 달리 다르다고 보는 게 유비다.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은 양태의 형상적 본질을 담고 있다. 이는 형상의 공통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사성은 원인과 결과에 공통질=속성에 의해 정의되는 일의성에 속한다. 표현적 유사성은 모방적 유사성이나 범형적 유사성이 아니다. 실체와 양태, 원인과 결과는 공통형상들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인식된다.
- 스피노자는 표현의 영역과 기호의 영역을 대립시킨다. 유일하게 적합한 인식은 표현적 인식 이고 기호, 유비에 의한 인식은 부적합한 인식이다. 기호에는 지시적 기호, 명령적 기호, 계시/해석적 기호가 있다. 이런 기호에 의한 인식은 1종 인식이고 부적합한 인식으로 표현적이지 않다. 지시는 표현이 아니라, 원인을 표현하지 않는 혼동된 인식이다. 명령은 표현이 아니라 자연 법칙을 계명이라고 믿게 하는 혼돈된 인상이다. 계시는 표현이 아니라 표현 불가능한 것의 culture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것(지성, 의지)과 유사한 규정을 신에게 돌려서, 신에게도 무한한 지성과 의지가 있고 그와 격이 다른 우리의 지성, 의지는 유한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비이고 고차성/탁월성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만약 신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 지성의 의미와 피조물이 갖고 있는 지성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 신도 사유하고 인간도 사유한다. 신도 연장적이고 인간도 연장적이다.
- 표현이 유출의 흔적을 제거해야 했다. 유출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에게 생산은 구별과 분화를 통해 일어난다. 구별은 구별되지 않는 것[분유불가능한 일자, 표현 불가능한 것]을 상정한다. 스피노자는 반대로 일의성과 관련해서 형상적 구별이라는 관념, 수적이지 않는 질적 복수성이라는 관념으로 존재론적 통일성과 속성들의 질적인 복수성을 양립시킨다. 속성은 탁월한 통일성/상위의 unité으로 생겨나서 질적으로 하락하며[1N에서 1N-1] 생산하는 유출이 아니다.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이 하나의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실체는 역설적 구별이 생겨나게 하는 일자[분유불가능한 일자]가 아니다. 속성들의 구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실체의 질적 합성과 동일한 것이다. 양태/사물을 생산하기 전에 구별 자체가 실체의 합성이다.
스피노자의 위계이론
스피노자에게도 위계가 있다. 하지만 이전 철학의 위계와는 다르다. 양태들의 생산이 분화를 통해 일어나지만 순전히 양적인 분화다. 강도량에 따른 분화다. 즉 깊이에 따른 분화다. 양태적 구별은 수적 구별이지 않고 강도적이므로 양적 구별이다. 속성들은 신의 절대적 역량에 상응하는 역동적 질이다. 양태의 본질은 어떤 질=속성의 일정 degré, 일정 양이다. 그래서 양태는 신의 역량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일부분은 외연적이 아닌 강도적 부분을 가리킨다. 신은 양적 분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인간은 모든 특권을 상실한다. 인간은 양적으로만 구별되며 인간에게 고유한 질은 없다. 양태에 상응하는 양에 따라 양태들은 분할된다. 각각의 양태들은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신으로부터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구별되지 않는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일자와의 거리에 따른 위계가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동일 속성의 양태들은 신적 실체를 언제나 ‘직접적으로’ 분유하는 그들의 본질 각각의 양에 따라 양적으로 구별된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매개가 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이 곧바로 양태를 생산한다. 스피노자에게도 직접 무한 양태[무한한 지성, 운동과 정지], 간접 무한 양태[세계,우주의 얼굴, 자연법칙], 유한 양태가 있는데 이것은 위계는 아니다. 간접 무한 양태의 경우에 변양되는[=양태화된] 속성에서 파생하는 것으로 최초의 변양은 매개 원인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 modification과 mode
- 실체의 affection = modification변양/존재론적으로 볼 때 실체의 양태 생산
- 속성의 affection = mode : 사유 속성의 양태로서의 관념, 연장 속성으로서의 물체/신체
ex. ‘나는 관념이자 신체이다’라고 하면 mode, ‘나는 하나의 존재다/양태이다’라고 할 때는 실체의 modifica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