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note[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20201204

권순모
2020-12-12
조회수 526

20201204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 예술의 차이와 철학의 사유의 차이의 동일성(by 들뢰즈)

이집트 예술은 mono-plan으로 원근법이 없다. 가령, 연못을 수평으로 보면 안 보이니 위에서 본 것으로 그리고, 나무는 앞이나 옆에서 본 것으로 그린다. 이것은 plan이 여러 개가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예술은 multi-plan으로 깊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깊이를 길이에 종속시킨다. multi-plan은 면이 여러 개인 입방체이다. 입방체에는 전면/전경avant-plan, 후면/후경arrière-plan 등 여러 면이 있는데, 전면에 의해 다른 면들이 규정된다.



이미지


위의 그림에서 보듯 천구의 적도와 황도를 자르면 적도면과 황도면이 나온다. 이 면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배열이 된다. 천구의 운동은 면들 위에서 규칙적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천상계는 규칙적이고 법칙에 따라 운동하지만 지상으로 내려 오면서는 비정상anomaly이 생긴다. 이러한 plan 간의 관계를 회화에서도 따져볼 수 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입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그리면 거기에는 plan이 있다. 전면/전경plan1 , 후면/후경plan2, plan3… 등 여러 plan에 따라서 사물이나 형상을 그려 입체감을 표현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plan이 있는데, 그리스 미술에서는 전면을 기준으로 그것과의 관계에 따라서 다른 면들이 결정된다고 본다. 전면에 모두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넓이에 따른 분할이 있고 길이에 따른 분할이 있는데 플라톤은 깊이를 길이로 환원시켰다. 즉 깊이를 발견하면서 길들였다. 이집트 예술에서는 깊이를 피라미드 안에 가두었다. 피라미드 안의 관은 입방체인데 그것을 피라미드 안에 가두어 은폐했다.

그리스는 깊이를 발견해 길들였다. 그래서 깊이가 “으르렁거린다”(by 들뢰즈). 이 깊이에서 모든 게 다 나온다. 깊이는 sans-fond이다. 끝없이 깊어지는 깊이다. 계속 깊어지는 깊이다. fond에는 근거, 배경, 바닥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바닥이 없어진다는 의미로 계속 깊어지는 순수한 깊이를 말한다. 순수한 깊이는 그리스어로 bathos라 한다. 플라톤은 이 순수한 깊이, bathos를 길이로 환원시켰다. 길이를 이를테면 깊이라고 우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사물을 넓이/전면에 따라 분할하면 좌우가 나오고 길이/수직면에 따라 분할하면 앞뒤가 나온다고 보았다. 길이를 깊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신플라톤주의의 표현운동

들뢰즈는 3세기 철학자로서 이집트에 살았던 플로티노스가 이후 싹틀 사유의 밑그림-시간관, 강도 개념, 표현 개념 등-을 그렸다고 본다. 그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는데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엔네아데스Enneades』를 펴냈다. 그는 플라톤의 체계를 뒤집었다. 가령, 분유의 원리를 플라톤은 분유자에서 찾았으나 플로티노스는 피분유자에게서 찾았다. 피분유자가 바로 sans-fond이다. 이것은 빛으로 여기서 모든 것이 다 나온다. 플라톤에게 빛은 매질媒質milieu=사물이 부딪히며 생기는 반사이다. 반면 플로티노스에게 빛은 광원光源으로 우리 눈에 안 보인다. sans-fond이 바로 빛으로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나온다. 그것은 존재 위의 일자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다.

플로티노스를 포함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깊이를 발견해서 해방시켰다. 깊이에 따른 분할은 영혼의 운동이요 외연적 운동과 대비되는 강도적 운동이다. puissance1, puissance2, puissance3…. 여기서 puissance는 강도 또는 degré와 거의 같은 의미다. puissance1에서 puissance2가 나오고 puissance2에서 puissance3가 나온다. puissance1은 다음에 나올 puissance2의 잠재적 multiplicité를 담고 있다. puissance1의 잠재적 multiplicité는 하나의 unité인 puissance2로 현실화된다. 그러면 puissance1는 원래의 잠재태로 돌아간다. puissance2은 다음에 나올 puissance3의 잠재적 multiplicité를 담고 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흰색의 무한한 degré 중 하나가 현실화되면 이것이 다른 흰색의 degré를 다 담아버린다. 이 현실화된 흰색은 하나의 unité다. 그 안에는 무수한 흰색의 degré가 다 담긴다. degré1은 무한히 많은 흰색을 품고 있다. degré2가 현실화되면 degré1는 원래 있던 잠재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conversion이라고 한다. degré3이 나오면 degré2 역시 잠재태로 돌아간다. 이 운동은 나선형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표현 운동이다. 표현 운동에서는 함축과 전개가 동시에 일어난다[함축과 전개의 이중운동]. 함축하면서 전개되는 것이 반복된다. 1N → 1N-1 →1N-2…에서 1N은 다음에 나올 것들을 다 담고 있다. 1N → 1N-1 →1N-2…은 procession/emanation유출 또는 발출이라고 한다. 다시 …1N-2 → 1N-1 → 1N은 convers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시간관과도 연결된다.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원운동, 즉 천체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세계의 운동에 종속이 되어 있었다. 이와 달리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시간이 종속에서 벗어나서 직선으로 퍼진다고 보았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결말이 종전처럼 원상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 상태에서 그냥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시간이 경첩에서 빠졌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간은 회전문처럼 돌아야 하는데 경첩이 빠지면서 문=시간이 일직선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시간관인데 그 전조가 플로티노스에게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지각의 예취들’이라는 절에서 강도 얘기를 한다. 들뢰즈는 칸트 주석가들이 강도 개념으로 칸트의 독창성을 말하지만 이미 중세부터 강도에 관한 설이 많았고 칸트는 이것을 취합해 정리한 것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이전에 강도 이야기를 한 철학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강도 개념도 플로티노스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시간이 물체의 운동, 천체의 운동, 세계의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으나 신플란톤주의에서는 영혼의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 1N → 1N-1 → 1N-2…는 puissance[강도/출력potential]가 계속 떨어지면서 분화되는 과정이고 현실화되는 과정이고 외연화되는 과정이다.

 

11장 내재성과 표현의 역사적 요소들

 

신플라톤주의에서 분유 문제

이 장에서 다룰 주제 1) 내재성과 표현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2) 표현적 내재성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플라톤의 분유는 1) 나누어 갖는 것이고 2) 모방하는 것 3) 다이몬을 영접하는 것이다. 세 가지 다 공통적으로 분유의 원리가 분유하는 쪽에 있다는 것이다. 분유는 1) 나누어 갖는 것이고 2) 모방이고 3) 예술가[데미우로고스]이든 혹은 다이몬이든 매개자의 역할은 ⅰ)감각계로 하여금 가지계를 재생산하도록 하는 것, ⅱ) 이데아가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분유되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우주 창조의 신=데미우로고스[예술가, 조각가]가 있다. 데미우로고스는 눈으로 모델을 응시하고 손으로 모델과 닮은 복사본을 만든다. 삼각형의 이데아를 보면서 삼각형을 그린다. 그런 식으로 감각계가 가지계=이데아를 복제하게 만든다.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으면 현실세계, 감각세계에는 무수한 삼각형이 있는데 이것들이 삼각형의 이데아를 나누어 갖는다. 이데아가 자신에 반하는 감각적인 것들에 의해서 이데아가 분유되기 하는 것이 매개자 일반의 역할이다. 매개자[다이몬, 예술가, 데미우로고스]는 ⅰ) 감각계로 하여금 가지계를 재생산하게 한다 ⅱ) 이데아가 이데아의 본성에 반하는 것에 분유되게 한다. 이데아를 모델로 감각계의 사물을 만들어 낸다. 감각계의 사물들이 이데아를 재생산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데아를 분유하게 하는 것이다.

 

증여와 유출

 

▶후기 플라톤주의X, 플라톤주의 이후, post-플라톤주의[=신플라톤주의]로 써야 함.

플라톤주의는 그냥 지속되었다. 지금도 있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존재했던 철학 조류다.

 

포스트-플라톤주의는 분유 원리를 피분유자 쪽=분유되는 것에서 찾았다. 가령 감각적 사물이 아니라 이데아에서 원리를 찾는다. 물론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데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결국 분유되는 쪽에서 찾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에 따르면 분유되는 것이 이데아이고 분유하는 것이 감각적 사물이다.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많은 삼각형 속에 분유된다. 이 심각형들은 삼각형의 이데아=form[ex. 내각이 180도]를 다 갖고 있다. 그래서 분유되는 것이 삼각형의 이데아이고 분유하는 것이 우리가 그리는 삼각형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양태가 분유자인 것이다. 피분유자가 분할 혹은 분리를 겪는다는 것은 찢어서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다. 플라톤처럼 분유자에서 원리를 찾으면 피분유자는 폭력을 당한다. 신플라톤주의자는 반대로 피분유자, 분유되는 것에서 분유의 원리를 찾는다. 피분유자는 신이다. 초월적인 일자다. 플라톤한테 가장 중요한 이데아는 선이다. 그것이 최고의 이데아다. 그것이 분유되는 것이다. 우리의 선함은 이데아의 선함의 불완전한 형태다. 덜 선하고 더 선하고 선하기도 하고 안 선하기도 하다. 아무리 선한 사람을 데려다 놓아도 그 사람보다 더 선한 사람은 어딘가에 있다. 항상 선한 사람은 없다. 분유하는 것이 우리들, 사물들, 인간들이다. 플라톤주의에서는 분유자 쪽에서 원리를 찾고, 신플라톤주의에서는 피분유자쪽에서 원리를 찾는다.

 

▶ 『의미의 논리』 보론, ‘시뮬라크르와 고대철학’

분유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이차적으로 갖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신플라톤주의의 트라이어드가 나온다.: 분유 불가자I’imparticipable, 피분유자[분유되는 것]le participe, 분유자le participant.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근거fondement, 지망 대상, 지망자〉, 〈아버지, 딸, 구혼자〉. 근거란 어떤 것을 일차적으로 소유하는, 그러나 그 어떤 것을 분유하게 하는, 지망자(근거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한에서 이차적 소유자)에게 그것을 주는[증여하는] 것이다. 분유되는 것은 분유불가자가 일차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분유 불가자는 분유하게 한다[분유할 것을 준다]. 그는 지망자들에게 피분유자[분유되는 것]을 준다. 정의(분유 불가자), 정의의 질(분유되는 것), 정의로운 자들(지망자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이 작은 쪽[감각적 사물들, 분유하는 것]에서 분유를 봤다고 비난하면서 피분유자가 분유자 안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피분유자는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하는 한에서 분유되고 주는 한에서 생산한다. 증여가 생산이고 생산이 분유다. 이를 응시로 설명할 수 있다. 데미우로고스는 눈으로 응시하고 손으로 만든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는 응시가 곧 생산이다. 첫 번째 응시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이다.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채운다[거울]. 그러면 여기서 사물들이 만들어진다. 자신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안에 있으면서 생산하고 증여한다.

플로티노스의 프로그램 1)가장 높은 것에서 출발한다. 가장 높은 것이 피분유자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데아 대신 일자로 표현한다. 존재 위에 일자. 존재 너머의 일자, 존재=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위의 일자다. 바로 거기, 피분유자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복사물들이 이데아 모델을 모방하고 재생산한다. 모방을 발생 혹은 생산에 종속시킨다. 모방보다 발생, 생산이 더 중요하다. 3) 폭력 대신에 증여를 한다. 폭력을 겪을 필요가 없다. 응시가 곧 증여이기 때문이다. 생산적 증여인 것이다.

진정한 활동은 분유되는 것, 피분유자의 활동이다. 분유자는 결과물이다. 피분유자가=일자가 응시하여 생산한 결과물이다. 유출인은 증여하는 원인, 증여하는 선, 증여하는 덕이다. 나누어가질 것을 주는 것이다. 분유자들이 피분유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플라톤주의다. 분유하는 쪽에서 분유 원리를 찾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분유되는 것은 응시하면서 생산하고 응시하면서 증여한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피분유자에서 분유의 원리를 찾으면 원리는 분유가 될 수 없다. 원리 자체는 분유가 되지 않는다. 원리는 분유할 것은 주는데 원리 자체가 분유되지 않는다. 원리에서 모든 것이 유출/발출된다. 원리는 모든 것을 증여한다. 그러나 원리는 분유되지 않는다. 분유될 수 있는 일자가 있고 그 위에 분유될 수 없는 일자가 있는데 그것이 원리다. 일자에 단계가 있는 것이다. 분유가능한 일자가 1N이고 분유불가능한 일자가 sans-fond이다. 프로클루스가 분유불가능자이론을 구상했다. 그 자체는 분유될 수 없지만 분유할 것을 주는 원리에 의해 분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증여물=나누어주는 것보다 우월하다/상위에 있다고 본다. 일자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자기가 갖고 있는 않은 것을 준다. 유출은 트라이어드의 형태를 띤다. 증여자=피분유자, 증여되는 것=증여물, 수령자=분유자다. 플라톤의 트리이어드는 이와 달리 피분유자, 분유, 분유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유자의 발생=일자의 응시만이 아니라 피분유자의 발생도 설명해야 한다. 분유자들을 생성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래서 sans-fond이 등장한다. 그것이 분유불가능한 일자다. 분유될 수 없는 일자에서 분유될 수 있는 일자가 나와 그것이 사물을 생성시킨다.

 

▶ 증여된 것과 그것을 수령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발생 → 증여물과 수령자의 발생. 이 두 가지 발생

 

Deleuze Cours 1984년 3월 13일

 

플라톤의 퍼스펙티브 혹은 고대 그리스 퍼스텍티브에서 깊이bathos는 언제나 억눌리거나 유폐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넓이와 길이에 종속된다. 플라톤은 넓이와 길이로 일어나는 프로세스인 분할의 방법을 사용해서 사물을 분류한다. 넓이와 길이는 깊이를 가두고 길들이고 종속시킨다.

전면/전경이 다른 plan들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전면과 관련해서 다른 plan들이 수직 혹은 사선의 교차 관계에 들어간다. 플로티노스는 비잔틴 예술과 궤를 같이 한다. 심층의 해방. bathos의 해방, sans-fond의 해방이 일어난다. sans-fond은 빛이다. 빛은 puissance들의 계열의 형태를 띤다. 깊이적으로 층화가 일어난다. 1N → 1N-1 → 1N-2…이런 식으로 일정 간격을 두고 배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가장 진한 흰색에서 가장 옅은 흰색으로 가는 과정에 해당한다. 신은 어떻게 분할되는가? 신들의 신인 제우스가 있다. 플라톤에게는 이것의 신, 저것의 신처럼 이름이 다른 여러 신이 존재한다. 이것이 넓이상의 분할로 이 경우 각각의 신이 하는 역할이 다르고 관할 구역이 다르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에서 신은 puissance의 계열에 따라 깊이로 층화가 된다. 그래서 모두 이름이 제우스다. 제우스1, 제우스2, 제우스3… 이것이 깊이로 분할하는 방식이다. 외연적인 분할이 아니라 강도적 분할로 degré의 층이 생긴다. 플라톤처럼 신을 넓이에 따라 분할하면 제우스와 그리고 제우스랑 이름도 다른 이질적인 신들로 나뉘어진다. 이것은 동질적인 분할이고, 종species으로 분할되므로 깊이에 따른 분할과 다르다.

빛은 형상形相form들을 창조하는 운동이다. 이것도 강도상의 운동이다. 반면 외연적인 운동은 빛의 운동의 결과물이다. 비잔틴 예술에서 운동은 빛의 운동, 즉 강도적 운동이다.

세계를 제작하는 자, 데미우로고스는 모델을 응시하며 복사물을 만든다. 핵심 메타포는 자국이다. 복사물을 만들고 거기에 모델의 인장을 찍는다. 플로티노스도 데미우르고스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눈으로 응시하고 손으로 생산하는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하기 위해서 응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응시하면서 생산하고 응시는 그 자체로 생산이다. 빛이 자신을 표현한다. 표현이 곧 생산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원천[광원]-거울[자기 응시]. 다른 한편으로는 씨앗-전개이다. 플라톤의 모델-복사물은 촉각 모델이지만 이것은 광학모델에서 유래한다.

플라톤은 눈으로 이데아를 응시하고 손으로 그것을 그린다. 그들은 이데아로서의 삼각형을 응시하고 칠판에 분필로 삼각형을 그린다. 이것은 모델-복사물 관계다. 플로티노스에게 응시하는 것은 곧 생산하는 것이다. 반면 플라톤에게는 데미우르고스의 폭력이 필요하다.

깊이의 계열에서 한 unité와 다른 unité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각각의 unité[하나인 것≒ 일자]는 다음 것들을 잠재적으로 함유한다. 현실적으로 함유하지 않고 잠재적으로 함유한다. 잠재적인 것으로 포착되는 multiplicité. 이것을 각각의 unité가 함유하고 있다. ‘잠재적으로 함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다음 것들에 의해 합성되지 않고 분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외연적으로 보면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지만, 이것은 그 차원이 아니다. 다음 것들을 잠재적으로 함유한다는 것은 다음 것들에 의해 합성되거나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unité가 다음 unité 속에 분해될 때, 전자의 unité가 함유하는 잠재성은 현실적이 된다. multiplicité가 현실적이 되지만 그것은 unité로서 현실적이 된다. 강도량에서 모든 unité는 현실적이고 그 자격으로 잠재적 multiplicité를 포괄 또는 함유한다. 잠재적 multiplicité는 다른 unité들에서 현실화되고, 이 unité들 각각은 다시 잠재적으로 multiplicité를 함유하며, 이 multiplicité는 다시 다음 unité들에서 현실화된다. 이렇게 나선형으로 간다.

신플라톤주의적 트라이어드는 빛의 트라이어드다. 이런저런 puissance의 일자가 있다. 그것을 다음에 오는 것에 대한 원리라고 하자. 그것 자체가 응시다. 실제로 그것은 응시하면서 작용한다/생산한다.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내가 나 자신을 응시할 때 나는 나 자신의 이미지로 나를 꽉 채우고, 그 이미지를 통해 나는 생산한다.

첫 번째 원리, 내가 출발하는 일자는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그 때문에 그것은 생산한다. 그것은 일자로서 함유하는 잠재적 multiplicité를 생산한다/발현한다/유출한다. 이 잠재적 multiplicité는 일자에서 발현한다. 이것도 응시다. 그것은 응시 그 자체다. 첫 번째 원리는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응시하면서 그 자체로 응시인 잠재적 multiplicité를 생산한다. 이 일자가 함유하는 잠재적 multiplicité는 일자로 돌아간다. 그것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의 conversion이다. 잠재적 multiplicité가 응시에 의해 자기가 생산하는 일자로 돌아가는 행위, 이 conversion은 그 자체 응시다. 자기가 나온 것=원천에 대한 응시. 그래서 각 degré에는 degré와 0 사이의 중간 degré들의 함축이 있다. 유명한 트라이어드가 있다. 1) 원리로서의 일자 2) 일자에서 발현하는 것, 잠재적 multiplicité. 3) 일자로 되돌아 가는 것.

 

▶ 신플라톤주의의 깊이에 따른 분할(by 들뢰즈)

 

1N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분유가능한 일자다. 제1puissance에서 나와서 제1puissance를 분유하는 것이 있다. 그 다음 degré인데 그것은 바로 제2puissance로 정신-존재, 사유-존재다. 정신이자 존재이고 사유이자 존재다. 제2puissance 층위에는 존재와 사유의, 정신와 존재의 절대적 unité가 있다.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어로 noûs라고 한다. 들뢰즈는 noûs를 intelligence[지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noûs는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2puissance는 1N-1이다. 이 제2puissance가 제1puissance를 분유한다. 제2puissance에서 나오는 제3puissance는 1N-2로 noûs보다 하위에 있는데 noûs를 분유하고 noûs를 매개로 해서 분유가능한 일자=1N을 분유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pshukhê다. 제3puissance에서 나오는 제4puissance는 이 영혼을 분유하는 physis, 자연이다. 자연이기도 하고 코스모스이기도 하고 현상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0까지 간다. 강도가 계속 떨어지면서 degré가 계속 낮아지고 puissance가 감소하면서 최종적으로 0까지 간다. 문제는 1N, 심층, 분유가능한 일자인데 이것 역시 다른 어떤 것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sans-fond이다. 이것이 분유 불가능한 일자다. 1N 너머/위에 그보다 높은 차원의 하나가 더 있다. 이 분유불가능한 일자를 무한하게 뒤로 물러선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건드리거나 만지거나 하면 계속 물러난다. 존재의 안개를 통해서만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 부정신학으로 보면 말하는 순간 무엇이 아니게 되는 신적 존재이다.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 사유불가능한 것이나 사유해야 한다. 사유는 사유할 수 없는 것까지 사유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계열에 필수적으로 작용한다. 분유불가능한 일자가 분유할 것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존재의 분유도 없고 분유가능한 일자도 없을 것이다. 한편 제3puissance, 영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혼이 증여하고 분유할 것을 주는 역할을 한다. 자연을 생산한다. 생산이자 창조다.

puissance1에서 puissance2가 나오고 puissance2에서 puissance3가 나오고 puissance3에서 puissance4가 나오고 puissance3는 puissance2로 돌아가고 puissance2가 나온 puissance1까지 돌아간다. 분유가능한 일자까지만 간다. sans-fond까지는 못간다. puissance는 잠재태이면서 현실태이다[잠재태와 현실태의 동일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와 현실태를 대립으로 보았다. 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잠재태와 현실태는 대립하지 않고 현실태를 잠재태의 표현으로 보았다.

 

유출인과 내재인의 이중적 차이

유출인과 내재인의 공통 특징은 자신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1) 생산 방식의 차이. 유출인은 자기 밖에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내재인의 결과물들은 원인 안에 있다. 2) 존재의 동등성 원리의 차이. 유출인에는 위계가 있지만 내재인은 위계가 없다.